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왕사

✶6 기억

수고했어.|플란츠 룬 카이리스+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ESAVIR by Riv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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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조 有

* 스포 有

* 공포 약 45000자


칼리안은 플란츠를 데리고 움직이는 것에 익숙했다. 아니, 싫었지만 익숙해졌다. 떼어놓으려 해도 안 떨어지고, 몰래 가려고 해도 속일 수 없고, 무엇보다 그 자신 역시 플란츠가 없으면 허전하다고 느꼈으니 어쩔 수 없는 순응이었다.

하지만.

“…형님?”

그러면서도, 그가 다치는 것엔 익숙하지 않아서.

익숙하지 못해서.

익숙할 수 없어서.

“형!!”

그것은 예견된 참사였다.

사색이 된 3왕자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왕세자를 안고 돌아온 날, 왕궁엔 비상이 걸렸다. 왕은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체르밀 4층으로 달려왔고 1왕자는 느긋한 평소와는 달리 다소 급박하게 걸음을 옮겼다. 왕세자의 정혼자인 발칸의 치유사는 머리의 부상이 나았는데도 왕세자가 깨어나지 못하자 망연자실했다.

눈을 뜨지 못하는 왕세자를 들여다본 발칸의 군단장은 왕세자가 자력으로 일주일 안에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왕세자의 차게 식은 손을 붙들고 그 말까지 빠짐 없이 들은 3왕자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발칸을 이끌고 고문실로 향했다.

다음 날, 3왕자는 피 냄새를 풍기며 왕 앞에 한 마법사를 올렸다. 나를 공격하고 형님을 쓰러지게 한 놈들 중 하나입니다. 단조로운 말투에 왕은 놈들이라면 이 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찌 되었느냐 물었다. 3왕자는 전부 죽였다고 답하고는 조금의 침묵 뒤 확실한 공범들만 죽였으니 그리 심려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덧붙였다. 어딘가 해탈한 듯한 발칸의 또 하나의 부군단장이 한숨을 내쉬며 그 마법사를 빈 고문실로 데려갔다.

궁이 다시 조용해졌다. 3왕자는 매일같이 체르밀 4층으로 올라갔다. 제 충직한 시종이 우려함에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왕세자의 차가운 손을 붙잡고 그 곁을 지켰다. 우울하게 울며 사랑하는 집사의 곁을 맴도는 고양이들을 돌봤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왕세자에게 ≪클린≫이나 ≪아브턴던트≫ 등의 마법을 계속해서 걸었다. ‘아프진, 않으실, 거예요.’ 치유사의 조언에도 아파서 깨어나지 못하시는 거면 어쩌냐고 울듯이 웃으며 소용없는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왕세자가 눈을 뜨지 못하고 상급자들의 어두운 분위기에 하급자들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나날들이 흘러가던 어느 날.

왕세자는 깨어났다. 쓰러져 돌아왔던 날로부터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날의 일이었다.

“…저, 저하!!”

깨어난 그를 가장 먼저 본 사람은 청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왕세자의 전속 상급 시종이었다. 기쁜 듯 골골거리는 고양이 소리에 의아해하며 들어온 그는 인간으로선 처음으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연두색 눈을 볼 수 있었다. 소리 없이 깨어나 고양이의 털을 골라주던 왕세자의 옅은 머리카락이 머리가 흔들림에 따라 가볍게 흩어졌다.

“언제, 언제 일어나셨어요? 몸…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아, 아아, 세렌티시여…”

시종은 짙은 색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왕세자가 머리에서부터 검붉은 핏물을 뚝뚝 떨구며 돌아왔던 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고양이가 핥아서 붉어진 피부에도 울상을 하던 시종에겐 왕세자가 눈을 뜨지 못하던 지난 일주일은 너무나도 가혹했던지라, 시종은 그 지옥 같은 나날이 끝났다는 것에 안심했다. 안도하고 기뻐했다. 눈 앞을 가려서 겨우 깨어난 주인을 흐리게 만든 눈물은 오롯한 환희만을 담고 있었다.

한편, 왕세자는 신의 이름을 내리 부르며 차오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는 시종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걱정으로 가득 찬 질문엔 대답하지 않은 채였다. 그는 그 강렬한 감정이 누굴 향한 것인지 분간해낼 수 없었으므로.

하지만 이 방엔 저밖에 없어서. 시종의 울음이 너무나도 서러워서. 그는 이 생소한 모습이 저를 향한 것이라 어림짐작하며 손을 뻗어 눈이 붉게 부어가는 시종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색하고 딱딱하지만 시종이 보이는 애정이 너무도 선명해서 낸 용기였다.

“……괜찮아.”

다만 그 짤막한 목소리는, 왕세자에게 익숙해진 지 오래인 시종에겐 너무나도 메마르고 불안정한 것이라.

시종은 멈칫 숨을 삼켰다. 잘못 들었나 순간 의심했지만 눈을 마주 봐주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들은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의 손길도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저하… 어디 불편한 부분이 있으신가요?”

시종은 자신이 왕세자를 제일 잘 안다는 오만을 떨진 않았지만 처음 곁에 머물게 되었던 초반에 비하면 이제 제법 잘 알게 되었다고 자부했다. 왕세자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순하고 더없이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도, 생각은 정말 너무도 많은데 말은 그에 반비례하듯 너무도 적다는 것도, 그래서 가뜩이나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든 면모를 그 적은 말속에 모두 담는다는 것도. 몇 년 간 왕세자를 모시면서 알게 되었다.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방금 왕세자의 말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공허한 배려와 불안이라서. 평소의 미지근한 온도보다도 낮은 온기라서.

“괜찮아요, 저하. 걱정하지 말고 얘기해주세요.”

시종은 재촉하지 않고 사근이 속삭였다. 생각이 많은 왕세자는 안 그런 척 굴어도 걱정이 많았으니, 하는 말은 적고 아끼는 말은 많은 왕세자의 솔직한 마음을 듣기 위해선 그에게 자신은 괜찮다는 확신을 주어야 했다. 그리 길진 않은 기간이나마 왕세자를 모시면서 알게 된 그의 습관이었다.

음… 역시 목소리에 깃든 희미한 불안을 알아차릴 만큼은 모시는 분께 익숙해져서 다행이다. 시종은 그리 생각하며 다시 한번 왕세자에게 저는 괜찮다고 속삭였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졸린 듯 눈을 가물거리는 고양이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멎었다. 투명한 연두색 눈이 희미하게 떨리며 저를 보는 시종의 푸른 눈을 마주 보았다.

“……모르겠어.”

“…네?”

“이 아이의 이름. 네 이름. ……내 이름까지도.”

“!”

“말해줄 수 있나.”

왕세자에 대해 잘 알게 된 만큼 이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잘 알기 때문에, 시종은 무심코 생각했다.

막내 왕자님이 이 사실을 알면… 세상이 망하게 되는 것 아닐까?

――라고.

왕세자가 기억을 잃었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시종은 순간 빠져나간 영혼을 어떻게든 되찾고 긴급하게 대마법사를 호출했다. 원인-은 명확하지만 이런 시종 재량으로 대처할 수 없는 일에 이런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대마법사를 부르는 것보다 옳은 대처는 있을 수 없었다. 현실을 실감하자마자 간담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던 시종에겐 최선을 다한 대처였다.

“저하,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하여 급하게 워프해 온 대마법사가 다 컸지만 아직 앳된 구석이 있는 왕세자의 멀쩡한 얼굴에 안도하듯 숨을 몰아쉬었다가 옅은 경계에 표정을 다스렸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건지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구별하지는 못하겠지만 충격 받은 기색을 감추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왕세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저어 질문에 부정을 표했다. 고양이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를 놓치지 않고 시야에 넣은 마법사는 씁쓸한 얼굴을 하며 조심스럽게 왕세자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생경한 따뜻함에 데리고 있던 고양이가 데우지 못한 마른 손이 움찔거렸다.

“확인하겠습니다.”

왕세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손의 온기를 닮은 따스한 마력이 화륵 타올랐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왕세자의 눈이 불과 같으면서도 뜨겁지 않고 다정하기만 한 마력에 순진무구하게 커졌다. 기억이 있을 땐 오히려 볼 수 없던 그 솔직한 반응은 더없이 의외롭고 귀여웠다.

하나 그 제 나이다운 모습이 좋은 변화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라, 이성적인 마법사는 마냥 좋게 볼 수 없는 모습 대신 새롭게 발견한 것에 집중하며 실제 나이를 연상하기 어려운 고운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왕세자가 눈을 감고 있을 땐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소중하고 귀한 왕세자의 머리에 남아 붙어 있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잔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

“흑마법……”

“네?!”

“…그만 있는 건 아닌데. 저하, 혹시 무언가 기억나는 것이 있으십니까?”

물론 전 칼리안 왕자님께 많은 것을 들었습니다만, 저 또한 모든 것을 들었던 것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덤덤한 목소리에 왕세자는 눈꼬리를 좁혔다. 마법사가 묻는 것은 아무래도 기억을 잃기 전의 일이겠지만…. …기억나는 것이라.

그저 어둡기만 할 뿐 아무것도 없었던 처음과는 달리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채운 수많은 추론들과 정보들을 훑어본 왕세자가 고개를 저었다. 많은 것이 있었지만 마법사가 묻는 것과 관계된 것은 아직 없었다.

“없어.”

기억이 있든 없든 질문엔 짧게나마 대답하고 보는 것이 한결같다. 입가에 부자연스럽게 곧은 웃음을 머금고 눈썹을 아픈 듯 일그러트린 마법사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저하의 머릿속에 흑마법의 잔재 조금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칼리안 왕자님의 증언을 떠올려보면 기억이 사라진 건 실패한 흑마법의 부작용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개인적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원인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는군요. 어찌 됐든 지금으로선 제 독단으로 무엇이 원인인지 확정지을 수 없을 것 같으니 더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하께서도 혹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정리되어 나오는 제 상태에 대한 추론을 귀담아들은 연두색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갖고 태어난 본인도 한계를 알 수 없는 똑똑한 머리가 긍정을 요하는 흐릿한 문장을 가까스로 알아듣고 둔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왕세자의 생각이 뻗어나가는 속도를 모르지 않는 마법사가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왕세자의 사고를 환기했다.

“그 외엔 별다른 이상 없습니다. 피로한 몸은 그대로 휴식을 취하시기만 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치유사의 확인도 받아 보시고요.”

“괜찮은 건가.”

“움직여도 괜찮냐는 뜻이시라면, 예. 괜찮습니다. 아, 치유사를 만나러 가는 김에 발칸을 살려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발칸?”

“저하의 군대입니다.”

미친 놈들이 죽어 나가고 있지요.

왕세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문장 그 자체를 알아듣지 못한 것이 투명하게 보이는 변화였다.

미친 놈들이라는 말과 군대라는 단어가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전시도 아닌 것 같은데 군대가 왜 죽어 나가고 있는가. 왕세자의 군대라는 건 무슨 소리지? 군은 왕의 것일 텐데?

수많은 의문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작은 고개가 서서히 기울었다. 개념과 가설과 지식을 하나하나 꿰매고 이어 맞추며 무거운 머리가 느리게 들렸다.

……그래. 미친 놈들인, 내, 군대라.

숨 한 번 들이쉬는 순간보다는 오래 걸렸으나 결코 길다 할 수 없는 시간만큼 가라앉았던 순한 얼굴이 마법사의 은회색 눈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온화하고 다정한 얼굴. 따스한 목소리.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착한 시종보단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

많은 정보와 그를 통솔할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누굴 묻어드릴까요?”

장난스러운 물음에 고요하던 왕세자의 얼굴이 가차 없이 찌푸려졌다. 가벼운 목소리를 줄곧 유지하던 마법사가 무엇을 우려해서 농담하는지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왕세자는 눈치가 정말 빨랐다- 딱히 달가운 유형의 농은 아니었다.

“말고. 질문.”

“가벼운 농이었습니다. 무엇을 알려드릴까요? 어지간한 것은 대답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내가.”

마른 손이 까끌거리는 목을 짚었다. 목구멍 안쪽이 버석거리고 메마른 것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밀어 넣어 문지르고 닦아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일주일을 쓰러져 있었다 해도, 왕족의 축복이 있는 한 수분이 부족할 일은 없을 텐데. 목이 불편할 이유는 없는데.

뱉으면 안될 것이 나오려는 것처럼 목이 따끔거렸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던 것 같은데.”

“!”

“…기억이 안 나. 누군지.”

왕세자는 목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초조해하는 티가 역력한 얼굴은 보는 관점에 따라 잘못을 저지른 아이 같기도 했고 생소한 것을 마주한 아이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그보다 한참 어린 이들에게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얼굴이었다.

하나, 왕세자의 반응은 결코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어린 이가 아이의 얼굴을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므로.

마법사는 왕세자가 아직 많이 어리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들의 열과 성에 힘입어 짧은 기간에 잘 성장해왔지만 왕세자는 여전히 경험이 적고 익숙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독한 온실에 파묻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밖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라 왔던 왕세자는 정말, 너무도, 어렸다.

그러니 무의식의 기억이나 익숙하지 못한 망각을 마주한 그가 그에 맞는 얼굴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 형님 정말 기특하게 잘 크신 것 같다고 뿌듯해하더니, 이른 설레발이었구나.

아니면, 이 아이가 네 성장을 따라잡은 걸까.

그래서 너는 다 컸다 했지만 내 눈엔 아직 어린 것일까.

마법사는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아들의 모습을 잠시 그렸다가 왕세자의 목에 상처가 나기 전에 서둘러 손을 잡아 풀었다. 힘줄이 돋아나려던 손에 힘이 빠지며 틀어막혀 색색거리던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던 연두색 눈이 미세하게나마 크게 뜨였다.

“괜찮습니다.”

“……괜찮나.”

“저하께선 분명 다시 기억해내실 것 아닙니까. 그분께서도 그리 믿으실 테니,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낙관적으로 들리지만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답에 왕세자의 호흡이 완전히 안정적인 속도를 되찾았다. 잠시의 정적 후 다시 한번 숨을 크게 가다듬은 왕세자가 많은 것을 알려준 다정한 위로에 나직하게 대답했다.

“알겠어.”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신지요.”

“먀웅……!”

인간들의 대화 소리에 기어코 잠에서 깨어난 작은 고양이가 저를 쓰다듬으라 보채며 다소 진지한 분위기를 깨버렸다. 왕세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말랑해지고 지친 듯하던 기색이 부드러워졌다.

“…이름.”

왕세자는 흰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며 느리게 대답했다. 알고 싶다는 것이 제 이름인지 고양이의 이름인지 판가름하기 어려워 지그시 맞춰오는 은회색 시선과 갸릉거리는 고양이의 애정 표현이 비슷한 온도를 가지고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온전히 마음을 가라앉힌 왕세자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 알고 싶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그를 요구하는 것.

주체성을 가지고 원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

잊힌 이가 어린 왕세자에게 가장 바라던 것이었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아이가 온실에 빼앗긴 권리를 되찾길 바라던 그를 아는 마법사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성장에 감격을 금치 못하며 눈꼬리를 접었다.

직접 알려주고 싶어 할 텐데, 그 대신 무엇부터 알려줘야 할까.

그래. 본인이 알고 싶다 한 것이 있으니, 그부터 알려줘야지.

“그럼 이름부터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응.”

“안고 계신 흰 고양이의 이름은 루시입니다. 잿빛 고양이의 이름은 안네. 저 시종은 레릭. 전 앨런 마나실이라고 합니다. 저하께선 저를 군단장, 혹은 마나실 후작이라 부르셨습니다.”

작은 고개가 끄덕였다. 조곤조곤 귓가에 내리는 이름들을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않겠다는 듯이 고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아르센 헤르츠. 파란 머리 마법사. 발칸의 부군단장.

니들렌 제이아. 소금 든 것 먹는 분홍색 머리 마법사.

히나 베른. 3왕자의 빛이자 소금. 왕세자의 정혼자인 치유사.

키리에 베른. 히나의 오빠이자 3왕자의 검. 귀 밝은 하프 엘프.

얀. 시로이안 지그프리드. 3왕자의 시종. 지그프리드의 차남.

리리에 브리센. 왕세자의 사촌 동생. 지그프리드의 막내.

발칸과 3왕자의 사람들 위주로 이어지던 설명은 리리에를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가족들에게 이어졌다. 아버지 르메인 루 룬 카이리스와 배다른 형 란델 사일 카이리스를 짧게 설명한 마법사가 저하께선, 까지 말했다가 목소리를 삼켰다.

왕족답게 다른 가족과는 별로 안 친했나 보군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던 연두색 눈이 의아함을 담아 기울었다.

곤란한 얼굴로 침음을 낸 마법사가 망설임 끝에 긴 고민을 뒤로 한 결단을 입에 담았다.

“저하의 성함은, 왕자님께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이 건은 저하의 계획에 들어 있던 일 같아서요.”

“…내 계획… 칼리안에게 말인가.”

타인의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가 어색했다. 확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틀릴 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을 담은 떨림이었다.

정확히 말한 적은 없었는데, 지나가듯 말했던 이름이 곧바로 나온 것을 보니 가뜩이나 멈추는 일 없는 머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팽팽하게 돌아갔는지 짐작이 가서. 조금이라도 덜어내고자 들였던 노력이 무용했다는 것을 깨달아서.

마법사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예.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알겠어. 레릭.”

뜬금없는 호명이었다. 문 앞에 서서 왕세자와 마법사의 대화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시종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려다가 퍼뜩 찾아든 깨달음에 자세를 바로 했다.

“…아, 네! 빌헬름 관으로 가시는 거죠?”

왕세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화가 끝나면 빌헬름 관으로 가시겠구나 예상하고 있기를 참 잘 했다. 시종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킷을 가지러 서둘러 문밖을 나섰다.

왕세자는 소리 없이 멀어지는 시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보채는 고양이를 내려두고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 잠시 휘청인 다부진 몸이 마법사에 의해 똑바로 섰다.

“괜찮으십니까?”

“응.”

“그냥 이쪽으로 와달라 전하라고 할 것을… 괜히 말한 것 같군요.”

“아니야.”

몸을 일으키자마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잠잠해진 것을 느낀 왕세자는 마법사의 부축을 사양하고 혼자 힘으로 섰다. 다소 흐트러진 차림새를 본 마법사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단정해진 옷을 내려다 보며, 왕세자는 마법사의 걱정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하필 휘청이는 모습을 제대로 보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시종에게 손을 내밀어 더한 걱정을 제지한 왕세자가 고개를 들었다.

“거기 있는 거잖아. 그 아이.”

날카로운 눈에 깃든 빛에 은회색 눈이 크기를 키웠다.

정답을 확신한 이가 눈을 감았다.

“갈래.”

만나야 할 사람, 만나러.

여느 때와 같이 생략된 말을 읽어낸 마법사는 걱정을 거두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늘이 맑았다. 익숙한 듯 어색한 풍경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연두색 눈이 느리게 깜박이다가 둔탁하고 날 선 타격음에 시선을 돌렸다.

정보가 파도처럼 밀려든다.

실낱같은 대화의 편린에서 뽑아내 잇고 정렬하고 가정한 모든 것들이 현실로써 감각을 자극하며 받아들여진다.

하나. 발칸은 군대다. 아마도 부군단장일 내 명령을 따르는, 내 군대. 지금은 누군가가 그들을 험하게 굴리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칼리안이겠지.

둘. 난 검을 다뤘을 것이다. 그걸로 싸우다가 머리를 다쳐서 일주일간 쓰러져 있었던 것일 터이다. 왕세자가 기억을 잃을 만한 개연성은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머리와 같은 급소를 내줬다는 건 실력이 그리 뛰어나진 않다는 것일 테고.

셋. 만나야 할 사람은 칼리안, 내 동생일 것이다.

넷. 흑마법이 아닌 내게 사용된 수단은……

따사로운 햇빛 아래 새하얀 이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그들 중심에 있는, 무겁고 날카로운 살기를 흩뿌리며 춤추듯 붉은 검을 다루는 검은 인영.

붉은 눈이 차가운 얼음에서 미끄러져 새로이 움튼 생명을 보았다. 찬란한 생기를 띈 연두색 눈이 루비보다 붉고 태양보다 빛나는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

칼리안이다. 저 아이가.

붉은 검이 멈췄다. 발칸의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형형색색으로 주변을 물들이던 마법이 사라졌다. 차가운 얼음과 뜨거운 불꽃이 사라지고 바람이 멎었다.

분명 주위의 모든 것을 기억 속에 새기던 예민한 감각은 그 모든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눈과 귀와 코와 피부가 모두 한 사람에게 집중했다.

형님.

그리하여 닿아온 것은, 오직 소리 없는 부름 뿐.

지독하게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곤 그저 최소한의 제어만 둔 폭력을 휘두르던 이가 붉은 검을 지웠다. 붉은 눈이 떨렸다.

후끈한 몸이 눈 한 번 깜박이는 찰나에 빈틈 없이 안겨 왔다.

“형님.”

괜찮냐고. 여기까지 나와도 되는 거냐고. 깨어나는 순간에 곁을 지키지 못하다니. 지금은 어디 안 아픈 건지……

그 모든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그저 부르기만 하는 목소리가 작고 희미했다. 발칸 전원과 싸우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숨이 가빴고 등이 떨렸다. 심장이 뛰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비슷한 체구의 품에 파고드는 이가 불안정한 감정을 내비쳤다.

“……괜찮아. 진정해.”

뼈가 두드러진 새하얀 손이 떨리는 등을 토닥였다. 주인은 몰랐지만 의식이 없기 전보다 마른 손을 느낀 검고 붉은 아이가 느릿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형님이다. 형님이, 맞아.

깨어나셨어.

안긴 자는 알 수 없는 부쩍 수척해진 얼굴이 확신과 거의 동시에 안도감으로 느슨해졌다.

“칼리안.”

그것도 이름이 불린 순간 다 허사가 됐지만 말이다.

타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평이했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티도 나지 않았다.

그 사실까지는 모르나 자신의 평정심엔 자신이 있는 이가 제 어깨에 파묻힌 희고 말랑한 볼을 잡아 미(美)를 그대로 조형한 듯한 얼굴을 들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뜨인 눈을 마주 보았다.

“괜찮아. 난.”

이미 재량껏 다 처리했을 거 아냐.

“그러니까.”

미쳤다는 내 군대 그만 굴리고.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주위가 고요했다. 흐릿한 감각으로 간신히 존재를 인식하고 있던 발칸의 인사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본능적으로 숨으며 생긴 적막이었다.

뭐를요, 침묵 끝에 소리 없이 움직인 입술이 그리 물었다.

그 모습이 어째서 무의식적인 어리광처럼 보인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색한 상태지만 기민한 눈치로 상대의 마음을 읽어낸 고양이 발바닥 색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모든 것.”

“!”

“알려주기로 했잖아.”

안 그래?

왕세자는 머리가 좋았다. 정말 좋았다. 기억이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충직한 시종을 울린 것이 무색하게 깨어난 지 10여분 만에 자신의 현 상황과 자신이 잊은 것의 정체를 알아냈을 정도로, 타고난 머리가 범인과는 궤를 달리 했다.

그런 그가 눈치챈 자신이 잊은 대상은 사람. 그리고 그가 큰 의미를 부여했던 모든 것.

즉, 인연(人緣).

왕세자가 자신에 대해서까지 잊은 것은 같은 맥락이었다.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은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사소한 것도 잊지 않는 머리를 가진 왕세자는 더 그랬다. 그가 자신에 대해 잊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잊은 연과 자신 사이의 연관성을 짚어냈을 터이므로.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 의미가 있지, 그에겐 시간문제일 뿐이었지만.

고급스러운 방과 '저하'라는 호칭으로 자신이 왕세자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은 시작이었다. '저하의 군대'라는 말과 스스로를 군단장이라 소개한 앨런을 통해 그는 자신이 발칸이라는 군단의 부군단장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직접 들은 그들이 미친 놈들이라는 정보는 자신이 미친 놈들을 통솔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에게 제법 아낌 받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추측케 해 기억이 말끔히 사라진 이유를-이때까진 스스로에 대한 기억까지 사라진 이유를 몰랐다- 눈치챌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람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것이지 지식이 사라진 건 아니었어서. 알게 된 정황 없이 기록의 형식으로만 남은 지식은 키워드를 듣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이 흑마법의 마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 덕분이었다.

마력을 구분할 수 있다는 건 마나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고, 마나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자신이 마법이나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인데. 오러를 끌어낼 수 있다면-소드마스터일 가능성은 그냥 처음부터 버렸다- 머리를 다칠 일은 없었을 테니 자신은 마법을 사용할 줄 알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그 정체를 깨달았다는 점을 보면 마법 실력 역시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리라 추측할 수 있다.

검도 마법도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 흑마법사랑 싸웠다는 것은―― 누군가 강한 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뜻이겠지.

앨런 마나실은 칼리안 왕자의 증언이 있었다고 했다. 같이 있지 않았던 사람이 증언을 할 수는 없을 테니 저와 함께 있던 사람은 그일 것이다.

가족들을 설명할 때 이복 형 다음으로 제 이름을 말하려다가 그만뒀으니 자신은 둘째겠지. 빛의 주시자와 달의 인도자가 첫째와 둘째이니 별의 수호자인 칼리안은 지그프리드와 하프 엘프를 수하로 뒀다던 그 셋째 왕자다. 상식적으로 빛과 달 다음은 별일 확률이 높으니까.

다른 기사들이 있었다면 왕세자가 직접 나서서 싸우진 않았을 것이다. 칼리안에게 전투 중 머리에 상처를 입고 의식을 잃은 사람을 혼자 데리고 올 정도의 무력이 있다면 다른 이들이 있어도 나섰을 가능성이 높고, 동생이 나섰다면 저도 나섰을 것 같으니 확신할 순 없지만…… 역시 둘만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호위가 함께 있었다면 아무리 부군단장이자 왕세자라 하더라도 징계 받고 있을 발칸을 지나가다가 살려줄 수는 없을 테니.

아무튼, 왕자 둘이 둘만 나가서 등을 맞대고 같이 싸웠다는 점이나 지인들을 말할 때 빠짐없이 나왔던 점을 보면 사이가 제법 좋은 것 같은데.

사이 좋은 형이 며칠 동안 의식 없이 있었다면-자신의 몸 상태로 미루어 추측했다-, 가공할 무력을 가진 동생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함께 가지 않아서 딱히 징계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닐 발칸을 살려주라고 했으니, 그가 군단을 굴리고 있는 것 아닐까.

왕세자가 중상을 입었으니 적들은 이미 다 죽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처리했든 왕궁으로 복귀한 뒤 군을 움직여서 처리했든 형제 간의 사이가 좋다면 더 가만 두지 않았겠지.

그럼 깨어나지 못하는 형에 대한 걱정으로 미칠 것 같은 동생은 거기까지 하고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깨어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깨울 수는 없다. 공적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버렸다. 결국 남은 건 애꿎은-과연 애꿎은 것일까? 왕궁의 경비를 뚫고 왕족 둘이 몰래 빠져나갔다는 건 경비가 산만했다는 뜻이다- 군단을 상대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 정도 밖에 없었겠지.

왕세자는 여기까지 추론하고 레릭 모르게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게 애가 아니면 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얘가 저보다 조금 더 오래 산 것 같은데 항상 이런 건지 때가 이래서 이런 건지.

각설하고, 왕세자는 속 터지기 일보 직전인 동생이 형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면 발칸을 괴롭히던 것도 관두고 적아구분 없이 이를 보일 듯하여 생각을 더 해봤다.

난전 속에서. 그리고 의식이 없던 며칠 동안. 삼엄하게 주변이 경계되던 왕세자에게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적어도 5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보호하고 있는 이에게 아무도 모르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머릿속에 남은 흑마법의 잔재 말고 다른 기운의 정체는.

―아.

세렌티의 힘이다.

기적을 실현시키는 인간의 힘이다.

그렇게 왕세자는 기억을 되찾을 방법을 알아냈다.

남은 것은, 무능한 세렌티의 힘을 거두고 흑마법의 잔재를 지우는 것.

그것 뿐이었다.

이래저래 길고 넓고 복잡했지만 결론만 말한 결과 전혀 온전하지 못한 열 문장으로 축약된 사고 과정을 들은 3왕자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전에 비해 마른 손에 맥없이 끌려와서 반강제적으로 체르밀 4층에 앉힌 채였다.

“정말이지…”

그 어떤 소리도 이보다 더 고울 수는 없을 것 같은 미성이 붉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내 형님께서 똑똑하신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긴 했지만, 대단하네요.”

“뭐가.”

“잊으신 게 마냥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기억의 유무에 상관 없이 절 계속 아껴주실 수 있다면 그냥 안 찾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진짜 기억 빼곤 거의 다 복원되셨잖아요.”

왕세자는 동생이 헛소리를 하는 건지 미친 소리를 하는 건지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과거의 틀을 거의 다 파악한 건 분명 맞긴 하지만-

이게 정녕, 진심으로 짖는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건가.

민트차를 머금은 붉은 입술은 미세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목구멍 너머로 머금은 것을 넘겨낸 이가 부드럽게 눈꼬리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브리센에 대한 기억이 없으시다면, 전 그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형님이 시드시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요.”

너 방금 나 식물 취급 했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연두색 눈을 본 3왕자가 작게 웃었다.

이렇게 기억의 유무에 차이가 없으면 안 찾는 쪽을 바라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 기억 때문에 매번 항상 진짜 참으로 쓸데없이 시들고 시들고 또또또 시들고 그렇게 속을 썩였는데. 기억 하나 없으시면서 내가 조금 더 나이 먹은 것 같다고 말해서 내가얼마나놀랐는지정말.

순하디순한 제 형님이라면 기억이 없더라도 이전과 같은 인간관계를 구축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동생의 사려 깊은 생각이 달그림자를 머금은 것처럼 낮은 목소리에 깨졌다.

“필요 없어. 걱정은.”

“…!”

“그냥 가지고 있는 게 낫지.”

기억을 뜻하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3왕자가 입술만 작게 움직여 소리 없이 물었다. 말을 다 한 것도 아니고 맨 앞의 두 글자 정도만 표현한 본인에겐 물은 기억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 짧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왕세자가 답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동생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단 뭐든 낫지 않나.”

…길게.

“형으로서 응당 그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살짝 벌어져 있던 입이 다물렸다. 파랑처럼 흔들리는 붉은 눈이 보였다. 무슨 말에 이리 동요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어로 의사를 표현하던 이의 문장으로 된 마음에 놀란 것인가.

그 마음의 내용에 새삼스럽게 놀란 것인가.

왕세자는 후자에 더 가능성을 두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은 모르겠으나-크게 다른 점은 없을 것 같다- 바로 조금 전에 사실과 과정을 전하기 위해 말을 길게 했던 참이었다. 긴 말에 놀랄 이유는 없었다.

출렁이는 파문이 이는 붉은 눈은, 마치 인정받을 줄 몰랐다는 듯이.

당신은 정말 한결같다는 듯- 감격과 경탄과 불신을 담아서.

“…제가. 그게 아니어도…”

“?”

“…아닙니다. 형님께서 왜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형이 동생을 위하는 것에 이유가 있나.”

발칸을 괴롭히며 보였던 붉은 오러.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 군단의 지휘권을 가진 카밀론에 가지 않은 왕세자. 그 군단을 자유롭게 다루는 3왕자.

모든 판을 이었으나 유일하게 비어있던 맨 처음의 퍼즐 조각을 찾았다. 터무니 없는 상상일 뿐이었던 두 가지 가능성이 실체를 얻으며 하나가 되었다.

“미래에서 온 타인이었던 건가, 너.”

“?!”

도대체가

아니

대체

시스파니안이시여!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다. 3왕자는 그 사실의 산 증인이 된 것처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 왕세자의 태연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뀌기 전을 알고 세심하게 살피던 과거의 그도 하루도 채 안 돼서 정체를 알아차리진 못했었다. 똑똑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무섭다.

“어떻… 아니 무슨 수로. 어디서……”

당황한 티가 역력한 목소리가 답지 않게 말을 완성하지도 못하고 논리정연하게 나열하지도 못했다. 혼란으로 가득 찬 고운 미성이 속절 없이 떨렸다.

확신의 무너짐이 만들어낸 동요였다.

왕세자에게 기억이 있었다면 쓸데없는 거에 신경 쓴다며 혀를 찼을 법한 표정이 3왕자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 그에겐 기억이 없었기에.

왕세자는 대형 폭탄을 터트린 주제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여유롭게 딸기 차를 들었다.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옅은 음료가 제법 입맛에 맞아 평소 머금는 양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음료가 목구멍 너머로 넘어갔다.

“왕세자는 군대의 지휘권을 가지지 않으니 내가 부군단장이 된 건 왕세자가 되기 전일 테고. 왕자가 직접 권력을 잡을 만한 이유는 외척이 엮인 권력 싸움 정도 밖에 없고.”

“!”

“그 군을 자유롭게 괴롭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실질적인 충성의 대상은 너. 그럼 내게 권력을 준 것 또한 너.”

“……”

“군단장이 나보고 그들을 달래라는 건 내가 부군단장이 된 지 제법 됐다는 건데, 지금도 약관을 넘지 못한 네가 그 어릴 때에 정치적으로 이렇게 수를 굴릴 수 있을 만한 이유는… 시간이 돌아갔거나 아예 타인인 것 정도가 끝일 것 같군.”

“…누가 절 뒤에서 밀어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기엔 발칸을 완벽하게 통솔하고 있던데.”

“제가 천재적이었던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네 입으로?”

뾰로통한 반박은 말려 올라간 분홍빛 입술에 의해 격파당했다. 과하게 똑똑하신 형님 앞에서 차마 제가 천재라 당신도 못했던 것을 했다고 답할 순 없던 동생이 비꼬는 어투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답지 않게 말을 많이 한 왕세자는 입맛에 맞는 따뜻한 차를 다시 한번 머금었다. 말을 오래 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만 역시 유쾌하진 않았다. 한 잔 더 준비하라 이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인정하지 않으려는 녀석을 납득시키려면 더 많은 말이 필요할 테니까.

“힘으로서 군은 과해. 내 목숨이 실시간으로 위험하고 내가 없으면 정녕 안될 정도가 아니면 아무리 상대를 아낀다 하더라도 주기 힘들지.”

3왕자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예쁜 눈을 내리깔았다.

군을 힘으로 줬던 이유는, 당신을 아껴서가 아니라.

……아니라.

”외척을 내치고 내게 힘을 실어준 것을 보면 내 외척은 상당한 공적이고 나와도 안 친했던 모양인데, 그런 이들에게 아끼는 것을 드러냈으면 내 목이든 네 목이든 한쪽은 진작에 떨어졌겠지. 그럼 그 이전엔 서로의 사이가 별로 안 좋았을 테고.”

“……”

“기억을 잃었거나, 다른 사람이거나. 기억을 잃었다면 그 정치력을 설명할 순 없으니 후자가 계기로 작용해서 관계를 재구축하게 되었겠군.”

“제가 그제야 형님을 제대로 알게 된 거였다면 어떻습니까.”

“이전엔 내가 괴롭혔나?”

“아.”

별 짓 안 했다면 '제대로' 알게 되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없다. 날카로운 지적에 겨우 뗐던 입이 다시 다물렸다.

괜히 말했다는 기색이 완연한 얼굴을 감정 없는 얼굴로 내려다 본 왕세자가 작은 한숨을 삼켰다.

“그런 얼굴 하지 말지. 난 어린 애가 아니니.”

“!”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린애였는지는 모른다. 궁금하긴 하나 굳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인연을 잠시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뿐, 그 자체는 이전과 다르지 않으니까.

기억이 온전했더라도 같은 생각을 했을 테니까.

따라서 왕세자는 동생의 반응을 이해하려 하는 대신 아이를 보호하지 못한 어른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3왕자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입 아프게 긴 추론을 실컷 늘어놓다가 이게 웬 꼴인가 싶긴 하지만, 지적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저 표정이 거슬리는데 뭘 어쩌겠는가. 저 놈이라면 기분 나쁜 건 시야에서 제거하라고 가르쳤을 테니 배운 대로 해야지.

……무엇보다, 아무리 조금 더 오래 살았대도 쟤가 내 동생인 건 안 변하는데 저딴 얼굴이나 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는 애답게 구는 것이 옳으므로.

“나랑 관계 없어, 기억 잃은 건. 기억이 없는 거지 성격이 달라진 건 아니니까.”

“……!”

“각설하고. 내가 멀리했다면 내 외척은 권력욕도 상당하고 수단방법도 안 가리는 사람들이었을 것 같은데. 그런 이들이 내 형제를 내버려 뒀을 리는 없지.”

기어코 3왕자의 표정을 무너트리고 이어진 왕세자의 추론은 맞았다.

브리센은, 실리케는 아무런 위협도 안 되는 아이를 그냥 죽이려고 했었다. 독을 먹이고 자살을 위장해 죽였었다.

정치적인 사유가 아닌 이유 없는 증오였기에, 막을 방법은 없었지만.

“외척이 왕자를 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왕권은 강할 수 없고. 보호자라곤 전하 밖에 없는 와중에 왕권은 약하다라… 내가 널 보호할 방법은 네가 내 수중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 정도밖에 없었을 것 같은데.”

그를 몰랐던 2왕자는 하여 3왕자를 괴롭히고 박해했다.

대상이 공포에 질리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면서도 내가 이렇게 대해도 이 아이는 내게 반항할 수 없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동생을 지키고자 했었다.

진실을 알았다면 더 멀리 보고 다른 선택을 했겠지만――

하필이면 덜 나쁜 것을 배워서.

안 배우는 게 좋았을 것을 배워버려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건 그때의 네가 약했다는 뜻이고, 지금의 넌 소드마스터지.”

변화만을 알아보았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분명히 붉은 검을 보았던,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연두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가 아직 스물을 넘지 못했으니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 나이에 소드마스터라…”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족히 스물은 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오러다. 한데 제대로 검을 배우지도 못한 어린 아이가 스물을 넘기 전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왕세자가 기억해내지 못한 진실까지 치면 아예 성인식도 지나기 전이었다.

이런 상황에 이전과 같은 사람이 맞냐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그쪽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맞다고 결론 내리는 사람이 안 이상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때의 내 결론은 네가 내 동생이 아니라는 것이었겠군. ……지금 넌 내 아우님이 맞으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시고.”

이미 지나간 일을 추측했을 뿐인 아무 생각 없는 말에 동생의 표정이 바뀌려고 하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왕세자가 재빨리 덧붙였다. 표정 관리-혹은 거짓말-에 이렇게 재능이 없어서야, 저 정치력은 어떻게 발휘하고 있는 건지.

아, 특정 상대 앞에서만 이렇게 투명한 건가.

아니면 언제나 투명한데 누구도 저 얼굴을 못 봐서 모르는 걸지도.

“안 했습니다, 이상한 생각. ……그보다, 그것만으로는 제가 미래에서 왔다고 까진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본인은 모르지만 감만으로 또 한 번 정답을 맞춘 왕세자가 3왕자의 제법 예리한 질문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둘만 있었다면 왕세자도 동생이 미래에서 왔다는 결론은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 이미 말한 것 중에 이미 마지막 단서가 있지 않았던가.

타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의문이 하나 더 생긴다.

“다시 봤다며.”

새로운 인상을 가져서 친해졌다는 말은, 원래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그는 원래부터 2왕자 개인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왕실 안의 소리는 어지간해선 왕실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2왕자가 3왕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공포에 질릴 정도로 괴롭혔던 사실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그가 외부의 사람이었다면 2왕자를 안 좋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외척의 적이라 2왕자까지 함께 싫어한 경우였을까?

확실히 그 경우는 제법 가능성이 있지만-당장에 지금은 왕세자의 충실한 발닦개인 발칸 대원들조차도 그들의 부군단장에 대해 제대로 알기 전엔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랬다면 그가 2왕자를 다시 보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원수의 가족을 누가 곱게 봐주겠는가-왕세자는 눈앞의 인간의 정확한 과거를 아직 떠올리지 못했다-.

그가 내부의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나, 그 경우는 더 말이 안 됐다.

최후의 수단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외척의 사람들이 왕실에 한가득 깔려있는 와중에, 왕실 내부의 사람? 외척의 사람이었다면 다시 볼 필요는 없었을 테고, 드물게도 외척의 사람이 아닌 경우였다면 그는 상술한 원수의 가족이었을 가능성보다 더 2왕자를 싫어했을 것이다. 그에게 2왕자의 악행은 현실이었을 테니까.

아무튼 길었던 설명을 축약하면, 동생의 몸으로 들어온 저 동생은 미래에 제대로 사고를 친-아마 동생이 죽고 외척의 허수아비로서 미쳤을- 자신을 보고 돌아온 피해자라는 결론만이 남는다. 아직 죄를 저지르지 않은 상대를 마주하고 그가 그렇게 된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것도 상대의 고의성이 정말 없어야 가능하다- 정도 말고는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사이를 재정립하려 할 이유가 없으니까.

왕세자의 다섯 글자를 어떻게든 이해해낸 3왕자가 얼굴을 크게 쓸어 내렸다.

정말 이 말을 이해하는 자신이 새삼스레 대단한 것 같은데, 그 다시 봤다는 말은.

“…그건 확신 내리시기 전에 말했던 건데요.”

“그게 더 결정적인 조각이고. 전엔 다른 단서였지.”

“……전의 것도 말해주세요.”

“굳이.”

“제가 이러는 이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붉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속이 못내 복잡한 듯 곧고 예쁜 손 사이사이로 드러난 얼굴이 어두웠지만 덧붙인 말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연두색 눈엔 이채가 서렸다.

―아, 그러니까.

심증은 있었다는 거지.

왕세자의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상대가 제 얼굴을 보고 움찔하면서 경계하는 낯을 띈 것을 보았으나 무시하고 상체를 앞으로 당겨 테이블에 팔을 기댔다. 손등을 위로 한 두 손이 턱 밑을 받쳤다.

어리광부리는 것을 끝냈다는 건, 이제 드디어 받아들일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겠지.

“앨런 마나실.”

“…스승님이요?”

“리베른에 있던 가장 어린 대마법사가 카이리스로 거처를 옮긴 이유가 뭐였을까.”

“……!”

다시 말하지만 왕세자는 인연만을 잊은 것이지 지식을 잊은 것은 아니었고, 리베른이 세 명의 대마법사를 전부 데리고 있다는 것은 왕족에겐 지식에 속했다.

쾅!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방 안을 울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3왕자의 눈꼬리가 잘게 떨렸다. 연두색 눈이 느리게 감겨들어 갔다.

이게 네가 가장 처음 세웠던 계획이었구나.

이전의 나도 이것을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온 것의 증거로 떠올려내지 못했던 거야.

고요하게 감겨 있던 눈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쾌감에 부드럽게 휘었다. 차오르는 만족감에 왕세자의 얼굴이 아이처럼 해사한 빛을 띄었다.

이건 '당신이라면 이 정도는,' 정도의 얼굴을 하고 있던 동생이 처음으로 보인 격렬한 반응에서 비롯된 걸까. 아니면 정보가 훨씬 적은 상태에서 과거의 자신을 넘어섰다는 성취감에서 비롯된 걸까.

“…그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신 계기는. 무엇입니까.”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왕세자는 부드럽던 태도를 완전히 바꿔 딱딱하게 묻는 3왕자를 보며 지그시 웃음을 감췄다. 현실감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인 듯한데 곧바로 태도를 바꾸는 모습이 참으로 기가 찼다.

한 번 넘어선 '예상'은 더 이상 깨지려는 모순의 방패가 될 수 없는 법이거늘.

“네가 살 수 있던 유일한 방도였을 테니까. 그가.”

“……”

“그리고 대마법사는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마법을 배척하던 카이리스에선 더.”

“……”

“그러니, 제대로 된 정보통도 없는 어린 왕자가 변덕스러운 대마법사가 이 나라에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 말고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조각 같은 얼굴이 살포시 옆으로 기울었다. 아슬아슬하게 턱까지 닿는 곱슬하고 옅은 백록색 머리카락이 사락 흔들렸다. 생명의 싹을 틔운 듯 반짝이는 연두색 눈이 붉은색 예쁜 입술을 꾹 다문 눈앞의 동생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말해주시면 감사하겠군.”

“……없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걸 제게 왜 이렇게까지 설명해주시는 겁니까.”

날카로운 눈을 순하게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왕세자에게 3왕자가 물었다. 억울한 듯 서러움이 가득한 얼굴과 목소리에 왕세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턱을 손에 가져다 괴었다.

어리광은 그만둔 것 아니었나.

뭐, 부족하다면 계속 말하면 되겠지. 내 동생이니까.

“네가 알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제가 말씀이십니까.”

“내 아우님께서,”

새하얀 손이 탁자에 내려놓은 컵 가장자리를 가만 쓸었다. 잠시 내리깔렸던 싱그러운 눈이 무게 있게 들렸다.

“내가 어떤 상황이든 동생이라 받아들여 주길 바라시는 것 같아서.”

붉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에 깊은 파문이 감돌았다.

“내가 추측한 아우님과의 관계를 확인한 건데.”

툭.

부드럽게 원을 따라 그리던 손이 깨지듯 내리며 탁자를 눌렀다. 고요를 깨는 소리에 굳어 있던 3왕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어찌, 신뢰가 되시는지.”

“……형님 머리에 대한 경의 외엔 어떤 감정도 안 듭니다만.”

“짖지 말고.”

다시 한 번 탁자를 누르던 손에 턱이 괴였다.

“들으니까 의식하기 시작했잖아.”

“……”

“이제 슬슬 머릿속의 모순을 마주했으면 좋겠는데.”

왕세자는 테이블에 닿아있던 몸을 펴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건너편의 몸을 딱딱하게 하고 있는 동생보고 보라는 듯 나른한 기색을 띈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뼈마디가 두드러진 희고 마른 손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내가 만나야 하는 사람이고.”

붉은 눈이 내밀어진 손끝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걸렸다.

“내 애정하는 아우님이시며.”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 모든 것을 알려주기로 약속한 대상이시니.”

왕세자는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다. 화났을 때 짓는 아이 같은 해사한 웃음이나 웃음 같지도 않은 상대의 화를 돋우는 비뚜름한 웃음 말고는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미소가 다인,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몇 년 동안 거의 보지 못했던 진짜 웃는 모습에.

3왕자의 붉은 눈이 크게 뜨였다.

“내 이름도 네가 알려줘야지.”

낮은 목소리가 상냥하게 울렸다.

모르는 척하지만 이 상황을 전부 이해하고 있을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왕세자는 확신에 쐐기를 박듯이 눈을 접었다.

“세렌티의 힘 따위에 넘어가 주긴 싫잖아, 칼리안.”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고운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부정할 순 없었다.

칼리안은.

그에게 그럴 수 없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지금이 좋을 수도 있어요. 아니, 좋을 겁니다. 그래도 말입니까.”

흐릿하던 의심에 확신을 가지고도 같은 말을 하는 동생을 물끄러미 본 왕세자가 한 폭의 정경 같던 웃음을 지우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짖지 말고.”

“……대체 그 말은 어디서 배우신 건지.”

허탈. 자책. 체념. 기대. 행복.

여러가지 상반된 감정을 모두 그러모아 헛웃음을 내뱉은 3왕자가 테이블을 가볍게 짚고 왕세자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는 얼굴에선 더 이상 불신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족한 왕세자가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형님의 이름은 플란츠입니다.”

탁.

멀어지는 손을 부드럽게 낚아채 차가운 손을 따스한 제 양손으로 꼭 덮은 칼리안의 고운 미성이 작은 웃음을 띄며 울렸다. 왕세자의 나른하던 눈매가 일순 일그러졌다.

“고귀한 달의 인도자. 브리센의 수장인 최초의 카이리스. 발칸의 부군단장. 나의 친애하는 친우. 내 사랑하는 형님. 잘 자란 내 완두콩.”

“…완두콩이라니.”

“이젠 증오 따위 하지 않으니. 다시는,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

……지적해봤자 소용 없겠군.

동생의 웃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왕세자는 찌푸리고 있던 눈을 감았다.

물밀듯이 돌아오는 기억은 아름다웠다. 아픔은 남았지만 이미 딱지가 덮여 성장의 거름이 된 기억은 더없이 찬란하고 빛이 났다. 모든 것이 동생의 덕분이었다.

뭐가 기억이 없는 편이 낫다는 건지.

시간과 관계없이 몰아치는 기억을 최대한 섞고 정리하여 잊으면 안 되는 순간을 기억의 맨 꼭대기에 놓아둔 플란츠가 가만히 눈을 떴다.

“칼리안.”

기억이 없을 때의 차가운 어조와는 확연히 다른 친숙함에 붉은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고운 손에 잡혀 있던 마른 손이 자비 없이 손을 내치고 보드라운 볼을 잡아 늘였다.

“하지 말랬지.”

“머르요…”

“쓸데없는 걱정.”

톡, 살 가장자리가 약하게 놓이자 아리게 올라오는 통증에 칼리안이 볼을 잡았다. 내 형님께서 똑똑하시긴 했지만 다른 사람 아프게 하는 데엔 별 지식 없으셨는데.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발개진 볼을 감싸고 뚱하니 바라보는 동생을 무시하며 플란츠는 어느새 무릎 위로 올라온 루시와 안네의 등을 쓰다듬었다. 기억을 되찾으니 보드라운 따스함이 새삼스러웠다.

“괜히 그래서 파훼가 오래 걸렸지 않나.”

“……제가 걸린 것을 아셨습니까?”

“뻔하지. 함께 있던 사람은 한 명 뿐인데.”

둘이 함께 나가서 걸려 온 세렌티의 힘. 자신에게 걸린 것이라기엔 자유로운 사고. 자신이 기억을 잃는 것에 가장 영향을 받을 사람.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칼리안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눈이 괜한 엄살을 멈춘 동생을 차갑게 올려다보았다.

“조사는?”

세렌티의 힘. 막연한 허상을 강제적인 개연성을 발휘하여 실현시키는, 제온의 새로운 무기.

위험한 걸 알았는데도 둘이서만 나갔던 이유.

“……정확히 알아낸 건 아직 없습니다. 목숨 보존을 약속해 준 마법사를 헤르츠 경이 심문하는 중이에요.”

“해주법은 예상대로였던 것 같은데.”

“형님께서 제게 걸린 걸 풀어주신 방법을 보면,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방지책.”

“계획대로 만들도록 전할게요.”

“그래.”

칼리안은 순순히 대답했다. 원래도 부드러운 미성이었으나 어색할 정도로 과하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귀담아들은 연두색 눈이 느리게 감겨들어 갔다.

흑마법이 풀린 머리는 평소의 몇 배는 되는 부하를 떠안았고, 타인의 손에 맡겨놨던 업무에 대해선 다 얘기했다. 축복이 받은 충격을 줄여주지는 않으니 당분간은 직접 움직이기보단 칼리안을 시키는 게 옳을 터였다.

……묘하게 시무룩해 보이지만 않았어도, 여기까지만 말하고 내쫓았을 텐데.

귓가에 아른거리는 섬세한 목소리를 치워버린 플란츠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을 내려보냈다. 몸을 일으켜서 테이블을 짚고 동생의 다부진 어깨를 잡아 당황한 듯 올려다보는 붉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데.”

“…뭘 말입니까?”

“얼굴. 목소리.”

흔들림 없는 단단한 얼굴이 가까이 내려왔다.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나려는 몸이 어깨를 잡은 손에 의해 저지되었다.

모순을 자각하고 마법을 깨버렸으면 만족해서 웃기나 할 것이지.

뭐가 또 문제여서 생사람 찝찝하게 만드는지.

“설명.”

“뭐를요.”

“감정은 말 안 하면 몰라.”

“……”

붉은 눈이 떨렸다. 거짓말을 참으로 못 하시는 아우님께선 언제나 그렇듯 속내를 숨기지 못했다.

깊게 가라앉은 연두색 눈이 상대를 꿰뚫어 보듯 빛났다. 곤란한 듯 오물거리던 붉은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납니까.”

“나.”

“넘어가 주실 생각은 없으시겠고요.”

“없어.”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뭐, 별거 아니긴 합니다만…”

고운 손이 천천히 올라 새하얀 이마를 매만졌다.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던 매끄러운 이마가 조심스러운 손길에 흔적 없이 풀렸다.

키는 얼마 차이 나지 않는데도, 한껏 올려다보는 것처럼 턱을 든 미의 화신이 그 아름다운 얼굴을 아프게 일그러트렸다.

“아프시잖아요.”

“…아니야.”

“많이 겪어보신 일이라 해도, 부담이 된다면 아픈 겁니다. 저 때문에 아프신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신경 쓰실 바 없는 사소한 문제입니다.”

“쓸데없어.”

“형님 아프신 거에 대한 게 뭐가 쓸데없습니까.”

손과 비교해서 확연히 온도가 높은 이마를 쓰는 손이 평소와는 다르게 차가웠다. 시원한 감은 좋았지만 물건에나 할 것이지 제 손의 온도를 낮춘 것이 영 꺼림칙했다.

……마법은 또 언제 쓴 건지.

걱정으로 가득 찬 붉은 눈을 내려다보던 연두색 눈이 깜박였다. 기억을 되찾았는데도 움직이는 마력을 눈치채지 못한 것을 보니 쓰러져있는 새에 저 놈이 또 성장했나보다 싶었다.

아무튼. 목소리에 저 심란한 기색이 깃들었던 것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거의 초반부터 제 상태를 알아차린 것 같은데.

“언제.”

“형님께서 애꿎은 제 볼 괴롭히는 걸 그만두셨을 때요.”

“애꿎기는.”

“호기심 많으신 걸 잊은 건 잘못 맞지만요.”

“짖지 말고.”

“멍.”

가차없이 눈꼬리를 찌푸리려다가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저지당한 플란츠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작게 웃은 칼리안이 플란츠의 보드라운 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쉬세요. 다 정리하면 4층으로 오겠습니다.”

“칼리안.”

“네.”

“필요한 거야. 탓하지 마.”

필요한 것.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고통? 망각의 경험? 일주일의 실신?

의도한 것이 무엇이든 이 이상 고민할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에 두어 번 깜빡거리던 붉은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염두에 두겠습니다.”

“…너.”

“레릭, 형님 쉬신대. 침실 정리해줘.”

방긋 웃는 목소리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청보라색 머리카락의 시종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거의 동시에 해사한 웃음을 띤 플란츠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을 뗀 칼리안이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플란츠를 꼭 껴안았다가 떨어졌다.

“실례했습니다. 소린 멀쩡하네요.”

“야.”

“이따가, 아니면 내일 쯤 오겠습니다.”

레릭이 있는 한, 플란츠는 어지간해선 테라스 너머로 넘어가지 않는다. 레릭이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에 레릭이 대놓고 보고 놀란 적은 5층에 올라가 깽판을 쳤던 그날 밖에 없었다.

……그걸 본 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안 건지.

테라스 너머로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를 물끄러미 보던 이의 얼굴에 걸려있던 해사한 웃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소중하고 너그러우신 우리 저하의 기분이 언짢아진 것을 느낀 레릭이 작게 물었다.

“3층에 다녀올까요, 저하?”

“됐어. …테라스.”

“잠그라는 말씀이시죠?”

“응. 잘 거야.”

“캐노피 쳐 드릴게요.”

빌헬름 관으로 나갔던 차림 그대로인 플란츠는 어깨에 걸친 재킷만 빼면 바로 잠들 수 있는 상태였다. 레릭은 플란츠의 재킷을 받아 들고-도와야 하는데 플란츠가 직접 해버려서 허둥댄 것은 비밀이다- 테라스 문의 자물쇠를 걸어 잠근 다음 침대의 캐노피를 치고 플란츠가 벗어 둔 신발을 들어서 나갔다. 두꺼운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린 플란츠는 곧 눈을 감고 깊은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지난 일주일과는 다른, 다정한 침묵이 체르밀 궁 4층에 깔렸다.

이주일 전.

지극히 사려 깊고 위대한 시스파니안의 직령에 찾아든 손님이 가져온 소식에 칼리안은 고운 얼굴을 구겼다. 사람도 정보도 불쾌했기에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세렌티의 힘을 비는 흑마법을 제온이 갖고 있다는 거지.”

“이젠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같더구나.”

“그건 어떻게 알았어?”

“느껴졌느니라.”

실레스티안의 뚱한 목소리에 칼리안의 입가에 플란츠의 그것처럼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용이니까, 참자. 그래. 용이지. 제온을 미워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아닌 용이다. 그러니 말귀를 못 알아먹을 수도 있지. 시스파니안께선 말씀이 짧으시고 아르나이젤은 기억이 짧고 비아다누르는 생각이 짧듯이 실레스티안은 성질머리가 짧으니까.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여기서 저 짧은 성질머리를 잘못 건드리…면…. …상관없지 않나? 여기 카이리시스인데. 시스파니안의 권역인데. 실레스티안의 성질머리가 얼마나 짧든 내 성질머리보다 짧지는 못할 텐데.

칼리안이 돌아버리려는 것을 눈치챈 플란츠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먼저 입을 열었다.

“효과.”

“흑마법은 촉매로 작용하고, 인간의 힘을 극대화해서 막연한 가정을 현실로 만든다. 한데 어린 놈아, 너 말버릇이 참 시스파니안을 닮았구나. 후손인 거 티 내느냐.”

“막는 법.”

“……뭐, 그래. 막는 법은-”

포기한 듯-아마 시스파니안을 상대할 때와 유사하다고 판단 내린 듯했다- 숨을 크게 내쉬고 입술을 웅얼거리던 실레스티안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입술도 목 근육도 확실히 움직이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본 칼리안과 플란츠 역시 표정을 굳혔다.

금제였다.

“……막혔군.”

“세렌티려나요.”

“악신에겐 필요 없으니까.”

“세렌티의 힘을 약화시킬 방법과 유사할 테니… 그렇죠. 하여간에.”

“참아.”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요?”

“응.”

“그걸 그렇게까지 줄이시면 아무리 저라도 무린데요, 형님.”

“알았잖아.”

“그건 그렇지만 말이죠…”

“핏줄은 흐려질 대로 흐려졌을 텐데 이렇게 티 날 수가 있나…”

칼리안은 실레스티안의 혼잣말을 무시하며 플란츠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하는 대화는 또 딴 데로 새버렸지만 생각까지 새지는 않았을 플란츠를 알았다.

기대에 부응하듯, 잠시 고개를 떨궜던 플란츠가 또 한 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체념이 아닌 권태로움이 담긴 한숨이었다.

“모순을 만드는 게 중요하겠군.”

“모순 말씀이십니까?”

“실현에 쓰이는 힘은 세렌티의 힘이라지만, 그 원천은 인간의 생각이니까.”

“과연… 방지책으로는 생각을 비우거나 정도 이상으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되겠군요. 생각이 없으면 틀이 없으니 실현될 수 없을 테고, 흑마법으로 불러올 수 있는 세렌티의 힘엔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후자는 형님 정도밖에 쓰지 못하겠지만- 써먹을 방법은 있겠죠.”

“확인은 해둬야겠지만.”

용의 지식이 더해지지 않아도 창조신의 힘을 빌어오는 흑마법의 파훼법이 어려움 없이 추론되었다. 더 빨리 생각이 닿은 것은 플란츠고 조금 늦게 생각이 닿은 칼리안이 하나하나 언급해 확인받으며 낱낱이 파헤치는 형태였다.

―이 정도면, 내가 없어도 되겠군.

물 흐르듯 이어지는 추론이 하나하나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던 실레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이제 가도 되느냐.”

“어. 가.”

“…응.”

“작은 놈에게 성을 내야 하는지 어린 놈에게 성을 내야 하는지 모르겠군.”

다 들으라는 듯 크게 투덜거린 실레스티안이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시스파니안이 밤을 칠한 듯 아름다운 어둠의 빛으로 화하던 것을 떠올리면, 마치 햇살 같은 눈부심으로.

플란츠는 느리게 눈을 굴려 칼리안을 보았다. 시스파니안이 그 무엇보다도 아끼는 후손은 이쪽이었으니 별 생각 없었지만 저쪽이 조상님의 오랜 지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신경 쓰였다.

“되나. 이래도.”

“형님께서 지고지순하시고 양순하시고 유순하신 건 저도 잘 압니다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상부상조하고 있는 거잖아요, 실레스티안이랑은.”

“그런가.”

“다누에게처럼 욕은 안 하니 그거면 됩니다.”

“알겠어.”

“예. 그럼 식사하러 가실까요.”

“응.”

방금 전까지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오늘의 석찬은 홀에서 한다고 했던 레릭의 말을 떠올린 플란츠가 미세하게 인상을 썼다가 칼리안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흑마법의 파훼법을 고민하는 것보다 석찬을 들러 가는 것이 더 싫다고 생각하는 티가 역력한 얼굴에 칼리안은 새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주일 전.

체르밀 궁 4층 침실의 테라스가 열렸다. 4층의 불은 웬일로 일찍부터 꺼져 있었지만 제 형님이 바람 소리에 눈을 뜰 만큼 예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칼리안은 망설임 하나 없이 4층에 발을 디뎠다.

“뭐야.”

예상대로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눈을 뜨고 몸을 반쯤 일으킨 플란츠의 달빛을 받아 빛나는 백록색 머리카락을 보며, 칼리안은 고혹적으로 깊게 미소 지었다.

“말씀 안 드리고 혼자 가면 또 노하실 것 같아서요.”

“당연히.”

“당연합니까.”

“그래서.”

오만한 듯 턱을 까딱거린 플란츠의 눈이 잠에서 막 깬 사람답지 않게 빛났다. 실제론 왕족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그럽고 순하고 유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내려다보듯 하는 모습이란, 새삼스럽게 웃음만 나와서. 분위기라도 잡으려는 듯 나른하고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칼리안의 붉은 눈이 허물어지듯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제온의 끄나풀이 붙었습니다. 유인해서 잡으려고요.”

“알았어.”

“여기 계시라고 해도… 따라오고 싶으시겠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내 동생인 것처럼 당연한 말 하지 말라는 얼굴을 잘 이해한 칼리안이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챙겨야 할 것 챙겨서 나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응.”

눈을 데구르르 굴린 플란츠가 이윽고 몸을 완전히 일으켜 다른 방으로 향했다. 챙겨 오라고는 했지만 신을 구두 한 켤레와 여러 기능의 팔찌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시나스타와 필요할지도 모르는 육포 말고 완두콩이 챙길만한 것을 예상할 수 없던 칼리안은 아버지한테 미리 부탁해서 가져온 로브를 꺼내서 준비했다.

―다만 예상했다 해서 정말 예상 그대로인 모습이 달가운 것은 아니라서. 검은 구두를 신고 팔찌를 착용한 채로 시나스타를 들고나온 플란츠의 모습에 붉은 눈이 암담히 감겼다. 아무리 축복이 있다 해도, 감기 걸리려고 이 형님이.

“…정말 그 차림으로 나가시겠다는 겁니까, 형님.”

“왜.”

“카이리시스는 추운데요. 카디건이라도 걸치시는 게…”

“로브.”

“…드릴 거긴 했습니다만.”

“그럼 왜.”

“…아닙니다. 이거 꼭 걸치고 계세요.”

로브를 줄 것을 예상했다는 당당한 되물음에 할 말을 잃은 칼리안은 포기하고 플란츠에게 들고 있던 로브를 씌워 주었다. 그 본인도 한평생 고귀한 왕족으로만 살아왔으니 시중을 받아왔으면 모를까 들어본 적은 거의 없을 텐데도, 팔을 끼워 넣고 단추를 꼭꼭 채워주며 모자까지 덮어주는 행태는 전문 시종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시중에 익숙할 뿐 혼자서도 잘 입을 수 있는 플란츠가 미간을 좁혔다.

“……유난히 극성이신데.”

“이번엔 제가 지켜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조심하시라고요.”

“못 믿으시나.”

“믿습니다. 형님께서 대륙의 일곱 번째 검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도 알아요. 하지만 걱정하는 건 별개이지 않습니까.”

“……”

“내 형님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강했던 나를 변함 없이 걱정하시듯.”

“반말.”

“-요. 그러니까 벌써부터 좋은 머리 괴롭히지 마세요.”

칼리안은 플란츠의 이마를 툭, 가볍게 문질렀다. 다소 느린 눈 깜빡임을 본 붉은 입술이 쓴 침을 머금었다.

“아직 적을 마주하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형님이라도 부담이 있잖아요.”

“…알았어.”

“혹시 몰라 여쭙는 겁니다만, 방금까지 몇 개의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네 개.”

“…이르네요.”

“그런가.”

“이릅니다.”

“알겠어.”

칼리안의 단호한 말에 플란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까지 확인한 칼리안은 플란츠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며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렸다.

달이 밝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아래 검은 두 인영이 체르밀을 가로질러 왕궁 밖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왕궁에서 제법 멀어지자.

“…확실히.”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이르러서 걸음을 멈춘 이의 낮은 목소리가 느리게 내리깔렸다. 철컥, 검을 다잡는 소리가 빈 공간을 울렸다.

“따라왔군.”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니. 내 아우님께선 거짓말엔 소질이 없으시니.”

“그건 그렇죠.”

“믿기 힘들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왕궁 안이었으니까요.”

“그렇지.”

바람이 멎었다. 마치 누군가가 부러 일으킨 인위였던 것처럼, 숨어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불어오던 바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붉은 오러의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날의 색이 다른 검을 쥔 플란츠가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며 자세를 갖췄다.

“마법사가 넷. 검사가 스물.”

“늑대들과 마법사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열은 내가 하지.”

“네.”

기왕이면 플란츠를 전위에 세우고 싶지 않았지만, 칼리안은 플란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키리에와 드미레아를 포함한 여섯 명의 소드마스터를 제외하면 누구와 싸워도 이기는 게 어색하지 않을 제자가 함께 싸우는 것을 막을 명분이 어디에 있을까. 자신이 위험한 것들과 싸우는 동안 남은 것들을 맡기는 것은 효율적이기도 하고 형님의 불만도 듣지 않을 수 있는 최적의 선택지였다.

챙!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청은색 날을 가진 검에서 순식간에 분리된 묵색 날이 적의 심장을 뚫었다.

칼리안의 눈을 용케 벗어난 마법사가 여섯의 심장을 뚫은 왕세자에게 다가왔다.

마법사 둘과 대사막의 늑대 일곱을 죽인 3왕자의 약점이 왕세자라는 사실은 이미 제온 내에서 공공연했기에. 전원이 당하기 전에 뭐라도 하기 위해서.

입술이 숨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연두색 눈이 둥글게 휘었다.

“왜.”

철컥, 묵빛의 날과 청은빛의 날이 합쳐졌다. 왼손으론 검을 턱밑에 들이대고 오른손으론 마법사의 로브를 잡아 눈앞으로 끌어낸 플란츠가 제게 닿지 못한 마력을 감지하곤 표정을 다시 굳혔다.

턱없이 부족하군.

팔찌의 반짝임과 거의 동시에 멀리서 혼자 날뛰던 칼리안이 빙긋 웃었다.

“너무 느린데.”

시전된 마법을 믿고 턱밑으로 예리하게 빛나는 두 색의 검을 흐린 시야로 보던 마법사가 이를 악물었다.

전투 중에 말을 거는 것을 보면, 왕세자는 전투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3왕자가 다 처리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 이제 오랫동안 준비했던 마법이 효과를 발휘하기만을 기다리면.

……어?

명백하게 제압된 상태로 입술을 비틀어 올리던 마법사가 문득 든 깨달음에 숨을 삼켜냈다.

분명 마법은 제대로 발동했는데.

왜.

“아무것도 안 일어나서… 놀라운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

잡히기 전까지 봤던 상황에서 크게 반전된 일 없이, 플란츠가 상대하던 제온은 다가오는 족족 날아오는 붉은 오러에 막혀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했고 대사막의 늑대 하나는 힘을 잃고 쓰러졌다. 칼리안은 이제 늑대 둘과 마법사 하나, 그리고 플란츠가 남겨둔 제온 넷을 상대하며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제가 걸었던 마법이 흩어지는 것을 발견한 로브 아래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고양이 발바닥 색을 닮은 분홍색 입술이 무기질한 호선을 그렸다.

“나도 궁금했는데. 어떤 생각이 현실이 될지.”

다정한 듯 나긋한 낮은 목소리가 작게 속삭이며 마법사의 목을 갈랐다.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소름끼치는 절삭음을 뒤로 한 빛나는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심장을 찌르는 건 익숙해진 것 같은데.

“마법사는 제 거라니까요.”

여유로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감히 제 형님을 노린 겁 없는 놈의 사지를 붉은 오러로 고정한 칼리안이 태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로 합친 시나스타로 옴짝달싹도 못 하는 놈의 심장을 한 번 더 꿰뚫고 그 눈의 빛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던 플란츠가 칼리안의 발소리를 인식하곤 시리게 얼어 붙은 눈을 들었다. 사실 가까이 오지 않았다면 무시하려고 했다.

“마찬가지로 하나 죽인 사람이 할 말인가.”

마법사는 넘겨주기로 했으니 지적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지만, 칼리안은 플란츠 몫의 제온 하나를 죽이고 한술 더 떠서 남은 세 명을 제압해 둔 채였다.

떠먹여주려는 꼴이 못마땅한 건 사실인지라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 플란츠를 본 칼리안이 소리 내서 웃었다.

아, 지금 상황 진짜 싫어하고 있으면서.

헛소리는 아니니까 봐주겠다는 뜻이려나.

“짖지 말라고는 안 하시는 겁니까.”

“왜. 알면서.”

“의외로 뻔뻔하신 내 형님이라면 맞는 말에도 짖는다 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내 형님께선 본인에게만은 참으로 엄격하시지.”

“반말.”

“요.”

두 색의 날을 가진 검이 또 한 번 저항하지 못하는 제온의 심장을 꿰뚫었다. 사람의 목숨을 끊어내는 데엔 망설임이 없으나 지침은 느끼는 이가 깊은 숨을 들이 내쉬었다.

남은 건, 늑대 둘. 마법사 하나.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는 제온 하나.

……왜 아직도 죽는 소리가 안 들리지. 피곤한 듯 미세하게 흐려진 연두색 눈이 가물거리며 기울었다. 놈들의 힘과 같은 색을 띄었음에도 불쾌함보단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붉은 옥에 죄인 남은 제온에게서 신경을 끈 플란츠가 발걸음을 돌렸다. 저벅저벅 호쾌하다는 말이 어울릴 걸음의 목표를 확인한 칼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생긋 웃었다.

“안 죽이십니까?”

“너야말로, 왜.”

“음, 술래잡기엔 그리 능하지 않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감이 이상해서요. 뭔가 놓친 것 같달까, 기분이 굉장히 더럽고 불길한데.”

감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감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무의식적으로 평상시와 다른 이질적인 공기를 알아차리고 연상해낸 것을 의식적으로 표현하지 못해서 얼버무린 표현이다.

플란츠는 평범한 사람들도 감이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위기를 피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반인의 감도 그러한데,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한 소드마스터가 감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정확할까.

소드마스터면서 엘프의 피까지 물려받은 칼리안의 감은, 그냥 감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물려받은 피라곤 500년 동안 희석된 옅디옅은 드래곤의 피밖에 없고 아직 소드마스터도 되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예민한 플란츠가 퍼뜩 불길함의 이유로 가장 유력한 후보를 찾아냈다.

“……흑마법은, 시전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고… 발동 시 따로 눈에 보이는 게 없지.”

“…예?”

“칼리안, 뒤!”

청은빛 날을 세운 시나스타가 바람을 갈랐다. 묵직한 파공음 사이로 귀를 찢는 부서지는 소리와 잽싼 발소리가 섞여들었다는 것을 안 칼리안이 표정을 달리 하며 순식간에 붉은 검을 생성해 플란츠와 반대 방향으로 휘둘렀다. 플란츠가 휘두른 것보다 훨씬 강한 힘에 금속이 튕겨 나가 땅에 처박히는 소리가 울렸다.

날카로운 연두색 눈이 한순간에 화살이 날아온 장소를 확인했다. 쇠뇌를 쐈던 늑대 한 마리가 혀를 찼다. 둔기를 놓친 다른 늑대가 산산조각이 난 무기를 포기하고 뒤로 몇 걸음 뛰어서 다시 어둠 속으로 숨었다.

제 힘에 놓칠 뻔한 시나스타를 다잡은 플란츠가 눈꼬리를 가늘게 찌푸렸다.

“방심.”

“압니다. 실수였어요. ……그냥, 다 죽여놓을 걸 그랬나 봅니다. 스물 넷이 몰려와서 둘을 상대 못 하고 넷 밖에 안 남은 주제에. 제 주제도 모르고 내가 아니라 형님을 노릴 줄은 몰랐는데.”

붉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늑대들은 그냥 찝찝한 정도였나 보군.

……아니면.

생각을 억지로 멈춘 플란츠가 단호하게 말했다.

“또 반말.”

“이거 형님께 한 말 아닌데요.”

“……”

“…귀여운 동생 좀 봐주시면 안 됩니까.”

“짖지 말고.”

잡아둔 제온에게 향하던 플란츠가 몸을 틀었다.

깨지지 않은 신록의 찬란한 눈이 달빛 아래 빛났다.

칼리안의 확신에 가까운 불길함에 은혜 입어 도망친 줄 알았던 놈들이 사실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미뤄뒀던 적은 지금 처리해야 마땅했다.

“처리해.”

“네.”

플란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검에 묻어 있던 피가 도망칠 궁리를 하던 제온의 얼굴에 튀었다.

철컹, 시나스타가 청은색 날과 묵색 날로 갈라졌다. 플란츠의 일말의 상냥함을 보지도 않고 알아차린 칼리안이 키득 웃었다.

“상냥하시네요.”

“처리.”

“어지간하면 지순하고 너그러우시면서 이 어여쁜 아우에게만 엄격하시다니깐.”

짖지 말고 처리나 하라는 문장을 고작 두 글자로 전달하는 효율적인 모습에 목소리를 가볍게 높인 칼리안이 나무 한 그루를 목표로 발돋움했다. 검을 분리해냈을 뿐 제온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플란츠가 순간 사라진 동생의 기척에 뒤쪽을 돌아보았다.

어둠이 드리운 숲 안쪽에서 음산한 쇠소리가 들려왔다.

“……”

일 대 이로 싸우고 있는 주제에, 이쪽을 묶어둔 오러를 되돌리지도 않고…. …뭐, 저 녀석이 이놈을 풀어놓고 가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지만.

생각을 정리한 플란츠는 다시 느리게 목표로 다가갔다.

빠르게. 덜 아프게.

그나마 얇은 것으로 목숨을 앗을 테니 덜 아프겠지. 비릿한 피 냄새 속에서 둔한 머리가 제멋대로 짐작했다. 죽는 데 덜 아프고 더 아프고가 어디 있냐고, 플란츠는 제 생각에 스스로 반박하며 묵색 날의 시나스타를 들고 걸음을 조금 더 옮겼다.

……나 모르게 사일런트라도 걸어놨나. 죽음이 코앞인데도 과하게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는, 눈도 입도 가리고 있는 놈을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 본 이의 뼈마디 두드러진 손이 검 자루를 더 힘주어 잡았다.

심장을 꿰뚫는 오싹한 절삭음이 제 손가락 끝에서부터 들려왔다.

덤벼드는 적을 죽이는 데엔 거부감 없지만, 사람이 죽는 걸 보는 데에도 제법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저항조차 못하는 사람을 직접 찔러 죽이며 검 끝에서 전해져오는 묵직한 심박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는 데엔 익숙할 수 없는 플란츠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가 끝났으니, 칼리안을 쫓아가야지. 왜 불길함을 느꼈는지 알아봐야지. 내 추론이 맞는 건지 확인을 해야지.

……저 놈과 먼저 대화한 다음에.

팍, 시나스타에서 이음새가 맞물리는 청량한 금속음 대신 힘으로 끼워 넣는 거친 소리가 울렸다. 조금만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플란츠가 시나스타를 이렇게 함부로 대할 리는 만무했겠지만, 소드마스터도 아니고 클린도 못 쓰는 사람이 마법사를 상대로 여유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나로 합쳐진 두 색의 날을 가진 검이 허공을 갈랐다. 털썩, 흙먼지가 일고 무언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무서우리만치 차갑게 내리깔린 연두색 눈이 풀이 꺾인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안 풀 건가, 투명 마법.”

“……”

“말이 적은 건 내가 제일이라 생각했는데.”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이 느리게 기울었다. 시나스타의 묵색 날이 비스듬히 예리한 날을 세웠다.

“풀어.”

“……!”

“명령이니까.”

상냥하게 덧붙여주는 것은 이걸로 끝이다. 순순히 투명화를 풀지 않으면 왕세자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것을 사유로 목을 치겠다는 살벌한 계획을 다섯 글자로 말한 플란츠가 시나스타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검붉은 피가 검날을 타고 뚝, 떨어졌다.

“질문.”

모습을 드러낸 검은 로브가 떨리는 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음에도 살벌한 기세를 흩뿌리며 날을 드리운 묵색 검날에 베인 목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칼리안에게 쓴 거지, 그 흑마법.”

“…그 흑마법, 이라면.”

“세렌티의 힘을 빌어 무형을 유형으로 만드는 흑마법.”

“!”

마법사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렵사리 뗀 입을 다물고 눈을 키웠을 뿐이나- 반응이 다 설명했다. 플란츠의 한쪽 입술 끝자락이 비틀려 올라갔다.

플란츠 본인에겐 흑마법이 들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동시에 하고 있는 서너 다섯 개의 생각을 세렌티는 실체화시키지 못했다. 설령 아직 현실이 되지 못한 것일지라도 플란츠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 중 실체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을 터였다. 그건 모두 세렌티의 힘을 빌려오는 것 정도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칼리안은?

칼리안은 여러 개의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없다. 아주 집중하면 될지도 모르나 싸우면서 할 수는 없다. 전투 중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가르친 장본인이 그였으니까.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전투 중 칼리안에게 흑마법을 걸 역량이 되는 마법사는 아델리아 밖에 없으므로.

“…궁으로 올 때 걸었나.”

“!”

“해제 방법.”

속을 뒤흔드는 역겨운 비린내가 짙어졌다. 겁을 먹은 건지 의지가 강한 건지 입을 열지 못하는 마법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본 플란츠가 시나스타를 잡은 자세를 고치고 무릎을 굽혀 마법사와 시선을 맞췄다.

“다 들었겠지, 대화.”

“……”

“입 안 열어봤자 소용 없어. 열든 말든 왕족 시해죄로 잡혀갈 테니까.”

“!”

칼리안이 이곳까지 데려왔을 때부터 눈치챘지만, 이 마법사는 끝이다. 이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플란츠가 머리를 다쳐서 그를 잊는 것이므로.

아마 칼리안은 흑마법이 걸리던 당시 마법에 걸려서 플란츠가 기억을 잃으면 어떡하지 정도의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세렌티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머리를 가진 플란츠가 개연성 있게 기억을 잃게 하려면 머리를 다치게 하는 것 정도밖에 없으니까 칼리안의 무의식을 움직여서 싸움터로 데려왔을 것이고.

하므로 마법사는 입을 열고 말고의 여부와 상관 없이 이미 레니시타 잎 위에 떨어질 목숨이다. 어찌 되든 간에 플란츠는 곧 머리를 다칠 예정일 테니까.

이 모든 것을 길게 설명하지 않은 채 결론만 말한 플란츠가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정보만 내놓고 가라는 말이 그리 어렵나.”

“……무, 무슨…”

“입이라도 열면 일말의 자비 정도는 내줄 수 있을 텐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겁니까.”

“도움이 된다면 그도 고려해볼 수 있겠지. 내 아우님께서 정하실 사안이긴 하지만.”

기억을 잃을 정도로 머리를 다친다면 며칠은 일어나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눈앞에서 쓰러질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 사실 나이가 좀 더 있으신 아우님께서 이성을 차리고 있을 것인지는, 음. 하피 사건을 떠올리면 별로 믿을 순 없긴 하지만.

동생과는 달리 거짓말에 능숙한 플란츠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웠다.

마법사가 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새빨간 입술이 평소와는 다르게 웃음기 없이 굳어졌다. 거의 날아다니는 것에 가까운 신기를 보이며 날아드는 화살을 격추하고 몰아치는 각종 무기들을 쳐내던 칼리안이 이를 꽉 다물고 마력을 움직였다.

거센 바람에 날아들던 화살들이 부서져 떨어졌다. 붉은 오러의 칼날이 화살 반대쪽으로 붕하고 휘둘러지는 철퇴의 쇠사슬을 꼬아서 마나를 주입해 철추를 터트렸다.

“숨겨놓은 게 얼마나 있는 거야… 귀찮게.”

처음부터 숲속에서의 전투를 상정하고 대비해놨던 건지, 부숴도 부숴도 끊임없이 나오는 화살과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슬슬 지겹다. 밤의 어둠에 가려 얼핏 보랏빛으로도 보이는 붉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노리는 게 있어서 굳이 이렇게 하는 걸 텐데…”

마력 한 톨 담기지 않은 화살이 쌩하고 날아드는 것을 쳐낸 칼리안이 느릿하게 팔을 내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전투 중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음.

역시 이상한데.

-형님. 팔찌 갖고 계시죠.

지금까지 만난 대사막의 늑대들은 전부 칼리안을 죽이려 들었다. 물론 적이니 서로 죽이려 하는 것은 딱히 이상할 것 없지만, 시간 끄는 일 없이 멍청하게도 왕족을 바로 죽이려고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끄는- 아니, 유인하는 것처럼. 화살은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수단처럼 옷자락이나 발 근처를 깔짝대질 않나, 무기는 지금 부서진 것만 두 손을 넘어가는데 상관없다는 듯이 도망만 치고 있질 않나.

아무리 생각을 접어두고 있다 하더라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들었던 죽이면 곤란할 것 같은 감각을 떠올리면 더했다.

-왜.

그래서 대신 생각해 줄 사람을 불렀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익숙한 낮은 목소리에 짙게 미소 지은 칼리안이 생각을 전했다.

-이상해서요.

-여전히.

-네, 여전히.

-왜.

말로도 생각으로도 타인에게 전할 땐 짧기만 한 형님의 그럼 여전히 이상한 이유가 생겨서 부른 것일 테니 말하라는 긴 말을 줄인 한 글자를 이해한 칼리안이 순간 뒤돌아보며 오러를 멀리 휘둘렀다.

또다시 발치를 겨냥하고 날아들던 화살이 파직 소리와 함께 부서져 추락했다.

-저를 죽이려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죽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공격하고 도망치고 유인하고 있어요.

-……

-붉은 오러를 쓰는 걸 확인했었는데 그것도 안 쓰고 있고요. 전 숲속이라 마음대로 날뛸 수 없는데 녀석들은 제법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리 와서 길을 확인했던 것처럼.

-……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달까… 아무리 봐도 절 유인하고 있습니다만.

따라가 줄까요?

칼리안은 의문을 굳이 언어로 구체화해서 전하지 않았다. 질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까다로운 전투 도중에 이리 말을 걸고 있는 행위가 앞으로의 행동은 플란츠의 선택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뜻이라는 것을 모를 플란츠가 아니었으니까.

잠시의 침묵이 이어졌다. 칼리안이 그러고 보니 형님 지금 뭐 하고 계시려나 딴 생각에 빠졌을 즈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데.

-꽤 헤매서 헷갈리긴 합니다만… 음, 나무 사이의 너비가 깊은 곳에 비하면 넓어졌습니다. 그림자도 옅어졌고요. 아무래도 숲 밖과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어딘지 알겠군.

-? 예?

-생각, 전해둘 테니까 나중에 풀어. 죽이지 말고.

-예?

생각의 뭉텅이가 전해진 것을 느낀 칼리안이 움직임을 멈췄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양 쇄도하는 화살들과 각종 암기들을 바람을 일으켜 날려버린 칼리안이 발끝에 힘을 줘서 높이 도약했다.

새하얀 달이 밝게 빛났다. 검푸른 밤하늘 아래 암녹색 나무와 검은 땅이 명명하게 구분되었다.

처음 전투를 벌였던 공터와 달빛 아래 빛나는 백록색 머리카락을 확인한 고운 얼굴이 가차 없이 일그러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방금 전까지의 미성과는 달리 무섭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반지를 통해 저 너머로 건너갔다. 선택에 맡기겠다더니

추궁하는 행위의 이유를 추측하고 있는지 대답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감정은 반지로 전달이 되던가. ……뭐, 지금 생각할 건 아니니 넘기고.

칼리안은 문득 든 의문을 가볍게 넘겼다. 지금은 굳이 기억을 되짚어서 사소한 의문이나 풀고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발밑이 흔들린다. 무기를 쓰던 늑대가 숨겨뒀던 무기를 다 소모했는지 칼리안이 밟고 선 나무를 베어 넘어트린 것이다. 적당히 지속하려던 술래잡기가 슬슬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동안 열심히 길러온 인내심과 완두콩 말 잘 듣자는 경험적인 다짐이 아니었다면 아까 죽이지 말라고 들었던 말도 다 까먹고 그냥 죽여버렸을지도.

빈틈이 있으면 쏘아져 오는 화살도 신경 쓰고 불안정한 발밑도 건사하고 툭하면 드는 그냥 죽여버리고 싶다는 충동도 최대한 다스리면서 건네져 왔던 생각 뭉텅이를 못 참고 그냥 풀어버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려니 짧은 질문이 돌아왔다.

-왜.

이건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의 연장선이리라.

칼리안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단호하게 답했다.

-형님께서 다치실지도 모른다면 말이 달라지는데요.

-이미 늦었는데.

-…예?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목소리임에도 그 크기가 작았다. 나무가 무너지는 굉음 사이에서 용케도 그 작은 목소리를 들어낸 칼리안이 당혹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디디고 서 있던 나무가 거세게 흔들린 것은, 그 순간.

잘못 디딘 발이 미끄러졌다. 바람을 다뤄 속도를 늦추는 것을 잊은 몸이 어두운 대기 속으로 떨어졌다. 추락하면서도 형형한 빛을 잃지 않은 붉은 눈과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햇빛 아래의 여린 잎사귀와 같은 눈이 마주쳤다.

“…형님?”

피 묻은 주변과는 다르게 홀로 새하얀 로브가 가까워졌다.

어느 틈에, 분명 뒤죽박죽으로 무너지는 나무 때문에 조금 놓치긴 했지만 위치는 적당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확인한 다음엔 더 신경 쓰고 있었는데. 대체 어느 틈에 공터까지 나온 거지?

아니 그보다,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당황한 몸이 공중에서 부자연스럽게 휘었다. 거꾸로 돌아서 자신이 나온 방향을 확인하려던 눈이 인위적으로 가려졌다.

-푹.

단단한 팔이 등을 받아 품에 안았다. 밤공기와 비교하면 따스한 체온이 겉은 차게 식었으나 속은 달아오르고 있는 몸을 감쌌다.

-필연이야.

방금 전과는 달리 머릿속을 온전히 채우려는 것처럼 크나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지 말고, 할 거 하면서 기다려.

하얀 옷과 그림자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 가려진 충격음이 뒤늦게 귀를 때렸다.

결코 반가워할 수 없는 지독한 향이 콧속을 찔렀다.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얼굴 옆을 타고 흘러내렸다.

“형!!”

머지 않아 상황을 알아차린 칼리안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형…… 형님. 플란츠.”

단단하게 힘을 주고 있던 팔이 느슨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그걸 느끼자마자 제 발로 땅을 디디고 선 칼리안이 안겨있던 자세를 고쳐서 플란츠를 받쳐 들었다.

옅기만 한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시뻘건 핏방울이 검은 로브를 적셨다.

“……반, 말. 하지 말고.”

어디서 난 힘인지, 로브 자락을 덥석 쥔 플란츠가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연두색 눈을 날카롭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말, 들어.”

사정 없이 흔들리던 붉은 눈이 반응하는 것을 확인한 플란츠의 눈이 느리게 감겨들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플란츠만 살피던 칼리안이 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들었다.

고통스러운 기색이 잔뜩 어려 있던 플란츠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너.”

눈을 깜빡이는 순간 날아든 붉은 오러가 숨어있던 마법사의 로브를 꿰뚫어 고정되었다.

칼리안은 머리의 부상이 악화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플란츠를 안아 들고 꼴사납게 제압된 마법사의 앞에 다가갔다.

“내 형님께서 죽이지 말라 한 건 너인가.”

“네… 네! 맞습니다. 제, 제온 내부의 정보와 흑마법에 대해 아는 바를 모두 말하면 자비를 내어줄 수도 있다고 저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칼리안에게 달려있다 들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는 마법사가 횡설수설 빠르게 고했다. 플란츠를 제가 더 아픈 낯으로 한 번, 마법사를 차게 식은 눈으로 한 번, 살벌한 기세를 흩뿌리며 숲 쪽을 한 번 본 칼리안이 못마땅한 기색을 가득 담아 혀를 찼다.

“내 형님의 상태를 잘 살피고 있도록 해라. 손끝 하나라도 잘못 댔다간 형님께서 살려주신 목숨을 다시 앗아갈 테니 그렇게 알고,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아, 알겠습니다. 왕자님께선…”

“난 저 뼈째 씹어버려도 모자랄 것들을 죽이러 갈 거다.”

이를 아득 가는 소리가 크게 공기를 울렸다. 소맷자락을 길게 빼서 칼리안만큼이나 조심스럽게 플란츠를 받아 든 마법사가 움찔 떨어서 목에 닿은 오러에 살짝 베였다.

마법사가 제 상처를 살피지도 않고 플란츠를 신경 쓰는 것까지 확인한 칼리안이 휙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나타난 곳은.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진짜 기분 나쁠 것 같은데.”

“!!!”

“…칼리안 왕자…!!”

마법사를 두고 도망치고 있던 늑대들의 앞.

가공할 만한 속도로 한순간에 따라온 칼리안이 아이처럼 웃었다. 지금은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이 분노했을 때 짓곤 하던 얼굴이었다.

“한 놈은 죽이고 한 놈은 본보기로 당장 궁에 데려가려고. 내 형님께서 울지 말고 해야 할 일 하고 기다리라 하셨으니까 말 들어야지. 그치?”

“무슨…!!”

“아, 일찍 죽고 늦게 죽고의 차이니까 상대를 너무 부러워하진 마. 정보를 제대로 말해줄 녀석은 이미 있거든. 현명하신 내 형님께서 이미 확보해두셨지.”

그럼, 누굴 죽이고 누굴 데려갈까.

지금껏 제어 하에 극소량만이 방출되던 마력이 제어 없이 온전히 해방되었다. 사나운 바람이 뺨을 때리고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칼리안은 그 속에서 홀로 평이한 낯으로 말갛게 웃었다.

아까부터 지겹도록 전투를 방해하던 나무들이 자취를 감췄다.

“역시… 감히 왕세자의 몸에 상처 낸 놈을 더 살려둘 수는 없으려나. 응. 눈앞에 있는데 더 이상 참는 건 무리네. 고역이야.”

사라진 나무의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섞여 핏방울을 일으켰다. 붉은 오러가 서걱 빛났다.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는데 굳이 시간을 끌어서 다치시게 만들었으니… 입맛이 참 써. 아니, 필연이라 하셨으니 어차피 다치셨을 거란 말인가. 이 녀석들이 아니면 뭐 때문에 다칠지 예상할 수 없어서 죽이지 말라고 하신 거려나. 내가 죽이지 말라는 대상을 이 녀석들로 착각할 가능성을 모를 분이 아니신데 말이야…”

“으… 으아아악!!”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리는 미성이 비명에 묻혔다. 종아리를 뼈가 보일 정도로 베인 하나 남은 늑대가 내지른 비명이었다.

생각하고 있는데 시끄럽잖아. 붉은 눈이 서릿발처럼 차게 가라앉았다.

“넌 지금은 안 죽이려고 했는데 왜 힘 조절 힘들게 그래. 그냥 죽여버릴 뻔했잖아.”

“괴, 괴물…!!”

“괴물이라니, 먼저 건드린 건 너희야.”

선후 관계를 잘 따져야지. 가르치듯 나긋한 어조의 목소리가 작게 속삭였다. 그 옛날 그레이의 허리를 부숴놓을 때 썼던 오러 몽둥이를 손에 쥔 칼리안이 무언가 깨달은 듯 아, 하고 소리를 내었다.

-스승님.

그러고보니 아버지와 연결된 반지가 있었다. 할 일 하고 기다리라던 말을 따르기 위해 웃음을 위장하고 있던 얼굴이 굳어졌다.

제발 깨 계시길. 제발. 어서.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예, 왕자님.

하나도 안 반가운 완두콩에게서 나는 지독한 피 냄새와는 다르게 언제 들어도 반가운 낮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하지만 그 반가움을 만끽하는 평소와는 다르게, 칼리안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도 못하고 급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

“빨리, 빨리 와주세요. 형님께서, 머리를 크게 다치셔서, 지금. 눈을 못 뜨시는데.”

-빨리, 빨리 와주세요. 형님께서, 머리를 크게 다치셔서, 지금. 눈을 못 뜨시는데.

마음 속으로만 말해도 되는 것을 잊고, 입에서도 말한 것처럼.

심상치 않은 기색에 반지 건너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안의 다급한 기색을 눈치챈 앨런이 칼리안이 까먹고 말과 생각을 동시에 한 것처럼 저도 모르게 낸 소리를 전달한 것이다.

-금방 가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직스러운 목소리에 칼리안이 너머에선 보이지 않을 것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빨랐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기절한 늑대 한 마리를 질질 끌고 순식간에 플란츠가 있는 곳으로 도착한 칼리안이 울상을 지었다.

“스승님…!!”

“이게 대체 무슨…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형님께선 뭔가 예상하신 게 있는 것 같은데, 저보고 울지 말고 할 거 하고 기다리라고. 그러고…”

“우선 빨리 옮겨야겠습니다. 이 마법사와 끌고 오신 그놈도 왕궁으로 데려갑니까?”

“이놈은 데려가고, 마법사는 내일 데려갈 겁니다.”

첫 데려간다는 말에 한순간 어린 살기를 느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살리고, 늑대는 죽이겠다는 말씀이시군.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이해한 앨런이 빠르게 손을 들었다.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사방에 어둠이 깔린 한밤중, 얇은 붉은색 빛이 잠긴 테라스 문 사이를 조용히 갈랐다. 깔끔하게 열린 테라스에서 바람이 들자 짙게 가라앉은 연두색 눈이 느리게 뜨였다.

“……칼리안?”

소리 없이 다가오던 검은 인영이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머리 근처에서 잠들어 있는 고양이들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옮겨낸 플란츠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지 말라고 잠가둔 문을 기어코 열고… 내일 쯤 온다더니.

연분홍색 입술 한쪽 끝자락이 감정 없이 말려 올라갔다.

“내일 온다며.”

“정확히는 이따가, 아니면 내일 쯤이라고 했죠.”

“그 이따가가 새벽이었나.”

“……실감이 안 나서.”

반투명한 캐노피 너머로 보이는 그림자가 움츠러든다.

울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울고 왔는지.

혼잣말인지.

매번 지적 받고 붙이는 '요'자를 어김 없이 떼 버린 짧은 말엔 갓 젖은 듯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위에서… 소리가 안 나니까. 분명 깨셨는데. 대화도 했는데. 말한 것은 어쩜 이리 잘 지키시는지 기억 하나 없으시면서 모순도 만드시고 흑마법도 깨시고, 기억 없어졌다고 가뜩이나 없던 편견 더 없어지셨는지 예전엔 낌새만 눈치챘던 사실에 확신도 가지시고, 그러셨는데. 울지 말랬는데 운 거 들킬까 봐 도망쳤는데.”

“……”

“그런데 불현듯 눈이 떠지니까, 다 꿈이었나 싶어져서. 어디서부터 꿈이었는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칼리안.”

낮은 목소리가 횡설수설하는 미성을 끊어냈다. 헛숨을 삼킨 듯 잠시 멈췄던 숨소리가 느리게 다시 풀어졌다.

플란츠는 캐노피를 걷었다. 답답한 것을 싫어하는 성미 탓에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 가벼운 캐노피가 얼핏 가리던 모습이 선명해졌다.

붉은 눈엔 눈물이 차 있고. 눈가는 붉게 부어있고. 숨소리는 끊어지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바람 소리에 가려질 정도로 작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주먹 쥐고 간신히 곧게 서 있는 몸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울다 온 사람처럼.

하나 그 모습이 퍽 꼴사납게 보이지는 않아서.

애처롭고, 안타깝고, 안쓰럽고…… 기특해서.

“이리 와.”

담담하나 다정한 부름에 답지 않게 검은 셔츠만 입고 야심한 밤중에 쳐들어온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가득 젖어 흔들리는 붉은 눈이 단단한 신록의 눈과 마주쳤다.

떨어지는 이를 받아들었던 팔처럼, 단단하기 그지없는 고목 같은 눈.

소리 없이 들어왔던 발이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옮기자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플란츠의 무릎 위에 앉은 이가 몸을 억지로 구겨서 작게 만들었다. 빈틈없이 안긴 조금 작은 몸이 마른 품에 파고들었다.

안정적인 심장의 고동 소리가 맞댄 몸을 통해 들려오는 것을 느낀 마른 입술이 열렸다.

“…뛰어요.”

“안 뛰면 죽어.”

“밑에선 안 들렸는데.”

“내 아우님이 키리에였던가.”

“키리에는 형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요.”

키리에 정도가 아니라면 그런 소리는 못 듣는 게 정상이라는 뜻을 이해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다소 아귀가 맞지 않는 대답은 그러니 저 말고 다른 동생을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마시라는 어린 투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등을 토닥이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따스했다.

그 손길이 멎지 않도록 인지 그와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인지, 가뜩이나 붙어있던 몸을 더 꽉 붙이는 칼리안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눈을 내리감았다.

“죽은 적은 없는데 왜 계속 심장 뛰는 걸 확인하시는지.”

“저 방금 고이 키운 내 형님 저하께서 이젠 다 크셔서 동생 위로해줄 줄도 아시고 잘 크셨다 파릇파릇하게 잘 키웠다 뿌듯해하고 있었는데요. 그런 말씀 하시면 제 만족은 어디 갑니까.”

“울더니 짖네.”

칼리안의 입이 다물렸다. 자신이 거짓말을 못 한다는 사실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안 울었다고 하면 곧바로 거짓말, 이라는 짧은 말이 단호하게 일침을 둘 터였다.

하지만 울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울지 말라던 말을 못 지킨 걸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잘 했어.”

결국, 기다리다 못한 플란츠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누구에게도 세 번은 참아주고 칼리안에겐 더 참아주는, 너그럽다면 너그럽고 가차 없다면 가차 없을 플란츠는 그 자신의 기준과는 달리 인내심은 없는 편이었다.

거의 들어보지 못한, 이 상황에선 기대도 안 하고 있던 말을 들은 붉은 눈이 크게 떠졌다.

“안 죽였고. 안 돌았고. 주변 살폈고. 마지막 들었고.”

“……!”

자백한 마법사는 살아 있다. 죽였다면 아무리 경황이 없는 상황이라도 플란츠에게 다 말 하는 칼리안이 말하지 않을 리가 없으므로.

칼리안은 안 돌았다. 너무 돌아서 술에 취해서 더 돌면 제자리로 돌아올까 하는 멍청한-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더하면 마이너스 말고 또 뭐가 되겠는가- 생각 때문에 술을 끼고 살았더라는 제 상처 헤집으며 남의 상처 보듬어주는 친구 놈이 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을 다 죽이지도 않았고 -또- 제온 놈들 다 죽이겠다고 떠나지도 않았으니까.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면 발칸이 얌전히 빌헬름관에 있었을 리가 없고, 마지막에 울지 말라 했던 말을 듣지 못했다면 울었다고 도망칠 리 없으니.

“수고했어.”

자세히 말 안 해줬는데 적절히 대처하느라. 말 잘 듣느라.

걱정하느라.

순식간에 붉게 물든 눈가가 엿보였다. 와중에 껴안은 팔을 놓지는 않은 이가 그 자세 그대로 팔을 들어 가득 차오른 눈물을 닦아냈다. 울지 말랬는데 운 거 숨기려고 했으면서, 또 운다. 울보다.

캐노피를 치우고 선명해진 시야에 테라스 너머의 둥근 달이 보였다. 모든 일이 끝났다는 듯 드리우는 달빛이 밝았다.

플란츠는 안겨드는 체온을 마주 안으며 눈을 감았다.


!!!

와 진짜 3개월만에 다 썼어요 실화냐 실화냐고 다 썼을때 35000이었는데 퇴고 하니까 45000된거 실화냐고요 와 진짜!!!

이제 안 건드릴 요량입니다.(비장)

오늘 미따 생일인데 미따 언급만 나오는 글을 다 써 버렸네요 하휴휴 뭐 어쨌든 다 썼으니까! 네! 5만자 안 넘은 걸 다행으로 생각할게요와힘들었다이게이렇게길어질일인가 

스포 진짜 많이 했는데 아무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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