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샘플

축축하고 우울한 글

(2838자)

A와 부쩍 가까워진 B은 전에 비해서 안색이 좋아졌다. 미소를 짓는 날이 늘어났다. 초콜릿처럼 달짝지근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단 맛이 있으면 쓴 맛도 있는 법이었다. B은 우울의 바다를 피할 수 없었다. 문득 문득 그녀를 엄습하는 슬픔과 자괴감에 잠기곤 했다.

신문에 새겨진 연도의 마지막 숫자가 바뀌는 걸 보면서 손톱을 물어 뜯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 돌아가고 나서 적응할 수 있을까?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가 여기 와서 배운 거라곤 범죄 뿐인데, 꾸역꾸역 가지고 있던 지식마저 머릿속에서 빠져 나가는데…

B은 A가 어느 날부터인가 술을 사오지 않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알코올로 슬픔을 잊으려고 했던 자기파괴적인 행동이 들통났음을 알아챘다. 귀가 홧홧해졌다. 정신 차려야지, 정신 차려야 해… A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겠노라고 다짐했지만, 고통이 밀물이 되어 찾아올 때면 휩쓸리고 말았다. 발버둥 치더라도 벗어날 수 없었다. 목끝까지 물이 차오를 때마다 A가 그녀를 뭍으로 끄집어냈다. 검붉게 타오르는 숯이 요동치는 새카만 물결을 갈랐다. 물 속에서도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러기를 수십 번, B은 점점 지쳐 갔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기에 발바닥이 늘 너덜거렸다. 해수의 비린내가 났다. 모래 알갱이와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흘렀다. 상처는 아물다가 덧나길 반복했다.

금전적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가사 노동에 질려 갔고, 끊임없이 거처를 옮기면서 그마저도 거의 안 하게 되자 무기력해졌다. 평범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소원대로 되지 않았다. 숨어사는 입장에선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A가 벌어오는 돈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경제적인 주도권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사람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B은 스스로가 ‘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시달렸다. 한 사람 몫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세계를 지옥으로 바꿨다.

B을 수렁에 빠트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인간관계였다. 뒷세계의 일원이 된 탓에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게 어려워졌다. 한때 그리드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 친해질 수 없었다. 그들은 A와 다를 바 없는 악인이었다. 어둠과 어언 3년을 함께 지냈지만, 그의 잔혹하고 무신경한 기질엔 도통 익숙해질 수 없었다.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과 어울리기엔 죄책감이 들었다. 위험에 빠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었다. 흘러 넘치는 감정을 꾹 삼키며 걸음을 돌렸다. 손을 씻은 뒤로는 종종 사람을 돕고 다녔지만, 결국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날 뿐이었다. 정체를 숨겨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녀의 곁에 있는 건 A 뿐이었다. 고립감과 외로움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한테 둘러 싸여 있던 그녀는 이런 상황이 낯설고 두려웠다. 고독감을 덜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상사한테 의지했다.

A는 B의 의존을 싫어하지 않았다. 표정을 살피며 품을 내어주거나 디저트를 입에 물려 주었다. 왜 그렇게 어두운 낯을 하고 있냐며 물어보는 일도 더러 있었다. B은 언제나 거짓말과 억지 미소로 답을 얼버무렸다. 추궁하는 듯한 붉은 시선을 못본체했다.

A한테 말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고민들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에 쌓인 것을 전부 털어놓기엔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B은 A를 아꼈지만 그를 믿진 않았다. 그의 도움을 기대하는 한편 기대를 접어두었다. 언제나 실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A는 B의 그런 점이 짜증났다. B가 입을 꾹 다물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릴 때마다 목 안으로 모래 알갱이가 들어찼다. 해소될 일이 없는 갈증이 심해져만 갔다. 표출되지 않고 상념으로 이어졌다. B을 완전히 소유하는 건 불가능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속을 갈라서 구성성분을 확인해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 녀석은 취하면 솔직해지니까, 술이라도 진탕 먹이면 전부 밝힐지도 모르지. 편법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실행할 순 없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 부하한테 그런 짓을 하긴 싫었다. 결정적으론 술에서 깬 B이 그를 싫어할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경멸과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연갈색 시선은 갖고 싶지 않았다. 그것 만큼은 소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A는 익숙하지 않은 기다림을 선택했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서 그녀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풀어질 순간을 호시탐탐 노렸다. 사냥감이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숨을 참고 잠복하는 사냥꾼처럼.

ㅁㅁ은 본디 느긋한 포획을 즐길 수 없는 성정이었다. 시시각각 B의 심장을 탐했다. 빠르게 뛰는 맥박음을 들으며 적절한 시기를 노렸다. 사냥감이 가진 우울과 불신이 뚜렷한 형태를 가질 때마다 혀를 찼다. 주로 그녀를 끌어안거나 배를 만지작거릴 때 그랬다. 옷 너머로 선연하게 닿는 딱딱함이 싫었다. 열심히 먹여도 늘어나긴 커녕 줄어들기만 하는 몸이 거슬렸다. 처음 만났던 날 입고 온 옷이 넉넉해진 것을 봤을 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B을 향한 갈망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A의 속이 시끄러워졌다. 심장 안을 도는 피가 혼탁해져갔다.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ㅁㅁㅁㅁㅁ는 웃지 않았다. 얼굴을 찡그리며 침전해가는 보물을 건져냈다. 언제 쯤이면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지? 뇌리에 아로새겨진 생각을 하며 뭍 위로 올라 왔다. 그를 구명줄 삼아서 붙잡는 B을 안고 놓지 않았다.

아스러지는 희미한 빛을 붙잡았다.

그가 가진 불꽃을 붙여주면 되살아나리라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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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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