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자들의 황야

자캐 크로스오버 AU 연성

0. 태양이 지지 않는 도시

존경하는 형님과 그리운 형수님께.

건강히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이제 곧 라스페로사에 도착해요. 우나이솔라에서 열차를 탄지 열흘만에요. 아직 도착하려면 반나절 정도는 남았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서 견딜 수가 없어요!

열차 창을 통해 내다보는 서부의 풍경은 정말 근사하답니다. 들쑥날쑥한 지평선이 끝없이 이어지고 드넓은 토지 위로는 거대한 들소 떼가 달리지요. 때로 모래 폭풍이 불기도 하는데, 이렇게 강한 바람을 뚫고 열차가 달릴 수 있다는 게 무척 신기하게 느껴져요.

샌더슨의 『황야횡단기』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이 땅은 특히 매력적이에요. 저처럼 모험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더더욱이요. 보이는 곳의 대부분이 미개척지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손발, 때가 묻지 않은 대자연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모래 아래 묻힌 유적과 유산은 얼마나 환상적일까요?

이렇게 멋진 곳에서 꿈을 이룰 생각에 매일 밤 잠을 설치고 있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바람의 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때까지 부디 건강하세요. 도마와 켈리, 안느에게도 안부 전해주시고요!

언젠가 반드시 웃는 얼굴로 돌아갈,

엘리야 올림.


석양의 도시 라스페로사(Lasperossa).

석양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태양이 지지 않는 도시로 불리는 기회의 땅. 모래 바람이 몰아치는 서부 황야 가운데 위치한 라스페로사는 서부 개척의 시작점이자 온갖 모험, 기담, 유적의 활로였다. 일찍이 탐험가 카를로 니콜라우스가 라스페로사에 첫 발도장을 찍은 이후 미지를 갈망하는 청년들과 황혼을 쫓는 사냥꾼들이 앞다투어 라스페로사로 몰려들었고, 중부 도미우스에서 시작된 횡단 열차의 한 갈래가 라스페로사로 이어진 이후에는 전 대륙의 유산과 전설이 모이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쏟아지는 태양빛 아래 황금색 대지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낭만적인 모험이 시작된다. 혈기 넘치는 소년들이 꿈꿔왔던 땅, 대홍수 전 고대의 유적과 용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어글리 스완>은 그렇게 전설을 좇아 찾아온 사냥꾼들에게 목을 축일 흑맥주와 몸을 데울 스튜를 내어주는 곳이었다. 값싸고 시원한 맥주는 물론 대륙 전체에 세 병밖에 없다는 명주 ‘샐러맨더’까지 보유한 맛집 중의 맛집. 5층짜리 목조 건물의 식당과 여관은 언제고 목청 큰 사냥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기 마련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술잔 부딪히는 소리와 얼큰하게 취해 떠드는 소리와 쩔렁이는 동전 소리로 시끌벅적한 ‘백조의 집’. 변함없는 하루를 이어가고 있던 그곳에 새 바람이 불어온 건 오후 세 시가 조금 지난 시각, 점심 식사를 즐긴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늦은 점심, 술, 잡담, 정보를 즐기는 사람들만 남았을 때였다.

“아,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동그란 얼굴에 통통한 볼살이 인상적인 청년. 순해 보이는 연두색 눈동자를 연신 굴리며 가게 안을 살피던 그는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조심조심 바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결이 좋은 코트를 입고 싸구려 나무 스툴 위에 엉거주춤하게 앉은 모습이 여간 귀한 집 아들이 아닌 듯했다.

옷차림으로 보나 생김새로 보나 이런 데 드나들 사람은 아닌 듯한데. 아를로스는 범상치 않은─어디까지나 ‘라스페로사’의 기준으로─손님을 곁눈질하며 바닥의 노란 먼지를 꼼꼼히 쓸어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쓰이는 거고, 할 일은 제대로 해야 했으니까.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아, 저어….”

이윽고 손님과 눈이 마주친 아를로스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눈앞의 순박한 귀족 청년이, 겉으로는 무구해 보일지라도, 황야를 걷는 라스페로사의 여느 사냥꾼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의 눈동자는 무수한 기대감과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라스페로사의 위명을 좇아 달려온 젊은 사냥꾼들이 으레 그러한 것처럼.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조금, 아를로스가 방금 털어낸 먼지보다도 적었다.

그러나 이 거친 도시에서 살아남는 것은 그가 얼마나 큰 꿈을 가졌는가와 하등 상관이 없다. 누구든 꿈을 좇아 라스페로사에 오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꿈보다 황금, 순수보다 비정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빠른 눈치와 합리적인 저울질은 생존의 첫 번째 필수 요소고. 하지만 지금 막 이 도시에 발을 들인 것으로 보이는 눈 앞의 청년에게선 라스페로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거나, 손님은 손님이지. 짧은 평가를 마친 아를로스는 금세 자신의 본업에 착수했다.

“식사부터 주문하시겠어요?”

“아, 네… 네! 식사! 저….”

얼굴만큼이나 뽀얗고 보드라운 손이 왼쪽 주머니와 오른쪽 주머니, 외투 주머니와 바지 주머니를 부산스레 뒤졌다. …하지만 그가 찾는 물건은, 좀체 나오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지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솜사탕처럼 하얗던 얼굴이 점점 파랗게 파랗게 질려갔다.

“지, 지갑….”

역시나. 쯧…. 이마를 찌푸린 아를로스가 조용히 혀를 찼다.

메마른 땅의 사람들은 의리와 인정이 넘치지만 그만큼 손 빠른 좀도둑도 많다. 소매치기, 납치범, 강도. 개중 가장 흔한 것은 역시 소매치기다. 그들의 손은 눈보다 빠르고 달리기는 바람만큼 잽싸다.

라스페로사에서 나고 자란 아를로스는 도련님의 지갑이 사라졌을만한 시기를 백 개도 더 넘게 꼽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역에서 내렸을 때. 혹은 광장에서 헤매었을 때. 또는 유물이 넘쳐나는 시장에서 넋을 잃었을 때.

 

사정은 안타깝지만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면 가게는 아무것도 내어줄 수 없다. 사장이 있었다면 저 가여운 청년을 위해 스튜 한 그릇 쯤 가볍게 베풀어 주었겠지만, 그것은 사장이라 가능한 일이었고 아를로스의 권한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축객령을 내려야 하나, 아니면 잠깐 두고 보아야 하나. 고민하던 그 때.

“이봐요, 도련님.”

“네, 네…? 네?”

“이거 찾아요?”

희고 늘씬한 손이 나타나 약간 헤졌지만 윤기가 흐르는 가죽 지갑을 건넸다. 두툼한 지갑을 건네 받은 엘리야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가, 감사… 감사합니다.”

“정신 놓지 말아요. 여긴 눈 뜨고도 목 베이는 곳이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거푸 허리를 숙이며 거듭 감사하는 청년에게 찡긋 윙크하는 그녀는 아를로스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글리 스완>의 단골을 꼽아보라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인 아를로스가 마찬가지로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일찍 오셨네요.”

“뭐, 어쩌다 보니?”

“웬 일로 선행을 다 하시고.”

“서비스야, 서비스.”

‘귀엽게 생겼잖아.’ 청록색 눈이 유쾌하게 찡긋거렸다. 청년의 얼굴을 흘끗 훑어본 아를로스는 조용히 수긍했다. 흠 없이 말간 얼굴에 이목구비도 또렷한 것이 메이벨이 마음에 들어할 생김새이긴 했다.

“아, 맞다. 나 심부름 있어.”

“오늘 저밖에 없는데.”

“물건만 꺼내주면 된댔는데. 발레리안이 사장님이랑 얘기해뒀다고 했어.”

“아… 무슨 물건인데요?”

“맥거핀에서 온 신형 엔진. 이건 주문서.”

또렷하고 간결한 필기체는 분명 발레리안 오펜의 것이 맞았다. 멋들어진 필체 옆에 삐죽빼죽하게 한 박자씩 어긋난 사인은 <어글리 스완> 사장 로엔하임의 것이었고. 고개를 끄덕인 아를로스가 물건을 찾기 위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 입술을 앙 다문 청년이 메이벨을 향해 한 발짝 크게 다가왔다.

“저, 저어…!”

“응?”

“저기, 어, 숙녀 분께선… 혹시 사, 사냥꾼이신가요?”

“….”

숙녀?

숙녀라고 했니, 지금?

붉은 입술을 오므렸다가, 일자로 쫙 폈다가, 다시 오므린 메이벨이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커다란 상자를 들고 걸어 나오는 아를로스에게 소리쳐 물었다.

“자기, 이 도련님이 아까 나한테 한 말 들었어?”

“무슨 말이요.”

“나보고 숙녀 분이라는데?”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채 감추지 못한 웃음기가 묻어 나왔다. 한 번만 더 찌르면 터지시겠군.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하든 쪽박 아님 뒤웅박이다. 아를로스는 상자를 메이벨 앞에 내려놓은 후 말없이 뒤를 돌았다. 온갖 진상의 진상에 단련된 그가 단골 손님의 집요한 눈길을 피해 애꿎은 술병을 다시 진열하는 동안, 용기를 낸 청년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저, 저기….”

“네에, 도련니임~?”

대답하는 목소리가 아주 간드러졌다. 그녀의 의형제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치를 떨며 삼백 리 밖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아를로스는 절로 굳어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대신 떨어진 물건을 줍는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저는, 어, 엘리야… 엘리야 오를란도라구 하는데요….”

“그렇구나아, 엘리야 도련님이구나아~”

진심으로 재밌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양손으로 턱을 괸 메이벨이 엘리야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고 눈을 빛냈다. 상대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분명했지만, 아를로스가 보기에 그것은 길가의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녀의 태도를 긍정적 표현으로 이해했는지, 조금 더 크고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저, 저는, 어, 역사도 연구하고… 고대 유적도 연구하고 있거든요.”

“으으으음~”

“그런데, 저어, 역시 혼자서 연구를 하는 건 너무 어려워서….”

“으으으으음~?”

“여기에 오면 사냥꾼 분들도 많고, 어, 의뢰를… 의뢰를 할 수도 있다고 해서요….”

“어떤 의뢰를요~?”

“저, 저는… 저어, 저는 바람의 별, 바람의 별을 찾고 있어요!”

주먹까지 꽉 쥐고 메이벨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 하는 것이 마치 부모님 앞에서 웅변 대회에 나선 아이 같았다. 어리숙했으며, …동시에 말할 수 없이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문제는, 그의 눈 앞에 있는 ‘숙녀’가… 고작 그 정도 의지에 감명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메이벨은 어수룩한 숫청년의 용기에 감동받아 눈시울을 적시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꽉 물며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

“큽.”

크흐흐흡….

크흐, 크, 크크크큭….

“수, 숙녀 분…?”

“크, 크흐, 으하하하핫!! 아하하하하!! 나, 나보고 숙녀 분이래!! 프하하하하!!”

“에, 에, 에에…?”

“으하, 으하하하! 숙녀 분! 바람의 별!! 발레리안 맙소사! 아하하하하!!”

메이벨이 ‘뒤집어졌다’. 글자 그대로.

어리둥절해 어쩔 줄 모르는 엘리야와 일어날 타이밍을 놓친 아를로스가 (카운터 아래 숨어) 메이벨을 바라 보았다. 한바탕 웃음과 사람들의 시선을 충분히 즐긴 메이벨이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도련님, 내가… 큽, 우리 상냥한 도련님을 위해 몇 가지 좀 가르쳐줄게요.”

“네, 네에…!”

“우리 도련님, 라스페로사는 오늘 처음이죠?”

“네! 오늘 점심에 막 도착했어요!”

“그러면, 자. 라스페로사에서는 어느 누구도 ‘숙녀 분’ 같은 단어는 쓰지 않아요.”

“에?”

아닌가. 쓰나?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그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쓰지 않는 말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고민을 넘긴 메이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그럼… 그럼, 모르는 여성 분을 부를 때는 뭐라고… 하나요?”

“거기 서 이 여자야.”

“네헤?”

“어이 예쁜 아가씨, 나 좀 볼까?”

“네에에?!”

기겁하는 엘리야를 보며 메이벨이 다시 한 번 웃었다. 이 도련님, 귀하게 자란 티가 너무 나잖아. 귀해도 너어무 귀하신 것 같은데 이런 분이 어쩌다 이런 도시에 오셨을까. 라스페로사가 명성이 높다지만 그건 그녀 같은 사냥꾼들에게나 통하는 말이지 이미 가진 것도 가질 것도 많은 귀족들이 직접 뛰어들 정도의 땅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 숙녀 분 그거는, 큼… 귀한 집 아들 티가 너무 많이 나. 그거 말고 다른 단어 찾아 봐요.“

“네, 네에에… 가, 감사합니다아….”

“그리고 두 번째.”

“아… 네!”

“그… 크, 바람… 바람의 별, 그거. 누구… 누구한테 들었어요?”

“그, 그건….”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엘리야가, 잔뜩 작아진 목소리로 ‘동, 동화책에서….’ 이야기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아를로스조차 헛웃음을 뱉을 뻔했다. 동화책에서라니. 하긴 그렇겠지. 바람의 별 같은 이야기를 동화책이 아니면 또 어디에서 보겠는가.

동화 속 보물 사냥꾼이라니. 어린 시절 그림 일기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메이벨이 이를 악 물었다. 나름대로 표정 관리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웃음 참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누가 그래요? 여기 오면 바람의 별을 찾을 수 있다고?”

당신 사기 당한 거야. 라는 말을 면전에다 대고 하기엔… 너무 마음에 드는 얼굴이었다. 하는 수 없지. 메이벨은 그녀답지 않게, 자비와 온화함을 베풀어 에둘러 설명해주기로 했다. 다만 그녀가 간과한 것은 엘리야 오를란도라는 사람이 보기보다 저돌적이고, 타고난 모험가 체질에, 도전자 기질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쫓는 것은 두루뭉술하고 환상적인 동화 속 별님이 아니었다. 그는 보다 구체적이고, 증거가 있으며, ‘실재하는’ 고대의 유물을 쫓아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저, 저도 많이 찾아봤어요! ‘바람의 별’ 설화가 시작된 페키 섬에도 가봤고, 테사 신 비석이 있는 페나타 해협에도 가봤구요… 비다벨로 협곡에서는 숨겨진 유적도 발견했어요! 바람의 별이 분명히 존재할 거라고 그 때 확신하게 됐는 걸요….”

허어.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던 주변 손님들의 입에서 일제히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동화책 하나로 시작된 여정 치고는 꽤나 본격적이었다. 엘리야의 입에서 나온 여행지 중 몇몇 장소는 라스페로사의 이름 높은 모험가들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전부 다녀봤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 문헌에 기록된 곳은 거의 다 찾아봤어요! 마지막으로 바람의 별이 기록된 건 이그니아 캠벨이 쓴 《신화 유랑기》인데, 이그니아 캠벨의 마지막 여행지가 겔란도 대협곡이기도 하고… 저기, 전설이기는 하지만, 《페니키아 사가》에서는 테사 신의 심부름꾼이 바람의 별을 가지고 서쪽으로 달려갔다고 적혀 있었어요. 게다가 서부는 대륙에서 제일 넓은 땅이고… 여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적들도 많고… 사냥꾼도 많으니깐… 같이 연구할 동료도 찾을 수 있고, 여기라면 정말 바람의 별을 찾을 수 있겠다 생각 했거든요….”

하나하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정말로. 메이벨의 취향이 아니라는 문제가 있었을 뿐.

“다른 사냥꾼 찾아봐요.”

 

그의 여행기가 감동적이긴 했지만, 동그란 얼굴도 참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만으로 덥썩 손을 잡기에 메이벨의 시간은 너무도 귀했다. 그녀는 절대 확신이 없는 모험에 자신을 투자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형제, 사냥 파트너 또한 그랬고.

“바람의 별은, 뭐,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라.”

 

사냥꾼에게 모험은 곧 경력이다. 어떤 모험을 했는지, 어디에서 모험을 했는지, 모험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그리고 실패한 모험은 사냥꾼의 흉터가 된다. 사냥꾼의 흉터는 명예의 훈장이라지만 훈장도 훈장 나름이지. 저런 낭만 가득한 훈장은 메이벨이 하려는 일, 메이벨의 미래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사냥꾼은 저희가 찾아드릴 수 있습니다.”

단호하게 손을 털어버린 메이벨 대신 슬그머니 일어난 아를로스가 엘리야에게 권유했다. 바람의 별에 낚일 동화쟁이가 또 있을진 모르겠지만. 보수만 충분하다면, 순진한 부잣집 도련님의 장단을 맞춰 줄 여행 친구들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의뢰인과 사냥꾼을 연결해주는 건 <어글리 스완>의 역할 중 하나이기도 했고. 애초에 이런 상황을 몰랐다면 모를까 눈 앞에서 목격해버린 이상, 아를로스에겐 저 온순한 도련님이 라스페로사의 쓴맛을 보지 않도록─혹은 최소한 덜 맛보도록─도울 의무가 있었다.

 

시무룩해진 엘리야가 아를로스를 돌아 보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주저하는 청년을 보며 휴, 한숨을 내쉰 아를로스가 먼저 물었다.

“의뢰비는 있으신가요?”

“아, 네에… 저어, 제가 받은 유산도 있고… 고향에 형님이 조금 지원해주실 수 있다고 하셔서….”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데? 아를로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식당 안 손님들의 귀가 일제히 쫑긋 서는 것을 느낄 수도 있었다. 고향의 형님은 그렇다 치고, 유산이라.

 

오랜 여행과 모험에도 흉이나 탄 자국 하나 없이 고운 얼굴, 물 한 번 만져 본 적 없을 것처럼 보드라운 손등, 명품일 게 분명한 코트와 재킷과 셔츠, 바지까지. 저런 도련님이 물려 받은 유산이라면 한두 푼 수준은 아닐 게 분명했다. 유산의 전부를 쏟아 부으려는 건지 일부만 투자하려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서도….

 

음, 해볼만 하다. 고개를 끄덕인 아를로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금액이 꽤 크겠는데요. 대충 얼마 정돕니까?”

“음, 음, 일단 300만 페블 정도…?”

뭐?

왁자지껄하던 식당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지며 가게 안의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엘리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스페로사 토박이로 잔뼈가 굵은 아를로스도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는 스케일이었다. 삼백 얼마? 삼백? 만? 삼백이 천 개도 아니고 만 개?

어글리 스완에서 자랑하는 ‘석양 정식’의 가격이 15페블이다. 라스페로사 사냥꾼들의 월 평균 수입은 대략 3천 페블이며, 위험 수당을 포함한 의뢰비용도 1만 페블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사냥꾼의 명성에 따라 백만 페블 정도야 쉽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300만 페블이라니? 경악에 휩싸인 사람들의 머리 위로 엘리야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저도 알아요, 바람의 별은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유물이고 찾기도 아주 어렵다는 거… 못 찾을 수도 있구요… 그러니까, 보수만큼은 충분히 챙겨 드리고 싶어요. 선금도 50만 페블 정도는, 수표로 지급해드릴 수 있고….”

선금. 50만. 게다가 수표.

 

후불, 현물, 담보 거래가 판을 치는 라스페로사에서 수표란 현금과 이음동의어다. 그것은 지금 <어글리 스완> 지붕 아래 모인 모두를 도련님의 충실한 하이에나 떼로 만들기에 부족함 없는 조건이었다. 저 도련님에게 실제로 그만한 지불 능력이 있느냐는 둘째치고, 계약서라도 뜯어보지 않으면 바보 천치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느긋하게 술 한 잔을 들이키던 사람, 궂은 일을 마치고 모처럼 고기를 썰던 사람, 막역한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던 사람들이 한 무더기의 늑대로 변해 ‘사냥감’을 향해 돌진하려던 순간.

메이벨이 전광석화처럼 엘리야의 손을 낚아챘다. 놀란 엘리야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리는데, 두 눈을 부리부리 뜬 메이벨이 목에 힘을 꽉 주고 말했다.

“취소.”

“네, 네?”

“거절 취소! 취소!! 수락! 무조건 수락!!”

바람의 별이고 나발이고, 이 돈벼락을 앞에 두고 올인하지 않으면 메이벨 오펜의 이름이 울지! 안 그래요 할아버지?! 오펜 가 가훈 제 1조 1항, 황금 보기를 부모 보듯이 하라! (할아버지 : 니미 그건 또 뭔 헛소리여?!)

 

메이벨이 아무리 옛 동화에 코웃음밖에 칠 줄 모르는 현실주의자라 해도, 아니, 현실주의자이기에 더더욱,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실패? 50만 페블에 실패가 어디 있어! 300만까지 받으면 그게 바로 성공이야!

“가요! 가! 도련님! 나랑 같이 가요!!”

“그, 그치만 어려우시다고….”

“누가, 내가? 아니? 난 그런 적 없는데?!”

“네헥?”

“눈 앞에 금덩이가 있는데 못 먹으면 등신이지!! 갑시다! 도련님 집이 어디에요?! 내가 라스페로사에서 제일 안전한 데를 아는데, 거기서 지내지 않을래요? 아니, 무조건 가는 거야, 나랑 같이 사는 거야!!”

메이벨 오펜. 라스페로사에서 실력 좋기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고, 아름답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며, 성격 더럽기로도 다섯 손가락, 돈 밝히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미친 장미’.

 

그녀가 엘리야의 손을 잡았고,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도련님도 그녀의 손을 (어쩌다보니) 맞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세 사람의 (반강제) 동맹이 결성되었으니, …끝을 알 수 없는 모험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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