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콜로니. 10
#10. 심문
V. 맥나마라 연방 빌딩.
FBI 디트로이트 지부가 위치한 그곳에 도착한 셋은 빌리를 데리고 올라갔다. 비어있는 심문실로 안내하자 그는 또 무엇이 불안한지 주춤대며 안으로 들어가길 꺼려했다.
노먼이 그에게 친절하게 설명했다.
"여기가 가장 안전해요. 봐요. 창문도 없고, 당신의 얘길 엿들을 사람도 없어요. 하지만 다른 곳에서 얘길 나누고 싶으면 그것도 괜찮아요. 여기 밖에 앉을까요?"
빌리는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복도로 사람과 안드로이드가 바쁘게 지나다녔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빌리는 그 시선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심문실로 들어갔다. 탁자 옆 의자에 빌리를 앉힌 노먼이 코너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갑 열쇠 주세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우리에게 직접 위해를 가한 적이 없잖아요."
퍼킨스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코너는 품에서 열쇠를 꺼내어 직접 빌리의 수갑을 풀어주었다. 빌리는 한결 안심된 얼굴로 손목을 매만졌으나 여전히 둘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노먼이 그들에게 말했다.
"둘 다, 잠시 나가 있어요."
퍼킨스가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돼. 약에 쩔어 있는 놈은 믿을 수 없어."
노먼이 퍼킨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런 유형은 불안감을 자극할수록 입을 열지 않아. 일단 나한테 맡기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들어오면 되잖아."
퍼킨스는 단호했다.
"저 덩치를 보고 말해. 우리가 들어오기도 전에 네 목 따윈 바로 분질러져 버릴걸."
노먼은 저도 모르게 목을 감싸며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그런 농담을 해?"
"농담 같아? 저건 살상용으로 만들어진 기계야. FBI의 모든 안드로이드 중 가장 철저하게 배경 조사를 거치는 모델이 군용 안드로이드인 거 몰라? 수갑만 풀었으면 됐지, 더한 안정감을 줄 필욘 없어."
잠시간 고민하던 노먼이 결국 타협했다.
"좋아. 그러면 코너만 남기자. 됐지?"
퍼킨스가 또다시 거절하려 입을 떼자, 노먼이 빠르게 덧붙였다.
"생각해 봐. 세 명한테 둘러싸여서 동시에 심문당하는 상황에 저자가 쉽게 입을 열 거 같아? 그리고 잊은 것 같은데, 아까 코너가 제압하는 거 봤잖아. 나도 무장 중이고."
퍼킨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노먼을 바라봤으나, 여전히 자신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빌리의 눈빛에 그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숨을 쉰 퍼킨스는 결국 문을 나서 반대편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단방향 유리 너머 심문실의 모습이 비쳤다. 코너는 문 앞에 가 섰고, 노먼은 빌리의 맞은편에 앉아 회수한 레드아이스 봉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빌리. 이제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이건 어디서 난 거죠?"
코너를 곁눈질한 빌리가 상체를 노먼에게로 잔뜩 기울여 속닥댔다.
"나도 잘 몰라…. 이건…. 이건 그냥 수, 수리공이 준 거야."
"수리공이요?"
"응…. 다치거나 상처 난 곳이 있으면 그에게 가."
"그자가 당신에게 이 약을 준 건가요?"
"나, 난 정말 그런 약인 줄도 몰랐어. 그냥. 그에게 수리를 받고 나서 너무 아팠고…. 난생처음으로 고통을 느꼈어. 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찾아가니 그가 진통제라며 이, 이걸 줬어."
"이걸 섭취하면 괜찮아졌나요?"
"으, 응…. 아픈 것도 없어지고…. 기분도 좋아. 근데 약효가 떨어지면 너무 아파. 갈수록 더 아파지는 거 같아."
빌리는 고개를 수그리고 울먹였다. 노먼은 어두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디가 아픈가요? 수리한 부위가 어디죠?"
빌리가 왼팔을 내밀었다. 팔뚝 상완에 가로로 길게 접합흔이 나 있었다.
"코너. 좀 봐줄 수 있어요?"
"네."
코너가 다가와 손을 뻗자, 빌리가 흠칫하며 모포 속으로 팔을 숨겼다. 노먼이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상처를 보려는 것뿐이에요."
여전히 확신 없는 표정으로 빌리가 천천히 팔을 내밀었다. 코너의 희게 변한 손가락이 흉터를 만지자, 빌리의 인공피부가 벗겨지며 하얀 외피가 드러났다. 코너의 LED가 노란빛으로 반짝이더니 잠시 뒤 그가 손을 뗐다.
"모든 부품이 완벽히 결합한 상태입니다. 깔끔하게 수리됐어요. 인간과 달리 안드로이드는 상처가 재생할 시간 따윈 필요치 않죠. 그 과정에서 고통을 느낄 수도 없고요."
"네, 네가 뭘 알아! 아파! 아프단 말이야!"
빌리가 소리를 지르며 반박하자 노먼이 그를 진정시켰다.
"맞아요, 빌리. 이 자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이해해요. 팔만 아픈 게 아니라, 온몸이 아프지 않아요?"
빌리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 어떻게 알았어? 맞아. 다 아파. 오른팔도, 다리도, 머리도, 눈도…. 그리고, 가끔가다 기억을 잃어버려.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어. 원래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게 바로 마약의 부작용이에요. 섭취할수록 더 아파질 거고 계속 먹다간 죽을 수도 있어요."
"주, 죽어? 싫어! 죽기 싫어!"
빌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악을 썼다. 노먼이 그를 다독이며 말했다.
"지금부터라도 먹지 않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 당신을 속이고 이 나쁜 약을 건네준 수리공이란 자에 대해 자세히 말해줘요. 우리가 대신 혼내줄게요. 그의 이름을 알고 있나요?"
"그는…. 이름이 없어. 그, 그냥 수리공이야."
"어떻게 생겼죠?"
"나도 몰라…. 그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
"가면을 썼나요?"
"항상. 보, 볼 때마다 가면이 바뀌었어."
"그럼 인간일 수도 있잖아요? 안드로이드인 건 어떻게 알았죠?"
"날 수리할 때 인공피부가 벗겨졌어. 안드로이드가 마, 맞아."
"남성형인가요, 여성형인가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 가면에 따라 목소리가 매번 바뀌었어. 남자일 때도, 여, 여자일 때도, 어린아이 같을 때도 있었어."
노먼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수리공이 여럿일 가능성은요?"
"그것도 모, 몰라. 하지만 말투나 행동이나…. 같은 안드로이드처럼 보였어."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죠? 어디서 봤어요?"
"롭슨 가에서. 아마…. 열흘 정도 됐을 거야."
"처음에 그를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당신이 먼저 찾아갔나요?"
"으, 응. 전투 중에 폭탄을 맞고 팔이 떨어졌어. 한동안 고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풀라스키에 안드로이드 수리공이 있다고 들어서 차, 찾아갔어.”
“거기가 어디였는지 기억하나요?”
“레핀 가의 어떤… 어떤 폐가였는데 지,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서 사라졌을거야. 그 이후엔 항상 그가 먼저 여, 연락해 와서 몰라.”
“연락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죠?”
“약이 떨어질 때쯤… 내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어와.”
노먼이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코너가 설명했다.
“안드로이드는 기지국 네트워크를 거치지 않고도 원격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무전기와 비슷한 원리로, 반이중 통신만 가능하죠. 하지만 너무 멀면 연결이 안 돼요. 이 모델은 60야드가 최대 수신 범위입니다.”
“그럼, 빌리에게 연락할 당시 가까운 곳에 있었겠군요.”
“맞아. 나더러 약을 계속 얻고 싶다면 롭슨 가를 떠나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항상 거기 있어야 했어. 기억을 잃고 다른 곳으로 갔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바로 골목으로 돌아와야 했어. 몇 주, 몇 개월 동안 계속….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
그리곤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맞아. 나, 나 이제 가야 해. 연락을 안 받으면…. 화가 나서 다시는 날 찾지 않을지도 몰라.”
“빌리. 잊었어요? 약을 먹을수록 고통이 악화할 거예요. 그리고 약이 아직도 많이 남았잖아요? 다 떨어질 때까진 수리공도 당신을 찾지 않을 테니 안심해요.”
빌리는 그 말에 조금 진정한 듯, 다시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노먼이 계속해서 질문했다.
“혹시 그에게 동료가 있었나요?”
빌리가 고개를 젓다가, 애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동료인지는 모르겠지만… 매, 맨 처음에 수리하러 그를 찾아갔을 때. 나 말고 다른 안드로이드가 두 대 더 있었어. 아, 아니. 여러 대 있었는데 작동하는 건 두 대뿐이었어.”
“그들도 가면을 썼나요?”
“아니.”
“그럼 어떤 모델인지도 알고 있나요?”
“응. 하나는 AP700이었고, 하, 하난 PL600이었어.”
노먼은 코너를 보았고 이번에도 코너가 설명했다.
"PL600의 외양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만, AP700 모델은 매우 다양합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요."
그리곤 심문실 탁자에 비치된 태블릿 위에 손을 얹었다. 화면에 사진 여러 장이 떠올랐다. 다양한 인종과 성별, 생김새가 모두 제각각인 안드로이드의 얼굴이 주르륵 나열됐다. 그가 빌리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이 중 어떤 모델이지?"
빌리는 화면을 곁눈질하더니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찍었다. 흰 피부와 갈색 머리, 새파란 눈을 가진 백인 남성형 안드로이드로 길거리에 널린 모델 중 하나였다.
노먼이 물었다.
"좀 더 자세한 인상착의가 있나요? 그가 입은 옷이나, 뭔가 특징지을 수 있을 만한 거요."
"그의 머리는 갈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어. 그리고 소, 손등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
"그림이요? 문신?"
"응."
"어떤 모양이었나요? 그려줄 수 있어요?"
노먼이 태블릿에서 펜을 뽑아 그에게 건네자, 안드로이드가 어색한 듯 몇 번 손을 움찔거리더니 화면에 천천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이윽고 꽤 정교한 그림을 완성한 빌리가 펜을 내려놓았다. 모서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온 정사각형 위에, 총과 칼이 교차한 문양이었다.
"이건…." 코너가 화면을 들여다보며 중얼댔다.
"아는 문양인가요?"
"네. 안드로이드 단체, 제리코를 나타내는 상징 중 하나예요."
"그럼 그들이 제리코의 일원일 수도 있다는 거겠네요."
"아마도요. 하지만 원래라면 총과 칼은 그려져 있지 않으니 확신할 순 없습니다."
노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건 나중에 더 알아보죠. 빌리, PL600도 특징이 있었나요?"
"그는…. 조금 인간 같았어."
"인간이요?"
"응. 정장을 입었고 이마에…"
빌리가 갑자기 입을 닫고 말을 멈추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노먼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의 이마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나요?"
빌리의 관자놀이가 노랗게 깜빡이고,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표정에 다시금 공포가 서렸다.
"빌리?"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뭐가 아니란 거죠?"
"아냐! 난, 난 아무것도 몰라! 이마도, 정장도, 문신도 아냐! 아니라고!"
노먼은 당황해서 몸을 뒤로 젖혔다. 빌리가 머리를 부여잡고 탁자 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빌리. 괜찮아요?"
"으으… 몰라.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묻지 마… 난 몰라…."
노먼이 코너를 돌아봤다. 하지만 코너도 빌리의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빌리. 진정해요. 여긴 우리밖에 없고, 당신을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노먼이 손을 들어 빌리의 팔을 잡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팔을 탁자 아래로 감췄다. 노먼이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질문도 거의 끝났어요. PL600에 대한 것만 알려줘요. 그의 이마에도 이것과 똑같은 문신이 있었나요?"
빌리는 고개를 젓다가, 끄덕였다. 노먼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으나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당신을 치료를 받는 동안 둘은 뭘 하고 있었죠?"
안드로이드는 이제 머리를 완전히 수그리고 중얼댔다. 노먼은 그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잘 안 들려요. 빌리."
"몰라…. 나도, 몰라."
노먼은 심문실을 비추는 유리를 흘끗 바라보곤, 또다시 물었다.
"수리공의 체구는 어느 정도였나요? 당신, 아니 여기 코너와 비교했을 때 그보다 작았나요, 컸나요?"
"몰라! 모른다고, 말했잖아! 몇 번이나! 말했잖아!"
빌리가 갑작스레 고함을 지르며 주먹으로 탁자를 쾅쾅 내리쳤다. 노먼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으나 총을 꺼내진 않았다. 안드로이드는 우그러진 탁자를 내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코너가 다가오자, 노먼이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빌리…. 알았어요. 제가 미안해요."
빌리가 노먼을 노려봤다. "다 들었으면 이제 내보내 줘."
노먼이 한숨을 내쉬었다.
“빌리. 알겠지만, 당신은 마약을 소지한 죄가 있어요. 이게 어디서 나왔는지 제대로 알아내기 전까지 당신을 보내 줄 수가 없어요.”
빌리가 이를 으득, 갈며 위협적으로 지껄였다.
“안전한 곳에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안전해요. 당신을 해칠 사람도 없고, 모든 혐의가 없어지면 언제든 당신을 내보내 줄 거예요. 그러니 몇 개의 질문만 더 대답해 줘요.”
그 말에 빌리는 팔짱을 끼고 등을 뒤로 기댔다.
“난 더 이상 할 말 없어.”
노먼이 빌리의 눈을 들여다봤다. 빌리는 인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봤다. 겁먹고 떨리던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차갑게 번뜩이는 검은 눈동자가 노먼을 응시했다. 노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빌리. 아까 보여준 그 여자. 페이지 클라인이 당신이 섭취한 것과 같은 성분의 마약을 먹고 죽었고, 그의 가정부 안드로이드의 시신을 훔쳐 간 용의자가 바로 당신과 같은 SQ800 모델이에요. 당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다, 약의 획득 경로를 알려주기 전까진 당신은 여기서 나갈 수 없어요.”
빌리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의원 집 안드로이드? 그거 누가 훔쳐 갔는지 말해주면, 풀어줄 거야?”
“알아요?”
“내가 그랬어.”
“네?”
“내가 훔쳐 갔다고. 대가리 박살 나서 뒤진 KR200 말이야.”
노먼이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죠?”
“물어봤잖아? 그래서 대답해 줬고. 자, 이제 내보내 줘.”
노먼은 침묵했다. 빌리는 완전 성격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어눌한 말투도 없어지고, 노먼의 질문마다 빈정거렸다. 약에 취해 횡설수설할 때보다 오히려 멀쩡하게 대답하는 지금,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노먼이 대답이 없자 빌리가 계속해서 떠벌댔다.
“그리고 그 약, 이미 여기저기 다 퍼졌어. 어떤 경로로 누구에게 구했는지 찾으려면 디트로이트 시내 안드로이드를 죄다 잡아 처넣어야 할 걸. 저 새끼도, 이 건물에서 돌아다니는 개들도 말이야.”
“개?”
“인간들 가랑이 사이에서 낑낑대면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개새끼들. 안드로이드라고 부르기도 아까워.”
빌리가 코너를 보며 이죽댔지만 코너는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없이 무표정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노먼이 물었다.
“수리공이 최초 유포자가 아닌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당신을 데리고 생체실험을 한 것 같은데요.”
빌리의 눈이 잠깐 흔들렸으나 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야 고맙지. 그럼 내가 첫 고객인 거잖아?”
“그것보단 첫 실험체죠. 죽으면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빌리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비릿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노먼이 나직하게 질문했다.
“KR200은 무슨 이유로 훔쳐 간 거죠?”
“인간들의 손에선 아까운 피가 죄다 버려질 거 아냐? 그거 하나면 만들 수 있는 양이 얼만데.”
“뭘 만드는데요? 레드아이스?”
“그건 인간에게나 효과가 있고. 우린 거기서 조금 더 자극적인 걸 섞지. 니들은 약해 빠져서 냄새만 맡아도 골로 가버릴 만한 걸.”
노먼은 탁자 위에 놓인 봉지를 집어 들었다.
“성분이라면 이미 분석했어요. 레드아이스에 레바졸, 인간의 혈액.”
“아아, 맞네. 혹시 너도 해본 거야? 어쩐지 아까부터 손이 달달 떨리더라니,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는 줄 몰랐는걸. 어때. 약발 죽이지?”
빌리가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댔다. 노먼은 탁자 밑으로 팔을 내렸다. 그리곤 묘한 표정으로 안드로이드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지?”
“뭘 말이야?”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나불대는 이유가 뭐냐고.”
“알고 싶어했잖아? 니들의 그 조막만 한 뇌 쪼가리로 자꾸 허탕 치는 게 안쓰러워서 말이야.”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던 노먼이 태블릿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너에게 다가간 그가 총을 건네며 당부했다.
“금방 돌아올 테니 허튼짓 못 하게 지켜봐요.”
“네.”
“아, 그리고. 데이터 전송인가 뭔가, 그거 잠깐 하지 마세요.”
코너가 의문 섞인 눈으로 바라보자 노먼이 제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그 왜… 어제 당신이 얘기한 거 있잖아요.”
그제야 코너가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노먼이 심문실을 나와 바로 옆 방으로 건너갔다. 문 앞에는 깁슨의 경호 안드로이드 두 대가 서 있었다. 그중 하나는 SQ800 모델이었다. 빌리와 똑같이 생겼으나 그보다 훨씬 또렷한 눈빛과 각 잡힌 자세로, 진짜 군용 안드로이드 같은 모습으로 문을 지키고 섰다.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유리 앞에 선 퍼킨스가 노먼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그의 옆엔 검은 머리를 낮게 틀어 묶은 깁슨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국장님.”
노먼이 인사하자 깁슨도 고개를 까딱였다. 탁자에 태블릿을 내려놓은 그가 품에서 검은 장갑을 꺼내어 오른손에 착용하고는, 퍼킨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ARI 줘 봐.”
“뭐?”
“빨리. 필요해.”
미간을 좁힌 퍼킨스가 깁슨을 돌아봤다. 깁슨이 눈짓하자, 퍼킨스가 어쩔 수 없이 ARI를 꺼내 들어 노먼에게 넘겨주었다.
노먼이 안경을 착용했다. 고작 하루뿐이었으나 얼굴에 닿는 감촉이 그립도록 익숙했다. 잠시간 제 품을 떠났던 ARI의 흑백 세상을 반갑게 바라본 노먼이 허공에 손을 올려 데이터를 불러왔다. 프로그램을 실행시킨 그가 명령어를 입력했다.
‘녹화 영상 분석. 얼굴 인식, 추출.’
‘추출 데이터 다운로드 중… 다운로드 완료.’
‘데이터 합성: 렌더링 23%…’
‘전파 수신 증폭 시스템 실행. 대상 입력 완료.’
노먼이 프로그램 창 너머, 유리에 비친 심문실 안을 들여다봤다. 빌리는 눈을 감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의 LED가 끊임없이 노란빛으로 돌아갔다. 노먼의 눈앞에 시스템 창 하나가 떠올랐다.
‘데이터 합성: 렌더링 100%’
하나만 남기고 창을 전부 삭제한 노먼이 태블릿 위에 장갑 낀 손을 얹었다. 화면이 반짝이고 ARI 속 데이터가 태블릿으로 옮겨졌다. 노먼이 문을 열고 나서며 퍼킨스에게 말했다.
“리처드. 너도 들어와.”
“왜? 아깐 그렇게 나가 있으라더니.”
“심문 대상이 바뀌었잖아. 저 자식이 내 목을 분지르려 하면 네가 좀 막아줘.”
퍼킨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결국 짙은 한숨을 내쉰 그가 깁슨에게 양해를 구한 뒤 노먼을 따라 나왔다.
두 사람이 심문실로 들어서자, 빌리가 곧장 비아냥거렸다.
“뭐야. 혼자는 무서워서 아빠도 데려온 거야? 그 선글라스는 또 뭐야? 형사 놀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노먼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탁자에 태블릿을 올려 PL600의 사진 하나를 띄웠다.
“우리가 자꾸 허탕치는 게 안쓰럽다고 했지? 근데, 내 생각은 좀 달라서 말이야. 어쩌면 네가 이 자를 숨겨주려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
빌리가 태블릿을 들여다보더니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한 가정부 안드로이드잖아. 누군지 알아야 숨겨주든 말든 하지.”
“정말 몰라? 이 자는 널 아주 잘 알던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잡혀 왔는지 진짜 모르겠어?”
노먼이 태블릿 화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옆으로 밀었다. 영상 하나가 떠오르고 우측 아래에 실시간으로 변하는 날짜와 시각이 표시됐다. 화면 속엔, 정장을 입은 금발의 안드로이드가 기다란 철제 침대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빌리의 눈이 꿈틀거렸다. 노먼이 미소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한낱 거리의 약쟁이였던 네가, 어떻게 FBI의 추적에 잡혔는지 안 궁금해? 우린 침입자가 SQ800이라는 모델명만 알았지, 네 모델은 디트로이트 시에 널렸어. 그런데 왜 하필 그 거리의 너였을까?”
빌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화면과 노먼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다시금 공포심이 감돌았다.
“여기가 어딜 것 같아? 그래. 바로 아래층 구금실이야. 이미 다 불었어. 마약도, 수리공도, 너에 대해서도. 전부.”
빌리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 이마의 LED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고, 노먼은 쉴 틈 없이 추궁했다.
“그런데 너는 이자를 숨겨주려 하네? 왜지? 그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나? 대답해. 그러면 이 자 대신 널 풀어주지. 말마따나 우린 이미 죽어버린 안드로이드를 누가 가져갔는지보단, 대체 어떤 간 큰 안드로이드가 인간에게 죽을만한 마약을 건네주었냐가 더 관심 있거든.”
빌리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의 LED가 끊임없이 노란빛으로 또 붉은빛으로 돌다가 뚝, 멈추고 삽시간에 푸른빛을 되찾았다.
빌리가 갑자기 씩 웃었다. 그가 이를 드러내곤 노먼을 똑바로 바라봤다.
“거짓말. PL600이 여기 있다고? 웃기시네.”
노먼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ARI가 깜빡이고, 높아진 장갑의 온도에 가죽 아래에 닿은 손등의 피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빌리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내 앞에 이 자를 데려와 봐. 그럼, 전부 말해주지.”
그리곤 입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그 이후로는 노먼이 아무리 추궁하고, 협박하고, 회유해도 그저 빙글빙글 웃으며 아무런 대답도 내뱉지 않았다.
노먼은 지친 표정으로 ARI를 벗었다. 품에 안경을 집어넣은 그가 코너에게 손짓했다.
“심문은 끝났어요. 이만 수갑 채우고, 구금실로 데려….”
그 순간 빌리가 벌떡 일어나 의자를 냅다 집어 던졌다. 코너가 의자를 잡아챘으나 그 반동에 퍼킨스와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빌리는 물러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노먼에게 팔을 휘둘렀다. 노먼이 가까스로 고개를 틀어 피했고 주먹은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벽에 쳐박혔다. 깨진 타일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짐승 같은 민첩함으로 빠르게 자세를 바꾼 빌리가 반대쪽 주먹을 내질렀다. 노먼은 왼쪽 팔을 굽히고 상체를 낮췄으나 팔꿈치를 강타한 충격과 함께 몸이 옆으로 밀려나고 탁자에 세게 부딪혔다. 옆구리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잠시, 그의 몸이 붙들려 올라갔다.
“당장 내려놔!”
퍼킨스가 빌리에게 총을 겨누며 외쳤다. 안드로이드는 노먼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가까이 오면 부러뜨릴 거야!”
노먼의 두 다리가 공중에서 버둥거렸다. 노먼은 빌리의 팔을 부여잡고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들이쉬었다. 퍼킨스는 노먼의 몸에 반쯤 가려진 안드로이드의 머리 대신, 총을 내려 훤히 드러난 그의 발등을 쐈다. 양쪽 발에 총알이 박혔으나 빌리는 꿈쩍도 않고 여전히 노먼을 붙든 채로 낄낄거렸다.
“가렵지도 않아!”
손아귀가 옥죄어들고, 노먼은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컥컥대는 숨소리가 터져 나오며 몸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퍼킨스는 얼굴을 구기며 노먼에게 가려졌다 드러나는 빌리의 노출된 상체를 저격할 만한 타이밍을 재려 온 신경을 집중했다.
문이 벌컥 열리고, 경호 안드로이드와 깁슨이 들어섰다. 빌리는 벽에 바짝 붙어 서서 노먼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을 덮었다. 안드로이드의 팔뚝에 힘줄이 불거졌다.
그가 노먼의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이 새끼 모가지가 분질러지는 꼴 보기 싫으면, 다들 저리 꺼…”
탕!
작은 심문실 안으로 커다란 총성이 울리고, 노먼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의 몸 뒤로 짙은 혈흔이 벽에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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