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수업
안녕하세요! 에피니예요!
오늘은 햇볕이 아주 아주 좋아요. 이런 날에 소풍을 가면 행운이 따르는 법이라고 칼립소 언니가 알려 줬지요. 메이벨 언니는 오늘 드레스 쇼핑을 간다고 했어요! 하지만 에피니는 따라가지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유리 오라버니랑 공부를 하기로 한 날이니까요! 그래서 정말 정말 따라가고 싶었지만 따라가지 않았어요! 에피니 기특해! 대단해! 머리 쓰다듬어 줘야 해! 상으로 딸기 케이크랑 초코 크로플도 먹고….
따악!
“아야!”
“집중.”
우.
유리 오라버니는 너무 엄! 격! 해요.
하얀 뺨이 불룩 솟아나왔다. 땡그란 눈동자 속에도 불만이 드글드글했다. 에피니는 나들이 가고 싶은 것도 참고 열심히 공부하는데 오라버니는 맨날 혼내기만 해!
에피니는 정말이지 억울하고 서러웠지만, 에우리페는 알 바 아니었다. 관심도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 에피니가 오늘 내로 예정된 진도를 마무리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 뿐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이틀치 진도를 일주일째 질질 끌고 있는 주제에 뭐 잘 했다고 주둥이를 내밀어. 에우리페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다시 한 번 주먹을 쥐자, 이크, 기겁한 에피니가 잽싸게 정수리를 감싸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집중했는데!”
“거짓말 마라.”
“진짠데!”
“딴 생각하는 게 눈에 다 보이는데 뭐가 어째?”
“딴 생각하고 집중도 했어요!”
“딴 생각하는데 집중을 한 거겠지!”
정곡이었다. 오라버니는 독심술도 하시나봐. 입술을 삐죽 내민 에피니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잔뜩 쪼그라든 소녀에게 용암처럼 뜨거운 눈빛과 함께 무시무시한 융단폭격이 떨어졌다.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 이만한 기초도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치만 안 되는 걸요!”
“하려는 마음이 없으니 그렇지!”
“재미없단 말이에요!”
“누가 공부를 재미로 해!”
“저는 재미로 하는데!”
“그러니 네 성적이 그 모양 그 꼴 아니냐!”
“에피니는 귀여우니까 괜찮댔어요!”
누가 그딴 망발을!
울화통이 터진 에우리페가 한 번 더 꿀밤을 날렸다.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시 정수리를 부여잡은 에피니가 으아앙,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속이 바싹바싹 타다 문드러진 에우리페는 저릿저릿한 뒷목을 한 손으로 붙잡은 채 벌러덩 자빠진 여동생을 불꽃이 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자격 시험이 코앞인데 저것이 아주 놀고 자빠졌다!
씨근덕대며 심호흡을 한 에우리페가 후, 하, 후, 크게 숨을 쉬고 다시금 폐를 부풀렸다. 저 발랑 까진 계집애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끔 혼꾸녕을 내야지. 딱 일주일, 일주일만이라도 바짝 다잡을 수 있도록 눈물을 쏙 뺄 생각이었는데.
“왜, 뭐가 잘 안 되는 게냐?”
“형님!”
“큰 오라버니이!”
예상치 못한 함정이 나타났다.
반쯤 입을 벌렸던 에우리페가 우뚝 굳고,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계집아이는 벌떡 일어나 사내의 널찍한 등 뒤로 달려갔다. 조그마한 머리통이 커다란 몸집에 가려 감쪽같이 숨겨졌다.
저, 저, 저 쥐콩만한 게.
에우리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등줄기가 섬칫해지는 눈빛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에테오가 뒤늦게 몸을 빼려 했지만, 이게 웬 걸.
아무리 해도 에피니가 떨어지질 않았다. 실수인 척 팔을 털어내기도 하고, 슬그머니 옆으로 한 발짝 걸어보기도 하고, 먼 하늘을 보는 척 하며 몸을 틀어보기도 했는데.
이 자식, 거머린가?
콱 멱살을 잡아서 던져버리면 떨어지긴 할 건데… 잠시 고민하던 에테오는, 에우리페의 눈치를 한 번 보고, 하는 수 없이 마음씨 좋은 큰 오라버니 역할을 조금 더 연기하기로 했다. 한 주먹도 안 되는 여동생을 떨궈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떻게 떨궈내든 에우리페의 눈총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으므로.
“좋은 말로 하지, 왜 화를 내고 그래.”
“좋은 말로 해서 안 되니 그러지요!”
“아니에요! 에피니 좋은 말로 하면 잘 들어요!”
“퍽이나!”
“으앙!”
분홍색 동그란 머리통이 에테오의 옆구리 틈으로 불쑥 튀어나왔다가, 번개처럼 사라졌다. 허공에 주먹질을 한 에우리페가 씩씩대다 현기증이 이는 이마를 짚고 휘청였다. 깜짝 놀란 에테오가 성큼 다가와 에우리페를 부축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또 에피니를 가리는 걸, 에우리페가 놓칠 리 없었다. 주먹을 꾹 틀어쥔 에우리페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오냐.”
“…비키세요.”
“….”
…그건 좀.
머쓱… 하게 시선을 돌린 에테오가 에우리페의 허리를 꽉 붙든 채로 딴청을 부렸다. 딱히 에피니를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아무렴 이 나이 먹고 그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애에게 동지 의식을 느껴 그런 것은 절대절대 아니다. 다만, 그렇잖아도 심약한 에우리페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질까 걱정이 되었을 뿐이다. 매번 혈압이 오른다 어쩐다 하면서 또 매번 신경을 쓰고 마음을 쓰는 것이 영 갑갑하여.
“거… 한 번만 봐주거라.”
“형님이 매번 그러시니 저 애가 늘상 뺀질대는 것 아닙니까?!”
“아니 너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에피니를 네가 키웠지. 내가 키웠느냐?”
쟤가 저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다, 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에우리페의 눈매가 대번에 매서워지며 서슬퍼런 도끼눈이 에테오를 째렸다. 살기는 물론이고 원기(怨忌)까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아차 싶었던 에테오가 쓰읍, 입맛을 다셨다. 아니, 그, 내 말은 그 뜻이 아니고 그러니까.
“네… 가 이만큼 키웠으면 다 키운 거지. 너무 애쓰지 말고 내버려둬라.”
“다 키우긴 뭘 다 키웁니까?!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걸!”
근데 솔직히 너보단 쟤가 더 자기 앞가림 잘할 것 같아.
라고 이야기했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에테오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목구멍 바로 앞까지 튀어나왔던 말을 혓바닥을 꽉 씹어 가까스로 참아낸 에테오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그가 생각하기에 그나마 가장 듣기 좋을 말을 꺼냈다.
“그래도 에피니는, 거, 튼튼하지 않으냐. 씩씩하고. 그럼 됐지.”
“….”
“핏줄은 못 속인다고, 그 애도 어쩔 수 없이 슐레이어 혈통인 게지. 자랑스럽지 않으냐?”
“……자랑은 개뿔…….”
“뭐?”
“…됐습니다. 비키세요.”
“뭐, 아니, 너 방금 뭐랬느냐?”
“아무 말 안 했는데요. 비키세요.”
“너 분명 나한테…,”
“비키세요, 라고 부탁드렸는데요.”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뭐요.”
“몰라서 물어?!”
“모르겠는데요. 에피니 도망칩니다. 비키세요.”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급기야 에테오의 눈에서도 불꽃과 함께 오기가 튀었다. 다부진 턱 위로 힘줄을 바짝 세우고 이를 꽉 문 에테오가 에우리페를 한껏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괘씸한 놈. 발칙한 놈. 버릇 없는 놈! 내가 이만큼이나 제 눈치 맞춰줬음 됐지!
“내가 왜 네 말을 듣느냐?! 싫다!”
물론, 거기에 굴할 에우리페도 아니었다. (에우리페 : 형님이 언제 제 말을 들어주신 적이 있긴 했나요?) 빨간 눈을 번쩍 빛낸 에우리페가 에테오의 가슴을 콱 밀치며 소리쳤다.
“비키세요!”
불시의 공격에 당황한 에테오가 어라, 하다가 뒤로 넘어갔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자빠진 에테오가 바닥을 뒹구는 사이 (에테오 : 이 자식이 진짜), 벌떡 일어난 에우리페는 지체없이 정원의 오솔길을 따라 내달렸다. 에테오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에피니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가지런히 정돈된 관상목들 사이사이로 자그마한 구두 자국만 하나, 둘, 남아 있었다.
잡히지 않으려 퍽 애를 썼다마는 에우리페의 눈을 속일 수야 없었다. 에우리페 캐번시가 누군가. 마력이 뭔지도 모르던 에피니 캐번시를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채찍질한 끝에 기어코 오벨리움 마법학교에 입학시키는 데 성공한 윌링엄 최고의 치맛바람이었다. 그런 그가 가장 잘하는 것 첫째는 발버둥치는 에피니를 책상에 앉히는 것이고, 둘째는 도망친 에피니를 쫓아가는 일이다.
집 밖에서는 몰라도 집 안에서라면, 어차피 갈 만한 곳도 한 곳밖에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에피니의 흔적을 따라 달린 에우리페는 정원 가장자리를 빙 돌아가, 앞마당까지 넘어가서, 대문 바로 앞에서 조심스레 문을 따는 에피니를 발견했다. 짱딸막한 손이 이미 대문 손잡이를 쥐고, 자물쇠를 돌리고 있었다!
결국, 에우리페가 폭발했다. 관자놀이와 목줄기에 핏대를 불룩 세운 그가 에피니를 향해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에─ 피─ 트─ 리─ 나─!!!”
우라질 계집애 같으니. 공부는 죽어라 해도 제자리 걸음인 주제에 도망치고 놀러갈 때만 쓸데없이 걸음이 빠르지!
“히이익!”
“어딜 가, 거기 안 서?!”
깜짝 놀란 에피니가 얼굴이 파래져서 뒤를 돌아 보았다가 엄마야,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숨을 몰아쉬는 에우리페의 등 뒤에서 어째, 화산이 용솟음치는 듯했다. 전에 없이 격렬한 불길을 본 에피니는 직감했다. 절대 잡히면 안 된다. 잡히면 죽을 거야! 하루종일 공부만 하게 될 거야! 벌칙으로 엄청나게 재미없는 깜지를 열두 장이나 쓰게 될 거야!
“너 이 자식, 당장 이리 안 와?!”
“싫어요! 오라버니 미워!!”
“야!!!”
생명의 위기를 느낀 에피니가 쏜살같이 달려 대문을 박찼다. 다급해진 에우리페가 손을 휘둘러 다시 대문을 닫으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에피니가 한 발 더 빨랐다. 덜컹이는 문 틈새로 잽싸게 빠져나간 에피니가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쳤다. 눈물 젖은, 애달픈 비명을 온 동네 구석구석 퍼뜨리면서.
“으아앙, 에피니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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