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파벨란] 자각
⚠ 스포일러 주의!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 본편 메인 스토리 이후 약간의 정황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시점: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 본편 엔딩과 침입자 DLC 사이
요약: 도리안이 테빈터로 돌아간 이후 심적으로 외롭고 힘든 나날을 보내던 심문관 라벨란은 꿈에서 그를 만나겠다는 목적으로 혈마법을 사용하게 된다.
라벨란 설정: 남성 마법사 엘프 인퀴지터. 도리안과 로맨스, 모든 동료들과 친구 관계. 정이 많은 성격으로 심문관이라는 직책에 늘 부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세계관상 설정 고증이 안 맞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밤중의 심문관의 처소에는 작은 불빛이 깃들어 있었다. 벽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흐리게 아른거리며 드리워진 채였다.
누가 엿들을 것도 없는데, 심문관 라벨란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단검을 들어 천천히 자신의 반대편 손으로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 끝으로 흘러내린 혈액이 잔에 담겨 있던 액체 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심문관은 눈썹을 찌푸린 채 잔을 집어 들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이윽고 그 자리에서 한 번 휘청이는가 싶더니 몸을 어떻게든 침대 쪽으로 이끌고 가 그 위로 쓰러지다시피 누웠다.
라벨란은 곧바로 잠이 들었다. 깨어 있는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소용돌이치던 수많은 생각들은 순식간에 물 밑으로 가라앉듯 사그라들었다. 그의 의식은 이제 온전히 꿈속에 있었다.
"수호자님!"
라벨란은 더없이 친숙한 천막 안에서 눈을 떴다.
"수호자님?"
바깥에서 수호자를 찾는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라벨란의 천막 앞에서 멈추어 섰다.
"할라를 살해한 솀렌들을 붙잡았다고 합니다."
라벨란은 차분히 밖으로 나섰다. 앳되어 보아는 엘프가 경직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벨란은 그가 비교적 근래에 발라슬린을 새겼으며, 그가 고통을 침묵으로 감내하는 동안 미살을 상징하는 문양을 그려 나간 장본인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음을 차례로 떠올렸다.
"솀렌들이라고요?"
"예, 두 명입니다."
부족원들은 잡아 왔다는 인간을 빙 둘러싸고 저마다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들은 수호자가 나타나자 목소리를 낮추며 길을 터 주었고, 무릎을 꿇린 채 손이 묶여 있는 두 인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당장 처형해야 합니다!"
"저들은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우리 영역에 발을 들였습니다!"
"죽여서 본보기로 삼읍시다!"
부족원들이 저마다 외쳤다. 라벨란은 두 인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그들의 행색을 꼼꼼히 살폈다.
"당신들은 테빈터인입니까?"
"그렇소."
두 인간 중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쪽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이려면 지체 말고 죽이시오. 우리가 그대들의 규칙을 어긴 것은 사실이니까."
"이들을 안쪽으로 끌고 가세요."
라벨란 수호자의 말에 왜 당장 죽이지 않느냐는 부족원들의 원성이 돌아왔다.
"이들의 옷차림을 보십시오. 이들이 귀족이라면 상당한 몸값을 받아낼 수 있을 겁니다."
라벨란은 돌아서며 덧붙였다.
"이자들의 목적이나 할라 살해에 관해서는, 제가 따로 심문해 보겠습니다."
라벨란은 자리를 옮긴 다음 자신만 테빈터인들 앞에 남고 다른 엘프들을 물러가게 했다.
"할라를 죽인 것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까?"
그들은 여전히 손이 묶인 채였다.
"실수이자 사고였소. 우리는 적들을 경계하며 움직여야 했고, 수풀 너머의 기척을 느낀 내 아들이 순간적으로 마법을 쏜 거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쪽이 어려 보이는 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불리한 처지임에도 묘한 자신감을 띤 것처럼 눈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의 오른쪽 눈가에 있는 점 하나가 유독 돋보였다.
"그래서, 당신들은 정말로 테빈터 귀족들입니까?"
"왜 아니겠소. 빈말로라도 부정했다간 무덤에서 들고 일어날 작자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오. 그 이름도 위대하신 파버스 가문의 종자들 되겠소. 몸값이라면 원하는 대로 쳐 줄 거요."
라벨란은 테빈터의 귀족 가문 이름에 대해 알 턱이 없었으니, 그가 이런 상황에서마저 자신의 가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내비치려 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는 동안 아들이라는 쪽은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테빈터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 겁니까?"
"이 근방에서 베나토리 놈들의 활동 정황을 포착했기 때문이오."
그는 20년 전 콘클라베 사건으로 온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갈 뻔했던 코리피우스라고 하는 자와 맞서 싸운 당시 심문회의 일원이었고, 현재까지도 테빈터 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추종자 잔당들과의 싸움을 계속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라벨란이 질문을 통해 그 모든 대답을 끌어내기까지 실제로는 며칠이 흘렀는데, 붙잡혀 있는 귀족들을 돌려달라는 인간들은 전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 자들을 언제까지 살려두실 겁니까?"
부족원들이 불만을 품는 것도 무리가 아닐 지경이었다.
"수호자님은 솀렌들을 지나치게 믿으십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더군다나 테빈터인들에게요."
더이상 할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부족원들은 이 인간들을 죽임으로써 온 인간 사회에 일말의 복수라도 이루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보통의 데일스 엘프 부족이 살아남아 온 방식이었고, 라벨란 자신 또한 데일스 엘프로서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정서도 아니었다. 라벨란은 수호자가 된 뒤로 부족을 이끌기 위한 수많은 결단을 해 왔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처형해 본 적이 없었다. 콘클라베 사건 이후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인간들의 행패가 나날이 심해져 가고 있음에도 그는 명백히 영역을 침범한 인간들을 곧잘 놓아주고는 했다.
부족원들이 자신을 유약하고 못 미더운 수호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것을 그 스스로도 짐작하고 있었다. 라벨란에게 부족의 수호자라는 자리는 끊임없는 책임감과 고뇌만을 의미했고, 그 결과는 대부분 반성과 후회로 끝나기 일쑤였다.
라벨란이 편히 잠들지 못하는 밤을 두 번 더 보낸 이후 마침내 그들을 처형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음에도 인간 마법사는 태연해 보이기만 했다.
"글쎄, 이 기회에 나를 내버리기로 했나 보군. 그 작자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처형 집행을 맡은 라벨란 부족의 한 사냥꾼이 칼을 손에 쥐고 두 인간 뒤에 서 있었다. 라벨란 수호자는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 데일스 엘프의 영역에 무단으로 침입하고 할라를 살해하였으며 이는 명백한…."
라벨란은 테빈터 마법사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왜 웃고 있죠?"
"아, 그 시절 우리 심문관이 생각나서 말이오. 그도 데일스 엘프였거든."
그렇게 말한 직후, 테빈터 마법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뭔가 이상한데…."
라벨란은 어째선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한순간에 달라진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이곳에…. 아니."
테빈터인은 자신의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는 누구지?"
그는 당황한 듯 머뭇거리는 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들이라고? 그럴 리가! 정체가 뭐지? 이 상황은 현실이 아니야!"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라벨란의 머릿속에서도 어렴풋한 위화감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라벨란은 아들을 주시하면서 자신의 지팡이를 쥐어 들었다. 그러자 불길한 빛이 아들의 몸을 뒤덮더니 눈 깜짝할 사이 악마의 형상이 되었다.
"악마잖아!"
경악한 엘프들의 비명과 함께, 온 사방에서 화살과 마법이 악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라벨란은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테빈터 마법사의 가슴에 화살이 꽂히는 것을 본 순간 그의 이름을 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도리안!"
라벨란은 숨을 몰아쉬며 심문관의 처소,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자신이 방금까지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그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명백히 인지할 수 있었다.
일단 그에게는 돌아갈 수 있는 라벨란 부족이 없었다.
한때 라벨란은 언젠가 이 심문회 일이 끝나게 된다면 부족으로 돌아가, 첫째 제자로서 수호자의 직책을 이어받고 부족을 이끌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벨란 부족은 인간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괴멸했다.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이후, 심문관인 자신의 판단에 의해 모든 사태를 방지할 수도 있었음을 깨닫게 된 이후, 라벨란은 하루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코리피우스와의 결전이 끝나고 도리안이 테빈터로 돌아간 뒤 라벨란은 마음을 좀먹듯이 자라나는 그 죄책감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심문관으로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그는 부족 사람들을 떠올렸고 자신은 애초부터 지도자의 자리가 맞지 않았던 것임을 스스로 되뇌는 습관이 생기고야 말았다.
라벨란이 지금껏 엄두도 못 내던 혈마법이라는 것을 써서라도 이루고 싶었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자신과 도리안의 의식을 연결해 꿈속에서 만나는 것. 그걸 이런 식으로 불쾌하게 보여주다니. 심지어 초대한 적 없는 악마까지 와 있었다. 역시 혈마법이란 건 믿을 게 못 되었고 이런 얄팍한 유혹에 넘어간 자기 자신이 몹시 한심하게 여겨졌다. 도리안이 알게 되면 뭐라고 할까? 라벨란은 마법에 쓰인 도구들을 치우며 혈마법에는 다시는 손끝도 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 도구들이 다시 책상에 오른 것은 그 다짐으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첫 혈마법 의식 이후 라벨란의 머릿속에는 그날의 짧고도 강렬한 기억이 자리 잡았다. 도리안이 자신이 있는 상황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던 찰나, 당혹감과 함께 라벨란 자신을 향한 그리움과 반가움이 스쳐 지나가던 그 얼굴을 라벨란은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선명해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 눈빛은 악마나 영계의 영혼 따위가 흉내 낼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진짜 도리안이었다. 그렇게 해서 도리안을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라벨란에게는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만족을 주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번이었던 꿈은 두 번, 세 번이 되었다.
두 번째 꿈에서 라벨란은 퍼렐던의 어느 마법사 협회의 수석 마도사가 되어 있었다. 마법을 연구하고 마법사들을 가르치는 삶이었다. 도리안은 그런 마법사 협회에 퍼렐던을 침략하려는 제국군을 이끌고 나타났다. 마법사들은 제국군에 대항하기 위해 혈마법으로 스스로 악마가 되었고 도리안은 그 악마들의 발톱에 몸을 꿰뚫렸다.
세 번째 꿈에서 라벨란은 엘프 신의 사원을 지키는 파수꾼 대장이었다. 고대 알라산으로부터 내려온 유산을 수호해야 하는 사명을 따르는 삶이었다. 도리안은 고대 마법을 연구하는 테빈터 연구자들과 함께 사원에 침입해 왔다. 도리안이 유물에 접촉한 순간 유물에 걸려 있던 마법이 그의 몸을 불살랐다.
꿈이 시작되면 라벨란은 자신이 꿈속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반드시 그곳에는 도리안이 있었고, 깨어난 후에 돌이켜 보면 그 사람이 자신이 아는 도리안이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 꿈의 양상은 저마다 다르면서도 전체적으로 비슷했다. 라벨란이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던 와중 도리안을 만나는데 도리안과 적대하면서 결국에는 도리안이 죽는 장면으로 끝나는 식이었다.
연인이 다양한 방법으로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악몽이 아닐 리가 없었다. 라벨란은 식은땀에 젖어 공포에 휩싸인 채 꿈에서 깨어났다. 그 상황이 꿈이었다는 안도감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아주 잠깐이나마 그와 연결되었다는 기쁨이었다. 그 기쁨은 심문관으로서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해 왔던 후회와 고뇌를 잊게 해 주었다. 라벨란 자신이 원래는 말 그대로 꿈도 못 꾸던 혈마법을 쓴다는 사실에 대한 배덕감은 차츰 흐려져 갔다. 도리안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양심의 가책은 남아 있었지만, 도리안에게 자신이 벌인 일임을 들키지 않고 단순히 기묘한 꿈으로 남으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도리안도 혈마법 자체를 금기시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꿈에서나마 자신을 보았다는 것을 기뻐해 줄지도 몰랐다. 남을 희생시키면서 힘을 갈구하는 혈마법이 사악한 의도로 사용되는 것이 위험한 것이지, 이렇게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작은 소망을 이루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이 꿈이 현실의 자신에게 실제로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라벨란 본인은 점차 능숙하게 외면하게 되었다. 심문회 동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잠을 편히 못 잔 사람처럼 피곤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고, 일상에서 친근하게 보여주던 유머와 여유를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부족의 몰살, 코리피우스와의 싸움, 연인과의 이별을 차례로 겪은 후에도 심문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그의 심정을 섣불리 헤아릴 수도 없었기에 동료들로서는 넌지시 그의 안부를 묻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는 사이 라벨란의 장갑 속 손에는 베인 상처가 계속해서 늘어갔다. 날이 갈수록 꿈은 도리안이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라벨란 스스로에게도 고문이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같은 꿈을 꾸고 있을 도리안에게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혈마법의 위험성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고, 언제까지고 이런 행위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깨달았을 때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나 있던 뒤였다. 라벨란이 의식을 행하지 않은 날 밤에도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하지만 섣불리 상담할 수 있는 상대도 없었다. 심문관이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혈마법을 썼다고 하면, 누가 좋은 시선으로 보겠는가. 더구나 라벨란은 자신을 믿고 있는 동료들을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라벨란은 이제는 비어 있는 솔라스의 방을 생각했다.
"솔라스가 있었다면 도움을 청해 봤을 텐데. 아니, 솔라스라면 내가 애초에 이런 마법을 함부로 쓴 것을 꾸짖었겠지."
솔라스가 심문회를 그렇게 떠나 버린 것도 자신이 그에게 끝까지 힘이 되어 주지 못했기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남은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내가 정말 심문관의 자리에 있어도 되는 사람이 맞을까? 코리피우스의 말대로, 그저 우연히 휘말려버린 불청객이었을 뿐이었다면. 자신 대신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있었다면 모든 것이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수 있었던 거라면.
꿈이 보여주는 대체된 삶은 라벨란을 계속해서 그런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었고 라벨란은 타국에 있는 연인을 떠올리며 견디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또 더 강한 유혹을 불러일으키기만 할 뿐이었다.
그날도 라벨란은 의식을 행하지 않으려 애쓰며 어떻게든 침대에 몸을 눕힌 후 어둠 속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빠졌다.
그러자 여느 때와 사뭇 다른 꿈이 시작되었다.
라벨란의 눈앞에는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군중이 있었다. 군중은 남녀노소 귀족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드라스테 님!"
"사랑해요, 안드라스테 님!"
"안드라스테 님, 창조주로부터의 전언은 없으셨습니까?"
그들 모두가 밝은 하늘 아래에서 라벨란을 향해 안드라스테의 이름을 외치며 칭송하고 숭배하고 있었다. 라벨란은 혈마법 의식을 저지른 이후 처음으로 자신이 꿈을 꾸는 상태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자신은 어째서인지 안드라스테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라벨란은 혹시 도리안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테빈터 귀족 차림을 한 사람들을 면밀히 살폈다.
그런데 순간, 주변을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밝았던 하늘이 캄캄해졌고 사람들의 환호는 아우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녀를 처형하자!"
"불태워라!"
"죽여버려!"
라벨란은 자신의 몸이 화형대에 묶여 꼼작 못하게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집행해라!"
그와 동시에 처형집행인이 들고 있던 불이 화형대로 옮겨졌고, 불길은 순식간에 치솟았다.
"누가 도와줘요! 제발!"
라벨란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를 구하러 오는 이는 없었다. 뒤이어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오, 가엾은 우리 심문관. 늘 연인에게 악몽을 선사하더니 이번엔 자신이 당하는 꼴이 되었군."
라벨란은 지금까지 그의 꿈에 들락거리던 영계의 악마가 라벨란의 꿈을 완전히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라벨란은 꿈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도했다. 하지만 불길의 열기가 그 어떤 현실보다도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만이 느껴졌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네 꿈을 영원한 평온으로 만들어 주지. 지금까지 맛본 삶 중에 어느 것이 마음에 드나? 부족 수호자? 수석 마도사? 회색 감시자? 물론 완전히 새로운 제안도 좋아. 이를테면 파버스 집안의 전속 하인 같은 것은 어떤가."
악마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라벨란은 이것이 꿈이고, 악마가 터무니없는 제안을 해 오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고통에 대한 공포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몸을 결박하고 있던 줄이 끊어져 풀리면서 라벨란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 손 잡아, 어서!"
라벨란은 고민할 것도 없이 그 손을 붙잡았다. 테빈터 집정관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헤사라안이 아니라 라벨란에게 누구보다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리안!"
도리안은 라벨란을 불길 한가운데에서 끄집어냈다. 두 사람은 화형대 아래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우선 이 악마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해."
라벨란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민라투스의 풍경이었던 것이 영계 그 자체의 풍경으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도리안?"
"어떻게 여기에 있느냐고? 나도 지금껏 자네와 같은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 테빈터에서 꿈을 지배하는 혈마법에 대항하는 법은 금방 찾을 수 있거든. 자네가 악마의 유혹을 끝까지 듣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약 그랬더라면…."
"전부 나 때문이에요."
도리안이 발걸음을 늦추며 멈추어 섰다. 라벨란은 숨을 몰아쉬며 다급하게 말했다.
"마법이야. 내가 혈마법을 썼어요."
"알고 있어."
라벨란은 도리안이 그렇게 말한 다음 자신을 다그치며 화를 내거나 책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리안은 말없이 그를 돌아볼 뿐이었다.
"당신이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당신에 관한 꿈을 꾸었는데, 그게 진짜 당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나쁜 생각이었죠."
라벨란은 변명하듯 늘어놓았다. 도리안이 자신에게 크게 실망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내 잘못이에요."
"아니, 내 잘못이야."
마침내 도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라벨란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자네를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은 나야. 자네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것도 나고, 자네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것도, 혈마법을 쓰게 만든 것도 전부 나지. 그러니 내 잘못이야, 아마투스."
라벨란은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 부족이 내 판단 실패로 인해 살해됐어요."
라벨란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떨리다가 점차 격양되어 갔다.
"지금도 나는 매 순간 내가 내린 결정에 후회하기만 해요. 우리 심문회도 지금까지는 잘 해왔지만 언제 나 때문에 문제가 생길지 몰라요. 물론 심문회를 이끄는 심문관으로서 이런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아요! 그냥…. 그냥 이런 이야기들을 당신과 나누고 싶었어요. 당신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어요. 당신이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리안!"
"자네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도리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가 내 얼굴을 그리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하지만, 다신 이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다음번엔 내가 꿈속에서 사악한 매지스터 황제가 되어야 할 지도 모르는데, 그런 건 별로거든."
라벨란은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대답했다.
"알았어요. 약속해요."
도리안은 그들 앞에 놓인 길을 가리켜 보였다.
"자, 이제 깨어날 시간이네. 우린 아주 잠깐 떨어져 있는 것뿐이야. 어쩌면 앞으로 몇 달 정도면, 우리는 실제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라벨란은 연인을 향해 씁쓸히 미소 짓고는 대답했다.
"그럼요, 물론이에요."
거기서 꿈은 끝이 났다.
"안녕, 아마투스."
"안녕, 베난."
그렇게 해서 심문관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의 혈마법은 없었다. 대신 달라진 것도 없었다. 여전히 매 순간 무거운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고 습관적인 후회와 자책은 계속되었다. 라벨란은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는 자신이 그 시절, 어쩌다 우연히 신기한 힘을 얻어 얼결에 심문관이 된 아무것도 모르는 엘프 마법사 시절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렐라아나로부터 근래 쿠나리 측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이니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그 일이 있고 실제로 몇 달이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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