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무텐

사막과 달 (1)

두번째 변종


스칼렛


 

끝없는 사막이라고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가도 가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걸을 때마다 사박거리는 소리가 나며 모래 위에 발자국이 남지만, 바람이 불면 지워졌다. 스칼렛이 가지고 있는 작은 랜턴은 먼 곳까지 밝히기엔 부족했다. 빛을 받으면 희미하게 드러나는 바위들은 바람에 깎여나가, 기이한 형상을 띄고 있었다. 사람 키보다 큰 바위들은 마치 무언가의 무덤처럼 보였다.

옆에는 같은 탐험대 동료인 리처드가 걷고 있다. 항상 무심한 눈을 한 그는 스칼렛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거의 띠동갑이었던가. 탐험대라고 해 봤자 정부 소속도 아니고 그저 존재할 뿐인 무명 탐험대다. 인원도 고작 셋뿐이다. 한 명은 지금 없다.

그래도 이 광활한 사막 위를 혼자 걷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이번에는 버섯이나 풀 따위를 구해가는 게 아닌 진짜 대발견을 할 자신이 있었다. 원래라면 매일 하던 대로 불야성 주변에 있는 숲 구역을 돌았을 테지만, 계속 같은 곳을 가는 건 질린다고 조른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사막 구역에 오는 것은 오랜만이라 기분이 들뜬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잠시 멈춰 서서 팔을 얼굴 앞에 대고 바람을 막았다.

“괜찮아?”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걸음을 계속 옮기던 리처드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아. 눈에 모래가 들어가는 게 싫어서.”

다시 주먹을 쥐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벌어졌던 거리를 따라잡았다. 겨우 이 정도로 괜찮냐는 말을 들으면 자존심에 살짝 긁힌 상처가 난다. 저 아저씨는 얼굴 본지 벌써 2년이 되어가는데도 스칼렛을 어린애 취급하는 건 여전했다. 하긴 자신만이 아니고 모두에게 저런 식이긴 했다.

기온이 낮아 입김이 나온다. 슬슬 쉴 곳을 찾으면 좋겠다는 리처드의 말에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아쉽게도 이 주변에는 그저 넓은 모래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혹시 모를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선 옆에 바위 하나라도 끼고 있는 것이 좋다. 건조한 사막을 걷고 또 걷는다.

그러던 중 저 멀리 어딘가에서 초록색 빛이 반짝한 것 같았다. 잘못 봤나 싶어 오른쪽 눈을 슬쩍 비볐다. 눈을 가늘게 뜨고 같은 자리를 다시 확인하니 어둠뿐이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본다. 리처드는 왜 그러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만 보았거나, 헛것을 보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후로도 30분은 더 걸은 것 같은데 수확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참 전에 봐 뒀던 무덤 닮은 바위 옆에 자리를 잡을 걸 했다. 그래도 둘의 입에서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벌써 체력이 부족하다고 하면 탐험가 실격이다.

 

스칼렛의 아버지는 불야성 사냥팀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몇 년 전에 은퇴하여 그 활약이 신문에 더 보도되는 일은 적었지만.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탐험가가 되고 싶었다. 그 사람의 딸이라고 주변의 기대를 받은 적은 있었지만, 부족한 검술 실력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재능이 드러난 후에는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부 소속 탐험가가 되는 것을 두 번이나 실패한 후에 높은 경쟁률을 체감하며 관뒀다. 그쪽으로는 자신보다 훨씬 강하고 재능 있는 자들이 많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을 만들어 내거나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스칼렛의 재능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에 간섭받지 않는다.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간결한 재능이다. 대인전에서는 쓸모가 있겠지만 글쎄. 외부에서 탐험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괴물들이 공격을 막아주는 것도 아니고 압도적인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처지를 비관하며 자신을 소속시켜 줄 탐험대를 찾았다.

결론적으로 한 아저씨, 그리고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와 한 팀이 되었다. 둘은 이미 서로 알던 사이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기묘한 조합이다. 그래도 구성원이 어떻든 간에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뻤다.

그래도 쉽지만은 않았다. 실력이 없으니 위험한 곳에는 도전할 수 없어 비교적 안전하고 잘 알려진 구역들 위주로 돌아다녔다. 대부분은 불야성 주변을 넓게 둘러싸듯이 펼쳐진 숲 구역이었다. 유물을 구해다 쓴다면 순식간에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가격을 보고 관뒀다. 애초에 좋은 도구를 얻는다고 해서 극적으로 강해지는 세상이었다면 인간들이 이렇게 갇혀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소한 문제는 조금씩 생겼다. 친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한 여자아이 레이시는 엄청난 사차원인 데다가 말없이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일상인 아웃사이더 생활을 지속했다. 처음에 리처드는 그것에 대해 ‘내버려 두라’ 말했었고, 스칼렛은 처음엔 걱정했지만 조금 지나자 익숙해졌다. 이제는 그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리처드는 레이시에 비하면 아지트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지만, 가치관도 염세적이고 열정이 전혀 보이지 않아 곤란하다. 이전에 그가 ‘탐험대에 소속될 생각은 없었는데, 레이시 탓에 이러고 있는 거다’라고 말했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래도 어린 둘과는 다르게 탐험 경력이 꽤 되는 사람이고, 제일 중요한 건 돈이다. 저 아저씨가 없으면 이 탐험대는 유지되지도 못할 것이다. 당장 탐험대 아지트로 쓰고 있는 건물부터 전부 그가 부담하고 있었다.

고정적으로 받는 금액이 없는 만큼, 생활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면 몇 배는 노력해야 한다. 이제 무명 생활은 지긋지긋하다. 오늘은 뭐라도 찾아서 돌아가고 싶다. 다른 탐험가들도 모두 그렇듯이 스칼렛 또한 유명인과 강자를 동경하는 일은 당연했다. 유물로 무장하고 괴물을 무찌르는 탐험가들. 동경은 불가능이기에 동경이다.

문제는 살아오면서 탐험가를 지망했을 뿐 다른 기술은 하나도 배우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탐험가를 그만두면 아무것도 모르는 맨몸으로 지하 도시 사회에 던져져 살아남아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때 장래 희망을 좀 더 다양하게 생각해 봤어야 했던 건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들면 어깨가 떨렸지만, 도망칠 곳은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선택한 이상 그 길을 계속 가야 한다.

 

“배는 안 고프냐.”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리처드의 말에 끊어졌다. 고개를 저었다.

“아직 찾아낸 것도 없는데 벌써 배고프면 안 되지.”

“그럼 쭉 굶었어야지. 오면서 밥은 왜 먹었대.”

스칼렛은 그 말을 듣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

“뭐,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오면서 버섯도 조금 구했고.”

“그거야 팔면 돈은 되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한숨이 나왔다.

“레이시는 뭐 하고 있으려나…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내심 아쉬웠다. 가끔 생존 신고만 하는 것처럼 얼굴만 비추는 레이시를 어찌하겠는가.

“모르겠다.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다음에 보면 네가 찾는다고 말은 해 두마. 솔직히 내가 대화를 피했던 것도 있어서.”

“괜찮아. 다음엔 같이 가 주겠지.”

“그런 특이한 녀석을 좋다고 받아주는 너도 참 대단하네.”

리처드는 기가 찬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시 흐릿한 불빛이 눈에 띈다. 한 번이었으면 잘못 봤으니 하고 넘겼을 테지만 두 번은 신경 쓰였다. 결국 스칼렛은 입을 열었다. 저기 뭔가 있지 않아? 하고. 리처드는 스칼렛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다. 딱히 뭔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안 보이는데. 뭐가 있지?”

“그래? 아까 반짝했는데. 약간 초록색으로. 기분 탓인가.”

“글쎄. 어쩌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조심해.”

지하 도시는 불야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친 탐험가를 노리고 강도질하며 살아가는 약탈자들은 존재한다. 리처드의 말을 듣고는 그런 일에 대비하기 위해 가방에 묶어 둔 대검의 끈을 풀었다. 그는 아까 그 방향을 다시 바라보고 있다. 아주 약간 정적이 흘렀다.

“뭔가 희미하게 빛나긴 하는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 주머니에서 망원경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나온 물건이다. 뭔가 보일까 싶어 옆에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아쉽게도 잘 모르겠다는 말만이 돌아왔다.

“확인해 볼까?”

인간이라면 호기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글쎄. 함정이면 어떡하려고. 궁금한 건 알겠지만 여기서 그러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네. 게다가 우린 둘 뿐이고.”

“그건 맞지만.”

또 사람을 어린애 취급하면서 잔소리를 쏟아대고 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입을 삐죽 내밀기만 했다. 토라진 표정이 된 걸 눈치챘는지, 리처드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알겠어. 조금 거리를 두고 파악한 다음에,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다른 곳으로 갈 거야.”

 

빛이 보인 방향으로 어느 정도 걸어갔다. 이제 조금 가까워졌다 싶어 리처드의 망원경을 뺏어 들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두운 사막의 바닥 위에… 사람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있었다. 짐승을 잘못 본 것이 아니다. 팔다리가 제대로 달려 있다.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다. 전혀 움직이지 않아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구분할 수 없다. 그 옆에는 은은하게 빛을 내는 커다란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대충 확인하고는 망원경을 내렸다.

“사람이야.”

“사람?”

“게다가 누워 있어. 미동도 없어. 다친 거 아닐까? 도와줘야 해.”

“잠깐. 또 급하게 생각한다. 아까도 조심하라고 했었지.”

“그래도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지도 몰라. 한 명밖에 없어. 주변에 숨을 곳도 없잖아?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튀어나오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럼 같이 가자, 라는 결론이 나왔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두 명이 같이 있는 모습인 게 나을 것이다. 저쪽까지의 거리는 대략 1킬로미터 되는 것 같다. 가면서 대화를 더 하지는 않았다. 가까워질수록 바닥에 밟히는 모래 소리가 조금씩 달라졌다. 땅의 질감이 다르다. 돌 같은 무언가에서 나오는 은은한 청록색 빛이 엎드린 사람을 비추고 있다.

조심스레 다가가 살펴보았다. 키는 190쯤으로 커 보이고, 검은 삐죽 머리를 가지고 있다. 복장은 이런 사막에는 어울리지 않는 평상복 같은 코트 차림이다. 바로 옆까지 다가가도 반응하지 않는다.

“괜찮아요?”

쓰러진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걸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순간 이미 죽은 사람인가 싶어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읽은 건지, 리처드가 다가와 한쪽 팔을 걷어붙이고 옆에 쭈그려 앉았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쓰러진 남자를 옆으로 뒤집었다. 앞머리가 꼬인 모양이 특이하다.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사이 조금씩 다른 색이 섞여 있다. 꽤 특이한 색이다.

“숨은 쉬고 있어.”

리처드의 확인에 조금 안도했다. 그냥 의식이 없는 것 같다.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건넸다. 리처드는 남자의 입에 물 따른 잔을 가져다 댔다. 탈수를 걱정하는 것이다.

“이 사람, 괜찮겠지?”

“아직 모르겠네. 그보다 옆의 이건….”

리처드의 시선이 남자 옆에 놓여 있던 것으로 향했다.

“진짜 크네. 이거 어떤 유물 같은 걸까? 이 사람 건가 봐.”

빛을 내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평범한 돌은 아니다. 거대한 손 같은 형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레 들어내려 했는데, 생각보다 무거웠다. 하나가 아니고 두 개다. 힘이 많이 들어 일단 관뒀다. 가방도 없이 이 큰 것을 혼자 옮기고 있던 걸까? 주변에 발자국이 없다. 어디서 왔는지 짐작할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나 바람에 발자국이 지워진 모양이다.

“눈을 떴는데.”

리처드의 말에 다시 시선을 옮겼다. 남자는 당황한 기색도 무엇도 없이 그저 밝은 청록색 눈을 끔뻑였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짐승의 눈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카로운 눈매지만 묘하게 졸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괜찮나?”

그는 리처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누운 상태 그대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정신은 든 것 같았지만 아직 생각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모양이다. 남자는 과묵했다. 어쩌다 이런 곳에서 쓰러져 있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몸이나 옷에 상처는 없다. 어떠한 흔적도 없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 함정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애써 삼켰다. 사람을 너무 관찰하는 느낌인가.

남자는 팔을 들어 허공을 향해 뻗었다. 손을 몇 번 쥐었다 편다. 아무래도 정신이 막 든 참이라 어색함을 느끼는 듯했다. 남자는 곧 입을 열었다.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입만 뻐끔거리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인가 싶어 수첩과 펜이라도 꺼내줄까, 생각했다. 다행히 목소리는 제대로 들려왔다. 그가 처음 꺼낸 말은 조금 의외였지만.

“…여긴 어디지?”

그 말과 스칼렛과 리처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고? 그래도 예의 바른 태도는 유지했다.

“끝없는 사막이야. 구역 이름도 모르고 있었어?”

속 사정은 깊게 알 수 없지만 특이한 경우다. 그 남자는 스칼렛의 말을 듣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여전히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면서 힘주는 소리를 내고는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멍해 보이는 상태다.

“미안. 모르겠어.”

“머리를 다친 건가? 겉으로 보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괜찮다면 확인해 봐도 될까.”

“으응.”

리처드가 남자의 머리 부근을 더 자세히 살펴봤지만 역시 외상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멀쩡한데.”

“이상하네.”

맨몸으로 돌아다니다가 사막에서 쓰러진 사람이라… 어쩌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조차 거짓말일 수도 있다. 어딘가 걸리는 부분은 있었지만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다.

“어느 도시에서 왔어?”

“도시…?”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이것조차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하 도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스칼렛은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옆을 보자 리처드는 의외로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름, 자기 이름은 알아?”

“아무것도 모르겠어.”

남자는 자기도 답답하다는 듯 손을 이마에 짚었다.

“나는 스칼렛이야. 옆에는 리처드 아저씨.”

“….”

“어쩌지. 불야성에 데려가서 전단이라도 붙여 볼까? 이 사람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네. 기억을 잃은 사람을 데려가서 누가 뭘 할 줄 알고. 게다가, 누가 일부러 이런 곳에 버려둔 거라면 더 곤란해지지.”

리처드와 스칼렛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는 동안, 남자는 옆에 놓여 있는 돌 같은 것에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은 호기심이 아닌 본능에서 나온 움직임 같았다. 남자의 손끝이 닿는 순간 빛이 일렁였다. 꼭 무언가를 알아보는 것 같이.

“그건 당신 옆에 떨어져 있던 건데, 알고 있냐고 물어보면 역시 모른다고 하겠지?”

“응. 몰라. 하지만… 이건 익숙한 느낌이 드네. 정확히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아는 물건이야.”

리처드는 아까부터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녀석이 말이 짧다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 그런 걸 따지다니 웃기는 아저씨다.

“신기하다.”

이름도 모르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도시가 뭘 뜻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스칼렛의 생각으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늠할 수도 없다. 생각대로 대발견을 하긴 했다. 지루했던 일상에 새로운 사건이라면 환영이다. 리처드는 한숨을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내쉬고는 가방을 어깨에서 내렸다. 가방에 있던 랜턴은 적당한 자리에 내려둔다.

“지금 더 이동하기는 힘들 것 같으니, 이 자리에서 잠시 쉬다 가자.”

“좋아.”

“다시 돌아가야겠군. 환자가 있으니 말이지.”

“당연히 돌아가야지.”

“난… 환자인가.”

남자는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너희는, 인간이야?”

이상한 질문이 나왔다. 애초에 물어본다면 이쪽에서 묻는 게 맞을 것 같은 질문이다.

“인간이 뭔지 모르나?” 리처드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등을 돌려 본인의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묘하게 관 모양으로 생겼다.

“인간이지. 혹시 사람 잡아먹는 괴물처럼 보여?”

조금 장난을 섞어 말했다. 남자는 한결 편해진 듯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이건 내 건가?”

“누가 봐도 네 거야. 한 번 들어 봐.”

리처드의 말에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자기 상반신 크기의 물건을 두 개나 들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방금까지 쓰러져 있던 사람이 이 정도로 힘이 세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여전히 리처드는 별 감흥 없다는 듯, 편하게 들고 갈 수 있도록 끈을 꺼내 묶어 주었다. 의외로 꼼꼼한 성격이라 튼튼하게 묶였다. 그 후로도 잡다한 얘기를 나누었다.

의문의 남자를 포함한 휴식은 1시간 정도로 짧게 끝냈다. 스칼렛은 슬슬 돌아가자는 말에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내려두었던 랜턴을 가방에 다시 연결하고, 옆에는 대검을 단단히 묶었다. 호위 임무를 맡은 기분이 든다. 남자는 자신도 짐을 드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고 이미 그의 등에는 커다란 유물(추정)이 두 개나 매달려 있었다.

리처드는 옆에서 돌아가는 길도 생각보다 위험하니 주의해야 한다며 남자에게 따분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절반은 못 알아들을 사람한테 설명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갈 길은 아직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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