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가지는 법

룡뭉


영원을 가지는 법

김승훈은 늘 웃었다. 외로울수록, 슬플수록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다 보면 김승훈을 둘러싼 상황이 괜찮아지리라 믿는 것처럼. 슬픔을 드러내는 것은 나약함의 상징이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은 곧 실패를 뜻한다며. 어른들은 김승훈이 어릴 적부터 김승훈의 감정을 묶었다. 김승훈이 나약해질 수 없도록, 실패할 수 없도록. 김승훈의 속이 썩어가든 말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대 최강이라는 평가를 지닌 1급 센티넬 김승훈의 능력이지, 인간 김승훈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김승훈은 계속 웃었다. 외로움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슬픔을 느끼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척을 하며, 괜찮아지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괜찮아지길 소망하며…. 감정이 묶여버린 채로 웃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김승훈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김용희가 알았다. 오직, 김용희만 알았다. 김용희는 김승훈에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고, 그저 옆에 앉아있을 뿐이다. 김승훈은 김용희 앞에서만큼은 웃지 않았으니까, 웃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래서 김용희는, 그냥 한참을 김승훈 옆에 앉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김승훈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형, 내일은 눈이 온대요. 하는 말이나 했다. 김승훈도 김용희도 눈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그런 것밖에 없어서. 전쟁, 싸움, 죽음, 희생, 승리, 패배 따위로 채워진 생에서 둘의 일상과 멀리 떨어진 대화 주제를 고르다 보면, 결국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일상일, 한때는 김승훈과 김용희에게도 일상이었던 것들만이 남게 되었으니까. 내일 눈이 내리던 비가 내리던 김승훈에게는 하나도 중요치 않다. 폭풍우가 몰아친다 해도 상부에서 싸움터로 나가라 명령을 하면 따라야 하니까. 그럼에도 김용희는 언제나 내일 눈이 온대요, 내일부터 꽃이 핀대요, 다음 주부터 더워진대요, 하는 말을 했다. 김승훈에게 조금이라도 숨을 쉴 틈을 주고 싶어서. 영영 얻을 수 없는 일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선물하고 싶어서.

 

김승훈은 제가 가진 능력이 싫었다. 끔찍했다. 할 수만 있다면 김승훈의 봄, 들음, 말함, 걸음 따위를 빼앗겨도 좋으니 제게 주어진 죄악을 거두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김승훈의 능력은 고스란히 김승훈의 죄가 되었으니까. 주어진 능력으로 사람을 살린 적은 없다. 김승훈이 있어 남한의 국민은 안전함을 보장받았으나, 그것은 김승훈이 적들의 생을 빼앗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오로지 죽임으로써 타인의 안전을 보장한다. 그 어떤 보람도, 뿌듯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용희처럼 무언가를 살리는 능력이었다면, 이만큼이나 괴롭지는 않았겠지.

김승훈은 정말로, 말 그대로 생을 빼앗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꽃을 시들게 만들고, 한순간에 한 사람의 시간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었다. 김승훈은 시간을 다루었으니까. 김승훈의 능력에서 가장 역겨운 것은 이 능력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김승훈은 웃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김용희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김승훈이 제 능력을 자신에게도 사용할 수 있었다면, 김승훈은 진작 죽어버렸을 것이 뻔하니까.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김승훈이 살아있는 것들의 시간을 빼앗기 위해 전쟁터로 향하면 김용희는 총을 쥐고 김승훈의 뒤를 따랐다. 김승훈이 미처 빼앗지 못한 생명의 발목을 묶어 주저앉히기 위해, 그렇게 김승훈이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센티넬은 총 따위로는 죽을 수 없었으니까. 김승훈과 김용희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면, 김용희는 녹지 재생 사업 따위에 불려 다녔다. 김용희의 능력은 꽃을 피워내고, 싹을 틔워내고, 나무에 열매를 맺히게 하는 능력이었으니까. 아름답기만 할 뿐인, 김승훈을 도울 수조차 없는 능력을 김용희는 증오했다. 김용희의 능력이 생을 빼앗는 쪽에 특화되어 있었다면, 김승훈이 지고 있는 죄책감을 나누어 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김승훈이 빼앗아야 하는 생을 대신 빼앗아주고, 김승훈에게서 악몽을 덜어 줄 수 있었을 텐데.

김승훈이 시간을 빼앗아 황폐해진 땅을 김용희가 새로운 것들을 자라나게 하며 푸르게 만들었다. 어떤 보람도, 뿌듯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승훈도, 김용희도 평생 가까이하지 못할 푸름이니까. 김용희가 만들어낸 생명은 오로지 국민을 향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니까. 센티넬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센티넬은 정부 소속의 무기이다.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인.

 

한때는, 김승훈과 김용희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국민이었다. 가족이라는 것도 있었고, 어린아이라면 당연히 품은 허무맹랑한 꿈도 있었고, 평온한 일상도 있었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김승훈이 여덟 살, 김용희가 일곱 살일 때 박탈당한다. 정부는 김승훈과 김용희의 권리를 박탈시키는 대가로 둘의 법적 보호자들에게 만족할만한 보상금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김승훈과 김용희의 삶을 결정 짓는 일이 둘을 제외하고 진행되었음에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였으니까.

같은 날, 나란히 센터에 입소한 두 아이는 같은 방을 배정받고,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이 공통 훈련을 받았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김승훈과 김용희를 그저 무기 취급을 하는 센터의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보면, 의지할 곳은 하루의 절반을 함께 보내는 서로밖에 없는 것이다.

 

 

여덟 살, 일곱 살이었던 아이들은 어느덧 스물여섯, 스물다섯의 나이가 되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 일반인이라면 설레었을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순간도 김승훈과 김용희는 전쟁터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김승훈은 열다섯, 김용희가 열넷 일 때부터 둘은 전쟁터로 보내졌으니까. 국민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기에 인권도, 기본권도 지켜지지 않았다. 받아쓰기를 하기 보다 능력을 좀 더 정교하게 사용하는 법을, 총알을 장전하는 법을, 총알을 표적에 정확히 맞추는 법을 먼저 배웠기에, 그 누구도 아이들의 성장 따위에 관심을 주지 않았고, 오로지 몇 명을 죽일 수 있는가, 얼마나 표적을 맞추었는가에 집중하였으니까. 국민도, 사람도 아닌 무기가 어른이 되는 것에 축하를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들의 능력의 발전에만 집착할 뿐.

김승훈과 김용희의 첫 전투는 김승훈에게는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센터에서 훈련하며 김승훈은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으로 능력을 다루는 법을 익혔으나, 아무리 죄인이라 해도 김승훈은 사람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에 자신의 의지가 담기는 것이 싫었다. 그렇기에 김승훈은 자주 무너졌고, 자주 울었고, 자주 불안해하였고, 이는 곧… 김승훈의 능력에 큰 영향을 끼친다. 김승훈의 감정 따위에 관심 없었던 어른들은 김승훈의 불안정한 상태 따위가 불러올 파장 따위 예상하지 않고 김승훈을 전쟁터로 몰았다. 그리고, 김승훈이 처음 출전한 전쟁터에서, 김승훈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일정 범위 내에 위치한 모두의 시간을 빼앗았다. 김승훈을 제외하고, 김승훈을 둘러싼, 사람이었던 것들이 말라비틀어진 채로 바닥에 즐비했다. 김승훈의 감정은 김승훈의 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김승훈이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면 김승훈의 칼날이 아군에게도 향할 수 있음을 모두가 알게 된 것이다.

김용희는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아마, 두 발자국만 더 앞에 있었어도 김용희 역시 김승훈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겠지. 능력 사용 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쓰러진 김승훈이 익숙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제 눈앞에 있는 김용희를 보며 엉엉 울었다. 나는 내가, 너까지, 죽인, 줄 알았어…. 김용희는 김승훈을 안으며 말했다. 형, 난 괜찮아요. 형이 날 죽일 일은 없어요.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김용희는 김승훈에게 끊임없이 말했다. 전 안 죽을 거예요. 다짐하듯이,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 듯이.

이후 김승훈은 슬픔도, 불안도, 죄책감도 느껴서는 안 됐다. 김승훈의 능력이 자신들에게 향할까, 공포를 느낀 어른들이 그렇게 정했다. 김승훈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행복 같은 것뿐이라고. 사람을 죽이라 전쟁터로 몰아넣은 주제에 행복을 느끼라니, 역시 사람이 아닌 무기로 보고 있으니 가능한 말이었다. 결국 김승훈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선 안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행복할 수 없기에 행복을 느낄 수 없고, 슬픔, 불안, 죄책감은 김승훈의 능력을 불안정하게 만들기에 느낄 수 없고. 그럼에도 김승훈이 웃어야 하는 이유, 오로지 김승훈에게 공포를 느끼는 어른들이 안심하기 위해서. 그들은 김승훈의 감정을 묶어두는 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웃고 다닐 것을 강요했다. 김승훈의 웃고 있는 모습으로 자신들의 불안을 잠재워야 하니까. 그래서, 김승훈은 웃었다. 어른들의 말대로, 슬픔, 불안, 죄책감을 숨기고 웃었다. 감정을 숨기고 능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끝도 없이 노력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면, 최대한 적게 죽이고 싶었으니까. 너무 많은 죄악을 쌓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한 번 쌓은 죄는 씻을 수 없다는 것을 김승훈도 알았다.

 

 

“용아, 난 지옥 갈 거야. 내가 죽인 사람이 너무 많잖아.”

“…같이 갈 텐데 뭐가 무서워요.”

“네가 왜 지옥 가…. 넌 천국 가.”

“형, 제가 죽인 사람도 적진 않아요.”

 

 

김승훈은 웃지 않았다. 김용희 앞에서는 웃지 않았다. 그저 소리 없이 눈물 흘릴 뿐. 김용희는 덜어줄 수 없는 김승훈의 죄책감, 김용희가 뺏어올 수 없는 김승훈의 악몽. 김용희는 김승훈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다. 울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김승훈을 안은 채로, 눈을 감고, 김승훈이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린다. 감정을 묶어두길 강요받은 김승훈이 유일하게 감정을 내보내는 순간을 막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라도 해야 김승훈이 숨을 쉴 테니까.

 

김승훈이 웃기를 강요받을 때, 김용희는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기를 강요받았다. 김승훈의 뒤에서, 김승훈이 놓친 생명의 발을 묶어 김승훈이 시간을 빼앗을 수 있게 도와야 하니까. 김승훈의 안정을 도와야 하니까. 그래서 김용희는 웃지 않았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총알을 장전하고, 표적을 향해 쏘고, 김승훈이 만들어놓은 폐허를 아무런 감흥 없이 녹색으로 채우고. 김용희는 김승훈 앞에서만 웃었다. 형, 나는 괜찮아요. 안 죽어요. 살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럼 김승훈이 울었다.

 

전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어났다.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수많은 센티넬들이 차출되었고, 그 속에는 언제나 김승훈과 김용희도 함께였다. 김승훈은 언제나 최전방에 서서, 김용희는 김승훈이 보이는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총을 장전한 채로 앉아서. 이 전쟁은 언제 끝날까. 언젠가 김승훈이 물었다. 김용희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이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걸 그들이 알게 되는 날에요. 하고 답했다. 전쟁은 희생을 동반한다. 승리했음에도 잃은 것은 되돌릴 수 없고, 기껏 얻은 승리가 완연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조금 더 빼앗기 위해, 조금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전쟁은 지속된다. 시간을, 생명을, 자원을 소모하면서. 더 이상 소모할 것이 남지 않았을 때쯤 전쟁은 끝이 날 것이다. 결국 이 전쟁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얻는 것이 없을 테니까. 모두가 잃기만 할 테니까. 김승훈과 김용희가 아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체를 했다. 아니, 실제로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

 

김승훈과 김용희는 여전히 함께 방을 쓰고, 함께 훈련을 받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잠에 들었다. 그리고, 함께 전투에 나가고,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도 함께하고….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둘이서 보냈다. 김용희는 아마, 죽는 순간마저 김승훈과 함께이리라 생각했다. 둘은 태어난 날도 일주일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그사이에 일 년이라는 기간이 존재했지만, 뭐 날짜상으로는 말이다. 센터에서 아무도 챙기지 않는 생일을 김승훈과 김용희는 꼬박꼬박 챙겼다. 가끔 보급되는 간식거리들을 모아서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나누어 먹으며 생일을 축하하고, 촛불도 없이 소원을 빌었다. 2월 17일, 김용희의 생일. 자정이 넘은 시각, 김승훈과 김용희가 좁은 방의 바닥에 나란히 앉았다. 김용희는 김승훈이 모아둔 간식을 앞에 두고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용아, 무슨 소원 빌었어?”

“형, 이거 말하면 효력 떨어져요.”

“아는데, 궁금한 걸 어떡하냐.”

“형 생일 때 말해줄게요.”

“뭐, 생일 선물 그런 거냐?”

“네. 생일 선물이요.”

 

 

그래, 고마워. 기대된다. 김승훈은 웃지 않았으나, 울지도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편안해 보였다. 그럼 이제 내 선물도 줄게. 그러고 김승훈은 조심스럽게 김용희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맞붙였다. 김승훈은 닿는 것만으로는 제 능력이 발휘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사람과 닿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김용희와는 종종 손을 잡았고, 어깨에 기대기도 했고, 안기기도 했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김용희가 김승훈에게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수없이 붙어 지낸 시간이 증명해준 명확한 사실이다. 김용희가 김승훈을 안심 시키고자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고. 웃지 않는 김용희가 김승훈 앞에선 웃는 것처럼, 울어선 안 되는 김승훈이 김용희 앞에선 우는 것처럼 둘은 언제나 기꺼이 서로의 예외가 되어준다.

 

 

“형, 선물이라면서요.”

“왜, 이 정도면 선물이지. 내가 구할 수 있는 최대야.”

“제대로 해야죠….”

 

 

애들 장난도 아니고 고작 입술만 잠깐 맞대고 떨어진 김승훈 얼굴을 붙잡고 김용희가 다시금 입을 맞췄다. 김용희는 한번 시작한 건 제대로 끝내는 걸 좋아해서, 은근히 집요한 면이 있어서 숨 막힌다고 슬금슬금 얼굴 뒤로 빼는 김승훈 뒤통수 붙잡고 천천히 입안을 훑었다. 김승훈의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나도 김용희가 닿지 않은 곳이 없도록. 결국 김승훈이 김용희 어깨 때릴 때쯤 김용희도 김승훈을 놔주었다. 김용희가 눈을 접어 웃으면서 말했다. 형, 생일 선물 고마워요.

 

김승훈도 김용희도 사랑한다는 말은 딱히 하지 않았고, 둘의 관계에 굳이 이름을 붙이지도 않았다. 탄생을 빼고 생의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 했으니까, 앞으로도 함께일 테니까. 관계를 정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냥 이대로도 충분했다. 사랑을 입 밖으로 뱉지 않아도 사랑을 알 수 있었기에. 김승훈도 김용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거지. 김승훈과 김용희가 서로에게 유일한 예외이듯이, 서로에게 유일한 행복이고,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평온은 스칠 뿐이다. 김승훈은 잠에 들면 늘 악몽을 꾼다. 김승훈이 악몽의 내용을 절대로 말해주지 않았기에, 김용희는 알 수 없었으나, 알 것 같기도 했다. 김용희가 종종 김승훈이 그의 능력에 의해 죽어버리는 꿈을 꾸듯이, 김승훈도 비슷하겠지. 제 능력으로 누군가 죽어나가는 꿈을 꾸고 있겠지. 그럼 김용희는 김승훈한테 다가가서 조용히 토닥여준다. 형, 안 죽어요. 살 거예요. 안 죽어요…. 김승훈에게 닿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하는, 어쩌면 다짐 같기도 한 말을 하며.

 

그리고 2월 26일, 김승훈의 생일. 요 며칠 잠잠하다 싶었던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익숙하게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총알의 수를 확인하고, 전술을 체크하고, 김승훈에게 다가가 손 한 번 꽉 잡아주며 말한다. 형, 오늘 밤에 생일파티, 해요. 그럼 김승훈이 웃지 않는 얼굴로 뒤돌아보며 말한다. 응, 오늘 밤에 하자. 소원 말해줘야 해. 그럼 김용희가 웃으면서 말한다. 네, 형.

 

전투는 늘 그렇듯이, 선두에 선 김승훈이 적들의 시간을 빼앗고, 빼앗지 못한 이들을 김용희가 주저앉히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국가의 이득을 위해 수많은 센티넬들이 쓰러져가며 이어졌다. 아,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불안하지. 늘 침착한 김용희는 어느 순간 전쟁터의 공기 흐름이 변한 것을 알아챘다. 기묘한 긴장감에 김용희가 총을 고쳐 잡고 상황을 살폈다. 김승훈의 상태도 괜찮고, 전세도 우세했다. 그런데, 이 느낌은 뭘까. 그리고 이내, 전쟁터 일대를 뒤흔드는 강한 진동과 함께 폭발음이 들렸다. 김용희는 먹먹한 귀를 붙잡고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 이건, 예측하지 못한 상황. 적군에 남측이 수집한 정보에 없던 능력을 지닌 이가 있다. 모두에게 아주 위험하고, 어쩌면 김승훈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을 지닌 이가.

김용희는 자리를 이탈하여 김승훈을 향해 달렸다. 김용희를 말리는 이가 없다. 운 좋게 적측의 공격에 맞지 않은 김용희를 제외하고 모두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던 김승훈이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해내며 천천히 무너진다. 형, 승훈이 형. 안 돼요. 김용희가 달려가 무너지는 김승훈을 받았다. 김승훈의 몸에 박힌 수많은 얼음 조각이 보인다. 형, 형 눈감지 마.

인간이 아닌 센티넬은 인간이 만든 무기인 총알로는 죽을 수 없지만, 인간이 아닌 센티넬의 공격에는 죽을 수 있다. 시전자의 능력이 약하다면 상관없지만, 지나치게 강하다면… 지금까지 김승훈의 능력을 이길 수 있는 이가 없었기에 김승훈은 늘 승리했는데, 김승훈을 죽일 수 있는 이가 나타난 거라면…. 패배는 곧 죽음이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죽는 것이 당연해진 세상이다. 이번 전쟁에 나타난 변수는 아군에게 확실한 패배를 안겨줬고, 곧 김승훈에게 죽음을 선물할 것이다.

 

김승훈 앞에서는 웃었던 김용희가 울었다. 형, 형 안 돼. 안 돼요. 오늘, 오늘 우리 파티, 하기로 했잖아요. 축하, 해준다고 했잖아요. 아직, 소원 못, 들었잖아요. 김승훈은 자잘한 얼음 조각이 박혀 피가 맺힌 팔을 들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김용희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댔다. 김용희의 눈 밑에 박힌 점 위로 눈물이 한가득 쏟아지고, 그 눈물을 따라 피묻은 김승훈의 손길이 이어지고…. 용아, 용희야. 울지 마. 김승훈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김용희 앞에서는 웃지 않던 김승훈이 웃었다. 이런 이별은 김용희의 예상에 없었다. 김승훈을 잡아먹지 못하는 능력은 언제나 김승훈을 살아남도록 만들었으니까, 승리하도록 만들었으니까, 앞으로도 김승훈은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다. 김승훈이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랐다. 김승훈의 죽음은, 이런 식의 죽음은 생각하지 않아서….

전쟁이란 것이 그렇다. 김승훈이 여태껏 적들에게 예고되지 않은 죽음을 선사했듯이, 언제든 김승훈도, 김용희도 죽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만은 피해 가기를. 지옥에 가게 되면 타인의 생을 빼앗으며 지은 죄로 인한 벌을 달게 받을 테니, 김승훈의 생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귀에 꽂힌 통신장비를 통해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용희는 거칠게 뽑아내고 무전기까지 던져버렸다.

김용희도, 김승훈도 알고 있다. 살아남지 못 하리라는 것을. 스물여섯, 스물다섯의 생은 김용희와 김승훈에게 지나치게 익숙한 전쟁터에서 끊기리라는 것을. 가장 강력한 무기인 김승훈이 쓰러지고, 급하게 지원을 나오는 아군을 보면서 적군이 다시 대열을 정비하는 것이 보였다. 김승훈이 피를 토하고, 김용희의 눈물을 닦아주던 손이 서서히 떨어지는 것을 김용희가 붙잡았다. 김승훈의 숨이 가늘어지는 것을 느끼며 김용희가 김승훈을 껴안았다. 형,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요. 내 소원은요, 형과 모든 순간에 함께 하는 거예요. 서서히 눈이 감기는 김승훈을 보며 김용희가 말했다. 형이랑, 정말로 끝까지, 함께 하는 거예요…. 그게 내 소원이었어요….

김용희의 몸에도 수많은 얼음 조각이 박히고, 김용희의 입에서도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서서히 무너진다. 그리고, 김용희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제 능력을 쓴다. 생명을 피워내는 능력으로, 황폐해진 땅에 꽃과 열매를 피워냈던 그 능력으로, 처음으로 질긴 덩굴을 피워내 김승훈과 제 몸을 묶었다. 절대로 풀리지 않게, 그 누구도 김승훈과 김용희를 떨어지게 할 수 없도록.

 

  

20XX. 02. 26. 전투 보고

 

등록기간 : 20XX. 02. 27

보존기간 : 30년

공개구분 : 비공개

 

 

총인원 : 238명

전투 참가 인원 : 238명.

열외 : 없음

 

사망자 명단

 

1급 김승훈 (25)

1급 김용희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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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38명.

생존자 없음.

 

전멸로 인한 전력 손실 및 국경 피해 심각함.

신속한 인원 지원 바람. 이상. 끝.

 

 

※ 특이사항

김용희(사망)의 능력 사용으로 김승훈(사망)과 김용희의 시체 회수 불가.

덩굴 제거 불가능함. 조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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