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라이프

나비반지 - 특별외전

나비, 그리고...

※ 주의사항

‘나비반지’ 회지 버젼을 만들 당시에 한번 넣어볼까? 하고 적었던 후일담 느낌의 외전 내용입니다. (아쉽게도 회지에는 분량 문제와 글 분위기 문제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럴 수도 있지, 느낌의 IF 외전으로 봐 주세요. 작중에서 평행세계를 생각하며 작성했기 때문에 무조건 그 이후에는 이럴 거야! 라고 고정되어 있는 생각이 아니라 이럴 수도 있지, 하고 보는 편이 느낌이 좋습니다.

염원을 이루는 14지부 이야기 망상

저는 모든 카드/이벤트 스토리를 다 읽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캐붕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보고싶은 부분만 막 썼습니다. 두서없음 주의하세요.

소재 특성상 애들 과거카드 전부다 스포있구요. 그밖에 각종 스포 있을 수 있습니다. 스포해도 상관없지 않나 섭종인데.

진하게 설정날조 있습니다. 섭종 직전까지 나온 모든 공식정보를 막 비벼서 만든 거라... 제가 공식이 납득이 안 가더라도 공식 설정이면 감안해서 최대한 핍진성을 만들어 썼습니다. (ex: 매니저가 사신지부 떠남 등)

좀 터무니없을 수 있습니다. 반쯤 망상이에요.

 

--

 

10월의 어느 날씨 좋은 저녁, 인간계의 어느 도시.

“다녀왔습니다.” 자주색 머리의 한 청년이 아담한 집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왔어, 노아?” 그에게 대답해주는 사람은 그보다 조금 더 키 크고 짙은 흑발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편히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막 돌아온 동거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네, 다녀왔어요, 유세프 씨.” 노아의 말에 유세프가 피식 웃었다. 현관에 다다른 그가 노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툭툭 쳤다. “매번 말하지만 그렇게 딱딱하게 안 해도 괜찮다니까, 노아. 형이라고 해도 돼.”

그러자 노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은인한테 어떻게 그래요. 유세프 씨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뒷골목에서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이전에 너도 내 생명의 은인- 어이구, 알았어.” 노아의 표정을 본 유세프는 말을 하다 말고 웃었다.

“그나저나 마일로 씨는요?” 유세프가 큭큭, 하고 웃을 동안 노아의 연두색 눈동자가 집안을 훑어보았다. 동거인은 아니지만 거의 같은 집에서 살다시피 하는 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 유세프가 조곤조곤 대답한다. “마일로라면, 편집부에 일이 있어서. 그리고 나는 한가해졌고.” “마감 끝나셨어요?” “응. 아까.”

 

현재 유세프의 직업은 전업 작가였다. 5년 전 변호사로 일하다 자기 직장과 의뢰자들에 대해 신랄한 고발 소설을 써냈던 그는, 다사다난한 공방과 사건들 끝에 유명 인사가 되어 현재는 변호사를 그만두고 글만으로 먹고 살게 되었다. 변호사 시절보다 조금 빠듯하긴 해도 먹고 살기에 별로 지장 없었고, 이 일은 양심에도 찔리지 않아서 유세프는 만족했다.

한편, 노아는 같은 시간 동안 순조롭게 진급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마을에서 유명한 경찰이 되어 있었다. 종종 야근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 휴일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유세프 옆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건 만약 유세프를 노리는 적이 남아있다면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고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다. 경호원을 그만두게 된 지금에 와서도 남아 있는 그의 민감한 버릇이었다.

“그나저나 내일 비번이라고 했죠, 노아 경장님?”

그런 노아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직함으로 장난스럽게 부른 유세프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겉옷 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냈다.

“아하하, 웬 티켓이에요?”

노아가 작은 미소를 짓자, 유세프가 설명했다.

“아, 이거? 피아노 연주회 티켓이야. 여동생한테 받았어. 이 기간 동안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공연이 이어지는데, 그 동안 쓸 수 있대. 같이 갈 거지? 마일로는 요즘 내 책이 잘 팔리는 통에 바빠서 못 간다고 했단 말이야.”

그 말에 노아는 티켓을 받아들어 한 번 더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일 가요.”

이에 유세프는 해맑게 웃었다.

 

*

 

다음 날 점심 무렵, 두 사람은 간만에 생긴 여유를 만끽했다. 그들은 정말로 공연을 기대 중이었다. “...앗.” 유세프가 눈을 치켜떴다. 그들이 공연이 열리는 아트홀의 로비에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왜 그래요, 유세프 씨?” 노아가 물었다.

“저기를 좀 봐.” 그에 유세프가 복도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사람들 사이로 하얀 머리를 야구 모자 안에 꾹 감춘 청년이 안절부절 못하고 바닥을 살피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그에게 향했다.

“저기, 무슨 일이신가요?” 유세프가 말을 걸어보자 짙푸른 눈동자가 둘을 향했다. 그는 까만 마스크를 턱에 걸쳐 쓰고 있었는데,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입을 우물거리다 겨우 말했다.

“...소중한 걸 잃어버려서요. 분명 이쪽으로 지나왔으니 이쪽 어딘가에 떨어뜨렸을 텐데...” “아. 그러면,” 이야기를 들은 노아가 나섰다. “도와드릴게요. 어떻게 생긴 물건이죠?”

상대방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네?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폐를...”

이에 노아가 담담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저는 경찰이거든요. 경찰은 시민을 도와야죠. 오늘은 휴일이지만.”

“저도 돕죠.” 유세프가 노아 옆에서 진지하게 말을 받아주었다. “전 경찰이 아니지만 일행을 혼자 일하게 둘 순 없으니.”

상대는 음, 하고 난감해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염치없지만 그럼 부탁드립니다. 사진이 들어가 있는 은색 로켓 펜던트에요. 목걸이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이제 보니 그의 손에 가는 줄이 들려 있었다. 아마 그 펜던트를 걸고 있던 줄이겠지.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제 세 사람이 된 그들은 분실물 찾기를 시작했다.

 

“...찾았다.”

이윽고 유세프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자판기들 사이 틈새에 들어갔다 나온 그의 손에 은색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떨어뜨린 뒤에 다른 사람들 발에 치였었나 봐요. 이거 맞아요?”

팬던트를 보자 상대의 울상이던 얼굴에 한 떨기 꽃 같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가 유세프에게서 펜던트를 받아들던 순간, 저 멀리에서 민트 색 머리에 구릿빛 피부, 큰 키와 덩치가 특징인 남성이 나타나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인나인! 어디 있어-! 옷 갈아입어야 돼-!”

“알았어-!”

하얀 머리칼을 가진 남성은 그 쪽을 바라보고 마주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유세프 일행 쪽을 보았다.

“감사했습니다. 그럼.”

그는 팬던트를 손에 꼭 들고 그 손을 가슴에 붙인 채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두 남자는 유세프의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럼 가 볼까?”

“좋아요.”

공연 시작 전까지 시간은 아직 넉넉했지만 조금 여유를 두고 싶었던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은 뒤 관객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공연은 즐거웠다. 무대 위로 여러 피아니스트가 나왔다가 각자의 아름다운 선율을 자랑하고 퇴장했다. 그렇게 몇 사람이 더 지나갔을까, 사회자가 무대 위에 나와서 다음 피아니스트를 소개했다. “오늘의 마지막 무대로는 어렵게 모신 샛별 같은 피아니스트, 나인 씨의 무대 보시겠습니다!”

“...어?” “앗.”

노아와 유세프는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 무대 위로 올라온 사람은 그들이 아까 만났던 그 청년이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고 옷도 세련된 양복으로 바뀌었지만, 특이하게 잘린 앞머리와 반짝이는 눈 색깔 덕분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나인이라는 이름. 분명 아까 남에게 불린 별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름이었다.

“신기한 우연이네요.” 노아가 유세프에게 소곤거렸다.

“하하, 그러게...” 유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그들은 나인이라고 불린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곡을 감상했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들려오는 아름다운 선율은 그야말로...

“연주자가 진짜 즐거워 보이는데요.” 노아가 살짝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유세프가 대답했다.

 

*

 

나인, 올해 23세, 직업은 피아니스트.

뛰어난 실력과 아름다운 외모로 프로 무대 데뷔와 동시에 매체들을 휘어잡은 그에게는 세 개의 별명이 있었다. 하나는 팬들이 붙인 '청초한 달빛.' 두 번째는 매체들이 부르는 별칭 '떠오르는 샛별'. 하지만 나인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세 번째 별명, '나인나인'을 제일 좋아했다.

“나인나인!”

연주를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온 나인을 키 큰 매니저가 웃으며 반겼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푸른 꽃으로 된 커다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나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나인이 볼을 부풀렸다.

“데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내 단독 연주회도 아니잖아.”

그러자 데이가 미소지었다.

“그렇지만 오늘 연주도 잘 들었는걸.” “가끔 너는 너무 오버하는 거 같아.” 나인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상대가 데이라서 나올 수 있는 표정이었다. 데이는 그가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같이 지낸 절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그는 나인이 믿고 의지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까는 무슨 일이었엉? 표정이 안 좋던데.” “그게.”

데이의 질문에 나인이 곧장 대답했다.

“엄마 사진을 잃어버려서... 그래도 좋은 분들이 찾는 걸 도와줬어. 정말로 다행이야.”

그 말에 데이는 활짝 웃었다.

“응, 다행이당.”

 

*

 

그 이후 다시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끼고 연주회 장소 밖으로 나오던 나인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던 누군가와 부딪쳤다.

“앗.”

“나인나인!!”

그래도 부딪친 상대가 잡아 준 덕분에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서로 각자 안고 있던 꽃다발과 파일 철만을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괜찮으세요?” 상대방의 물음에 나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 연갈색 머리와 하늘색 눈을 가진 청년이 보였다. “아, 네...” 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대는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급해서 그만.” “아뇨, 괜찮...” “테오!!”

그때 갑자기 난입한, 데이만큼 큰 목소리에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후드티의 모자를 푹 눌러쓴 주황색 머리 청년이었다.

“괜찮습니까?! 테오, 그리고 다른 여러분들?!”

테오라고 불린 청년은 다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준, 목소리가 너무 커. 또 다른 사람을 놀래게 만들 뻔했잖아.” “죄송합니다!”

씩씩하게 사과하는 목소리에, 데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와, 혹시 준이에요?” “준? 그게 누군데?” 나인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데이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설명했다.

“아, 나인. 지난번에 삼촌이랑 사엘 형이랑 영화를 보러 갔는데, 거기 나오는 주인공 배우였어!”

“잠깐만요. 그쪽이 나인이라고요?”

데이의 말을 듣던 테오가 놀라서 움찔하더니 물었다. “혹시 그... 피아니스트 나인이요?” “...” 나인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켰으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네에.”

“우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잠시 감탄하던 테오가 입을 열었다. “저는 테오에요. 이쪽은 신인 액션 배우 준 맞고요.” “그리고 테오는 제 친구이기도 합니다! 몇 년 안에 제 정식 매니저가 되어 주겠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죠!” 준이 쾌활하게 끼어들었다.

“아... 그러시구나.” 나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 그런데, 죄송하지만 혹시 공연 보러 오신 거면... 오늘 공연 일정은 끝났는데요.” 그러자 테오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저는 따로 다른 일 때문에 아트홀 직원 분들과 이야기 좀 하러 온 거라.” “그러시구나.” “그나저나 나인 씨가 연주하신 곡마다 잘 듣고 있어요. 저도 취미가 피아노라 가끔 따라 쳐보기도 하는데... 그렇게 감정이 살아있고 부드럽게 치는 건 어렵더라고요. 저는 어려서부터 각 잡고 칠 줄만 알아서...”

“아하하.”

나인은 테오의 손을 바라보았다. 길고 잘 뻗은 하얀 손가락들. 그러나 나인처럼 오랫동안 악기를 연주한 것 같진 않았다. 취미 정도일까? 나인은 그동안 보았던 사람들을 토대로 그의 연주 경력을 대강 짐작해 보았다.

“아, 나도 액션 영화 좋아행! 나인나인은 시끄러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같이는 못 가는데... 사엘 형이랑 같이 보고 나와서 감상 이야기하는 게 제일 좋아서요.”

“그렇습니까? 이번에 신작 들어가는데, 완성되면 꼭 보러 오십-” “준!”

한편 준과 데이는 언제 친해졌는지 이미 재미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데이는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쓰고 있었고, 준은 신나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될 대외비 사항까지 말하려다 테오에게 저지당했다.

“촬영 일정은 외부인한테는 비밀이잖아! 그걸 말하면 어떡해!” “아...!”

“푸핫-.”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인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정말 사이좋으시네요, 다들.”

“하하하...”

테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저희가, 특히 준이 여기 있는 건 비밀입니다. 영화 한 편 찍었는데 벌써부터 팬이 많이 생겨서 큰일이거든요.”

“저희도... 제가 여기 있는 건 비밀로 해 주세요. 이유는 똑같아요.”

“아, 그럼요.”

두 사람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제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준. 이제 들어가야 해. 약속 시간에 늦겠다.” “데이. 우리도 빨리 안 돌아가면 선생님한테 혼나서 저녁을 늦게 먹게 될 거야.” “아! 네!” “알았엉!”

서로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친해진 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채, 그들은 떨어뜨린 물건들을 줍고는 엇갈려 헤어졌다.

 

*

 

테오와 준은 아트홀 안쪽으로 서둘러서 걸음을 옮겼다. 슬슬 약속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군요.” “네.”

신분증과 얼굴을 대조한 뒤 두 사람은 아트홀에서도 관계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바이어와 미팅을 가졌다. 준과 테오는 나란히 앉아 바이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번에 준 씨가 들어가는 영화랑 미술 작가들이랑 콜라보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잖아요? 주제는 반짝이는 열정.”

“그렇습니다. 피가 끓는 싸움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남들을 밝고 명랑하게 대할 수 있는 힘의 근원도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준은 진지하게 바이어의 말에 응했다.

테오는 그 옆에서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정식 매니저는 아니었지만 준의 최측근이었기에 이 자리에 같이 있을 수 있었던 그는, 주위 사람들이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어쩌면 어린 시절 겪어 왔던 억압의 틀에 대한 반발심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몰라, 테오는 종종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 보곤 했다.

“그런데, 테오 군이라고 했죠.”

바이어가 갑자기 테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앞선 상념에 깊게 잠겨 있던 테오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이거 기획을 먼저 의뢰한 사람이 테오 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낸 거죠?” 그 질문에 테오가 웃었다. “저는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는 걸 좋아해서요.” “호오?” “상대가 빛날 수 있다면, 저는 그런 목표를 위해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 대답에 준이 웃으며 테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건 맞지만 그러다가 한 가지에 꽂히면 파죽지세로 그것만 골똘히 생각하다가 끙끙 앓기도 하지 않습니까? 테오는 아직은 여유를 갖는 법을 더 배워야 합니다.” “준...!”

테오가 바이어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하하하!!!” 다행히 바이어는 둘의 행동을 보고 크게 웃었다. “마음에 듭니다. 당신들의 눈에서부터 그런 열정이 보이는군요. 아주 좋아요.”

 

*

 

미팅은 순탄하게 끝났다. 테오와 준은 웃으면서 아트홀에서 나와 골목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준이 물었다. “테오, 저녁은 무엇을 먹겠습니까?”

“글쎄다... 분식집 가서 매운 라면?” 테오가 파일 철을 꼭 끌어안으면서 말하자, 준이 씩 웃었다. “테오, 오늘은 테오가 먹고 싶은 거 먹어도 됩니다. 저번에는 제가 먹고 싶은 걸 먹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테오가 준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나 생각해주는 건 고마워 준. 그런데 나 진짜 오늘은 매운 거 먹고 싶어. 신기하게 갑자기 확 당기네.” 그러자 준은 더 크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간만에 그 분식집으로 가죠!”

 

*

 

두 사람은 그들이 자주 찾는 단골 분식집으로 향했다. 유명한 맛집이라 벽 곳곳에는 다양한 연예인들의 싸인들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고, 그 사이사이로 손님들의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는 아담한 가게였다. 그들은 익숙하게 늘 앉던 구석 자리에 앉으려고 했으나... 오늘은 그 자리에 선객이 있었다.

“어? 준? 테오?”

그리고 그 선객은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테오와 준도 마찬가지였다.

“아...” “리히트 형님?”

리히트, 올해 26세. 직업은 배우. 주로 드라마로 경력을 채워나가던 그가 첫 도전한 영화는 마침 준도 참여한 영화였다. 그걸 계기로 준과 리히트는 꽤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테오는 준을 통해 그를 알게 되었다. 분식을 좋아하는 리히트는 종종 촬영장에서도 분식을 시켜 먹곤 했고, 자기랑 일하는 스태프들과 같이 먹기에도 양이 많다면서 준과 테오에게도 나누어주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온 지 얼마 안 된 건지 리히트의 앞에는 아직 몇 점 먹지 않은 순대 접시가 놓여 있었다. 리히트는 밝은 얼굴로 물었다. “웬일이래, 너희를 여기서 다 보네. 영화 끝나고는 처음인데? 저녁 먹으러 왔어?” “네.” 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동생들 본 김에 내가 쏴야지. 순한 맛 닭 꼬치랑 떡볶이랑 매운 라면이지?” 리히트는 두 사람의 입맛을 잘 알았다. “네.” 테오가 대답하기 무섭게 리히트는 몸을 휙 틀어 분식집 주인인 나이 든 아주머니를 향했다. “여기 닭 꼬치 순한 맛이랑 떡볶이랑 라면 둘 다 매운 맛이요!”

 

이윽고 음식이 나오고, 그들은 한 테이블에 앉아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

“조부모님들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응.” 준의 물음에 리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오는 영화가 액션 영화잖아? 그런데 손자가 찍은 첫 작품이라고 화면이 현란해서 어지럽다 하시면서도 여러 번 보셔가지고... 말리느라 혼났다니까.” “하하하.”

준이 라면을 먹다 말고 크게 웃었다. 테오는 그 옆에서 턱을 괴고 떡볶이 떡을 씹으며 둘의 대화를 진지하고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여튼, 어쨌든 다행이야. 그런데 영화가 무사히 개봉한 건 이번에 무슨... 어느 회사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큰 회사에서 투자해 준 덕분이 크다고 하더라고. 그 회사 CEO분도 몇 번 잠시 촬영 현장에 다녀가셨던데, 자기가 투자한 영화가 잘 되나 보겠다고 왔다나. 나도 먼발치에서 봤는데.”

“그 사람 어떻게 생겼습니까?” “연갈색 머리에 파란 눈, 어...” 준의 질문에 대답하던 리히트가 뭔가 생각난 듯 테오를 가리켰다. “그래, 딱 테오같이 생겼어. 차가워 보이는데 웃으면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 무슨 느낌이냐면, 조금 나이 든 여자 테오라고 하면 될 거 같더라.”

“예?” 그 말에 테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오? 짐작 가는 사람 있습니까?” “나랑 그렇게 닮은 나이든 여자라면... 우리 어머니 말고는 없잖아, 준.” 테오의 말에 두 사람이 숨을 들이켰다.

“어?” “진짜네. 생각해 보니 혈연이 아닌데 그렇게 닮았을 리가.” 리히트는 갑자기 목이 칼칼해졌는지 라면 국물을 한 모금 숟가락으로 떠먹고는 말했다. “...너희 어머니랑 사이가 안 좋다고 하지 않았어?” “정확히는 과거에 저를 방임한 문제로 좀 사이가 그렇긴 하죠.” 테오는 떡볶이 떡을 한 개 더 집어 먹고 눈을 접시로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는 왜 한 번도 못 봤을까요?”

이에 잠시 생각하던 준이 입을 열었다. “음... 미안한 거 아니겠습니까?” “응?” “다 큰 자식한테 과거에 그런 상처를 줬는데 지금 와서 해 줄 수 있는 게 그런 도움뿐이면, 마주치면 서로 어색해지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네.”

리히트는 테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굉장히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니다. 아무것도 아냐.” “...”

준과 테오는 그의 가족 사정은 몰랐지만,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지부장은 아직도 그래?” “아니, 일이 있으면...”

그때, 옆 테이블이 소란스러워졌다. 조용히 있던 만큼 그걸 잘 들은 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대략 겉보기엔 청소년 정도로 보이는 두 사람과 그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사람이 사이좋게 분식을 먹고 있었다. 거의 다 먹은 듯 그들의 접시는 꽤 비어 있었다. 금발머리 소년이 으음, 하고 어색한 음성을 뱉었다.

“잠깐 이 인간 세상에서 떡볶이 정도는 먹고 올 수 있는 거잖아. 밥은 먹고 간다고 그래. 여기 오느라고 니들이 일처리를 얼마나 많이 해야 했는데.”

그러자 핫 핑크색 단발머리 한 쪽을 땋아 내린 소년이 저렇게 내뱉고는 제 앞에 놓인 라면을 후루룩 면치기하며 먹었다. 준과 테오, 리히트가 앉은 자리까지 매운 냄새가 확 퍼졌다.

“아, 알겠어요, 퀸시 님.” “엘은 조금 더 대담해져도 됩니다. 후후후...” 검고 긴 머리를 뒤로 느슨하게 묶은 미청년이 말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저 세 사람처럼 말입니다.” “으악, 죄송합니다.” 그 말에 테오는 그들이 자신들의 시선을 눈치 챘음을 깨닫고 냉큼 사과했다. “쯧쯧.” 퀸시가 조그맣게 혀를 찼다.

“기이 님, 어떻게 아셨어요?” 엘이 묻자, 기이가 대답했다. “후후, 수천 년 정도 살면 저런 시선 감별에는 익숙해집니다.” “수천 년...?” 세 사람이 의아해하자 엘이 둘러대듯 말했다. “아, 저희는 연극 준비하고 있거든요, 엣취!!”

“오, 연기 하십니까? 여기도 연기 합니다!” 준이 신나서 말했다. “준!” 테오가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하하, 단역에 단발성 공연이지만요, 엣취!! 지금 기이 님이 배역에 너무 몰두하시고 계셔서 그런 말을 했나 봐요, 엣취!!” 엘은 테오의 반응의 이유를 눈치 채지 못하고 어색하게 둘러댔다. 자꾸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테오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걸 눈치 챈 엘은 “그러면 저희는 다 먹었으니 이만, 좋은 식사 되세요!” 하고 곧장 벌떡 일어나서 퀸시와 기이에게 눈짓했다. 둘 역시 그의 의도를 눈치 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마자 엘은 분식집 아주머니에게 식사 값을 계산했다. 순식간에 그들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리히트가 급하게 일어나 기이의 팔을 붙잡았다.

“저, 저기!” “네?” “저희 어디서 봤나요? 왜 이렇게 익숙하지?” 리히트는 말하면서도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저 사람들도 연기 쪽 일 한다잖아요. 같은 촬영장에서 엑스트라라도 했던 거 아닐까요?” 테오가 말했다. 그러나 리히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아냐... 나 엑스트라 분들하고도 꽤 친한데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는걸.”

“후후.”

기이는 웃으면서 그대로 리히트의 손에서 팔을 쑥 뺐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습니다, 리히트 배우님.”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과 함께 일행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

리히트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휴아, 거기 그 분들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분식집에서 황급히 나와 몇 블록 걸어가며 엘은 겨우 참았던 숨을 뱉었다.

“그러게. 잘 지내는 거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퀸시는 입가를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

기이는 씁쓸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기이, 그런 식으로 말해놓고 내심 신경 쓰이냐?” 퀸시가 물었다.

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아직도 리의 감은 날카롭더군요. 하마터면 리, 하고 예전처럼 부를 뻔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인간계에 임무 이상으로 간섭할 수 없는데...”

“에이, 오늘은 우연이니까 봐 주겠지.”

퀸시가 장난삼아 엘의 어깨를 한번 끌어안았다가 물러났다.

“조금 더 인간계에 있다가 가지 그래? 간만에 휴가 갔다 오라고 매니저도 허락해 준 건데 이런 불상사로 그냥 돌아가긴 아깝잖아.” “아하하...” “후후, 그게 좋겠군요.”

셋은 천천히 걸음을 이어나갔다.

 

*

 

“...이상하다.”

한편, 분식집에서는 리히트가 기시감에 그대로 굳은 듯 서서 미간을 찌푸린 걸 유지하고 있었다.

“분명 어디에선가 봤는데. 왜 기억이 없는 거지.”

“리히트 형.”

보다 못한 테오가 그의 외투를 잡아끌어서 그를 도로 앉혔다.

“그럼 일단 먹던 거를 마저 먹으면서 생각해 봐요. 원래 배고프면 별별 생각이 다 드는 법이거든요.”

확실히 그들의 접시는 아직 반도 비지 못했다. 리히트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신경 쓰이는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아트홀에서 열리는 콜라보, 리히트 형님도 참가하십니까?” 준이 적절한 질문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준, 이번에 촬영 들어가는 영화에 나올 배우만 콜라보 대상 아니야?” 테오는 물어보면서도 그도 궁금한지 리히트를 바라보았다. “무슨 영화?” 리히트가 묻자, 준이 즉각 대답했다.

“요새 제일 핫한 작가가 쓴 글을 원작으로 하는 거 말입니다. 범죄를 진지하게 파헤치는 경찰을 다룬 액션물이던데요.” “아, 유세프 작가 원작 말이지? 그거라면 나도 대본 받았어.”

리히트는 겨우 기이에 대한 상념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그거 원작이 나름 재밌던데. 시리어스한 게 취향이라면 재밌을 거 같더라. 안 그래? 대본 받고 읽어 봤어? 아, 그리고 그 내용이 작가의 전작인 침묵의 시대하고도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던데. 테오 너는 매니저 지망이니까 너도 다 읽어 봤지? 그치?” “네...” 대답하던 테오의 입이 뚝 멈췄다. “테오?” 리히트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떨궜다. “이상하다, 저, 예전에, 그러니까 지금 신작 대본 말고... 그 전작이라는 책 ‘침묵의 시대’를 읽은 기억은 있는데 대체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마치 안개 어딘가에 서 있는 것처럼 기억이 그 부분만 흐려요.” “이제 내 기분 이해하겠어?” 그 말에 리히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직감은 그런 적 있다 말하는데 언제인지 기억 안 나는 거. 굉장히 기분이 기묘하단 말이지...”

이에 잠시 그들을 보고 있던 준이 입을 열었다.

“둘 다 굉장한 기시감입니다!”

 

*

 

한편, 그 기시감들 중 일부를 만든 장본인인 기이는 여전히 엘, 퀸시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도서관이라도 들러볼까요?”

지나가다 이 방향으로 계속 가면 시립 도서관이라고 적혀 있는 팻말을 발견한 기이가 손짓했다.

“여기까지 와서 도서관?” 퀸시가 툴툴댔다.

“아까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마주하고 나니, 궁금해진 게 좀 있어서 말입니다. 어쩌면 다른 분들에 대한 이야기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

엘이 재밌겠다는 듯 작게 박수를 쳤다.

“그러게요. 저도 궁금하긴 해요.” “쳇. 이번만이다.”

퀸시는 한숨을 푹 쉰 뒤 동의했다.

그래서 셋의 다음 목적지는 도서관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설마 그렇게 향한 도서관에서 또 다른 익숙한 인물들을 마주칠 줄은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서자마자 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거 시안 님 아니에요? 머리를 검게 염색하긴 했지만...” “쉿!”

엘이 놀라서 말하자 퀸시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열람실 한쪽에 있는 체구가 작은 남자는 얼굴을 가리려고 마스크와 모자를 푹 쓰고 있었지만 셋에게는 너무 익숙함을 숨길 수 없었다. 붉은 색조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책과 노트를 번갈아 보다 이따금씩 노트에 메모하고 있는 남자는 분명 시안이었다.

“너 쟤 염원을 잊었어?”

“아이돌... 아!”

“그래, 소란 일으켜서 쟤한테 좋을 게 없어. 쟤도 어차피 우릴 기억도 못 할 텐데.” “후후후.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몰래 공부라도 하고 있나 봅니다. 시안답지 않게 집중 중이군요.”

기이가 웃으면서 시안이 읽고 있는 책 표지를 가리켰다. [쉽게 배우는 시적 표현] 이라고 적힌 표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책은 [쉽게 배우는 물리학], 그 옆에는 [쉽게 배우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용어]... 시안은 그 책들을 독파하는 데 상당히 노력 중이어서 주위가 소란스러운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무래도 우리, 비켜 줘야겠지?” “네에...”

그들은 슬슬 멀리 있는 역사 책 섹션으로 이동했다.

“...?”

시안은 이쯤 되어서야 이상함을 눈치 채고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셋은 떠난 뒤였다.

 

*

 

세 사람 대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다른 사람이 시안 앞자리로 다가왔다. 녹색 기가 도는 흑발에 두꺼운 안경을 낀 게 특징인 이 청년은 두꺼운 상대성이론 책 몇 권을 들고 가다 무거워서 잠시 쉬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팔을 흔들며 털었다. 마침 아직 고개를 들고 있던 시안의 시선에 그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풀면 팔 다쳐요. 제대로 정성 들여 스트레칭 해야지.”

무의식적으로 툭 던진 한 마디에 그 청년이 시안을 바라보았다. 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아는 체를 해 버린 제 불찰에 아차,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런데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안경 렌즈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뜬 청년은 이내 시안에게 몸을 푹 숙였다.

“시안 님 아니에요? 4년 전에 [스타 재발굴: 다시 보자 원석이 있는지 2]에 나왔던.”

“아앗.”

완벽하게 들켰음에 시안은 마스크 뒤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네... 저 맞아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시릴 애커먼이라고 합니다.”

청년, 시릴은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봤어요, 그때 1등 하셨던 분이잖아요. 노래 완전 좋던데. 그리고 그 때 계신 그룹 옛날 곡도 찾아봤었는데 그 전에도...” “아, 네. 감사합니다.” 시안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설마 자신의 4년 전, 거의 무명이던 시절을 아는 사람과 만날 거라고는 그도 예상 못 한 탓이었다.

그때, 시릴이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에서 시안이 속한 그룹의 최신 곡 MR이 흘러나왔다. 시릴은 주위를 둘러보고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목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시릴, 언제 와?”

시릴은 장소가 장소인지라 주위 눈치를 보며 워치에 대고 소곤거렸다.

“야, 네가 동생인데 이름 막 부를래, 시안 애커먼? 지금 도서관이니까 금방 갈 거야. 끊어.” “히잉, 알았어-.”

그리고 시릴이 통화를 끊고 시안을 바라보았을 때, 시안은 통화 내용을 듣고 벙 쪄 있었다. “지금...?”

시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급히 손을 내저으며 얼버무렸다. “아, 제 동생 이름도 시안이라서요. 얘가 태어날 당시에 병원 텔레비전에서 그 프로가 한창 나오고 있었죠.” “아... 그러시구나...”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신기한 우연이네요.” “그러게요.”

시릴은 시안과 마주 웃다가, 문득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무리 텔레비전과 매체에서 봐서 시릴이 시안을 안다지만 시안에게 시릴은 그저 타인, 수많은 팬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이렇게 우리 대화가 자연스러운 거죠?”

시릴이 분석하기에 지금 그들의 대화는 기이했다. 보통 정체를 숨긴 연예인과 그의 팬일 뿐인 일반인이 할 수 있는 대화라기엔... 분위기가 너무나도 편안했다. 마치 서로를 까발리거나 상처 줄 리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끼리의 대화 같았다. 분명 서로 직접 대면하는 건 초면일 텐데.

“음... 싸인 해 드릴까요?”

그건 시안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여분 종이가 없는데. 책 반납하고 새로 빌리러 온 거라서...”

시릴이 얼버무리자, 시안이 책상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그럼 제 노트 찢으면 되죠.”

하지만, 시안이 노트로 손을 뻗자마자 시릴이 그 손목을 잡았다. “아뇨, 안 돼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노트 찢으면 안 되죠.” 시릴은 다른 손으로 시안이 필기하던 페이지들을 가리켰다.

“정리가 서투르고 생각나는 대로 필기한 거 보니까 공부 방법에는 소질이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열심히 많이 쓸 정도면, 진짜 열심히 했단 소리잖아요? 안 그래요?” “어... 이번에 마음을 이공계 용어에 비유한 가사를 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심화 버전을 쓰려니까 어려워서 쉬운 거부터 읽고 있었죠.”

말하면서 시안이 미간을 구겼다. “아, 그러면 제가 도와 드릴까요?” 그 모습을 보던 시릴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온 건, 그도 모르는 새였다.

“어...?”

불안한 눈으로 보는 시안을 보고, 시릴은 잠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이내 자각하고 깜짝 놀라 입을 헤벌렸다가,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놓으면서 급하게 말했다.

“아, 아뇨. 악용이나 문제를 일으키려는 게 아니라. 저 이공계 전공이라서. 네. 어, 문학적으로는 서툴지만 용어 해설 같은 건 자신 있어요. 네. 정 보수가 신경 쓰이시면 햄버거 하나 사 주시는 정도면... 아, 이것도 이상한가...”

쩔쩔매는 그의 모습에,

“아니, 아니, 저도 놀라서 그랬어요. 저도 해 끼치려는 의도 없었으니까 진정해요. 시릴 씨.”

도리어 시안이 그를 달래야 했다.

“시...”

그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 까지 밖에 말하지 않은 바람에 시릴과 시안이 동시에 목소리 주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시안 쪽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시안의 매니저였으니까. 시, 까지만 부른 건 공공장소에서 시안을 부르면 다들 돌아볼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는 사람이냐? 시안?” 열람실을 나서는 몇 명의 고등학생들과 엇갈려 들어온 매니저는 자기 연예인을 지키기 위해 시안 옆에 서서 시릴을 바라보았다.

“아, 지나가던 팬이었습니다.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안 말할게요. 대화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시릴은 냉큼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책상에 놓아두었던 책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매니저는 의아한 눈으로 시릴을 보고 다시 시안을 보았다. “혹시 저 사람이 이상한 짓 하진 않았어?” “아니. 잠시만요!”

시안은 급하게 대답하고는 바삐 움직여 시릴의 팔을 붙잡았다.

“그... 연락처 주시고 가야 다음에 용어 해설을 해 주시는 게 가능하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네...?”

시릴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거 진짜 해요?”

“저, 이렇게 배려심 있는 팬은 처음 봐서요.”

시안이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시감 느껴지는 팬도 처음 보네요. 그걸 알아낼 때까지라도 옆에 있어 주지 않겠어요?” “아, 네... 시안 씨가 괜찮다고 한다면, 요.” “당연히 괜찮죠. 나중에 약속대로 햄버거랑, 싸인 앨범도 드릴게요.” 그렇게 시릴과 시안은 서로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친해진 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채 서로 친근한 대화를 주고받았고, “...?” 매니저는 둘 사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괜찮아요, 매니저 형. 여기서 잠시 기다려요. 책 좀 빌려 올게.”

시안이 웃었다.

 

*

 

“...”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과 같은 도서관 같은 열람실에서 베린이 미간을 살짝 구긴 채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같이 대학 입시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던 진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은 먼저 떠나고, 베린만이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혼자 남아 있었다. 컨디션 조절 문제로 항상 어머니와 같이 집에 가는 게 습관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슬쩍 시계를 바라보니, 도서관이 문 닫을 시간이었다. “음.”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나오라는 전화가 오지 않는 걸 보니 평소보다 어머니의 직장 일이 늦게 끝나는 듯해서 밖에서 기다려야 할 모양이었다.

그는 문제집들을 덮어서 가방에 집어넣고, 옆에 미리 챙겨 두었던 식물도감을 빌리기 위해 따로 챙겨들었다.

 

“대출이요.” “네.”

그가 도감을 빌리고 있는데, “대출이요.” 검은 머리를 가진 두 사람이 창구로 다가왔다. 아마 이 사람들도 책을 정리하고 슬슬 떠날 모양이었다. 베린은 이에 관심 없어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흘끗 그들을 바라보았다.

“콜록, 이상하다...”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모르는 사람들인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과거 학교의 동창들을 오랜만에 다시 본 느낌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내가 저런 대학생들하고 만났을 시간이 어디 있어.”

베린은 책이 든 가방을 짊어지고 그대로 열람실 밖으로 나갔다. 밖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윽.” 베린은 벤치에 앉아서 몸을 움츠렸다. 아직 계절은 가을이었으나 가을바람도 그에게는 제법 찼다. 조용히 귀에 이어폰을 끼웠다. 이윽고 강렬한 록 음악이 그의 고막을 즐겁게 때렸다.

잠시 그러고 있다 보니 아까 창구에서 본 두 흑발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예 함께 온 일행은 아니었던 듯 그들은 서로 헤어져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마스크를 벗었다.

“...앗.”

베린은 그제야 그 남자가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아이돌보다는 록 음악에 관심이 더 많은 그여도, 요즘 매번 텔레비전에 나오고 버스 정류장에 광고가 붙어 있는 유명한 아이돌은 팬이 아니더라도 뇌리에 기본 상식으로 자리 잡는 인물이었다. 옆얼굴만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저 사람, 시안이네...?”

시안은 그대로 봉고차에 올라 매니저와 함께 사라졌다. 베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연예인이랑 아이돌도 도서관에 오는구나... 신기하다.”

그때 이어폰을 타고 흐르던 록 음악이 끊기고 전화벨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베린은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 나와 있니? 미안하구나. 오늘은 조금 늦어서 벌써 도서관 문 닫는 시간이 되어 버렸어.]

“난 괜찮아. 천천히 오세요.”

[그래.]

 

통화를 끊고 난 뒤 베린은 잠시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에 띄는 폰 배경화면은 록페스티벌에 진과 같이 갔을 때 같이 찍은, 손목에 거는 입장 띠를 찍은 사진이었다. 두 개의 손목이 나란히 엇갈린 모습은 친한 친구니까 찍을 수 있는 사진이었다.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린 베린이 피식 웃었다. “히히... 또 가고 싶다. 입시 끝나면 또 같이 가보자고 해야지.”

그러던 중,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익숙한 화제를 입에 올렸다. “퀸시님, 그래서 저번에 록페스티벌 가신 거였어요?” “물론이지. 약속은 지켜야지 않겠어?” “후후후. 그때 결국 같이 끝까지 다 보고 나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세 사람이 지나가면서 록페스티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운데에서 걷고 있는 핫 핑크색 머리는 지난번에 그가 넘어질 뻔했을 때 잡아준 사람이었다. 마침 록페스티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서 바로 기억이 났다.

“...신기한 우연이네.”

베린이 중얼거렸다. 그는 그를 스쳐 지나간 그 사람들을 계속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베린-!”

그러나 이윽고 들려오는 익숙한 부르는 목소리에 결국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지만.

“앗, 엄마.”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걸어갈 때, 이번에는 상대 쪽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신경 쓰이십니까, 퀸시?”

“아냐, 아무것도. 이제 슬슬 돌아갈까. 포탈 열게 눈에 안 띄는 구석진 데 찾아봐.”

 

*

 

“오늘 학교는 괜찮았니?” “네.”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면서 어머니와 베린은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동안 틀어져 있던 차 안 라디오에서는 요즘 한창 입시 시즌이라서 그런지 다양한 대학의 학생들을 인터뷰하는 특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양한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대학교... 저도 이 학교에 다닙니다. 여러분을 학우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학교 이름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아까 “대출이요.” 하던 남자의 목소리와 비슷한 목소리에 베린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저 대학에 관심이 있니?”

어머니는 단순히 아들이 대학교에 대해 관심이 많나 보구나, 하고 오해하고 있었다.

“관심이 있는 거라, 그보다는... 나오는 목소리가 익숙해서...” 베린은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는 와중에도 라디오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대학교의 시릴 애커먼 군이 한 사전 인터뷰 내용이었습니다. 질 수 없죠. 다른 대학 학생의 인터뷰도 들어 봐야겠죠?]

“...” 어쩐지 익숙한 이름. 하지만 어디서 들은 건지 기억할 수는 없어 베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자동차 시동을 끄자 차 내부 라디오도 꺼져 버렸다.

 

베린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식물도감을 꺼내서 책상 위 잘 보이는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 옆에는 며칠 안 남은 숙제 때문에 집에 가져온 역사 교과서가 있었다. “아차.” 베린은 뒤늦게 숙제에 대한 걸 깨닫고 책상 앞에 앉았다.

“입시에 세계사도 들어가던가...?” 원래 집에 가서 식물도감을 마저 읽고 그 이후 카페에 대한 공부를 할 생각이었던 그는, 생각해 둔 일정이 어그러진 것에 툴툴대며 교과서와 노트를 펼쳤다. 빨리 숙제를 끝내 놓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생각이었다. “세계사에 중요한 서양 유물, 요컨대 글라시아의 황금 관이 발견된 시기에 대하여...” 베린의 손에서 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

 

몇 백 년 전. 그 황금 관이 실제로 쓰이던 시기.

“에취!” 글라시아 왕국의 왕 루이는 심하게 재채기를 했다. 그가 왕위를 이어받은 지 어느덧 3년,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기를 거쳤기에 나라는 다시 태평성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질병은 강력한 국왕인 그도 어찌할 수 없어서, 날씨가 추워진 지금 슬슬 감기가 닥쳐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국왕 전하, 괜찮으십니까?” 한 대신이 물었다. 루이는 목이 간지러워서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쓰던 서류를 내려다보자... 이런, 재채기하면서 펜을 삐끗하는 바람에 하얀 종이에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얼룩이 심하게 남았다. 그걸 눈치 챈 신하 중 하나가 자연스럽게 새 종이를 두 손으로 공손히 챙겨서 건네주었다.

“큼, 고맙네.”

루이가 다시 서류를 쓰기 위해 펜촉을 잉크에 담그려던 찰나, 한 신하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전하. 곧 메이플 왕국의 사절단이 방문하기로 예정된 시기입니다. 연회 준비를 어떻게 할까요?” “벌써 그 시기인가...” 잠시 생각하던 루이는 결국 쓰던 서류는 나중에 쓰기로 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일단 사절단 명단부터 가져와 보게. 속한 인물에 따라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라던가, 쓸 수 있는 장식 등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말이야.”

메이플 왕국. 글라시아 왕국의 이웃 국가이자 명백한 우호국으로 루이와는 인연이 깊은 나라였다. 그러니 좀 더 신중히 준비해야 했다. 그 나라의 기사, 에단 아스터 버틀러가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루이는 배신자에게 왕좌를 빼앗길 뻔했고, 또한 루이 그레이스가 아니었다면 에단 역시 메이플 왕국의 현 왕을 지키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을, 복잡하게 인연과 감사가 꼬여 있는 사이였다. 그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루이는 조용히 웃었다.

“그는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무렵, 다른 신하가 사절단 명단을 가지고 왔고, 루이는 그걸 받아서 천천히 읽다가 익숙한 이름이 사절단의 우두머리로 적혀 있는 걸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단... 그가 온단 말인가?” “네? 아,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가 아니잖은가. 나라의 영웅을 대충 맞이하면 쓰나?”

루이는 진지하게 명령했다.

“당장 명예로운 이를 대하는 예우에 맞춰서 확실하게 각 잡고 준비하게. 알겠나?” “네, 넵!!”

몇몇 신하들이 혼비백산해서 뛰쳐나갔다. 그들은 배신자 레인이 처리당한 이후 물갈이되어 새로 등용된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에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설적인 기사의 이야기를 모른다는 건 아니었다.

 

*

 

“...”

한편 그 전설의 장본인, 에단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말을 타고 있었다.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사절단에 꼭 제가 가야 합니까?” “응.”

3년이 흘러 이안 왕자, 아니 이제 이안 국왕은 멋지게 성장해 있었다. 에단이 제 명령에 주저하자 이안은 웃으면서 그를 타일렀다. 보통 신하들이 주저했다면 단호하게 대했겠지만, 지금의 이 여유로운 모습은 상대가 에단이라서 보이는 태도였다.

“에단, 나, 이제 에단의 생각만큼 약하지 않아. 나도 제법 자랐어.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기도 했고, 네가 키워서 내 곁에 붙여 준 강한 기사들도 많아.”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단의 대답에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에단은 여전히 매우 충실한 기사였고 아직 제 주군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그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결국 이안은 비장의 패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번에 네가 사절로서 가야 할 곳이 글라시아 왕국이야.” “...!”

에단이 색이 다른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글라시아 왕국. 그의 목숨을 구해 줬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도와 준 국왕이 다스리는 나라. 타국이긴 하나 그가 절대 잊을 리 없었다. 스렐 왕국과 함께 메이플 왕국이 은혜를 입은 나라들 중 하나였으니.

“마냥 아무 생각 없이 놀라는 것도 아니잖아. 사실 나도 그 왕국에 은혜를 갚아야 하고, 네 일처리 실력을 믿는 거니까, 잘 하고 와.” “...” 이안은 에단의 표정을 보고 아예 쐐기를 박기로 했다.

“...에단, 진짜로 아예 휴가를 주기 전에 다녀와.” “...네.” 에단은 그제야 긍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작은 소동을 떠올리면서 그는 짙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주군이 성장하면서 더 이상 마냥 유약하지 않게 된 건 좋은 일이었지만, 어쩐지 조금 뻔뻔해져 가고 있는 것도 좋은 일일까? 잠시 생각하던 에단은 결국 그 생각을 고이 접었다. 주인을 멋대로 판단하거나 그 생각에 간섭하는 건 애초에 기사로서 할 짓이 못 되었다.

“5분 정도만 더 가다 보면 글라시아 왕국의 국경입니다.”

옆에 따라붙은 사절단 일원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하자. 그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왕국에 도착한 사절단을 맞이하는 이들은 화려했지만 경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절단을 환영했다.

“기사님, 어서 오세요!”

특히 에단은 가장 많은 환영을 받았다. 사방에서 장미꽃 꽃잎이, 이따금씩은 통짜 장미꽃이 그들 주위로 날아다녔다. 3년이 지났지만 아직 사람들은 당시엔 아직 왕자였던 그들의 국왕을 지켜내는 데 기여한 빨간 머리를 가진 타국의 기사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절단은 그 인파를 뚫고 글라시아의 수도에 있는 성에 도착했다. 곳곳에 놓인 장식들은 우아하고 정갈했다. 양 옆으로 도열한 신하들과 기사들은 굳건했고, 무엇보다...

“오래간만일세, 그대.”

지금 상석에 있는 왕좌에서 웃음 짓고 있는 국왕 루이는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에단 역시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 이후 그는 할 일을 충실히 했다. 인사도 제대로 했고, 이안의 편지와 감사의 선물도 잘 전달했다. 그 이후의 연회에서도 그는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비록 영웅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관심을 얻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치근거렸으나, 조금 어려워도 그는 잘 해내고 있었다.

“...저어.”

그러던 중, 누군가 그 인파를 뚫고 에단의 앞으로 다가왔다.

“나라 간 극비 문서에 대한 건으로 국왕 전하께서 급하게 찾으십니다, 버틀러 경.”

에단은 말 전한 신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그걸 이유 삼아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생이 많았네, 그대.”

안내받은 조그만 별실에서는 루이가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웃고 있었다.

“지쳤을 텐데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서 미안하네. 그대를 빼내 올 명분과 장소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네.” “...” 그의 배려를 느낀 에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왕 앞에 마주앉았다.

“잘 지냈는가.” “네.” 에단은 웃으면서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고급스런 맛이었지만 동시에 너무 달지 않은 것이 딱 에단의 취향이었다. 루이는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다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문서 이야기는 핑계가 아니라 진짜라네.” “네?” 에단이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루이는 웃으며 말했다. “나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백성들이 우리 이야기로 국왕과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낸 게 극단들 사이에서 연극으로 나왔지 뭔가?”

“푸흡.”

이에 에단은 사레가 들려서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연신 헛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그 모습을 보던 루이가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저런, 그대. 괜찮은가? 그래도 하던 이야기는 마저 해야겠지. 어렵게 그 대본을 몇 부 구했다네. 가져가서 이안 왕에게 보여주게. 분명 재밌어할 걸세.”

에단이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재밌어하시는 걸로 끝나지 않으실 거 같습니다만... 콜록...” 그는 벌써부터 그 대본이 메이플 왕국의 가장 좋은 극장에서 가장 실력 좋은 장인의 가장 멋진 의상을 두르고 가장 유명한 극단에 의해서 공연되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안이라면 틀림없이 그러고도 남을 거 같았다. 에단은 겨우 숨을 고르고 말했다.

“...사실 그렇게 미화되는 걸 별로 선호하진 않습니다. 저 같은 기사는 모시는 분들의 생각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음, 이야기가 너무 미담으로 퍼지는 게 싫다면 수습은 도와주겠네. 너무 과장되고 미화된 극으로 가지 않게 그 부분만 주의하라 명하면 되겠지?” 그리 말하며 루이가 도움을 주려고 했으나, “감사합니다만, 소용없을 겁니다.” 에단이 곧장 대답했다. “원래 그런 건 높으신 분들이 법으로 막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퍼져나가는 법입니다.” “아하하-.” 결국 루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 에단은 목을 연신 가다듬었다. 만약 그가 연회장에 검을 들고 올 수 있었다면, 그리고 뭔가 베는 것으로 미화된 이야기가 퍼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면 즉각 그렇게 했겠지만, 둘 다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던 기사는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무래도 그 극은 곧 메이플 왕국에도 퍼질 거라고 예상했다.

 

*

 

“황금 관과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은빛 검 유물은 그 지역, 그러니까 옛 두 나라의 땅 범위에서 채집되고 연극으로 공연되는 전통 명작, ‘장미의 왕과 단풍의 기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숙제 끝.”

베린이 교과서를 탁 닫았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툴툴댔다.

“우리 학교 역사 선생님은 좀 유별난 데가 있단 말이지. 별의별 이야기를 다 조사해 오라고 시키신단 말이야. 그 뿌리를 알면 이야기를 좀 더 역사적으로 읽을 수 있다나 뭐라나... 지난번 숙제는 분명 아직 설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부족에 대한 이야기였지? 그리고 그 전 숙제는 몽골에 관한 이야기였고...”

“베린, 밥 먹어라-.”

부드러운 목소리가 베린의 툴툴거림을 끊어놓았다.

“네-!”

베린은 곧장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미처 닫지 못한 노트가 문이 닫히며 불어온 바람에 팔락거리며 그 전에 한 숙제를 보여주고 있었다.

 

*

 

그러니까, 이건 조금 옛날의 이야기.

 

“...”

푸른 대지 사건 이후 7년이 지났다. 아이타치는 어느덧 스물 한 살의 장성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 7년 동안 그는 훈련이나 사냥을 나서지 않을 때는 따로 공부를 하고 있곤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티야의 후계자인 자신은 가장 멀리 날며 가장 높이에서 많은 것을 보아야 그의 가족들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계자님.”

아이타치가 자신의 천막에서 새로 얻은 문서들을 읽고 있을 때, 에르킨이 그의 옆에 다가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조금 와 보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가?” 아이타치의 물음에 에르킨이 설명했다. “이번에 옆 부족과 물물 거래를 했었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도 여러 개 섞여 들어온 거 같습니다. 한 번 확인해 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알겠다.” 아이타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천막을 나서서 걸음을 옮겼다.

 

“이것들인가?” “네.” “확실히 희한한 것들이군.”

아이타치는 다양한 물건들을 보고 있었다. 쇠로 만든 큰 이빨들의 모임 같은 것도 있었고, 털이 두꺼운 짐승의 외피로 만든 모포도 있었다. 그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이건 덫 같은데. 무쇠로 되어 있는 게... 장작 토막 하나만 가져와 보게. 성인 남자 팔만큼 긴 것으로.” “여기 있습니다.”

아이타치가 장작을 받아들고 톱니 안쪽에 넣은 뒤 힘을 주어 누르자, 순식간에 철컹 소리와 함께 덫이 닫히며 장작을 꽉 물었다. 만약 그 안에 들어간 것이 장작이 아니라 사냥감의 다리였다면 꽤나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정말 희한한 물건입니다.” 에르킨이 말했다. 확실히 그들이 속해 있는 아티야 부족은 덫으로 하는 사냥보다 직접 활로 사냥하는 것이 더 익숙한 민족이었기에 이런 것은 잘 보지 못했다.

“그러게... 어, 활도 있네?” 아이타치는 대답하다 말고 한쪽에 놓인 활을 보았다. 들어 보니 아티야 부족이 쓰는 것보다 조금 더 크고 무거운 활이었다. “지상에서 쓰는 활인가 보군.” 아이타치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아티야 부족은 주로 말을 타며 활을 쏘는 편이었기에 활이 너무 무거우면 곤란했다. 이 활은 말을 타기보다는 땅에서 뛰어다니며 쏘아야 할 거 같았다.

“이게 어디서 교환을 했다는 건가?” 아이타치의 물음에 에르킨이 대답했다. “저희와 이걸 교환한 부족 말로는 저 북부에 사는 세카디 족의 물건이라고 합니다.” “음...” 아이타치는 잠시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었는데 어디서 들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세카디 족이 사는 땅은 험준한 산 높은 곳이라서 상당히 춥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포를 가지고 있었던 거겠죠.”

에르킨이 모포를 만지던 그때, 툭 소리와 함께 성인 남성 손바닥 크기의 나무판자가 떨어졌다. “이게 뭐지?” 아이타치가 그것을 주워들었다. 나무판자에는 뭐라고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몇몇 단어는 읽기가 어려웠다.

“이 단어는 읽을 수가 없군. 하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단어는 읽을 수 있어. 어떠어떠한 이 물건들을 얻은 이여...”

 

*

 

세카디 족 내부에선 하얀 사슴 사건 뒤 2년이 지날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도둑 누명을 벗은 키샤는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하게 되었고, 그런 동생을 키르는 언제나 뒤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얀 사슴에 대한 키르의 말을 듣고 대비책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

아티야 부족이 세카디 족의 물건들을 손에 넣기 몇 달 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친애하는 이 물건들을 얻은 이여, 나는 그대가 추운 날에도 돌아갈 가정이 있길 바라며, 아픈 날에는 그대를 걱정하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키샤는 천천히 짧은 글을 읽고 있었다. 이 글은 사슴에 대한 대비책 중 하나였는데, 만약 하얀 사슴이 또다시 나타나 사람들을 ‘눈멀게’ 하는 일을 벌인다면 그 앞에 선 사람이 무엇을 위해 여러 환경을 지나오다 사슴 앞에 섰는지 상기하라고 쓴 문장이었다.

“...”

키르는 말없이 나무판자에 그 문장들을 새겨 내리고 있었다. 이 문장들은 창고 안에 넣을 물건들 옆에 있을 예정이었다. 키샤는 잠시 고개를 들어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형, 손 조심해.”

“그래. 계속 읽어라.”

“응.”

키샤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목표뿐만 아니라 당신을 생각하는 그들이 있는 세상에 눈을 뜨길 바란다. 이게 끝이야 형.”

“그래.”

키르는 천천히 한 단어씩 새겨 넣고 있었다. 나무판자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도 그 글을 새겨 넣고 있었다. 그는 사슴 사건에 휘말린 이후 조금 진지해진 감이 있었다. 원래도 진지한 사람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더 단단해졌다. 과거에는 가끔씩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는 그 이후 더 야생의 늑대와도 같은 냉정하고 침착한, 그러면서도 행동할 때가 언제인지 구분할 줄 아는 면모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가족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다시는 그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 그는 매번 그렇게 다짐하곤 했다.

“...”

키샤가 형 옆으로 쪼르르 다람쥐처럼 뛰어왔다. 그는 형이 마지막 글자까지 새기고 나자 와,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그의 형은 평소에 활 손질도 직접 하는 만큼 손재주가 좋아서 상당히 정갈하게 글씨를 새길 수 있었다.

“대단하다 형.”

“너도 곧 이것저것 배워야 할 거다.” 키르는 그렇게 대답하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2년이라는 시간은 마냥 소년 같던 제 동생도 약간 청년 티가 나도록 만들었다. 아마 조금 더 있으면 성인식을 치르고 첫 사냥 훈련을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런 단순한 잡일뿐만 아니라 사냥도 나갈 수 있어야지.”

“응! 꼭 형처럼 훌륭한 사냥꾼이 되어 보이겠어!”

키샤가 주먹을 불끈 쥐고 흥분해서 말했다. 키르는 동생의 거친 행동에 살짝 뒤로 물러났다가 이내 키샤를 타일렀다.

“하나하나 흥분하면 좋은 사냥꾼은 못 돼. 다람쥐나 토끼 한 마리 잡았다고 신이 나서 그러다간 온 산의 동물들이 다 도망칠 거다.” “헤헤...”

이에 키샤는 멋쩍은 듯 팔을 내렸다. “그러면 그거 줘. 내가 창고에 가져다 둘게.” 관심을 돌리려는 핑계인 건 알았지만 키르는 순순히 동생에게 목판을 넘겼다. “다녀오겠습니다.”

“...” 그 동안 키르는 떠나는 동생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예전 그 날, 아무리 하얀 사슴에게 홀려서 그랬다지만 동생은 사실상 도둑질을 했단 사실에 아직 죄책감이 조금 남은 거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는 보폭이 크고 빨라서 금방 키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 목도리는 계속 여기 걸려 있는 거야?” 마을 공동 창고 앞에 선 키샤가 형에게 물었다. 창고 문에는 구멍 난 목도리가 걸려 있었다. 이 근방에선 보기가 힘든 스타일의 목도리는, 2년 전에 키르가 가져온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목도리에 난 구멍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사슴에 대한 또다른 경고지.”

키르가 대답했다. 확실히, 이 목도리는 사람들을 괴롭히려고 이 창고를 사용하려는 사슴에게 사람을 갖고 놀지 말라고 하는 경고이기도 했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사냥꾼아, 절대로 폭설이 내리는 날 숲으로 들어가지 마라. 겨울의 숲은 사악해서. 너의 눈을 멀게 하고. 너의 말을 앗아갈 테니.]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도, 키샤가 태어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마을의 어린아이들에게 배우게 하고 대대로 전해지는 격언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직접적인 증거나 다름없는 물건이니만큼, 당분간은 계속 창고에 걸려 있을 전망이었다.

“자네.”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키르를 보았다.

“자네가 무사히 돌아온 이후로 2년이나 지났는데 오늘도 아이들이 용감한 사냥꾼 이야기를 해 달라고 난리지 뭔가. 혹시 오늘도 애들한테 이야기 좀 해 줄 수 있는가?”

“나는 용감한 사냥꾼이 아니다.” 키르가 대답했다. “나는 그저 동생을 지키고 싶어 눈이 멀어버릴 뻔한 사냥꾼이었을 뿐이지.” 마을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키르는 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함으로써 마을 아이들이 그 비열한 사슴을 경계하는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가서 말하겠다.”

키샤는 형을 보며 웃었다. 그의 형은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는 말수가 적어서 가끔 오해할 만한 말이 되었다 싶으면 아차, 하고 급하게 덧붙이는 경향이 있단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는 동생 키샤를 떠올리게 만드는 어린아이들에게 약하다는 사실이었다.

키샤는 형과 마을 사람이 대화 나누는 사이 창고 문을 열었다.

“...이제 다시는 도둑질로 보일 행동은 안 해. 그러니까.”

창고 문을 열고 얼른 판자만 놓고 나올 생각이었다.

“앗!”

그러다 키샤는 그만 문지방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직감적으로 비명을 듣고 문제가 있음을 파악한 키르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동생의 뒷목을 낚아챘다. 덕분에 창고 안으로 꼴사납게 엎어지는 건 면했다.

“괜찮은가?” “으응...” 키샤의 표정이 조금 울상이 되었다. “형이 바빠 보여서 판자만 얼른 놓고 나오려 했는데...” “나는 괜찮다.” 키르가 말했다. “그러니 너도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다.” “...형?” 키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르의 앞뒤 다 잘라먹는 말이 또 튀어나왔다. 키르도 그 점을 눈치 챘는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언제든 필요하면 그냥 나를 불러라.” “...”

여전히 많이 이것저것 생략된 말이었지만, 키샤는 형의 말을 알아들었다.

“...응, 알았어.”

형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동생의 마음가짐이었다.

“어, 그런데 판자가... 어디 갔지?”

그러나 넘어질 뻔한 순간 손에서 떨어진 판자가 없어져 버려서 결국 키샤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키르는 그런 동생을 안심시키려 웃었다. “하는 수 없지. 판자는 다시 새기면 된다. 네가 안 다친 게 나는 더 중요하다.”

 

형제는 그 판자가 창고 밖 공중으로 날아가다 마을 외부와 교류 목적으로 나가는 짐수레에 턱 얹힌 건 몰랐다.

 

*

 

“그리고 나는 당신이 목표뿐만 아니라 당신을 생각하는 그들이 있는 세상에 눈을 뜨길 바란다.” 아이타치는 나무판자에 적힌 문장을 끝까지 다 읽었다. “어쩐지 무언가... 격언 같기도 하고 가르침 같기도 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에르킨이 끼어들었다.

“그래.” 아이타치가 대답했다. “무언가를 걱정하는 말 같아. 마치 누군가가 위험에 빠질까 염려하는 말 같기도 해. 멋진 말인걸. 그런데 이게 왜 이 안에 들어있었을까?” “글쎄요...?”

두 사람은 그 문장들을 다시 한 번 눈으로 읽었다.

“어쨌든 이 물건을 얻게 될 사람에게도 이런 따뜻한 마음을 나누려 하다니, 세카디 족은 멋진 사람들이로군.” 이에 에르킨이 물었다. “세카디 족이 남긴 글이라 어찌 확신하십니까?” “이 근방의 부족들은 이런 목판을 잘 쓰지 않으니까.” 아이타치는 바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 문구의 의미는 많은 이들이 알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나중에 대족장님과도 상의해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음, 그리고 일단 이제 저녁을 먹을 준비를 해야겠다. 며칠 뒤면 또 짐승 떼를 따라 이동해야 하니까.”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초원의 하늘에는 어느새 노을 물이 들고 있었다. 아이타치는 이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에르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하긴 슬슬 배고프긴 합니다. 자, 다들 이 물건들을 정리하자! 식사 준비를 하려면 이 공터를 치워야 해.”

“네!” 그래서 부족 사람들이 물건들을 치울 동안, 아이타치는 나무판자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이건 내가 가져가지. 조금 더 곁에 두고 보고 싶군.”

 

그리고 그 목판은 아티야 족이 저녁 식사를 할 때도, 계속 들판을 이동할 때도, 몇 십 년이 지나서도 계속 아이타치가 가지고 있었다.

 

*

 

그리고 몇 십 년 뒤.

“그래서 역사학적으로 이런 목판은, 흔히 대륙에서 여러 부족이 교류했다는 증거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이런 형태의 목판은 이쪽 대륙 남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오히려 북부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입니다.”

그 목판의 사진을 띄워 놓고 대학생들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는 교수가 있었다. 교수는 내내 열기를 띄며 말을 이어나갔다.

“...”

그러나 거의 모든 학생들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대다수가 전공도 아니고 교양 강의로 이 ‘근대 고미술의 역사’를 수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학생들은 아예 곤히 취침 중이었다. 다만 그 와중에 유일하게 웃고 있는 학생이 한 명 있었으니, “흐음. 이 과목 성적도 제가 이기겠는걸요?” 올해로 대학교 1학년이 되는, 스물세 살의 청년 모리였다.

 

신 연속 폭주 사건이 수습된 후 1년 뒤, 미카는 아끼는 제자에게 물었다. “소호야. 네가 그렇게 미술에 자신이 있다면, 한번 대학교에 입학해 보는 게 어떻겠니?” 처음 미카의 그 물음에 모리는 상당히 당황했더란다. “네?” 그러나 미카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네가 나중에 무슨 일을 하던, 많은 학식을 쌓는 건 중요하단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학식들을 어떻게 활용할지도 중요하지. 남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는 데 지식을 쓰는 방법을 익혀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지식을 배우는 게 필요하지 않나요?” 지켜보던 모리의 사형이 물었다. “그래서 모리를 대학에 보내시려는 건가요?” “그래. 그래서 조심스럽게 권유해 보는 거란다. 지원은 이쪽에서 해 줄 테니, 나쁜 거래는 아니지?” “...” 잠시 가만히 생각하던 모리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해 볼게요.” 그리하여 모리는 바로 공부를 시작해서 다음 해에 대학에 입학했다.

확실히 미술학 수업은 모리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대강 유명한 명작을 모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왜 당시 원작자는 그런 기법을 썼는지, 어떤 배경 역사가 있었는지를 이해하고 나니 모리의 그림은 모작도 순수 창작물도 모두 좀 더 정교해졌다.

그러나, “남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는 데 지식을 쓰는 방법을 익혀야만 해.” 미카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모리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하고 있었다.

 

“...”

강의가 끝나고 모리는 천천히 대학 안에 있는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다음 강의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공강이라서 여유 시간이 있었다.

그 때, 토독... 하고 모리의 머리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응?” 모리는 위를 보았다. 두 번째 물방울이 모리의 콧등에 떨어졌다. 맑은 하늘에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여우비다.” 우산이 없었던 모리는 황급히 대학 내 구내식당으로 몸을 피했다.

“... 마침 점심시간이니까, 밥 좀 먹고 있다 보면 비가 그치겠죠.”

모리는 그 길로 키오스크로 가서 장어덮밥을 시켰다.

 

식사는 금방 나왔다. 맛있는 장어덮밥을 몇 입 먹고 있자니 식당에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 시작했다.

“어휴, 갑자기 웬 비야?” “그러게~.”

구내식당엔 밥을 먹으러 온 학생들도 있었지만 모리와 같은 이유로 비를 피하러 온 학생들이 꽤 많았다. 갑작스런 비에 짜증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식물들은 좋겠지만 사람들한테는 피곤하겠어요.”

그런데 남들과는 관점이 조금 다르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모리가 덮밥에서 고개를 들었다. 구름 같은 하늘색 머리의 남자가 막 모리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샌드위치가 올라간 식판을 가지고 있었다.

“...”

그리 큰 관심사는 아니었기에 모리는 다시 자기 식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

“...”

“저기요? 거기 파란 머리 남자분.”

그런데 아까의 목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모리는 덮밥 한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파란 머리 남자는 자신밖에 없었다. 그제야 자신을 부른 걸 알아차린 모리가 목소리 주인을 보았다. 그러다 목소리 주인의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상대가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합석해도 될까요? 지금 자리가 많이 없네유.”

확실히, 지금 구내식당은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서 협소한 상태였다. 그나마 비어 있던 자리가 모리와 같은 테이블이었다. 모리는 입에 있는 걸 꿀꺽 삼키고 말했다. “아... 네... 뭐.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승낙이 들어오자 조심스럽게 모리의 앞자리에 앉았다. 모리는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자연스럽게 남자를 관찰했다. 상대는 메고 있는 백팩 옆쪽 주머니에 두 개의 배지를 달고 있었다. 하나는 그의 학과를 상징하는 채소 모양 마크가 달린 배지였고, 다른 하나가 좀 특이했는데, 긴 귀와 꼬리를 가진 귀여운 마스코트가 그려져 있었다. 어디서 봤던 거 같은데. 모리는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집중했다.

“윙키에유. 트윙클 랜드의 마스코트죠.”

모리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상대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모리는 곧장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무심결에 그만.” “아녀요. 캐릭터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럴 수도 있죠 뭐.” “네?” 모리가 고개를 갸웃하자 상대가 모리가 맨 숄더백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여우 인형 키링이 걸려 있었다.

“아하하, 그런가요?”

모리는 적당히 얼버무려 넘겼다.

“제이미? 제이미 형 맞아?”

그때, 다른 목소리가 상대를 불렀다. 모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휙 돌렸다. 분홍 머리를 가진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갑작스레 비가 온 탓에 우산을 챙기지 못한 걸까, 그의 어깨가 빗물에 젖어 있었다. 그동안 모리 앞에 앉아 있던 상대는 잠시 가만히 자기 이름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했다. 그러다 마침내 떠올려냈는지 번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카티?”

“역시 제이미네!”

카티는 곧장 제이미 옆에 앉았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랄 게 있을 수 있지? 오늘 별자리 운세에서 예전에 만났던 인연을 다시 마주칠 거라고 했었는데 그게 형이었나 봐.” 카티는 한참 재잘거렸다. “그래요, 반가워요. 그런데...” 그러나 제이미의 반응이 난처하다는 투이자, 카티는 그제야 제이미의 시선을 따라가다 모리를 발견했다.

“일행이야?” “아니, 합석 허락해 준 분. 지금 식당에 자리가 없잖아유.” “아하.” 이들의 반응에 모리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도 일행은 아니신 거 같은데요.” 그 말에 제이미가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먹고 말했다. “예전에 만난 적 있는 사이기는 하니까요. 그게 벌써... 제 열아홉 생일 때니까 3년 전이네요. 세상에.” “우와. 벌써 그렇게 됐다고?” 카티가 재잘댔다. 모리는 두 사람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 한 번 스쳐 지날 때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 사이 같은데 희한하게도 오래 만나 온 사이처럼 다시 편안하게 대화가 되고 있었다.

“카티도 얼른 주문하고 와요. 같이 먹어요. 시간 있죠?” “응!” 카티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키오스크로 향하자 제이미가 모리를 쳐다보았다.

“인연이란 건 결국 어떻게든 이어지게 되어 있는 법이네요.” “인연이라...” 모리는 잠시 생각하다 웃었다. “제이미 님은 인복이 참 많으신 거 같네요. 예전에 만났던 인연, 그것도 친해졌던 좋은 인연을 또 만나는 걸 제가 사는 사원에선 길한 운이라고 보거든요.” “...” 제이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어 보였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잠시 뒤 카티가 라면 한 그릇을 식판에 받쳐 들고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덮밥을 다 먹은 모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좋은 인연을 보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좋은 시간이 되시기를.”

“... 저 사람 뭐야? 자기 할 말만 하고 간 거야?”

카티가 모리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제이미를 돌아보았다. 제이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뭔가 불편해 보여서 말은 안 했는데... 저 사람도 어쩐지 저한테 익숙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뭔가 카티를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듯한.” “...그게 뭐야?” 카티가 모리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이미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카티를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모리의 모습이 인파 사이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자, 제이미는 다시 몸을 돌려 여유롭게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카티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조금 찌푸린 표정으로 라면을 한 젓가락 퍼 올렸다.

 

한편, 구내식당을 나서며 모리는 혼자 생각했다. “사람은 저런 약간의 인연에서 얻은 지식만으로도 남을 이해하고 친해질 수 있는 걸까요?” 지금 드는 감정은 분명 부정적인 건 아닌데, 복잡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남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는 데 지식을 쓰는 방법을 익혀야만 해.” 미카는 분명 그렇게 말했지만, 모리는 그걸 연구하기 위해 아직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의미 있는 지식이 무엇인지도, 그리고 인연이 무슨 의미로 있는지도.

 

*

 

한편, 구내식당 옆에 있는 대학 도서관 앞에서 갈색 머리를 가진 한 여성이 우산을 쓴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니저님.”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연령대의 한 남자가 여성 옆에 섰다. 여성이 그의 금빛 눈동자를 돌아보았다.

“엘. 왔어?” “네, 매니저님. 저희 데리러 오신 거예요?” “응.”

매니저는 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기이는? 기이도 우리랑 같이 14지부로 복귀해야 하잖아.”

“후후후, 여러 도서관에서 조사해 보니 인간계도 많은 게 달라졌더군요.”

그 순간 두 사람 뒤에 기이가 기척 없이 나타나 웃으면서 말했다. “꺅!” 매니저는 놀라서 우산을 놓칠 뻔했다. 옆에 서 있던 엘이 날쌔게 그 우산을 잡았으나, “엣취, 에에취!!” 그도 놀란 건 마찬가지인지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들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이는 연신 웃는 낯이었다.

“자, 그럼 돌아갈까요?” “그, 그래...” “그러면 포탈 열 만한 구석진 데를 찾아봐야겠어요.”

셋은 지부로 복귀하기 위해 도서관 건물 뒤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매니저가 길 한복판에 멈춰 섰다.

“어?” “왜 그러세요, 매니저님?” “아니, 저쪽은 식당이잖아?”

매니저가 구내식당의 통유리를 가리켰다.

“누군가랑 시선이 마주친 느낌인데...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이겠죠.”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

한편, 구내식당에서는 카티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카티, 뭐 해요?”

“어쩐지 날 아는 사람하고 눈이 마주친 느낌이 드는데 기분 탓이겠지?”

“...거 참 부산스럽네요. 일단 밥이나 마저 먹어요.”

제이미는 창을 등지고 있어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티는 인파 사이를 아쉬운 듯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지내던 이야기나 해 봐요. 뭐 하고 지냈어요?”

그걸 보다 못한 제이미가 말을 걸어 카티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

“음... 나는... 게임제작학과에 다니고 있고... 또...”

카티는 천천히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이번에 UI 짜보는 게 좀 어려워! 일러스트는 재미있는데 어렵고! 버그 찾는 건 재밌지만... 우응...”

“일단 이것저것 다 해 보면서 감을 찾는 거죠.”

제이미가 대답해 주었다.

“밭에 맞는 작물을 찾는 것처럼, 카티도 어떤 세부 전공이 좋을지 알아가고 있는 단계인 거예요.” “...그런 비유를 하다니, 제이미는 역시 농경 관련 학과지?” 이에 카티가 볼을 부풀리며 물었다. “네.”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언제 한 번 놀러 오면 방울토마토는 좀 드릴 수 있어요. 따뜻한 곳에서 길러서 그런지 아직 열매가 맺히더라고요. 그리고...”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여우비가 그쳤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구내식당을 빠져나갔다. 바깥의 바람은 선선했고 가을답지 않게 조금 따뜻했다. 다시 나비가 날아가기 좋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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