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콜로니. 11
#11. 변절자
노먼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진 그가 목을 부여잡고 거칠게 기침했다. 순식간에 그 앞으로 달려간 퍼킨스가 노먼의 몸을 뒤집어 눕히곤 재킷을 열어젖혀 상체를 샅샅이 살폈다. 흰 셔츠에, 눈에 띄는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숨을 몰아쉰 퍼킨스가 위를 올려다봤다.
꼿꼿하게 선 빌리의 우측 이마에 뚫린 구멍으로 티리움이 뚝, 뚝 새어 나와 떨어졌다. 검은 눈동자는 빛을 잃었으며 LED는 회색으로 변한 채 모든 움직임이 완벽히 멎었다. 빌리의 뒤통수에서 튀어나온 피로 벽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퍼킨스가 고개를 돌렸다. 코너의 왼손에 들린 총구에선 여전히 새하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코너가 총을 내려 탄창을 제거하고 깁슨에게 넘겨주었다. 깁슨은 얼결에 이를 받아들였다.
빠득, 이를 갈며 일어난 퍼킨스가 코너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가 안드로이드의 멱살을 잡아챘다.
“노먼이 맞을 수도 있었어!”
코너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저는 절대 표적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 새끼가—”
“…그만해. 리처드.”
노먼이 콜록대며 퍼킨스를 말렸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나왔다. 깁슨이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윽….”
깁슨의 손이 그의 허리를 스치자 노먼이 몸을 수그렸다. 오른쪽 옆구리를 잡고 인상을 찌푸린 그 표정에, 깁슨이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선 안드로이드에게 명령했다.
“그렉. 구급 지원 요청해.”
안드로이드의 LED가 노랗게 깜빡이더니, 잠시 뒤 입을 열어 대답했다.
“요청했습니다. 5분 내로 의료팀 도착 예정입니다.”
겨우 숨을 고른 노먼이 깁슨에게 말했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나중에 해.”
“아뇨. 지금 해야 해요. 국장실로 자리를 옮기죠.”
깁슨의 손을 풀고 걸음을 옮기려던 노먼은, 한 발짝 내딛자마자 바로 비틀거렸다. 깁슨이 그의 몸을 잡아챘다.
“왜 퍼킨스가 답답해하는지 알겠군. 말을 진짜 안 듣네.”
퍼킨스가 음울한 눈으로 깁슨을 바라봤다. 노먼이 고개를 저었다.
“의료팀은 잠시 기다리라고 해요. 딱 10분이면 됩니다.”
깁슨이 노먼의 진지한 얼굴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렉, 넌 제이든 요원을 부축해서 국장실로 데려가고, 잰은 여기서 대기하다 의료팀이 도착하면 그쪽으로 오라고 좀 전해줘.”
“네.”
그렉이 앞으로 나서자, 퍼킨스가 팔을 들어 막았다. 그가 깁슨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국장님. 지금 저자와 같은 SQ800의 손에 노먼의 목이 부러지기 직전까지 갔어요.”
깁슨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곤 노먼에게 사과했다.
“이런. 내가 너무 무심했네. 미안해. 그럼 그렉 대신 잰을….”
노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빨리 자리를 옮겨요.”
그리곤 문가에 선 안드로이드에게 말했다.
“그렉. 괜찮다면 저 좀 부축해 줄 수 있을까요? 고마워요.”
그렉이 손을 내밀었고, 노먼은 그 팔에 의지해 절뚝이며 심문실을 나갔다. 깁슨과 퍼킨스가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노먼이 불현듯 뒤를 돌아보곤 여전히 심문실에 선 코너에게 말했다.
"당신도 따라와요, 코너."
"알겠습니다."
퍼킨스는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코너를 흘겨봤으나 그들 곁으로 다가오는 안드로이드를 막아서진 않았다.
복도엔 총소리를 듣고 몰려온 요원들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깁슨이 손을 들어 옆으로 물렸다.
"잠깐 소동이 있었지만, 해결됐어. 다들 자리로 돌아가."
요원들은 여전히 호기심 어린 표정 반, 걱정스러운 표정 반으로 그렉이 부축하는 노먼을 살펴봤으나 눈에 띄는 심각한 부상은 없었기에 이내 하나 둘씩 흩어졌다.
복도를 나선 세 명의 인간과 두 안드로이드는 넓은 사무실이 훤히 내다보이는 국장실로 들어갔다. 깁슨이 손을 들어 유리의 투과율을 조종하자 투명하게 비춰 들어오던 사무실의 풍경이 희뿌연 유리 벽으로 바뀌었다.
그렉이 노먼을 책상 맞은편에 앉혔고 노먼은 여전히 욱신대는 옆구리를 쓸어내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고마워요. 그렉. 괜찮다면, 잠깐 자리를 비켜줄 수 있을까요?”
그렉이 깁슨을 돌아봤으나 깁슨은 고개를 저었다.
“내 밑에서 일하는 안드로이드는 괜찮아. 안심하고 말해도 돼.”
그렉과 깁슨을 잠시간 번갈아 보던 노먼이 ARI를 꺼내들어 착용했다. 국장실 내부에 도청기나 어떤 감청 장치도 없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안경을 도로 벗었다.
피로한 눈을 한차례 감았다 뜬 그가, 차가운 표정으로 깁슨을 올려다봤다.
"FBI 내부에 변절자가 있습니다."
"뭐?"
"변절자든, 원래부터 그런 목적으로 들어왔든. 어쨌거나 빌리에게 누군가 데이터 전송을 시도했어요. 두 번이나. 처음엔 그에게 자백하라 전달했고, 나중엔 PL600이 잡히지 않았단 것도 알려주었을 겁니다."
깁슨의 이마에 주름이 파였다. 그가 손을 들어 노먼의 말을 막았다.
“아니, 아니 잠시만. 내가 처음부터 진술을 들은 게 아니어서 말이야. PL600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까 그 안드로이드에게 보여준 영상은 뭐였지?”
“그냥 ARI로 합성한 거예요. 하필 빌리가 진술한 PL600 안드로이드와 제가 어제 본 안드로이드와 인상착의가 비슷해서 사용해 봤습니다. 먹힐 줄은 몰랐지만요.”
“어제 본 안드로이드?”
“네. 시 외곽에 위치한 공장에서 감시 카메라 영상을 입수했어요. 클라인 의원 사망 전날, 그와 접선한 안드로이드입니다.”
“뭐?”
“그건 나중에 찬찬히 설명드릴게요. 어쨌든, 변절자가 있다면 도망가기 전에 색출해 내야 해요. 그자는 아마 우리가 빌리를 데려온 걸 목격했거나,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심문실에 있던 빌리의 존재를 알아내고 연결을 시도했을 겁니다.”
"데이터 전송이라면 건물 밖에서 온 신호일 수도 있지 않나?"
"아닙니다. ARI가 찾아낸 전파는 그보다 훨씬 가까워요. 이 건물 안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다섯 개 층 내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럼, 위아래로 총 열 개야. 전산실과 구금실을 빼도 일곱 개 층이고, 그 안에서 근무하는 직원 수가 최소 백 명은 넘어. 좀 더 특정할 만한 단서가 없나?"
"네. 데이터 송신을 시도한 자는 안드로이드일 가능성이 큽니다."
"근거는?"
"통상적인 네트워크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그랬다면 ARI가 위치를 찾아냈을 겁니다. 상대방은 전혀 다른 전파송신 채널을 사용했고, 이는 안드로이드가 쓰는 방식 중 하나예요. 코너가 알려줬습니다."
깁슨이 돌아보자, 코너가 수긍했다.
"안드로이드의 원격 대화는 인간이 쓰는 전파수신기론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ARI가 잡아냈단 게 흥미롭긴 하네요."
노먼이 고개를 저었다.
"신호해독까진 실패했어요. 무슨 내용을 주고받았는지도, 어디서 전파가 시작되었는지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깁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상이 안드로이드라면 훨씬 범위가 좁혀지긴 해. 대충 열…, 아니 스무 대쯤 되겠군. 하…. 안드로이드 심문은 골치아픈데."
가만히 듣고 있던 퍼킨스가 덧붙였다.
"우리가 들어온 동선을 따져보면 좀 더 쉬울 겁니다. FBI 정문을 지키고 선 안드로이드, 엘리베이터에 함께 탔던 시설팀 직원, 바로 이 층의 사무실에도 상주하는 안드로이드 두 대가 있죠. 국장님의 안드로이드를 제외하고서도요. 그리고 건물 내 감시카메라를 확인할 수 있는 보안팀이랑, 수감 시설을 관리하는 안드로이드가 있다면 그 역시 찾아봐야 합니다."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PL600이 잡히지 않았단 걸 바로 알릴 수 있는 자는 아마도 내부 인트라넷 접속 권한을 가진 자일 거예요. 하지만 만약…."
“만약?”
“만약 변절한 안드로이드가 한 대가 아니라면, 사실 이 모든 가정이 무의미하긴 합니다. 정문부터 여기까지, 그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을 수도 있죠. 그럼 색출해 내기가 더욱 까다로워질 겁니다.”
깁슨은 머리를 짚었다. 한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저었다.
“FBI 내 모든 안드로이드는 배경 조사를 철저하게 거치고 들어와. 변절자가 넘쳐나진 않을 거야. 일단, 빌리에게 바로 정보를 건네줄 수 있을 만한 안드로이드부터 찾아보는 걸로 시작하지.”
깁슨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그가 프로그램을 실행하자 모니터에 직원 명단이 좌르륵 떠올랐다.
"자네들 얘기대로 추려본다면… 정문을 관리하는 자는 일단 아니야. 내부 접근 권한이 없어. 이 층에서 일하는 안드로이드도 간단한 사무보조라 마찬가지고. 흠, 의외로 보안팀에는 안드로이드가 하나도 없군. 제일 많을 거로 생각했는데. 임시 수감시설을 관리하는 안드로이드는 딱 한 대 있어. 당연하지만, 접속 권한도 갖고 있고."
"어떤 모델이죠?"
깁슨이 키보드를 두드려 검색했다. 잠시 뒤 사진 한 장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퍼킨스가 화면을 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허, PL600이네. 우연치곤 너무 공교로운데."
노먼이 의아하게 화면을 쳐다봤다.
"가사도우미 안드로이드가 어쩌다 FBI 수감시설 관리직에 지원하게 된 건가요?"
"나야 모르지. 직원을 뽑는 건 각 부서 담당자가 하는 거니."
노먼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작스레 욱신대는 목을 움켜쥐었다. 대화하며 긴장이 차츰 풀리니 뭉쳐있던 어깨마저 결려오기 시작했다. 노먼이 손을 돌려 목덜미를 주물렀다. 퍼킨스는 그 목에 난 시뻘건 손자국을 쳐다봤다.
"넌 의료팀부터 봐. PL600에 대한 조사는 내가 할 테니."
"그래, 제이든. 자넨 우선 치료부터 해."
"아뇨. 괜찮습니다. 저도 직접 가서 봐야…."
"조용히 해. 명령이야."
깁슨이 매섭게 노려보며 덧붙였다. "겉보기엔 문제없어도 내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내가 볼티모어에서 근무할 때, 요원 한 명이 러시아에서 보낸 첩보 안드로이드에게 목이 붙들렸다가 풀려났는데 너처럼 괜찮다며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다 나자빠졌어."
퍼킨스가 눈을 찌푸렸다.
"그는 어떻게 됐습니까?"
"뭘 어떻게 돼? 경추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전신마비 상태로 5년째 병상에 누워있지."
퍼킨스가 노먼을 돌아봤다. 노먼은 몸을 뻣뻣하게 굳히곤 목각인형처럼 자리에 반듯하게 앉았다. 그는 이제 머리를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눈만 도륵 굴려 깁슨을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그럼, 국장님께서 메모리 검사 관련 승인을 받아주실 수 있나요? 빌리의 기록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국장실의 문이 열리고 짙은 남색 유니폼을 입은 의료 지원팀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요원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어디 있습니까?"
깁슨이 노먼을 가리켰다. "목이랑 허리를 좀 봐줘."
요원 중 한 명이 눈을 찌푸렸다.
"부상 장소에서 함부로 옮기시면 안 됩니다."
"다음부턴 조심하지."
노먼의 목부터 샅샅이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본 요원이 셔츠를 들어 상처를 입었다는 옆구리의 멍 자국을 살펴봤다. 소형 의료 기기를 들이대며 확인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뼈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정밀 검사를 받아보길 바랍니다. 연부조직과 근육에 손상을 입었어요. 염증 반응도 있고요."
깁슨이 노먼에게 말했다.
"인근 병원에 가서 검사받고 와. 그동안 난 승인 절차 밟고 올 테니."
"네…. 알겠습니다."
깁슨의 협박성 짙은 충고 이후 노먼은 한층 고분고분해졌다. 깁슨이 먼저 국장실을 떠나자, 노먼은 천천히 일어나 지원팀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퍼킨스도 밖으로 나섰다. 노먼이 몸을 돌려 퍼킨스에게 당부했다.
"혹시 모르니 코너도 데려가. 안드로이드에 관한 거면 도움이 될 거야."
퍼킨스가 뒤따라 나오던 코너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봤다.
"이 자식을 어떻게 믿고? 빌리나 변절자와 연관이 없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는 아니야. 일단 FBI 인트라넷에 접근 권한이 없고, 데이터 전송을 조금이라도 시도했거나 혹은 시설을 해킹하려 접속했다면 ARI가 바로 잡아냈을 거야."
그럴싸한 논리에 납득한 퍼킨스는 마뜩잖은 얼굴로 수긍하다가, 그 말뜻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채고 표정을 굳혔다.
"그가 데이터 전송을 하는지 안 하는지, ARI로 확인하려 했다고? 그걸 직접 쓰고?"
노먼은 피로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원팀에게 양해를 구한 그가 퍼킨스의 팔을 잡아끌어 구석으로 데려갔다.
"변절자가 있다는 걸 안 이상, 그리고 코너가 이 사건을 함께 수사하는 이상 우리 편인 걸 확실히 해야 했어."
퍼킨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 뇌가 그 자리에서 튀겨질 수도 있었어."
그 말에 노먼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젠 코너가 좀 과장해서 말한 거야. 절대 그렇게 심각한 상황 아니었어."
"심장이 멎는 것보다 심각한 상황이 있나?"
퍼킨스의 빈정거림에 노먼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조용히 해. 남의 의료정보를, 동네방네 다 떠벌릴 작정이야?"
“의료 정보 같은 소리하네.”
퍼킨스는 여전히 노먼을 노려봤다. 노먼이 재차 한숨을 내쉬곤 ARI를 꺼내 들어 퍼킨스의 재킷 안쪽에 꽂아 넣었다.
"자. 이제 됐지?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갖고 있어."
그의 앞섶을 한차례 툭툭 친 노먼이, 퍼킨스가 더 잔소리하기 전에 몸을 돌려 지원팀을 따라 사무실을 나갔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