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30분 뒤 깨워줘

쟈밀 바이퍼 드림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언제 어디서 천적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야생동물들은 항상 잠자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도망가기 쉬운 자세로 자거나, 작은 기척에도 깨어날 수 있게 선잠을 자도록 진화하거나, 천적이 발견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자는 등. 가장 무방비한 상태에 천적을 만나지 않도록, 많은 신경을 쓰곤 했지.

그리고 이건 가장 지능이 발달했다 여겨지는 종족인 인간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신중한 사람은 제 잠든 모습을 남에게 함부로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피곤하면 아무리 철저한 사람도 빈틈이 생기기 마련인 걸까.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스카라비아 기숙사에 왔던 아이렌은 담화실 구석에 잠들어 있는 쟈밀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곳에서 주무시다니. 많이 피곤하셨던 걸까.’

 

잘 거라면 방에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은 아무도 없어 조용하지만, 담화실이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지 않은가.

그가 걱정되어 그냥 지나칠 수 없던 아이렌은 슬그머니 상대에게 다가가 어깨를 건드렸다.

 

“쟈밀 선배.”

 

너무 거칠지 않게 가볍게 몸을 흔들어 보았지만, 쟈밀은 깨어나지 않았다. 항상 긴장하며 살아가는 탓에 조금만 건드려도 깨어날 거 같은 그가 이렇게 조용한 걸 보면, 아무래도 적잖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안 깨시려나?’

 

이렇게나 피곤한 상태라면 그냥 깨우지 않고 자게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한 번 깬 후 다시 잠들면 피로가 덜 풀리지 않나. 심지어 다시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니, 깨우는 건 포기해야겠다.

조심스럽게 어깨에서 손을 거둔 아이렌은 비어있는 옆자리에 앉아, 흐트러진 쟈밀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진짜 조각상 같다.”

 

평소 늘 하는 생각이긴 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상대의 잘생김이 와닿는다. 아마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들에게 ‘이 학교 최고의 미남은 누구냐?’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연예인인데다가 자신을 가꾸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 빌을 꼽겠지. 하지만 적어도 아이렌은 달랐다. 객관적으로는 분명 빌이 제일 미남일지 몰라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취향이 있지 않던가.

고양잇과 동물처럼 날렵하지만 가녀리다기보다는 다부짐이 느껴지는 몸의 윤곽, 선명한 이목구비, 바라보고 있자면 빨려들어 갈 듯 깊이 있는 눈동자와 마디가 도드라진 큰 손까지.

너무나도 제 취향에 부합하는 남자를 보며 혼자 벅차오른 아이렌은 장난스럽게 그의 팔을 안았다.

 

“이대로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노골적인 진심을 중얼거리는 아이렌은 히죽 웃고 있었다. 결코 그의 외모만 보고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누가 그러지 않던가. 잘생긴 건 질리지 않고 언제나 짜릿하다고. 아무리 추상적인 것들에 사로잡혀 사는 아이렌이라 하더라도, 제 마음에 쏙 드는 아름다움 앞에서는 평범한 소녀가 될 뿐이었다.

 

‘나 때문에 깨시면 안 되니까, 적당히 해야지.’

 

평소에는 체면도 차려야 하고 상대를 귀찮게 하기 싫어서 이렇게 붙어있을 수 없었는데. 오늘은 운이 좋았다. 운동으로 다져진 건장한 팔과 어깨에 얼굴을 비비던 아이렌은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안았던 팔을 놓았다.

그런데, 뒤로 물러서려는 그 순간.

 

“!”

 

방금까지 옆에 끼고 있었던 팔이 민첩하게 움직이더니 제 손목을 덥석 붙잡는다.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뻔했던 아이렌은 숨을 삼키고 쟈밀을 바라보았다.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도무지 깨어날 거 같지 않았던 그는 두 눈을 뜬 채 아이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가?”

 

자고 일어나서 잠겨있는 목소리에서는 분노나 짜증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렌은 그것 하나만큼은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서, 선배? 언제부터…….”

“언제부터 깨어있었냐고? 글쎄. 네가 어깨 흔들 때부터?”

“…….”

 

한마디로 말해서, 그냥 처음부터 깨어있었다는 건가. 지금 보니 영화연구회 동아리는 제가 아니라 쟈밀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이 정도 연기력이라면 조만간 배우로 데뷔할 수도 있지 않을까?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에 잠깐 할 말을 잃은 아이렌은 시선을 피하며 애써 대꾸했다.

 

“깨워서 죄송해요. 계속 주무세요.”

“됐어. 어차피 잠깐만 자려고 했고.”

“아니, 그래도…….”

 

슬쩍 손을 빼내 보려고 해도 쟈밀은 자신을 놔주지 않았다. 아플 정도로 손목을 꽉 쥐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야무지게 쥔 손의 악력을 보아하니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처음부터 깨어있었다면 제가 잠을 방해 한 것도 아닌데, 대체 이 남자는 왜 이러는 건가. 자신이 무결한 것은 아니지만 야단맞을 정도의 일을 한 건 아닌데.

아이렌은 그 미약한 억울함 덕분에 겨우 쟈밀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드디어 자신을 보는 후배의 머뭇거리는 모습에 슬쩍 코웃음을 친 그는 얼굴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넌 참 이상하단 말이지.”

“예?”

“평소엔 무슨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하면서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면서, 어떨 때는 별거 아닌 걸로도 이렇게나 민망해하잖아? 방금 한 말들이 그렇게 창피할 말인지 나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능청스럽게 웃는 쟈밀은 제 말에 대꾸하지 못하는 아이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실은 알고 있다. 놀리고 싶어 모르는 척했을 뿐, 아이렌이 민망해하는 기준은 조금만 관찰해도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이 계집애는, 제 노골적인 진심을 말하는 걸 창피해하는 거다.

평소 사랑스러운 말을 할 때 진심을 담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저, 한번 가공해 예쁘게 다듬은 진심과 날것 그대로의 욕망이 담긴 진심은 같지 않다는 거지. 보석도 가공해야지 보기 좋지, 원석 그 자체로는 상품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가.

여러모로 완벽주의자인 아이렌이니, 아마 다듬지 않은 욕망 같은 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 정작 다른 이들이 궁금해하는 건 바로 그 솔직한 열망인데 말이다.

어느새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렌을 더 놀리고 싶어진 쟈밀은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안 가지고 갈 건가?”

“……가져가도 되나요?”

“그럴 수 있으면.”

 

정말 시도라도 해보라는 건지, 그는 아이렌의 손을 놔주고 비스듬하게 앉아 상대를 바라보았다.

‘와, 이건 미인계 아닌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필사적으로 씹어 삼킨 아이렌은 뜨거워진 뺨을 양손으로 훔치며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선배는 커서 못 들고 가니, 포기할래요.”

“너답지 않은데.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대신 카림 선배라면 들고 갈 수 있을 거 같네요. 저보다 키도 작으시니까요. 제가 그렇게 연약하지 않으니 업고 가면 될 거 같은데.”

“뭐?”

 

카림을 대신 데려가겠다니, 이건 너무나도 뜬금없는 선택지가 아닌가.

제 장난에 응수하기 위해 질투를 유발하려고 이러는 거라면,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좀 더 친밀한 다른 남자를 고를 텐데. 평소에도 비교적 거리감이 있는 카림을 고르는 건 대체 무슨 의도인가.

하지만 그 이유는, 곧 답변자의 입으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럼 선배는 저절로 따라오겠죠? 카림 선배를 놔둘 수 없을 테니까요.”

“아.”

 

과연. 이래야 아이렌이지. 열받을 정도로 현명하지 않은가.

어느새 부끄러움을 떨쳐내고 평소의 여유를 되찾은 후배의 태도에 김이 샌 쟈밀은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았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선배 만나러 온 건 아녜요. 그냥 같은 반 친구 만나러 왔다가, 담화실에 누가 있길래 확인해 본 것뿐이에요.”

“반 친구를?”

“예. 어제 책을 빌렸거든요. 제가 빌린 거니, 반납은 직접 가서 해야겠다 싶었죠.”

 

무슨 책이기에 하루 만에 다 읽은 건지, 왜 도서관이 아니라 다른 학생에게서 책을 빌렸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건 멋없는 일이겠지.

일단 지금 수중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면, 이미 책은 본래 주인의 손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쟈밀은 딱 그 정도만 파악하고 상대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짓을 관두었다.

 

“다시 안 자도 괜찮아요? 바쁜 일이 없으면 다시 주무세요. 잠깐 낮잠을 자는 건 일의 효율성을 올려준대요.”

 

궁금한 게 한 트럭 있는 쟈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렌은 또 능숙하게 말을 돌려버린다.

완전히 졸음이 가시진 않은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말에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넌 안 바쁘냐?”

“저요? 그다지요.”

“그래?”

 

아이렌의 대답에 양쪽 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는 상대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그럼 옆에 있어.”

“네?”

“내가 자는 동안 옆에 있으라고. 그리고 30분 뒤 깨워줘.”

 

이미 기대놓고 물으면, 싫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지 않나.

물론 쟈밀과 조금이라도 더 붙어있고 싶은 아이렌으로서 이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긴 했지만, 아까 한 짓을 생각하면 정말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자괴감이 들고 만다.

 

“껴안고 쓰다듬는 정도는 봐줄 테니까. 붙어있는 게 어때?”

 

아이렌이 망설이는 사이. 쟈밀은 기회를 잡기 위해 좀 더 몸을 밀착하고 귓가에 속삭이는 노력을 보인다.

그 효과적인 유혹에 순식간에 머리에 피가 몰린 아이렌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며, 투정 부리듯 삐뚜름한 태도로 대꾸했다.

 

“제가 무슨 짓 할 줄 알고 이런 제안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뭔가 착각하는 것 같다만, 무슨 짓은 나도 할 수 있다만.”

“그래요? 무슨 짓 할 거예요?”

“그게 궁금하면 옆에 있어야지.”

 

그렇게까지 말하면 정말 거절할 수 없어지지 않나.

누가 묶어 둔 것도 아닌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어진 아이렌은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도로 쟈밀의 팔을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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