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의 추억, 5월 편
아줄 아셴그로토 드림
* 트친이랑 1년 장기 프로젝트(https://1yearcollabo2.creatorlink.net) 하는데 써서 냈습니다.
“아줄, 그건?”
늦은 밤 옥타비넬 기숙사의 담화실. 일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제이드는 작은 화분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줄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심각한 얼굴로 꽃봉오리가 서너 개 달린 식물을 살피던 아줄은 소리소문없이 다가온 제이드에게 인사 대신 대답을 건넸다.
“선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꽃다발이면 모를까, 화분 채로 선물 받다니. 누구에게 받았습니까?”
“아이렌 씨가 주셨습니다.”
“아이렌 씨가?”
그거라면 확실히 거절하기 힘들었겠지. 아무리 대가 없는 선물은 사양하려 하는 아줄이라도, 마음에 담아둔 여자의 선물을 어찌 내치겠나.
간단하게 상황을 파악한 제이드는 화분에 심어진 식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인어지만 개인적인 관심 덕분에 지상의 동식물에 대해 잘 아는 그는 잎과 줄기만 보고도 이게 장미, 그것도 전체적인 크기가 작게 개량한 미니장미라는 걸 쉽게 알아냈다.
“얼마 전 함께 외출했다가 아이렌 씨가 본인 것까지 두 그루 사서 하나는 절 주시더군요. 게다가, 누구 꽃이 먼저 피는지 내기하지 않겠냐고 했지요.”
“내기?”
“예. 먼저 꽃을 피운 쪽의 소원을 들어주는 걸로요.”
“흐음. 그래서, 승낙하셨습니까?”
아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꼭 다문 꽃봉오리를 검지로 톡 쳤다.
“운으로 결판나는 내기라면 거절하겠지만, 식물을 키우는 건 기술과 관련된 일이니까 승낙했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제 도움은 필요 없습니까?”
“됐습니다. 이미 관련 지식은 다 찾아보았으니까요.”
사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식물에 대해 잘 아는 제이드의 도움을 거절할 이유는 없을 거다. 하지만 아줄이 굳이 사양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빚을 지는 게 싫어서였다. 이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특히 이 옥타비넬에서 공짜는 없는 법이지 않던가.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렌과의 내기이니, 자신만의 힘으로 이겨내고 싶다는 생각도 거절의 이유가 되었으리라.
함께 해온 시간이 있다 보니 아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제이드는 한발 늦게 아줄의 옆자리에 놓여 있는 원예 관련 책들을 발견하고 소리 죽여 웃었다.
시간이 지나, 내기를 시작하고 일주일이 흐른 5월 14일 아침.
아줄은 물을 주기 위해 화분을 확인했다가, 터진 꽃망울들 사이로 비집고 나온 새하얀 꽃잎을 보고 탄식했다.
“이건……!”
안 그래도 이틀 전부터는 슬슬 필 기미가 보이더니, 결국은 꽃이 핀 건가. 역시 매일 관리해 주고 낮에는 볕이 잘 드는 곳에 놔둔 보람이 있다.
활짝 핀 건 아니지만 누가 보아도 ‘피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의 꽃의 상태에 보람을 느낀 그는 스마트폰으로 꽃의 사진을 찍어, 곧바로 아이렌에게 제 승리를 알렸다.
‘무슨 소원을 빌까.’
반드시 이길 거라는 각오로 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기니까 기쁜 건 어쩔 수 없다. 냉정하게 말해서 누가 지는 걸 좋아하냐는 말이다. 이런저런 소원을 생각해 두긴 했지만 아직 뭘 부탁할지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던 그는 아이렌의 답장을 기다리며 꽃을 감상했다.
“흰색이었군요.”
처음 꽃을 살 때. 가게 주인은 ‘무슨 색 꽃이 필지는 모른다’라고 미리 말했었다. 어차피 대중적인 색 중 하나……. 그러니까, 빨간색이나 노란색, 흰색이나 주황색 중 하나. 혹은 저 색들이 섞인 장미라고는 들었지만, 막상 아줄은 어떤 색의 꽃이 필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중요한 건 빠르게 꽃피우는 것, 그것뿐이었으니까.
“음?”
몇 분이나 흘렀을까. 드디어 답장이 왔다.
제 승리를 확신한 아줄은 누구보다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운명의 신은 그만의 편이 아니었다.
[제 화분도 꽃이 폈어요.]
그 한 마디와 함께 온 사진 속에는, 제 것과는 다른 산호색 장미꽃이 보였다.
“……무승부, 라는 거군요.”
혼잣말을 중얼거린 아줄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상대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은 4송이 피었지만, 상대는 3송이 피었으니 제가 이긴 거라고 쳐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개화 정도를 보면, 아이렌 쪽이 더 활짝 핀 거 같기도 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기준을 좀 더 명확히 정했어야 하나.’
좋아하는 여자를 이겨 먹어야 속이 시원한 못난 남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제가 아이렌에게 빌고 싶었던 소원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쉬움과 허탈함 사이. 내기 앞에서 깐깐해 지는 자신의 모습에 묘한 자괴감이 밀려올 즈음. 그의 스마트폰이 한 번 더 울렸다.
“……아.”
알림의 정체는 아이렌의 메시지였다.
마침 메시지 창을 열어두었기에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본 그는, 방금까지 자신을 괴롭힌 착잡함을 금방 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소원은 서로 하나씩 들어주는 걸로 할까요. 아무래도 장미는 저랑 선배 중 누구 한쪽 편만을 들기 곤란했나 봐요. 선배 장미는 흰색이네요. 정성스럽게 기르셔서 그런지, 엄청 예뻐요.]
그러고 보면 무승부가 나긴 했어도, 없었던 일로 할지 둘 다 승자로 쳐줄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었지. 어찌 보면, 지는 사람이 없게 된 지금이 가장 좋은 결말일지도 모른다.
제가 생각해 온 소원이 물거품이 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니, 일순 머리가 맑아진다. 방금까지 왜 그렇게 초조해한 건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하긴, 중요한 건 승패가 아니긴 하지요.”
일단 소원은 장미가 활짝 필 즈음 정하고, 지금은 육지 식물의 아름다움이나 곱씹어 보아야지.
아줄은 ‘아이렌 씨도 예쁩니다.’라고 답장하려다가, ‘씨’와 ‘도’ 사이에 급히 ‘의 장미도’를 추가해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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