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 track (상)
배룡
소재주의 (성폭력에 대한 묘사 있음)
short track (상)
복부를 향해 주먹이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기침이 터져나올 거 같았으나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쓰러지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주었다. 잠시 숙여졌던 몸을 꼿꼿이 폈다. 여전히 고개는 바닥을 보는 채다. 어깨에 손가락이 닿으며 꾹꾹 눌러댔다. 뒤로 완전히 밀리지 않도록 몸에 힘을 주어야 했다. 진영이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죄송하다는 말뿐이다. 죄송합니다.
진영의 대답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깨를 향했던 손이 진영의 얼굴을 향하며 뺨을 때렸다. 고개가 돌아갔고, 입 안에서는 피 맛이 느껴졌으나 돌아간 얼굴을 다시 제 자리로 돌리는 일이 더 급했다. 뺨을 두 대는 더 맞았다. 그 덕분에 얼굴이 부어오른 것이 느껴졌다. 원래도 피부가 약해서 남들보다 자국이 더 잘 남는 편인데, 이번엔 때리는 놈 손까지 매웠다. 아, 씨발 진짜 좆같게….
진영이 지금 처맞는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잘못 걸려서 그랬다. 눈깔을 싸가지 없게 떴다며 불려갔고, 진영은 내가 언제 니 보고 눈깔을 싸가지 없게 떴냐며 따지고 싶은 심정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라는 사과는 덤이었다. 하나도 안 죄송한데, 그냥 그게 규칙이라서 죄송하다고 했다. 선배한테 처맞을 때는 다 이유가 있으니 그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이라나, 뭐라나…. 하여간 운동한다는 새끼들은 이래서 안 된다. 대가리가 다 돌인데 잔머리만 존나 잘 돌아갔다. 지성인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예의 같은 것은 내려놓았는데 스트레스는 풀어야 하니까 그걸 자기보다 약자를 패는 방식으로 해소했다. 같잖은 이유를 붙여가며. 선배 된 도리로 후배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강약약강이었다. 코치님, 감독님한테는 설설 기면서 후배들한테는 꼰대짓도, 폭력도 멈출 줄을 몰랐다. 처맞기만 하면 다행인 정도기도 했으니까…. 아 이거 생각하니까 또 기분 더럽네. 아무튼, 배진영은 눈깔 싸가지 없게 뜨고 선배를 바라보았다는 이유로 삼십 분째 처맞는 중이었다. 원래 얼굴은 잘 안 때리는데 이 개새끼가 얼굴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덕분에 얼굴 반반한 배진영은 얼굴까지 처맞았다.
진영은 그냥 때리면 때리는 대로 이 악물고 버텼다. 피부는 약했는데 맷집은 강했다. 다행인가. 제가 맷집이 강하다는 것은 운동 시작하고 처맞아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평생 모르고 살아도 좋을 뻔했다. 진영보다 키가 작은 선배가 진영을 올려다보며 진영의 뺨을 툭툭 치고는 말한다.
“처신 잘해라, 내가 너 지켜본다.”
“네, 죄송합니다.”
그러곤 탈의실을 나갔다. 진영은 황급히 탈의실에 걸려있는 거울 앞으로 가 얼굴을 확인했다. 뺨이 새빨갛게 부어오르고, 생채기까지 나 있었다. 입술 터진 건 덤이었다. 아, 좆됐네…. 물론 이 좆됐다는 뜻이 뭐, 코치님이나 감독님이 알면 안 된다. 이런 뜻은 아니고. 코치님이나 감독님은 애들이 처맞든 말든 관심 없었다. 패서라도 말 잘 듣게 하라고 종용했다. 그 말이 선배들에게 권력을 쥐여줬고, 진영 같은 후배들은 얌전히 처맞다가 고참이 될 때쯤에 다시 후배들을 향해 폭력을 선사했다. 악순환이었다.
아무튼, 진영이 좆된 건 제 방의 룸메가 이걸 보면 난리 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늦어 아무도 없는 숙소 복도를 걸어가며 생각한다. 자고 있어라, 자고 있어라, 제발 자고 있어라…. 잘 안 쪼는 배진영이 조금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불이 꺼져있었다. 다행이지 않은 점은 걔가 안 자고 있었다는 거고.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진영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아…. 하는 낮은 목소리의 부름이 진영을 맞이했다. 진영이 퉁명스레 말했다. 너 왜 안 자냐. 내일 새벽부터 훈련인데. 진영이 말하자 답없이 진영의 손목을 잡고 방 안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고 방이 완전히 암흑에 잠기자 걔는 제 침대 옆의 보조등을 켰다. 그제야 조금 밝아진 방에서 걔 얼굴이 보였다.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진영을 살폈다. 진영은 이게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부어오른 뺨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걔 성질도 만만치는 않아서 고개 돌린 진영의 턱을 붙잡고 조심스레 저를 바라보게 했다. 아, 진짜…. 이래서 자고 있길 바란 건데.
“야, 용아, 나 존나 괜찮으니까 적당히 봐라. 뭐 처맞는 거 하루 이틀이냐? 별로 아프지도 않더라. 하여간 니 존나 유난….”
“…뭐가 안 아파. 그 선배 손 엄청 매운데.”
“…그 새끼가 니도 때렸냐?”
김용희 안심 시키겠다고 애써 웃으며 말하던 배진영 표정이 굳었다. 미친놈이, 김용희한테까지 지랄했다고? 배진영의 인상이 단번에 살벌해졌다. 용아, 왜 대답 안 하냐. 똑바로 말해. 그새끼가 니도 때렸냐고. 어디 맞았는데. 진영의 말에도 용희는 답이 없다. 그냥 진영의 손목을 붙잡고 제 침대에 앉힌 뒤 서랍에서 구급상자를 꺼낼 뿐이다. 진영이 계속 용희를 불렀다.
“용아. 야. 대답 안 해? 어디 맞았냐고.”
용희는 진영의 말을 전부 무시한 채 소독약을 꺼내 들고 생채기가 잔뜩 나선 피까지 작게 맺힌 진영의 얼굴을 소독하는 일에 집중할 뿐이다. 갑작스레 몰려오는 따가움에 진영이 움찔하자 상처에 고정되어 있던 용희의 시선이 돌아가며 진영과 눈을 맞추었다. 용희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많이 아파? 진영이 재빨리 답했다. 아니, 안 아파. 진영의 답에도 김용희는 이미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것이 뻔했다. 진영의 얼굴에 닿은 손길이 이전보다 더 느릿하고 조심스러워졌으니까. 용희는 다시 시선을 돌려 진영의 얼굴에 남은 상처에 집중한다. 야, 나 진짜 괜찮다고…. 진영의 말에도 용희는 답이 없다. 그래서 진영도 그냥 입을 다물고 용희의 손에 상처를 맡기고 멍하니 허공이나 봤다. 김용희 존나 빡쳤네…. 화 잘 안 내는 김용희는, 화나면 세 개의 단계가 있었다. 처음에는 웃었고, 그다음에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다음에는 일어나서 크게 웃었다. 근데 그것마저 안 한다는 건 김용희가 정말,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뜻이다. 배진영이 처맞고 온 날이면 김용희는 유독 말이 없어졌으니까.
용희가 진영의 얼굴에 연고를 살살 펴 발랐다. 이건 뭐, 닿는지 안 닿는지, 애매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러곤 그 위에 밴드를 붙였다. 진영아, 다 됐어. 어. 머쓱한 마음에 진영은 퉁명스레 답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용아.
“어디 맞았냐고. 내가 지금 세 번째 묻잖아.”
“…….”
“왜 대답 안 하는데? 씨발 너 왜 나한테 숨기냐?”
“그런 건 아니야.”
“그게 아니면 뭐. 어디 맞았냐고 묻는데 니 대답 하나도 안 하잖아. 지금 나한테 시위하냐? 뭔데. 그 새끼가 니한테 뭔 짓 했냐고.”
“별로 안 맞았어…. 너가 걱정할 정도 아니야.”
“구라치지 마.”
“진짜야.”
“씨발, 니 자꾸 나한테 구라치면 가만 안 둔다.”
진영이 인상을 팍 구기고 용희에게 말했다. 김용희가 말을 안 해주면 배진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괜히 허세 부렸다. 가만 안 두긴 뭘 가만 안 둬. 배진영은 절대로 김용희 못 이기고, 김용희한테 손 하나 못 댄다. 용희는 진영이 인상을 쓰든, 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진영아, 늦었어. 자. 내일 새벽 훈련이잖아. 그렇게 용희는 제 침대에 앉아있는 진영의 손목을 붙잡고 진영의 침대로 이끌었다. 김용희도 손은 매워서 잡힌 손목이 조금 아팠다. 그래도 티는 안 냈다.
결국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진영아, 불 끌게. 잘자. 진영은 퉁명스레 답했다. 어. 그러곤 한참을 있다가 다시 물었다. 용아.
“응.”
“진짜 말 안 해줄 거냐. 그 선배가 너도 때렸냐고.”
“진영아.”
“어.”
“늦었어.”
“…알았다.”
진영은 한숨을 쉬었다. 진영도 고집 센 편이었지만 용희도 만만치 않았다. 용희가 한 번 마음 먹은 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용희가 무엇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무조건 용희가 바라는 대로 된다. 그게 김용희니까. 그러니까, 용희가 진영에게 말해주지 않기로 정했다면, 진영은 절대로 용희에게서 답을 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제가 알기론 용희의 몸에서 상처를 본 적은 없다. 서로 벗은 모습을 몇 번을 봤는데. 그때마다 확인했지만, 김용희는 맞은 적 없다. 눈깔 싸가지 없게 뜬다는 이유로 배진영이 자주 불려가서 처맞을 동안 김용희는 상대적으로 덜혼났다. 선배들도 김용희한테는 크게 지랄 안 했다. 싸가지 없고, 눈 치켜뜨는 버릇 있고, 유망주 소리 듣고, 얼굴 반반하다는 이유가 있는 배진영은 반반한 얼굴로 어떻게 코치 꼬신 거 아니냐는 개같은 소문까지 달고 다녔지만, 같이 유망주 소리 듣고 얼굴 반반한 김용희한테는 다들 지랄 덜 했다. 애가 워낙 착하게 생기기도 했고, 실제로도 착해서 그런가. 아무튼 진영은 그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한테만 지랄하고 끝나면 좋지. 김용희 맞으면 저가 더 빡칠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김용희가 그 선배 손 매운 걸 어떻게 아냐고. 그 새끼는 겉으로 보기엔 좆밥이라 안 맞아보면 손 매운 거 모른다.
진영은 잠들 수가 없었다. 눈 위에 팔 얹어놓고 계속 생각해본다. 뭘까. 왜 김용희가 그 새끼 손 매운 걸 알까. 제가 알기론 그 새끼한테 김용희가 맞은 적은 없는데 어떻게 아는 걸까. 언제 김용희를 불러낸 걸까. 언제 김용희한테 손을 댄 걸까. 진영이 생각하기에 그 새끼가 김용희한테 손을 댄 건 확실했다. 김용희가 죽어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배진영한테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침묵하기를 택했다는 뜻이니까.
진영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용희에게로 향했다. 그러곤 곱게 누워있는 용희 손목을 낚아챘다. 야, 용…. 진영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진영이 용희의 손목을 잡자마자 용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뜨곤 손목을 빼냈기 때문에. 놀란 용희가 제 손목을 잡은 이가 진영인 것을 확인하자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 꼴을 모두 지켜본 진영은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분명한 거부반응. 배진영은 알 수 없는, 김용희가 혼자 품고 있는 경험에 대한 후유증. 용희가 머쓱하게 웃었다. 놀라서…. 너 자는 줄 알았는데. 왜 아직 안 자. 늦었다, 진영아. 용희가 애써 말을 돌렸다. 그 말을 하는 내내 배진영이랑 눈 한 번 안 맞췄다. 진영이 용희의 침대 위에 털썩 앉고는 고개 돌린 용희 쪽으로 다가가며 눈을 맞췄다. 그러나 다시 용희가 진영의 시선을 피했다. 기분 좆같네, 이거. 진영이 아랫입술을 씹어대다가 입을 열었다.
“용아.”
“…….”
“나한테 왜 말하기 싫은 건데?”
“너한테 할 말이 없으니까….”
“구라치지 말라고 했다. 니 반응이 지금 정상이라고 생각하냐? 내가 니 손목 잡은 게 몇 번인데 이제와서 이렇게 놀라는 게 정상이냐고. 무슨 일인데, 용아. 좀 말을 해 봐.”
“…진영아,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
“무슨 일 있었다는 거네. 근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는데. 너는 씨발 그럼, 내가 니랑 똑같은 일 당하고 오면 넘어갈 거냐? 니 지금 내가 얼굴 좀 처맞은 걸로도 이 난리 치면서, 왜 내가 니 일 아는 건 안 되는데?”
진영의 말에 용희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진영아, 그 선배가 너한테 다른 짓 했어? 용희가 다급하게 물었다. 진영이 답했다. 아니, 처맞은 거 말고 없는…. 진영은 말을 하다 말고 다시 생각한다. 맞은 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설마…. 진영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야, 용아, 너…. 용희가 고개를 숙였다. 진영이 용희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용아, 고개 들어 봐. 너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아냐. 아니야, 진영아. 그거 아니야. 아니야.”
“김용희, 씨발 구라치지 말고! 솔직히 말하라고. 용아, 좀….”
“진영아, 나 괜찮아.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응? 이런 일 운동하다 보면 다 있잖아. 별거 아니잖아. 다들 그렇게 살잖아. 어차피 선배 은퇴하면 볼 일도 없어. 올해가 마지막 출전이잖아. 그러니까 좀만 더 버티면….”
“가만히 있으라고? 니가 그런 일을 겪었는데 내가 가만히 그 새끼 출전하는 꼴을 보라고? 너 같으면 되겠어? 씨발, 너는 왜 말을, 왜 나한테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말해? 말하면 뭐가 달라져? 왜 너한테 다 말해야 돼? 내가 내 입으로 그걸 다 말하라고?”
“…….”
“…….”
“…용아. 난 그냥 못 넘어가. 처맞는 건 참아도, 이건 아니야. 항의할 거야.”
“진영아, 난 그냥 넘어갈 거야. 제발, 조용히 있자, 우리…. 두 달밖에 안 남았어, 우리 올림픽….”
“그 새끼 출전정지라도 시켜야 될 거 아니야! 넌 그 새끼랑 같이 뛰고 싶냐?”
“그 선배 협회장 아들이야. 우리 말 들어줄 리도 없고, 오히려 출전정지 당하는 거 우리일 수도 있어…. 나만 참으면 돼, 진영아. 나는 별로 안 맞았잖아, 다른 애들에 비해. 그러니까 맞은 걸로 퉁 치고 살면 그만이야. 진영아, 우리 올림픽 나가기로 했잖아. 가서 같이 메달 따기로 했잖아. 응? 나는 그거면 돼. 난 진짜 그거면 다 괜찮아….”
김용희가 고개 푹 숙이고 말했다. 진영은 김용희가 울기라도 하나 싶어서 조심스레 얼굴 잡고 들었는데 다행히 울고 있진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속이 끓었다. 차라리 울지. 울어서라도 풀지. 김용희는 인내심이 강해서, 참는 걸 너무 잘해서 제 감정까지도 꾸역꾸역 삼키는 게 익숙한 애였다. 진영과 눈이 마주친 용희가 웃어 보였다. 진영은 그 웃음이 곧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져서 그냥 용희를 안는 것밖에 못 했다.
용희와 진영의 꿈이 발목을 잡았다. 올림픽, 메달, 우승. 어릴 적부터 간절히 바라오던 것. 국대 자격을 얻고 올림픽에 출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훈련과 폭력과 폭언을 견뎌냈는지 모른다. 그깟 꿈 하나 때문에 부당해도 부당하다 말하지 못하고, 그냥 패면 패는 대로 맞았고, 욕을 하면 하는 대로 들었다. 그래도 진영에게 하나 위안이 되었던 점은 거의 모든 부당한 일이 진영에게로 향했다는 것이었다. 워낙 남에게 신경 안 쓰는 편이고, 맷집도 센 덕분에 처맞든 욕을 들어먹든 신경 안 썼다. 빡치긴 했는데, 그냥 자고 일어나면 잊을 수 있었다. 눈에 띄는 덕분에 대신 어그로 끌어서 처맞았으니까 김용희는 안 건드렸으면 했다. 그런데, 김용희를 건드렸다고. 김용희한테 그딴 짓을 했다고.
진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머리에 피가 몰렸다. 그럼에도 김용희는 이 모든 일을 그냥 덮자고 했다. 말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올림픽이 당장 두 달 남았고, 올림픽에 출전해서 메달을 따는 것이 꿈이니 그걸 위해 그냥 덮고 넘어가자고. 진영은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김용희랑 같이 메달이 따고 싶었다. 김용희랑 같이 태극기를 달고 달리고 싶었다. 그 선배가 협회장 아들인 건 진영도 알고, 용희도 알고, 쇼트트랙 하는 사람이면 전부 알았다. 용희 말이 맞았다. 이 일을 화두에 올려봤자 출전정지를 당하는 건 저나, 용희가 될 수도 있었다. 아 씨발…. 그깟 꿈이 뭐라고. 결국 진영도 침묵을 택한다. 온전히 용희를 위함이 아니라는 점이 좆같았다.
진영은 다음 날부터 아주 대놓고 좆같이 굴었다. 싸가지 없이 눈 치켜떠서 불려간 적이 수십 번도 넘었기에 눈 예쁘게 뜨려고 꽤나 노력했는데, 이제 그냥 째려보고 다녔다. 선배 앞에서 짝다리 짚고, 말 걸면 대답 개싸가지 없이 했다. 덕분에 하루종일 불려가서 처맞았다. 훈련 중엔 어찌나 시비를 거는지. 아 씨발, 발목 날아가는 줄 알았네. 처돌았나…. 스케이트 날이 제 발목을 정확히 겨냥했으나 진영은 민첩하게 피했다. 괜히 유망주 소리 듣는 줄 아나. 이번 국대 중에서 배진영이 제일 쇼트트랙 잘하는 건 모두가 알았다. 그다음이 김용희였다. 협회장 아들인 그 선배는 못 했다. 턱걸이로 국대 됐다. 원래는 상비군이었어야 할 선배가, 하필이면 부상으로 선수 한 명이 빠지는 바람에 국대에 발탁됐다. 미친 새끼, 운도 존나 좋지….
진영의 뺨을 대차게 때리곤 어깨를 툭툭 밀치는 선배를 진영은 빤히 쳐다봤다. 평소였으면 그냥 고개 숙이고 있었을 텐데, 이젠 그냥 눈 맞추고 째려봤다. 뭐 씨발. 어쩔 건데. 그 새끼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더니 발로 정강이를 찼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으나 이 악물고 버텼다.
“이 새끼 눈깔 봐라? 야, 야. 배진영이. 내가 눈 곱게 뜨라고 하지 않았냐? 너는 선배 말이 말 같지 않냐?”
“네.”
“뭐?”
“말 같지 않다고요. 귀가 먹으셨나…. 보청기 하나 해 드릴까요.”
“이 씨발놈이…. 야, 니가 뭐라도 된 거 같아? 좀 잘한다고 띄워주니까 이게 존나 미쳐가지고…. 안 되겠다, 내가 오늘 너 교육 확실하게 시켜 준다. 이 꽉 물어라, 새끼야.”
진영은 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삼십 분을 더 처맞았다.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하는데 이번에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김용희 난리 나겠네…. 한숨 한 번 쉬어주고 진영은 제 방으로 향했다. 오늘도 용희는 잠에 들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시간이 새벽 세 시가 다 된 시간이라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기어이 버틴 모양이었다. 진영이 퉁명스레 물었다. 또 안 자고 뭐 하냐. 용희가 다시 진영의 손목을 붙잡고 제 침대로 이끌었다. 진영은 순순히 따랐다. 용희는 진영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이 요즘 나서서 처맞는 이유, 별거 없다. 그냥 김용희한테 시선 덜 가라고 그런 거니까. 제가 어그로 끌어서 처맞으면 김용희한테 쓸 시간이 없을 테니까, 그럼 김용희가 덜 힘들 테니까. 그런데 눈치 빠른 김용희가 이걸 다 알았나 보다. 치료가 다 끝나고 용희가 말한다.
“진영아, 하지 마.”
“…뭘.”
“너 나 때문에 지금 일부러 더 개기는 거잖아. 그거 하지 말라고.”
“니 때문 아닌데? 내가 이제 참기 싫은 거지.”
“진영아.”
“뭐.”
“진짜 왜 그래…. 나 괜찮다고 했잖아. 좀, 이러지 마. 니가 나 대신 맞으면 내 기분 어떨지 생각 안 해?”
“누가 니 대신 처맞는다고 했냐고. 착각하지 마. 내가 그 새끼한테 이제 맞춰주기 싫은 거니까.”
“아닌 거 안다고.”
하…. 진영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김용희는 눈치가 빨라서, 진영의 얄팍한 도움을 간파해버리고 만다. 그래도 진영은 멈출 생각이 없다. 김용희한테 손대는 게 죽도록 싫었으니까. 제가 처맞는 건 괜찮아도 김용희한테 손대는 것만큼은 용납이 안 됐다. 내가 씨발 얘한테 얼마나…. 아무튼, 배진영이 싸고도는 김용희한테 손대는 새끼를 저 멀리 치워버릴 수 없다면, 손대지 못하도록 시선이라도 돌려야 했다. 맷집 센 배진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용희가 진영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진영아, 진짜 하지 마. 약속해. 안 그러겠다고. 진영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을 돌렸다. 용아.
“응.”
“늦었다, 잠이나 자.”
그러곤 용희의 눈 위에 손을 올리곤 용희를 눕혔다. 잘 자라. 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용희가 다시 일어나 진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진영아. 진영이 용희를 바라보자 용희가 입술을 씹으며 우물쭈물하더니 진영의 손목을 쭉 땡겼다. 그대로 진영이 다시 침대에 앉았다. 진영이 물었다. 왜. 용희는 답하지 않고 양손으로 진영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춰올 뿐이다. 진영은 용희를 밀어내지 않았다. 용희의 뒷목을 잡고, 뒤통수를 살살 쓸어주니 용희가 움찔했다. 그러자 진영이 입술을 떼고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다시 용희가 진영에게 입술을 맞댔다. 결국 진영의 말은 용희에 의해 먹혀버리고 만다. 결국, 또 김용희의 뜻대로 되고 만다. 배진영은 김용희를 이길 수 없으므로.
하지만,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던가. 기어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배진영이 기를 쓰고 어그로 끌어가며 김용희에게서 시선을 돌리려고 애를 썼음에도, 그 새끼는 김용희에게 손을 댔다.
모두가 잠든 새벽, 숙소 복도를 배진영이 미친듯이 달렸다. 진영이 향한 곳은 늘 처맞던 탈의실이다. 탈의실 문을 열자 주저 앉은 김용희가 보였다. 진영이 말한다.
…용아.
진영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쳐다보던 용희가 고개를 들고 진영과 눈을 맞췄다. 그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공허함 뿐이었다. 진영과 눈을 맞추고 있던 용희가 시선을 돌리고 말한다.
진영아.
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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