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son

한역 백업

유진 15 오늘 점심은 파란 버섯 튀김이야. 너도 먹을래? 가격은…… 100렉. (물론 농담이다.)

아이오네 18 (딱히 용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100렉을 내민다.) 어제 파이도 맛있더라.

유진 15 너한테는 돈 안 받아!!!! (기겁하며 손사래 친다.) 내가, 아무리, 쪼잔해도 그렇지…… 너는 무슨 돈이 남아나니? 농담으로 한 소리야. 왜 이렇게 퍼주고 다녀?

아이오네 18 이상하다. 장사꾼 기질이 있어보였는데. (본인이 줄 때면 이렇게 기겁하는 게 재밌긴 하다.) 음... 남긴 했지. 남은 걸 준다고 해서 문제는 안 되잖아. 그리고 네 음식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유진 15 그거랑 그거랑은 별개야…. 너한테 돈 뜯어냈다간 마음이 불편해서 한숨도 못 잘걸. (한숨 쉬더니 마른 세수 한다.) 그러니 남는다고 해도 그건 네가 갖고 있어. 어차피 오늘은 버섯을 많이 발견해서, 나눌 생각이었어. 버섯 좋아해?

아이오네 18 착한 줄은 알았는데 진짜구나. (아마도 남에게 몇번인가 네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지. 받기 싫다 하니 다시 갈무리해둔다.) 안 보일 때면 주변에서 채취라도 하고 있나보네. 응. 가리는 건 딱히 없거든.

유진 15 딱히 착해서라기보다는, (낯간지러운지 뒷목 긁었다.) 그냥 일반적인 수준의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내 얘기 어디서 또 들었어? (접시 한가득 채워서 네 앞에 내놓는다. 자연스럽게 그 옆 그루터기에 앉았다.) 여기서는 할 게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무언가에 계속 집중하고 있어야 하거든.

아이오네 18 네 친구한테서? (친구 사귀는 건 나중에 해야 한다는 사람이었으니 모호한 투다. 뜨거운가? 튀김을 톡톡 건드려본다. 작은 걸로 하나 집어 낼름 입에 넣었다. 바삭하네.) 시험에 대한 압박 때문에 그런가.

유진 15 … 여기선 잠도 안 오겠는걸. (바닥 본다.)

아이오네 18 나무를 탈까 생각했는데 바닥을 굳이 말한 거 보면 올라가면 안 된다는 거겠지. (아쉽다는 듯 나무를 올려다본다.)

유진 15 난 저 나무도 갑자기 움직일 것 같아서 무섭더라. (어깨 으쓱인다.) 그런데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서라도,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을 자신 있어?

아이오네 18 아~ (그래서 바닥에서 자라고 한 건가. 납득했다.) 그건 쉽지. 다리를 가지에 묶고 자면 되거든.

유진 15 …… 다리만 묶인 채 대롱대롱 매달려서, 머리에 피가 쏠리는 감각에 깰 것 같아. (잠버릇이 좋다고는 못했다. 혼자 상상하더니 고개 내젓는다.) 너 그런데 보기보단 운동신경이 좋은가 보다. 난 나무 탈 생각 딱히 안 해봤는데.

아이오네 18 잠버릇이 고약하구나. (가까운 나무를 툭툭 차본다.) 놀만한 걸 찾다보면 그렇게 돼. 적당한 높이까지 올라가는 수준이지만. 그정도는 감각만 좋으면 너도 금방 할걸~ 해볼래?

유진 15 그런 편이지. 누나가 종종 뭐라고 했어. (나무 툭툭 차면 잔뜩 쫄았다가, 무해한 나무임을 확인받고 안심한다.) 우리 집은 숲 속에 있었는데도 내가 사다리를 애용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자신 없어. 가르쳐줘.

아이오네 18 사이 좋은 남매네. 잠도 같이 자고. 많이 그립겠다. 그렇게 친하면 시험 치러 가는 동생이 걱정도 많이 되겠지. (얘도 은근 겁이 많구나 싶다. 나무를 몇번 만지고 살피는 듯 하더니 파인 부분을 가리킨다.) 이런 홈을 잡고 밟으면서 올라가면 돼. 도끼로 찍으면서 올라가도 되고~ 천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건 보여줄 수가 없어. 내 힘이 안 되거든. (......)

유진 15 옛날 얘기야. 당연히 이 나이 먹고 누나랑 같이 잠들지는 않아. (투덜거리다가도 설명 경청한다. 파인 부분 만지작댄다.) 잡고 올라가는 건 시범 보여줄 거지? 천은 어떻게 써야 하길래 그래?

아이오네 18 많이 자란 것처럼 이야기하기는~ (키득거리곤 팔을 뻗어 위쪽 홈을 잡는다. 껍질이 거칠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친 천을 써야하는데. (네가 어디를 밟고 어디를 잡아야하는지 보여주는 건지 행동 하나하나가 느리다.) 한쪽 손에 감고 나무에 둘러서 다른 쪽 손으로 잡는 거지. (발끝을 홈에 넣을 때면 고개가 내려갔다가 또 위를 본다.) 그걸 몸쪽으로 당기면서 다리로는 나무를 밀어내. 올라가면 다리로 기둥을 잡아 버티고 천을 위로 올리고 다시 당기고. 그걸 반복하면 돼. (차츰차츰 올라가서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가장 낮은 높이의 가지에 걸터앉는다. 힘들어.) 후...... 올라올 수 있겠어?

유진 15 왜 놀리는 말투로 들리지? 내 착각인가? (눈썹 한쪽 들어 올렸는데, 이미 나무를 오르고 있는 아이오네에게 보일 턱이 없다. 그냥 입 삐죽댔다. 네가 타고 올라갔던 발판을 그대로 짚고, 그대로 위로 몸 잡아당겼다.) 천이 있어서 그쪽을 시도해볼까 했는데, 듣기만 해도 초심자한테는 무리네. (위 올려다보다가, 발이 미끄러져 균형 잃는다. 나무기둥에 찰싹 달라붙어 겨우 살았다.) …… 생각보다도 힘든데, 이걸 정말 놀이로 삼았다고? 마을에 얼마나 놀 게 없었던 거야.

아이오네 18 내면이 어리다는 증거지. (가지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자니 매미처럼 붙은 네가 보인다.) 여기 좀 장관이야. (네 모습이.) 으음~... 없는 편이긴 할걸. 나중에 바람에게서 구입하는 식으로 여러가지 생기긴 했지만. 같이 하긴 어려웠거든. 너는 보통 뭘 했는데? (본인 힘으론 잡아서 끌어당겨줄 수도 없으니 네가 올라오면 앉을 수 있게 기둥에서 조금 떨어진다.)

유진 15 이제는 막 가져다 붙이네… (딱히 반박할 말 없어서 입 다물었다. 나무줄기에 손바닥이 잔뜩 긁혀서, 이럴 바에야 그냥 떨어지는 쪽이 나았겠다 싶기도 했다. '별로 높지도 않은데.' 겨우 균형 잡고 나무 조금 더 올랐다. 가지 끝에 팔 걸치고 나서야 심호흡했다. 시선 맞추는 것이 굉장히 오래간만인 것 같다.) 버섯 재배, 당근 키우기, 잡초 뽑기? (말해놓고 보니 놀이라고 하기엔 민망하다.) 친구가 없었던 건 아냐?

아이오네 18 (상체를 숙여 턱을 괸 채 바라본다. 한번에 성공할 정도면 운동신경이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 나중엔 나보다 잘 타겠군. 얄미워서 이마를 통 쳤다. 지금은 반격도 못하니까.) 그거 네 이야기 아니야? (별 반 다를 것도 없네. 순순히 인정한다.) 없던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네. 마을에 내 또래가 없었거든.

유진 15 아!! 왜 때려?! (이마 맞고는 배신감에 어린 표정 짓는다. 손가락으로 톡 미는 힘이 강할 리도 없는데, 밀쳐져 떨어질까 봐 팔로 나무를 다시 한가득 끌어안았다. 주섬주섬 가지 위로 올라오는 속도가 느리다. 겨우 자리 잡고선 기둥에 등 기대고 이마 문질렀다.) 내 이야기는 무슨, 아냐. (맞다.) …외로웠어?

아이오네 18 얄미워서. 겁쟁이~ (숨길 생각 없이 툭 뱉고는 슬쩍 아래를 본다. 떨어져도 죽진 않는 높인데. 물론 잘못 떨어지면 어디 하나 불구되기도 좋겠지만. 그렇게 못된 장난을 칠 생각은 없어서 말로만 골린다.) 응. (하늘을 바라보며 발을 느리게 동당거린다.) 한때는 그랬지. 이것도 하면 안 되고, 저것도 하면 안 되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그 다음부터 그건 안 됐거든. 네가 겪은 외로움이랑은 다르겠지만 말이야.

유진 15 얄미울 이유가 없잖아. (이마 문지르는 통에 까진 손바닥의 핏방울이 이리저리 묻었다. 그제야 눈치챘는지 얼굴이 푸르죽죽해지는데, 이래서야 겁쟁이란 말 부인할 도리도 없고.) 안 된다는 말은 누가 했는데? 마을 어른들이? 너희도 마법사 마을이야? (아무렴 바위 골렘은 상상하지 못한다.)

아이오네 18 (손을 잡아다가 제 소매로 누른다. 천쪼가리라도 매어줄 걸 그랬다. 애매한 배려는 이렇게 종종 모잘랐다.) 응~ 한번은 내가 뛰어들어서 안겼다가 몸에 멍이 잔뜩 든 적이 있어. 그다음부터 포옹 금지야. 지금까지도. (으쓱) 아니. 숲속지기. 다들 마법은 못 쓰거든. 나만 쓸 줄 알지. 크고 무겁고 단단하거든. (등에 맨 죽창-지팡이-을 들어 허공에 겨누면 모래알이 골렘의 형상을 만든다. 얼추 파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제어다.) 대충 이렇게 생겼지~

유진 15 애정표현이잖아, 뛰어들지만 않으면 괜찮을지도 모르고. 그건 좀 섭섭했겠네…. 실례란 건 알지만, 좀 무섭게 생기셨는데. 확실히 엄할 것 같고. (가만히 손바닥 내주고 기다린다. 고마워, 작게 속닥거렸다.) 그럼 마법은 어디서 배웠어? 그냥 학교엘 가서?

아이오네 18 하하~ 맞아. 험상궂게 생겼지. 그래도 다들 과묵하고, 성실하고, 나랑은 전혀 달라. 하지 말라고 한 것도 다 내가 다치는 것들 뿐이라서. 된통 아픈 뒤라 엄하게 말할 것도 없었지. 이래서 경험해봐야 안 한다고 그러는 건가? (샐쭉 웃는다. 내려갈 때 더 다치는 거 아닌가 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본인 머리에 묶은 끈과 목에 묶은 끈을 풀었다. 손 하나에 끈 하나씩을 둘둘 매어준다. “내려가서 돌려줘.”) 음~ 보통 학교에서 배우나? 난 오코스한테서 배웠어. 걔가 땅두더지마냥 마을 한복판에 솟아올랐거든.

유진 15 내가 보기엔 너도 성실해 보여. 태도가 가벼운가 싶다가도…. 그런 곳에서 자랐으면 너도 그렇지 않을까? 다르다고 생각은 해도, 보고 자란 게 그렇다면. 오코스는 누군데? (잠시 손바닥에 묶인 끈 본다.) 이거 빌려줘도 되는 거 맞아? 꽤 깨끗하길래… 누구한테 선물 받은 건 줄 알았어.

아이오네 18 그래? (목소리가 퍽 기껍다. 올라간 입꼬리에는 묘한 만족감이 서려있다. 그럴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러한 말에 티가 나는 건 여전히 바라기 때문이다.) 오코스는 지하약초꾼이야. 땅속에서 자라는 약초를 캔다던걸. 동굴이라던가. 지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걸 찾는다고 했어. 전설의 약초~ 뭐 그런 거라도 찾는 모양이지. 그래서 그런가 걔도 흙을 다뤄. 난 바위가 다루고 싶었는데 말이야. 아니면 바람이라던가. 그러고보니 넌 어떤 마법사야? (여기와서 본 마법 중 기억나는 거라곤 불이다. 폭발! 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서 귀를 문질렀다.) 빨간 건 산 거, 갈색은 받은 거. 선물받은 거 맞는데. (태평)

유진 15 응. 적어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쪽이야 알 수가 없지, 내가 본 적이 없으니. 그러면서도 네가 기분이 좋아 보이니 덩달아 만족스러운 눈치다.) 약초계. 그래서 별로 특별한 건 할 줄 몰라. 약초를 조합하는 거나 합성하는 거. 오코스란 분은 내가 만났어야 했겠는데. 왜 하필 바위와 바람이야? (아이오네가 흙, 개중에서도 모래를 다룬다는 것은 조금 전의 마법으로 눈치채서, 고개만 끄덕인다.) …갑자기 너무 부담스러워졌어. 봐, 손 떨린다. 갈색 리본이라도 지금 당장 돌려줄까? 누구한테 받은 건데?

아이오네 18 아~ (착한 사람에겐 제가 무르다는 걸 확인사살 받은 기분이다. 심술이 비죽 올라오긴 했으나 그뿐이다. 시험치는 동안은 얌전히 살기로 했지 않나.) 좋아하는 걸 닮고 싶어서. 다들 그렇지 않으려나. 네가 흙이길 바란 것도 그거 아냐?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다. 다리를 조금 더 힘차게 달랑거리면 가지가 조금씩 흔들린다.) 개구리심장이네~ 괜찮아. 네게 아예 준 것도 아닌데. 시험치러 올 때 받은 거야. 굳이 따지자면 마을 전체려나. 너도 올 때 받은 거 없어? 기원하는 부적 같은 거.

유진 15 좋아하는 건 닮고 싶지. 난 그런데 굳이 고르자면 숲속지기가 되는 쪽이 좀 더 꿈에 가깝긴 했어. 그런데 내가 흙을 좋아한단 말 했던가? (가지가 흔들리면 겁 집어먹어서 눈 커진다. 엉덩이 뒤로 밀어 기둥 쪽에 조금 기댔다.) 난… 딱히 없었는데. 애초에 마을에 따로 인사를 하고 나오진 않았어. 그랬다가 못 돌아가면 찝찝하잖아.

아이오네 18 그건 나도 그래. 태어나자마자 정해져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만. (으쓱) 네가 오코스한테 배웠어야 했다며. (겁 먹은 모습에 키득거린다.) 모호한 끝은 추모조차도 할 수 없는데 말이지. 은근히 매정하네.

유진 15 넌 바로 알았어? 난 학교 갈 나이가 될 때까지도 내가 숲속지기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눈치도 빠르고 여러모로 명석하구나. (말에서 유추한 점을 이르는 거다. 가볍게 덧붙였다. "아는 사람 중에 흙을 쓰는 마법사가 있었어.") 추모하길 바라지도 않아. 애초에 마을 사람들과 그렇게 긴밀한 사이도 아녔어. 넌 아닌 것 같으니… 리본은 내려가자마자 돌려줄게. 앞으론 남한테 빌려주지도 마.

아이오네 18 (그냥 웃고만 만다. 어떤 이상은 영원히 박제된다.) 흐응~... 네 누나 이야기겠네. (마을 사람과 사이가 그럭저럭인데다가 말하는 사람은 한명만을 가리키니. 고개를 기울여 바라본다.) 왜 네가 화났어?

유진 15 응. 누나 이야기. (그러다가 한참 말 없다. 물결치는 고동색 머리카락을 따라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딱히 화난 것까진 아닌데. 기원하는 부적이라며. 빌려주기라도 했다가, 네가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아이오네 18 (있‘었’다라. 침묵에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작게 흥얼거린다.) 그럼 내 능력이, 가치가. 거기까지였단 거겠지. 부적이라고 준 것도 아닐걸. 머리 좀 묶으라고 준 거지~ (둥글게 휘어진 채 바라보던 시선이 다시금 앞을 향한다.) 유진. 부적처럼 물질적인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마음이 중요한 거지.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니까. 그런 거 없다고 죽지도 않고. 있다고 해서 안 죽는 것도 아니지. 단순히 그뿐인 이야기.

유진 15 그래, 마음이 중요한 거지. (네 말 그대로 입안에서 굴렸다. 평범한 말인데 발음이 어색하다.) 난 미신 같은 것 잘 안 믿어, 아이오네. 그게 날 더 약하게 만들 것 같거든. 그러니까 부적 떼어놓지 말라는 건… 정말 거기에 매달려서라기보단, 마을 사람들이나 내 마음을 헤아려달란 뜻에 가까운 거지. 넌 안 그럴지 몰라도 남겨진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의미 부여를 해. (어깨 으쓱이며 분위기 환기한다.) 이 시험이 정말 우리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아이오네 18 장례가 산 자를 위로하기 위한 문화인 것처럼 말이지. (버려진 것 또한 의미부여에 애쓰기 마련이다. 어느 쪽이건 체념하고 순응할 때를 찾는 것이 더 나은 일이고. 불가능한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낫다. 다디로 가지를 감싸듯 잡고는 뒤로 훅 넘어간다. 달랑달랑. 팔까지 축 늘어뜨린 채다.) 아니라고도 할 수 있고 맞다고도 할 수 있지. 평가당하는 가치는 운이야. 어쩌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고 말겠다는 욕망 같은 거.

유진 15 …! (네가 중심을 잃고 떨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급하게 손을 뻗었으나 한발 늦었고, 상대는 대롱대롱 매달린 채다. 놀란 가슴을 달래려 크게 심호흡한다.) …미리 말 좀 해주면 안 돼? 너 여기서 떨어지는 건 줄 알고 놀랐어. 다리를 묶어둔 것도 아닌데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놀랐잖아. (마른 세수 한다. 기댔던 등이 앞으로 쏠렸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다.) 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살아남기 위해서.

아이오네 18 아하하~ (놀란 눈이나 급히 뻗어지는 손이 천지가 뒤집히는 순간에 함께 잡힌 탓에 웃음을 터뜨린다. 남의 심장을 곤두박질치게 하고서는 마냥 즐거운 눈치다.) 그래볼까 싶긴 했었지. (고민없는 진솔한 답이다.) 못할 것 같긴 해.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으면 사는 내내 숨이 막힐 것 같거든. 땅에 묻혀본 적 있어? 그런 느낌일 거야.

유진 15 못됐어…. (투덜거린다. 웃는 것이 얄미워 허벅지 쿡 찌른다.) 아무래도 살면서 땅에 묻혀볼 경험이 많진 않지. 없어. 아르부스토에서 죽음은 곧 거름이니, 다소 은유적이네. 꼭 죽지 못해 사는 것 같고. 그럼 우리는 둘 다 탈락인가? 큰일이다, 땅속 지하에서 만나게 생겼어.

아이오네 18 알아. (머리에 피가 몰려서 가지를 한 손으로 잡고 올라오려다 다른 손으로 휘적휘적 내쫓는다. 끄응. 벌개진 얼굴로 어지러운지 가지 잡고 가만히 있는다. 이어지는 네 이야기에 찡그렸던 얼굴인 채로 웃느라 얼굴이 이상하다.) ...그렇게까지 안 하면 죽는 결말이라니 참. 외롭지 않고 좋겠네.

유진 15 일으켜 세워줘? (가볍게 묻는다. 굳이 먼저 실천하지 않은 것은 …역시나 나무 위가 여전히 위태롭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네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느라 같이 이상한 표정이 됐다.) 네 외로움은 내 것과는 다르다고 했었잖아. 그런데도?

아이오네 18 웃음부터 제대로 참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흘겨보곤 혼자 올라온다. 어지러움을 달래려 눈을 감는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유진 15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네 표정이 웃겼단 말이야. 난 나름 참으려고 했어. (변명하듯 대꾸한다. 올라오는 것까지 보고선 좀 안심했다.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그러니까 없는 것보다 겨우 나은 존재라는 거지, 내가.

아이오네 18 예에...... (믿음이 요만큼도 없는 무성의한 대꾸다. 어지러움이 가실 때쯤 묶어둔 것은 끝자락에 달랑거려 산발이 된 채로 고개를 돌린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볕과 같은 눈이 보인다.) 달래지 못하고 동질감을 느낄 뿐이니까. 같지 않음에도 빗대고 동정하는. (시선을 거둔다.) 너나 나나 자라려면 멀었네.

유진 15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한데도 찰나의 마주침에… 입을 그대로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금색 눈 실컷 보았으면서도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한참 뒤에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마법사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 (틈.) 10년 채울 거지, 2차 시험까지. 그럼 그때는 정말 자란 채로 만날 수 있어.

아이오네 18 (눈을 감고 다리를 산들바람에 맡겨 흔든다. 공백을 낮은 흥얼거림이 채웠다.) ...... (누구나 외롭다. 그러나 고독이란 늪에 발을 담그고 나갈 노력하지 않는 이는 상대적으로 적기 마련이다. 제 처지를 동정하면서 어느 곳 하나 발 디딜 곳 없다 느끼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그래, 누구나 그래.” 그렇지 않음을 이 자리에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그것이 답인양 군다.) 채워? (짧은 반문. 이내 웃는다.) 그때까지 죽지 말아야겠네. (주어는 없다.)

유진 15 편지할 거야? (모든 게 끝나고 나니 사소한 것들이 궁금해진다. 남은 시간이 짧아 대신 물었다.)

아이오네 18 응. 마을로 돌아가면 시간도 많을 테니까.

유진 15 네가 그런 걸…… 귀찮아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흐리게 웃는다.) 아니라니 다행이다. 답장을 못 받으면 꽤 섭섭할 것 같았거든.

아이오네 18 (맞는 말이다. 어떤 때에는 달가워할 테고 어떤 때에는 성가셔야 할 성미가 맞기에.) 표정이 왜 그래.

유진 15 약간 불안해. 십 년 동안 못 만난다는 것도, 앞으로 그만큼 기다려야 한단 것도. 마음이 달아 버리네. 살아남은 걸 온전히 즐기는 방법을 모르겠어.

아이오네 18 네가 잘하는 걸 해. 사람을 많이 만나면 좋겠지. 여관을 겸한 주점 같은 거. 듣다보면 하고 싶은 게 생길지도 모르지.

유진 15 넌 항상 방법을 듣는 것에서 찾더라. (틈.) ……잘하는 거라고 해도, 내가 해먹고 사는 것과 정말 파는 것은 너무 차이가 크지 않아? 과대평가야.

아이오네 18 듣는 것밖에 아는 방법이 없으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양 대꾸한다.) 할 생각이 없다면야.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네 몫이야.

유진 15 날 괴롭히는 말투야, 그거…. (괜히 눈썹 팔자로 휜다. 울상에 가까운 얼굴이 됐다.) 난 너처럼 강하지도 않고, 실패가 무섭거든.

아이오네 18 (검지로 양쪽 눈썹 끝 올려준다. 이상한 얼굴...) 음~... 실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유진 15 ……… 빈털터리가 되기? (하지만 생각해보기를, 그건 지금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넌 뭐 하고 지낼 거야.

아이오네 18 주머니가 비면 편지해. (미소를 보고 가벼이 답했다.) 글쎄. 마을에서 전처럼 지내겠지. 농작물을 기르고, 덫을 놓고, 하릴없이 거닐면서.

유진 15 날 철면피로 키우는구나. (느리게 고개 끄덕였다.) 돌아가면 안아달라는 말은 해봐. 뛰어들어서 안기는 게 아니니까, 멍은 안 들지도 모르잖아.

아이오네 18 나도 그렇게 자랐거든.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모든 건 시기가 존재해. 필요없어.

유진 15 널 닮는 건 좋은 일이네. 노력해 볼게. (두 팔 벌리고 쳐다본다.) 그럼 난 안아줘도 돼? 너한테 필요 없는 건 알아. 내게 필요해서 그래….

아이오네 18 어리광쟁이. (그러나 한 걸음 내디뎌 안는다. 등에 닿은 손은 느리게 네 뒷머리를 쓰다듬는다. 약간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고서.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준다.) 괜찮을 거야. (무엇이?)

유진 15 내가 그런 편인 거 진작 알았잖아. (등 세게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채로 웅얼댄다. 다소 낙관적인 바람이다.) 모든 게?

아이오네 18 응. (가진 천성조차 다르니 그에 기대를 품어보게 되는 것이다. 저와는 다르게 잘 자랄 것이라고. 등을 토닥인다.) 전부.

유진 15 난 어떤 말이든 쉽게 믿는 편이지만, 네 말은 조금도 의심 안 해. 넌 우리 누나랑 닮은 점이 하나도 없거든. (느리게 몸 떼어낸다. 시선 맞췄다.) 이왕 어리광부린 거, 조금 더 바라도 돼?

아이오네 18 신뢰를 잃으면 닮아버리겠네. (가벼운 우스갯소리와 함께 바라본다.) 말해.

유진 15 그러지 않게 주의해. (음.) 보고싶을 거라고 말해줘.

아이오네 18 외로움도 많이 타. 손도 많이 가고. (내리깔았던 시선이 올라온다.) 보고 싶을 거야. (어떤 순간에는 분명. 변덕쟁이라 할지라도.) 10년 잘 버텨.

유진 15 그만 뭐라고 해. (조금 툴툴댔다.) 너도, 꼭 다시 만나.

아이오네 18 (키득거린다.) 응. 잘 가, 유진.

아이오네 편지에도 적어뒀으니 유진이 맛있는 걸 내어줄 거야. 나 대신 즐겨줘.

야영을 하다보면 육포로 허기를 달래야 할 때가 있는데.그럴 때면 네가 해준 음식이 생각나. 이래서 상인이 교역을 할 때면 요리사를 따로 고용하는 걸까. 식당은 열었을지 모르겠네. 네 음식이라면 분명 장사가 잘 될 텐데.

열었다면 망하진 않았을 거야. 규칙이 있으니 찾아가진 않을게.

대신 이 아이한테 맛있는 걸 좀 줘. 나 대신 맛있게 먹어줄 거야. 아. 딸기는 안 돼.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더라.

유진 소포가 무겁지. 미안해.

왜 야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게다가 보통 편지는 안부 인사로 시작하지 않아? 네가 실수로 잊은 것 같아서 답하자면 난 잘 지내, 고마워. (빼먹지 않은 거 알아.)

식당은 곧이야. 괜찮은 곳을 발견해서 한참 공사하는 중. 우리 마을은 꽤 외진 곳에 와서 출장 비용을 두 배로 받는다나 뭐라나. 덕분에 내가 직접 손대야 할 게 많아. 망치에도 손을 두 번이나 찧었지. 네 응원은 축복으로 생각할게.

역시 만나고 싶다. 보고 싶어. 아쉬운 대로 쿠키를 들려 보내. 구우면서 생각한 건데, 네가 뭘 특별히 좋아하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 말한 적 없지? 초콜릿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네. 까마귀에게는 호두 파이를 먹였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랑을 가득 담아, 유진.

아이오네 보기보단 가벼우니까. 힘내줘. (손바닥에 올라오는 크기의 까만 자갈이다. 매끄럽게 생겼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 전에 네가 준 쿠키는 잘 먹었어. 꼬맹이들도 좋아하더라. 이제 식당을 열었겠네. 망치질도 익숙해졌을 테고, 손도 나았을 테지.

해가 떠있을 때 항상 마을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야영 중이었던 이유. 어쩌다보니 지금도 야영중이네.

이건 하루 전에 머물던 마을에서 산 거야. 거긴 마음을 다스릴 때 돌을 만진대. 촉감이 좋더라.

유진 …무화과 하나로는 안 될까? 타르트는 어때.

오랜만이네. 답장이 늦었어. 넌 잘 지내? 꼬맹이들은 또 누구고. 정착할 생각 없이 계속 돌아다니는 거야?

생각보다 손님이 꽤 있어. 점점 바빠지고 있지만, 그만큼 일도 손에 익었고. 설거지로 생긴 습진에는 모래미꾸라지의 뼈를 갈아 넣은 연고가 좋단 사실도 터득했지. 네겐 별 쓸모 없겠지만, 하나 보내줄까?

네 말대로 시도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빈털터리가 되진 않을 것 같으니, 빚진 셈 칠게. 소원 하나 달아두도록 해.

선물도 마음에 드네. 적당한 걸 돌려주고 싶은데 소포가 가는 동안 상하지 않을 음식을 고르는 게 쉽지 않아. 이번엔 무화과 잼이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너를 생각하며, 유진.

아이오네 유진에게 다녀올 때면 털에서 윤기가 나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이번에도 잘 다녀와.

나쁘지 않아. 세상은 넓어서 처음이라고 칭해야 할 게 많거든. 돌아갈 곳은 있으니까. 가끔 마을에 돌아가고 있어. 꼬맹이들은 응. 가족이 없는 아이들. 돌아다니다가 주웠어. 덕분에 마을이 조용하지 않지.

보내준 무화과 잼은 잘 먹었어. 빵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폐허에서 지내는 중이라 구할 방도가 없었어. 그냥 먹어도 맛있더라. 지금 같이 있는 아이가 널 궁금해하길래 이웃 나라 왕자님이라고 해놨어. 속은 것 같아. 자기 이름을 적으라고 성화네. 얘 이름은 샐비어야. 다홍색 머리가 인상깊지. 귀엽게 생겼다고도 적어달래. 육아는 마을의 몫인데 이럴 때면 피곤해져. 얘도 게테마로 갈 테니 우리의 재회가 더 먼저겠지만. 혹 만나게 되면 적당히 대꾸해줘.

소원이라. 어려운데. 생각해볼게. 정 안 되면 유명해져서 찾아가도 못 먹을 유명 요리사님의 식당 예약하기. 이런 걸로 쓰면 되니까. 쉬엄쉬엄 해. 골병들걸. 가끔은 여행도 다니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즐겁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거든.

이곳은 폐허지만 붉은 줄기에 핀 겹꽃이 아름다워. 밤이면 등불벌레가 떼를 지어 날고. 무덤도 많다는 게 문제려나. 유령도 나온대. 붉은 꽃을 동봉할게. 이번에는 네 인사를 쓸까.

너를 그리워하며, 아이오네.

유진 너 혹시 술도 마셔? 음주배달은 곤란하긴 한데.

내가 우리 누나한테 주워졌다는 이야기 했던가? 어련히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잘 대해줘. 어린 나라고 생각하고. 키우는 거 잘하잖아.

이웃나라 왕자님 생각이 짧았네. 잼만 먹으면 꽤 달았을 텐데. 이번엔 훈제 켈피와 라즈베리 코디얼 한 병을 보내. 요즘 레스토랑에서 가장 잘 팔리거든. 코디얼엔 위스키가 들어갔으니 샐비어는 주지 말고.

내가 렉 좋아하는 거 알잖아. 쉬엄쉬엄 한다는 게 쉽지 않아. 게다가 내가 생각을 비우는 것에 썩 재능이 없는 편이라는 걸 근래 깨닫고 있거든. 여행을 떠났다간 더 정신이 사나워질걸. 붉은 꽃밭도 등불벌레도 즐기지 못할 거고. 여행 이야기는 네가 많이 들려주면 안 돼? 참고로 네가 보낸 꽃은 말려서 벽에 걸어놨어. 색이 무척이나 예쁘더라.

유령을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이 뒤로 무언가 적었다가 지웠다.)

샐비어와 아이오네가 보고 싶은, 유진.

아이오네 참 덧없어. 좋은 소식만 전해주는 게 좋겠지. 이걸 전해줘. (한손에 잡히는 크기의 타원형의 유리다. 들여다보면 흐릿하게 주변의 사물이나 자신이 비칠 것이다.)

내가 키우는 걸 잘했던가. 뭔가를 키워본 적은 없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맡겼어. 훈제 캘피도 그쪽에 맡겼고. 걘 이제 거기에 있거든.

코디얼은 맛있었어. 이걸 마시니까 주조장에 가보고 싶어서. 지도를 따라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고 있지. 오랜만에 한껏 취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코디얼이 몇 방울 흘렀는지 옅은 향과 액체가 떨어져 남은 자국이 있다.)

일벌레라니.

폐허 근처에 유리호수가 있었어. 주변에는 수정바위가 곳곳에 있어서. 다른 게 비친 거지. 유령을 보려면 꿈에 나타나길 소망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름답기는 하더라. 달빛이 내릴 때 특히. 눈이 좀 아팠지만. 유령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할게. 호수를 조금 떼어왔어. 갔던 곳을 또 가게 될 줄이야.

유진 25 (숲에서 무리 모인 곳으로 느리게 돌아온다.) 역시 내가 할일이 없네.

아이오네 28 무력감만큼 사람 등을 쉽게 떠미는 건 없지. (돌아오는 이를 보며 검지와 중지로 가위를 만들어 가벼이 흔든다.)

유진 25 날 분석하려고. (상대 인지하면 괜히 크게 심호흡했다. 양심이 쿡 찔린다.) …바위도 부수는 애가 왜 그걸 골랐어. 다친 곳은?

아이오네 28 (앞서 나간 것에 이제와 양심이 아픈 것은 아닐 테고, 기묘한 호흡에 고개가 기운다.) 두들겨 맞으면 이런 기분일 것 같다? (보이는 곳은 멀쩡한데다가 목소리도 태연하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잘못했어?

유진 25 (쓰게 입술 달싹인다.) 미안해. 그냥 비위를 맞춰주는 게 제일 빠르게 끝날 것 같아서. 너 어디 다쳤는데. 겉보기론 잘 모르겠어. 로브로 싸매고 계셔서 도통…. (또 말 멈춘다.) 지금 고해성사 시간이야?

아이오네 28 피는 흘리지 않았어. (치료할만한 상처는 아니란 뜻이다. 구태여 로브를 걷어올리는 행위의 귀찮음을 넘기기로 한 것이고.) 네 반응이 평소랑 달라서. 찔리는 구석이 있나 싶었지.

유진 25 쓸데없이 눈치 빠르게 굴지 말고, 적당히 넘어가 줘. 들어서 유쾌할 것도 없어. (그럼 대신 주머니 뒤적거려 연고 꺼낸다. 손바닥 위에 올려줬다.) 피를 흘린 다음에는, 죽지는 않았다고 대답할 거야?

아이오네 28 네가 티를 내잖아. 티가 나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차에 손바닥에 올라온 것을 본다. 거절하기보다는 후드의 주머니에 넣었다.) 하하. 상처에 따라서 그렇겠지. 죽지만 않았다고 안도하는 삶을 살기엔 불편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라서. 늙어 몸이 불편해지면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단 말을 왜 하는지 알겠더라.

유진 25 합의해, 네가 날 잘 아는 걸로. (눈만 굴려 내려다본다. 금색 눈에서 지팡이로 시선 떨어진다.) 넌 말을 항상 담백하게 하는데, 왜 그게 더 걱정이 될까. 이런 이야기는 편지에 없었던 것 같은데.

아이오네 28 그래. (가위로 졌지만. 그 말은 삼킨다. 토라질 것이 뻔했다. 네 시선을 따라 옮기면 그곳엔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좋은 이야기가 많으니까. 전한다면 그런 이야기가 좋잖아. 여행 가는 것도 못하겠단 식당 주인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만 적었을 뿐이지.

유진 25 그 식당 주인이 다른 이야기도 전부 듣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천천히 대꾸한다. 약간 불만스럽다.) 공백은 날 더 불안하게 해, 아이오네. 행간에 네가 비운 것이 무얼까 항상 골몰하지. 내 상상은 네 현실보다 과도할걸.

아이오네 28 새롭게 찾은 장례 문화에 대해서, 발을 헛디뎌 오고가는 일이 어려워지는 것. 네게 이름을 알려준 아이가 다시는 마을에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고. (느리게 이어진다. 억지로 늘린 무언가처럼.) 그런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면 추측이 번지는 건 막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뿐이다.) 네 상상이 해결될 거라 생각해?

유진 25 (귀 기울여 듣는다. 침음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끝내 눈꺼풀 내렸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부드럽고, 모진 구석이 없다.) 날 무력하게 하는구나, 이번에도. (그런 답이다. 수긍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나는 네게 위안이 되지 못해?

아이오네 28 ...... (입을 몇번 달싹였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진 않는다. 다문다. 생각해본 적 없다. 제게 위로와 위안, 안식 따위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그에 가장 가까운 건 의식을 밑바닥에 내던져 잠이 드는 거다. 이제는 자라 어엿한 청년이 된 이의 얼굴을 눈에 담는다.) 네가 만드는 요리를 좋아해. 날아오는 답신도. 그건 위안과 다를까. (사소하고 자잘한 것. 어쩐지 이건 네게 답이 되지 못할 거 같다. 그는 다시 침묵했다.)

유진 25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간신히 대꾸한다.) …될 수도 있겠지.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적당히 속인다. 그러지 않고서는 참담함이 서릴 것 같아서. 그간 자라며 배운 것 중에는 거짓말도 있고 대상이 꼭 타자가 되리란 법도 없다. 다시 시선 맞췄을 때는 시원스럽게 웃는 낯이다.) 보낸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뭐였는데.

아이오네 28 (변화를 본다. 유진은 아이오네가 이야기해주지 않노라 성토했으나 아이오네는 유진 또한 다를 바 없다 여긴다. 네가 보인 표정, 달라지는 숨소리, 오가는 음, 작은 손짓과 같은. 아이오네는 매번 읽어냈다.) 네가 생각하는 위안은 뭐야.

유진 25 의존하는 마음. (진창에 머리통을 처박고도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하게 하는 것들. 이를테면 그에게는 검고 매끄러운 자갈이나 색이 바랜 겹꽃, 조각난 호수 따위. 위안이라 표현했으나 본질은 불가피성에 가깝다. 왜 사람은 계속 욕심을 낼까. 느리게 대답한다.) 혹은 네 삶에 결단코 필요한 것.

아이오네 28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는 주장을 들은 적 있어. (네 이야기를 곧잘 하던 이를 떠올린다. 앞으로 더 성숙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후원이라는 명목을 가지고자 했었던. 짧게 웃는다. 확실히 들은 바대로 친구-그는 계속 아니라 우겼지만-가 맞구나 싶어서.) 부정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답했지. 사람을 망치는 것 또한 사람이라고. (그 결과가 이 자리에 있다.) 네가 안타까워, 유진. (하필 잡은 것이 이런 거라서. 닮지 못한 것을 닮았다 여기게 되어. 불확실한 것을 약조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렇게 하겠다고해도. 너는 믿지 못할 테지.

유진 25 망쳐도 되는데, 너라면. (농담조로 대꾸하지만, 공언 아님을 모르는 사람 없다. 애초에 더 망칠 구석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그 주장 누가 했는지는 뻔히 알 것 같아서 대꾸했다.) 걘 내가 위협이 된다더라. 너한테도 그래? 그러니까 내 말은, (틈. 묻는다.) …필요하진 않더라도 내치지는 않을 거지. (믿지 못할 것이란 대답이 된다. 선견이 편협하다.)

아이오네 28 (푹 뒤집어쓴 로브의 인영은 물가 앞에 지팡이를 세워 의지한 채 웅덩이를 내려다본다.)

유진 25 네 결정을 듣고 싶어. 그리고 조언도.

아이오네 28 (한참 파문 하나 없는 수면을 바라보다 묻는다.) 조언?

유진 25 이전에도 물웅덩이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을 것 같아? 2차 시험을 보다가, 올빼미 숲에서.

아이오네 28 응. (고민하지 않는다.) 소문은 일정량의 진실을 포함해. 그걸 기반으로 불어난 거니까. 발견했지만 가지 않은 이들이 있어 구전되어 왔겠지. 우리는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고. (이 순간 그렇게 되었다. 전해져오는 감각은 낯선데도 그리 멀리서 느껴지는 것 같지 않다.) 미련을 품었구나.

유진 25 희망이라고 불러. (다소 다급하게 말 고친다.) 제발, 아이오네… 내가 널 믿는 것을 알잖아.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가장 신뢰하는 상대에게.)

아이오네 28 (낮은 조소. 후드 아래 가려져 보이는 것은 올라간 입꼬리다.) 내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유진.

유진 25 가도 된다고 말해줘.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응? (내려다보는 시선이 애절하다. 고작 입매밖에 보지 못하면서도, 시선 떨어지질 않았다.)

아이오네 28 (아이오네는 이 순간 옅은 환멸을 느낀다. 하나씩 내려앉는 것이 존재감을 가지고 무게로 내리누른다. 동시에 지독한 외로움이 찾아온다. 바람. 안타깝게도 닮은 것이 있노라고. 생각보다도 많이. 그들이 주는 것이 하나씩 뒤섞여 혼재한다. 무미건조한 선고다.) 가. 저곳엔 네가 원하는 게 있을 테니. 밀어줘?

유진 25 (환희와 탄성, 희열이 그 문장으로부터 타고 번진다. 이 선고는 그에게 확신이 된다. 말뿐인 명제라도, 아주 오랫동안 그를 지탱하게 될 것이다. 눈꺼풀을 내리깔아 녹색 눈에 오른 열을 내렸다.) 이오.

(허락도 구하지 않고 지은 애칭을 부르는 일은 많이 없었다. 음절이 짧게 떨어지고, 그와 동시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함께 가지 않을 테야?

아이오네 28 (처음 불려보는 애칭이다. 시험을 치르기 전 그를 칭하는 것은 당연 ‘아이오네’라는 이름이었고, 누군가는 ‘글러먹은 놈’, 혹은 ’아이온’이라 불렀다. 시험을 치를 적에는 앞글자만 따다 부르는 ‘아이’가 성행했고. 무의미한 사실을 머릿속에 나열한다.) ...... (시선이 권유에 꽂혀있었다. 도통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혹은 고민하는 사람처럼 그것도 아니라면.) 네... (미련이란 말을 혓바닥 아래로 숨긴다.) 희망에 매달리는 일을 같이 하자는 건가.

유진 25 그건 내 몫임을 나도 알아. 게다가 너는… 내가 바라는 것을 온전히 들어준 적이 없잖아. (담백하게 대답한다. 여전히 손을 거두지 않은 채로, 시선이 꽂혀서. 비록 그것이 그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지 못했어도, 여전히 그에게는 소중한 이들이 있다. 그러니 이건 그저 어리광이다.) 가면 더는 편지를 못 받으니까. 네가 여행하는 소식조차도 들을 수 없고, 좋아하는 술을 보내주지도 못할 테니까.

아이오네 28 원하는 말을 해줬음에도 말이지. (사랑이란 죽음은 닮았다.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내내 휘둘린다는 점에서. 아이오네는 깊은 애정 속에서 살아왔으나 애정을 받아들이질 못했다. 화병에 옮겨담은 꽃이 줄기끝이 잘리지 않아 물을 빨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니 제게 쏟아지는 것에 무던했다. 미약하게 스며들 때가 있었으나 온갖 자극에 익숙해진 뒤로는 때때로 이것이 약에 취한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러니 내내 어리광 부릴 줄밖에 모르는 이가 이미 죽어-아이오네가 여기기엔 그랬다- 사라졌음에도 내내 사랑해마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게 오는 것이 않아 그럭저럭 괜찮았다. 되려 흥미롭기까지 했으니.) 그 모든 것을 뒤로 할 정도로 사랑을 택하는 널 몇이나 축하할까. (그게 좀 가엽기도 했다. 주변을 받아들인 다른 꽃과는 다르게 제가 가진 물이 없다고 토로하는 것이. 아이오네는 약조하지 않는다. 유진이 원하는 온전함을 자신이 줄 일이 있을까. 글쎄. 어려운 일일 터다. 의지하여 걸었던 지팡이를 놓고 그 손을 잡는다. 정처없는 삶이 돌연 죽는다해도 그것은 네 몫이 될 것이다. 자초한 것은 너다.)

유진 25 (입꼬리 당긴다. 미소 지은 채다. 기실 유진은 아이오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그의 사랑이란 것은 죽어서도 도통 마를 일이 없는 감정인 한편, 아이오네는 모래사막을 닮았으므로. 따라서 지팡이가 바닥을 나뒹굴 때, 유진이 느끼는 것은 기대가 채워졌다는 충족감보다는 ―대단히 보잘것없게도― 단순한 고양감이다.) 그런 것에 일일이 상처 입을 나이가 지나버렸어. 왜, 도무지 축하해줄 마음이 안 들어?

(안쓰럽거나 가엾어 보인다면 그것으로도 좋다. 손잡은 채로 부드럽게 당긴다. 언제라도 놓고 떠날 수 있을 정도의 세기다. 언젠가 아이오네가 지팡이를 놓았을 때 그가 겨우 그 허리를 붙잡으며 감각한 것은 위태로움과 몰이해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약한 기쁨을 느꼈다.) 숲에 다시 온 이래로 말이야. 보고 싶었다는 말을 내가 아직 안 했지.

아이오네 28 축하할 일은 아니지. (찬란했던 이의 얼굴과 안식을 찾아 도망친 이. 그리고 그의 길잡이. 그들은 축하받아 마땅했으나 곁에 선 이의 것은 모호하다. 망령에 사로잡힌 이와 무엇 다를 게 있는가. 고개를 든다. 후드 끝자락에 설핏 보이는 낯은 만족이라 칭할 수 있다. 투정이 먹힌 이의.) 파악된 기분인걸. (응석이 이어지는 것에 뱉는 말이다.)

유진 25 그럼 하지 마. 바란 적 없으니까. 그냥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약조를 바라지 않으니 곧 소망의 나열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미련이다. 청득한 것이 기쁘다는 이유로 멍청하게 내뱉으나, 그 또한 안다. 영원과 모래바람을 불러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천천히 뒷걸음질치면 시선에 두 사람 몫의 지팡이가 걸린다.) 칭찬으로 들려.

아이오네 28 하하. (메마른 웃음이다. 너와 나는 외로운 인간이다. 주는 것을 받지 못하고 자신을 동정하며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나쁜 버릇이 습성이 되었다. 너는 네게 닿는 애정을 돌보지 않았고, 나는 애정이 내게 닿는 걸 이해하지 못했으니. 우리는 외로운 인간이나 같을 수 없었다.) 대용 같네. (어울리지 않는 것을 곁에 세우려 하는 것조차 동정해야 할까. 아이오네는 유진이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 시기, 철이 들고 성숙해지는 날이 올까 잠시 상상한다. 희망이 희망으로 존재하는 순간부터는 어쩌면.) 영악하단 이야기야.

유진 25 응. (부인하거나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간결하게 응답하고 나면, 그 자신도 아주 새삼스럽도록 상처 입어 눈꺼풀 내리깔았다. 와중에도 부드러운 입꼬리가 사그라지는 일 없다.) 그게 그거지, 네가 받아줄 거란 뜻이잖아.

(대용인 것을 알아도, 결단코 채워지지 않을 고독임을 알아도, 내가 전하는 애정이 가닿거나 스며들지 못하더라도 한동안은 변덕을 부려줄 테니까. 그러니 도리어 축하 따위보다 값싼 연민이 달갑다. 원하는 것이 건전했던 적도 없다.) 물이 차가울까?

아이오네 28 (아이오네의 변덕이 새삼스레 솟아나 뒤틀리지 않는 한 유진의 어리광에 지고 들어갈 것이다. 그것이 꾸며낸 것이라한들 자신이 받지 못했던 걸 애써 내어주는 일이라. 속으로 조소한다. 자기연민이 이토록 깊을 줄이야. 조각조각이 나 존재하는 기분이다.) 잔인하네. (단조롭다.)

(보이는 것은 없되 들려오는 것만 있는 물은 겉보기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감기 걸릴지도. (입술이 시퍼렇게 변했던 걸 떠올리자 짐짓 꺼리는 얼굴이다.)

유진 25 내가 널 상처입힐 수도 있던가? (언제나 아이오네는 넘겨줄 뿐 받지 않았다고 사내는 생각했고, 관계의 지평도 그즈음일 줄로 알았다. 어떠한 감정도 느끼기 전에 툭 묻는다. 추후에야 생각하기를 일반적인 의문은 아니다.) 인간 세계에도 스카치가 있기를 바라지. 넌 정말 걸릴 것도 같거든.

아이오네 28 난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아니니까. 걔네도 깎여. (이 너머에는 게테마도, 바람도, 지하도 없다. 일러주고자 한 이야기는 영원히 비밀이 되어 사라질 것이고. 이곳에 남은 이들은 영원히 살아가겠지. 같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랬다. 들려오는 바 없으면 그저 잘 살겠거니 여기는 것과 같아서. 넘어가면 오롯한 이방인이다. 두 명의 이방인.) 네가 간호하겠지.

유진 25 영광이네. 유감이고. (답변을 듣자 너울거리는 감정이 기쁨과 슬픔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잘 모르겠다. 심장은 뛰었으나 세기만을 짐작한다. 뭍의 가장자리에 발을 걸치고서도 뒤는 돌아보지 않았고, 오직 아이오네를 응시한다.) 마땅하게도. 그건 내 권리야. (몸체가 뒤로 넘어가는 감각이 까마득하다.)

아이오네 28 아이오네는 이 순간 고민한다. 여전히 잡은 손은 언제든 뿌리칠 수 있는 힘이었다. 이대로 뒤로 무르면, 손을 놓아버리면. 네 표정은 상상되지 않는다. 너머로 가겠다는 선택 자체를 바꾼 건 아니었으나 어리광에 온전히 맞춰주기 싫어진 것도 있었으리라. 찰나에도 변덕이 들끓었다. 그리하지 못한 건 인간의 눈이 가진 힘일 터다. 변덕이 족쇄처럼 얽혀 이 땅에 자리할까 이해하지 못할 애정을 피해 내내 시선을 돌려왔다. 익숙한 모든 것을 내버리는 길. 이 순간마저 직시하는 그 눈에 결국 진 것은 이쪽이다.) ...욕심이 많아. (변덕이 가라앉는다. 앞으로 쏠리는 무게에 눈을 감았다.)

유진 25 알았잖아. (기어이 봄바람이 분다. 그게 좋아서 웃었다. 둔중하거나 가벼운 소리와 함께, 고독이 수면 아래로 침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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