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유키] 오후의 달과 바닷바람이 밀려드는 집
※ 헤븐 번즈 레드 4장 후편 시점이지만 큰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달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연한 하늘에 조각달이 걸려 있었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는데도 햇빛이 희부예서 하늘만이 옅푸르고, 그런 구름이 섞인 하늘에 희미하게 하얀 달이 나룻배처럼 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직업이 해커다 보니 자연스레 실내에 머무는 일이 잦았고, 세라프 부대원이 되고 나서는 훈련이며 임무며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원래 무언가에 몰두하지 않고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내켜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떠 있는 달에 시선을 빼앗겼다.
오직 달만을 올려다보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무렵, 루카가 말을 건넸다.
"윳키."
이름을 부르기 전부터 루카가 말을 걸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감각보다 인지가 먼저 이루어지는, 마치 데자뷔 같은 이상한 기분. 그것은 똑바로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묘한 거부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는 정해진 동작을 그대로 수행할 뿐인 자동인형처럼 고개를 돌려 루카를 바라보았다.
"난 이제 가볼게."
어디로?
루카의 문장이 멎기도 전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디로 가려는 거야? 네가 있을 곳도, 네 동료도 전부 여기에 있는데.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숨이 가빠졌다. 목젖까지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뛰는데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였을까,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귀에 들린 것처럼 루카가 대답했다.
"선배, 그리고 동료들이 잠들어 있는 곳에."
서늘한 공기가 폐부에 고여 들었다. 온몸이 서걱거리듯 소름이 돋는다. 그건 무슨 의미야? 그러나 묻지 않아도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의문을 확인하지도, 가지 말라고 애원하지도 못한 채로 목소리는 입속에 잠겼다. 얼어붙은 나를 두고 루카의 모습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손을 뻗어 루카를 붙잡고 싶었지만 발은 떨어지지 않고, 다만 루카가 아스라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이제 안녕, 윳키."
왜? 어째서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모두가, 내가 소중하지 않아? 너는 아직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냐고 외치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루카를 붙잡으려는 시도는 실현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다만 천천히, 시야를 채운 입술이 작별의 말을 그리고….
그 순간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윳키!"
소리가 멀어져 있던 귓가에 따가운 외침이 날아들었다. 근 몇 달 사이에 부쩍 익숙해진 호칭과 목소리였다. 카야모리 루카. 전직 록밴드의 보컬이라는 타이틀을 괜히 달고 있는 건 아닌지, 루카의 성량은 보통 사람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이렇게 시끄럽게 불러대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옮기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뭐야,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오늘 자유시간에 다 같이 어딜 갈 건지 얘기하고 있었잖아."
"그래? 그럼 나는 빼줘."
"왜에~, 윳키도 가자아~. 응? 가자~가자~."
"또 애처럼 조르기냐."
귀찮게 달라붙는 루카를 무시하고 카페테리아의 아침을 다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카페테리아의 식사는 언제나 준수한 품질을 유지했다. 일상적인 메뉴도 그렇지만, 인도, 중국, 미국, 하와이, 기타 각국의 요리도 놀라운 재현도와 맛으로 내놓았다. 전 세계가 멸망 직전인 상황에서 재료나 요리사를 어디서 조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인류가 세라프 부대원들에게 거는 기대가 많다는 거겠지. 마냥 기껍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지만, 다소 경건한 마음으로 식사를 해나간다.
"이즈미 씨도 좋으면서 애타게 하네."
"응응."
"커흡!"
그런 귀중한 식사를 코로 내뿜을 뻔했다. 제발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을 순 없는 걸까. 아니면 평범한 잡담을 하던지. 내가 쿨럭거리며 뒷수습하는 중에도 토죠와 아사쿠라는 서슴없이 동료 간의 연애를 조장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역시 연애는 밀당이 중요하니까."
"너무 루카 씨를 애태우면 안 돼, 이즈미 씨. 루카 씨가 불쌍하잖아."
"햐, 한창 좋을 때야."
"이러다가 둘이 움쪽쪽하겠어요!"
이젠 아이카와와 쿠니미까지 가세했다. 이대로 놔두면 또 저들끼리 좋을 대로 떠들어대기 때문에 나는 이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라고!"
"윳키, 오늘 기운이 없는 것 같아. 무슨 일 있었어?"
지금 이 소동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걱정을 한다. 태평하게 나를 걱정하는 루카에게 화를 내려다가 말을 삼켰다. 아까와는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가 문득 오늘 꾸었던 꿈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깟 꿈이 뭐라고, 나의 쓸데없는 무의식일 뿐인 게 당연한데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굳이 거북한 꿈을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냐. 그렇게 걱정되면 소리 지를 일이라도 없게 하던가."
"그래? 그런 것치고는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담배 초콜릿이라도 먹을래?"
주머니에서 담배 초콜릿을 꺼내는 루카를 손사래로 거절했다. 단순히 사양한 것뿐인데도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바라보는 얼굴이 묘하게 풀 죽은 것처럼 보였다. 서운한 표정을 짓는 루카에게 무심코 신경이 쏠리는 것을 무시했다. 이러다가도 금방 기운을 차릴 게 분명하다. 신경 써봤자 휘둘릴 뿐이라고 애써 신경이 쓰이는 것을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다시 숟가락을 들었을 때였다.
"31A 전원, 사령관실로 오세요."
사령관실에서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성에 우리는 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식사 도중이었을 텐데 미안하군. 갑작스럽지만 돔 근처에 대형 캔서가 나타났다고 한다."
"위치와 적의 정보는요?"
웬일인지 루카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예고 없는 호출이었지만 다들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제는 31A도 어엿한 세라프 부대원으로서의 태도를 갖추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서움도 모르고 말대꾸나 하고, 훈련을 땡땡이칠 생각을 하기도 하고, 작전 중에도 시시한 농담 따먹기나 하곤 했는데.
"이번 경계 임무의 작전지는 작은 반도의 연안이다."
"연안이 뭐야, 윳키?"
"쉽게 말해서 바닷가라는 거야."
"뭐, 바다? 와아! 바다다, 바다! 사령관님, 임무 빨리 끝나면 바다에서 놀아도 돼요?"
앞의 말은 취소다. 이 녀석은 아직도 철이 덜 들었다. 사령관님의 눈이 가늘어진다. 언제쯤 루카를 째려보지 않는 사령관님을 볼 수 있는 걸까? 아마 카야모리 루카가 죽는 날까지 불가능하지 않을까? 테즈카 사령관님이 지그시 눈을 감고 모자를 고쳐 썼다. 저건 분명히 바보 멍청이를 외치려는 걸 거다. 솔직히 반쯤 확신할 수 있었다.
"…마음대로 해라."
"얏호! 즈카쨩, 사랑해!"
의외로 테즈카 사령관님이 허락을 해줬다. 아마 입 아프게 금지하는 것보다 조금은 풀어주는 게 루카에겐 잘 먹힌다는 걸 깨달아서겠지. 엄격한 군을 상대로 어찌 보면 대단하다. 아니면 이 군대가 조금 이상한 거려나. 모로 가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 루카가 환호성을 질렀다.
"출몰했다는 캔서는 과거 토벌 기록이 있는 종이지만 두 부대 이상이 연합해서 퇴치했던 캔서다. 그러니 발견하더라도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보고만 하도록. 이상."
"알겠습니다! 자, 얘들아, 바다에 가자! 레츠 고!"
"놀러 가는 거 아니다."
사령관이 내뱉지 못한 한숨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좁아진 미간을 보아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사령관을 뒤로하고, 우리는 헬리포트로 향했다. 줄지어 걸어가며, 휘파람을 부는 루카에게 주의를 주었다.
"누가 보면 바다에 처음 가는 줄 알겠다. 적당히 해."
"그렇지만 31A가 다 같이 바다에 가는 건 처음이잖아."
어느새 루카가 어린애 같았던 표정을 지우고 입가에 담담한 호선을 그렸다. 잔잔한 미소가 가슴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바다는 언젠가 봤던 모습과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엔 모두와 함께라서 특별한 거니까."
루카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뭐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도 31A와 함께여서 느껴왔던 감정과 경험이 있었고, 모두의 존재가 내 안에서 큰 무게로 느껴졌다. 괜히 말려든 기분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가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왠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는 제멋대로고 바보 같을 정도로 천진난만하면서, 이렇게 가끔 제대로 된 말을 한다.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헬기에 올랐다.
"이제 제법 걸은 것 같은데 여기서 드론을 날려보는 건 어때?"
선두에 서서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던 루카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잠깐 전첩을 켰다. 오후 2시. 오전에 시작했던 경계 임무는 어느새 정오를 넘어서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렬로 늘어서 있던 부대원들이 대오를 풀고 흩어졌다. 부대원 중에서 가장 체력이 약한 쿠니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푸하~,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 잠깐 쉬면서 캔서의 위치를 확인하자. 꽤 수색하면서 왔으니까 대형 캔서라면 이때쯤 탐색에 잡힐 것도 같은데."
아직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긴장을 풀 수는 없겠지만, 길었던 행군은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카렌과 츠카사가 주위를 경계하며 사각이 생기지 않도록 자리를 잡았다. 쿠니미는 많이 지쳤는지 소리까지 내어가며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런 쿠니미에게 아이카와가 자신의 물병도 건넸다.
"아직 작전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니까 물이나 식량은 아껴둬."
쿠니미와 아이카와 쪽으로 충고한 뒤 드론을 날렸다. 결국, 이때까지 와서도 드론 조작이 완벽하게 가능한 건 나밖에 없었다. 돌격부대로서 꽤 많은 전공을 올리고 처음보다 실력도 확연히 늘어났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은 있었다.
그래도 선배 부대인 30G를 보면 부족한 점은 경험이 메워주겠지. 그리고 서로의 결점은 부대원들이 협동하여 보완해 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잘해 나갈 수 있을지 걱정만 앞섰지만, 이제 가족처럼 믿을 수 있게 된 부대원들이었다. 지금도 드론에만 집중하고 있는 나를 부대원들이 빈틈없이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31A를 믿고 드론을 통한 캔서 추적에만 집중했다.
"1시 방향, 3,000m 떨어진 곳에서 대형 캔서 발견. 데스 슬러그야."
"데스 슬러그? 그건 우리가 예전에 퇴치한 적 있는 캔서 아냐?"
"돔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니까, 퇴치할 수 있으면 우리끼리라도 퇴치하자."
"일단 사령부에 보고해야지."
루카가 전첩을 꺼내 사령부와 통신을 했다. 보고가 끝나고 루카는 우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다!"
약점으로 뛰어드는 루카의 일격을 맞고 캔서가 넘어간다. 거대한 검은 캔서의 육체가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윽고 하얀 파편으로 흩어지는 캔서를 보면서 전투의 끝을 실감했다. 후방에 있어서 31A 부대원들이 긴장을 푸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오늘의 임무는 이걸로 끝이네."
"임무 지령 때 사령관님이 말한 대형 캔서는 찾지 못했지만, 데스 슬러그를 격파하고 나면 일단 경계 임무를 종료해도 좋다고 했으니까."
"오늘의 숙제를 내일로 미루는 느낌이네요."
"자자, 그런 건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몸이 근질거린다는 듯이 루카가 웃었다.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색의 얼굴이 지금은 개구쟁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함이 루카다웠다. 결국 못 참겠다는 듯이 루카가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제 바다에 가자!"
"예에!"
그런 루카를 보며 이제는 모두가 익숙하다는 듯이 호응했다. 조금 지친 기색이 있던 부대원들 사이에 웃음이 돌았다. 이럴 때는 손발이 잘 맞는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카의 행동이 문명이 파괴되고, 인류의 미래가 위태로운 현재에 어울리지 않은 순수함이라도, 우리에게는 위안이 되고 희망을 준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쁜 것도 아니라서 나도 따라 웃어버렸다.
해변에는 바다로부터 밀려온 파도가 얇게 퍼지고, 끝이 없을 것 같은 모래사장에서 쿠니미와 아이카와가 맨발로 뛰어놀았다. 하늘은 맑고, 바다가 물결치며, 어디까지나 잔잔한 전경이 평화롭게 펼쳐졌다. 나는 툇마루의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아무 두려움도 없을 것 같은 풍경과 먼 메아리 같은 웃음소리와, 조용히 옆을 지키는 루카의 존재를 느꼈다.
바다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들뜬 쿠니미가 해변으로 달려가고, 그 뒤를 아이카와가 쫓았다. 남겨진 우리는 해변을 찬찬히 걷다 발견한 2층 목조 주택에서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토죠와 아사쿠라는 2층을 보겠다며 계단 위로 올라가고, 해변이 보이는 마루에 앉은 내 옆에는 루카만이 남았다.
2층에서는 의미가 흩어진 말소리와 간간이 섞여 드는 웃음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쿠니미와 아이카와가 고함을 내지르며 왁자지껄하게 장난을 치는 소리도 파도처럼 흩어진다. 엷게 깔린 구름에 해는 기세가 약해졌다. 맑고 옅은 하늘에 조각달이 걸려있었다. 바다와 하늘로 한없이 푸른 풍경.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얀 달을, 나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평화롭네."
긴장이 풀린 목소리가 말을 건넨다. 귀를 기울여 보면 부스러지는 파도와 목청소리 사이로 고른 숨이 느껴졌다. 평온한 숨소리였다. 돌아보지 않아도 섬세한 옆얼굴이 느슨한 미소를 띠고, 한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을 눈동자에 담는 것을 그릴 수 있었다. 아마 캔서가 없는 세계에서도 성공한 아티스트가 누릴 수 없었던 것을 생각했다. 나는 진심과 바람을 담아 대답했다.
"그래."
"내일이 되면 다시 캔서를 토벌하러 다니는 일상이 돌아오겠지만 말이지."
"그것참 살벌한 일상이네."
"어쩔 수 없잖아. 인류가 멸망하려는 시대인데."
바닷물이 모래사장을 때리고, 그것을 피하려는 듯이 와아 하고, 쿠니미와 아이카와가 달렸다. 캔서라는 재앙이 우주에서 날아오기 전에는 숱하게 있었을 모습이었고, 이제는 보기가 힘들어진 광경이었다. 뭉클한 감정이 가슴 속에 솟아오른다. 동시에 당장이라도 이 평화가 깨어져 버릴 것 같아서, 잠깐의 고요가 지나가고 나면 거칠게 몰아치는 비바람이 우리를 할퀴어갈 것 같아서, 문득 이 안온함이 견딜 수 없을 듯이 느껴졌다.
지금 이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도, 무언가 닥쳐올 것만 같아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가늘게 휜 달이 어느 순간부터 꿈속의 광경과 겹쳐졌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의 일상도 마음에 들어."
내 감정과 상관없이, 느긋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루카는 말을 이어갔다.
"31A가 있고, 모두가 있고, 다 함께 웃고 떠들고 즐겁게 지내는 일상이 좋아."
줄곧 바다를 바라보던 루카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올곧은 눈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을 딛고, 굳고 단단해진 정신이 느껴졌다. 그 속에는 허황된 다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업적을 쌓아온 자의 신뢰감이 있었다.
"그리고 윳키가 있어서 좋아."
부드러운 목소리가 진지함을 담아 말을 전해왔다. 그 카야모리 루카가 하는 말이니 별 의미는 없을 텐데도, 심장이 두근거려서 나는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에게 곧게 향해지는 시선을 비끼며 내가 대답했다.
"그럼, 계속 살아가. 그 좋아하는 일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칫 퉁명스럽게 나온 말에도 루카는 맑게 웃었다.
"응! 당연하지!"
어느새 바닷가에서는 디오라마의 모형같이 작았던 인영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충분히 놀았다고 생각했는지 바닷물에 푹 젖은 쿠니미와 아이카와가 해변에서 올라왔다. 때맞춰 목조 계단을 내려오는 두 발소리도 도란도란 내려왔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으로 치마를 털었다. 그리고 루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갈까."
나를 올려다보던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를 따라서 루카도 손을 털며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지면이 흔들리고, 무언가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으악!"
"이 진동은 뭐지?"
"저기! 5시 방향 바닥에서 무언가 올라오고 있어!"
아사쿠라의 외침처럼, 바닥에서 흙을 헤치고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했다.
"사령관님이 말했던 캔서야!"
"땅속에서 매복하고 있었던 건가."
"젠장, 일단 후퇴하자!"
우리는 재빨리 방향을 틀어 도망치려고 했지만, 바로 지하에 묻혀있던 캔서의 꼬리가 지층을 뚫고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루카가 전첩을 들고 외쳤다.
"어쩔 수 없어, 다들 전투태세!"
루카의 지시에 따라 다들 세라프를 소환해 자세를 가다듬었다. 루카, 카렌쨩, 아이카와, 쿠니미가 전열에 서고, 나와 토죠가 전열 공격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후열에서 사격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다 같이 캔서와의 전투에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많은 캔서를 토벌해 왔다. 그건 허황된 것이 아니라 실적이 있는, 진정한 실력이었다. 그럼에도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리고 호흡이 흐트러졌다. 이어지는 전투 속에서 꿈 속의 달이 하얗게 어른거렸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스컬 페더도 토벌한 우리가 지금 이 캔서를 물리칠 수 없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두 개 이상의 부대가 합동으로 토벌했다고 한 만큼 캔서도 끈질기게 공격을 이어 나갔고, 우리의 디플렉터 잔량은 조금씩, 그러나 꾸준하게 깎여가고 있었다.
"받아랏!"
루카가 매섭게 캔서의 약점을 파고들어 일격을 날렸다. 동시에 캔서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다행히 우리가 쓰러지는 것보다 캔서가 쓰러지는 것이 빨랐다. 외피가 파괴된 거대한 몸체가 빨간빛을 내뿜으며 부서질 기미가 보였다.
쓰러뜨렸나? 찰나의 안심이 스칠 때였다.
"윳키! 위험해!"
길게 늘어뜨려져 있던 캔서의 꼬리가 갑자기 뒤틀리며 내가 있는 곳을 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는 몸이 굳어버린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커다란 꼬리가 내가 있는 곳으로 내리쳐지는데도 피하지 못하고 바라만 볼 때였다.
"커헉!"
"루카!"
순간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눈앞에는 나를 밀치고 대신 캔서의 공격을 맞은 루카가 새빨간 피를 내뿜었다. 이런 걸 원하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녀석, 잘도 우리 부대장을!"
"완전히 끝장을 내겠어요!"
아이카와와 쿠니미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분노한 부대원들이 캔서를 공격하고, 최후의 일격을 맞은 캔서가 마침내 쓰러졌다. 나는 그 끝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루카에게 곧장 뛰어가, 루카를 안아 들었다.
"루카! 정신 차려!"
"윳키…, 괜찮아?"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왜 그랬어?!"
"말했잖아…. 모두랑 있는 일상이 좋다고…."
내상을 입었는지 루카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의사도 뭣도 아니라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그저 루카를 절박하게 끌어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자부심을 가져왔던 좋은 두뇌도 이럴 때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이카와가 사령부와 통신하는 것을 멍하니 들으며, 어느새 차가워진 루카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니까…, 윳키를 지킨 거야. 앞으로도… 쭉, 함께이고 싶으니까…."
"바보야! 네가 죽으면 아무 소용 없잖아!"
"난 죽지 않아, 윳키.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더는 말하지 마. 상처가 깊어지겠어!"
피를 본 손이 떨려왔다. 그렇더라도 패닉에 빠지려는 정신을 애써 추슬렀다. 침착하자. 이렇게 루카를 잃을 순 없었다.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손을 애써 움직여 교육 시간에 배웠던 응급처치를 되새겼다. 서투른 처치를 하는 사이에도 루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죽지는 않을 건데, 윳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이런 상황에서도 바보같이 계속 떠드는 루카의 입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라면, 그런 생각이 들어서 더는 듣지 않겠다고 내칠 수가 없었다. 루카의 얼굴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뜨거워진 볼을 훔칠 새도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말만 해. 꼭 들어줄게."
"그럼…. 내게 입 맞춰줄 수 있어?"
"뭐…?"
"윳키가 내게 키스해주면 위험해서, 아, 다시는 다치지 말아야지… 생각하게 될 테니까…. 안될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뜨거운 피가 왈칵 쏟아지는 루카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팬으로서 응원했을 때부터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입술이었다. 세라프 부대원이 되고 나서는 참 잘도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다 생각했고, 그럼에도 매력적인 목소리로 노래하는, 사실은 남모르게 동경했던 입술이었다. 눈물은 자꾸만 넘쳐서 루카에게로 떨어졌다. 안될 리가 없었다. 싫을 리가 없었다.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루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첫 키스는 피처럼 비리고, 눈물처럼 짭짤했다. 하지만 이상과 다른 느낌에도 환멸하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멀리서 헬기의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나는 루카의 손을 붙잡고 오래도록 루카를 안고 있었다.
"이야, 죽는 줄 알았네."
"이즈미 씨한테 죽지 않는다고 말했던 거 아녔어?"
병실 의자에 앉은 아사쿠라가 사과를 깎아서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사과가 한 조각 놓일 때마다 루카는 게 눈 감추듯 사과를 먹어 치웠다. 이쯤 되면 먹는 게 아니라 흡입하는 수준이었다.
"죽는 줄 알았다는 거지, 죽는다는 게 아니니까. 나는 죽지 않아."
"루카 얘기만 들으면 루카가 불사신 같네."
"응, 나는 사실 불사신이야. 영원히 살아서 카레링과 츠카삿치가 호호 할머니가 되는 모습까지 지켜볼 거라고."
"그때쯤이면 니도 할매 아이가."
나는 병실 문 근처에 기대서 이 바보 같은 대화를 듣고 있었다. 한가롭게 멍청한 대화를 나누어도 좋을 만큼 루카의 상태는 멀쩡했다. 헬기로 이송되는 동안 빠르게 응급처치를 한 덕분에 루카의 상태는 상당히 호전되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헐레벌떡 의사를 찾아간 것이 무색하게, 의사의 진단은 3일 치료 후 퇴원. 뒤숭숭했던 꿈자리 탓인지, 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군 것에 대해서 나는 매우 부끄러워졌다.
"일찍 죽을 수는 없잖아. 윳키가 날 위해 움쪽쪽도 해줬는데."
루카의 폭탄 발언에 31A 부대원 전원이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간신히 잊었는데 그걸 또 언급하다니! 내가 노성을 지르기 전에 부대원들이 끼어드는 것이 더 빨랐다.
"끝내 하고야 만 것이군요! 키스!"
"이야, 마이 길었다 안카나."
"이제 정말 결혼하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네."
"응응."
소란스러운 31A 덕분에 나는 끓어오르는 창피함으로 얼굴을 감쌌다. 역시 괜한 짓을 해버렸잖아! 낯이 뜨거워져서 세수한다는 핑계로 병실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 루카가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다음에는 피 묻은 키스가 아니라 오붓한 분위기에서 단둘이 하자?"
맑은 눈으로 엄청난 소리를 하는 루카에게 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다시는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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