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Over the BEYOND

“개회(開會)합니다.”

또렷한 선언과 함께 불꽃이 튀며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 드러났다. 둥글고 넓은 회장 안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히 앉은 사람들은, 생김새도 나이도 인종도 모두 제각각으로 이렇다 할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니라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침묵에 집어 삼켜질 듯 무겁고 숙연한 분위기.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방금 전 개회를 알렸던 목소리가 물꼬를 틀었다.

“비욘드의 글로리아 오벨에게서 온 전언입니다. 로엔그린 하인스가 비욘드에서 혈귀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해서, 협회 측에서 추가 인력을 보내 달라고 하는군요.”

그러자 그의 옆자리에서 그의 말을 경청하던─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사람이 냉큼 대꾸했다.

“시급한 일이니 비욘드 근처에 있는 사람이 좋겠습니다. 비욘드에 지금 우리 협회원이 얼마나 있지요?”

“발레리안과 메이벨 조사원이 있습니다만, 그들은 이미 글로리아와 동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스 오벨이 요청한 것은 그들 이외의 추가 인력입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미스터 쇼어와 미스터 릴케도 이미 미스 오벨과 합류했습니다.”

“치엘로의 막내딸은요? 최근 비욘드로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만….”

“연락이 닿질 않습니다. 워낙 신출귀몰한 사람이 아닙니까. 치엘로에 물어봤습니다만 가족들과도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그 치엘로인데, 한 번쯤은 연락을 시도해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가 비욘드 안에 있다면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가 그녀에게 직접 일을 맡기긴 어려울 겁니다. 정보 전달이 제대로 되지도 않을 거고요.”

“에르빅은 어떻습니까?”

“에르빅의 딸들은 올해 안식년입니다. 마이어 경, 당신도 팔라딘이니 잘 아시겠지요.”

“아니, 그 집에 아들도 하나 있지 않소이까?”

“…진심이신가요? 그는 올해 열여덟입니다.”

“아니, 덩치가 그렇게 큰데 아직 열여덟밖에 안 됐다고?”

“요즘 애들이 워낙 금방 크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보다 크던데!”

“그렇게 따지면, 미스터 브라운, 당신은 저보다도 작지 않습니까.”

“그게 뭐 어때서?!”

“덩치로 나이를 따진다면 제가 당신보다 연상이란 뜻입니다.”

“뭐요?! 해보자는 거야 뭐야?!”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열을 내십니까?”

“이 여자가 진짜!”

“…그만. 미스터 브라운, 미세스 링컨, 사적인 싸움은 나가서 하십시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호엔하임의 쌍둥이는요? 그들은….”

“호엔하임의 장남은 지금 런던에 있습니다. 1년 전부터 다른 연구에 매진 중이고요.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아직 진행 중인 거겠죠. 연구가 끝나기 전까진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 동생도 있지 않소? 칼립소 호엔하임이던가?”

“그녀는 지금 아프리카에 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엔 왜 또?”

“무슨… 쥐꼬리별똥 어쩌고 하는 꽃이 거기서 발견 됐다나… 아무튼 당장 연락한다고 해도 시일이 꽤 걸릴 겁니다. 마녀들이 다 그렇지요.”

그리고 한숨.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러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어깨를 떨어뜨리며 커다란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 후, 또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슐레이의 아들은 어떻습니까?”

“슐레이요?”

“슐레이에 누가 있습니까?”

“설마… 에테오 슐레이?”

수군수군대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에테오 슐레이. 그 이름 자 하나만으로, 좌중이 들썩이며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 몇몇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고작해야 사람의 이름일 뿐인데. 그는 지금 여기서 사람들이 제 이름을 논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을 텐데. 이토록 당황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하지만 잠시 후, 그 ‘이유’가 몸소 ‘등장했다’. 얼굴을 시뻘겋게 달군 중년 남성 하나가 콧수염을 바르르 떨고 책상을 쿵 내리치며 고함을 쳤다.

“에테오 슐레이?! 그 미친 놈 말이오? 그 놈 얘긴 꺼내지도 마시오!”

“…음, 예. 죄송합니다, 미스터 하우어. 오신 줄 몰랐습니다.”

“그 미친 놈이 응급실에 실려 보낸 우리 아들이 아직도 혼수상태요! 그런 놈을 뭘 믿고 일을 맡긴단 말요?! 제 형제도 못 알아보는 놈을!”

“음… 제가 이야기한 건 슐레이의 첫째가 아니라, 넷째 아들이었습니다만.”

“에우리페 슐레이? 그 놈도 마찬가지지!”

“…그는 그래도 꽤 얌전한 편 아닙니까? 몸이 좀 약하기야 하지만….”

“제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하잖소? 그에게 일을 맡기려면 어차피 에테오 슐레이를 통해야 할 텐데, 그 놈이 제 동생을 순순히 내어주겠소?”

“그래도 한 번 얘기만 꺼내 보는 것은….”

“일 없소!”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분노는 무시무시했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던 상대는, 본전도 뽑지 못한 채 어깨를 수그리고 항복했다. 가까스로 생각해낸 대안이 별 소득 없이 무산되고 나자 회장에는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누군가 정말 획기적인 생각을 떠올리지 않는 이상 이번의 침묵은 조금 길 것 같았다.

그 때.

덜컹.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빈 자리를 찾은 사내가 자리에 앉기 전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당신이 늦다니 별난 일이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별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얘기들을 하고 계셨습니까? 분위기가 좋지 않군요.”

“비욘드에서 혈귀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추가 인력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 그 일 말입니까? 그거라면 됐습니다. 오를란도에서 사람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침울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화색을 띄며 가슴을 펴고 앉았다. 수십 쌍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갑작스런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 멋쩍게 웃은 사내가 이야기했다.

“방금 그 얘기를 듣고 들어오는 길입니다. 오를란도의 막내 아들이 오늘 정령사 교육을 마쳤다는군요. 다들 아시다시피… 정령사는 ‘바깥’에서 지내기는 좀 그렇잖습니까.”

“예에, 그렇지요.”

“그래서 아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비욘드에 보내겠다고 합니다. 제가 그 얘길 듣고 비욘드에 혈귀가 나타났다는 얘길 하니 힘을 좀 보태주겠다고 했습니다.”

“아!”

“다행입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에요. 이걸로 좀 안심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갓 정령사가 된 사람이라면…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괜찮을 겁니다. 본인이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닐 텐데요. 뭐 그리고… 다들 그렇게 위기를 겪으면서 배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요, 그렇지요. 그렇고 말고요.”

…대체 뭐가 그렇다는 건지.

방금 전까지 그토록 어둡던 사람들은, 이제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띈 채 덕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이제 한시름 놓겠군, 잘 됐어요, 안심입니다… 같은 말이 대부분이었다. 무엇을, 무엇 때문에, 대체 어떤 확신으로 안심하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수런대던 분위기가 조금 잠잠해지고 나자, 처음에 개회를 알렸던 사람─아마도 이 자리의 우두머리인 듯한─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높이 든 손을 두어 번 흔들어 모두의 이목을 한 데 집중시킨 그가 말했다.

“그러면, 이번의 회의는 이 정도로 할까요?”

“예, 그렇게 하지요.”

“그렇게 합시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훅, 숨소리가 들리며 촛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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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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