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son

올빼미 숲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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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진



가벼운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쳤다. 아이오네는 사늘하게 부는 흐름에 다리가 흔들거리도록 내버려두었으나, 유진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보드라운 공기조차도 위협적이라, 대신 모아 안았던 다리를 풀고 나뭇가지를 발끝으로 안았다. 짧은 머리카락만이 바람 사이로 흔들렸고, 기둥에 기대지도 앞으로 수그리지도 못한 등이 제자리에서 옹송그렸다. 아마 이건 두 사람의 차이다.

나뭇가지 위는 위태로웠으나, 그조차도 나쁘지 않은 기분에 일조했다. 이 위에선 언젠가 찾아올 올빼미 숲의 괴수들을 고려하는 대신, 온 신경을 떨어지지 않는 데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면 남은 신경줄은 대화 위를 뛰었다.

"마법사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

아끼는 사람을 주류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은 왜 이루어질까? 사회적 관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어서, 특이점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해서, 외로워서. 그의 누이는 그래서 유진을 아주 평범한 소년으로 키웠다. 적당히 이기적이게, 적당히 다정하게, 적당히 충만하고, 적당히 외롭게. 자신과 비슷하도록.

사람은 때때로 무척이나 어리석다. 노력하면 바꿀 수 있을 줄 알지. 그러면 자신을 떠나지 않을 줄 안다. 하지만 영생하는 숲에서도 생명은 절대 영원하지 않다. 자랄 것이다. 끝내 순환할 것이다. 유진도 아이오네도.

"그래, 누구나 그래."

소년은 아이오네에게 정의를 내리는 것이 무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주류엔 언제나 예외가 있기 마련이고, '누구나'가 될 수 없는 자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모래바람은 무척이나 변덕스럽고, 오직 제 뜻만을 따른다. 그 까닭에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동조에 안심하는 것뿐이다.

-

고독은 수렁과 같으나, 따지자면 본디 진흙은 아이오네의 영역이다.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라, 소년은 어쩐지 10년을 하찮은 약속 따위로 번 기분이 들었다. 무기명의 대상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욕심을 부렸다.

"다치지도 않으면 안 돼?"

그들이 뿌리내린 곳이 아르부스토임을 참작하면, 다소 개연성 없는 공약이다.




2. 아이오네

“다치지도 않으면 안 돼?”

동시에 아래에서 작은 소란이 인다. 중천에 떠올랐던 해도 어느새 가라앉고 있으니 남은 시험을 마저 치러야 할 참이다. 밑을 향했던 눈길은 기다리는 이를 향한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아, 나지막한 말은 다 나오지 못하고 혀 아래로 숨어든다. 그늘이 빗긴 자리 담긴 걸 엿본 탓이다. 덜 여문 아이의 욕심을 매정히 접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떨어지더라도 죽지 않을 높이 위 가지, 긴장하여 곱아든 몸. 말문을 닫은 채 하릴없이 허공을 누비던 아이오네는 천천히 그 위에 선다. 접촉면이 줄어들고 중심이 멀어지니 가지의 흔들림이 커진다. 그에 달린 나뭇잎이 스쳐 왁자지껄하다. 유진의 당혹스러운 낯에도 비죽 입꼬리를 올린다.

그대로 있어. 느슨히 떨어지는 말은 강압이 서려 있다. 천진한 걸음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유진의 앞까지 도달하고 나면 음영 진 얼굴이 가만 내려다본다. 기둥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아래로 내디뎌 발끝으로 홈을 파고든다. 남은 발이 가지에서 떨어져 내리면 유진의 시야 끝에 걸리는 것, 소리 하나 없이 가만히 눈만 휘어지는 목소.

아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도 목울대를 넘기지 않는다.

-

밤은 낮보다 환했다. 하늘은 동굴의 천장, 숲은 벽면으로 만들어 버린 화마의 주인은 침묵한다. 통증에 주저앉을 시간은 없었고 주변을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피부에 느껴지는 열감이 홧홧하다. 안구도 익을 수 있다며 웃던 어느 인물의 환청이 들리는 것을 보면 곧 경험할 수 있겠노라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냇가나 하늘, 장작더미 위에 쏟아지던 요란스러운 폭발은 생명을 불사 지르고 싶어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대로 감았던 눈을 다시 뜨니 보이는 건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이 이파리의 그림자를 만들어 낼 때였다. 강박적으로 들려오는 사과와 참으려 애쓰는 울음, 신경질적인 목소리. 희미한 빛이 투과된 자리에는 재가 바람을 타고 배회한다.

의식을 잃고 닫힌 눈 사이에 가둬진 열기는 이제 빠져나간다. 머리카락이 일부 탄 것인지 아니면 타지 말아야 할 것이 탄 것인지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미미한 비린내가 넘실거린다. 피부를 파고든 이가 한둘이 아니라 그럴 것이다. 재와 열을 한껏 들이마신 목이 겨우 끌어모은 침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불만을 토로한다. 몇 번인가 목을 짓눌러보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거꾸로 매달린 것도 아닌데 어지러운 것을 보니 상태가 말이 아니다. 연신 사과를 내걸던 이가 약초를 짓이겨 만든 약을 가져와 발라주고, 남은 천에 둘둘 말리다 보면 정신은 차츰 맑아진다. 인간은 참으로 번거롭고 성가신 존재임이 분명하다. 아이오네는 때때로 자신의 변덕마저도 번거로웠다. 의식이 돌아오고 나니 하필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 떠올라서다. 몸 곳곳에 이는 통증을 무시하고 지팡이를 부목 삼아 걷는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으니 신경 한 톨 닿아있지 않았다.

덧없이 거닐던 동작은 유진을 발견하고 서서히 멎는다. 부름은 없다. 거리를 벌린 채로 유진이 이목을 눈치채고 시선이 맞닿았을 때 아이오네는 전과 마찬가지의 표정을 지었다. 깔깔한 목소리가 속삭인다.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해.”

약속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래, 네게 말이야.


3. 유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해."

아이오네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래, 꼭 죽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1차 시험의 마지막 두 밤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은 잊었다. 떠올릴 수야 있었지만, 굳이 되짚어 회고하지 않았다. 폭발이 서린 곳에서 자색 눈은 동기들의 피가 번져 벌겠고, 그 시야에 담긴 내용은 고통스러웠으므로 좀처럼 떠올리기 싫었다. 하지만 가끔 생각은 의지를 배반하여 흘렀고, 그럴 때면 유진은 얼굴을 다리 사이에 묻고 모든 것이 끝나기를 빌었다.

저주받은 목각인형은 하필 화마를 다루는 마법사에게 안겼다. 안아달라고 간절하게 외치며 실타래 손을 뻗는 모습이 선명하다. 맥동하는 어린 마법사에게는 목각 인형이 가장 바라던 열기가 있었겠지. 아마 이그나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 거다. 폭발은 뜨겁게 제 숨을 끊어먹었고, 주변을 전부 태웠다. 사랑과 불꽃은 때로 구별할 수 없다. '외로웠다잖아.' 가끔 유진은 그 마음에 동질감을 느꼈다.

소년은 우유부단했으나 고집스러웠고, 회피에 능했다. 영원한 진창에 머리를 처박는 일이란 건 유진도 알았다. 다른 방식을 몰랐을 뿐이다. 무방비하게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엔 그래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입만 달싹여 불렀다.

"…아이오네."

대답하지 않아도 아이오네의 입꼬리는 웃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 낯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으나 성질을 부릴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즈음에는 눈가를 찡그리기만 했다. 거리 좁히지 못하고 있자 아이오네의 발걸음이 다시 한 번 하늘거렸다. 맨발은 공터의 흙 위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으나 지팡이는 투박한 음성을 뱉었다. 빗방울이 느리게 떨어지듯 툭, 툭.

"이렇게 가르쳐줄 필요는 없었어."

내가 과한 욕심을 부려서 그래? 다치지도 말아 달라고, 터무니없는 소망을 빌어서 그래? 목구멍이 문장을 짜냈으나, 공기에 막혀 쉿쉿대는 소리만 났다. 고개를 떨구면 바닥에 물 자국이 났다. 그제야 유진은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4. 아이오네

흙이 젖는다. 풀잎을 타고 흘러내린 이슬이 만든 동그란 자국과 모양이 같다. 떨어지며 작은 방울이 튄다. 불규칙한 속도로 내리는 게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굴었다.

하나 불에 타고 남은 잿가루가 부유하는 하늘은 먹구름 한 점 없다. 텁텁한 공기는 상황이 파함을 고하며 사이사이 볕이 스며들어 흩어진다. 원망이 맺힌 눈의 일렁거림을 모르지 않는다. 목소리에 괸 수렁의 깊이를 알겠는가. 내리꽂혔던 탓은 화살을 돌려 심장을 죈다. 그에 메마른 토석을 침관하는 건 고개 숙인 자의 것이다. 땅은 지난밤 품어 남은 잔재로 몸에 남은 얼룩을 지우려 했으나 새로운 흔적을 이기지 못한다. 격양된 감정이 숨관을 틀어막는다. 지팡이를 쥔 이의 침묵과 초연한 태도는 얼핏 관조자로 비친다.

“이제 못 믿겠어?”

툭,

빗방울이 느리게 떨어진다.

“원한다면 그래도 되지만,”

툭,

다시 한 방울.

“알잖아.”

툭,

싸한 내음이 풍긴다.

아이오네는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생각을 종용하고 이해를 강압한다. 숙인 고개 앞에서 낮고 거친 소리가 내려앉는다. 사려하여 애틋하게 위로하는 방법은 멀다. 아는 것은 눈물이 메마르고 목이 쉬어 더는 울지 못할 때까지 곁을 지키는 것뿐이라. 폭력적인 단마디는 유진의 앎을 전제로 한다. 아이오네는 가르침을 내리려 제 몸 불사를 위인은 되지 못한다. 욕심, 소망, 바람. 이는 기원일 뿐이다. 간절한 마음 위에 파고들어 생을 축내는 것.

무게가 기운다. 주인을 지탱하던 지팡이는 바닥을 나뒹군다. 비뚤어진 채 손을 뻗는다. 푹 숙인 고개 아래 드밀어져 젖은 뺨을 감싼다. 굳은살이 틀어박힌 손끝은 움직임이 잘다. 나직한 선언이다.

“유진.”

“난 살아있어.”

비루한 몸뚱이가 너절할지언정 죽지 않고 이 순간 폐부로 들이차는 잿더미를 마시며 네 눈앞에 있다. 그러니 책망할 대상 없고 눈물 흘리는 일 없이 대수롭지 않게 넘겨야 할 것이라고. 앞으로 십 년이다. 두려워할 것 없는 세월이 남아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5. 유진

그는 손위 누이와 닮은 모든 것에 집착적으로 매달리면서도, 좀처럼 그것들을 미워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곁을 떠나가는 것들은 싫다, 역시. 다만 세상에 우뚝 서 있는 것은 소년뿐이었고 잿빛 하늘마저도 천천히 움직였다. 무지한 천공은 원망할 수도 없고 붙잡아둘 수도 없어서 납작한 심리를 더욱 들끓게 했다. 눈 밑이 덥다.

소년은 아이오네 게테마로부터 제 누이를 찾지 않음으로써 라일라를 보았다. 정말, 인간의 중심 되는 부분이 하나도 닮아있지 않다. 상냥한 목소리도, 달래는 음성도, 친절한 부연 설명도 부재하기에 선명하다. 이를테면 흙바닥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 두 인영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삶의 기로가 그 사이에 있으므로… 거름이 된 과거의 망령과 다르게 여기, 분명히 아이오네는 살아있다.

지팡이가 수평을 이루면 보라색 눈이 흠칫 놀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듦과 동시에, 앳된 얼굴의 외곽이 상대의 손바닥에 닿는다. 표정이 엉망인 것은 신경 쓸 틈 없이 그 팔과 허리를 엉성하고 조잡하게 붙잡았다. 다만 깨닫는 것은, 아이오네는 그의 부축이라곤 조금도 필요없이 꼿꼿한 사람이다. 기울어진 몸과 삐뚤어진 축이 여상하다. 살아있다는 응답이 이어진다.

"알아."

언젠가 괜찮다는 위로를 해달라 부탁했을 때, 동료들은 저마다의 대답을 했다. 나시사와 발디마르는 살아있으니 괜찮다고 했고 를뤼톈은 살기 위해서는 괜찮아야 한다고 답했다. 즈베즈다는 죽지 않고 이야기가 전해지는 한 괜찮은 것이라 말했고, 밀라는 괜찮아질 것이라 속삭였다.

"하지만 아이오네, 이오. 그게 다는 아니잖아…."

목숨 연명하는 것이 전부라면 이 하염없는 비애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눈물은 어디에 떨궈야 하는지. 사랑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소년은 계속해서 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앎은 자신만의 것이고 두 사람은 너무 달라서, 아이오네는 등을 밀어주는 대신 가만히 서 있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진은 십 년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데에 실패했다. 마른 이파리가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거나 폭우가 거처를 쓸어갈 때에도, 까마귀로부터 안부가 날아오거나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 때에도 곧잘 불안에 떨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돌을 온종일 만지다 못해 닳도록 손에 쥐고 자도 기분이 널을 뛰었고, 붉은 꽃다발이 바스러지는 날에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제 귀에 구멍을 몇 개 더 냈다. 아이오네가 굳이 제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키우는 걸 잘했던가. 뭔가를 키워본 적은 없는데.

청년이 라즈베리 코디얼 향이 나는 편지를 읽다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누구한테 편지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혹은 '나는 안중에도 없어?' 따위를 휘갈기려다가 관뒀다. 2차 시험이 곧이다.

채 하지 못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면 된다. 기다릴 수 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6. 유진

 

그는 물웅덩이나 인간 세계 따위에 흥미를 둔 적 없으나, 누이가 즐겨보는 공상소설을 가끔 훔쳐보긴 했다. 남매에게 취미로 읽을 책을 살 유흥비 따위는 없었으므로 라일라는 종종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왔는데, 책표지는 너덜너덜했고 이야기는 항상 멋진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유진은 그게 대체 왜 좋은지 몰랐다. 아마 치기 어린 질투심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세상 따위에 환상이나 미련을 가질 필요가 무엇 있나. 네게는 내가 있고, 나에게는 네가 있으며, 우리는 영원히 이 아르부스토에 있을 텐데.

 

머리가 크면서 영원이란 단어가 어렵다는 것을 배웠다.

세상 모든 것 중 영원한 것은 참 희귀해서 구하기 힘들었다. 마법은 마력을 다하면 사라지고, 약초는 시간이 지나면 시들었다. 제아무리 오래 보존하고자 애를 쓰며 배합해도 소비기한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영원이란 것은 오히려 세상의 순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왜 사람은 영속성에 무한한 애틋함을 느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괴물의 피를 따라 한참을 걸으면, 그곳에 반짝이는 물웅덩이가 있었다. 누군가는 기함하고 누군가는 반겼으나 유진은 그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웅덩이 자체의 실존을 의심했으나, 그것이 하필 올빼미 숲 한가운데 ―하물며 시험이 끝나기도 전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어떤 가능성이 물길을 열었고 불현듯 심장이 철렁였다. 모든 것이 운명처럼 맞아떨어지지 않나! 누이가 즐겨보던 책에 항상 또다른 세계가 등장했던 것과, 그가 내내 2차 시험을 기다려왔던 것, 달리 되지 않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것, 또 다른 세계로 향할 수 있는 통로를 맞닥뜨린 것까지!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다.

 

수면은 투명했고, 내려다보면 자신의 형상이 비쳤다. 길게 땋은 고동색 머리카락과, 서쪽 숲을 빼닮은 녹색 눈이 일렁였다. 그게 몹시 흡족해서 한참을 내려다봤다. 그런 사내가 아마 곧이어 투신할 것 같았나 보다. 귓가에서 동료들이 말을 걸었다.

앙키는 헛된 희망에 자신을 밀어 넣는 사내를 걱정했다. 타리안은 말리다가도 끝내 품을 내어 그를 안아주었고, 즈베즈다는 모순된 확신을 보듬어주었다. 테르셀과는 어린 날의 약속을 철회해야 했고, 발디마르에게는 기회를 잡으라는 조언을 들었다. 를뤼톈과는 아주 이별했다. 모든 대화를 나누면서도 유진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물웅덩이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다.

 

그래서 습관처럼 모래바람을 찾았다. 조언을, 혹은 확신을 달라고.

그건 조언이라는 말로 표현되었을 뿐 실상 바라는 말을 가장 신뢰하는 이에게 듣고 싶다는 바람에 불과했다.

아이오네는 미련이라고 말했지만 유진은 희망이라고 불렀다. 실낱같은 가능성도 저울에 올려둔다면 죽은 삶보다는 가치가 있다. 게다가 이때쯤 남자는 확신하고 있기도 했다. 라일라가 분명히 자신을 물웅덩이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다. 결단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누군가 밀어주지 않더라도 제 발로 떠날 마음이 들었다. 오직 사랑으로 이루어진 사내를 여태껏 붙잡은 것은 당연하게도 사람이다.

 

오직 흙으로 돌아간 누이만이 그를 살아 숨 쉬게 했으나 죽은 채로도 사랑은 남았다. 그건 라일라가 유진에게 남긴 유품과 같다. 살면서 결단코 떼어낼 수 없는 것, 육신을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 그는 아이오네에게 제안하면서도, 거절당할 것을 다소 각오한다. 그렇지 않나, 이 마법사가 언제 제 소망을 그렇게 들어주었다고. 언젠가 아이오네에게 다치지 말기를 기대했었을 때 그는 열다섯이었으나, 이제는 스물다섯이 되었다. 바뀌지 않은 점이 있다면 그가 여전히 어리광을 부린다는 것이다.

 

"이오."

짧은 애칭이 상대를 부른다. 더운 손바닥을 내민다.

"함께 가지 않을 테야?“

 

-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은 제 누이의 전철을 밟아 영원히 아르부스토를 떠났다.

 


7. 아이오네

 

반짝이는 수면이 아름답다. 낭설이 실재함을 인식한 순간 밝은 빛이 일었다. 수면에 던져져 튀어 오른 물이 발을 적신다. 고요한 물낯에 파문이 인다. 기묘한 환희에 젖은 이 또한 아름다웠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는 물결이 잦아들 때까지, 이후로도 오래 투명한 표면을 담았다. 안에서는 낯선 목소리와 알 수 없는 음이 진동했다. 어느 들판을 따다 둔 달큰한 냄새가 풍겼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기이한 표면은 미지를 엿보게 한다.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는 여행자에게 손을 내민다. 발목을 휘감아 삼켜버릴 거대한 아가리다.

 

길을 떠나는 나그네를 축복하는 일은 어렵다. 생과 사의 기로 앞에 매듭지어진 결속을 뿌리치는 건 매정한 일이 된다. 여태 일구었고 기다리는 이를 어찌 두고 갈 수 있으랴. 누군가는 이를 두고 현실에서 이상으로 도망치는 어리석은 겁쟁이라 일컬을 터다. 떠난 자들에게 중하지 않은 일이다. 번뇌의 해방이란 그렇다. 다만 버석한 모래성엔 해묵은 것이 없다.

 

-

 

변덕을 빌미로 짧은 인사를 나눈다.

 

안녕, 영원히.

영원히, 안녕.

 

이로써 불후한 생을 얻고 영구한 죽음을 갖는다.

 

-

 

변덕이 끓어올랐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서글펐으며 피로하였고 환멸이 스며들었음을. 권유를 바라보는 눈길은 서늘하고 건조하다. 제안이 아니다. 들먹임. 기실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아도 들어 먹힐 투정을 빌미로 채근함이 옳다. 괘사를 부린 과거의 저를 탓함이 옳은가. 자신마저도 성가실 때가 잦았다.

 

영원은 깊은 애정 속에서 탄생하여 자라왔으나 쏟아지는 마음을 받아들이질 못했다. 뿌리가 뽑혀 화병에 옮겨 담은 꽃이 줄기 끝이 아물어 물을 빨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흘러넘쳐 적시는 것에 무던했다. 미약하게 스며드는 것조차 온갖 통증과 자극에 익숙해져 잃을 참에는 느껴도 잡아채질 못했다. 망연히.

 

약조하지 않는다. 원하는 온전함은 영원 아래 존재하지 않아서.

정처 없는 삶이 돌연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미련을 붙드는 자의 것이다.

그 자신이 자초하였기에.

 

봄바람과 어울리지 않는 여름의 후덥지근함이 손을 타고 기어오른다.

녹음의 미지는 고독 두 자락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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