적왕사

✶4 Secrétum (4) (24.01.11 재)

계약(2)|현판AU

ESAVIR by Riv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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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당신의 목표…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당신을 어떤 방식으로 도우면 되죠?”

베른은 손을 깍지 껴서 턱을 기대며 물었다. 느긋해 보이는 태도와는 달리 긴장을 늦추진 않았다.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얻어내려는, 저와 기이할 정도로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상대할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으니까. 이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정도 이상으로 긴장되기는 했지만… 불리한 계약을 해서 아이의 몸이 다치는 상황을 만들 수는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오랜만의 긴장을 즐기는 수밖에.

-브리센, 알고 있나.

“……브리센이라면…”

‘전 왕비님의 가문이에요.’

브리센. 카이리스의 제2 가문.

영국으로 따지면 후작의 위치에 있는 가문이며 작은 형님의 외척이라고 칼리안이 덧붙여 설명해주는 것을 귀담아들은 베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센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칼리안이 설명해준 정세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브리센의 악명은 유명했으니까.

그러니까 떠올려보면…… 에반과 그레이라는 두 걸출한 소드마스터를 배출했으면서도 어마어마한 권력욕으로 카이리스를 오랫동안 좀먹어온 가문이었던가.

‘고마워.’

“알고 있습니다. 악명이 많이 높죠.”

-부족할 것 같은데.

“당연한 소리 하지 마시고… 그래서, 본론은 뭐죠?”

베른은 나른하게 웃었다. 그렇게 무섭게 추궁하던 사람이 방에 들어온 뒤로는 아르센의 말대로 무엇도 묻지 않고 있으니, 이 정도 힌트는 내주어도 상관 없겠다 싶어서였다.

한쪽 눈을 찌푸린 이모티콘을 만들어낸 L이 몸체를 아르센을 향해 돌렸다. 부국장, 앞 설명해. 아르센은 짤막한 명령에 긴 한숨을 내쉬고는 베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카파 님, 혹시 발칸이 언제 창설되었는지 아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베른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칼리안의 대답과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카이리스 식으로는 일곱 살, 한국 식으로는 여덟 살. 지금 칼리안은 열다섯 살. 그럼,

“7년 전이라고 말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브리센의 가세가 약해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입니다.”

“!”

베른은 7년 전 창설된 발칸과 7년 전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브리센 사이의 연결고리를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이채 섞인 붉은 눈을 한 번, 로봇의 몸을 한 부국장의 -그 안 친하던 형님과 같이 살다가 물들었는지- 무심한 이모티콘을 한 번 본 아르센이 말을 이었다.

“발칸은 처음부터 브리센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부국장님의 주도하에 국장님을 등용하고, 국장님께서 저나 다른 마법사들을 불러 모아서 세운 대외적으로는 마법 관리국이라고 불리는 내부 공작 기관이죠.”

“……과연.”

“발칸에 대해 잘 모르셨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관리국은 대외적인 명분일 뿐이라 실제 사용하는 마법보다 수준 낮은 마법들만 간간이 발표하거든요. 카이리스의 귀족이 아닌 한 발칸에 대해 듣기는 어렵습니다.”

“이해했습니다.”

베른은 아까 전 아르센이 그때 왕자님 일곱 살이셨다며 설명을 넘겼던 부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러워서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그렇게 설명했던 부분도 어느 정도 둘러댄 것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관심을 좀 두고 살 걸 그랬지. 그쪽과 더 엮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건데, 입맛이 제법 썼다.

“그 뒤로… 음,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케르노의 조력으로 다른 나라 한 곳에 있는 시설 말고는 브리센의 힘을 온전히 무력화시켰다는 것이 현황입니다.”

“케르노라면… 전하는 아닐 테고, 성년을 넘은 왕자들 중 한 명입니까?”

“네. 그 이상은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형님들이요? 형님들이 갑자기 왜 나오는 거예요?’

맑은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던 베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왕가의 역사를 배웠다면 상식인데- 하긴,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살았으니. 형제들을 매우 좋아하는 아이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던 베른이 아주 천천히 생각을 풀어냈다.

‘…카이리스 왕가는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의 후손이잖아?’

‘맞아요.’

‘카이리스의 왕족들은 시스파니안이 가진 진실을 밝혀내는 힘을 물려받거든. 아주 사소한 비밀도 카이리스의 왕족 앞에선 숨겨지지 못해. 그런 점을 기리기 위한 호칭이 '케르노'야.’

‘아…’

‘왕이나 네가 저걸 판별했을 리는 없으니까, 네 두 형님 중 한 명 아니냐고 물어본 거고. 내가 아는 한 현재 카이리스의 직계 왕족은 너 포함해서 넷 밖에 없거든.’

‘이해했어요. 케르노라는 거 처음 들었어요.’

‘너무 어릴 때 외국에 나가서 그래. 8살에 카이리스에 있었으면 배웠을 거야. 그때부터 의무 교육이 시작되니까.’

‘역시 많이 아쉽네요…’

‘외국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

칼리안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다정하게 긍정적으로 달래주던 베른은 문득 L의 인공적인 이모지 얼굴을 보았다. 꼭 기다리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다소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그렇게 생각할 즈음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리하면 목표는 브리센을 허물어트리는 것. 목적은 이번에 들어온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고 가능하면 놈들의 마지막 기점을 완전히 무너트리는 것까지.

“!”

7년의 대치를 끝낼 때가 되었다는 말. 아르센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 몸으로 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고 있느냐는 감정이 가장 먼저 읽히긴 했지만, '드디어'라는 희열이 숨겨지지 않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 온 숙원인 것이다. 브리센 몰락은.

L은 아르센의 그런 노골적인 얼굴에 아무런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어깨로 보이는 부분을 으쓱였다.

-몸이 멀쩡하다면 내가 했겠지만, 보다시피 이런 상황이라.

“원래 몸의 상태가 그리 안 좋은 겁니까?”

-그래.

“원래 몸으로는 그런 게 가능하단 말도 되는군요. 소드마스터는 아닌 듯하고, 마법사인 것 같은데… 몇 서클인 겁니까?”

-노코멘트하지. 앞으로의 일에 그리 필요하지 않은 요소일 테니.

로봇의 몸으로도 대규모 《금지》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보면 알아둬야 할 것 같은데. 베른은 그런 마음을 가득 담아 생긋 웃어 보였다. L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냈지만 아르센의 희열을 무시했던 것처럼 베른의 압박을 무시하는 대신에 정보를 더했다.

-이 상태론 6서클 정도까지 쓸 수 있다. 더 필요한가?

“…그 상태로 6서클…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이신 모양이군요. 발칸의 부국장이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이상하게 웃지 말지.

“이 얼굴에 이상하단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신다면 L, 당신에 대한 평가를 낮출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아, 아저씨!!’

‘미안미안. 근데 진심이야.’

베른의 날카로운 붉은 눈이 장난스럽지만 굳은 의지로 빛났다. L에게 한 말은 반쯤 농담이었지만 칼리안의 외모에 대한 생각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미의 화신이라는 말이 과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미모를 가진 프레이야의 얼굴을 꼭 닮은 칼리안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베른은 아르센이 동의하는 듯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퍼뜩 정신 차리고 L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며 L의 반응을 기대했다.

-…짖지 말고.

개소리 말라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 들을 줄은 몰랐지만.

L은 예상치 못한 험한 말에 말문이 막힌 베른의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선 그쪽이 해줘야 할 것은 세 가지다.

“세 가지나 말입니까… 좋습니다. 말해보시죠.”

-첫째, 정보의 진위와 실제 규모 확인.

정보의 진위를 확인할 필요라… 아까도 말했지. 베른은 턱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믿을 만한 출처가 아닌 겁니까?”

-꿈이라서.

“?”

이게 무슨 소리야. 베른은 저도 모르게 진지하게 듣던 태도를 놓치곤 눈을 크게 떴다. 믿기지 않는 대답을 내놓은 L의 감정을 드러내는 녹색 빛은 당연한 말을 한 것처럼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눈을 내리 깔고 침묵을 지키던 아르센 헤르츠가 다급하게 손을 들었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네. 해보세요, 헤르츠 경.”

제발. …이라고 덧붙여 말한 것 같은 허락이 떨어지자 아르센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카파 님, 케르노께서 저희 일에 도움을 주시고 계신다는 말은 기억하시죠?”

“네. 쉽게 잊기 힘든 정보였죠.”

“도움 주시는 케르노께서 예지몽의 능력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정보를 정확히 인지하는 건 아니고 그 장면만을 보시는 거라서 추측을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는 거죠. 브리센이 멍청이도 아니고, 지역을 명확하게 추론할 수 있는 특징이 있는 곳에 세력을 두겠습니까.”

-그건 맞는데.

“그 멍청이들한테 당하신 분은 조용히 해주십시오.”

베른은 겁 없이 또 다른 부국장의 선을 건드리는 아르센의 모습에 소리 없이 감탄했다. 상냥한 분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과연 괜히 나온 말은 아닌 건지, 아니면 로봇의 몸을 한 동료-추정하기론 상사-의 감정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아르센은 조용해진 L을 힐끔 보곤 태연하게 설명을 이었다.

“녀석들의 동료 중에 세크레툼이 있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체크하고 돌입해야 합니다. 조작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덧붙인 설명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었느냐 묻는다면, 전혀 아니었지만.

“…세크레툼이라고요?”

야수가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평온한 분위기를 깼다. L의 녹색 시선이 베른에게로 옮겨갔다. 칼리안이 아저씨, 하고 조심스럽게 부르는 것이 들린 듯했지만 베른은 신경 쓰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신경 쓸 수 없었다.

다른 세크레툼에 대한 정보는 없었나… 누군지 알겠군. 아르센은 동요 없이 고개를 저었다. 눈을 감은 듯 고개를 숙인 L이 작은 한숨 소리를 내었다.

“카파 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케르노는 상성 상 세크레툼을 이기기 쉽고…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현존하는 세크레툼은 셋이니, 브리센 측 세크레툼은 한 명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정체도 이미 파악해 뒀습니다.”

“셋? 하… 좋아요. 일단 하고 있던 얘기부터 마저 듣겠습니다. 그 건에 대해선 이따 설명 좀 해주시고요.”

흥분을 너무 많이 했다. 베른은 아려오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L에게 손을 펼쳐 보였다. 다음을 설명하라는 뜻을 이해한 L이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짤막하게 말했다.

-둘째, 브리센의 목적.

……7년을 대치해 왔다면서. 또 한 번 말을 잃은 베른은 다시 한번 아르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아르센 역시 공손하게 두 손으로 L을 가리켰다. 제가 설명할 영역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결국 베른은 왠지 모르게 덥게만 느껴지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렴풋이 짐작되는 건 있습니까?”

-없어. 영문을 모르겠더군.

“당신이 모를 정도라면… 쉽진 않겠는데. 그들이 무엇을 했는데요?”

깨끗한 의문만을 담은 질문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베른이 분노해서 조용해졌을 때랑은 다른, 정말 말로 표현하기 껄끄러운 무언가가 있을 때 특유의- 불길한 침묵.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센의 소리였다. 베른은 칼리안의 심장이 긴장으로 빠르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 왜 이럴까, 어쩐지 곧이어 나올 해답이 칼리안과 제법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칼리안이 연관되었다는 게 아니라… 아이를 혼란스럽게 할 법한 종류의.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은 L이 감정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2왕자의 몸을 가지고 인체 실험을 했지.

“!!!”

아르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베른은 저도 모르게 심장 께를 부여잡았다. 가빠진 숨소리가 들렸다. 작은 미성이 형님, 하고 듣기만 해도 아픈 소리를 내었다.

‘안 돼, 칼리안. 진정해. 지금 그럼 안 돼.’

‘하지만 형님이, 플란츠 형님이…’

‘물어볼게. 물어볼 테니까, 아파하지 마. 지금은 형님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잖아.’

간신히 칼리안을 달랜 베른이 겨우 입을 열었다.

“……2왕자님께, 어떤… 상태는 어떻습니까?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

“잠깐, 아까 당신이 녀석들에게 당했다고. …당신도 실험당해서 그 몸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럼 도움을 주고 있다는 그 케르노가 2왕자님인 거고?”

의미를 읽을 수 없는 녹색 빛을 들여다보던 베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해 물었다. 순간적으로 번뜩인 머리가 상태가 좋지 않다던 L의 원래 몸과 인체 실험을 한 브리센을 꿰맞췄다. 시시각각으로 창백해지는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던 L이 느리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답하기 전에, 하나만 묻지. 이것만 알면 당신 정체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을 테니….

“…네. 마음대로 질문하십시오.”

-…몸의 주인, 지금 의식이 있는 건가.

베른은 깊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거의 다 알아차린 것을 확정 내리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쪽만 들킬 것을 다 들킨 상황이 제법 야속하기는 했지만… 알아차린 것을 뭐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있습니다.”

누구의 심장이 뛰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칼리안의 것이 빠르게 뛰는 것 같기도 하고, 베른 자신의 것이 빠르게 뛰는 것 같기도 했다. 깜빡깜빡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던 녹색 빛이 다시 선명하게 켜졌다.

-그런가.

“……”

- 이쪽의 케르노인 2왕자는 회복 중이다. 나는, 당신 예상대로고.


벌써 다 들켰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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