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화 - 마이너스와 마이너스 (1)
작은 균열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더 매섭다던가. 숨을 고르는 잇새 사이로 들이쉬는 열기 가득한 바람은 마치 불길 휩싸인 폭풍처럼 폐부 깊숙한 부분까지 훑었다. 메마른 혀 끝에서 텁텁하고 까끌거리는 모래 알갱이가 굴러다녔다.
부서진 장벽위로 올라선 이의 그림자가 벽을 타고 내려와 지면에 고였다. 망설임없이 뛰어내릴 높이는 아니었기에 하마터면 구명줄인줄 알고 잡을뻔했다.
“저쪽이다!”
꼭대기에 선 마법사가 자신을 향해 외치는 추적자의 소리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이던 후회던 접을 필요가 있었다. 이글거리는 모래밭을 바라보던 마법사가 로브를 당겨 더욱 깊이 눌러썼다. 그림자 아래에서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 마침내 확신이 비췄다.
‘휘잉-’
뛰어내리는 마법사를 바람이 불어와 감싸안았다. 그 덕분인지 모래위에 딛은 발자국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마법사가 움직였다. 어느 새 등 뒤까지 바짝 다가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법사를 향해 욕설 가득한 고함을 외치고 있었다. 밟는 자리마다 폭폭 파이는 모래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마법사를 붙잡았지만 그는 그것을 떨쳐냈다.
지금이 아니면,
그러니 반드시,
가야한다.
결의가 다져진 눈빛이 로브 그늘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제게 주어진 모든 것을 내버리고 떠나가는 이의 어깨는 텅 비어 있었다. 모래는 더 이상 그를 삼킬 수 없었고, 등 뒤의 장벽은 점점 희미해져 의미를 잃고 있었다.
흙먼지가 가라앉고서야 마법사가 사라진 자리에 당도한 추적자들은 이를 득득 갈아댔다.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크게 분노하며 외쳤다.
“현 시점부터 수석 마법사를 긴급 수배한다!!”
-
<5년 전>
‘똑-똑똑-똑-’
오래된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에 노아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가물거리는 의식에서 잠으로 옮겨가려는 찰나였다. 가슴을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올린 노아가 머리 끝까지 깊이 뒤집어썼다. 어둠속에서 손에 짚이는 대로 덮은 탓인지 덮여져 있던 발끝이 드러나며 찬 공기에 휩싸였다. 그 끝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몸을 웅크 렸던 노아가 끈질기게 이어지는 노크 소리에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똑-똑-똑-’
“..아, 나간다고…!”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힌 문 너머에는 푸른 단복을 갖춰 입은 마법사가 서 있었다. 지난 밤의 당직이었던 걸까, 짜증섞이 눈 아래에 그늘이 제법 짙었다. 필시 일을 마치고 서둘러 숙소로 향하던 도중에 붙들려 이리 온 것이리라. 업무가 아닌 이상 제발로 노아의 방문을 두드리는 이례적인 일을 할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문가에 삐딱하게 선 노아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한숨을 푹 내쉰 마법사가 편지봉투 하나를 던지듯이 건넸다.
“일어났으면 문 좀 빨리 열던가. 뭐 하자는 거야, 지금?”
“대강 놓고 가면 알아서 챙길텐데 뭘 하는건 그쪽이지 않습니까?”
“아르크 대마법관님의 전갈이다.”
“...이 노인네가..”
피곤에 찌들어 소모될 기력이 남지 않은 모양인지 마법사는 용건을 마치자마자 발걸음을 돌렸다. 문가에 홀로 선 노아가 편지봉투 끝을 세게 잡았다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왔다.
마법이라는, 그리고 샬레인이라는 편한 수단이 있는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꼭 사람을 시켜 소식을 전하게 하는 건 아르크 대마법관의 질 나쁜 습관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러는 걸 보면 분명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침대 발치, 창문 옆에 놓인 나무 책상 위에는 잠들기전에 읽던 책이 펼쳐져 있었고, 무언가를 적은 종이들과 펜은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었다. 책상 위를 에워싼 책들은 하나같이 두껍고 단단한 표지로 싸여있어서 마치 성벽같았다. 밤새 책표지에 내려앉은 얇은 먼지를 쓸어낸 노아가 편지봉투를 그 위에 두고 서랍을 뒤적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푸른 보석이 장식된 작은 열쇠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봉투를 단단히 여민 붉은 인장에는 마치 열쇠구멍처럼 가운데가 빈 마법식이 새겨져 있었다. 노아가 열쇠 끝을 마법식에 대고 오른쪽으로 비틀자, 보석이 환히 빛나다가 잠잠해졌다. 열쇠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후, 손끝으로 봉투를 연 노아가 안에 들어있던 종이를 꺼내 펼쳤다. 푸른 잉크를 고풍스럽게 휘갈겨 쓴 글씨가 눈에 띄었다. 아직 졸음이 남은 눈을 느리게 깜빡인 노아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수석 마법사에게,
자네에게 급히 부탁할 용건이 있으니 이 내용을 확인하는 즉시 내 집무실로 와주길 바라네.
자네의 스승이자 대 마법관인 아르크로부터.]
“이런 얘기는 제발 통신 샬레인을 써, 망할…!”
눈동자에 남아있던 모든 잠이 달아나버렸다. 노아가 재빨리 얼굴을 닦고는 벽에 걸린 단복을 낚아채며 방 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동시에 지붕 위의 눈뭉치들이 후두두, 바닥을 향해 쏟아져내렸다.
한 바탕 소란이 휩쓸고 간 어두운 방 안에는 노아에게 왔던 편지만이 허공에서 천천히 흘러내리듯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동이 완전히 떠올라 투명한 유리를 꿰뚫은 햇빛이 복도에 넓게 퍼졌다. 지난 밤의 당직을 맡았던 마법사들이 행정실과 파견 대기실에서 나오며 출근행렬 사이에 뒤섞였다. 넓은 복도도 아침만큼은 분주하고 사람으로 꽉 들어찼다. 그러나,
‘아침부터 재수없게-’
‘저건 또 왜 저런대냐?’
‘내가 아나, 뭐. 알고 싶지도 않다.’
‘야야, 그냥 들어가. 저런 거 쳐다볼 시간도 아깝다.’
노아가 복도에 들어서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정적 사이에서 간간히 들리는 것이라곤 적의가 담긴 수군거림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아는 쉬지않고 걸어갔다. 무시 하기엔 오히려 익숙해져서 일일이 대꾸할 가치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저들은 노아를 향해 시간낭비라고 하지만 노아에겐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별 의미 없어.’
주먹을 꾹 말아쥔 노아가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서서히 멀어지던 노아가 마침내 복도 끝에서 사라지자, 마법사들은 제 할일을 찾아 움직였다. 복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분주해졌다.
-
오르고 오른 계단의 끝에 다다르기 시작하자 흰 끄트머리가 보였다. 일정 간격을 두고 떨어진 세 개의 대리석 문은 한눈에 보기에도 육중해 보여서 저걸 어떻게 쓰나 싶을 정도였다. 잠시 숨을 고른 노아가 가운데 문 앞으로 향했다.
‘똑똑똑-’
나무문도 아니었건만, 노크 소리는 가벼웠다. 안에서 들리기라도 하려나 싶을 즈음 문에서 마법식이 빛나더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게.”
마법식의 빛이 문 가운데를 가르자 작은 손잡이가 생겼다. 그것을 잡고 양쪽으로 문을 밀어젖힌 후 안으로 들어선 노아의 시야에 산처럼 가득 쌓인 서류와 책 무더기가 들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엉망인 집무실 사이를 헤치고 선 책상도 다를바 없었다. 바닥보다는 덜하긴 해도 어수선한건 마찬가지라 나중에 집무실 청소를 하게되면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조차 가늠이 안 됐다.(물론 의무는 아니었지만, 제 스승은 가끔 스스로도 감당못할 정도로 집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노아가 수고를 감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그나마 멀쩡한 구석에 내려놓으려던 찰나, 누군가의 손이 노아의 등 뒤에서 편지를 낚아챘다.
“아침에서야 전달받아서 늦었습니다, ‘아르크 대마법관님’.”
익숙하다는 듯, 노아가 천천히 뒤를 바라보자 노년의 마법사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새고, 눈가에 세월의 골이 새겨지는 시기임에도 두터운 안경알 뒤의 눈동자는 선명히 빛나는 것이 장난기가 다분한 성정임을 짐작케 하고 있었다.
“싸우다가 늦은 건 아니고?”
“그러길 원하신 게 아니라면 다음부턴 통신 샬레인으로 직접 전달해 주시지요.”
“그렇게라도 서로 얼굴 보고 살아야 미운정이라도 들게 아닌가.”
“급한 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인내심에 한계가 다다른 듯, 노아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제자의 심통을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인 아르크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노아에게 내밀며 껄껄 웃었다. 붉은 실로 엮은 서류뭉치는 무얼 정리한 것인지 양 손으로 받아들었음에도 제법 묵직했다.
“그래, 내 정신 좀 보게. 일단 이걸 받아 주겠나? 아, 차는 뭘로 하겠나?”
“차는 됐습니다.”
“이거 원, 제자랑 차 한잔 나누는것도 어려운 스승은 나밖에 없을걸세.”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도 온 걸로 기억합니다만?”
“이럴땐 그냥 모른척 넘어가주는걸세, 노아.”
“저 바쁩니다.”
스승의 아쉬운 소리를 한 귀로 흘려보낸 노아가 응접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무릎에 올려둔 서류를 펼쳐 천천히 내용을 훑었다. 차락차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잔잔히 이어졌다. 서류를 반 정도 넘겼을 즈음, 맞은편 자리에 앉아 안경을 고쳐 쓴 아르크가 노아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거기서, 잠시.”
종이 귀퉁이를 잡고 페이지를 넘기려던 노아의 손이 멈칫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노아가 아르크를 바라보자 다시 읽어보라는 듯, 아르크가 손을 까딱였다. 노아의 시선이 다시 종이로 향했다. 흰 종이 위에는 누군가의 신상정보가 상세히도 담겨 있었다. 왼쪽 구석에 첨부된 사진을 보자 사각 무테 안경을 쓰고 어깨까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기른 사람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알 뒤에서 비추는 눈동자가 오묘하게 빛나는 짙은 녹빛이라는 것과 노아와 비슷한 연배로 보인다는 것 외엔 특이점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다만, 어깨부근에 보이는 흰 옷깃으로 연구동 소속 연구원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연구동 소속 연구원 아닙니까?”
“일반 연구원이 아니라 수석 연구원일세.”
“수석…”
노아가 신상정보란의 이름을 확인했다.
[레인]
직사각형 빈칸 안에는 성도 없이 오로지 ‘레인’이라는 이름 두글자만이 있었다. 하지만 나우에 어디 성없는 이름이 특별할 일이던가. 노아만 하더라도 다를것 없었다.
“별다를 것도, 급한것도 없어보입니다만.”
“특이 사항란을 보게.”
아르크의 말에 이번에는 서류 하단으로 눈을 돌렸다.
[특이사항 : 고대 정령 중 하나인 ‘운디네’의 계약 정령사]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