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필리아입니다.
FINAL FANTASY14 칠흑의 반역자 스포
*이름 외의 모든 것은 날조입니다.
https://youtu.be/YKeLSdYg7a8?si=oheOHj6LegGl5_mT
"더!"
대검을 든 금발의 소녀가 숨을 몰아쉰다.
"더 빠르게!"
수정과 같이 푸른 눈이 투지로 불탄다. 뒷짐을 진 란지트가 민필리아를 걷어차고 대검이 발길질을 막아내지만 지친 몸이 뒤로 밀려난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민필리아."
"감사합니다."
"훌륭하구나. 내가 가르친 역대 무녀들 중에 가장 빠른 성취를 보이고 있어."
빛의 범람을 막아낸 여성의 뒤를 이어 이름을 이어받은 이번 대의 민필리아. 빛의 범람은 죄식자를 자아내고 푸른 눈과 금발을 가진 소녀들을 전장으로 내몬다. 최초의 기억이 있을 때부터 그녀의 곁에는 란지트가 있었다. 그는 꼬질꼬질한 소녀에게 스푼과 포크보다 날붙이를 먼저 들려주었다.
죄식자. 빛의 범람에 휩싸인 인간. 민필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야 할 빛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하늘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대검을 휘두르느라 굳은살이 박힌 손, 기이할 정도로 새하얀 날개, 그것을 끊어내는 감각, 빛으로 흩어지는 죄식자, 그리고 죽어가는 율모어군.
'안 돼.'
율모어군이 우세하다.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여느때와 다름없이 돌아갈 수 있다. 분명 그럴텐데 직감이 자꾸만 여기서 도망치라고 말한다.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달려나갔다. 이유도 없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란지트 장군에게 벌을 받을 것이다.
'안 돼.'
무엇이? 죄식자의 발톱이 뺨을 길게 스치고 지나갔다. 녹슬지 않은 대검은 그 죄식자도 찢어발겼다. 하지만 다리가 무겁다. 그럼에도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빛의 무녀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
‘도망쳐’
심장이 간질간질. 무엇으로부터? 아니, 죄식자들이 원래 이렇게 몰려다니던가? 보고받았던 개체수보다 많지 않은가? 불안한 감각에 이성적 근거가 뒤따라온다. 죄식자들의 움직임에 흐름이 있다.
“저게 뭐지?”
소음이 마구잡이로 흩어지는 전쟁터지만 한 병사의 외침이 유독 귀에 박혀들었다. 날카롭고 커다란 날개와 인간형태의 상체 아래 달린 네발 짐승의 몸통. 병사가 가리키는 곳에서 거대한 창을 든 재앙이 있었다.
“대,대죄식자다!”
재앙은 느리지만 확실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대죄식자라는 위명에 걸맞게 강력해 보이는 죄식자들을 곁에 두르고서. 기세좋게 창을 휘두르던 인간들은 절망했다. 그리고 미약한 희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민필리아는 똑똑하다.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아서 대죄식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전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
“중상자들을 후퇴시키고 지원을 요청하십시오. 대죄식자의 시선은 내가 끌겠습니다. 다른 죄식자들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민필리아님!”
“저것이 진짜 대죄식자라면 당신들은 상처만 입어도 죄식자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내가 맡는 것이 맞습니다.”
뺨의 상처에서 핏방울이 눈물처럼 턱을 타고 흐른다. 대검을 잠시 땅에 꽂은 민필리아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길게 흩날리던 머리칼을 모아 잘라버렸다. 단번에 끊어진 머리카락은 어깨에 겨우 닿을듯했고 민필리아는 개운하게 머리를 마구 털었다. 전투에 불편함이 있더라도 빛의 무녀로서 유지하고 관리해왔던 긴 머리카락이 거친 단면으로 잘려 바닥에 뭉쳐 떨어졌다.
“지원이 온다면 저도 늦지 않게 퇴각하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율모어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 달려갔다. 민필리아는 꽂아두었던 대검을 다시 뽑아 대죄식자를 마중했다. 죽음의 문턱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이지만 짧아진 머리가 가벼워서 유쾌해졌다.
란지트 장군, 나는요. 긴 머리가 무거워서 불편했어요. 무언가를 베는 것도 즐겁지 않아요. 나의 실력이 늘고 시야가 넓어져도 적의 약점보다는 인간의 죽음이 먼저 보여요.
대검을 든 팔이 떨린다. 다리는 오랜 전투가 누적되어 무거워서 움직이기 싫다. 다른 죄식자들은 홀로 나선 민필리아를 스쳐지나간다. 대죄식자만이 그녀 앞에 섰다. 인간을 위한 무녀와 인간이었던 것이 부딪힌다.
밀려나는 쪽은 민필리아다. 창과 대검은 여러번 붙었다 떨어졌다. 긴 싸움을 이어왔던 소녀의 호흡이 격렬해진다. 집중력이 깨지는 순간 창은 그녀를 후려칠 것이다. 지금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란지트 장군의 가르침었다. 공격을 끝까지 눈으로 쫒고 자신의 손발끝을 의식하여 몸을 완전히 지배해라. 큰 동작에는 빈 공간이 따른다. 그것은 죄식자도 다름없다.
소녀는 진정시킬 수 없는 호흡은 잠시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땅을 발로 밀어냈다. 숨 대신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쾅-!
대검과 검만큼 거대한 창이 부딪치며 꽉 깨문 잇새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난다. 무리한 힘겨루기에 한 쪽 다리가 푹 꺾여 무릎을 꿇는다. 죄식자가 비웃는 것처럼 짐승의 울음소리를 냈다. 눈을 치켜뜬 민필리아가 사납게 웃으며 창을 쳐냈다.
내 뒤에 더 이상 남은 건 없다. 팔이 뜯기고 피를 토하더라도 지겹게 새하얀 저 한 쌍의 날개만은 뜯어내고 말리라.
민필리아는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상처가 늘어나지만 아픔보다는 원망을 먹고 투지가 타오른다. 그렇게 너덜거리게 된 대죄식자의 날개를 그녀가 결국 뜯어냈다. 그렇게 뜯어낸 날개를 붙잡고 민필리아가 던져졌다. 바닥을 구르고 바위에 튕겨 엎어지고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온 몸이 으스러진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진짜 여기까지인가보다. 들숨에 피비린내와 달큰한 죽음이 섞여 어지럽다.
대죄식자는 다각다각 걸어와 말의 하체로 보이는 앞발 두 개를 높게 들어올렸다. 찍어내리던 발굽이 떨어지다 새까만 기운에 휩싸이더니 멈추었다. 대죄식자의 얼굴 높이 쯤, 검고 화려한 로브를 입은 인간의 형상이 떠 있었다. 그 로브를 입은 이는 앞발을 붙잡은 것과 같은 기운을 두르고 민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꽤 열심히 했네. 너덜너덜해졌잖아?”
민필리아에게는 그 중얼거림이 들리지 않았지만 자신을 향해 말한다는 것 만은 어렴풋이 알았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보았던 밤을 닮은 색. 어두운 로브를 입은 것이 느리게 바닥으로 다가왔다.
“율모어의 원수는 군대를 물리고 성으로 도망쳤다. 참 우습지? 빛의 무녀라며 그렇게 대우할때는 언제고 너를 버렸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느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이해하는데에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민,필리아는… 다시 나타날테니까…”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내고 로브를 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빨간 가면을 쓴 남자가 한숨을 한 번 쉬고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앞발을 든 채로 붙잡혔던 대죄식자가 하나의 빛덩어리로 줄어들었다.
“어둠의 전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죽음을 가지고 온다는 전설의 인물. 왜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허, 검은 로브를 입었다고 어둠의 전사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건 네게도 어울리는 말일 것 같은데.”
로브를 입은 남자는 몸을 돌려 빛덩어리와 함께 검은 구멍으로 사라졌다. 이제 이 곳에는 아무도 없다. 움직임이 없는 시체들 사이에서 작은 몸이 힘겹게 숨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그조차도 얼마 남지 않았다.
슬픔이 가슴 한 구석에 응어리진다. 이 감정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무엇인지 모르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워 종종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어떤 것. 말을 걸지도, 걸어보지도 않았지만 나를 아껴주는 것 같은 이 것 아마도 ‘민필리아’이겠지.
아아, 민필리아. 당신이 다음에 찾아가게 될 소녀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에게 스푼과 포크를 잡는 법을 먼저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쁜 이름을 받아 스스로의 인생을 위해 싸우면 좋겠어요. 그 아이는 새까만 밤 하늘을 볼 수 있을까요?
생명이 조금씩 흩어져가는 소녀에게서 ‘민필리아’가 떠나간다. 금빛으로 찬란히 빛났던 머리카락이 서서히 원래의 색을 되찾고 있다. 빛이 가득한 이 세계에서 반역과도 같은 칠흑의 색으로.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