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이자 인도자인 그 소녀와.
ⓒ 노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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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n By: Pride & OZ
Written By: @BigWavee__
Play With: Acoustic Cafe, 『Tears』
정재형, 『Abyss: 마음속 깊은 곳에』
현실이 우리를 배반할지라도
시대가 우리를 외면할지라도
환멸이 나를 소멸하게 하지 말며
혐오가 나를 오염되게 하지 말며
실망이 나를 무기력하게 하지 말며
공포가 나를 잠식하게 하지 말며
시간이 나를 시들게 하지 말지니
어둠 속에서도 내 눈동자는 빛나기를
고난 속에서도 내 마음만은 푸르기를
⋯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오즈의 표정은 마치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평온했다.
오만의 프라이드가 이변을 깨달은 것은 평화로운 일상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였다. 아메스트리스의 국토 전체를 연성진으로 삼아 신을 담겠다던 아버지의 계획이 무로 돌아가고, 브래들리 가의 대저택에서 일견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던 프라이드는 그의 시야 귀퉁이에서 움직이는 오즈를 보고 문득 의구심을 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걸음이 느리지 않나?
“......오즈?” “응?”
언제나처럼, 그녀의 언사는 실크처럼 부드러웠고, 행동은 프랑스 자수처럼 섬세했으며, 발밑에서는 숙녀들의 걸음걸이처럼 보드라운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녀가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 의문은 확신으로 변했다.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오즈는 죽어가고 있었다. 목이 멘 지 오래인 개처럼, 소실되어가는 별빛처럼. 추락하는 자 특유의 외마디 비명조차 없이 죽어가는 눈망울에서 그는 안식과 평화를 읽었다.
종종 그 눈빛을 보고 있으면 종말이라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필시 진리의 문 너머로 끌려들어 갔다가 다시 되돌아왔을 때의 후유증이리라. 프라이드는 그녀의 심장이 절반씩이나 손실된 까닭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죽음이 어찌할 도리 없는 순리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심장은 이자胰子나 신장처럼 대체 가능하거나 일부가 손실되어도 생존에 큰 지장이 없는 장기가 아니다. 그것은 굳이 무언가에 비유 하자면 양초의 경랍. 만년필의 컨버터. 심장의 절반이 날아갔는데 별 탈 없이 여생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그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 보기에 프라이드는 인간의 신체를 잘 알았다.
오래된 밧줄이 결국 삭아 끊어지듯, 또는 푸르죽죽하게 녹슨 외 연 열기관이 스스로의 속도를 버티지 못해 바스라져가듯——점차 같은 업무에도 무리를 느끼던 심장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해 작동을 멈출 때, 오즈 또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오즈.” 그가 오랜 고심 끝에 조심스레 그 진실에 관해 거론하였을 때, 오즈는 기겁하지도 충격받지도 않았다. 그저 화단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몸의 양옆에 늘어뜨린 채, 푸른 들판 한가운데에서 프라이드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 표정은 마치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한순간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브래들리 부인은 이제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 귀퉁이에서 평온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부인은 재물, 권력, 명예 같은 세속의 영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오즈는 그녀에게서 한때 공화국의 영부인이었던 여성 특유의 당당함이나 현명함, 정신적 성숙이며 영혼의 안식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무수한 것들과의 작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자각할 때마다 오즈는 역사의 뒤엣길로 사라진 자들과 아마 그들을 영영 잊지 못할 부인을 떠올렸다.
어떤 슬픔은 결코 극복하거나 치유될 수 없고,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리하여 진짜 두려운 것은 상실이 아니라 망각이다. 잃어버린 것에는 회한이라도 남지만 잊어버린 것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므로.
프라이드는 삶에 대한 집착, 스스로에 대한 연민, 가지지 못했거나 앞으로 가지려 하는 것에 대한 아집의 무용함을 알았다. (얼마나 추했던가? 그의 아버지라는 작자 말이다.) 돌이켜보면 아련한 지난 세월의 경험으로부터 의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태곳적부터 유구하게, 아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여 체화하는 것은 다른 법이었다.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되는 걸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어떤 끔찍한 형태로든 변화는 찾아오는 법일까? 수많은 인류의 학자들이 수백 수천 년 동안 연구해 왔을 철학적 관념에 대한 고민을 하며, 프라이드는 자신이 태고의 존재 이유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을 향해 애정이 뻗어나간다. 거대한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이. 하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집착과 연민과 아집조차 무용해질 때까지, 영원이라는 단어가 힘을 잃고 쇠락할 때까지 함께 있고 싶었다. 그 이상의 욕망은 없었다. 오로지 존재하기만을 원했다.
바람이 불어오면서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가 둘의 머리 위로 날아 올랐다.
“......오즈.”
그다음 말을 이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까?”
“프라이드.”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차분하고도 사랑이 깃든 목소리였다. 단언컨대 프라이드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앞에 속죄하거나 구원을 기원하지 않았다.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에 이유가 있던가? 지나가는 행인의 머리 위로 빗줄기가 쏟아지는 것에 비구름이 사죄를 해야 하는가?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과 뱀을 잡아먹는 새와, 그 새를 잡아먹는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비는가? 어쩌면 그것이 진솔한 그의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죽음이 비극으로, 눈물이 죄악으로, 이별이 속죄로 느껴지는 것인지, 지금까지의 그의 진솔함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변하는 법이야. 우리는 오직 순간을 붙잡을 뿐이지. 하지만 프라이드, 어떻게 손가락으로 바람을 잡을 수 있을까?”
그 눈은 끝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했다. 이별이라는 것은 이 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가장 혹독하게 치르는 전술이자, 이 별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유일무이한 신앙 같다. 모든 만남에는 개개 저마다 헤어짐이 있는 법이라는 진리만큼 끔찍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만나는 것과 헤어지는 것. 그 시기를 자율적으로 고를 수 없다는 것보다 큰 고통이 있다면 필시 그것뿐이었다. 언제나 인간들의 입에서 귀로, 귀에서 다시 입으로 오르내리는 가장 큰 비극은 팔다리가 꺾이는 고문이나 창자가 꼬일 듯한 고통이 아닌 지당한 순리였다. 죽도록 굶주리면 죽는다거나 죽도록 사랑해도 죽는다거나 하는 것들.
그것을 떠올리자, 거대한 손가락이 움켜쥔 듯 목이 막히는 느낌에 프라이드는 한숨조차 쉬지 못했다.
“잘 들어, 프라이드.”
그러는 사이 오즈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뜰을 뒤덮은 시금한 풀내음 사이로 익숙한 체향이 느껴졌다. 아무 것에도 간절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누웠던 적이 있었다⋯⋯
새삼스럽게 과거의 상념을 헤엄치는 사이, 마디가 둥글고 살결이 보드라운 손가락이 뼈가 아물지 않은 어린 손을 맞잡았다. 눈매의 둥근 곡선, 새벽녘의 박명薄明을 닮은 눈동자가 그려내는 연보라색 농담濃淡. 바람결을 따라 물결처럼 흐르는 밀색 머리카락과 은은한 체향. 오즈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조각들이 하나하나 자세하게 눈에 들어왔다. 느껴졌다. 알 수 있었다.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프라이드, 나는 떠날 거야. 하지만 넌 어쩌면, 살아가면서 다시 한번 나를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몰라. 이제는 알 수 없는 과거의 일에 대해서 견해를 묻고 싶기 때문일 수도, 모진 풍파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지 함께 책을 읽거나 공을 차거나 체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 네 곁으로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면 너는 너 자신 안으로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분명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걸!
“사랑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지만, 그 흔적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법이니까.”
지금 이 순간,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지향에 대한 전진과 미래에 대한 탐구, 모든 욕망과 집착과 연민을 거부하고 안주할 수만 있다면. 시간이여, 멈추어라. 그러나 그 금구禁句는 입 밖으로 나오는 일 없이 묻히고 말았다.
“눈을 감아, 프라이드.”
그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입술 위에서 꽃잎이 얹는 듯한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눈을 떴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제 옆에 생긴 한 자리의 공백이 왜인 지 모르게 아팠다.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아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 완전히 그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그곳에서 그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 안에는 그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녀와, 나의 사랑이자 인도자인 그 소녀와.
“......작별입니다, 오즈.”
사랑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지만, 그 흔적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법이므로.
<참고 자료>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1808~1832)
— 헤르만 헤세, 『데미안』(1919)
— 박노해, 『혐오가 나를 오염되게 하지 말라』(2022)
— 위기철, 『껌』(2000)
— 김소연, 『명왕성에서 2』(2000)
— 헤라클레이토스, 『단편들』
—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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