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멘트 웹발행
2024. 7. 28. 대운동회에서 발간된 빵준 히어로물 회지의 웹발행입니다.
필라멘트
지은이 | 전씨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표지 | 김수박 (@ttangmoban)
발행일 | 2024년 7월 28일
트위터 | @S2yeon_gjung
빌런이 될 수 없는 히어로의 이야기
주의사항
-본 책은 네이버 웹툰 <가비지 타임>의 비상업적 비공식 회지의 웹발행입니다.
-모든 구성을 회지용으로 집필하였기에 웹발행은 보기에 맛이 덜 살 수 있습니다. 결제 시 고려해주세요.
-위 회지는 모두 작가가 만든 허구로, 원작 및 실제와는 무관합니다.
-장르는 히어로물입니다.
-부상이 다분하며 연구소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체실험 및 약물 등의 비 인륜 소재가 다뤄지나 묘사가 상세하지 않습니다.
-작 중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전부 성인이며, 전체이용가 회지입니다.
※본 책은 23. 12. 2에 발간된 회애여종의 후속작이며,
“두 세계관은 별개”의 것으로 전작을 읽지 않으셨더라도
회지를 즐기시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는 스위치를 눌러도 밝아지지 않는다.
이건 전영중이 처음 깨달은 지식.
1장 : 전조
깜박- 깜박. 벌써 전구를 갈 때가 됐는지, 눈을 감지 않아도 시야가 저절로 깜박거렸다. 서재 안에 켜둔 불은 책상 등뿐이었지만, 아직 채광이 글씨를 읽을 수준은 되어 영중은 아무렇지 않게 마저 신문을 읽었다. ‘은평구 싱크홀, 역시 재해로 인한 지반 붕괴가 원인’, ‘대한재해대응히어로협회, 14개 재해안전학회와 업무협약 체결’. ‘재해가 일상이 된 오늘. 사진 제공=히어로 협회’.
몇 분 지나지 않아 깜박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정신 사납기가 더는 견딜 수 없어, 결국 영중이 딸칵- 전구를 껐다.
읽던 신문을 반으로 접어들고 나오니 막 저무는 해가 거실 절반을 비추었다. 물을 따라 소파에 앉자 어느새 빈손이 자연스레 리모컨을 찾았다.
까맣던 텔레비전이 켜지자 커다란 화면에 가득 준수의 얼굴이 들어왔다. 곧바로 뉴스 데스크로 전환되는 화면. 자주 봐서 맞춰져 있던 뉴스 채널이다. 영중은 소리를 키웠다.
작게 보이는 준수가 팔을 움직이자 번쩍- 환한 빛과 함께 곧 집채만 한 재해가 쓰러졌다. 쿵, 소리에 뒤이어 재와 함께 준수의 망토가 펄럭였다. 화면이 전환되고 생중계인 듯 저하된 화질 속 시민들에게 꽃다발을 받는 준수가 나왔다. 목에 화환을 두른 화면 속 준수는 기자의 질문에 어색한 표정으로 저기하게 대답해주었다. 과하게 가까운 카메라들에도 성질 하나 내지 않고는 검은 세단을 타고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영중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빛을 냈다. 조금 뜸을 들이다 확인하니 역시, 준수에게 온 연락이었다.
-야, 일 없는 거 다 안다.
-밥 먹자.
-답장 안 하냐?
-야.
-야.
오는 연락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화면이 다시 뉴스 데스크로 전환했다. 아나운서가 단정한 발음으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자 전화벨이 울렸다.
그새를 못 참고 준수가 전화를 걸었다.
-“야 왜 읽어 놓고 답장을 안 해.”
“뉴스 보고 있었어. 준수야, 우리 준수 멋지던데?”
-“하, 참. 내가 이번에 좀 깔끔하게 잡긴 했지.”
“그러니까 말이야.”
아나운서는 이번 괴물의 등급과 피해 지역, 그리고 사상자의 수를 시청각 자료를 이용하며 명료하게 안내했다. 사상자는 단순 찰과상 2명뿐.
B급 짐승 형 재해를 무려 단독으로 나서 가로수 하나의 피해만으로 처리한 준수의 다양한 활약상이 자료 화면 모니터를 쉼 없이 채웠다. 영중이 생각하기에도 아나운서의 말 그대로, 칭송받아 마땅한 성과였다.
-“암튼 형아 성과금 받았으니 밥 먹자.”
“누가 형아야, 참나. 저번에 맛있다고 했던 거기?”
-“응.”
“예약해둘게.”
-“시간 넉넉하게. 나 집 가서 샤워할래.”
“영상 보니까 별로 움직이지도 않던데 씻게? 이렇게 히어로들이 출동마다 씻으면 곧 물 부족 위기 국가에서 물 부족 되는 건 금방이겠어.”
-“지랄하지 말고, 거의 다 왔다. 입을 옷이나 챙겨둬.”
전화가 끊겼다. 성미가 급하다니까. 그래도 기분이 좋아 보여 영중도 작게 웃었다. 그사이 화면은 패널들이 모여 준수의 활약상을 분석 및 토론하는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영중은 미소를 지우고 화면에 집중했다. 물론 식당을 예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약간의 고민 끝에 색이 들어간 셔츠와 가벼운 바지로 두 사람분의 새미 정장을 골라 세팅해 놓는 중, 방문이 열렸다. 준수였다. 준수는 가볍게 인사만 남기고 성큼성큼 자기 속옷 하나를 챙겨 도로 나갔다. 집에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상보다, 기대를 많이 하는 듯해 영중은 눈치껏 꺼내 놓았던 옷들을 쓰리피스 정장으로 바꿨다.
씻을 필요가 없던 영중은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정돈했다. 의상이 바뀌었으니 머리도 단정히 해야 했다. 드라이기로 마무리하고 있으니 곧 속옷 차림의 준수가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는 방치란 해 헐렁한 바지 하나를 대충 주워 입은 준수가 다가왔다.
“오~ 우리 영중이. 포마드야? 잘생겼네. 나도 해주라.”
“뭐? 알아서 해. 귀찮아.”
“빨리.”
“성준수.”
“해줘.”
“…하, 손 닦고 올 테니까 머리라도 대충 말리고 있어. 다 젖은 머리로 뭘 해달라는 거야.”
“응. 빨리 와.”
잡은 팔을 살살 흔들며 부리는 고집에 영중이 한발 물러났다. 준수 손재주를 생각하면, 자신이 해주는 게 더 손질이 빨리 끝날 것 같기도 했으니 그러려니 넘어갔다.
손을 닦고 온 영중은 대충 머리를 탈탈 털던 수건을 빼앗아 드라이기로 말려줬다. 기분이 좋은 준수는 얌전히 앉아 영중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았다.
물기가 적당히 마르자 영중은 손에 왁스를 짜내 머리칼을 손으로 쓸며 넘겼다. 귀찮다던 말과는 다르게 모양을 내는 데 금방 집중해 말이 없어진 영중을 거울을 통해 조용히 감상했다. 영중의 머리와는 조금 다른 가르마의 포마드가 완성되자 준수는 그 차이에서 애정을 느끼며 조금 감동했다. 이 새끼, 역시 내 얼굴 좋아한다니까. 머리까지 하는 걸 보니 오늘 입을 복장이 짐작됐다. 완성된 머리도, 영중이 골라둔 옷도 다 마음에 들었다.
“옷 입고 나가면, 딱 맞춰 도착하겠다. 서두르자.”
“응.”
둘이 방문한 호텔 레스토랑은 기본 홀과 예약제 방으로 나뉘었다. 영중은 준수의 유명세가 있으니, 당연히 방을 예약해두었건만. 어디서 소식이 퍼진 건지 주요리를 기다리는 사이 다른 테이블에서 와인 선물이 세 병이나 건너왔다.
“우리 준수 인기가 많다?”
영중이 와인 중 하나를 따 잔에 따르며 농을 던졌다. 따르고 있는 건, 주요리인 스테이크에 맞춘 레드 와인이었다. 준수가 장단을 맞추려 잔 받침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게, 우리 영중이는 좋겠네.”
“내가 왜?”
“이렇게 인기 많은 내가 널 좋아하잖냐. 개이득 아냐?”
와인이 채워진 잔을 들어 올리며 준수가 웃었다. 농담에 농담으로 응수하자 영중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준수가 언제 이렇게 능청맞아졌지.”
둘은 마주 보고 웃으며 가볍게 잔을 맞췄다. 잔을 비워낸 영중은 잠시 감상에 빠졌다. 그러게, 우리가 언제 이런 사이가 됐지.
준수의 뒤엔 유명하지만 정확한 풀네임이 기억나지 않는 모더니즘 화가의 작품이 걸려있었다. 자신의 뒤에도 비슷한 게 걸려있겠지. 영중은 굳이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옆을 봤다.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이 레스토랑은 준수가 영중에게 좋은 걸 먹이고 싶을 때 오는 곳이었다. 둘 다 새로운 가게를 발굴해 내는 취미가 없었으니. 그냥 자신들이 아는 제일 비싸고 정갈하고 맛이 좋은 곳을 기념일 전용 코스로 고정했다.
준수는 먹는 데 집중했는지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자연스레, 오늘은 준수가 뭘 기념하기 위해 오자고 한 걸까 고민했다. 예전에는 둘이 마주 보고 앉아 호텔에서 잔을 기울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아마 준수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계속 다른 길을 갔겠지.
“너도 알겠지만, 난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여유가 있지 못 해. 좋은 연애 상대는 못 될 거야.”
“괜찮아. 나는 여유 있을 때 봐줘. 네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울게.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널 도울 수 있는 자격만 줘.”
여러 차례의 완곡한 거절에도 준수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붙잡았다. 항복한 영중이 정말 상투적인 애인이라는 타이틀만 쥐여줬을 뿐인데. 준수는 그걸 잘 활용했다. 결국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옆자리를 꿰차고 함께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의 집념이 대단했다.
영중이 골똘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자 준수가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불러왔다. 고개를 들었다. 전체적으로 검은 벽지와 곡선형의 흰 조명. 그 아래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성준수는 객관적으로 봐도 근사한, 남자친구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옛 생각. 이맘때쯤 준수가 나한테 고백했었는데.”
“뭐야, 기억하고 있었냐. 몇 주년 같은 건 신경 안 쓸 거 같아서, 그냥 기념만 하려고 했는데. …뭐, 지금도 그 생각은 별반 다르지 않아. 곁을 내어줘서 고맙다.”
준수는 이런 말이 민망한지 볼을 붉히면서도 눈빛은 진지했다. 영중은 시선을 피해 자기 손등 위에 올라온 준수의 손을 보다가, 자기 손을 슬쩍 빼내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왜 이래, 낯 간지럽게. 준수 오늘 기분이 아주 좋은가 봐?”
닿아있던 손을 빼냈으니 기분이 나쁠 법도 하련만, 눈으로 영중의 기분을 살피며 준수는 차분하게 손을 거둬 팔짱을 꼈다.
“뭐, 그렇지. 너랑 이렇게 맛있는 것도 먹고, 오늘 협회에서 성과금 받았고. 연구소에서도 오랜만에 검진받으러 오래.”
“…연구소에선 어쩐 일이래. 히어로들은 이상 수치만 관리 잘하면 검진 같은 건 필요 없는 거 아니었어?”
“뭐, 피나 좀 기증하라는 소리일 거야. 그런 건 흔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후 가벼운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마쳤다. 준수는 끝까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신이 기념일을 기억해준 것만으로도 기뻐하다니. 선물이라도 준비할 걸 그랬나. 준수가 계산을 마치는 사이. 영중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래도 태연하게 선물을 건넬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됐다.
식당을 나서던 중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잠시 기다리던 둘에게 누군가 말을 붙여왔다. 상대를 확인한 둘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우리 둘 다 모르는 눈치인 걸 보아하니 민간인인가. 잠자코 말을 들어보니 아까 와인을 건넨 사람 중 하나인 거 같았다. 눈치를 보던 준수가 결국 직원에게 펜과 종이를 요청했다.
히어로의 사적인 팬서비스는 자제하도록 협회 측에서 권고사항이 내려와 있는 상태였지만. 마침 또 와인 포장을 기다리던 중이라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 그들은 히어로 준수를 칭송하며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오늘 준수 히어로님이 멋지게 처치하신 재해 발생지가 저희 친척 집 바로 근처였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직원이 펜과 종이를 가져와 준수와의 대화가 끊기자, 이들은 한발 뒤로 물러나 있던 영중에게도 말을 걸어왔다.
“실례지만 일행분도 히어로이십니까?”
영중이 힐끗 안쪽을 보자 멀리서 둘의 와인을 들고 대기하는 직원이 보였다. 아마 이들은 준수와 대화할 시간을 벌기 위해 와인 포장을 식사 후에 하도록 매수한 듯싶었다. 아, 이제 슬슬 다른 레스토랑을 찾아봐야겠다. 성준수는 별로 신경 안 쓸 테니 자신이 알아봐야 했다. 영중은 다시 이들을 쳐다보며 웃는 낯으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저는 아닙니다. 그냥, 친구예요.”
“어이쿠 제가 실례했습니다. 워낙 풍채가 당당해 보이셔서 히어로 감이라고 생각했어요.”
“말씀 감사합니다.”
준수가 사인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이 다가와 와인을 건네주었다. 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간혹 겪는 일이었다. 히어로 극성팬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으니까.
이해는 갔다. 협회는 히어로의 안전을 위해 모든 사생활 유출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미디어에 쉼 없이 재해와 싸우는 현장을 노출하며 우상으로 메이킹 되는 것에 비해, 모든 히어로의 정보가 정밀하게 관리되어 알 수 있는 게 없다시피 하니. 호기심이 가득한 이들에게 어떤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가끔 저렇게 히어로와의 우연한 만남을 가장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곧잘 마주쳤다. 이 모든 행위에 악의가 없다는 게 놀라운 히어로의 세계였다. 오직 순수한 팬심만으로 히어로의 사적인 영역마저 탐했다. 한 편으로 영중은 그 팬심을 이해했다. 히어로를 가장 가까이서 보는 그에게도, 히어로란 아주 멋진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준수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엘리베이터에 둘만 타게 되자 곧바로 말을 쏘아 붙여왔다.
“야, 야. 너도 곧 히어로가 될 거면서 왜 아니라고 했냐. 연구소 출신에 초능력 있으면 곧 히어로지. 그리고, 우리가 친구냐?”
“준수야, 세상이 어떤데. 등록증도 없으면서 초능력 있다고 하면 잡혀가. 그리고 밖에선 친구라고 소개하는 게 제일 낫다는 건 너도 동의했었잖아. 왜 이래, 취했어?”
“한 병 나눠 마셔 놓고 누굴 주정뱅이 취급이야.”
인상을 팍 쓴 준수가 한 걸음 옆으로 떨어져 로비에 불이 들어온 엘리베이터 버튼을 노려보았다. 서운하다는 걸 감추지 않는 모습에 영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준수 분명 오늘 좋은 날이라고 또 뒤에 계획을 잡아 놨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와인 든 손을 바꿔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준수의 손아귀 위로 슬며시 손을 겹쳤다.
“준수야, 우리 둘 다 마셨잖아. 차 타지 말고, 그냥 여기 방 잡자.”
“나 안 졸린데.”
삐진 와중에도 영중의 손은 잡아야겠는지 금방 아귀힘을 풀어 영중의 손을 붙잡는 모습에 안심했다. 많이 화난 게 아니구나?
“그럼, 산책이라도 하고 오자. 여기서 한강 가깝잖아.”
엄지로 손등을 살살 문지르며 비위를 맞춰오는 영중에, 금방 기분이 풀린 준수가 고개를 획 돌려 눈을 크게 뜨고 마주 봐왔다.
“데이트 신청이냐?”
“응, 데이트하자. 손잡고 걷자.”
“좋아.”
프런트에 와인을 맡기고 나간 한강은 구름이 짙게 낀 밤이었지만, 가로등과 강 건너 야경의 불빛으로 환했다.
손을 꼭 붙잡고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조경 사이에 난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옆으로 자전거 무리가 지나갔지만, 누구도 둘을 신경 쓰지 않았다. 밤에도 사람이 적지 않은 한강 공원이지만 밤이기에 암묵적으로 주위에 무관심한 분위기는 히어로에게도 잔잔한 일상을 선사했다.
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다가 의견 공방이 필요할 땐 보이는 벤치에 앉아 손을 놓지 않은 채 대화를 정리하고, 다시 일어나 걸었다. 꽃잎은 이미 비를 맞고 떨어져 푸릇해지기 시작한 늦봄. 축축한 이파리가 풍기는 진한 초록의 향기도 강의 물비린내를 다 가려주진 못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영중이까지. 준수는 모든 게 다 좋았다.
한강 둔치로 내려간 둘은 홀로 낚시하던 남성의 챔질을 구경했다. 화려한 동작 끝에 낚아 올린 것은 작은 재해였다. 준수가 곧바로 빛을 쏘아 재해를 처리했다. 유일무이한 빛의 히어로인 탓에, 번쩍이는 빛을 알아본 사람들의 이목이 끌리자 준수가 영중의 손을 잡고 황급히 달아났다. 날벌레가 얼굴에 부딪혔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실컷 달려 편의점에 도착해 잠시 테이블에 앉았다. 땀으로 흘러 내려온 머리칼에도 그저 웃음만 나왔다. 박장대소하던 둘은 숨을 고르기가 무섭게 허기를 느꼈다.
“야, 내가 라면 끓여올게.”
“그럼 난 마실 것 좀 골라올게.”
역할을 분담해, 먼저 계산하고 나와 앉아있던 영중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같이 온 그의 덩치에 걸맞은 대형 진돗개가 영중에게 머리를 비비며 쓰다듬으려는 손을 마구 핥아왔다. 라면을 다 끓인 준수가 빛무리를 소환해 라면 두 그릇을 동시에 들고 코너를 돌았다.
준수가 보이자 남자는 영중의 손뼉을 한 번 툭 치곤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릇을 내려놓은 준수가 드르르 칵 의자에 앉아 맥주 캔을 따며 무심하게 물었다.
“저 사람 뭐야? 키 크네.”
“아는 지인이야. 강아지 산책 중이기도 했고, 낯을 좀 가려서. 가볍게 인사하기엔 네가 좀 유명하냐.”
“흠, 그렇긴 하지.”
휴지로 손을 닦아내는 영중을 보며 젓가락을 뜯은 준수가 깔끔한 모양에 만족하며 영중의 라면에 꽂아줬다. 뒤이어 뜯은 건 비율이 엉망이었다. 혀를 한번 찬 준수는 튀어나온 조각을 정리하고 대충 손에 끼워 라면을 먹었다. 영중도 한 입 집어 먹었다. 면은 적당히 꼬들꼬들했다. 준수도 동의했다. 맛있었다. 둘은 가볍게 맥주 캔을 맞댔다. 준수가 남은 면을 먹는 사이 테이블 밑으로 손에 들린 걸 확인한 영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물 좀 사 오려고.”
영중이 편의점에 들어가고 혼자 남은 준수는 마시고 있던 캔을 비워냈다. 다 마신 캔을 바닥에 세워 단번에 밟았다. 단단한 구두 밑창에 캔이 단번에 납작해졌다. 캔 두 개를 더 밟고, 한 캔은 술이 남아있어 대신 다 먹은 라면 그릇들을 가지고 가 정리했다.
딸랑- 종이 울리고 영중이 나왔다. 묵직해 보이는 봉투에는 갖가지 음료가 들렸다. 당장 술 깨는데 좋다는 유명한 숙취해소제와 배 음료수, 이온 음료수 등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술과 안주를 기대하던 준수가 실망하든 말든 영중은 숙취해소제부터 까 준수의 입에 밀어 넣었다.
“아이씨, 맥주 두 캔 가지고 유난이야.”
“준수야, 난 술에 취한 사람이랑 하기 싫어. 이거 술 깨는데 좋다는 것들로만 사 온 거야. 이거 다 마시면 호텔에 도착했을 즘엔 술이 다 깨어 있을 거 같은데, 정 안 내키면 어쩔 수 없지.”
“야, 줘 봐.”
환과 병으로 된 숙취해소제들과 갖가지 음료를 다 비워낸 준수가 그사이 테이블 위를 정리한 영중의 손을 덥석 쥐고 경보하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에선 신호를 핑계로 힘껏 달렸다. 영중이 먼저 하고 싶다고 들이대는 건 귀했다. 그렇기에 준수는 얼마 있지도 않은 취기를 몰아내며 호텔로 걸음을 서둘렀다. 나올 때는 가깝던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호텔 앞, 달리다시피 하던 걸음을 늦춰 돌고 있는 회전문으로 들어가려던 준수의 손목에서 큰 소음이 울렸다. 긴급 경보였다. 출동 명령 알람. 익숙한 자동차 엔진음에 워치를 보던 준수가 뒤를 돌았다. 로비 앞으로 검은 세단이 들어와 정차했다. 히어로 준수의 출동 차량. 준수가 이번엔 영중을 바라봤다. 영중은, 준수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출동이네. 얼른 가 봐.”
성준수는, 오늘 술을 마신 걸 후회했다. 분명 자신이 술을, 마셔서 그런 걸 테니까. 되돌아보면 역시 좀 그랬다. 그래, 영중은 준수가 술 마시는 걸 달가워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영중에게서 깊은 그늘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현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짧게 브리핑을 들었다. 슈트를 갈아입을 여유도 없었다. 협회 예상 등급은 B. 준수가 낮에 싸운 재해의 등급도 B. 단독 처치 장면이 뉴스에도 나올 만큼, B급은 이례적인 등급이었다.
평소 같으면 C급만 나와도 테러급의 피해 규모가 상정되어 대응팀이 꾸려졌다. 그런데 하루에 B급을 두 번이나 상대하다니. 아까 봤던 영중의 표정이 떠올랐다. 깊은 그늘. 그건 걱정일까. 준수는 B급이라는 특이점이 무슨 일의 전조같이 느껴져 어떤 불안을 느꼈다. 역시, 술이 문제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은 불안한데 머리는 선명했다. 영중이가 먹인 숙취해소제들이 효과가 있긴 한가 보다. 분위기도 조졌으니 호텔이 아닌 집에 돌아가 있겠지? 아닌가. 걔도 술 마셨으니 운전 못 하나. 걔 성격에 대리를 부를 거 같진 않은데. 흠, 호텔로 돌아가면 다시 해주나? …빨리 돌아가야겠다.
도착한 조용한 상가 골목. 가로등 불빛조차 없는. 대피가 끝나 더욱 고요한 길거리에 준수는 어떤 안정감을 얻었다. 밤이라는 시간의 어둠은 준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빛을 다루는, 지구상에서 가장 빛나는 히어로였으니.
4주년의 데이트를 망쳤다는 짜증 같은 사사로운 감정은 현장에 들어서자 금방 사그라들었다. 준수는 빛무리를 생성해 자신을 중심으로 팔방에 띄웠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위험했다. 재해가 나타난 것치곤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준수는 꺼진 가로등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따라 이동하는 빛무리는 골목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길에서 길의 끝까지.
그렇게 한참을 걷던 준수가 문득 멈춰 섰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길 위에서 골목 안 한 나무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여덟 개의 빛무리가 다시 앞으로 이동했다. 일렁이던 그림자는 이내 멈춰 가만히 나무의 형상을 취했다. 누가 보더라도 나무 그 자체인 그림자는 조용히 빛이 멀어지길 기다리다, 어둠밖에 남지 않았을 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튀어나왔다. 이번엔 바닥 간판의 모습을 취한 그림자는 히어로가 갔던 반대 방향으로 가기 위해 다시금 몸을 옮겼다.
“야, 야. 뭐하냐? 재밌냐?”
누군 시발 밤일도 제쳐두고 달려왔건만. 길에 놓인 음식물 쓰레기 봉투의 그림자가 순간 크게 튀었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제야 재해는 준수가 빛무리만을 이동시키고 어둠 속에 계속 서서 기다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밝은 빛이 지나간 후라 그 뒤의 어둠이 짙어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로등의 불빛을 꺼버린 자신의 실수였다. 재해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서둘러 긴 그림자를 찾아 몸을 옮겼다.
“숨바꼭질이나 하자고 온 게 아닌데.”
준수는 재해가 들어있는 그림자를 향해 빛으로 만든 십자가를 꽂아 넣었다. 상대는 역시 B급답게 까다로웠다.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준수는 수십 개의 빛무리를 띄워 길 전체를 밝혔다. 빛이 교차하고 일대의 어둠이 옅어졌다. 그런 중에도 유난히 어두운 그림자 한 무리가 보였다.
저놈이구나.
다른 그림자로 이동해도 이미 위치를 들킨 재해를 준수는 놓치지 않았다. 재해는 밝은 골목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며 발악했다.
지금은 도망만 다니지만, 언제 자길 두고 달아나 무력한 시민을 해칠지 모르는 녀석이었다. 준수는 양팔을 교차하며 잠시, 아 전영중 데려올걸. 따위를 생각하며 상가 일대를 빛으로 가득 메워버렸다.
누구든 이곳에 성준수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빛무리. 영업이 끝난 시간에 대피도 마친 뒤였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그렇게 결국 그림자 밖으로 나온 드러낸 상대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사람?’
재해라 하면, 당연히 자연재해와 같은 뜻을 가진. 이상 수치의 증가로 발생한 자연 일부가 돌연변이 화한 지성 없는 무생물체로 인한 재앙. 빠르게 재해의 정의를 읊던 기억 한구석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분명, 성준수는 겪은 적이 있는 일이었다. 폭주 단계의 사람. 그것도 히어로가 아닌. 기억은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와 영중이와 재회하던 날의 향기까지 재현했다. 이상 수치 특유의 향기. 그렇게 준수가 완전히 상념에 빠지기 직전, 땅바닥을 굴러다니던 사람이 말을 붙여왔다.
“아, 재수도 없지. 바로 히어로한테 잡히다니. 그것도 완전 역속성.”
현실로 돌아온 준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십자가를 목에 대자 상대가 잠시 주춤했다. 눈치를 보더니, 히어로가 당장 자길 죽일 거 같지 않자 이내 다시 입을 놀려왔다. 아마 폭주의 영향으로 과흥분 상태인 것 같았다.
“내가 그림자에 숨어 지낸 지 좀 됐거든, 이제 숨어 사는 것도 너무 지겹고 싫었는데. 찾을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우연히 정보는 들었지만 아무리 그림자를 옮겨 다녀도 찾을 수가 없었어.”
재해인 줄 알았던 사람은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뭐, 알아서 정보를 불어주겠다는데, 마다하지 않았다. 현장의 음성은 손목의 장치를 통해 모두 협회에 전송하고 있었으니, 이제 곧 제압 인원이 올 것이다. 준수는 정보도 더 캐내고, 기다릴 겸 잠시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뭘 찾아다녔는데.”
“그야, 나 같은 사람들을 받아주는 곳이지.”
“그게 어딘데?”
“히어로에 대항하는 빌런 연합을 모른단 말이야? 푸하하. 히어로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불쌍해라!”
“…너 같은 사람이 뭔데.”
“안쓰럽기도 해라. 그야 너와 달리 우리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상대의 몸에 약물이 꽂혔다. 준수가 황급히 십자가를 치웠다. 아득하게 인지 너머로 무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재해를 제압했습니다. 선봉, 히어로 성준수. 재해와 복귀하겠습니다.”
그가 옆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선명히 보였다. 앞에 서 있던 오직 준수만이.
‘히어로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지.’
2장 : 박동
똑, 똑.
링거의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구소 특유의 냄새에 코가 마비됐다. 연구소에선 늘 이렇게 감각이 예민했다. 와중에 벽은 무슨 처리를 한 건지 바깥의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았다. 덕분에 예민해진 귀에 들리는 소리라곤 링거액이 떨어지는 소리와 심장 박동뿐이었다.
시간이 한참 된 거 같은데, 아직 링거액이 남았다. 자세가 불편해 다리를 뻗었다가 벽을 걷어찼다. 벽은 무사했는데, 뒤꿈치에 통증이 찌릿했다.
낮게 상욕을 뱉으며 침대 프레임 안으로 다시 다리를 집어넣었다. 창피한 건 알아서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이 짓도 네 번째였다. 이 정도 찼으면 적응될 법도 하건만, 여전히 자세는 불편했다.
침대 밖으로 뻗은 팔이 약간 저렸다. 다양한 신체를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침대는 이젠 다 큰 준수가 누워있기엔 버거웠다. 하긴,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부터 침대가 좁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그 뒤로 10년이나 더 지난 지금은 다리를 굽히다 못해 몸을 약간 접어야 했다.
채혈만 하면 될 줄 알았던 방문에 하필 히어로 슈트를 입고 오는 바람에 붙잡혀 버렸다.
“방금까지 현장에 있다 오신 거죠?”
“…네.”
어제, 호텔로 돌아갔던 준수는 영중이 없는 빈방에서 혼자 잤다. 밤이 늦어 따로 연락하진 않았다.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나오니 자신의 출동 차량이 대기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협회로 출근하던 참이었다.
아침 운동으로 잡은 건 재해가 아닌 강도였다. 번화가 한복판에서 칼부림하던 녀석을 마침 출근하던 준수가 잡았다. 이런 놈을 잡을 때마다 준수는 어릴 때 단순하게 자원봉사자 혹은 민간 용병 정도로 생각했던 히어로가 자경단에 제일 가깝다는 걸 체감했다. 그래도 상여금은 주니까 불만은 없었다.
어쨌든 길 가다 손 하나 까딱해서 잡은 범죄자도 일은 일이라. 현장에 있다 왔다는 걸 부정하지 못한 준수는 결국 붙잡혀 신체검사를 마치고 자가 회복 활성화제를 투여받았다.
똑, 똑. 반복되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자니 잠이 올 거 같아 자세를 옆으로 누웠다. 핸드폰은 들어올 때 반납해야 해 어디 연락할 수도 없었다.
‘영중이는 집에서 뭐 하려나. 또 나 나오는 뉴스 보나?’
어젯밤 잡은 재해 아마, 보안상 보도되지 않을 테고. 아침에 범죄자를 잡았으니 짧게라도 언급될법했다. 아무래도 쌓아온 명성이 있으니 작은 행동도 크게 보도됐다. 전영중을 생각하니 보고 싶어졌다.
어제 치사하게 자기 혼자만 집에 가버린 녀석이었지만. 히어로가 직업인 만큼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영웅은 다 그렇지. 가정보다 세상을 지키는 히어로.’
물론 영중이는 그런 부분에 대해선 다 이해해줬다. 감수해야 하는 건 영중이 아닌 준수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견뎌내야 하는 건 가끔 냉랭한 남자친구의 태도? 이건 준수가 이해하고 있으니 괜찮았다. 좋아하니까. 그냥, 곁에만 있어도 충분했다.
링거를 다 맞고 호출 벨을 누르자 익숙한 얼굴의 연구원이 들어왔다. 잠이 드는 약을 놓을 때마다 들어오는 사람. 준수는 익숙하게 자세를 바로 누웠다.
‘아, 이 약 맞은 거 알면 전영중이 싫어할 텐데.’
영중은 연구소를 싫어했다. 이해했다. 준수도 연구소는 별로였다. 태어나서 집보다 더 오래 지낸 연구소였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정이 들지 않았다. 사람도, 공간도.
그래도 준수는 부모를 잃은 어린 자신을 하대하지 않고 사무적인 태도로 대해줬던 연구원들에 크게 불만이 없는 편이었다. 애초에 히어로가 되길 원해 직접 자원했기에 나쁜 기억은 별로 없었다. 다른 연구소로 헤어진 영중이는 그곳에서 대우가 별로였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다시 재회했을 때의 모습이 충격적이었으니. 준수는 영중의 예민함을 다 이해했다.
그대로 잠들어 깨어나니 저녁이었다. 세단에 싣고 다니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정장은 클리닝에 맡겼다. 혹시 영중이 밥을 해놨을까 봐, 간단하게 포장마차에서 꼬치류를 쓸어왔다. 집에 들어와 보니 현관 복도에 작은 가방이 먼저 보였다. 쪼그려 앉아 열어보니 간단한 옷가지와 속옷이 들어있었다.
“영중아, 이게 뭐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부엌에 가니 영중이 이어폰을 끼고 뭘 적고 있었다. 식탁에 가방을 내려놓으니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귀를 연다.
“왔어?”
“이거 뭐야?”
“아, 나 좀 있다가 부산 다녀오게.”
짐작은 했다. 처음엔 쫓겨나나?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었기에 다시 살펴보니 속옷이 영중의 거였다. 그나저나 좀 있다? 오늘?
“부산? 며칠? 너 거기 아는 사람 있어?”
“하루. …그건 왜 물어보는데? 중요해?”
“아니, 약속 있는 게 아니면 나도 같이 가자고. 나도 데려가.”
“너 바쁘잖아.”
“시간 낼 수 있어.”
영중이 미간을 찌푸렸다. 준수가 고집을 피운다고 생각했다. 준수도 그걸 눈치챘다.
“아니, 진짜 된다고.”
“왜?”
그 질문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충동적이란 걸 알아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연구소에서 약을 맞고 와서. 히어로 재량으로 쉴 수 있는 시기라곤 더욱 말할 수 없었다. 영중이 연구소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이해했기에, 준수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가 없진 않았다.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고 가는 몇 마디. 스피커폰.
“네, 성준수 히어로 금일부터 명일, 휴가 신청되었습니다.”
정말 준수가 휴가를 받아냈다. 사 온 꼬치는 냉동실에 들어갔다.
5년 만에 처음 쓰는 휴가를 통보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싸 향한 부산. 최대한 서울에서는 멀리, 하지만 국내에 빠르게 복귀가 가능한 곳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쏙 들었다. 오랜만에 영중이랑 온전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당일 저녁, 부산에 도착한 둘은 호텔에 집을 내려놓고 곧장 밤바다로 향했다. 해변과 가장 가까운 숙소를 잡아 모래사장이 금방이었다. 둘은 시원한 차림으로 가볍게 해변을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시력이 좋지 않은 둘에게 밤바다는, 모래 너머 끝없이 펼쳐진 어둠으로 보였다. 언덕 위에 앉아 잠시 어둠이 주는 안정감을 누렸다. 습하고 짠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이제 어디 가?”
“자야지. 이 시간에 어딜 가”
시간이 아까웠다. 어디로든 가고 싶어 안달복달 못하는 준수를 보며 한숨을 내쉰 영중이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 어리광을 받아주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나 푹 쉬려고 내려온 김에 너도 같이 쉬라고 데려온 거야. 방에 침대 하나인 건 아직 못 봤지? 같이 누워서 쉬자.”
“좋아.”
사귀는 사이에 동거까지 하면 한 침대에서 같이 자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영중 선에서 기각되고 각방을 쓰게 된 이후로 준수는 같이 잘 기회를 놓치지 않아 왔다. 산만 한 덩치 둘이 넓은 침대를 두고 굳이 딱 달라붙어 한 베개를 같이 베고 꾸깃꾸깃 누웠다. 포근했지만 낯선 잠자리. 영중의 몸 냄새나 온도가 긴장을 누그러트렸다. 덕분에 준수는 낮에 잤음에도 다시 푹 잠들었다. 깊은 잠은 오랜만이었다.
어스름한 새벽, 이상 수치를 감지한 워치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제일 가까운 히어로 중 등급이 제일 높은 게 휴가 온 자신이라니. 유동 인구가 많은 만큼 히어로가 많이 배정되어 있을 관광지니까, 조금만 더 버텨볼까? 고민하던 준수가 옆을 더듬었다. 침대보의 온기가 싸늘했다. 빛무리를 띄우며 벌떡 일어났다. 옆에 누워있어야 할 영중이 없었다. 불이 꺼진 화장실과 사라진 신발. 준수는 워치의 지도를 열었다. 이상 수치는 호텔과 가까운 항구 인근에 좌표가 찍혔다.
재해를 찾아 달려온 항구 창고. 사방에 컨테이너가 즐비했다. 짠 바다 내음 사이로 찌든 금속 냄새가 가득했다. 준수는 빠르게 처리하고 영중을 찾으러 갈 속셈으로 슬쩍 밝아져 오는 하늘에 미리 큰 빛무리를 띄워냈다.
곳곳에 준수의 빛이 닿으며 그림자가 교차했다. 움직이는 물체를 찾기 위해 작은 빛무리도 내보냈다. 작은 빛무리는 규칙적인 패턴을 그리며 발목 부근을 날아다녔다.
수색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어느 한 구역에서 순간 거대한 어둠이 피어올랐다. 어둠은 모든 걸 집어삼키며 다가왔다. 이윽고 새벽하늘을 띠던 창고 일부가 지워졌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지독한 공허.
익숙한, 힘에 준수가 능력을 갈무리했다.
달려간 곳엔 영중이 있었다.
영중은 누군가의 몸통을 짓밟고 있었다. 짙은 어둠 탓에 빛이 넓게 퍼지지 않아 보이는 건 일부였지만 준수는 영중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영중의 발 주위로 일어난 작은 어둠이 꾸물꾸물 사람을 집어삼켰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에. 곁으로 다가온 준수가 영중을 붙잡고 얼굴을 비췄다. 가려진 얼굴을 보고 싶었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다행히, 영중은 평소같이 작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발화 능력을 쓰는 재해더라고.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만나서 쫓아와 버렸네. 일단 나도 히어로 지망생이니까.”
정말, 어지럽게 번쩍거리던 워치의 경고가 뚝 멈췄다. 조금 전 영중이 재해를 처리했을 때부터였다. 영중이 어둠을 걷어냈다. 새벽 창고에서 날 법한 냄새가 공간을 다시 채웠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살포시 태양 빛이 닿은 실내 공기가 깨끗했다. 준수는 자신이 느끼는 모든 특이점을 가볍게 넘겨버렸다. 영중의 말은 어폐가 없었다.
“오, 너 능력 제어가 능숙한데. 이 정도 실력이면 곧 자격증 시험 신청해도 되겠다?”
“뭐, 아직은 미숙하지. 그래도 현역인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자신감이 생긴다.”
“그래도 혼자는 위험하니까, 다음부턴 빨리 날 깨우던가 해.”
“걱정했냐?”
“그럼 안 했겠냐? 쯧, 얼른 들어가자.”
고개를 끄덕인 영중이 언제부터 잡혀있던 손목을 빼내 손바닥을 마주 잡았다. 그제야 준수의 긴장이 풀렸다. 어깨에 힘이 빠지자 급격하게 졸음이 몰려왔다.
“졸리다.”
“하하, 얼른 들어가서, 우리 내일 늦잠 자자. 점심에 일어나서 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야. 그래, 메뉴 생각해 둬. 점심까지 쭉 자자.”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난 둘은 까치집 지어진 머리를 대충 모자 하나로 가려 밖으로 나왔다. 해운대 골목은 따로 맛집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막 점심 장사를 시작한 아무 곳이나 들어가 낙지, 곱창, 새우가 들어간 볶음을 시켜 맛있게 비벼 먹었다. 특히 계란말이가 맛있다며 영중은 혼자 세 판을 먹었다. 실컷 배불리 먹고 산책할 겸 바다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한창 걷던 둘은 마침 옆에 선 버스에 미술관 세 글자를 발견했다. 영중의 손에 이끌려 무턱대고 올라탄 버스. 몇 정거장 뒤 내려 다시 두 블록 걸어 도착한 시립미술관은 다행히 문이 열려있었다.
둘 다 처음 구경하는 미술관은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덩그러니 놓인 돌부터 벽에 붙은 그림과 다양한 조형물들. 파도가 치는 영상관까지 감상을 서로의 귀에 속닥거리며 실컷 구경했다. 전시관의 구석 공간, 투과되는 빛을 이용한 조형물 앞에 놓인 소파를 발견해 준수가 먼저 앉았다. 에어컨 바람이 잘 드는 목이라 시원했다. 뒤늦게 자판기 음료를 뽑아온 영중이 음료와 함께 대화 주제를 던졌다.
“이런 전시관, 전에도 와본 적 있어?”
음료를 받은 준수는 질문에 관해 자기 생각을 늘어놓았다. 히어로가 되기 전까진 문화생활을 즐길 형편이 아니었고, 되고 난 뒤엔 서울이란 공간 자체가 지켜야 하는 일터로 느껴져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영중은 이해했다. 히어로는 상시 출동 대기를 해야 하는 직업이었고, 준수라면 관람보단 재해 처리를 우선시할 테니까. 그 일례로 둘은 흔한 영화관조차 가본 적이 없었다. 물론, 영중도 문화생활을 할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마찬가지로 준수와 다니는 게 다 첫 경험이었다. 그래도, 영중은 가끔 소망했다.
“혹시 몰라, 재해를 겪기 전에. 그니까 우리가 아주 어릴 적에 부모님이 데리고 와주셨을지.”
“네 말대로 진짜 그랬다고 해도 나한텐 기억이 없고. 기억하고 있을 사람도 세상에 없으니. 그 경험은 없는 일이 되겠지. 언제가 처음인 게 뭐가 중요하냐. 난 오늘 너랑 와서 좋아.”
“…정말 훅 들어오는구나.”
“왜? 설렜냐?”
“하하, 준수가 살맛 나나 보다. 우리 밖으로 나갈까? 나 조각 공원 보고 싶어.”
“밖을? 그래.”
해가 쨍쨍한 밖으로 나왔다. 푹푹 찌는 걸 보면 여름이나 다름없어 보였는데 아직 매미는 울지 않았다. 둘은 돌 위에 비대칭으로 얹어진 나무 따위를 구경하다 막 생겨난 작은 재해를 발견했다. 조각 공원의 조각품 중 하나였다. 준수가 곧바로 십자가를 찔러 넣었다. 막 생겨나 작게 꼬물거리던 재해는 재가 되어 흩어졌다.
갑자기 조각품이 사라진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곧바로 보안을 불렀다. 미술관 같은 공간은 재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상주 히어로가 있었다. 역시, 미술관 측 히어로가 준수를 알아본 덕에 둘은 다른 절차 없이 바로 풀려났다.
“유명한 남자친구도 조금은 쓸모가 있네.”
“고맙다는 말은 됐다.”
재해는 어느 한 점의 이상 수치가 일정량을 넘어 형태가 일그러진 것을 의미했다. 그 이상 수치의 기준은 불완전함. 재해안전학회의 발표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불완전한 건 인간의 모든 부산물이라 정의했다.
예술 작품같이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은 물론. 당산나무같이 인간의 마음이 모인 것까지. 모두 어느 한 점에 불안전함이 모였다는 점에서 이상 수치를 보이고, 곧 재해가 되었다. 최소한, 준수가 아는 정의는 이랬다.
햇볕이 뜨겁고 초록은 찬란했다. 옆을 보니 영중은 편의점에 들러 산 얼음 컵을 입에 털어 넣어 씹고 있었다.
“푸핫. 야, 너만 먹냐. 나도 더워.”
귀엽게, 진지한 생각을 못 하겠네. 준수가 덥다고 말하자 고개를 젖히라고 턱을 까딱인 영중이 곧 준수 입에 얼음을 쏟아 넣어주었다. 조준은 잘했지만 입보다 얼음 컵이 더 커 옆으로 몇 조각 흘렸다. 흘린 얼음 조각은 손에 쥐어 살살 녹였다. 까드득, 어깨 위 무겁게 내려앉은 햇볕을 얼음을 씹는 소리가 몰아냈다. 둘은 양 볼 가득 얼음을 물고 그렇게 역까지 걸어갔다.
버스랑 이동 시간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았지만, 둘은 첫 경험에 꽂혔는지 이참에 부산의 지하철까지 타 보자는 의견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타 본 부산의 지하철은 뭐, 별거 없었다. 서울이랑 크게 다른 바가 없게 느껴졌다.
몇 정거장 만에 다시 돌아온 숙소는 에어컨이 맞춰져 있어 시원했다. 뙤약볕을 걸어 다닌 둘은 가볍게 씻고 짐을 쌌다.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서울. 역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준수는 마중 온 검은 세단을 타고 현장에 불려 나갔다. 애초에 가볍게 챙겨 내려가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영중이 양손 가득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창 너머로 보였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가면 계란말이 해줘야지. 차가 코너를 돌았다. 몸이 조금 기울어졌다. 그제야 준수가 창에서 눈을 뗐다. 이럴 때가 아니지. 앞에 놓인 테이블 위 슈트를 집어 갈아입기 시작했다.
히어로 슈트. 히어로들이 현장에서 입는 복장. 초능력으로 만들어낸 특수 소재로 짜여 충격 완화 및 온도 조절, 섬유 자가 복구 등의 기능이 있었다. 빛을 다루는 히어로의 슈트는 그 특성을 뽑아 금색 포인트가 들어간 흰색이 주를 이뤘다. 이 색 자체가 곧 준수만의 상징이었다.
전영중은 색감이 존나게 안 어울린다고 칭찬 한 번 해준 적 없었지만, 슈트를 입고 금색 술이 달린 어깨 견장을 얹은 흰색 망토까지 메면 아주 근사하다고 느껴졌기에. 남몰래 자부심을 품었다.
도착한 현장에는 세 명의 히어로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출동한 히어로 수를 보니 보고 받았던 A급이 맞아 보였다. 물 형태의 재해는 빗물에 녹아들어 히어로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공격을 가하면 웅덩이를 옮겨 실체를 확인하기 힘들었다.
‘며칠 전, 이런 놈을 상대한 적이 있었지.’
비가 거세게 내렸다. 지난번처럼 모든 매개체를 차단하기엔, 주위에 방해되는 게 너무 많았다. 혀를 한 번 찬 준수가 자신이 아는, 또 다른 스타 히어로에게 지원 요청을 넣었다. 지원이 오기 전까지 힘을 아끼기 위해 후방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재해를 제압할 실력이 되지 않는 세 히어로도 자신들의 역할을 이해했다. 버티는 싸움. 물은 베어도 물이었다. 누가 불리한 싸움인진 분명했다. 히어로 세 명의 몸에 하나둘 구멍이 늘었다. 비 때문에 피가 잘 멎지 않았다. 상처가 늘수록 움직임도 둔해졌다.
자신을 공격하는 히어로들이 이젠 만만하다 느꼈는지, 숨어다니던 재해가 빗물을 모아 덩치를 키워나갔다. 땅 위의 오물이며, 히어로들의 핏물까지 빨아들인 재해는 양감을 가진 거대한 물 덩어리가 되었다. 커진 덩치만큼 점차 쏘아지는 물줄기가 매서웠다.
물줄기를 맞은 건물에서 스파크가 튀며 폭발이 일어났다. 운도 없지. 딱 한 발 놓친 곳이 하필 가스가 지나는 곳에 닿았나 보다. 구멍이 뚫린 건물들에서 잔해가 떨어졌다. 준수는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돌멩이를 빛무리로 막았다. 단면이 거친 잔해들은 닿기만 해도 치명적이었다. 물에 젖은 피부는 상처를 짓무르게 했다. 특히, 얼굴은 곤란했다.
준수가 방패를 띄워 주위를 최대한 보호했지만 차선책이었다. 결국 직접 해결하기 위해 빛으로 만든 십자가를 검처럼 꼬나쥐었다. 그때였다. 재해를 중심으로 모였던 물 덩어리에서 긴 줄기가 뻗어 나와 나선형으로 누군가의 주위를 돌았다. 물을 다루는 히어로가 현장에 도착했다.
누가 스타 히어로 아니랄까 봐, 등장하는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혔다. 물을 조종하는 히어로 박병찬은 재해의 몸을 구성하던 물의 주도권을 단번에 빼앗았다. 그 물로 장벽을 펼쳐 빗물을 막은 모습에 준수가 튀어 나갔다. 십자가를 크게 돌려 재해가 있던 자리에 꽂았다.
먼저 상대하던 히어로들이 장벽 밖으로 대피했다. 준수는 땅에 꽂힌 십자가에 빛무리를 응축했다. 순식간에 장벽 안이 뜨거워졌다. 자꾸 실체를 숨긴다면, 매개를 없앨 뿐. 준수가 방벽 밖으로 달려 나왔다. 곧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벽 내부가 수증기로 가득 찼다. 물로 만들어진 방벽도 점차 얇아졌다. 결국 안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며 방벽의 천장이 증발해 뜨거운 증기가 뭉게뭉게 하늘로 올라갔다.
“처리했나? 비 때문에 잿가루가 안 보이네.”
누군가 입을 열었다. 불길했다. 바닥에 앉아 치료받던 히어로 중 하나였다. 그는 저 폭발이, 재해가 죽으며 발생한 작은 이슈로 여기는 듯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상황이 이상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고 이상 수치로 인한 잿가루가 쓸려 내려간다? 그럴 리가. 재해가 사라지며 발생하는 잿가루는 이미 그 자체로도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거기 너. 이번이 몇 번째 출동이냐?”
“두 번째입니다.”
“…당장 후방으로 물러나. 다시 온다.”
“네?”
이미 느끼고 있었는지, 박병찬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늘로 흩어지고 시간이 지났건만. 아직 맨눈으로 보이는 수증기가 하늘을 덮었다. 수증기가 모인. 안개라고 하기엔 높이 떠 있는 낮은 구름에서 번개가 일었다. 준수의 머리에 아까의 폭발이 스쳐 지나갔다. 저 재해는 물이면서도 전기 속성을 띄고 있었다. 아마 후자의 힘은 히어로들의 행동을 둔하게 하는 게 다일 정도로 미약했나 본데. 수증기가 되며 번개를 일으키기 좋은 모습을 띠게 됐다.
준수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이번 재해를 좀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A급은 역시 A급이었다. 그나저나 다루는 힘이 두 가지라니. 이런 일은 흔하지 않았다. 뭔가 위화감을 느끼려는 찰나.
콰쾅- 번개가 내리쳤다.
재해가 만들어 낸 번개는 어떤 의지를 띠고 온갖 피뢰침을 무시한 채 하어로를 향해 곧장 뻗어왔다. 비가 멎질 않았다. 땅은 위험했다. 준수가 만들어 낸 빛무리에 병찬이 올라탔다. 그래, 준수 혼자였다면 저걸 어떻게 처리하나 고생 좀 했겠지만. 병찬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물을 다루는 히어로. 그는 적어도 이런 환경에서는 최강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자였다. 다가오는 번개 줄기를 물줄기로 흘려내며 둘은 공중에서 재해에 접근했다.
“수증기, 아니 이 구름을 좀 모아줄 수 있을까? 음, 아까 너랑 내 역할을 반대로 해보자는 뜻이야.”
“제가 가도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사실 이런 환경이면 준수 너 없이도, 공중에서 버틸 수 있어.”
등을 팡팡 두들긴 병찬이 허공으로 한 걸음 나섰다. 흐르는 비를 밟고 서 있는 병찬의 남색 망토가 휘날렸다.
경외감이 절로 들었다. 물론, 화면 너머 다른 이가 보기엔 빛을 타고 날아다니는 준수도 마찬가지로 느껴질 터이다. 히어로 준수는 자신이 지켜야 할 이들을 위해 다시 하늘을 갈랐다. 갈라진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준수가 빛이 닿는 범위를 키워 재해 전체를 비췄다. 재해의 힘이 약해졌다.
병찬을 공격하던 재해가 준수로 대상을 바꿨다. 아직 빛이 닿았을 뿐인데, 벌써 위협이 된다 느껴지나 보다. 지능이 괜찮은 놈이었다. 준수가 자신을 증발시킨 걸 복수라도 하듯 공격이 퍼부어졌다.
번개가 준수를 향해 땅이 아닌 하늘로 솟아올랐다. 빛을 다루는 준수에게 순간 번개가 하나의 큰 빛줄기로 보였다. 하지만, 그건 눈의 착각이다. 절대 빛으로 생각해서 손을 갖다 대면 안 됐다. 준수는 생존에 가장 효율적이라고 느끼는 충동을 억누르며 빠르게 이동했다.
빛 방패를 두른 주위로 번개가 지나가며 엄청난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는 중에도 준수는 쉬지 않고 이동해 구름 범위 바깥에 가장 익숙한 십자가들을 띄웠다. 그리고 돌렸다. 재해를 모르기 위해 바람이든 열이든 뭐든 이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줄어드는 구름에 따라 빛이 점차 모여들었다. 착실하게 재해 크기가 줄어들었다. 먹구름으로 어두운 하늘 아래 떠 있는 타원형의 빛의 구. 준수는 제 몫을 다 했다.
병찬이 나설 차례. 그의 손짓에 따라 구름 너머에서 용이 나타났다. 준수가 공격받는 사이 비와 먹구름에서 모은 물 덩어리로 빚어낸 것이었다.
병찬의 용은 재해가 갇힌 빛의 구를 삼켰다. 재해를 삼킨 용이 하늘을 천천히 유영했다. 배 안에서 빛나던 구가 점점 작아지다 이내 사라졌다. 겉으론 보이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그 끝에 패배해 한 방울로 응축된 재해는 곧 태양광에 증발했다. 소멸이었다. 준수가 빛을 거뒀다. 흩날리는 잿가루 위로 햇빛이 지나갔다. 반짝반짝 빛이 잘게 퍼졌다. 비가 그쳤다. 작전 종료, 히어로의 승리였다.
도어락 소리가 나기 무섭게 준수가 문을 벌컥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영중이 복도 끝에서 고개만 삐죽 내밀었다.
“수건 좀 가져와 줘.”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이 꽤 애처로웠다. 오랜 경험으로, 애인이 밖에서 씻고 오는 걸 싫어하는 걸 아는 준수가 옷을 갈아입기 위한 최소한의 물기만을 닦아내고 바로 돌아온 참이었다. 예상대로 영중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대답 없이 수건을 대놓고 등 뒤에 숨겨 다가왔다.
팔을 뻗는 준수를 무시하며 영중이 면밀하게 상태를 살폈다. 몸에서 풍기는 물비린내에 카라 아래 남아있는 모래.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자 얼굴은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차가운 볼에 따뜻한 손이 닿자 살짝 머리를 기대어오는 모습에. 영중이 패배를 선언하듯 수건을 펼쳐 머리칼을 살살 말려주었다.
“다른 곳은 좀 있다 확인하자.”
“나 괜찮다니까. 얼굴 보고도 못 믿냐.”
“…확실히 얼굴은 멀쩡하네.”
영중이 팩하니 뒤돌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준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당연하지, 얼굴만은 존나 멀쩡하지. 성준수가 생각하기에 전영중이 자길 봐주는 이유는 얼굴 딱 하나인 거 같았으니, 준수는 현장에서 본인 몸뚱아리를 향해 들어오는 공격 중 얼굴을 최우선으로 보호했다. 그게 피한다고 다 피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노력은 해볼 만했다. 얼굴에 큰 흉터라도 생겼다가 나중에 이상 수치가 높아진 영중이 자길 못 알아보고 사고 치기라도 한다면. …그런 일은 최대한 일어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냥, 얼굴만 전영중이 아는 형태로 지키면 되는 거 아냐? 어렵지 않지.
대충 물기를 닦고 곧장 샤워하러 욕실로 향했다. 아까부터 등줄기에 물이 흐르는 느낌이라 찝찝했다. 옷을 벗어 찬장에 넣고 물을 틀었다. 식은 몸을 덥히려 따듯한 물을 틀었다가 낮게 비명을 지르며 미지근한 물로 돌렸다.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비명이 듣고 달려온 영중이었다. 준수의 발아래 흰 욕조 위로 빨간 핏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영중은 눈으로 준수의 몸을 슬쩍 살피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차라리 지랄이라도 했으면 같이 대거리라도 하련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영중이 거슬렸다. 속이 답답했다. 전영중은 말을 하는 게 나았다. 영중이 입을 꽁 다물면 준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단이 없었다.
네가 하는 일이 뭔지. 네가 왜 바쁜지. 왜 너한테서 자꾸- 그 냄새가 나는 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늘 기다렸다. 말을 해도 되는 거라면 해줬겠지. 네가 예민한 이유가 다 있겠지. 그냥,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말해주겠지. 그런 부분은 내가 다 이해할 테니까, 단 하나.
준수는 영중이 자신에게 감정만은 솔직하길 바랐다.
네가 날 안 좋아해도, 내 행동이 거북해도 괜찮으니까 참지 말고 있는 그대로 티 내. 준수는 영중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때가 제일 –두려웠다- 거슬렸다.
욕실의 불이 깜박거렸다. 몇 번 만에 밝은 시간보다 어두운 시간이 더 길어졌다. 준수는 따가운 부위를 피해 대충 비누칠했던 몸을 마저 헹궜다. 어차피 들키기도 했고, 알아채고 나니 이젠 옷을 입으면 따가워서 바지만 주워 입고 나가보니. 거실 테이블에는 구급상자가, 부엌 식탁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일단 영중이 있는 거실 소파에 먼저 가서 앉자, 정답이었는지 영중이 구급상자를 열었다.
“등, 보여줘.”
영중의 손에 비해 약품들은 다 작아서 뭘 들었는지 보이질 않았다. 준수는 눈치껏 -나 회복 활성화제 맞은 지 얼마 안 돼서 괜찮아- 따위의 말을 삼켰다. 진짜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영중아, 난 히어로잖아.’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준수의 가방이 싸져 현관에 놓이게 될지도 몰랐다. 영중이 자길 걱정했다는 건 기분은 나쁘지 않았기에, 준수는 알아서 닥쳤다.
뭐, 연고겠거니 싶었던 약통은 소독약이었다. 화상 상처에 민간인이 자격증 없이 소독약을 막 사용해도 되는 건가? 현장에선 다친 줄도 몰랐던 상처가 지금은 너무 아팠다.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는지, 영중이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많이 화난 게 아니구나. 다행이다. 긴장이 풀린 준수도 실없이 웃었다.
“전영중 왜 웃냐.”
“네가 웃겨서.”
“그러냐.”
붕대를 감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몸통 앞을 감기 위해 가깝게 붙을 때마다 영중의 온기가 느껴졌다. 다시 멀어지는 온기가 아쉬울 정도로. 준수는 그냥 이대로 올라타서 거사를 치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접어 넣었다. 그러기엔, 좋지 않은 눈 시력에도 영중이 만들어 놓은 식탁이 너무 선명하게 잘 보였다.
처치가 끝났다. 준수는 영중이 건네준 상의를 입고 식탁에 가 앉았다. 식탁 한가운데 냄비를 두고 주변에는 열무김치, 갓김치, 오이무침, 물김치, 파김치, 계란프라이, 장조림, 고사리무침, 콩나물무침이 올라와 있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장조림이랑 파김치는 원래 냉장고에 있던 거고. 나머지는 처음 보는 반찬들이었다. 주로 손이 많이 가는 반찬들. 준수는 영중이 화가 나면 번거로운 음식을 만들며 화를 삭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마터면 진짜 쫓겨날 뻔했다. 준수는 무의식적으로 꺼져 있는 텔레비전을 쳐다봤다. 역시 다 보고 있었구나. 하긴, A급 재해가 구름이 되어 번개까지 치는데 생중계를 안 하기도 어려웠겠다. 영중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느껴졌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내 걱정했어?”
“그럼 안 돼? …준수야. 제발 네 몸도 좀 챙겨. 그걸 왜 네가 잡으러 가?”
“내가 필요하다고 역까지 데리러 왔는데 그걸 무시하냐? 야, 야. 그리고 결국 내가 안 갔으면 그거 피해 존나 컸어.”
“너 말곤 잡을 사람이 없데? 아주 세상 모든 재해를 네 손으로 잡아야 만족하겠다? 너 그거 병이야. 영웅병이라고.”
“말 그딴 식으로 하지 마. 히어로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게 존나 이상하다고! …너 오늘까지 휴가잖아.”
영중은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참는 거였다. 준수는 그런 영중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이상한데? 그 표정을 읽은 영중은, 다시 말을 삼켰다.
식탁 위 침묵이 이어졌다. 아직 밥 한술 뜨지 못한 상태였다. 영중의 표정이 너무 가라앉아서, 준수는 결국 영중이 싫어할 걸 알면서도. 중요한 말을 꺼냈다.
“오늘 내가 다쳐서 그래? 걱정하지 마. 어차피, 금방 나아. 너도 알잖아, 우린-”
“준수야. 조용히 하자.”
준수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내쉬며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던 영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이 좀 식었다. 다시 덥힐게.”
“괜찮아. 식어도 맛있어 보이는데.”
“너 오늘 비 맞았잖아. 따뜻하게 먹어.”
탁, 탁! 가스레인지에 불이 붙었다. 영중은 식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등을 보였다. 찌개가 끓을 때까지 지켜보겠다고 저러는 거야 지금? 준수가 짜증을 참아냈다.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말본새가 저게 뭐냐? 내가 시발 시민만 지켜? 너도 지키는 거잖아.’
갑자기 억울했다. 한 소리 더 이어가려던 준수의 기척이 느껴졌는지. 영중이 말을 꺼냈다. 여전히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서.
“우리. 점심은 부산에서 먹고 저녁은 서울에서 먹네.”
“지금 시간은 야식이지. 뭐야, 아직 저녁 안 먹었어?”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지. 네가 문자로 기다리라고 했잖아.”
“아, 맞다. 계란말이.”
“갑자기 웬 계란말이? 반찬이 부족해?”
한쪽 눈썹이 올라간 영중이 뒤를 돌았지만, 준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없었다. 부엌으로 곧장 들어온 준수가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왔다.
“계란말이를 그렇게 먹고 싶어? 해줘?”
“아냐, 넌 앉아있어. 내가 해줄게”
준수가 몸으로 툭툭 영중을 밀어냈다. 영중은 왠지 기분이 상해 순순히 밀려나지 않고 위아래로 준수를 훑으며 말했다.
“네가? 계란 아까우니까 그냥 내가 할게.”
“됐어. 계란말이 그거 충청도 사람 영상 보니까 쉽게 할 수 있겠던데?”
“아니…. 하. 프라이팬 이걸로 써.”
영중이 대놓고 미덥지 않은 얼굴로 프라이팬을 꺼내줬다. 기름은 이거, 소금이랑 후추는 여기. 허브솔트 쓸 거면 찬장 안에. 영중의 손을 따라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알았어. 가서 앉아있어.”
애써 긴말을 삼켰다. 보기에 쉬워 보이고 맛있었다면 그 사람이 잘하는 거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고 싶었지만. 말았다. 준수가 지금 왜 저러는지 한편으로는 이해가 돼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나름대로 관계를 좋게 만들겠다고 노력하고 있는데 딴지를 걸기엔, 장난으로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 마디만 더 나온다면 크게 싸울 느낌. 영중은 준수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준수가 아니라- 구조였으니까.
찌개가 먼저 끓어 중간에 영중이 가져왔다. 지나가며 조언도 해줬다. 준수야, 계란은 약한 불로 요리해야 하는 거 알지? 아, 시바거-. 응, 몰랐구나. 영중은 마음을 비우고 기다렸다. 아, 계란프라이 식었겠다. 다섯 개나 부친 반숙 프라이가 윤기를 잃어갔다. 영중이 찌개 뚜껑을 열어 프라이 접시 위에 얹어 뒀다. 준수는 완숙이든 반숙이든 다 잘 먹으니까. 그리곤 슬쩍 접시를 준수 쪽으로 밀어 뒀다.
몇 분 뒤 준수가 뿌듯한 얼굴로 계란말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진한 갈색 계란말이. 크기는 또 왜 이리 큰지. 영중은 웃는 얼굴로 물었다.
“계란 몇 개 썼어?”
“8개.”
오. 감탄사를 뱉은 영중이 접시를 받아 자기 앞에 가져다 놨다. 자연스러운 행동에, 준수가 물었다. 나는? 넌 프라이 먹어. 영중이 접시 위에 덮인 뚜껑을 열자 거의 완숙에 윤기가 흐르는 계란프라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영중의 식사량을 아는 준수가 양보했다.
어차피 영중이 먹으라고 만든 거라 많이 먹을 생각도 없었다. 맛이나 좀 보려고 했건만. 그래도 계란프라이는 맛있었다. 차돌이 들어간 된장찌개도, 여러 종류의 김치와 나물무침들 전부 맛있었다.
준수가 맛있다고 칭찬하자 입안 가득 계란말이를 넣어 먹고 있던 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네. 저렇게 좋아하는데, 자주 해줄까? 준수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영중은 쓰고 짠 계란말이와 함께 실은 오늘 하려고 했던 말을 마저 삼켰다. 앞으로 더 힘들어질 텐데, 그냥. 이 상태로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헤어지지 않아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입맛이 썼다. 영중이 물을 마셨다.
“아, 그러고 보니 거실 화장실 전등 나갔더라.”
시간은 계속 흐르고, 수명이 다한 필라멘트는 끊어진다.
3장 : 고조
날이 갈수록 재해의 등급이 높아졌다. 등장 빈도 또한 너무 잦았다.
이전까지, A등급 이상의 재해는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게 보통이었다. 지금같이 매일 일어나는 재해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
협회 연구소의 치료로도 바로 다 낫지 못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히어로가 매일 생겨났다. 유례없는 히어로 인력난이었다.
결국, 정해진 운명처럼 사건이 다가왔다. S급 재해의 도심 출몰. 그 재해는 고래의 형상을 하고 하늘을 날았다.
서울 종로구 종묘 위 출몰한 재해는 천천히 하늘을 유영했다. 가벼운 꼬리 짓 한 번에도 광풍이 일며 유리창이 깨졌다. 방향을 트는 몸짓 한 번에 온갖 구조물이 굉음을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이동 경로를 귀 아프게 외쳐대는 사령탑에 관심이 없어도 외워졌다. 고층 빌딩 숲으로 유명한 종로는 움직이기만 해도 풍압으로 유리가 깨지는 초거대 재해가 출몰하기엔 장소가 너무 좋지 않았다.
종로3가역 인근에서 고래가 하강했다. 강남에서 출발한 준수는 이제 막 남산터널톨게이트에 진입했다.
무전을 들어보니 먼저 도착한 히어로들끼리 고래의 몸통을 묶으려 하고 있었다. 동물계 재해의 대처법 중 하나였다. 자연계와 다르게 동물계는 죽는다고 모든 흔적이 재가 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흘린 피나 잘린 살점들은 그대로 남기고 사라졌기에. 이렇게 특대형의 재해는 도심 밖으로 데려가는 게 정석이었다.
이동 차량이 터널에서 빠져나왔다. 재해는 여전히 종각역을 향하고 있었다.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특수 소재로 만든 그물이 준비됐다. 몸통 지느러미를 단번에 감싸기 위해 허공에서 두 히어로가 서로 교차했다.
그러나 그때, 등 지느러미를 스치는 그물에 눈치챈 재해가 급하게 몸을 뒤틀었다. 위로 치솟아 반원을 그린 재해의 꼬리에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주위에서 손 쓸 도리도 없이 두 히어로가 땅에 처박혔다. 푹 꺼진 아스팔트 파편 주위로 피가 낭자했다.
교통경찰들이 반대 방향의 차선까지 열어 대피하는 시민들 도왔다. 여기서부턴 날아가야 했다. 준수가 세단에서 내리자, 이미 차량을 알아봤던 시민들이 히어로의 이름을 연호했다. 빛무리 위에 올라타, 하늘에 떠오르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고래가 다시 움직였다. 쇼맨십은 여기까지. 준수가 빠르게 이동했다. 시민 대피 및 건물을 보호하던 주위 히어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보호막을 치고 맞바람을 불러 힘을 상쇄해도 역부족이었다. 준수가 앞을 막아서기엔 아직 거리가 좀 남았다. 정확한 거리를 가늠하며, 이를 악물고 빛으로 만든 십자가를 몸통 주위에 돌려 크기를 키웠다.
쏘아진 빛이자 십자가가 그들 앞에 꽂혔다. 주위 건물보다 큰 십자가는 재해가 불어낸 바람을 옆으로 갈랐다. 모두 빛의 위명 아래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망토가 휘날렸다.
“히어로 준수, S급 재해 출몰 종로 상공. 현장 참전.”
준수 하나 더 한다고 상황이 역전되진 않았지만, 준수가 가지는 상징이. 모두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줬다.
방금 일어난 사태를 본 협회 본부에서 등급이 낮은 히어로들을 모두 시민 대피 구역 경계로 빼고, 서울 전역에 있는 A등급 이상의 히어로를 긴급 소집했다. 재해는 그러는 와중에도 천천히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히어로들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건물 사이가 아닌 도로 위를 날도록 유인했다. 고래를 추락시킬 부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종각역 상공. 웬만한 빌딩 두 채 크기의 고래를 땅에 내려놓기 마땅한 부지가 당장은 없었다. 이대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는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지속됐다.
광화문. 소집 명령을 받은 히어로들이 대거 모여있었다. 광장에 천막을 치니 임시 현장 지휘소가 생겨났다. 빠르게 인원이 모인 만큼 긴급 브리핑이 진행됐다.
“지금 이곳에선 북악산이 가장 가깝습니다.”
“안 됩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경복궁과 청와대 위를 지나가야 합니다.”
“지금처럼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간다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북악산이 아니라면 최소한 남산까지 데려가야 하는데. 지금 종묘에서 종각역으로 오는 데만 이미 천문학적인 피해가 났습니다.”
방안을 마련하던 이들 사이로 엄청난 소음이 다가왔다. 누군가 천막을 젖혔다. 저 멀리서 점차 다가오는 아득한 크기의 등 지느러미가 보였다. 광장에 모인 히어로들의 기척을 느낀 건지 재해가 한 차례 더 높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종각역 상공. 재해가 가까이 붙어 경호하던 히어로 일부가 굉음에 추락했다. 인근 건물의 유리창이 모두 깨지며 파편 그 위를 덮쳤다. 준수가 손을 휘둘러 떨어지는 히어로 주위에 방패를 둘러주었다. 그러느라 손이 떼진 한 쪽 귀의 무전기가 터지며 이명이 들렸다. 자꾸만 액체가 흐르는 간지러운 느낌에 귀를 긁으려다 참았다.
주위에 늘어난 빛무리가 신경에 거슬렸는지 재해가 몸을 크게 휘둘렀다. 내로라하는 은행과 건설사의 본점 빌딩이 중간부터 부러져 추락했다. 다른 히어로들이 달려들어 무너지는 건물을 받쳤다. 준수가 십자가를 검처럼 들고 그들을 위협하는 지느러미를 잘라내려 달려들었다. 아직 무사한 무전기에서 급하게 전언이 들려왔다.
바로 앞이 문화재니, 이곳에선 재해를 자극해선 안 된다는 명령.
준수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는 사이에도 이동한 재해의 꼬리에 맞아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의 본사가 뒤로 무너졌다. 빌딩은 청계천 위로 넘어가 뒤쪽 건물을 덮쳤다. 워낙 높은 건물인 탓에 도미노처럼 여러 건물이 넘어지려 했다.
급한 대로 준수가 무너지는 건물 사이로 달려들었다. 빛으로 두 주먹을 구현해내 힘껏 밀었다. 금방 후회했다. 이미 허리가 꺾인 건물을 어떻게 하지. 이걸 떠받치고 있는 것도 낭비. 다시 세운다 한들, 주저앉을 게 뻔했다. 시민이 대피한 것은 확실한가? 재해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이 건물이 무너지면 서울 시청 건물까지 영향이 갈 텐데. 살살 내려놓을까. 건물 네 개가 겹쳐 있어서 혼자선 힘들어. 앙다문 입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준수야, 나와. 네가 할 일은 따로 있잖아.”
떠받치던 무게가 줄어들었다. 꺾인 건물의 잔해가 일제히 떠올랐다. 광화문에서 대기하던 히어로가 왔다. 병찬이 청계천의 물을 이용해 건물을 감쌌다. 근처 야외 주차장 부지에 내려놓는 걸 도왔다.
“형, 안 무거워요?”
“물도 무거운데 공중에 띄우잖아. 난 물리법칙에 구애받지 않아.”
“그건, 부럽네요.”
“빛은 가벼운가?”
“아무래도요.”
한 차례 위기를 벗어나자 잡담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가면 영중이랑 손잡고 같이 영화를 봐야겠다.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냈다. 지지직- 지지직. 무전기 너머가 너무 시끄러웠다. 그래도 중요한 명령은 알아들었다.
‘재해를 녹지광장으로 데려가라.’
“녹지광장? 그, 경복궁 옆에 있던 공터 맞죠?”
“응, 최근 공원처럼 바꿔놨다는데. 안 가봐서 잘 모르겠다.”
“궁이랑 너무 가깝지 않아요?”
“준수, 너 무전기 고장 났구나? 20분만 시간을 벌어달래. 예정에 없던 루트라서 시민 대피도 해야 하고, 경복궁 주위에 방어막 생성이 가능한 히어로를 전부 배치하고 있다는데 수가 좀 부족해서 베리어 기기도 설치해야 하나 봐.”
“저희는 안 불러요?”
“아무래도, 우리는 재해를 유인하는 역할.”
고개를 끄덕였다. 재해가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주위에 달라붙는 히어로가 거슬리는 듯 몸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고래의 꼬리 주위로 큰 힘이 모여들었다. 위험해. 준수가 꼬리를 노리고 기다란 빛을 투척했다. 공격은 허무하게 막혔다.
파도가 일었다. 도심 한가운데에 바다가 몰아쳤다. 병찬이 그 움직임에 힘을 가해보려 하였지만 실패했다. 결국 정면을 막았던 준수가 파도에 휩쓸렸다.
터지는 소리만이 계속 이어졌다. 도로 양쪽의 건물이 무너져 땅이 울리고 그 폭풍으로 더 날아간 준수는 결국, 신호등에 몸을 부딪치고서야 멈춰 설 수 있었다.
고통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이러니하게도 폐 깊숙이 들어오는 건 물이 아닌 공기였다. 숨이 쉬어져서 다행이다. 여기가 정말 바다였다면 바로 익사였다. 실체는 없지만, 그 힘만은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능력. 히어로처럼 초능력을 쓰는 초대형 고래형 재해.
“요즘 자꾸 능력을 두 개 이상 가진 재해가 나오는데. 이게 말이 되나?”
더 멀리 날아갔다가 돌아온 병찬이 부러진 팔을 맞추며 물었다. 간이용 알약 형태 활성화제를 먹는 걸 못 본 체하며 준수도 제 몸 상태를 확인했다.
“일단, 어떻게든 해봐야죠.”
얼마나 날아온 건지, 옆에는 벌써 광화문광장이 보였다. 이순신 장군 동상 발치에 바다가 찰랑거렸다. 수면 아래로 자동차가 한 대 두둥실 지나갔다. 저런데도 실체가 아니라고. 쯧. 아니꼬웠지만 이미 몸으로 겪어 봐서 더 부정할 수 없었다.
준수도 활성화제를 하나 삼키며 너덜너덜한 몸 수습해 일어섰다. 같이 S급의 위력을 톡톡히 맛본 히어로 슈트의 자가 복구도 시작됐다. 재해는 시선을 빼앗는 히어로들을 잡으려 몸부림쳤다. 타이밍을 보던 둘의 근처에서 뜬금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르릉-
“응? 자전거?”
신호등을 밟고 서 있는 둘의 아래로 무언가가 지나갔다. 흔하게 보이는 초등생용 분홍색 네발자전거였다. 자세히 보니 보조 바퀴가 하나 없었다. 그럼, 세발자전거인가? 병찬이 중얼거리는 사이 여자아이가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광장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 어?”
“…시민은 다 대피한 거 아니었어요?”
뒤를 돌아보니 온갖 잔해로 망가진 길만이 보였다. 저 길을 저 어린이 자전거로 지나왔다고? 준수와 병찬의 눈이 마주쳤다. 광장에서 큰 소음이 들려왔다. 우리 방금 민간인을 현장 지휘소에 들여보낸 건가? 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하기에, 이 중에서 안전 구역까지 가장 빠르게 다녀올 수 있는 게 준수였으니.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 셈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찬은 재해와 준수를 번갈아보다가, 팔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럼 난 재해 쪽으로 가야겠다~”
호기심은 가득했지만, 준수에 이어 자신까지 현장을 이탈하기엔 전력 손실이 너무 컸다. 나중에 준수한테 물어봐야지.
광화문광장. 기계가 가득한 천막이 열려있고 그 안에 높은 사람들이 인상을 썼다. 아까 봤던 말총머리의 여자아이가 덩치 큰 히어로에게 붙들려 발버둥 쳤다.
“우리 엄마라고요! 엄마를 괴롭히지 마!”
악을 쓰는 아이의 반항이 거셌다. 몸통을 붙잡고 있던 히어로가 나가떨어졌다. 아무리 애라서 봐줬다고 해도, 민간인에게 현장 히어로가 나가떨어져? 심상치 않은 아이였다. 아직 거리가 남았던 준수가 아이 주변에 여덟 개의 빛기둥을 꽂았다. 아이가 위를 쳐다봤다. 높이를 가늠하는 듯한 모습에 뚜껑까지 마저 닫았다. 순식간의 창살에 갇힌 아이가 사나운 얼굴로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잇따른 소란에 흰 가운의 무리가 다가왔다. 문양을 보니 준수도 아는 곳이었다. 용산 연구소. 맨 앞에 있던 사람이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덩치 큰 히어로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재해를 엄마라고 부르며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차갑던 연구원의 시선이 아이에게 가 닿았다. 뒤에 있던 다른 연구원이 서류 꾸러미를 몇 번 들춰보더니 귓속말을 건넸다.
방긋, 순식간에 그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이를 위한 미소가 아닌, 순수한 기쁨의 얼굴.
“잘 찾아왔습니다. 역시 딸답군요. 믿고 있었답니다.”
아이를 제외한 주위 공기가 일순 싸늘해졌다. 지금 저 연구원이 여자아이가 재해의 자식이라는 걸 인정했다. 그렇다는 건 재해가 원래는-
짝!
연구원의 손뼉 소리가 주위를 깨웠다.
“여러분 더 중요한 대의가 지금 눈앞에 있습니다. 재해의 아이. 재해를 유인하기엔 더없이 좋은 방법이 나타난 겁니다.”
“소장님 하지만, 그건 소녀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 되묻죠. 히어로 이일우. 당신에겐 반항이 거센 S급 재해를 유인할 방법이 있습니까?”
히어로가 침묵했다. 내내 욕을 퍼붓던 아이가 변한 분위기를 알아챘다.
“일단 그 소녀를 이용하죠. 꼬마야, 너도 너희 엄마가 더 고생하는 건 보기 싫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 아니 소장이라 불린 남자가 이번엔 준수를 응시했다.
“그럼, 히어로 성준수.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말입니까?”
“아이를 데리러 온 게 아니었나요? 마침, 재해를 유인하는 역할도 맡고 계시죠. 딱 제격이네요. 자, 이만 가보도록 하세요.”
믿을 수 없는 결정이다. 누굴 죽이려고 그러나. 하지만 협회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결국, 준수는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빛무리 위에 올랐다.
방금까지 저주를 퍼붓던 모습이 거짓말같이 아이는 침착했다. 불안정한 자세에도 올곧게 재해를, 제 어머니를 바라보는 모습에 준수가 단념했다. 슬쩍 어디 옥상에라도 올려놓고 작전할까 잠시 고민해봤지만, 소용이 없어 보였다. 이미 엄마를 구하기 위해 작은 자전거 하나에 몸을 실어 재해 현장까지 달려온 아이였다. 대피시킨다 한들, 다시 달려 올 게 뻔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옆에 두는 게 제일 안전하겠지. 준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해보자. 까짓거.
물줄기로 숨구멍을 틀어막던 병찬이 먼저 다가온 준수를 발견했다. 얘가 걔야? 고래 새끼? 바람이 거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을 대충 읽어낸 준수가 대답했다.
“네, 형. 얘가 새끼 고래예요.”
고래의 새끼면, 새끼 고래가 맞지 않나. 싶어 대충한 대답에 병찬이 끄덕였다. 잘됐네. 숨통을 조여 기력 빼는 것도 한계였거든. 병찬이 전투 중이던 히어로에게 무전을 보냈다. 공격 중단. 다들 위치로. 그 입 모양을 보던 준수가 깨달았다. 아, 무전기 교체하고 올걸.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귀가 조용했다. 준수는 무전이 안 된다는 걸 알리기 위해 좀 더 가까이 붙었다.
“엄마!”
아이가 소리쳤다. 준수가 고개를 돌렸다. 절대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저런 존재감 앞에선 방심하기도 어려웠다.
언제부터 옆을 보이며 가만히 멈춰 서 있었나.
고래의 형상을 한 재해는, 농구선수 키만 한 거대한 눈동자를 조용히 준수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워낙 큰 눈동자에 준수는 잠시 압도당했다. 그러나 이내 알아차렸다. 고래가 보고 있는 것은, 준수가 아닌. 여자아이였다.
“엄마, 나야!”
아이가 다시 소리쳤다. 고래는 작게 입을 열었다 닫았다. 준수는 눈동자를 굴렸다. 병찬도 마침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재해가 아이를 인식함. 작전 속행. 준수가 아이를 몸통 가까이 고쳐 안았다. 준수 목에 팔을 두른 아이가 옆으로 돌아 손을 뻗었다. 재해가 움직였다.
준수가 아이를 데리고 멀어졌다. 재해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번엔 방향을 틀었다. 경복궁 옆 녹지광장을 향해. 재해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움직임은 고요했다. 마치 행여 자신의 날갯짓이 아이에게 피해 줄까 걱정하듯이 말이다.
애써 숨을 골랐다. 목을 끌어안고 있는 아이의 체온이 차가웠다. 아니, 자신의 체온이 높아진 걸지도. 준수는 땀 냄새가 날까 싶어 아이를 조금 떨어트렸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는데도, 아이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재해의 속도가 빨라졌다. 시발. 준수도 맞춰 더욱 빠르게 나아갔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들조차 후끈한 몸의 열기를 식혀주진 못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여전히 무전은 들리지 않았다. 무자비한 시선의 폭력 속 약속된 목적지를 향해 준수는 나아갔다.
“…저기요. 아저씨.”
“어, 왜?”
“저기로 가면 저희 엄마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재해의 최후는 늘 같았다. ‘재로 돌아가는 것.’ 마른 입술을 한 번 핥았다. 재해를 엄마로 알고 있는 아이에게 소멸을 논하기엔, 글쎄. 히어로 성준수는 그런 성정이 못 되었다.
“뭐, 네가 하기에 달렸지. 계속 이대로 얌전히 굴어 준다면 전투, 음 큰 싸움 없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나마 희망적인 이야기를 꺼내 본다. 지난, 그림자를 다루던 재해처럼. 제압이 가능하다면 잠재워서 데려가지 않을까? 정말, 꽃밭인 말이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지어졌다. 그런 미소에도 아이는 안심이 되는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만약, 저게 재해가 아니라면. 정말 아이의 어머니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협회는 이 사태에 관해 알고 있었을까? 어떻게 처리할 셈이지. 저 고래가 사람이 맞는다면. 그림자에 숨던 재해 또한, 사실은 사람이 맞았던 건가- 사람이 어떻게? 왜? 협회는 대체 무엇을?-
갑자기 극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다행히 중심을 잃진 않았지만, 재해와 거리가 좁혀졌다. 아직 발밑이 국세청이었다. 거대하고 강한 존재의 위압감이 다가왔다. 준수는 방금 무슨 생각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렸다. 300m 남짓 남은 거리가 너무 멀어 보였다. 재해는 소름 끼칠 정도로 천천히 날았다.
아이를 삼켜 보호할 수 있는 거릴 유지하며 계속 기회를 엿봤다. 아이는 삼켜지고, 준수는 찢겨 지겠지. 그걸 알기에, 틈을 내어주지 않으려 다시 집중했다.
이윽고 녹지광장 위. 준수가 멈춰 서자 재해 또한 공중에 머물렀다.
주위로 히어로가 바쁘게 날아다녔다. 재해를 땅으로 끌어 내릴 밧줄을 몸에 감았다. 낮아지는 눈높이에 맞춰 준수도 조금씩 하강했다. 그리고 마침내, 100m가 조금 넘는 몸통 길이의 재해가 땅에 내려앉았다. 공원에 피어있던 꽃들이 짓눌리고 나무가 부러졌다. 흙먼지가 일었다.
제압을 위해 약물이 준비되었으나, 재해의 크기가 너무 커 들지 않았다. 인질이 언제까지 효용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 단숨에 숨통을 끊기 위해 준수가 호출됐다.
준수가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놨다. 아이를 데리고 접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 곁을 떠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재해를 꽁꽁 싸맨 밧줄은 오직, 재해가 허락했기에 둘려있는 것임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자신이 아이에게서 멀어지는 순간부터 하찮은 구속 따윈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겠지.
그러나 지금 현장에는 두께만 2미터가 넘는 고래의 피부를 뚫고 목을 잘라낼 수 있는 히어로가 준수 말곤 없었다. 결국 준수가 나서야 했다. 안고 있던 아이의 체온이 아직 품에 남아있었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재해를 베어야 했다. 다시 두통을 느꼈다. 두어 걸음 휘청거리자 다시 두통이 가셨다.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 저건 재해야.’
모든 건 인류를 위해. 키가 큰 남자가 다가와 아이 뒤에 섰다. 히어로라기엔 슈트를 입지 않았고, 연구원이라기엔 가운을 입지 않았다. 두통이 막 가신 준수는 특이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덩치가 큰 남자에 안심하며 아이를 맡겼다. 재해 위에 올라타는 일은 쉬웠다. 재해의 시선은 여전히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 밖으로 나오니, 놀랍도록 몸이 가벼웠다. 식은땀도 멈췄다.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공중에 뜬 준수가 빛무리를 머리 위로 돌렸다. 자기 키의 세 배를 훌쩍 넘도록 길어진 십자가를 조준했다. 목표지점에 다른 히어로가 표시해둔 빨간 페인트로 엑스자 표시가 보였다. 약간 빗나갔지만, 피부를 뚫는 데 성공했다. 뜨겁고 날카로운 십자가가 피부 아래를 헤집으며 점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바람 소리에 지상의 소리가 묻혔다. 준수의 무전은 잠잠했다.
준수는 손아귀에 힘을 줘 십자가를 움직였다. 한 바퀴 돌려 완전히 잘라낼 심산이었다. 재해의 숨통을 끊는 게 히어로의 역할이니까. 그러나 벌써 근육에 잡혀 십자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준수가 혀를 한 번 찼다. 바람을 타고 지방 타는 냄새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역겨움에 헛구역질을 한 번 했다. 어차피, 버티기만 해도 이기는 싸움이다. 주변 피해를 막는 일은 다른 히어로들의 일이었으니. 준수는 이기는 생각만 했다.
재해가 발버둥 쳤다. 꼬리 짓 한 번에 거목 같던 두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다. 거대한 파도가 경복궁을 감싼 방어막에 부딪혀 부서졌다. 역으로 밀려온 바다에 공원의 녹지가 흩어졌다.
고통을 느끼는듯한 모습은 동물형 재해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이 모습에 속는 히어로는 없었다. 실제로는 그저 조건반사일 뿐이다. 자연체인 재해에 통각이 있을 리가.
빛무리를 크게 만들어 십자가를 내리쳤다. 계속되는 망치질에 재해 몸통을 묶은 밧줄이 하나둘 끊어졌다. 끊어진 밧줄들이 탄력에 허공을 날았다. 위협적으로 옆을 스치는 밧줄에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재해가 몸을 띄웠다. 붕 뜨는 충격으로 지면에 모래바람이 일었다. 그때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아주 작고, 약한 소리. 본능적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새끼 고래였다. 재해에 비하면 아주 작은 크기지만 웬만한 사람보단 큰 고래.
새끼 고래가 다시 울부짖었다. 재해가 멈춰 새끼를 응시했다. 새끼가 공원 바닥에 흥건한 바닷물 위를 헤엄쳐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면 감동적일지 모르겠지만, 멀리서 보면 그렇지 않았다. 준수는 멍하니 현장을 둘러봤다. 위치는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 팔이 뻐근했다. 준수가 힘겹게 손목을 들어 올렸다. 이상 수치 탐지기 화면. 이 일대를 통틀어, 수치 이상 현상은 100m가 넘는 재해 하나뿐이었다. 어깨에 힘이 빠졌다. 새끼 고래는 폭주자도, 재해도 아니었다.
다행이다. 아이는 폭주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것도 잠시, 곧 의문이 들었다. 히어로도 아닌 아이가 어떻게? 작은 의문 위로 이상 수치가 흘러내리던 영중의 얼굴이 지나갔다. 그래, 처음 본 것도 아니잖아. 준수는 땅에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이 사태에 협회가 어떻게 반응할지 살펴보아야 했다. 협회는, 과연 이 일을- 머리에 두통이 느껴졌다.
깨질듯한 감각 뒤 찾아온 몽롱함. 재해 위 하늘, 어중간한 지점에 멈췄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우욱, 멀미를 느꼈다. 준수가 멈추어 선 사이 지상에선 다시 비명이 들렸다.
눈을 찌푸려 겨우 본 시야에 거대한 주사를 맞고 옆으로 쓰러진 새끼 고래의 모습이 보였다. 그 주위를 둘러싼 연구원과 재해의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준수가 땅에 내려왔다. 새끼 고래의 심장이 헐떡였다. 아이는 살아있었다. 그래서 재해가 가만히 있는 건가? 이상해. 이건 마치, 재해가 이성으로 사고를 하는 것 같아. 준수는 공포를 느꼈다.
지능이 있는 재해는 간혹 있었다. 등급이 높을수록 자주 보이던 현상이다. 그런데, 이성이 있는 재해? 자연 상태에서 발생하는 재해에 자아가 있다는 건, 5년 간의 히어로 생활에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머리가 다시 아팠다. 언젠가. 비슷한 의문을 가졌었던 거 같은데. 다시, 두통에 기억이 흐려진다. 지금, 뭘 하고 있었지.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준수 씨.”
누군가 준수의 어깨를 짚었다. 흐린 시야에 익숙한 하얀 가운이 들어찼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니 시야가 조금 돌아왔다. 어깨를 톡톡 두드린 소장이 손을 뻗었다.
그곳엔 바람처럼 하늘을 흘러 다니는 바다와 핏물과 사람. 나무와 건물 잔해. 모래와 밧줄. 그리고 그 한 가운데 거대한 십자가를 등에 진 재해가 있었다. 아, 그렇구나. 재해를 잡으면 돼.
“…나는, 히어로니까.”
4장 : 전개
“여러분 보십시오. 히어로 성준수가 S급 초대형 재해를 도륙하고 재로 돌리는 장면입니다. 또다시 인류는 승리했습니다.”
여름 저녁은 아직 바깥이 환했다. 막 귀가한 성준수는 들어가서 쉬래도 옆에 딱 붙어 앉아 고집을 피웠다. 결국 어깨에 기대 졸기 시작한 히어로에게 영중은 아량을 베풀어 제 허벅지를 내어주었다. 같이 들어가서 자자는 애인의 뜻을 모르진 않았지만, 영중에겐 확인할 소식이 남아있었다. 채널을 돌리자 기자회견에서 브리핑하는 경찰이 나왔다.
“지금 화면으로 보이는 의문의 안개가 녹지공원 일부를 감쌉니다. 안개가 사라진 뒤, 잠들어 있던 새끼 고래가 사라졌습니다. 경찰 당국에서는 히어로 성준수의 출전 이후 아이와 계속 함께 있던 남성을 이번 S급 재해 토벌 현장을 테러하고 새끼 고래로 변한 아이를 납치해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습니다.”
지나가듯 작은 화면으로 스포츠머리의 남성이 확대됐다. 멀리서 현장을 담아냈던 영상이라, 확대된 남성의 이목구비는 화질이 뭉개져 특정이 불가했다.
“또한 히어로도 아닌 아이가 어떻게 고래로 변했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희가 입수한 바로 아이가 현장에서 재해를 부모라 불렀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저희, 경찰은 이에 관한 모든 진실을 테러범과 협회에 물어 반드시 정의를 바로 세우고 시민의 안전을 지켜내겠습니다.”
브리핑을 더 들어보았지만, 쓸만한 정보가 없었다. 영중은 다시 채널을 돌렸다. 거세게 흔들리는 화면으로 S급 재해가 처치되는 장면이 짧게 재생됐다. 뒤이어 나온 아나운서가 히어로 성준수와 재해의 이동 경로를 종로구 지도 위에 그리며 둘의 접전지를 3차에 나눠 설명했다.
평소라면 현장 생중계 영상을 풀었을 텐데, 하나같이 멀리서 시민들이 찍은 영상을 제보받은 듯한 앵글과 화질이었다. 재해의 위험도가 너무 높아 헬기를 띄우기는커녕 카메라맨조차 남질 못했으니, 사건을 전국에 송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였다.
영중이 한숨을 내쉬며 그제야 소파에 등을 기댔다. 허벅지를 베고 있던 준수가 몸을 뒤척였다. 손을 뻗어 몸통을 살살 토닥여주자 다시 숨소리가 고르게 났다.
텔레비전 소리를 한 칸으로 줄인 영중은 핸드폰을 들었다. 다시 내려놨다. 분명 일은 그르쳤지만, 고생하고 돌아온 히어로의 휴식을 빼앗을 만큼 급한 사항은 아니었다. 영중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앞으로 할 일이 산더미였다.
경찰의 지명수배는 대중 사이에서 큰 파란을 일으켰다. 추적 사건 24시. 유명한 교양 프로그램에서 오랜 의혹들을 모아 단번에 터트렸다.
“초능력을 이용한 테러라니 너무 무섭죠. 지금 협회에 올라온 역대 히어로 명단을 아무리 봐도 비슷한 인물 하나 찾을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그 남자는 재해가 맞는 거잖아요?”
“히어로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초능력을 써서 테러했다는 건지. 경찰 쪽이든 협회든 하루빨리 진실이 밝혀지길 바랍니다.”
시민 인터뷰를 지나 전문가의 소견도 덧붙었다.
“여태껏 자연물인 줄 알았던 재해 중에 사실 사람이 포함되었고, 일부라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거라면. 이 사실을 숨기고 그들을 재해라고 부르며 계속해서 사냥해온 협회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프로그램은 진실을 은폐하고 사람을 사냥해온 협회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만일 이 모든 의혹이 사실이라면, 히어로와 재해를 가르는 기준은. 그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협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해 온 걸까요. 그리고, 그 권력을 이용해 어떤 짓을 저질러 온 걸까요. 의문을 가지고 있던 우리는 여기서 최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슬픔에 잠기게 했던 사건을 겪게 됩니다.”
새끼 고래로 변하기 전 아이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화면에 떠올랐다. 녹지공원으로 보이는 장소. 밧줄에 묶인 재해를 향해 엄마라고 계속해서 소리치는 아이. 그리고 그 몸에 꽂히는 거대한 빛의 십자가. 대중은 이를 보고 불경함을 느꼈다. 마치 현장이 신을 모독하는 것만 같아서.
인터넷은 물론 사람이 셋 이상 모인 곳이라면 어딜 가나 이 화제로 꽃을 피웠다. 무고한 아이의 엄마를 심판한 빛의 십자가라는 이미지가 강렬하게 대중의 뇌리에 박혔다. 철저하게 숨어있는 협회를 지나, 그 십자가의 주인인 히어로에게 관심이 모이는 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히어로는 모든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
“테러라고요? 재해는 전부 자연 발생으로 인한 재앙이 아니었나요? 그들이 어떻게 테러를, 그건 마치-”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지. 사회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라 기밀에 붙였던 사안이네. 그런 현상이 나타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여기 있는 몇몇은 이미 만나봤을 걸세. 민간 폭주자. 그들은 확실히 재해가 아니었지.”
협회 지하의 강당. 경찰의 기자회견 이후 보내진 공문을 받고 현역 히어로 수십 명이 전부 모였다. 부상자는 연구소에서, 강당에 모인 이들은 히어로 워치를 통해 모든 음성을 전달받았다. 낮은 목소리로 무게를 잡던 협회 부소장은 어떤 취조실의 CCTV 영상으로 스크린을 전환했다.
준수가 잡았던 그림자를 쓰는 재해였다. 아니, 빌런 희망자. 몸이 축 처져있는 그의 앞에서 협회 직원이 어떤 음성을 틀었다.
‘히어로에 대항하는 빌런 연합을 모른단 말이야?’
영상을 멈춘 부소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여태 수가 적어 잠잠했던 모양인데, 최근 세력과 체제를 확립해 빌런이라는 형태로 모여들고 있다고 하는군. 불온분자가 아닐 수 없어. 여기 모인 자네들. 히어로처럼 정상적인 능력 개방이 아닌 인위적이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능력을 개방해 굉장히 불완전하고 이상 수치가 높은 걸로 파악된다.”
몇몇 히어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서 재로 돌아가지 않는 재해를 만났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 수치가 높았다. 그건 재해라기보단, 마치 히어로가 폭주한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들은 테러범이야!”
부소장이 강하게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넓은 강당에 싸늘한 적막이 감돌았다.
“어떻게 보면 재해보다 더 악질이지. 자연재해와 다르게 그들은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테러 대상을 고르니까. 빌런은 선을 넘었어. 초능력을 갖기 위해 약물을 풀고, 그대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폭주하도록 방조한 건 우리 협회에선 절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다. 모든 건 대의를 위해.”
히어로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들은 시민을 지키는. 초능력을 다루는 영웅. 연구소에서 레퍼런스로 배운, 보통 그들의 주적은. 같은 초능력을 쓰는 악당-빌런이었다. 빌런 집단을 체포하고 불법 약물을 압수해 다시 시민의 평화를 이뤄내리라. 히어로들의 결의가 모였다.
***
“불온분자라니, 정말 자기들 좋은 대로 갖다 붙이는군. 준수 너도 저런 과격한 사상에 동의하는 줄은 몰랐는데.”
“뭐, 시민들이 위협에 놓이는 건 맞으니까. 나는 위협만 처리되면 크게 상관없어. 평소 하던 일과 별반 다르지 않지 않나?”
준수에게서 협회의 입장을 전해 들은 영중이 조소를 띄웠다.
협회는 오늘, 히어로가 아닌 초능력자들의 존재를 모두 빌런으로 낙인찍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이 통과 됐다는 게. 정말, 히어로 모두가 이견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영중이 보기에 악은 협회였다. 순진무구한 준수의 표정에 그는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지금은 어차피 말해도 들리지 않을 터.
입을 굳게 다문 영중에 준수는 어깨를 으쓱이다 그의 몸통을 베고 누웠다.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기밀을 듣기 위해 제 침대로 굴러들어온 애인의 앙큼함을 눈감아준 대신 얻은 대가였다. 평소의 서러움까지 담아 꽉 끌어안자, 영중이 몸통이 뒤척이며 편한 자세를 찾아 마주 안아왔다. 그제야 만족한 준수가 미소를 띠며 잠들었다. 내일부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바빠질 예정이었으니.
***
“안녕하세요, 기상호입니다. 오늘 날씨는 열사병에 주의하세요.”
“뭐야, 사투리? 부산이냐? 여기까진 웬일이래.”
“네, 서울의 인력난이 심해 여어까지 오게 되었어요.”
지난 S급 재해를 잡는데 히어로 측에 두 자리를 넘어가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협회 연구소의 다른 이름인 히어로 육성소. 육성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인력을 충당했다. 그렇게 아직은 미숙한 지망생들이 대거 채용됐다. 설마 전국 대상으로 진행했을 줄이야. 준수는 앞으로 세 달간 교육을 맡게 된 부사수의 프로필을 다시 읽었다. 달랑 한 장짜리. 텅텅 빈 표. 심지어 기동성이 뛰어난 자신에게 붙은 땅 붙박이 능력자.
“텔레파시? 독심술? 야, 야. 장난하냐. 이걸로 어떻게 싸울 건데.”
“저는 사수 선배님만 믿고 있습니다.”
“벌써 내가 편하지 아주?”
“죄,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봐도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능력이었다. 저번 S급 전투에서 무전기가 고장 난 상태로 싸웠다고 놀림 받는 건가. 그래도 뭔가 잘하는 게 있어서 온 건 아닐까? 준수가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어휴. …야 넌 무기가 뭐야.”
“거기 적혀있습니다.”
준수가 다시, 한 장짜리 프로필을 세 번째 들여다보았다. 기억대로 무기 칸은 비어있는 게 맞았다.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무기가 없다고? 확 낮아진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상호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체술이요. 체술.”
빠르게 기합 자세를 지어 보이는 꼴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준수가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맨몸으로 재해를 어떻게 죽이겠다는 거야.”
“아 햄. 저는 그거죠, 그거.”
빌런 탐색기요. 준수가 표정을 없앴다. 조용히 의중을 떠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프로필을 치웠다. 이건 이제 더 볼 필요가 없었다.
이해했다. 얇고 텅텅 비어있던 이유가 있었다. 이딴 프로필은 애초에 의미가 없었던 거다.
독심술. 체술. 그리고 성준수. 저 부사수 놈은 사람 무리에 숨어있는 빌런을 색출해 내기 위한 스페셜리스트였다.
“햄, 근데 저 부산 사람인 거 그래 티 나요? 서울말 연습했는데. 흠흠, 근처에 이상 수치가 관측됩니다. 히어로의 출동을 요구합니다.”
붉게 번쩍이기 시작한 워치가 기상호가 따라 한 대사 그대로 다시 읊었다. 위치를 보니 둘이 제일 가까웠다. 예상 등급 D. 뭐, 사무직 히어로의 첫 현장으로 적절하겠네. 준수는 출동 응답을 눌렀다.
“시끄러워. 뭔 말을 AI한테 배웠냐? 그게 왜 서울말이야.”
“헉 맞아요. 우리 집 빅스비가 알려줬어요.”
“안 그래도 빡치니까 닥쳐. 쯧. 따라와.”
재해는 나무였다. 흔한 은행나무 가로수. 부사수는 나뭇잎이 적은 나뭇가지에 조르기 한 판을 선보였다. 보다 못한 준수가 나무를 베어 재로 돌렸다.
“아아, 잘 알았다 너희들의 수준.”
“니가 잡았냐? 나대지 좀 말자.”
“넵.”
꼴은 우스웠지만 쫓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이놈은 생각보다 잘 버텼다. 재해의 공격에 맞아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데리고 다닐 가치가 있었다. 대충 방패 한 번만 둘러주면 재해를 처리할 때까지 살아서 버텼으니, 웬만한 풋내기보다 나은 편이었다.
수준을 파악한 준수는 귀찮은 부사수를 데리고 이날 현장을 3개나 돌았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부사수는 긁히고 쓸린 잔 상처가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레 질문했다.
“원래 이렇게 재해가 자주 일어나요?”
슬슬 물어볼 타이밍이라 생각했다. 준수도 사실 너무 바쁘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얼굴이 꼬질꼬질한 걸 보니 자가 회복 활성화제 효력이 다 해 보였다. 오늘은 연구소에 들르라고 일찍 퇴근시키려 일정표를 수정하며 대답했다.
“아니. 평소에도 이랬으면 이미 서울은 멸망했겠지. …아마 사회 분위기 때문에 그럴 거야. S급 재해의 여파를 다 수습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기자회견을 연 경찰도 모자라, 협회도 빌런의 존재를 발표하며 맞불을 놨잖아.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사회가 혼란해지면 자연스럽게 이상 수치도 올라가. 그렇게 되면 재해의 빈도가 높아지지. 이상 수치라는 건 결국 사람의 사념 덩어리가 자연물을 오염시키는 거니까.”
준수는 제법 영중이처럼 말하며 슈트를 갈아입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당연했다. 엊그제 뉴스를 보며 영중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영중은 원래 신문이며 뉴스며 챙겨보는 편이었지만, 요새 특히 더 심했다. 뭐 하냐고 연락하면 신문 스크랩하고 있었어. 뉴스 보고 있었어. 등등 아주 소식에 미쳐 살았다. 자기가 언급한 불안한 사회에 그 자신도 포함된 거 같았다.
지망생이 공부하는 용도라고 이해하기엔 과하지 않나? 싶은 집착. 준수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이유가 뭐든, 히어로인 자신이 열심히 하면 될 일이었다. 그가 불안해하지 않을 세상을 위해.
잘 모르는 기상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도와 차도를 가르는 선을 두고 서로 지나치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을 태운 검은 세단은 오늘도 재해가 발생한 현장으로 향했다.
재해는 B급 개구리. 다른 팀이 먼저 와 상대하는 중. 준수팀은 상호의 경험을 위해 견학 및 후방 대기를 위해 왔다. 싸우고 있는 히어로는 창을 이용했다. 얼굴이 낯익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아, 광화문에서 아이한테 날아갔던 걔다.
“어? 뭐라고? 아파? …싸우기 싫다는데요, 햄.”
준수가 현장을 살피는 사이 한쪽 귀를 감싸 쥐고 중얼거리던 기상호가 헛소리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준수가 전투 중인 히어로 채널에 접속했다. 역시 무전에는 그런 대화가 오고 가고 있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누가.”
“잠시만요. 대화가 되는 상대는 아닌데요. 아 야야. 그래 아프나. 어? …아무래도. 점마가 내는 비명 같은데요.”
상호가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건 재해였다. 자동차만 한 개구리. 골이 아팠다. 빌런 탐색기가 엄한 걸 찾아냈다. 준수가 무의식중에 힐끗 워치를 확인했다. 이 대화도 전부 협회에 전송 중이겠지.
“뭐라는 거야. 너 사람끼리만 생각 주고받을 수 있다며.”
“그러니까요. 타이밍을 보면, 아무리 봐도 읽히는 건 저 재해인데요.”
“다시 묻는다, 기상호. 저것의 생각을 읽은 게 분명해?”
“네. …햄. 저 재해, 아무래도-”
“그만. 더 말하지 마. 뭐가 됐든 우리 선에서 판단할 상황이 아니야.”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알아들어 다행이다. 현장은 준수가 나서지 않아도 됐다. 재해는 다른 히어로의 손에 처리됐다. 숨통이 끊긴 순간, 다른 짐승형 재해와 마찬가지로 육신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저건 빌런이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 준수를 내려준 검은 세단은 기상호를 협회로 데려갔다.
계획과 다르게 일찍 퇴근한 준수를 제일 먼저 맞이한 건 영중의 전화 소리였다.
"그걸 못 참았다고? 또? 국민아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래. …하, 됐어.
어차피 엎질러진 물. 다치지는 않았고? 그래, 일단 얌전히 있어. 곧 갈게."
어찌나 놀랐는지 드물게 커진 목소리가 현관문 밖까지 들렸다. 준수가 도어락을 열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신발을 신던 영중과 눈이 마주쳤다.
“전화 목소리 다 들리더라. 누구냐? 무슨 일이야?”
“아, 친구인데. 하, 취해서 취객이랑 싸웠데. 몇 대 좀 맞은 거 같은데 한 번 찾아가 보려고.”
“그러냐. 문제 있으면 연락하고. 내가 전문이지 그런 거.”
준수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시늉을 하자 영중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하하. 됐어, 지금 경찰이랑 사이도 안 좋잖아. 갔다 올게. 기다리지 말고 저녁도 먼저 먹어.”
가볍게 웃어 보인 영중이 준수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영중이 나간 집은 고요했다. 오랜만에 혼자 남게 된 준수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다행인 건지 속보는 없었다. 대신 한 주 동안 보고된 재해의 수와 위치가 서울을 기준으로 표시된 지도가 나왔다. 앞에 선 아나운서는 앞선 7일간의 재해 출현 숫자와 간략한 평균 등급을 날짜별로 정리해 설명했다. 최종적으로 출현 빈도를 도출해, 이를 S급 출현 이전과 비교했다. 최종적으로 두 배 이상 차이 나는 수치. 거참, 간단명료하고 유익했다. 답답함에 다리가 달달 떨렸다. 팔짱을 낀 준수가 화면을 꼬나봤다.
공영 방송에서 저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전영중은 이런 걸 왜 매일 보고 있는 거야? 확실히 빈도는 잦아졌지만, 출현 등급이 비교도 안 되게 낮았다. S급이 등장하기 전, 전조에 가깝던 고등급들의 출현보다 이전인. 평화롭다고 할 수 있는 시기에 비교해서도 등급이 낮았다.
보고된 수치 중 대다수가 측정 등급조차 뜨지 않는 약한 녀석들이었다. 혐오스럽게 꿈틀거리기만 하던 재해들은 시민의 심신 안정을 위해 빠르게 치워진 것이다.
이것도 재해라면, 재해의 빈도가 잦아진 건 사실이지만 그 실상도 함께 보도해야만 옳았다. 뉴스가 사람들의 불안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다시 재해의 양분이 되어, 또 다른 재해를 낳을 뿐. 이런 뉴스는 사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열을 올리던 준수의 워치에 알림이 왔다. 협회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준수가 사흘의 휴가를 받았다. 부사수에게 연락해보니 죄송하다는 말에 뒤이어 강제로 끊어졌다. 협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이런 결정이 내려왔는지 성준수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전영중은 외박했다.
방송 편성이 없는 새벽을 지나 아침이 왔다. 7시에 시작된 뉴스는 첫 소식으로 기온과 날씨를 알렸다. 준수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하단에 빨간 줄이 뜨며 화면이 전환됐다. 진하게 그려진 긴급 속보 라인 뒤로 아나운서가 소식을 전했다. 협회가 빌런 아지트를 습격했다는 소식. 그 잔당을 쫓고 있다. 현장에서 사로잡은 폭주 직전인 빌런 셋을 사로잡았다. 예상 도주로와 함께 그곳에 거주하는 시민 여러분의 안전을 우선시하겠다는 협회장의 발표. 딱 한 장 공개한 현장 사진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준수의 시선이 손목으로 향했다. 워치는 잠잠했다.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성준수는 이번 작전에서 제외됐다. 왜?
정오가 되고서야 전영중이 귀가했다. 현관 센서 등이 꺼지자 집 안이 온통 어두컴컴했다. 번쩍이는 텔레비전 불빛만 간간이 복도를 비췄다.
의아했던 영중이 거실을 가로질러 암막 커튼을 걷어냈다. 먼지가 햇볕 아래 부유했다. 빛은 소파까지 들이닥쳐 앉아있는 준수를 비췄다.
“…왜 그렇게 청승 떨고 앉아있어? 밥은 먹었어?”
11시 뉴스의 끝자락. 아직 도주 중인 빌런들의 몽타주가 빈 수배서가 떠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 나 배고파. 밥 시키고 씻게.”
대답 없이 준수가 눈알만 돌렸다. 욕실 앞, 영중이 옷을 한 꺼풀씩 벗어낼 때마다 갓 터진 멍이 하나둘 드러났다. 바닥에 떨어지는 옷가지에서는 흙먼지가 작게 일었다.
“너 어디 갔다 왔냐.”
“뭐야, 외박해서 화났어? 연락 못 한 건 미안해. 어제 말했던 친구가 지랄이 하도 심해서 받아준다고 같이 훈련하다 뻗었네. 준수, 너도 기억하려나. 전의 한강에서 강아지 산책시키면서 지나간 적 있어. 강아지라기엔 좀 크긴 하다만.”
“야, 야. …지금 나오는 거. 너냐?”
영중이 말을 멈췄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한재해대응히어로협회 협회장과의 회담록을 공개했습니다. “초능력을 이용한 모든 종류의 테러는 근절 돼야 한다”며 “테러 조직 ‘빌런’ 소탕과 관련해 히어로 협회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아나운서의 정갈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준수 꿈꿨어? 소파에서 잤구나?”
“너 아닌 거 확실하냐고. 질문에 대답해.”
“말도 안 되는 걸 질문하니까 그렇지.”
속옷 차림으로 걸어온 영중이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소리를 줄였다. 다가오니 아깐 보이지 않던 피딱지가 여기저기 보였다.
‘그게 아니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상처들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시발. 준수가 분노를 한 번 삼켰다. 준수는 바보가 아니었다. 여태까지 그가 느꼈던 특이점들, 이상했던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밤새 차갑게 식은 머리로 생각했다. 준수가 내린 결론은. …지금 우리는 대화가 필요했다. 영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제된 말을 꺼내려 숨을 고르는 사이, 또 이상이 일어났다. 영중이 꺼버리려던 화면에 붉게 번쩍이는 긴급 속보가 떴다.
다시 소리를 키우니 남산타워와 올림픽공원에 테러가 발생했다는 아나운서의 말이 들려왔다.
재해가 아닌 사람이, 두 곳을 동시에 노린 테러. 남산에는 땅이 갈라지며 공기가 얼어붙었고, 올림픽공원은 일대가 늪으로 변하며 거대 식물이 자라 주위를 공격했다. 헬기가 사건의 중심을 멀리서 찍은 영상을 확대하자 흐릿하게 사람 형상이 보였다. 아나운서는 섣불리 테러범들을 명칭 하지 않았지만. 시류를 아는 이들의 머리에 한 단어가 똑같이 떠올랐다.
빌런. 그들이 전면으로 나왔다.
어딘가 화가 나 보이기도 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가 고정된 영중과 시선 끝 화면을 번갈아보던 준수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어깨를 툭 툭 친 준수가 그대로 현관문을 나섰다.
“씻고 있어. 다녀온다.”
올림픽공원, 집에서 더 가까운 올림픽공원을 선택한 준수가 도착했을 땐, 이미 공원은 초토화였다. 나무는 뿌리를 드러내며 쓰러졌고 호수는 늪으로 변했으며. 늪 위에는 거대한 줄기 기둥이 둥지를 트고 점차 그 범위를 넓혀갔다. 압도적인 위용은 성준수가 잠시 멈춰 하늘에 닿았다는 잭과 콩나무의 나무 기둥을 지상에서 본다면 저런 모양일 수 있겠단 생각을 할 정도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 거대한 줄기는 치솟는데 집중하지 않고 착실하게 옆으로 범위를 넓혀갔다는 점이다. 길이 깔린 땅을 헤집으며 자라나 주위를 쓸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정차 중이던 자동차 다섯 대가 반대편 건물에 처박혔다.
강력한 태풍이 불듯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시민들이 몇 보였다. 다시금 지면을 쓸어내는 줄기가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우선순위가 바로 세워졌다. 곧바로 날아가 줄기를 잘라낸 준수가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패를 덧씌웠다.
뜨거운 빛에 베인 줄기 단면에서 타닥타닥 소리가 나며 마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손목이 시끄러웠다. 워치가 울렸다. 현장에 다른 히어로가 도착할 때까지 조금만 더 시간을 벌어달라는 음성 메시지. 준수 다시 몸을 날려 줄기를 베어냈다. 큰 강아지를 안고 뛰어가던 남자가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준수도 작게 까딱였다.
먼저, 줄기들이 더는 공원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
-와, 씨. 대박.
막 씻고 나온 영중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젖은 머리를 털며 바지만 주워 입은 영중이 소파에 앉았다. 발신인은 지국민이었다.
-야, 나 방금 네 남친 봤다.
“하….”
아직 꺼지지 않은 텔레비전에서 사람들을 덮치는 줄기를 잘라내는 동시에 날아온 자동차를 부드럽게 받아 땅에 내려놓는 준수가 보였다. 준수가 구해낸 시민의 수가 옆에 배너로 잠시 떠 있다 사라졌다.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영중이 전화를 걸었다.
“국민아, 너 지금 어디야.”
-“나 여기 올림픽공원. 뉴스에도 나왔냐? 여기 지금 난리도 아니다.”
“보고 있어. 네가 거기 지금 왜 있는데.”
-“구마 산책하고 있었지. 우리 구마 진돗개라 실외 배변이잖아.”
“몸 사리고 있으라 했잖아 국민아. 너는 미디어에 노출된 상태라니까. 당장 어제만 해도 그 난리가 났는데.”
-“미안. 근데 네 남친 잘 싸우는데? 성준수라고 했나. 걔가 소환한 빛무리 타고 시민들이 날아다녀. 장관이네. 난 이대로 돌아가면 될 듯싶다.”
“혹시 따라붙을지도 모르니까 숙소로 가지 말고. 그냥, 거기 있어.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
-“그래, 얼른 와라. 나 도넛 옆 편의점 앞에 있을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것도 저것도 다 골치가 아팠다. 설마 준수가 거기까지 도출해냈을 줄이야. 역시,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못 하는 녀석이었다. 협회는 시발 저렇게 머리 잘 굴러가는 놈을 썩히고 말이야. 옷방으로 가며 신경질적으로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흰 티를 꺼내 입다가, 뉴스에서 본 능력이 떠올랐다. 늪? 아, 열받아. 당장 입던 흰 티를 거칠게 벗어 옷걸이에 걸치고 검은 티로 갈아입었다. 습관처럼 모자도 집어 들었지만, 바로 다시 내려놨다. 머리칼을 쓸어보니 젖어있는 게 신경 쓰였다. 대신 모자가 달린 바람막이를 꺼내 입고 마스크를 꼼꼼하게 썼다. 운동화 끈을 고쳐 묶은 동시에 어둠이 일어나 영중의 몸통을 삼켰다. 지면 아래로 가라앉은 어둠이 있던 자리엔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아무것도 없었다.
***
다시 올림픽공원. 빛의 열기에 줄기에 불이 붙자 늪이 일어나 불길을 덮었다. 순식간에 매캐한 하얀 연기가 일대를 채웠다. 뒤를 돌아보니 히어로가 도착해 시민 대피는 얼추 이뤄진 뒤였다. 이젠 뒤를 볼 이유가 없었다. 준수는 싸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협회가 워치로 사진을 보내왔다. 두껍게 솟아난 기둥 꼭대기에 두 사람이 있었다. 주동자? 이 사달이 단 두 명의 소행이라니? 협회가 잘못된 정보를 보낼 리 없으니, 저 둘만 잡으면 되겠지.
준수의 주위로 커다란 십자가가 네 개 떠올랐다. 그중 하나를 검처럼 꼬나쥐고 줄기 위에 올라섰다. 세 십자가가 회전했다. 준수 주위의 연기가 흩어졌다. 확보된 시야 너머로 기둥의 꼭대기가 보였다. 잠시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곧바로 휘둘러지는 줄기에 준수는 도약해 피했다. 사각에서 날아오는 줄기는 띄워둔 빛무리가 잘라냈다. 발을 향해 뻗어오는 줄기를 밟고 앞으로 굴렀다. 목을 노리는 줄기를 베어내며 몸을 휘감은 건 손으로 뜯어내며 계속 달렸다. 길이 끊어져 기둥에 난 이파리를 밟고 도약했다. 바람을 찢으며 휘둘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큰 충돌음이 발생했다. 키보다 굵은 줄기가 준수를 덮쳤다. 고통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 3초 정도 시간이 흘렀다.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오른 어깨가 탈골됐다. 쥐고 있던 빛의 검을 밟고 올라타고서야 멈춰 설 수 있었다.
꽤 먼 거리를 날아왔다. 이를 악물고 강제로 어깨를 꿰맞췄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 대신 왼손에 검을 다시 쥐고 공격적으로 비상했다.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일순 검신이 늘어나며 정신 사나운 잔 줄기를 모조리 베어냈다. 두 번 휘두르자 기둥에 흠집이 났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준수가 다시 웃어 보였다. 당겨지는 얼굴 근육이 욱신욱신했다. 그제야 오른쪽 얼굴이 퉁퉁 부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머리도 같이 부딪혔던 모양이다. 하긴,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이다. 힘겹게 오른 눈을 떠 보자 시야가 온통 벌겠다.
아, 잠을 안 자서 그런가. 얼굴을 다친 준수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붓기는 연구소에 들러 빼야겠지? 차분하게 멀쩡한 팔을 휘둘렀다. 팔 하나를 내어주며 만든 흠집을 놓치지 않았다. 충격에 파괴되지 않고 착실히 크기를 키워, 저보다 세배는 거대해진 세 십자가를 방금 낸 흠집에 꽂아 넣었다.
십자가에 가려져 더는 위가 보이지 않았다. 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를 더욱 깊이 박아 넣었다. 불씨 튀어 오르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촤아아아- 물이 거세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 그림자가 졌다. 거대한 손이 늪에서 솟아났다.
준수가 황급히 물러났다. 손은 기둥에 꽂힌 빛을 거머쥐었다. 순식간에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설마, 싶어 쳐다보는 사이 오른쪽에서 채찍 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검을 휘두르며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떨어지던 준수가 적당한 줄기를 붙잡고 매달렸다. 파열음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손이 십자가 하나를 뽑아냈다. 늪에서 올라온 흙투성이의 커다란 손이 십자가를 검처럼 쥐자, 마치 전설 속 검처럼 보였다.
남의 능력을 뽑아 들고 득의양양해 보이는 꼴이 거슬렸다. 검이 위로 치솟았다. 아, 시발. 빛을 해제했지만, 한발 늦었다.
올림픽공원 삼거리를 향해 검이 휘둘렸다. 준수가 빠르게 빛무리에 몸을 실어 공원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전개한 방패 위로 칼날 같은 풍압이 부딪쳤다. 굉음이 몇 초 지속됐다.
바람이 멈추고 방패가 사라졌다. 지친 준수가 도로 위로 떨어졌다. 빛무리에 실려 겨우 등으로 착지했다. 대자로 누워 숨을 골랐다. 저 멀리 십자가를 꽂아뒀던 자리가 비며 기둥이 쩌적- 휘청이는 소리가 들렸다. 슬슬 왼눈이 떠졌다. 오른손을 들어 올려 쥐었다 펴보았다. 회복 속도가 괜찮았다. 이 정도면 불구가 되진 않겠는걸.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솔솔 불었다. 약한 체취. 희미하지만 익숙한 향이 뒤에서 흘러왔다. 우리 집 샴푸. 준수가 뒤를 돌았다. 그곳에 어둠이 피어올랐다.
커다란 강아지를 안고 있는 어떤 남성이 어둠 안으로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둠. 그 옆에 서 있는 건 영중이었다. 마스크를 쓴 옆모습이었지만, 저 동그란 머리통을 성준수가 잘못 알아볼 리 없었다. 전영중이 여기 왔다.
“네가 왜?”
바람의 방향이 인위적으로 바뀌었다. 푸릇한 풀 썩은 내와 함께 물비린내가 풍겨왔다. 준수의 반응속도보다 빠르게 누군가 옆을 지나쳐갔다. 빡빡이? 손을 뻗기 무섭게 굵은 줄기가 사이를 가로막았다. 급하게 던진 빛줄기 모두 줄기에 박혔다. 시발. 이를 악문 준수가 뒤를 돌았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 아스팔트를 부수고 자라난 가장 굵은 줄기 위에 곱슬기가 있는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눈이 마주치던 새끼다. 이 새끼 동료가 왜 전영중을 향해 달려간 거지? 지금 영중의 상황이 궁금했지만, 준수는 본능적으로 절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두어 번 쥐었다가 편 왼손에 길게 빛이 솟아났다.
“뭘 봐. 죽여버리고 싶게. 아까부터 가만히 처서서 구경하더니 무슨 바람으로 직접 납셨데? 아주 사는 게 존나 재밌지? 능력 하나 잘 갖추니까 세상이 네 발아래인 거 같지? 내가 너 찢어발길 거야 시발놈아.”
천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상대는 아무 대답 없었다. 대신 역광 속 두 눈이 형형한 빛을 내고 있어, 따로 말이 필요 없었다. 준수가 먼저 하늘에 십자가를 수놓으며 접전이 시작됐다. 서둘러 눈깔 새끼를 조지고 영중에게로 가야 했다.
영중은 바람막이 주머니에서 양손을 꺼냈다. 방송국 헬기 소리가 건물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직은 사각이었다. 힐끗 보니 발밑이 벌써 진창이 됐다. 얘네들, 생각보다 많이 까부네. 영중이 딱- 핑거 스냅을 치자 이들이 딛고 서 있는 땅에 어둠이 피어올랐다. 상대는 위협적이지도, 우호적이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다섯 걸음 뒤에서 영중을 집요하게 관찰했다.
자신의 늪을 덮어버리는 걸 보고도 제지하지도, 방어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저 빙긋 웃는 얼굴로 가볍게 입을 열었다.
“요즘, 우리 명성을 자꾸 가로채 가는 무리가 있다던데. 너희였구나?”
영중이 힐끗 남자의 뒤로 시선을 보냈다. 이 정도 거리면 들렸을 텐데. 역시나, 남자의 발치로 빛이 날아와 박혔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지 잠깐 한눈을 팔았다고 준수가 저만치 치여 날아갔다. 아, 혹시 일부러 날려 보낸 건가? 대화하자고? 배려심이 깊네. 영중이 마스크를 내렸다. 얼굴은 빙긋 웃고 있었다.
준수가 다시 지면에 빛을 꽂으며 돌아왔을 땐, 이미 영중은 떠나고 없었다. 합류한 주동자 둘은 목적을 다 이룬 듯이 빠르게 물러났다.
뒤따라가던 준수의 귀에 무전이 들려왔다. 남산타워를 테러하던 일당도 동시에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미련이 없다고? 준수는, 방금 있던 일을 떠올렸다. 이들은 영중에게 목적이 있었다.
당장, 영중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했다.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그들을 두고 황급히 집 방향으로 몸을 튼 준수 뒤에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 협회에서 보내온. 준수가 항상 히어로 일을 할 때 타고 다니는 차. 이것까지 타야, 현장의 끝이었다. 준수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를 지나는 헬기 안 카메라 렌즈가 빛을 반사했다. 어디선가 환영처럼 환호성이 들려왔다.
착각이 아니었다. 미처 멀리 대피하지 못했던 시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피하지 못 한 시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순간 얻어맞은 듯 머리에 큰 두통이 밀려왔다. 이런 일을 겪고도 웃는 낯의 이들은 박수와 감사를 전했다. 준수의 가슴에 꽃이 꽂혔다. 인지가 느려졌다. 주위의 모든 행위가 느린 동작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아까, 머리를 너무 세게 부딪혔나 보다. 아니면, 눈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겼거나. 협회에 있는 한, 어느 순간에도 준수는 히어로였다. 깨달음을 얻자 다음은 쉬웠다. 준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열어준 세단에 올라타며 손을 흔들었다.
집엔 밤이 다 돼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사람을 뭐 이리 오래 붙잡아 두는지. 현관에 나와 있는 영중의 신발은 세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깨끗했다. 준수는 진흙투성이인 자기 신발을 비닐에 넣어두었다. 조심히 영중의 방문을 열어보자 다행히, 영중이 보였다. 침대에 정자로 곧게 누워 곤히 잠든 그를 차마 깨울 수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지금 기분이 그랬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영중이 무사한 걸 확인하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제야 호숫물을 뒤집어쓴 몸이 찝찝했다. 곧장 씻고 나온 집은 온기 하나 없이 싸늘했다. 서늘함에 잠시 소름이 돋았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머리에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도, 오늘은 왠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피를 많이 흘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머리를 베자 곧장 잠이 쏟아졌다. 그날 꿈에는 영중의 뒷모습이 나왔다.
5장 : 위기
준수는 요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영중이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영중이 피하기도 했지만, 준수도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다시 붙잡고 물어봐봤자, 또 대답을 피할 게 뻔한 데 괜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만에 하나 정말, 빌런 측에 협력하고 있다면. 연인이자 히어로인 자신이 어떻게 나가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에 부사수란 새끼가 쫑알쫑알 시끄럽게 굴어, 죽이고 싶은 걸 참느라 두 배로 고생했다.
생각을 허락 없이 읽거나 멋대로 전송해오는 미친놈이 자꾸만 준수한테 엉겨 붙었다.
“햄 진짜 이상하다니까요!”
시끄러운 녀석을 무시하고 빛의 창을 투척했다. 창은 곧게 나가다가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재해를 콱 붙잡았다. 준수가 주먹을 쥐자 갈라졌던 창이 재해를 가르고 다시 하나로 모여들었다. 우선 한 마리.
“저 재해도 지금 비명 지르고 있어요.”
기상호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다시 새로운 창을 던졌다. 두 마리.
“재해의 반은 말을 한다니까요.”
수십 개체로 분열한 점액질이 도로를 부식시키며 기어 다녔다. 에이씨. 너무 많아. 준수가 잘게 빛무리를 흩뿌렸다. 쥐었던 주먹을 활짝 펴자 빛무리들이 강한 열을 내뿜었다.
“햄이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보이라는 빌런은 안 보이고 말하는 재해만 계속.”
“시끄러워.”
준수가 기상호의 옷깃을 붙잡고 비상했다. 둘이 있던 자리에 산이 강한 듯 보이는 액체가 쏟아졌다.
허우적거리면 바로 손을 놓아 버리려 했으나 부사수 놈은 용케 얌전히 공중을 끌려다녔다. 쯧. 혀를 한 번 찬 준수가 발밑에 빛무리를 만들어 주었다. 목을 쥐고 캑캑거리던 녀석은 이내 살만해졌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협회에선 보안에 부치라는데 영 찝찝해가.”
협회까지 언급되면. 준수도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작전에서 배제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 준수의 질문에 협회는 밤에 투입되는 비밀 작전인 만큼 빛을 다루는 능력은 제외했다고 했다.
‘아, 그런데 작전지가 어디였다고요? 지하수도요, 아 네.’
올림픽공원에선 역시 최초로 빌런과 마주한 히어로라며, 단신으로 빌런을 물린 히어로라는 둥 좋아라, 언론에 남의 얼굴을 풀더니. 땅속에 있는 빌런 아지트는 빛을 내는 능력 때문에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전에도 그랬듯, 명목을 챙기러 분명 모든 현장에 자신 데려갈 줄 알았는데. 제외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준수가 낸 결론이었다.
‘전영중, 너냐? 네가 연관되어 있어서 내가 배제된 거냐?’
물론 영중은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올림픽공원에서 보인 행보만 봐도 충분히 주의 대상이었다. 협회는 전영중의 이름은 몰랐지만, 준수가 같이 살고 있는 연인의 존재는 알았다. 머리가 아팠다. 한숨을 내쉰 준수가 입을 열었다. 둘의 모든 대화는 워치를 통해 협회에 전송됐다. 이미 밉보이고 있는 상황에 협회를 의심하는 발언까지 하면 더 귀찮아질 게 뻔했다.
“뭐, 높으신 분들이 까라면 까야지.”
“하지만 그때 햄도,”
“난 협회를 믿어. 더 나은 인류를 위해.”
“….넵.”
기상호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준수도 머리 아픈 생각은 그만하고 싶었다. 지금 자길 혼란스럽게 하는 건 집에 있는 전영중 하나로도 족했다.
다시 생각이 빙글빙글 돌아가려는 머리를 몸을 움직여 억지로 멈췄다. 거세게 날아간 창이 마지막 재해를 꿰뚫었다. 성준수는 감정 없는 기계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시발!
이런 시커먼 새끼 말고 차라리 전영중이 이렇게 쫑알쫑알 붙어왔다면 귀찮음도 덜 하고 참 좋았을 텐데. 하긴, 그건 그거대로 성가실지도 몰랐다. 전영중은 사소한 것도 절대 져주려 들지 않는 놈이니까. 그래도 준수는, 전영중이 가끔은 자기한테 일상에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수다 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얘가 하루 종일 뭐 하고 지내나 궁금했다. 지금도 그래, 무슨 생각하는지 절대 말해주지 않잖아.
평소에도 텐션이 높은 녀석은 아니었지만, 요즘 영중은 특히 더 가라앉아 있는 게 느껴졌다. 집에 오면 조용히 서재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다던가, 불을 끄고 방에 들어가 준수가 와도 나와보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식으로 한 번 꼬드겨 같이 밥을 먹었을 때도, 준수의 말에 가끔 단답형으로 대답만 해줄 뿐 조용히 먹고 일어났다. 답답함에 화를 냈다. 기분 나쁜 게 있다면 말 하라고. 저번에 의심해서 그러냐고 사과도 해봤다.
‘아냐, 그런 게 아니야 준수야. 내가 지금은. …전에도 말했듯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얼른 초능력에도 성과를 보여서 히어로가 되어야 너도 안심할 거 아냐. 여러모로 조급해서 널 불안하게 만들었나 보다. 내가 시간이 필요해 준수야, 조금만 기다려줘.’
‘…그래.’
영중이 이리 말하면 준수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뭘 어떻게 해보려던 마음이 꺾였다. 대화가 일방적으로 마무리됐다. 영중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고, 준수는 혼자 남아 식탁을 정리했다.
도움을 줄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영중은 막상 중요한 때에 절대 자기 옆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기만뿐인 관계. 그래도 성준수는 두 사람이면, 뭐든 극복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이젠 잘 모르겠다. 전영중은 아직도 자길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미덥지 않겠지. 영중은 히어로가 되겠다고 훈련한 성과로 부산에서 홀로 재해를 잡는 모습까지 보여줬건만, 준수는 빌런이 아니냐고 의심이나 해댔으니. 이해한다, 짜증이 날 법도 했다. 그래도, 같이 사는 애인한테 좀 의지하면 어디가 덧나냐고.
‘내가 심하긴 했지. 히어로 지망생에게 빌런이냐고 물어봤으니. 하지만? 전영중 네가 먼저 수상하게 굴었잖아. 시바거’
그냥,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주면. 또 믿어 줄 텐데. 여태 그래왔듯이 모든 특이점을 다 넘겨줄 텐데. 왜 그 한마디를 못 해서. 고작 믿음 한 조각 주질 않아서 이 사달을 만드는지 모르겠다. 정말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전영중의 뇌를 열어보고 싶었다.
저 새끼는 지금 아무 생각 없는 거 같다만, 그냥 시원하게 툭 까놓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 우리 관계를 보고 누가 연인이라고 생각하겠냐. 옆자리를 내어준다더니, 이젠 노력할 생각도 하질 않네.
분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검은 세단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준수는 영중과 재회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준수가 히어로가 된 지 1년 차의 일이었다.
서울 어딘가의 하수처리장, 수치 이상 특유의 불에 타고 남은 재가 풍기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냄새의 근원지로 보이는, 검은 점액으로 범벅되어 어둠을 파고드는 재해. 갈대밭으로 추정되는 녹지는 어둠이 넘실거렸고. 손아귀처럼 길게 뻗어 자란 어둠은 재해를 지키듯 준수 앞을 가로막았다.
새벽 특유의 스산한 공기. 망토를 괜히 한 번 펄럭인 준수가 빛으로 만든 십자가를 나뭇가지처럼 휘둘렀다. 공격성은 없어 보였지만, 발등 위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게 거슬려 어둠을 지워냈다. 빛이 범람해 어둠을 침범하자, 물체가 뒤를 돌아봤다.
빛이 닿은 몸체 일부의 점액질이 증발했다. 흘러내리는 역겨운 점액질 사이로 맨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아는 얼굴이었다. 거리가 있었지만, 아직 시력이 0.8 정도 남아있던 시기라 준수는 얼굴 주인을 단번에 알아봤다. 의외였다. 정말 여기서 보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얼굴.
아주 오랜만이었다. 9년만인가? 준수가 먼저 차에서 내린 이후로 보지 못했던, 준수의 마지막 친구.
“전영중. 너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상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땡그래진 눈동자가 지진 난 듯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달아났다. 강 위를 천천히 기어 다니던 점액질이, 갑자기 빠르게 멀어졌다.
새끼, 저거 분명 알아본 거지? 재해, 아니 전영중이 성준수를 알아봤다.
어떻게? 이성이 남아있나? 영중이 멀어지자 주위를 가득 메우던 어둠도 사라졌다. 사라졌다기보단, 그냥 전영중이 거대한 어둠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어둠에 잠겨 있던 갈대밭은 의외로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멀리 달아난 녀석을 쫓아가는 길에 보아도 주위에 전혀 피해가 없었다. 꿀렁이던 어둠은,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용도로만 주위를 메워둔 거였나. 그걸 깨닫고 나니 전의가 사라졌다.
“야, 전영중. 기다려 봐.”
하수도를 벗어나 어느새 산을 타니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목소리가 들렸는지 영중이 멈췄다. 머리 위에 빛을 띄워도 주위가 온통 어두웠다. 두렵진 않았다. 준수는 어둠 안으로 발을 디뎠다.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어둠은 종아리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손목을 붙잡았다. 진흙 같은 촉감의 점액질이 손아래 피부에서 꿀렁꿀렁 뿜어져 나왔다. 닿는 부위가 따끔따끔했다. 슈트가 녹아 내리다가 재생하길 반복했다.
성준수는 이 현상을 알고 있었다. 폭주. 보통 수명이 다한 히어로의 육신이 능력을 담아내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 은퇴하고 모습이 보이지 않은 히어로는 이상 수치의 폭주로 재해 위험 상태가 되어 처치당했다는 걸, 이미 사라진 누군가에게 저주처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저주가 맞았다.
‘쟤를 내가 죽일 수 있을까.’
이제 유일하게 남은 어린 시절의 인연이 폭주 상태라니. 반갑다고 인사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 만나게 될 땐, 둘 다 히어로가 되어 세상을 구하자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곧 죽을 거라니. 이건, 이건 아니잖아. 미끄러지던 손에 다시 힘을 줬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죽여야 하는 옛 인연에 준수는 책임감을 느꼈다. 한 번 해보자. 멀뚱멀뚱 가만히 서 있는 영중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러자 갑자기 발버둥 치기 시작해 힘을 더 줘 억지로 눈을 맞췄다.
“야, 나 믿지? 너 안 죽어. 그러니까 진정해.”
점액을 흘리느라 흰자위가 온통 검게 변한 눈이 가만히 준수를 바라봤다. 폭주 상태의 히어로는 재해와 다름없었다. 아주 위험한 행위였지만, 준수는 방금 자신을 알아본 듯 행동한 영중을 믿었다.
얼굴을 빤히, 조금 오래 쳐다보던 영중이 결국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쟤 진짜 내 얼굴을 알아보나 보다. 이제 좀 고분고분해지려나. 준수가 안심하며 얼굴을 짜부라트릴 듯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탁- 얼굴에서 떨어지던 손을 영중이 소리 나게 쳐냈다. 무슨 짓인가 싶어 인상을 쓰자 영중이 슬금슬금 조금 물러났다. 그리고 오지 말라는 듯이 한 손을 내밀더니, 곧. 뿜어져 나오던 검은 점액질이 멈추고 공간을 막아내던 어둠이 걷어졌다. 걷어진 어둠은 모두 영중의 발치로 빨려들었다. 어스름한 새벽녘이 울창한 나무 사이를 뚫고 둘이게 닿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어둠이 걷어지니 레이더에 빨간 점이 사라졌다. 영중은 눈이 아픈지 손으로 눈가를 짚더니 곧 쓰러졌다. 억지로 뜨여보니 흰자가 온통 벌겋게 부어있었다. 눈물자국을 따라 피도 묻어났다. 옷가지며 뭐며 다 녹아내려 알몸인 녀석을 어디 넘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전영중을 집으로 데려왔다.
평화롭던 시절 속 유일한 생존자이자, 같은 꿈을 나누던 친구란 추억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돌아왔다. 원하던 히어로가 되어, 사람을 구하고. 민생을 살피고 명성이 올라가고. 그러나 환호를 보내는 사람 중,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외로움,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던 고독 속에 전영중은 성준수가 다시 발견한 가장 어두운 빛이었다. 어린 시절 성준수는 어떤 히어로를 지망했는가. 그걸 함께 기억할 유일한 존재. 준수는 어떤 관계로 얽혀서든 영중을 옆에 둬야겠다는 강박을 느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건 사랑이었다.
“어디 갔다 와?”
“공원, 산책하러. 나 먼저 잔다.”
사랑, 그래 성준수는 전영중을 사랑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성준수의 인생에서 사랑할만한 타인을 고르라고 하면 생각 나는 게 전영중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 이외의 타인은 전영중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쟨 내 꿈을 나눠 가졌고, 내가 다시 발견했으니까.
인간관계가 넓었다면 선택이 달라졌을까,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저 새끼가 너무 냉랭해서 얄미울 때.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고. 이젠 영중 없는 삶은 딱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전영중은 바쁘다며 성준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꽤 괜찮은 애인이었고 적당히 의무를 다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준수도 만족했다. 그런데 이건 아니지 않아?
“야, 너 바람피우냐?”
그간 수상했던 이유가, 빌런이 아니라 바람피우는 거였나? 지난 늦봄, 다른 남자와 손뼉을 맞대던 모습. 그리고 영중의 손에 작게 들려있던 쪽지를 봤었다. 보통 길에서 만난 친구 사이에 쪽지를 주고받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의심의 싹은 지난번, 올림픽공원 이후 양분을 받아 꽃을 피워냈다.
“지난번 공원에서도 그래. 너 씻는다며. 왜 개 산책시키는 새끼를 구하러 달려오는데? 그것도 다 젖은 머리로 급하게. …영중아, 내가 그 자리에 있었잖아. 히어로인 네 남친이 알아서 구하지 않을까? 그 새끼가 뭐가 그렇게 걱정됐길래 현장까지 네가 직접 와? 그리고, 그 전날에도 아침까지 둘이 같이 있었다며. 뭐, 공원이 너희 밀회 장소야? 산책이나 재해는 암호 같은 건가?”
“우리 준수, 저번부터 상상력이 참 풍부하네. 소설 작가 해도 되겠다.”
방에 들어가려던 영중이 결국 뒤를 돌았다. 소파에 앉아있는 준수는 미간 한 점 구겨지지 않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침묵 속에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성준수 지금 진심이구나. …하지만 여태 물어본 적 없었잖아. 잘 지내 왔잖아.
“우리 뭐 연인 간 마의 900일 이런 거야? 이상하다. 900일은 한참 지났는데. 너랑 몇 달 전에 같이 외식한 게 4주년이라며. …아, 혹시 준수는 4라는 숫자를 좋아하나? 왜, 어제 잡고 들어온 재해도 4. 지금도 4시. 우리도 4주년. 그래서 4주년에 멈추려는 건가? 와,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F층 버튼을 숫자 4로 바꿔 줄 수 있냐고 문의해 봐야겠네.”
“개소리 좀 하지 마. 엘리베이터 버튼을 왜 바꿔 시발 4층에 살지도 않는데.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잖아. 너 딴 새끼 만나냐고.”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지 이해가 안 되니까 그러지.”
“대답하라고 시발! 너 그 새끼랑 무슨 관계야.”
“…내가 꼭 대답해야 하나?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해도 안 믿을 눈친데? 적어도 욕은 빼고 질문해야지 준수야, 무섭잖아.”
영중의 턱에 힘줄이 돋아났다. 이기죽거리는 말투에 웃지 않는 눈이 거슬렸다.
“표정 봐라? 네가 뭔데 이를 악물어. …아, 됐어.”
성준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 자꾸 처 나가서 이상한 짓거리하고 들어오는 거. 더는 못 봐주겠다.”
다리를 부러트려 놔야지 시발. 험한 말을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은 영중의 입장에선 황당 그 자체였다. 어처구니가 없네. 평소에, 아니 진작에 이렇게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갔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진짜 문제는 직면하지도 못하는 꼭두각시 주제에.
진실을 멋대로 곡해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꼴이 놀라웠다. 이왕 굴린 김에 거기서 머리를 좀 더 굴려보지, 그랬냐. 그랬다면 빌런이나 바람 따위가 아니라. 영중이 정말로 뭘 하고 다니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텐데. 잡힌 멱살이 억울했다.
늘 짜증 나게 구는 건 너고 참아주는 건 나였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 우리 준수는 어차피 자기 힘으론 거기까지 밖에 생각 못 하지? 협회에 목줄 쥐여준 개새끼라.”
“협회 얘기가 갑자기 왜, 아. 됐다. 이 악물어 전영중.”
성준수가 영중을 때렸다. 고개가 돌아갔다. 턱이 얼얼했다. 아팠다. 주먹으로 맞은 턱이 너무 아팠다.
그러나, 주먹질을 당한 얼굴보다 성준수가, 정말 자신을 때렸다는 점이 더 영중을 아프게 했다. 날 사랑한다며 성준수. 아, 미리 알아차렸어야만 했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래, 이런 소꿉놀이. 4년이나 했으면 오래 한 거지. 금방 질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갔네? 당연한 거라고. 이게 당연한 결말이라 생각했지만 먼저 맞은 게 억울해서. 영중도 똑같이 주먹을 내질렀다.
돌아갔던 고개가 천천히 돌아왔다. 또 짜증 나는 얼굴이다. 왜 놀라는데. 왜 상처받은 얼굴이냐고. 자신이 반격할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는 듯이.
이를 악문 성준수는 벌겋게 달아오른 주먹을 다시 휘둘렀다. 영중도 지지 않고 팔을 뻗었다. 우당탕 테이블 위 살림들이 떨어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먼저 위에 올라탄 준수가 영중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가격했다. 가드를 올리면 어깨를 쥐어팼다. 몇 대 더 맞아주던 영중이 다리를 뻗어 올리며 허리를 세웠다. 엉킨 몸이 뒤로 굴러가며 위아래가 바뀌었다. 준수가 곧바로 가드를 올렸다. 준수가 하던 대로 어깨를 몇 대 때리던 영중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거칠게 몰아 쉬는 숨에선 물기가 묻어났다.
“이젠 날 사랑하지 않아?”
퉁퉁 부은 볼과 터진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은 발음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준수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설마, 저 겁쟁이가 사랑을 입에 담았겠어? 전영중에게 처음 주먹을 뻗었을 때보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귀는 맞지도 앉았는데 고막에 물이 찬 듯 심장 소리가 쿵쿵 울렸다. 시끄러웠다. 잘 못 들었으니까, 한 번만 더 말해주길 기다리다가 팔을 내릴 타이밍도 놓쳤다. 온몸에 피가 빠르게 돌았다. 감각이 예민해진 팔뚝 위로 물이 떨어졌다.
목덜미가 싸해졌다. 피 흘리나? 그렇게 세게 안 때렸는데. 설마, 우나? 생각에 빠진 팔뚝 위로 무게가 실려 왔다. 영중이 이마를 기댔다.
“헤어지고 싶으면 바로 말해. 시발 좆같은 핑계 대지 말고. …나도 상처받아 준수야.”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눈물은 팔뚝을 타고 내려와 준수의 얼굴 위로 툭툭 떨어졌다. 팔을 벌리려 하자 언제 붙잡혔는지, 꽉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얼굴 보고 싶은데.”
“보면 죽여버릴 거야.”
“평소에도 이러면 얼마나 좋냐. 넌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어.”
“그냥 죽어.”
“미안하다고. 악. 야, 야! 네가 말을 안 해주면 내가 알 방법이 없-”
결국 영중에게 다시 맞아 입술이 터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곧바로 영중이 입술을 부딪쳐와 소독해줬으니까. 둘은 방금 있었던 폭력의 잔열을 해소하려는 듯 옷 아래로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사이좋게 터진 입술은 아프긴커녕 짜릿하기만 했다. 상처를 비집어 열고 너덜거리는 살점을 뜯어 몇 방울의 피를 나눠 마셨다.
숨이 멀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열기는 뜨거웠다. 영중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서운한 걸 다 풀어내려는 듯 준수의 여린 살을 물어뜯어 피를 맺히게 했다. 오랜만에 만져지는 가장 은밀한 곳을 자극하는 영중에 준수는 고통에도 금방 헐떡였다.
이건 일반적인 연인들이 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폭력에 가까운 정사. 영중은 억눌려있던 감정을 언어로 뱉는 대신 상대를 입에 담는 형태로 표현했다. 이건 흔히들 하는,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걸 보여주려는 증명 행위와 비슷했다. 대신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는 게 아닌, 상대를 삼켜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는 방법. 준수도 이를 이해했는진 모르지만, 영중과 똑같이 상대를 물어 피를 핥고 파정한 욕망을 삼키고 타액을 마셨다. 이에 따라 둘은 비로소 오늘. 서로는 서로가 되어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건 비언어적 대화이자 폭력이자 이해이자 온정이자 배려이자 결국- 사랑이었다. 영중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오만했다.
다음 날 여기저기 쓰리고 아픈 몸을 일으켜 준수는 출근했다. 자가 회복 활성화제 효과가 떨어져 가는 것도 있지만, 영중이 어제 격렬하게 남긴 표식이라 바로 지우긴 좀 꺼려졌다. 두고두고 약 바르라고 시켜야 자기가 얼마나 짐승 새끼처럼 굴었는지를 깨닫지.
치아 모양을 따라 오돌토돌 난 피딱지는 움직일 때마다 거슬렸고, 그 주위의 푸르딩딩한 멍은 구를 때마다 아팠다. 그런데 막상 화가 나다가도, 이 상처를 내던 영중의 얼굴이 떠올라서 기분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어젯밤을 생각하자 목이 타는 기분이 들어 500ml 물 한 통을 단번에 들이켰다. 숨을 깊게 내쉬어 열감을 진정시켰다. 오늘 현장은 끝났고, 협회에 긴급회의가 잡혀 용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슈트 단추를 풀며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준수가 상의를 다 벗자 협회 직원이 오늘 있을 회의의 사전 브리핑을 시작했다. 마침, 사람이 많은 시장 옆에서 신호가 걸렸다. 자주 다니는 길은 아니었다. 대로에 4중 충돌 사고가 나 처음 가보는 지름길로 빠진 참이었다. 많은 인파에서 흘러들어오는 여러 생각들이 시끄러운지 기상호가 커튼을 살짝 들췄다. 빠르게 정장 셔츠 단추를 하나 잠근 준수가 브리핑을 좀 미루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 새끼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히어로가? 우연이겠지- 신호가 바뀌고 차가 출발하자 갑자기 기상호가 소리쳤다.
“차, 차 좀 멈춰봐요.”
“뭔데?”
“햄! 문 쫌! 빌런이!”
빌런이란 말에 반응한 준수가 차가 멈춰 서기도 전에 이음새를 잘라 문을 걷어찼다. 기상호랑 같이 차에서 뛰어내려 빛무리에 탄 거까진 좋았으나 문제가 몇 가지 생겼다. 첫째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둘째는 둘 다 사복 차림이었다.
물론 긴급 출동 때는 사복 차림으로 현장을 뛰는 경우가 간간이 있긴 했다. 준수만 해도 데이트 복장 그대로 현장을 뛰지 않았는가. 그러나 상대가 빌런이라는 점에서 조금 걱정됐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몸으로 때우는 부사수 새끼는 목숨이 바로 걸린 일이었다. 협회도 마음이 같았는지, 세단 창문이 열리고 둘의 망토가 집어 던져졌다.
준수가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까딱였다. 진한 남색 정장 위에 준수의 새하얀 망토가 둘렸다. 바람이 불었다. 망토가 펄럭이며 준수의 셔츠도 펄럭였다. 하나 채워진 단추가 힘을 내 버텼다. 준수도 이 점을 알아차렸지만, 여유가 없었다. 기상호가 코피를 뚝뚝 흘리기 시작한 와중에, 히어로 준수가 왔다는 소식이 퍼져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야, 사람이 너무 많아서.”
“햄, 저기요!”
고개를 박고 중얼거리던 상호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준수가 당장 빛무리를 이동시키며 대충 몸 위에 망토를 둘러줬다. -꼬리를 잡혔나? 하필 오늘. 쯧. 히어로와 접촉은 곤란해. 거사가 곧인데- 상호가 흘러내리는 초록색 망토를 붙잡자 손에 묻은 코피를 흡수했다.
“내 놓칠 거 같나.”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기상호는 한 명의 빌런을 특정해냈다. 그러나 준수는 그런 능력은 없어서. 대신 기동을 담당했다. 걸리적거리는 게 없도록 가판대보단 높이, 시장 천장보단 낮게 날며 기상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기름에 튀겨지는 음식 냄새와 수천의 인파로 나는 체취가 위로 올라오니 좀 덜했다. 시장 바깥에 협회 직원들이 도착했는지 위치에 신호가 왔다. 그러나 히어로가 나타났다는 소란이 더 커 인파는 통제되지 않았다. 다행히 일종의 쇼라고 생각하는 듯, 여기저기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괜찮았지만 대피하라고 외쳤다간 무조건 사고 날 인파가 몰렸다.
이동하는 둘을 따라 급류처럼 휩쓸리는 사람들에 기상호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코피가 멈추질 않았다. 절로 눈을 찡그려질 만큼 많은 혈흔. 그래, 퍼포먼스라 이거지. 준수가 대놓고 판을 깔 생각으로 빛무리를 다섯으로 나눠 골목으로 보냈다. 골목과 골목을 돌아 다시 모이는 빛들. 거기에 출력을 키우니 빛이 강해져 바로 아래 땅에선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물론 위에 탄 히어로도 파악이 힘들어졌지만, 눈 감고 방향을 지시하는 탐색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어느 빛에 히어로가 탄 지 특정하지 못한 빌런은 결국 인적이 드문 길목으로 몰아졌다.
인적이 드문 상가. 골목마다 가득한 간판과 달리 아직 대낮이었는데도 문이 닫힌 가게가 많았다. 유명한 시장 옆에도 이런 곳이 있네. 자주 돌아다니는 편이 아닌 준수는 별 의심 없이 땅에 내려왔다. 발을 디디는 순간 굉음이 들려왔다. 쩌저적- 살벌한 소리와 함께 주변 건물 유리창에 성에가 빠르게 뻗어나갔다. 지면에는 서리가 가득하여 걸음을 떼기 두려울 수준이었다.
“뭐야, 얼음?”
“냉기요. 왜, 전에. 남산에 왔던 녀석 중 하나에요.”
뉴스로 들은 바가 있다. 남산에는 땅이 얼며 지진이 일어났다고. 냉기 능력자. 빌런 탐색기가 대어를 낚았다. 미디어까지 탄 빌런. 경계 1순위였으니 회의 불참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대어라면 어떤 긴급 안건이더라도 협회가 이해해 주는 게 맞았다. 빌런을 잡느라 회의에 빠졌다는 걸로 아니꼽게 나오는 순간 히어로 단체는 목적과 대의를 잃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회의 안건이 마침 빌런의 테러를 대비한다고 했던가? 어차피 따져보면 결국 빌런이니, 결과적으론 준수와 부사수는 협회와 같은 용건의 일을 보게 되는 것이다. 회의에 가지 않고 냉기 능력자를 상대한다는 결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냉기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준수는 숨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다만, 성준수에게 히어로로 살면서 가장 만나고 싶으면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능력 0순위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추위를 유발하는 능력 전부를 말할 정도로 유감이 있었다.
“햄? 햄!”
“어, 난 괜찮아.”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성준수는 히어로였고 앞에 있는 건 범죄자다. 준수는 빌런이라 자칭하는 이능력 범죄집단을 잡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건 빌런 집단의 아마도 행동 대장 중 한 명이다. 부사수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느껴졌다. 그제야 준수는 자신이 공황에 빠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살면서 몇 번 없던 경험. 그때와 똑같이 손끝에 낀 서리가 보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얼어 뭉치는 게 느껴졌다. 단추가 하나만 잠긴 셔츠는 보온 능력이 없었다. 조금 겁먹었다고 해서 물러설 순 없었으니 준수는 차근차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우선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놀려 단추부터 잠갔다. 길목 안쪽에서 생성되는 냉기가 둘을 지나쳐 뒤쪽으로 흘러갔다. 망토가 펄럭였다. 오면서 봐둔 사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부사수는 알아서 망토를 칭칭 감고 있었으니, 준수가 이목을 끌어주면 적당히 무사하리라.
“햄! 조심해요. 여기-” 콰장창-
이미 인류가 추위를 맞서는 데 있어 의복을 갖추기보다 불을 피워 온기를 얻은 역사가 90만 년은 더 이르게 있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절대적 냉기 앞에서 준수가 옷을 여미기보다 불씨를 찾아 나선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도, 기원을 따져보면 더욱 당연한 일. 그렇게 생각하며 성준수는 서로 맞은 편에 있는 안경원 두 곳의 유리창을 깨트렸다. 그 탓에 부사수의 목소리가 더 들리지 않았지만, 준수가 생각하기에 우선순위는 따로 있었다. 수백 개로 나뉜 작은 빛무리들이 렌즈를 옮겨왔다. 준수의 지휘 아래 각도가 한 점에 맞춰졌다. 온갖 유리와 렌즈 너머 빛이 검은 아스팔트 도로 위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곧바로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골목 너머에서 사람 키가 넘는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굉음을 들은 빌런이 다가오고 있다. 사고를 빠르게 굴러갔다. 준수의 머리에 문득, 언젠가 본 영상들이 지나갔다. 왜, 있지 않은가, 텔레비전을 켜면 곧잘 방영되던 지식이 빛나는 별. 그리고 유튜브. 그 프로그램의 실험 영상에서도, 그 뒤로 과학이 더 발전한 최근에서도 태양열 조리기구는 항상 긴 시간을 동반했다. 그러는 사이에 도로 위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매캐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좀만 더 기다리면? 아니지. 기다릴 여유가 없지. 장작도 없는 도로 위에 불을 붙여야 뭐해. 서점은 없나? 주위는 온통 카페였다. 자동차라도 터트려야 하나? 가로수를 잘라 불쏘시개로. 하, 안 됐다. 성준수는 히어로니까. 이미 가게 두 개를 해먹은 참이었지만 조금 제정신이 돌아왔다. 준수에겐 시간이 없었지만, 충분한 빛이 있지 않은가? 그래, 그냥 직접 빛을 응축하면 되는 일이다. 원래 곧잘 해 오던 방식이다. 빛을 응축해 더욱 뜨거운 열을 발생하기. 이걸 왜 바로 기억하지 못했을까. 준수는 곧장 팔에서 빛을 뿜어내며 그 빛을 한 점에 집중시켰다. 빛무리가 떠나며 버려진 유리 따위들이 일부 언 도로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사방이 번쩍번쩍 빛났다. 서릿발이 날려왔다. 빛이 모여들었다. 그 밝기가 점점 커지다 단번에 팍 줄었다.
뭔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눈이 부셨다.
폭발, 그것은 폭발이었다.
빛이 모여들면 폭발이 일어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빅뱅!
초신성!
빛이 먼저냐 폭발이 먼저냐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성준수가 그 수준의 능력자였나? 그렇게 많은 양의 빛을 방금 응축했느냐, 묻는다면 아니오!
성준수가 상상하지도 감히 이해하지도 못할 빛의 영역에서의 일이었으니 당장에는 왜 폭발이 일어났는지 알지 않아도 됐다. 일단 빌런은 쓰러졌고 폭발로 인해 불이 나 냉기는 가셨고 빌런은 쓰러졌고 사건은 해결됐다.
화르륵- 감은 눈 너머로 열기가 아른거렸다. 무언가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기시감. 냉기. 불. 달짝지근한 탄 냄새. 여기까지 생각하자 퍼뜩 눈이 떠졌다.
누군가 서 있었다. 비록 온몸에 불이 붙어 시커먼 실루엣이었지만, 멀쩡하게 휘날리는 초록색 망토가 기상호임을 알렸다. 자신이 일으킨 폭발에 휘말려 불이 붙었나? 아니다. 기상호는 몸부림치고 있지 않았다. 불꽃의 모양으로 보니 알 수 있었다. 저건 발화였다. 발을 디딘 자리의 아스팔트를 새카맣게 태웠다. 아스팔트 타는 냄새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기상호 몸뚱아리에서 튀는 불똥들이 타닥타닥 굴러다니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불이란 건 원래 이리 밝고, 시끄러운 거였던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연히 머리도 들리지 않아 고개만 조금 돌려 주위를 살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준수가 이해하든 말든 시야에 보이는 상황 정보는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주변은 깨끗했고 아까 그 빌런도 두 발로 서 있었다. 성준수는 그냥 공황으로 기절했을 뿐이고, 그런 준수를 지키기 위해 기상호가 둘 사이를 막았다. 그리고 신체 발화. 발화 능력자라니.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발화라는 개념은 흔한 게 아니었으니, 성준수가 살아온 삶에서 그 단어를 찾으려 드니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부산에서, 전영중이, 처리했던 발화 재해. 준수는 그날의 향을 떠올렸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때 영중이 밟고 있던 건 사람의 몸통이랑 비슷했고, 잿가루는 흩날리지 않았으며. 그때 봤던 어둠의 모양은 올림픽 공원에서 영중이 외간 남자인지 뭔지 그 키 존나 큰 새끼를 삼켰을 때와 비슷했다. 그래, 사람을 이동시킬 때 쓰는 어둠 모양 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부사수는. 재해였고. 아니야 다시 생각해. 기상호는, 부산 출신의. 폭주자 출신이었고. 얘는 협회에 텅 빈 이력서로 입사해서 빌런 탐색기로 일했고. 그런데 발화 능력은 숨겨왔고. 왜? 협회가 저놈의 정체를 몰랐나? 지금 드는 생각으로는, 저 새끼처럼 숨어있는 미등록 정신 조작계열 능력자가 기상호를 제 옆에 붙여 놓았다는 것. 왜? 미등록자가 간도 크게 협회에 위장취업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지? 빌런은 결국 제압당했다. 불과 냉기의 싸움인 만큼 치열했으나, 제 부사수는 위장 취업할 만큼의 실력은 있었던 모양이다. 체술은 개뿔 시발. 그러고 보니 전영중도 폭주자 출신이었지. 협회의 눈을 피해, 사회에 존재하는. 아,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림자를 쓰던 빌런의 말을 떠올렸다. 히어로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협회. 히어로 연구소. 1인 1실. 능력을 끌어 올려주는 약물. 체계화된 능력 활용 교육. 그리고 함께 차에 탔던 고아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지?
‘난, 지금 이걸 왜 떠올리는 거지.’
체온을 덥히던 불이 사라졌다. –햄, 속여서 미안해요.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흐린 시야 속 협회 직원들의 구둣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들것에 실렸는지 몸이 붕 떴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6장 : 종장
둥근 불빛이 일곱 개. 연구실이다. 익숙한 냄새와 아는 조명이 준수를 안심시켰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자 연구원들이 다가왔다. 시야가 휙휙 바뀌었다. 어지럽다. 팔뚝에 꽂힌 주삿바늘을 타고 외부의 액체가 흘러 들어왔다. 이물감은 팔을 타고 목덜미까지 올라갔다. 액체가 고이는 기분. 이내 목을 타고 올라가 머리에 이물감이 퍼졌다. 예민했던 감각이 다시 둔해진다. 한 연구원이 말을 걸어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요. 방심 한 번 안 하던 사람이.”
“그냥, 흔한 문제예요.”
“뭔데요? 말 해봐요.”
“연애 문제에요. 애인이, …그래도 어제는 좋았어요. 근데 몸 상태는 박살이 났죠. 그래서, 좀 …상념에 빠졌어요. …실수.”
“아, 그러시구나. 맞다. 애인이랑 동거하고 있다고 했죠? 이건 회복을 촉진하는 약인데 저번에 맞으신 것보다 약발이 세서 정신이 좀 몽롱하실 거예요.”
“네.”
흐린 시야로 흰 게 휙휙 지나다녔다. 연구원이 팔을 뻗었다 거두니 침대 시트가 내려간다. 준수가 어지러움을 참으려 눈을 감았다. 급격하게 졸음이 몰려왔다. 생각보다 부상이, 심했나. 귓가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분 성함이 뭐라고 했죠?”
소리가 웅웅거렸다. 누군가 멀리서 가까운 소리를 냈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겨우 문장을 인지했다. 그러나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영중이는 연구소를 싫어해. 말하면 안 돼. 말하면 싫어할 텐데….
몰아치는 감각에 속절없이 시야가 빙빙 돌았다. 기억의 파도는 예고 없이, 작은 방아쇠에 당겨진 총알처럼 사소한 계기를 촉매제로 밀려와 큰 상흔을 남기며 정신을 헤집었다.
파랗다 못해 하얗게 내리쬐는 무거운 햇볕 아래 흔들리는 새카만 나뭇잎 그림자. 연두색 울타리 너머로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쨍한 주황색 농구코트. 잔디 위에 앉아 물을 마시던 옆으로 다가온 그놈과의 첫 만남.
“나도 한 모금만.”
“싫어. 네가 누군데.”
“너 성준수 아니야? 나 너랑 같은 학교 옆 반 전영중이야.”
영중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옆에 앉았다. 옆구리에 낀 농구공과 땀에 흠뻑 젖은 회색 티셔츠. 준수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까 반대 코트에서 농구 하던 무리인가. 그런데 왜 여기로?
“네 친구 가는데? 쟤네한테 달라고 하지 그래?”
“모르는 애들이야. 네가 혼자 앉아있는 거랑 같은 이유,”
무더운 여름날, 그러나 집에만 있기엔 에너지가 넘쳐나는 나이답게 밖으로 나와 모르는 애들과 섞여 공놀이한 참이었다. 드러난 피부가 온통 빨갛게 익은 준수는 꺼지라고 말할 기력도 없을 만큼 더워서, 대신 생긴 걸 구경했다. 상의를 펄럭이는 손 위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엄청 더워 보였다. 시선이 땀방울을 거슬러 올라가 턱선을 타고 이마께에 닿았다가, 땀으로 젖은 짙은 눈썹을 지나 콧날을 타고 혀를 작게 내민 입술에 닿았다. 볼이며 이마며 햇볕에 그을린 주제에 혀는 새빨갰다. 준수의 집요한 시선을 알아챈 고개가 반대로 돌아갔다. 준수는, 작게 아쉬움을 느꼈다.
“야, 마셔.”
준수가 물병을 건네자 고개가 다시 돌아왔다. 고마워. 둘은 그렇게 아는 사이가 되었다. 종종 농구를 함께 하고, 밥을 같이 먹고, 방과 후 함께 떡볶이를 먹던 시간은 짧았다.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원인은 눈보라 재해.
둘이 살던 동네는 단숨에 폐허가 되었다. 영중과 준수는 가족을 모두 잃었다. 재해로 고아가 되는 건 요즘 시대엔 아주 흔한 일이었다. 너무 흔해서 동정조차 얻지 못하는, 보통의 이야기. 마지막까지 반드시 살아남으라며 자신을 덥혀주던 체온과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한 서재의 불길도, 품에서 결국 식어버린 여동생조차 너무 흔한 일이라, 먼 미래 준수가 스타 히어로가 된 뒤에도 인터넷 기사 한 줄 실리지 않은 이야기.
그 집에서, 무릎을 꿇은 준수는 결국 차가운 동생을 내려놓았다. 집이 너무 추웠다. 너무 추워서 눈물조차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반드시 살아야 했던 준수는 까맣게 타버린 서재로 달려갔다. 꺼진 불씨를 되살리려, 온기를 찾으러. 손발과 옷이 까맣게 물들었지만, 몸은 여전히 싸늘했다. 준수는 평생, 그날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서재에 누워 식어가던 준수를 비춘, 따뜻했던 햇볕 한 줄기. 히어로였다. 히어로는 준수를 뒤덮은 죽음을 몰아내고 반짝이는 새 삶을 주었다. 그런 준수가 히어로를 꿈꾸게 되는 건 당연했다.
히어로가 되는 길은 역설적으로, 고아가 된 덕에 걸을 수 있게 됐다. 국가에 의해 강제로 보내진 보육원. 준수와 같은 사연의 아이들이 백이 넘게 가까이 모인 이곳에서 소문이 돌았다. ‘협회에서 히어로가 될 아이들을 데려간 대!’, ‘우리 보육원에도 들른 대.’, ‘협회를 따라가면 히어로가 될 수 있대!’.
바깥에서는 모든 정보는 철저하게 숨겨져 흔한 정보 블로그 포스트 하나조차 쓸 수 없었던 히어로에 관한 정보가, 고아만 가득한 보육원에 돌았다. 이상함을 느끼기엔 어렸다. 고작 11살. 그리고 정말, 며칠 뒤 협회가 보낸 거대한 차가 보육원에 들렀고 준수는 당연히 차에 올라탔다.
차에는 의외의 인물이 타 있었다. 전영중. 영중과 첫 번째 재회였다. 사건이 터지고 처음으로 만난 아는 얼굴에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영중이도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는지 자신을 의지해왔다.
“준수 너는 왜 히어로가 되려는 거야? 안 무서워?”
“멋지잖아. 나도 누군가를 구하는 히어로가 되고 싶어. 힘이 없는 이들을 위해 대신 싸워줄래. 그리고 …강해지면 재해가 덜 무섭지 않을까. 또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싫으니까. …그러는 너는. 너도 히어로가 되려고 차에 탄 거 아냐?”
“난, 보육원이 아니라 길에서 잡혔어. 싸움을 잘한다고 데려간대. 잡힐 땐 무서웠는데, 그래도 너랑 말해보니까 히어로가 된다는 건 좀 멋진 거 같아.”
“그러냐? 하긴. 뭐, 너도 같은 히어로가 되면 좋겠다. 같이 재해를 무찌르고 사람을 구하는 거야. 우리 둘이 같이하면 더 셀 거 아냐. 농구 시합을 할 때도 슛을 넣을 때 스크린이 있으면 성공률이 확 뛰는 것처럼.”
“…그러게. 둘 다 히어로가 되면 좋겠다.”
둘은 나란히 앉아 머리를 맞대고 속삭였다. 공간이 좁진 않았지만, 함께 타고 있는 아이가 많아 딱 붙어 앉아야 했다. 너무 가까워서 차가 덜컹 일 때마다 머리가 부딪쳤지만 둘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팔뚝을 붙잡아 서로 끌어당겼다. 혼나지 않고 떠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좁고 불안한 상황 속 옆 사람의 침묵은 무서웠다.
품 안의 온기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던 순간을 겪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배려했다. 자리가 좁아 심장 소리를 들려줄 순 없었으니 말이라도 계속해야 했다. 둘은 경험을 말로 공유하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서로의 트라우마를 이해했다. 에어컨이 틀어진 듯 선선한 차내에서 팔이 닿아있는 부분이 유난히 뜨거웠다. 그 온기가 가려워 긁고 싶었지만, 준수는 꾹 참아냈다. 영중도 참고 있는데 먼저 빼내면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비슷한 처지의 친한 친구와 온기를 나누니 안심이 됐는지 잠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던 둘은 문이 열리며 쏟아지는 빛에 부스스 깼다. 처음엔 다섯 명이 내렸다. 두 번째도 다섯. 세 번째도 다섯. 차에는 아직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많은 인원에 비해 내리는 수가 적었다. 불안이 엄습했다. 영중도 비슷하게 계산을 마쳤는지 둘의 눈이 마주쳤다. 직감했다. 둘은 다시 헤어질 것이란 걸. 먼저 내린 건 준수였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뒤돌아보니 영중이 울고 있었다.
다시 혼자 남겨진 준수는 어느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기억의 끝.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1인 1실에 다른 아이들과는 동선도 겹치지 않았다. 보는 사람은 늘 같은 연구원 다섯 명뿐이라 심심하고 가끔 외로웠지만, 몽롱하던 시간이 더 길어서 견딜만했다. 뭐, 가끔 기억나는 건 시야를 가득 채우던 동그란 불빛과 복도 끝 유난히 형광등 수명이 짧던 자리, 그 탓에 소등 후에도 곧잘 깜박거리던 불빛. 그 기억에 히어로가 되며 빛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피워냈을 때도 덤덤했다. 준수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빛을 동경했으니까. 그걸 다루게 되는 일은 당연했다.
***
현관문이 강제로 열렸다.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집안에 들어왔다.
그것도 모자라 얌전히 있는 영중을,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피우며 소란스럽게 제압했다.
아, 각오는 했지만, 몹시 거슬렸다. 소중한 보금자리를 망가트리는 녀석들의 머리통을 잘게 쪼개 구마의 먹이로 던져주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실현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영중은 거사를 위해 참았다. 차라리 산책 핑계로 밖에서 잡혀줄걸. 의식이 잠시 끊어졌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전혀 모르는 장소에 누워있었다. 아마 원래 자신이 머물던 연구소가 아닌, 협회 건물과 연결되어있는 직속 연구소일 것이다. 이곳이 가장 튼튼하다고 준수한테 들었던 만큼 이미 능력 활성이 안정된 영중을 구속하기에 적절한 설비를 갖추고 있겠지.
멀리서 말을 하는 듯, 아득하게 연구원의 말이 들려왔다. -피를 조사해본 결과 △△연구소 출신의 폐기 대상이 맞습니다-, -어떻게 실패작이 저절로 안정되어 연구소로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저번에 잡은 그림자 놈은 결국 다시 폐기했죠-, -아지트에 찾은 놈들은 하필 이상 수치가 높을 때 사살하는 바람에 시신이 남지 않아 연구를 못 했고요-, -하여간 히어로 새끼들은 멍청해서 대의를 몰라. 모든 건 인류를 위해-
모든 건 인류를 위해.
팔을 타고 불쾌한 이물감이 들어왔다. 잘 아는 감각이었다. 사고를 단순하게 만드는 약물. 여기에 세뇌 교육까지 들어가면 협회에 관한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두통을 얻고 결국 생각을 포기하는 암시가 걸린다. 모든 히어로가, 성준수가 그랬듯이. 성준수 등신. 전영중은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는 약물을 느끼며 희열을 느꼈다. 이 순간이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너흰 정말이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영중은 웃는 낯으로 잠들었다.
***
잘게 흔들리는 천장에 준수가 깨어났다. 지진이 났을 때 흔들리는 건물이 내진 설계가 되어있는 거라고는 들었지만. 연구소는 지하에 지어져 있지 않았나? 지하 건물의 내진 설계 원리는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준수의 방은 안에서 밖이 보이지 않았고, 방음이 뛰어났다. 몸을 일으켜 익숙하게 어댑터를 잠그고 링거 바늘을 빼냈다. 바늘구멍은 대충 바늘을 고정하던 종이테이프로 막고 복도로 나왔다.
언제나처럼 조용한 연구동을 지나 입원동인 지상으로 올라오니 예상보다 더 큰 소란이 일어나 있었다. 급하게 떠나는 사람과 살려달라며 들어오는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섞였다.
“빌런들이 협회 건물을 노린다!”
빌런? 상황을, 파악해야. 로비로 이동하려던 준수의 옆을 키가 큰 남자가 스쳐 지나갔다. 준수가 자연스레 지나가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모르는 얼굴에 연구 가운도 입지 않은 꼴로 어딜 들어가려고 하는 건지. 소란을 틈탔다기엔 숨겨지지도 않는 덩치로 얼토당토않은 짓을 하는 게 어이없었다.
“저기요, 이 뒤로는 민간인 출입 금지입니다. 물론 동물도요.”
남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지 않았다. 붙잡고 보니,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거 같은 몽타주.
월! 웬 진돗개가 한 번 짖더니 몸을 일으켜 준수의 얼굴을 핥았다. 줄 끝을 붙잡고 있는 손을 보니 기억이 났다. 이 남자. 저번에, 한강에서 영중이랑 손잡았던 그 남자인가? 영중이가 통화할 때 국민이라고 불렀던?
“아, 제가 병문안을 와서요. 얘가 연락이 안 돼서 지금 상태가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싶네요. 저희 구마는 사람을 잘 찾거든요, 제가 길을 몰라서. 친구를 찾으려면 같이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여긴 병원도 아닐뿐더러, 병문안 올 사람들이 없는 사람뿐일 텐데요.”
준수가 턱을 까딱였다. 힘이 좋은 개도 떼어냈다. 왜 붙어오는 거지. 진돗개는 원래 충성심이 높아서 경계가 심하지 않나?
‘아, 설마 나한테서 나는 전영중 냄새를 맡은 건가?’
저 개랑 그렇게 가까운 사이면, 그 주인이랑도 존나게 친하다는 뜻이지 않은가? 성준수는, 전영중의 마음은 확인했지만. 아직 상간남 새끼도 같은 생각인지 듣지 못한 상태였다. 어느 나라 국민인진 모르겠지만 한없이 아니꼬웠다.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남자가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연락을 보냈다. 화면을 슬쩍 보니, 문자창 상대방 이름이 전영중이었다.
“전영중이 지금 여기 있어요?”
그제야 푹 눌러쓴 모자를 들어 올리며 남자가 얼굴을 보였다. 준수의 경계심과 별개로, 준수를 확인한 국민은 마스크를 내리며 반갑게 웃어 보였다.
“아! 영중이 남자친구시구나. 영중이 친구 지국민이라고 합니다. 준수 씨 얘기 많이 들었어요. 영중이가 죽고 못 살던데요. 영중이 잡혀 온 지 모르셨구나. 하긴, 지금 여기 계신 걸 보면 그럴 만도 하네요. 어젯밤에 갑자기 잡혀갔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얘를 깨워야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밖에 시끄럽던데 그거 보러 가셔야 하나?”
“…아니요. 같이 갑시다. 길은 제가 조금 알아요. 그러니까, 통제 구역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거잖아요? 하, 민간인을 혼자 들여보낼 순 없으니까 같이 가요. 근방에 히어로가 저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협회 근처이니 밖은 금방 처리될 겁니다.”
예상치 못한 호의적인 반응에 준수가 주춤 물러났다. 얼결에 동행도 허락했다. 혼자 찾아보겠다고 말을 했어야 옳았지만, 효율을 생각하면 같이 가는 게 나았기에 혼란이 왔다. 그런 준수를 신경 쓰지 않는 듯 국민은 앞장서는 진돗개 구마를 쓰다듬고 간식을 먹였다. 연구동 엘리베이터에 탄 국민이 자연스럽게 지하 4층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준수가 의문을 가졌다.
“영중이 지금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아요?”
“네. 아까도 말했잖아요. 저희 구마가 사람을 잘 찾는다고. 아, 안녕하세요. 구마에요. 이름이 고구마. 흠흠, 우리 구마 능력이 포인터거든요. 그래서 영중이 위치를 추적할 수 있어요. 천재 강아지 고구마를 믿고 영중이도 순순히 잡혀준 거죠.”
국민의 되지도 않는 가성은 무시했다. 잡혀줬다? 준수는 막연하게 영중이 잡힌 원인이, 평소 연구소를 싫어하던 이유에 있다고 생각했다. 연구소에 거취가 알려지면 잡혀가는 상태. 라고 이해해 여태 영중의 신상을 숨기는 데 동조하고 있었으니. 그러니까 순순히 잡혀줬다는 말은 이상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더 이상한 게 있었다.
“개가 능력이 있다고요? 비유가 아니라?”
국민이 미소를 지었다. 무지몽매함을 보는 안타까움이 녹아있는 눈썹과 자기 반려견을 자랑하려는 눈이 조화를 이뤘다. 남의 반려견 자랑을 들으려던 질문이 아니었기에. 준수가 먼저 선수 쳐 질문을 고쳤다.
“고구마와 지국민씨. 그리고 전영중, 당신들은 빌런입니까?”
국민의 표정이 변했다. 형용할 수 없는 눈빛. 로봇처럼 끌어올려진 입이 열렸다. 둘의 발걸음 뒤로 희뿌연 안개가 내려앉았다.
“거시적인 의미에선 빌런이 맞겠죠. 하지만 분류가 달라요. 걔네가 자길 무시한 사회에 힘을 과시해 혼돈을 가져오려는 폭력조직이라면, 저흰 나름 신사적으로 단 한 곳만의 파괴를 바라죠. …사실 두 곳 다 전면에 나선 적은 별로 없어요, 아직 둘 다 신생 세력인지라 규모를 키우는 데 집중했거든요.”
국민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이어갔다.
“여태 빌런의 소행이라고 보도 된 것 중 90% 이상은 협회의 언론플레이에요. 그 탓에 큰일 한 번 못 쳐보고 해산될 뻔했는데, 저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어요. 저희는 잡았고요. …아, 여기서 말하는 저쪽은 협회가 아니라 빌런입니다. 그래서 미디어에서 말하는 빌런이 맞냐고 물으시면 아예 다른 조직이라고 딱 잘라 발뺌은 못 하겠네요.”
“잠깐. 빌런의 목적이 파괴와 혼돈이라고요. 그럼, 신사적이라는 그쪽들, 전영중이 바라는 목표는 뭡니까?”
“아, 저희 목적이요. 늦었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저희는 협회 붕괴를 노리고 있는 테러리스트입니다. 협회의 히어로 성준수씨. …모든 비인도적인 연구행위를 규탄하고 모든 히어로 시스템을 초기화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리더는 저지만, 정보책과 참모 역할을 영중이 하고 있어요. …그래서 영중이 지금 기밀문서가 저장되는 용산의 보안을 뚫으려 고생하고 있는 겁니다. 연구소 정말 싫어하는 걸 알아서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빼지 않고 결국 붙잡혀 가더라고요. 그러니 얼른 가서 구해줘야죠. 인지를 흐리는 약물을 맞고 있을 테니 오래 두면 안 돼요. 남자친구시잖아요? 그렇죠?”
그 약물을 방금까지 맞고 온 준수가 얼굴을 쓸었다. 아까 로비에서 들었던, 빌런이 협회 건물을 노리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사실일 리 없다고 생각해서 더 심란했다. 저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바깥은 초유의 사태일 터.
“이런걸, 왜 제게 말해주시는 겁니까?”
“저희 목적은 협희 시스템의 초기화지 히어로의 몰락이 아니라서요. 뭐, 그것도 있지만. 일단, 영중이 애인이시니까. 영중이 관련된 일을 제가 숨겨주기엔 좀, 그렇지 않나?”
준수는 모든 의심의 싹을 접었다. 영중은 다른 남자와 바람피우고 있던 게 아니라, 테러 준비를 하는 거였다. 이게 다행인 일인지 아닌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국민은 멋대로 암시가 없는 상태에서 약물만 맞은 거면 금방 이성이 돌아온다며, 너무 걱정할 필요 없을 거라 조잘거렸다. 영중이 천천히 공을 들인 덕에 성준수에게 걸린 암시도 풀리는 중이지만, 세뇌가 안 통할 정도로 풀리진 않아서 지금은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다며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영중이도 물어봤으면 대답해줬을 겁니다. 별로 숨기고 있지 않거든요. …아마 지금 상태라면 속옷 개수까지 알아낼 수 있을걸요.”
그런 건 묻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정보다. 그야, 애인이자 동거인이니까. 지하 4층. 복도 끝 가장 두꺼운 납으로 된 문을 열자 워치가 붉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하, 이것도 저것도 다 정신 사나웠다. 전부 찢어발기고 심신의 안정을 얻고 싶었다. 그냥, 전영중이나 빨리 만나고 싶었다.
연구동 복도,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이럴 리가 없을텐데. 의심하면서도 닫힌 문이 있다면 강제로 열어젖히며 구마가 짖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가는 길이 길어질수록, 방금 울린 이상 수치 알람이 영중이를 가리키는 걸까 조금 걱정됐다. 지나온 문이 몇 개인지 세기 귀찮을 즘 드디어 구마가 멈춰 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불이 팟- 켜졌다. 준수가 늘 머물던 방과 다른 구조의 방 안에는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옆에 난 큰 유리창 너머로 반듯하게 누워있는 영중이 보였다.
온몸이 구속된 모습에 서둘러 확인한 영중은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절반 넘게 줄어든 약물을 바로 뽑아버리자 바늘이 빠진 구멍으로 피가 조금 맺혔다. 솜을 가져와 지혈하는 사이 국민이 도움이 되는 약을 찾아왔다.
사지가 묶인 영중의 몸은 일으켜지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약을 삼킬 수도, 밖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국민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다 밖으로 다시 나갔다. 밖이 보이지 않던 유리창이 깜박 켜졌다. 연구원들이 쓰는 기계장치를 국민이 몇 번 만지니 금방 영중의 구속이 풀렸다. 처음 온 사람치곤 기계 조작을 능숙하게 해냈다. 준수가 영중의 몸을 일으켜 품에 기대게 했다. 약을 받아 식도를 열어 물과 넘겨주니 꿀꺽 잘 받아먹었다.
아까 약통을 찾아온 것도 그렇고. 설마, 처음 온 게 아닌 건가. 분명 국민이 본인 입으로 처음이란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 길을 모른다고만 했다. 문득 전에도 느꼈던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차에 가득했던 고아들. 1인 1실. 그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지? 해답을 얻을 것만 같았다.
“윽, 아 머리야.”
“야, 괜찮아?”
영중이 몸을 일으켰다. 상념을 끊은 준수가 일단 휘청이는 영중의 몸통을 힘껏 안아 고정했다. 영중은 얌전히 안겨 기대어왔다. 눈을 낮게 뜨고 숨을 고르는 등을 준수가 서투르게 쓰다듬었다. 준수 뒤로 몇 발 이동한 국민이 영중의 안색을 확인했다. 그러곤 입을 뻐끔거렸다. ‘시작됐어.’ 고개 너머로 입 모양을 읽은 영중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둘이 간과한 것은, 유리창 밖의 불이 인기척이 없어 자동으로 꺼져 있었다는 것. 준수가 창문에 반사된 국민의 입 모양을 봤다는 것. 시작됐어? 시작. 빌런. 테러. 협회.
“…영중아 우리 빨리 밖으로 나갈까. 밖에 무슨 일이 좀 생긴 거 같네.”
“미안 준수야. 난 여기서 할 일이 있어.”
“할 일이라는 게 뭔데? 내가 도울 순 없는 거야?”
영중이 방긋 웃었다. 마치 준수가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국민을 잠시 돌아본 영중의 발밑에 어둠이 피어올랐다. 어둠은 국민과 구마를 삼켜 지면 아래로 사라졌다. 복도에 사람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깜박, 지나가는 사람에 바깥 불이 켜졌다. 그들은 연구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준수야, 사실 네가 도와줄 수 있는 게 하나 있어.”
“뭔데? 빨리하고 나가자. 여기 계속 있을 거 아니잖아.”
“나랑 있자. 준수야, 내가 널 사랑해.”
영중이 양팔을 활짝 벌리며 눈을 접어 웃었다. 뭐야, 왜 귀엽게 굴지. 표현이 드문 연인의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도 준수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오히려 피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얘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테러. 연구소 보안. 잡혀 온 참모 전영중.
들어오기 힘든 연구소 내부로 침입하기 위해 전영중이 일부러 붙잡혔다. 영중이 붙잡히기 위한 정보는 아마 어제 잡힌 냉기 능력자가 불었겠지. 들어온 이유는 전영중의 능력을 통해 사람이 이동할 수 있어서. 밖에 있는 저들은, 협회를 테러하기 위한 빌런이다.
기상호가 자작극을 벌이는데 발화 능력을 보인 이유는? 중간에 일이 조금 틀어졌나. 빌런과 테러리스트가 손을 잡았다고 했지. 기상호는 테러리스트 쪽이고 냉기 능력자는 빌런 쪽이라 생긴 소통 오류일지 몰랐다.
대충 상황이 파악됐다. 성준수는 지금 연구소 내부에 빌런을 불러들이는 걸 물심양면 돕고 있었다. 바보같이. 예정에 없던 히어로를 마주친 저들은 지금, 전영중이 대표로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을 붙잡아 두었고. 성공했다.
밖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빌런들이 모두 위로 올라갔다. 테러라고 했으니 아마 폭탄이라도 설치했겠지. 그렇다면 아직 다음 층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판단은 이만하면 됐다.
전영중은 충분히 시간을 벌었고, 성준수는 전부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자만이었다. 성준수는 지금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몸에는 누구누구가 낸 멍이 가득했고, 기절할 때 머리를 부딪혔는지 혈압이 오를 때마다 거즈가 붙어있는 뒤통수가 욱신거렸다.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머리가 아까 투여받은 약물 탓에 더 굴러가지 않았다. 그래, 약물. 지국민이 뭐라 뭐라 하는 건 들었다. 세뇌? 암시? 그건 그렇다 치고. 이걸 왜 네가 맞고 있는지. 준수가 맞고 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영중이 예민하게 굴던 걸 기억했다. 연구소가 싫다면서, 순순히 잡혀들어와 그렇게 싫어하던 약물을 맞은 네 기분은 지금 어떤지. 궁금한 게 많았다. 솔직히 말하면 화도 났다. 저들을 제압하러 밖으로 나서기 전, 할 말을 해야 했다.
“후. …몸은 어때? 괜찮은 거 맞아? 약물 알레르기 같은 거 있진 않고?”
“…없어. 알레르기.”
“그럼 다행이네. 야, 이제 시간도 벌 만큼 번 거 같은데 같이 나가자. …너 연구소 싫어하잖아. 여기 연구소 냄새 엄청 나.”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하마터면 키스를 날릴뻔했다. 아, 약물 효과가 아직 남아있나 보다. 영중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전영중이 처음 내어준 사랑이란 단어가 너무도 달콤하고 강력했다. 자신을 꾀어내기 위한 달콤하기만 한 말에 넘어가는 건 평생에 이번이 처음이었다. 성준수는 평생 자기 고집이 있고,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본능이 강한 남자였지만, 다 부질없었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이 사랑이 지속되길 바랐다. 계속 뒤통수만 때리는 저놈이, 준수는 아직 너무 좋았다. 열심히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렸건만 다 소용없었다. 영중의 눈길 한 번에 준수는 얌전히 침대 걸터앉았다.
준수가 눕기에 버거운 침대는 당연히 전영중한텐 더 작았다. 누구 한 명이 눕기엔 비좁지만, 의외로 장정 두 사람이 앉아있기엔 모자람이 없는. 딱 그 정도 크기의 침대. 말없이 준수 손을 만지작거리던 영중이 침대 위로 다리를 올려 벽에 등을 기댔다. 손이 잡혀있던 준수도 따라 그렇게 했다
침대 밖으로 다시 나가는 다리를 접어 끌어안았다. 둘의 어깨가 맞닿았다. 영중이 머리를 기대왔다. 온기가 따뜻했다. 준수가 뒤로 머리를 기댔다. 마침, 옛날 꿈을 꿨던 참이라. 향기처럼 기억이 몰려왔다. 기억의 향은 준수를 다시 그 옛날, 십여 년 전의 냉동 탑차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건 영중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침묵이 길어지자 심장 박동이 크게 느껴졌다. 여전히 이 박동을 상대에게 들려줄 방법을 찾지 못한 이상, 말을 이어야 했다. 둘은 아직 냉동 탑차 속 아이가 더 자라지 못한 것처럼 불안해했다.
“영중아, 설명해봐. 여태 네가 뭘 했고, 뭘 바라고 있는지. 다 말해봐. 날 설득하고 싶은 거 아냐? 들어줄게.”
“뭐래.”
“너, 전부터 나한테 말 하고 싶어 했잖아. 당시엔 몰랐는데 이젠 알겠어. 미안. 그땐 내가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네 반응도 이해해. 그러니까 지금 말 해봐. 내가 다 들어 줄게.”
“…협회는 연고가 없는 고아를 데려다 실험해. 실험으로 이능력자를 만들어. 실험에 성공한 능력자는 너 같은 히어로가 돼.”
“응.”
“성공 확률은 높지 않아. 강한 이능력이 나올 확률은 거기서 더 낮지. 그래서 많은 실험군이 필요하고. 우리 세대엔 고아가 많았으니까…. 그만큼 실험체도 많았어. 우리가 탔던 차 한 대만 해도 아이가 40명은 넘었는데, 지금 전국의 히어로 명단을 보면 전체 수가 수백을 넘지 않잖아. 게네들이 어떻게 됐는지 짐작이 가?”
“글쎄다…. 너처럼 폭주했나?”
“폭주면 상태가 좋은 거야. 적어도 능력이 정상적으로 발현됐다는 거니까. 물론 약물로 깨운 이능력이기 때문에 그 단계를 넘어도 적응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육신이 능력을 담지 못하고 이상 수치가 높아지면 네가 봤던 것처럼. …나처럼 인적이 드문 곳에 폐기돼.”
“응. 듣고 있어.”
“아니, 넌 아직 듣지 않았어. 초창기 자연 발현으로 활약하던 히어로에 비해, 요즘 2세대라고 불리는 성준수 너희 세대는 확실히 히어로 황금기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수도 많고 뛰어난 능력자도 있어. 그런데 그에 비례해 전국, 특히 연구소가 있는 지역은 이상 수치가 평균보다 높고 그만큼 재해 생성 빈도도 잦아지고 있어. 이상하지? 히어로가 황금기라면 당연히 평화로워야 정상이잖아. 성준수 너는 재해 빈도가 늘어난 이유를 알아? …그건 네가 잡아 온 재해 중 70%가 실험 폐기군이기 때문이야. 우리 또래의 고아들이었다고. 히어로의 입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협회는 이능력 부하로 녹아내린 실험체들을 민가로 내보냈어. 협회로서는 손해가 전혀 없는 방법이었지. 실험에 성공하면 히어로, 실패하면 재해로 내보내 시민을 위협하고, 그걸 다시 자신들이 만들어낸 히어로가 처치하게 하는 것. 대부분의 히어로 인력이 서울에 집중된 이유도, 높은 등급의 재해가 주로 서울에서 발생하는 이유도 같아. 그들은 사람들의 생존 욕구를 발판 삼아 세력을 키워 갔어.”
영중이랑 같이 봤던 교양 프로그램에서 제기한 가설이었다. 그땐 빌런의 등장으로 묻혔는데, 사실이었구나. 준수가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영중이 그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말문이 터진 영중은 그동안 속으로 담아왔던 진실을 쏟아냈다. 아주 예전부터, 함께 이 무거운 주제의 일을 논의하고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성준수는 함께 나눌 수 없는 연인이었고. 지금은 뱉어내는 말 한 마디 마디마다 괴롭고 슬플 뿐이었다. 함께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히어로로 활동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능력을 다룰 수 있는, 성공한 사례의 수가 쌓이기 시작했어. …하지만 협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사회에 복귀시켜주지 않았어. 수가 많다면, 실험을 통해 소모하겠다는 방법을 내세운 거지. 그렇게 3세대들은 히어로의 능력을 강화하는 새로운 실험에 쓰이게 되기 시작했어. 최근 몇 달 들어 복수 능력을 지닌 재해가 나타나지 않았어?”
확실히 그랬다. 당장 생각나는 S급 재해만 쳐도 유전인 고래 화를 빼고도 3가지 능력을 다뤘으니까. 거대화, 부유, 파도.
“네가 나한테 붙인 기상호라는 놈도 폐기 처리된 거냐? 그때 부산에서?”
“맞아. 내가 살리러 내려갔었지. 용케도 눈치챘네. 준수 눈치로는 평생 모를 줄 알았는데.”
“됐고, 계속 말 해봐.”
“상호로 예시를 들면 처음 발현된 능력은 텔레파시. 거기에 능력 강화 실험을 받다가 성공하는 바람에, 두 번째 이능력을 주입받게 되었고 폭주한 케이스지.”
“그 두 번째가 발화?”
“맞아. 그 뒤론 우리가 봤던 대로 항구 창고에 버려져 큰 사고를 칠 예정이었지. 협회가 바라던 등급은 A급 이상이지 않았을까. 그 뒤로 S급을 한 번 거의 성공했다가 실패하면서 진실을 목격하는 히어로가 많아졌어. 세뇌가 풀리기 시작한 거야. …내가 느낄 땐 너도 그쯤부터 의문을 가졌었지. …그때 협회는 실험보다 귀중한 자원을 찾아냈어. 능력의 유전. 자연 능력자의 뛰어난 능력 적합도. 게다가 멀쩡히 돌아다니는 성공작들, 그러나 여전히 사회에 섞이지 못한. …협회는 우리를 사로잡기 위해 빌런을 운운하며 히어로 외 모든 능력자를 공공의 적으로 만든 거야. 사람들이 환장하는 전형적인 히어로 구도를 생성하여 시민의 눈을 돌려 합법적으로 우릴 잡아 가둬 실험하고 싶었나 보지. 그 결과, 과격한 친구들끼리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며 뭉쳐 거사가 앞당겨졌달까. 뭐, 이게 다야.”
아니. 전영중은 해야 할 말을 아직 하지 않았다. 슬슬 대화의 끝이 보였다. 빌런들이 연구동을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그걸 느꼈냐고? 성준수는 줄곧, 연구소에 오면 감각이 예민해지곤 했다. 불 꺼진 복도에 어두운 유리창 너머로 영중의 표정이 보였다. 그걸 본 순간, 준수는 차에서 먼저 내리는 게 이번에도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날 내리기 전 뒤를 돌아봤듯이, 영중의 손등 위로 손을 포갰다.
“영중아 내가 들어야 할 말이 더 있지 않냐?”
“준수야.”
“응.”
“성준수.”
“어, 왜.”
“…나 때린 거 사과해. 그리고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해.”
“아이씨, 때린 건 미안하다니까. 근데 그건 네가 잘 못한 거 아냐? …아니, 미안. 사랑해, 영중아. 나 너랑 안 헤어져. 가야 하는 걸 아는 데 가고 싶지 않아. 너랑 있고 싶어.”
포갠 손등 위로 깍지를 쥐었다. 그대로 손을 가져와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감았던 눈을 뜨자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목덜미까지 붉어진 영중이 보였다. 두 사람의 손이 내려갔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두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금방 떨어진 입술에 아쉬움을 느끼며 준수가 더 다가갔다. 영중이 눈을 꾹 감고 입을 앙다물었다. 이내, 준수를 밀치고 침대 밖으로 튕기듯 나가 일어섰다. 깜빡- 바깥의 불이 켜졌다. 갈무리된 얼굴을 보니 이제야 약효가 가신듯했다. 아쉽네. 입맛을 다시는 준수를 향해 영중이 일갈했다.
“이미 내가 이겼어, 성준수. 이 건물엔 이제 빌런은 나뿐이고. 그걸 막을 히어로는 너 하나뿐이야.”
“내가 왜 지냐? 상대가 전영중인데.”
“네가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머리가 있으면 생각해, 영중아. 상성을 보라고. 어둠인 네가 날 어떻게 이기겠냐.”
영중의 발치에서 농도 짙은 어둠이 퍼져나갔다. 바닥을 지나 벽을 타고 천장을 뒤덮었다.
“글쎄, 해봐야 알겠지. 말로만 떠드는 남자는 매력 없는 거 알지? 준수야.”
“존나 잘 알지. 그래서 내가 너랑 사귀잖아. 영중아.”
영중의 어둠이 깊어졌다. 콘크리트가 부서지고 철골이 뽑히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영중의 영역이 확장됐다. 빛으로 바닥을 갈라보니 연구소 타일이 보였다. 갈라졌던 틈은 금방 어둠에 가려졌지만 얻은 정보가 있었다. 영중의 어둠은 빛에 지워지진 않지만 베인다. 그리고 장소 이동은 없다. 연구소를 무대로 삼을 생각인가. 빛무리를 날려 현재 영역을 확인했다. 이미 같은 층은 전부 확장된 듯 넓었다. 테러라더니, 제대로 준비했네.
준수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사방에 빛을 띄웠다. 준수는 영중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능력을 쓰며 대련해주기엔 준수는 바빴고, 영중은 눈에 띄는 짓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준수가 싸우는 장면은 터치 몇 번만 하면 영상이 수백 수천 개가 떠올랐다. 준수가 생각하기에 영중이 이길 방법은 자신이 분석 당하기 전에 치는 것뿐이었으므로 대비를 단단하게 했다.
건물 붕괴를 견제하기 위해 빛을 횡으로 길게 날렸다. 한참을 날아가던 빛은 이윽고 어둠에 먹혀 사라졌다. 계속 확장되고 있는지, 가로 공간은 연구소 면적을 뛰어넘었다. 아니면, 준수가 알 수 있는 범위보다 훨씬 넓은 크기로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거나. 빛무리로 만든 십자가를 허공에 돌렸다. 빛에 지워지지 않는 어둠은 끈적하게 주위를 감싸 빛이 퍼지는 걸 억제했다.
쿠르릉- 다시 불길한 소리가 났다. 십자가는 이미 건물 3층 높이만큼 커졌건만 여전히 벽은 닿지 않았다. 이젠 발밑을 베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준수가 빛무리를 띄워 밟고 올라섰다. 공간 싸움은 한 수 접혔으니, 능력 주인과 직접 맞부딪힐 차례였다. 십자가를 검처럼 꼬나쥔 준수가 대각선으로 베었다. 영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어둠을 끌어올려 사라졌다. 꾸물거리는 어둠만 베어낸 준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했다.
띄워놓은 빛무리에 일정하던 그림자가 일순 일렁였다. 영중이 위에서 나타났다. 영중이 손을 뻗자 어둠이 손아귀처럼 준수를 덮쳐왔다. 빛이 잘 뻗어지지 않았다. 준수가 그대로 어둠에 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먹히니 눈을 감는 행위를 넘어 모든 감각이 차단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득한 기분을 말로 표현하자면, 어둠은 죽음을 닮았다.
■■■ ■■■ ■■■. “성준수 너답다, 너다워.”
어둠이 모두 걷어진 지상. 건물 잔해 사이에서 흰 실험복의 영중이 모습을 드러냈다. 찐득찐득한 어둠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니 어둠 아래 있던 이목구비가 되돌아왔다. 바람이 불자 흙먼지가 크게 일어났다. 연구소 건물은 물론, 뒤집힌 땅 아래로 연결된 협회 건물 일부까지 일부 붕괴했다.
기세등등하게 앞을 막아서긴 했지만, 준수 상태도 별로 좋지 못했다. 눈을 제외하면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공간을 빠져나왔지만, 피를 많이 흘렸다. 어둠을 뒤집어쓴 사이 매초 온몸에 잔 상처가 났다. 자가 회복 활성화제 효과로 회복되어 큰 상처는 없었지만, 동시에 피부가 다시 갈리는 게 반복돼 피로가 많이 쌓였다. 그 과정에 흘린 피로 입고 있던 파란 실험복은 이미 온 군데가 물들어 바람이 불 때마다 피부에 찰싹 붙어 체온을 빼앗아 갔다.
“이미 전국에 있는 모든 연구소를 습격했어. 만일 그들이 실패해서 멀쩡한 연구소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시간문제일 뿐이란 걸 알잖아? 가장 중요한 건 여기, 서울 용산지부고. 오늘부터 협회 관계자는 세상에 없을 테니까.”
“너흰 못 할 거야. 내가 막을 거니까.”
“하하, 그럼 좀 더 서둘러야지, 준수야. 그렇게 서 있다간 계속 당한다? 지금 막 간부와 연구진들이 타고 있던 비행기를 회항시켰어. 방법? 쉽지. 내내 무시당하고 가둬뒀던 비전투 계열 능력자가 우리한테 있으니까. …준수야 나 잠깐 갔다 올게, 처형 금방이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어둠이 피어오르는 모습에 준수가 빛을 곧장 쏘아 보냈다. 예상 퇴로에 십자가까지 꽂아 넣자 영중이 건물 잔해를 무너트려 공격을 막았다. 먼지가 일어 시야가 가려졌다. 준수가 곧장 잔해 위로 빛을 넓게 쏘며 영중이 이동할만한 어둠을 지워냈다. 먼지가 가라앉고, 영중은 아직 현장에 서 있었다.
“글쎄, 아무래도 땅 위에선 내가 한 수 위인 거 같은데 어쩌냐 영중아.”
영중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갔다. 준수는 비행기든 처형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건 잘 이해했다.
상관없었다. 대낮의 지상은 빛을 다루는 준수에게 더 유리했다.
준수가 거리를 좁혔다. 다리를 자르는 게 아무래도, 능력 특성상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겪지 않을 거 같았다. 그럼, 두 개 다 잘라도 되겠네. 빛을 낮게 횡으로 휘둘렀다. 영중이 어둠에서 거대한 대검을 꺼내 방패처럼 들어서 막았다. 또 횡이야? 준수야, 너무 뻔하잖아. 영중이 어둠을 흩뿌렸다.
지척에서 둘의 능력이 부딪혔다. 어둠이 튀어 준수의 피부가 잘게 녹다 금방 다시 회복됐다. 그러나 준수의 빛에 그을린 영중의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멈칫한 준수를 향해 영중의 어둠이 갈라져 뻗어갔다. 뒤로 물러나며 전부 베어낸 준수가 심호흡했다. 테러 행위를 멈추게 하도록 다리를 자르냐 마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통 인간의 회복력으로는 당장 신체 일부가 잘린다면 쇼크로 죽을 수도 잇단 걸 방금 떠올렸다. 아니, 쟤도 능력자인데 왜 회복력이 민간인에 가깝지? 아차 싶었다.
히어로가 아니라는 건. 연구소 밖의 능력자라는 건. 평범한 신체 조건을 가진 인간이 특별한 무기 하나만을 든 채 싸우게 되었다는 소리다. 저들은 깊게 베이면 죽는 몸뚱아리로 거대한 권력과 맞서 싸우는 선택을 했다. 심지어 절반은 비전투 계열의 능력자인 상태로. 준수는 영중을 이해할 수 없어졌다. 그동안 영중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게 다 자만이었다.
성준수는 전영중을 몰랐다.
“영중아. 너는 왜 이런 테러를 자행한 거냐?”
죽을지도 모르는데.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네가 히어로를 하는 것과 같아.”
너도 똑같잖아. 그렇게 쓰이다 언제 죽임당해도 모를 환경에서.
영중이 철골을 집어 던졌다. 옆으로 피한 자리 위로 콘크리트 덩어리가 날아왔다. 달아나는 영중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좁히려는 준수와 건물 잔해를 던지며 멀어지는 영중. 콘크리트 먼지로 잠시 시야에서 놓친 사이 영중이 협회 건물 옥상으로 이동했다.
피뢰침을 뽑아 던지고 옥상 문을 뜯어 던졌다. 준수는 날아오는 물체를 물 흐르듯 피하며 똑같이 옥상에 올라섰다. 협회 건물에는 아직 대피하는 인원이 있었다. 여기까지 빌런이 오자 다른 히어로가 지원을 위해 접근했다.
놀람도 잠깐, 자신을 에워싼 히어로 무리에도 영중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무리 잔챙이 같아 보여도 히어로는 히어로다. 수적으로 열세면 여유롭기 힘들 텐데. 방어나 기동성 면에선 인정했지만, 솔직히 공격력은 허접한 영중이 아무것도 없는 건물 옥상에서 어떻게 싸우려는지 의문이 생겼다. 뭘 믿고 웃는 거지? 그게 뭐든, 먼저 선수 치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다.
공격이 날아왔다. 전영중의 능력이 아니었다. 물줄기? 물총으로 쏘는 건가? 바람? 선풍기라도 틀었나. 미비한 공격력이었지만 히어로들이 영중을 두고 준수를 공격한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기상호가 위장 취업할 수 있었던, 비행기를 회항시킨. 단 한 명. 이런 걸 가능하게 하는 능력자가 세상에 둘 이나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정신 조종 계열의 능력자. 준수가 물줄기를 피해 공중에서 몸을 돌렸다. 올려다본 지상에는 서둘러 멀어지는 사람들 사이 우뚝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얼굴, 기억해뒀다.”
공항에 있을 줄 알고 방심했다. 준수가 옥상을 향해 빛으로 만든 창을 던졌다. 계속해서 날아오는 창을 피해 히어로가 흩어지고 어느새 협회 건물 위로 내려앉은 어둠 속으로 영중이 사라졌다. 전영중은 협회 건물도 무너트리려 하고 있었다. 두 번은 당해주지 않는다. 준수가 즉시 거대한 빛무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태양처럼 둥글고 밝은, 거대한 빛의 덩어리.
빛이 협회를 감싸고 있는 어둠에 부딪혔다. 영중이 충격에 튀어나왔다. 협회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뜨거운 피가 시야를 가렸다. 몸은 허공에 붕 떠 추락하고 있었고, 팔 하나는 감각이 없었다. 영중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영중이 눈을 떴을 땐 처음 보는 집이었다. 집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 공간에 들어와 푹신한 침대와 포근한 이불을 덮었던 게 몇 년 전이었지.
피부에 닿는 낯선 감촉에 영중이 뻣뻣하게 굳어있을 무렵 문을 열고 준수가 들어왔다.
“전영중 일어났냐. 몸은 씻겨놨으니 옷은 알아서 입어라.”
옷가지를 침대 위로 던진 준수는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영중은 성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황급히 준수가 던지고 간 옷을 주워 입으며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성준수? 저거 성준수 맞지? 내가 왜 알몸으로.’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머리에 안개가 낀 듯 장면이 뿌옇고 목소리는 흐렸다. 그래도 하나 기억나는 건 누군가 양 볼을 붙잡아 어루만져 주었고, 자신은 다정한 손길에 눈물이 날 만큼 안심해서. 자기 어둠이 더는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것뿐.
“설마 그게 성준수인가?”
부끄러웠다. 어릴 적 같이 놀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서 보여준 게, 능력을 제어하지 못해 버려져선 발버둥 치는 꼴이라니. 얼굴까지 화끈거려 손등으로 다급하게 열기를 식혔다.
준수는 무사히 능력을 몸에 적응시킨 듯싶었다. 지금은 히어로가 됐겠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야 속 유일하게 빛나던 하얀 제복은 문외한이 보더라도 알 수 있는 히어로 슈트였다.
너는 네가 말 한대로 멋진 히어로가 되었구나. 한심하지? 나는 능력 하나 제어하지 못해서 버려졌는데.
“야, 영중아. 너 여기서 살아라.”
“내가 왜?”
“왜긴. 갈 데 없잖아.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나 히어로라서 돈 잘 벌어. 너 하나 먹여 살리는 건 돈 쓰는 축에도 안 껴.”
재수 없고 거만한 말. 성준수는 그런 일을 겪고도 처음 만났을 때와 성격이 똑같았다. 분명 영중이 폭주하는 모습을 봤으면서도 개의치 않는 태도가 자신이 알던 성준수 그대로라, 영중은 부끄러워도 참고 받아들였다. 이 선의가, 사회에서 폐기 처리된 영중에겐 너무도 간절한 것이라서, 폐기된 쓰레기여도 선의에 기대 계속 살고 싶어서.
그렇게 준수에게 얹혀사는 모습으로 자유를 얻은 영중은 연구소가 혹시 자신을 찾으러 올까 싶어, 두려움에 방어적으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이상한 점이 많았다.
잠행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능력을 지닌 영중은 직접 연구소 차량에 숨어도 봤다. 그러길 한 달. 영중은 무언가 자기처럼 폐기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연구소 차량이 공간이동으로 사라지고 주변의 이상 수치가 올라갔다. 탐지 기기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이상 수치 특유의 달짝지근한 탄 냄새가 진동했다. 영중은 그날 계획 없이 그 폐기물을 어둠에 감춰 달아났다.
어둠 속에서 활발하게 돌아다니던 재해는 영중의 보살핌을 받자 며칠 뒤 수치가 안정되며 본 모습을 드러냈다. 강아지였다.
자기도 남에게 얹혀사는 주제라 키울 여력이 없던 영중은 강아지를 산에 풀어놓았다. 그러고 이 주일 뒤, 강아지가 영중을 찾아왔다. 품종이 진돗개가 섞인 걸로 보이긴 했지만 하얀 마음 백구가 현대에 재현된 건가? 믿을 수 없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꼬질꼬질한 녀석을 차마 내칠 수 없어 어둠 속에 숨겨 들어와 영양가 있는 밥을 성실하게 먹였다. 성준수가 카드 명세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이 강아지는 능력을 지녔다. 방향감각이 상실되는 어둠 공간 속 영중을 정확히 찾아왔다. 추적? 포인터? 개가 능력을 지녔다니. 충격적이었다.
실험, 능력. 폐기. 실험으로 능력을 주입 받는다. 이건 모든 히어로가 겪는 과정. 도중에 능력을 몸에 담지 못하면 실패작으로 분류되어 폐기된다. 이건 영중이 직접 겪었다. 그리고 폐기된 실험군은 재해가 되어. 토벌된다.
그렇다면, 여태 히어로가 사냥하던 재해들이 전부? 비약이다.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영중은 몸으로 뛰며 정보 값을 모아 대략적인 비율을 구했다.
70%. 민간을 습격한 전체 재해 중 폐기된 실험체가 약 70%를 차지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영중 혼자 얻은 편협한 자료도 아니었다. 연구소를 따라 돌아다니는 사이 영중이 구해낸 사람의 수가 농구팀을 이룰 정도는 되었다. 그들 또한 연구소의 시선 밖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아왔다. 결론은 같았다. 연구소는 악이다. 그 시기쯤이었다. 준수가 영중에게 고백한 건.
준수네 집에서 함께 살게 된 지 1년. 준수가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바깥으로 나돌기만 하는, 말로만 히어로 지망생인 자신이 뭐가 좋다고. 준수는 꽤 진지한 얼굴로 영중을 책임질 수 있는 관계가 되고 싶다고 전해왔다. 뭘 책임진다는 건지, 우리가 책임을 질만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닌데. 영중은 일부러 더 까칠하게 반응했다.
“너도 알겠지만, 난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여유가 있지 못 해. 좋은 연애 상대는 못 될 거야.”
준수는 예상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나는 여유 있을 때 봐줘. 네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울게.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널 도울 수 있는 자격만 줘.”
한심하다 성준수. 이런 남자한테 매달리기나 하고. 영중은 기분 내키는 대로 준수와 첫날을 보냈다. 입술을 앙다물고 자신을 견디는 준수가 생각보다 보기 좋아서. 제멋대로 구는 자신도 좋다며 끌어안는 품이 좋아서. 영중은 이 관계를 지속해왔다.
웃기지, 주마등도 아니고 말이야. 그것도 하필 성준수가 고백하던 순간이 떠올랐다는 게 우스웠다. 한심하다 전영중. 히어로가 되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여기서 뭐 하냐? 아니지.
한심한 건 성준수 너 아냐?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남한테 이용당해. 네가 그러고도 히어로야?
성준수가 지킨다던 힘없는 이들에는 우리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무렵, 연구소의 뒷배를 알아냈다. 대한재해대응히어로협회. 연구소가 대외적으로 히어로 육성소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때부터 두 기관의 유착 관계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의심이 확신이 선 순간. 테러리스트가 모여 뜻을 다졌다.
“히어로에게 죽었어야 할 폐기물들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들이 협회를 뒤엎는다. 흥미 있지 않아? 전형적인 히어로물의 클리셰잖아.”
영중은 부드럽게 웃었다. 올림픽공원에서 빌런과 처음 접선한 날. 그들이 물었다.
“너희는 이 체제의 붕괴를 바라는 건가?”
“맞아. 히어로 육성 연구소. 그 뒤에 있는 협회까지.”
식물을 다루던 남자와 눈을 맞췄다. 이름이 최종수라고 했다. 남산의 땅을 가르던 남자, 임승대가 입을 열었다.
“뭐든 상관없어. 우리는 복수와 영광을 원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 내어줄 수 있었다. 국민과 영중이 연달아 설명했다.
“단순한 파괴만으로는 체제가 무너지지 않아.”
“다시 발생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존재로서 억제제가 된다. 그리고 그 대항마는, 성준수가 맡게 될 거야.”
늪을 부르던 이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대단한 사랑이네.”
“아니, 이건 오만일 뿐이야.”
이런 행위를 사랑으로 포장하기엔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영중에게는 오만한 목표가 있었다. 저 빌어먹을 협회를 부수고 모든 ‘히어로가 되지 못한 이’들을 해방하는 것. 목표 안엔 성준수도 들어가 있었다. 그야, 성준수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지금 영중에게 있는 건 히어로 해방과 성준수의 사랑밖에 없었다. 목숨에도 별 미련이 없었다. 다른 목표도 미래도 필요 없었다.
모든 히어로에게 영광을, 이건 한 테러리스트의 작은 소망일 뿐이다.
애인을 잘 둔 덕에, 땅에 부딪혀 즉사하는 일은 면했다. 공중에서 둘은 블루스를 추듯 얽혀 땅에 내려왔다. 무너지는 협회가 들려주던 폭발적인 음악이 그치고 두 사람은 지면 위에 멈춰 섰다. 헬기 안 카메라 렌즈가 빛을 반사했다. 관중은 충분히 모였다. 자, 이제 막이 내릴 시간이다.
영중이 천천히 십자가를 들고 있는 준수의 팔을 들어 올렸다. 영중이 다칠까 걱정된 준수가 손에 힘을 풀었다. 빛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면 안 되지. 어둠은 둘의 그림자에 숨어 자연스럽게 빛을 옮겼다. 영중이 몸에 힘을 풀었다. 뒤로 기울어지는 몸.
준수가 황급히 붙잡아보았지만 보이는 건 영중의 가슴을 꿰뚫고 나온 자신의 빛이었다.
“어. 야, 야. 영중아.”
빛을 빼내야 할지, 그대로 두어 상처 부위를 지져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가까웠다. 두려웠다. 영중이 희미하게 웃으며 붙잡은 손을 빛 위로 옮겼다.
“준수야, 제대로 찔러야지. 너는 히어로잖아.”
“닥쳐. 전영중. 힘주지 마.”
영중의 몸통이 점차 기울었다. 이에 따라 빛이 그의 몸을 갈랐다. 안 돼. 시발. 준수가 황급히 그의 몸에 꽂힌 빛을 없앴다. 피가 울컥 솟았다. 준수가 손으로 눌러 피를 막았다. 빛으로 상처 부위를 지져 피를 멈추고자 했다.
“웃어, 준수야. 주위를 둘러봐 모두 너를 보고 있어.”
입에서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영중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온통 붉은 입가에선 소리가 나질 않았다. 대신 마지막 힘을 짜내 입을 뻐끔거렸다. 오직, 그의 연인만 볼 수 있는 형태로 전한 인사.
‘축하한다, 히어로’
품 안으로 무너지는 영중을 받으며 준수도 땅에 주저앉았다. 영중의 몸이 너무 뜨거웠다. 준수는 이런 온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영중아 나 무서워. 그러니까 말 좀 해봐. 입 끝에 걸린 망설임은 소리로 나오지 못했다.
만약 영중이 대답해주지 않는다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었다. 손에 묻은 영중의 피가 아직 이렇게 뜨거운데, 지금이라도 응급처치하면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준수가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가 준수를 강제로 일으켰다. 아까, 옥상에서 봐뒀던 사람. 영중의 사람이었다. 그는 준수의 한 팔을 들고 소리쳤다.
“히어로 성준수가 빌런을 무찔렀습니다! 만세!”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안전선 밖의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새끼는 뭔데! 팔을 뿌리치고 나니 주위에 영중이 없었다. 수상한 무리가 영중의 사지를 들고 옮기고 있었다. 당장 따라가려는 준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기상호였다.
“꺼져. 죽여버린다.”
“햄, 웃으셔요. 협회와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던 빌런 무리의 수장을 무찌르셨잖아요. 이제 다신 적수도, 위협도 없을 긴데. 기뻐하셔야죠. 영중햄이 바라던 대로 유일무이한 진정한 히어로가 되셨어요. 주위를 둘러봐요. 모두가 히어로의 탄생을 기뻐하고 있어요.”
분명 밖에 있던 시민들이 몰려왔다. 누군가 고의로 안전선을 치웠다. 다가온 시민이 준수의 손을 멋대로 잡아 흔들었다. 손에 묻은 피가 신경 쓰여 빼내려 해도 감사하다며 손등을 다정하게 쓸어주셨다. 영중의 피가 점차 지워져 갔지만,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그들 모두 기뻐하는 동시에 울고 있었다. 일상의 평화를 위협하던 빌런 무리를 보기 좋게 퇴치한 히어로. 뼛속까지 히어로인 성준수는 약자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한쪽 눈이 없어도. 협회가 사라졌어도. 어느 순간에도 준수는 히어로였다. 깨달음을 얻은 히어로 성준수는 그렇게 전영중을 잃어버렸다.
7장 : 결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준수는 히어로였다.
전영중이 그러길 바랐기 때문에.
그럼에도, 이 모든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여전히 성준수는 전영중을---.
협회가 사라진 히어로 사회는 예상보다 큰 혼란을 겪지 않았다. 협회의 권력을 탐내는 자들이 나타날 때마다 빌런 무리가 나타났고, 성준수가 처리했다. 야금야금 수가 줄어든 빌런 측은 표면상 완전히 토벌되었고, 정치계는 성준수에게 목숨이 달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빌런과 성준수가 협력관계라는 증거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아 결국 긴 공석 끝에 대한재해대응히어로협회의 새로운 협회장 자리는 성준수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그런 준수의 곁엔 기상호가 남아있었다. 쥐새끼들처럼 여기저기 숨어든 빌런 사이 기상호는 그렇지 못했다. 성준수의 앞을 가로막았다는 죄로 현장에서 붙잡혀 협회 대부분의 서류 작업을 담당하는 비서로 채용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꾸 성준수 좋은 일을 해주듯 나타나서 지랄하다 숨어드는 빌런의 뒷배에는 이 텔레파시 새끼가 있는 것 같았지만, 역시 머리통을 갈라보지 않는 한 증거가 없는 일이었다.
연구소가 없어지니, 재해 발생률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절이 꿈만 같이, 단 몇 달 만에 적당한 빈도로 출동하게 되었다.
연구소가 사라지자 역설적으로 연구소의 존재 의의가 사라졌다. 부작용도 알려지지 않은 자가 회복 활성화제는 폐기 됐다. 왜 히어로의 수명이 특출나게 짧은지, 히어로의 죽음이 왜 폭주를 의미하게 됐는지 이젠 알아야 했다. 재해 발생률이 떨어져 이젠 회복 활정화제를 맞아야 할 정도의 강행군도 없었다. 그러나 반발이 없던 건 아니다.
물론 머지않은 미래에 S급 재해가 100% 자연 발생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뭐, S급 정도 되는 수치 이상에 사람의 악의가 없을 수 있느냐는 가정을 빼고 생각해보자면. 그런 위기 발생에는 히어로에게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활성화제만큼은 필요하지 않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준수는 그 질문 이후 모든 히어로를 해고했다.
물론 퇴직금은 두둑하게 지급했다. 출범식 이후 비정상적인 수입원을 차단하고 이전 간부들이 협회 이름으로(당연히 아니다) 축적해둔 재산이 있었기에 자금이 충분했다. 준수는 기자회견 이후 정식적으로 재단을 만들었다. 이제 히어로는 월급이 아닌 공훈 연금과 상여금을 받는다.
월급에서 나오는 의무감이 아닌, 선함과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히어로의 자질을 보인다면 공훈 대상이 되었다. 물론 능력을 쓰는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식물을 잘 다루는 리더로 대인 제압팀 정도는 꾸려 놓았다.
좋게 말해 프리랜서가 된 히어로들은 자체적으로 팀을 꾸려 성과를 얻고 인센을 타가는 형태로 발전했다. 현장에서 존재감이 희미했던 보조 능력과 회복 계열 능력도 이젠, 안전을 위해 필수로 데려가야 하는 팀원으로 추앙받았다.
협회에 묶여 살던 히어로들의 삶에도 자유가 생겼다. 물을 다루던 히어로 박병찬은 서울을 벗어나 인천과 양양을 오고 가며 수상레저를 즐겼다. 원래도 스타 히어로였던 그는 개인 방송을 시작하며 더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특수장비가 따로 필요 없는 앵글과 영상미가 많은 호평을 얻었다. 천성에 따라 인명구조도 멈추지 않았다. 내륙에 갇혀있던 물의 능력이 바다로 나가자 모자람 없이 훨훨 날아다녔다.
박병찬같이 자기 삶을 개척한 히어로도 많았지만, 맨정신으로 자기 삶을 꾸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사랑을 만나고 결혼하는 히어로가 매우 많아졌다. 협회장으로서 모든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사실 히어로 일보다 협회장 쪽이 훨씬 더 바빴다.
영중이 말하던, 자경단이나 전투 용병의 역할이 아닌. 정말 미디어에서나 보던 자주적인 히어로의 역할을 돌려받았다. 히어로라는 말에 담긴 동경을 되찾은 것이다. 히어로들의 히어로. 협회장 성준수는 역사에도 히어로를 대표하는 히어로로 기록될 것이 자명했다.
집에 돌아온 준수는 영중의 서재에 들어갔다. 영중이 자주 앉아있던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잠시 먼지가 일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탁자 위에는 투명한 백열전구 속 필라멘트가 선명히 드러난 조명 하나가 올라와 있다.
물끄러미 보다 무심코 손을 뻗어 전구를 켜니 뻑뻑한 스위치는 딸칵- 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켜진 전구는 눈이 아릴 정도로 순간 밝은 빛을 내다 금방 사그라들었다.
깜빡, 깜빡. 픽- 켜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구는 깜박이다 픽하니 꺼져버렸다. 다시 스위치를 잡아당겨도 딸칵 소리만 반복될 뿐 불은 켜지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준수가 빛무리를 만들어 전구 안을 비춰보니 원인이 바로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얇게 이어져 있던 필라멘트가 톡 끊어져 있었다. 투명한 전구 너머로 일그러진 전등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시야에 따라 모양이 일렁였다. 고개를 들자 거짓말처럼, 곧게 뻗은 전등 그림자는 멈춰있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댄 준수가 충동적으로 빛무리를 없애버렸다. 방 안에 희미한 어둠이 드리웠다.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는 스위치를 눌러도 밝아지지 않는다. 이걸, 성준수는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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