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고집쟁이를 재우는 법

빌 셴하이트&레오나 킹스카라 드림

“아이렌, 혹시 이거 밤새 쓴 거니?”

 

빌의 물음은 결코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지만, 아이렌은 쉽게 답을 내놓지 않았다.

끔뻑끔뻑.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아이렌은 마치 혼이 없는 인형같이 보인다.

멍하니 숨만 쉬던 아이렌은 거의 5초가 지난 후에야 빌이 제게 말을 건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지.”

“제 얼굴이 왜요?”

“넌 거울도…….”

 

언제나처럼 잔소리를 쏟아내려던 빌은 급히 입을 닫았다. 제가 지금 내뱉으려는 말이 모순된다는 걸 자각한 탓이었다.

후우, 하고 짧은 한숨을 내뱉은 그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안 보지. 잊고 있었어. 그래. 넌 거울 보는 걸 싫어하지.”

“요즘은 그래도 자주 봐요. 루크 선배가 손거울을 선물해 줬거든요.”

“그래?”

 

그건 좋은 변화다. 자신을 꾸미고 가꾸는 것에 힘써야 한다는 것과 별개로, 본인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건 심리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니 고치는 게 좋으니까.

뜻밖의 좋은 소식에 빌의 표정이 잠깐 부드러워진 사이. 여전히 무언가에 취한 듯 몽롱한 아이렌이 느릿느릿 대꾸했다.

 

“어쨌든 거울은 왜요?”

“거울을 봤다면 모를 수 없을 텐데. 너, 당장이라도 잠들 것 같아.”

“그 정도인가요.”

 

그 대답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아닌 척 능청스럽게 상황을 무마하려는 뻔뻔함도, 정곡을 찔려 당황하는 허술함도 없는 무미건조한 대답.

분명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아 인지능력이 떨어져,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황도 판단할 수 없고 상대가 자신을 꾸짖는 중이란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거겠지. 빌은 생기 없는 몰골로 공책을 거둬가는 아이렌의 모습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그 외의 피드백은 없나요?”

“지금 말해도 알아들을 수는 있니? 졸려서 귀에 안 들어올 거 같은데.”

“괜찮아요. 정말 졸리면 잘 거예요. 그것보다 선배, 슬슬 가보셔야 하지 않나요? 학원장이 찾는다면서요.”

“……그래.”

 

만약 상대가 제 말을 제대로 들을 정신이 있었다면 뭐라고 충고도 해주고 글에 대한 피드백도 해줬겠지만, 지금 아이렌은 도토리로 버터를 만든다고 해도 ‘그거 맛있겠네요’ 따위의 소리를 할 정신머리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으리라.

일단 자신은 학원장실에 다녀오고, 아이렌은 한숨 자고 일어난 후 다시 이야기 해야지.

그리 결정한 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아리실을 나가버렸다.


 

“빌,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학원장실에 모인 각 기숙사 사감들이 ‘제가 불러놓고 외출한 황당한 학원장’을 기다리는 사이.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꾹 닫고 있던 빌은 제게 말을 걸어오는 카림을 슬쩍 쳐다보았다.

 

“걱정?”

“응!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기분 상하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싶어서!”

 

기분이 안 좋긴 하지만,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제 미간을 오른손 검지로 꾹꾹 누른 빌은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별일 없어. 그냥 어느 바보가 미련한 짓을 해서 말이야.”

“어느 바보?”

 

마음은 따스하지만 다소 눈치가 없는 카림은 빌이 말하는 바보가 누구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옆에서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레오나는 단서가 거의 없음에도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아이렌이 사고라도 쳤나?”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 들춰지자, 손가락 마사지까지 하며 겨우 펴두었던 빌의 고운 얼굴이 다시 구겨진다.

긍정의 뜻을 담은 침묵과 함께 빌이 시선을 피하자,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카림이 입을 다문 빌을 대신하여 말을 이었다.

 

“레오나, 갑자기 아이렌 이야기는 왜 나온 거야?”

“뻔하지. 오늘은 문화부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이니까. 저 녀석은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왔을 테고, 영화연구부에서 저 녀석이 바보라고 부르면서도 신경 쓸만한 건 아이렌 정도밖에 없지 않나?”

 

그것참 논리적인 추론이다. 오죽하면 머리가 좋다는 걸 이런 식으로 티 낼 필요는 없지 않나 싶을 정도라고 할까.

빌은 다소 부실해 보이는 논리로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한 레오나가 얄미워 칼날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애석하게도, 레오나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이렌 씨에게 무슨 일 있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렌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하니 신경 쓰이는지, 이젠 조용히 상황을 구경하던 아줄까지 대화에 끼어들고 만다.

제가 상황을 공유할 의무는 없더라도 이 이상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건 좋지 않겠지. 괜한 소란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 빌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냐. 그냥 잠도 안 자고 무리하는 것 같길래, 미련하다 싶어서 황당할 뿐이지.”

“잠을 안 주무신다니, 대체 왜?”

“최근 열린 각본 공모전에 낼 글을 쓰느라 그러는 모양이더라고.”

“아하.”

 

제가 도와주기엔 미묘한 일이라 판단해서일까. 아니면 이 정도 정보면 충분하다는 걸까. 다행히 아줄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나는 기어이 한 마디 얹어야 속이 시원하겠는지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 그 녀석이 애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별걸 다 걱정하는군.”

 

그건 네가 그 녀석 꼴을 못 봐서 그렇다. 차라리 어느 수상한 놀이공원의 목각인형이 더 생기있어 보일 정도로 비몽사몽 한 상태였는데 누굴 유난스러운 사람 취급인가.

빌은 그렇게 따지려 했지만, 문밖에서 느껴지는 크로울리의 인기척에 입을 닫아야 했다.


 

크로울리의 전언을 듣고 돌아온 레오나는 곧바로 사바나클로 기숙사로 가지 않았다.

분명 지금 돌아가면 자신을 기다리는 러기와 마주치겠지. 그러면 높은 확률로 오늘까지 처리해야 했던 기숙사 내부 일로 잔소리할 게 뻔했다.

그런 건 굳이 제가 할 필요 없이 적당히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는데, 왜 굳이 자신이 나서야 한단 말인가. 머리는 좋지만 모든 일은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생각하는 그는 제가 나설 필요까지도 없는 일에 발을 뻗긴 싫었다.

그래서 그는 잔소리를 피해 식물원으로 와, 자신의 비공식 지정석에 몸을 뉘었다. ‘한숨 자고 돌아가면 러기가 이인자로서 책임지고 모든 걸 해결해 놓겠지.’ 그리 생각하고 잠들려는 순간.

 

“휴…….”

 

익숙한 목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음에도 괜히 상체를 살짝 들어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본 레오나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왜 걱정한 건지 알 거 같기도 하군.’

 

비척비척 걸어가다가 근처 꽃나무 앞에 쪼그려 앉은 아이렌의 얼굴은 흙이라도 뿌려놓은 듯 칙칙했다. 누가 보면 잠을 못 잔 게 아니라 어디 아픈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그였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렌의 정신은 다른 곳에 쏠려있는 듯했다.

 

“진짜 뭐가 문제지. 이게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주문이라도 외우듯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아이렌은 들고 있는 공책으로 제 머리를 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하던 게 잘 풀리지 않아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이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문제는, 저런 방식의 자책은 기분 전환도 휴식도 되지 않는 미련한 짓이라는 것일 뿐.

‘모른 척하기엔 이미 눈에 들었으니, 어쩔 수 없나.’ 최대한 조용히 자고 싶었던 레오나는 결국 방황하는 초식동물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좀 조용히 하지 그러나?”

 

뒤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자, 느리지만 리듬감 있게 머리를 치던 아이렌이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평소라면 갑자기 말을 건 탓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을 텐데. 이리도 조용한 반응을 보니 진짜 졸리긴 한 모양이다.

작은 반응 차이 하나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한 레오나의 꼬리가 좌우로 짧게 흔들렸다.

 

“레오나 선배, 안녕하세요.”

“…….”

“선배?”

“아, 살아있었군. 난 시체가 말을 하는 줄 알았지.”

 

명백하게 장난스레 놀리는 말투인데도 아이렌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이건 평온한 게 아니라 감정이 마비되어있는 쪽에 가까울 터였다.

멍한 얼굴로 레오나를 바라보던 아이렌은 엉뚱한 소리만 해댔다.

 

“죄송해요, 조용히 할게요.”

 

궁극적으론 저 말을 듣고 싶었던 게 맞지만, 지금 해야 할 대답은 저게 아닐 텐데.

레오나는 평소와 너무나도 달라진 아이렌의 낯선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긴 한숨과 함께 쪼그려 앉은 상대를 안아 들었다.

 

“선배?”

“마침 잘 왔군. 어차피 멍하니 있을 거면 베개라도 해.”

“예?”

 

평소라면 좀 더 시끄럽게 버둥거릴 텐데, 이 와중에도 ‘예?’하고 맥없는 반문을 하는 게 전부라니. 진짜 숨만 붙어있는 수준이지 않은가.

이건 절대 하루만 밤샌 게 아니다. 그리 확신한 레오나는 제 잠자리에 아이렌을 앉히더니, 상대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버렸다.

 

“레오나 선배, 이게 무슨…….”

“가만히 있어. 시끄럽게 굴지 말고.”

 

평소라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진 않아도 입만큼은 조잘조잘 의문과 반박을 내뱉을 아이렌이지만, 지금은 그가 시킨 대로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이 후배가 갑자기 고분고분한 요조숙녀가 되자고 결정해서 아니라,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힘들 만큼 지쳐있어서 그런 것뿐이겠지.

이래서야 진짜 베개나 다름없지 않나. 몸은 편해도 이상하게 마음은 놓이지 않아 한참 동안 눈만 감고 있던 레오나는 한쪽 눈만 슬쩍 떠 상대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럴 줄 알았지.’

 

예상대로 아이렌은 잠들어 있었다. 한 손에는 공책을 꼭 쥐고, 다른 손은 레오나의 머리카락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모습 그대로 꿈나라로 가버린 그는 어지간해선 깨어날 거 같지 않았다.

짧은 시간 사이에 단잠에 든 후배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자 한결 속이 가벼워진 레오나는, 그제야 평소처럼 낮잠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왜 아무 연락도 없는 거지?’

 

해가 지고 하늘이 노을로 물들 무렵.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 아이렌과 아까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려 했던 빌은 답장을 보내지 않는 아이렌을 찾아 식물원으로 향했다.

마지막 연락 때 기분 전환 겸 식물원을 걷고 오겠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아직 여기 있을 수도 있다. 그 졸음에 취한 느릿느릿한 걸음이라면 아직 온실 내부를 한 바퀴도 돌지 못했다 해도 놀랍지 않고.

 

‘여기 없으면 도서관이라도 가봐야 하나.’

 

뛰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빠른 걸음으로 식물원 내부를 도는 빌은 예리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수풀 안, 아이렌이 좋아하는 꽃 근처, 나무 아래와 앉아서 쉬기 좋은 구석까지.

혹 제 실수로 아이렌을 놓치지 않게 심기를 기울여 사방을 살피던 빌은, 이내 온대식물 구역의 나무 아래에서 황당한 광경을 목격하고 멈춰 섰다.

 

“……하.”

 

제가 찾던 이는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엉뚱한 녀석도 한 세트로 붙어있었지. 빌은 함께 잠들어 있는 아이렌과 레오나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입술만 깨물었다.

아까 제게 아이렌은 아이가 아니라느니 뭐니 하며 호들갑 떤다는 듯 굴어놓은 녀석이, 정작 여기서 아이렌과 함께 잠들어 있다니. 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상황인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아이렌이 잠들었으니, 그것 하나만큼은 다행인 걸까.

더는 잔소리하지 않아도 되니 기뻐해야 할 텐데,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저 얄미운 남자가 처리한 점이 거슬려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몇 겹의 감정이 복잡하게 마음에 쌓여 그 정체를 명확히 할 수 없는 빌은 조용히 발걸음을 돌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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