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선

지구인들이 별을 사랑하듯이

春雪 by 현명

차선우는 그날따라 아주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전이었다.

보통이라면 아홉 시가 되기도 전부터 눈을 떴을 텐데, 차선우는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모처럼의 휴일이니 예상에 없던 휴식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차선우는 습관적으로 액정을 두드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화면임에도 차선우는 위화감을 느끼며 금세 전원을 껐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아침까지 먹고 나서야 차선우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 녀석의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어젯밤, 그 녀석이 징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한창 바쁠 때라서 내일은 하루 종일 업무에 매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차선우는 그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느냐고 되물었다. 다소 매정한 물음에도 정세현은 굴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없으면 네가 쓸쓸해할 것 같아서. 녀석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차선우는 혀를 찼다. 오랜만에 조용하게 지낼 수 있겠다, 그렇게 말하니 정세현이 토라진 것처럼 투정을 부렸었다. 거기까지 회상했을 때 차선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낯짝이 두꺼운 녀석이었다, 평화로운 일상에 자기가 훼방을 놓고 있다는 생각은 할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은 차선우는 무얼 해야 좋을지 떠올리지 못했다. 원래 무엇을 했었는지도 기억에서 흐릿했다. 설령 떠올린대도 그다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녀석이 참 일상 구석구석 훼방을 놓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바보가 된 기분으로 차선우는 일단 다시 한번 눈을 붙였다. 잠이 솔솔 쏟아졌다. 정세현이 없는 오전에 차선우에게 들리는 소리라고는 툭툭 떨어지는 빗소리뿐이었다.

열두 시 반쯤 다시 깨어난 차선우는 혼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해냈다. 가장 잘하는 요리를 해 먹고 오랜만에 대대적으로 청소를 했다. 집이 좁아서 청소는 금세 끝이 났다. 차선우는 자신의 좁은 거처를 좋아했다, 넓은 집에서 홀로 남겨진 기분에 휩싸이는 건 더는 싫었다. TV라도 한 대 설치해 놨으면 집이 덜 조용했으리라 생각하며 게임도 몇 판 했다. 게임이 지겨워질 때쯤이면 거대한 정보의 바다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누리꾼들이 서로를 헐뜯는 댓글을 세 개쯤 보다가 그만두고 차선우는 문득 이 모든 것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밤이 되면 별을 보러 가자. 차선우가 내린 결론은 그랬다. 비가 오는 날 하늘을 볼 수는 없었으므로 가까운 플라네타리움에 갈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차선우는 내심 불안해졌다, 그마저도 재미가 없으면 어떡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차선우는 하루 종일 정세현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지루한 하루를 보내다 보니 그는 조금 짜증이 나 있었다. 정확히는 그 녀석 없는 일상을 지루하게 여기는 스스로에게 성질이 났다. 그 녀석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언제라도 다른 것에 흥미를 느끼면 자신을 떠나 버릴 녀석인데. 차선우는 그런 녀석에게 도저히 마음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쉽게 손에 쥔 것은 그만큼 쉽게 손에서 빠져나간다. 차선우는 평생 쥐고 싶은 것을 오롯이 손에 넣어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렇게 느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찰나의 착각으로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그 바람 같은 녀석은 절대로 손에 잡혀 주지 않을 거라고……

그 완고한 확신은 플라네타리움 앞에서 정세현을 마주쳤을 때 금이 갔다.

"…… 여기는 왜 왔어? 내가 말해 주지도 않았잖아. 바쁘다고 연락도 안 되더니……"

"선우 보고 싶어서 왔지. 너라면 어쩐지 오늘 여기 올 것 같았거든. 그나저나 연락도 안 해 봤으면서 그렇게 말하기야?"

"너 바쁜데 방해될까 봐 그랬지……."

뻔한 거짓말이었다. 정세현은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 웃었다. 녀석의 눈가가 드물게 거뭇했다. 척 봐도 피곤해 보였다. 차선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녀석의 눈가를 쓸어 주었는데, 정세현은 가물거리는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면서도 기분이 좋은 양 웃었다. 차선우는 몹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피곤하면 지금이라도 자러 가. 이렇게 졸려 하면서……"

"피곤한 건 맞지만, 그래도 너 보고 싶어서 왔어. 그러니까 너무 매몰차게 보내지는 말아 줄래?"

"매몰차다니…… 네가 걱정돼서 한 말이야."

"정말? 기쁘다."

정세현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차선우는 또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녀석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와도 차선우는 모르는 척해 주었다. 나 없이 잘 지냈어? 간단한 질문에도 차선우는 조금 머뭇거렸다. 빈말로라도 잘 지냈다고 여기기 어려운 하루였다. 대충. 그 정도로 답변하니 정세현은 더 캐묻는 대신 빙긋 웃었다. 자리에 착석하고 영상이 시작할 때까지도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서로의 손만 꼭 잡고 있었을 따름이다.

[무더운 여름이면 아름다운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질러 흐릅니다. 목을 축이러 날아온 백조자리와 열심히 기어 오는 전갈자리가 특히 눈에 띄지요.]

차선우는 혼자서도 수십 번 이곳에 왔었다. 프로그램에서 읊어 주는 별자리 해설 같은 건 줄줄 욀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겨움을 모르고 또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는 원체 반짝이는 것을 사랑했고 밤하늘에 수놓인 별자리는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풍경으로 손꼽았다. 그것을 조잡하게나마 재현하고 싶어 천장에 야광별을 붙여 놓으면 옛 연인은 어린애 같은 짓이라며 웃어넘겼다. 그리고 정세현은 좋은 생각이라며 기꺼이 야광별 붙이기를 도와주었다. 커다란 남자 둘이서 조그만 별을 조금이라도 보기 좋게 붙여 보려고 애쓰던 모양새가 우스웠던 생각이 났다. 차선우는 문득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정세현을 보았다. 드문 일이었다.

[…… 백조자리는 은하수 한가운데에 위치한 크고 아름다운 별자리입니다. 견우성, 직녀성과 함께 백조자리 꼬리 부근의 데네브가 커다란 삼각형을 그리는데, 이것을 여름철의 삼각형이라 부릅니다.]

정세현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곳에 수십 번을 방문했으나 정세현이 잠든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정세현을 낯설게 여기며 차선우는 녀석의 긴 속눈썹을 가만 바라보았다. 한 올 한 올에 별빛이 맺혀 가녀린 빛을 냈다. 정세현은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화려하고 반짝거렸다. 차선우는 꽤 자주 녀석을 질투하곤 했다, 녀석의 곁에 있으면 별을 빛내기 위한 어둠이 된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나 빛나는 녀석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도통 빛날 줄 모르는 자신의 곁에서도 정세현은 변함없이 반짝거렸다. 자신과 함께 우주 영상을 본 날이면 녀석은 몰랐던 사실들을 이야기했다. 플라네타리움에서 똑같은 영상을 거듭 보아도 녀석은 항상 새로운 부분을 찾아내어 조잘거리곤 했다. 언젠가는 행성 정렬을 보러 가자며 대뜸 차에 태우기도 했고,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차창에 흐르는 빗물을 보며 조그만 우주 같지 않으냐 묻기도 했었고……

- 계속 궁금했는데, 너도 우주에 관심이 있었어? 관심 없어하는 친구들은 이런 곳에 오면 지루해하던데.

- 아니, 관심 없었고 앞으로도 썩 재미있진 않을 것 같아. 그렇지만 네가 좋아하잖아……

[데네브는 1등성 중 어두운 편에 속하는 1.3등급의 밝기이지만, 사실 태양보다 16만 배 더 밝다고 해요……]

정세현은 잠들었음에도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손을 매만지며 차선우는 문득 생각했다. 정말로 정세현이 나를 사랑할지도 몰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세현이라면 다른 좋은 사람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더 다정하고 상냥하게 구는 사람에게 얼마든지 떠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세현은 구태여 자신을 만나러 오기를 택했다. 편안한 잠자리를 뒤로하고 구태여 불편한 관람용 의자에 몸을 구긴 채로 눈을 붙이고 있다. 차선우는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원체 사랑할 이유보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훨씬 많은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를 사랑할지도 몰라. 사랑은 원체 재고 따질 수 없는 감정이니까. 그리고 나 역시 어쩌면, 우주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 지구인들이 별을 사랑하듯이……

[…… 거문고자리의 상징인 오르페우스는 마지막 순간 뒤를 돌아보아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눈에 담아 두는 것이 어떨까요?]

[이상으로 여름철 밤하늘 관측 프로그램을 마치겠습니다. 나뭇잎이 물드는 가을에 다시 만나요.]

플라네타리움의 밤하늘이 사라지고 단조로운 흰색 조명이 상영관을 비추었다. 관객들이 일어나 상영관을 떠나는 소리가 어렴풋 들려왔다. 차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영상에 조금도 집중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이 또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세현을 깨워 나가야 하는데도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차선우는 붙박인 듯 잠든 정세현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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