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갈증

케이크버스 해월

春雪 by 현명

#1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케이크들은 좋은 향기를 풍기고 포크들은 그에 반응하여 상대를 잡아먹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식인 충동을 느끼는 인간들이 판치는 현대 사회는……

그다지 야만적이지 않습니다. 포크들은 위험군으로 분류되어 따로 관리를 받게 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람을 잡아먹고 싶다는 충동에 스스로를 내맡기지 않기 마련입니다. 평생 채워지지 않을 굶주림과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더라도 말이죠. 포크들은 그걸 영혼의 갈증이라고 부르덥니다. 뭐, 그건 포크들의 사정이니 케이크인 저는 알 바 아닙니다. 호랑이를 걱정하는 토끼는 없잖아요.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해라고 부르세요. 나이는 스물 중반이고 바이올린을 조금 켤 줄 압니다. 저는 케이크 중에서도 유난히 수요가 없는 편입니다. 건강식품 비슷한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그리 기분 좋은 평가는 아니더군요. 몸에서 냄새 난다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케이크가 포크를 사랑하게 되면 대다수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포크에게 잡아먹힌다고들 하덥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채워 주고 싶어진다 하더라고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건강식품 먹자고 남을 죽이고 싶어하는 정신 나간 사람도 없을 테고요……

#2

하지만 뭐든 단언하면 변수가 들이닥치는 법입니다. 저는 정신 나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를 만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 사람은 굉장한 미인이었어요, 평범한 동인이었다면 분명 모든 포크를 홀리는 케이크였을 겁니다(앗, 내가 무슨 말을!). 성황리에 연주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저는 문득 누군가에게 손목이 붙잡혔습니다. 평생 스토커 새끼가 붙은 적이 없어서 긴장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긴장이 싹 풀릴 만큼 예쁜 얼굴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스토커가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좌우지간 그 사람이 난데없이 말했습니다.

🌙 당신, 좋은 냄새가 나시네요…….
🌊 그렇게 후한 평가는 처음 받는군요. 구미가 당기십니까?
🌙 네. 다른 사람들은 냄새만 맡아도 코가 저릿할 만큼 달았어요. 맛도 못 느끼는데 냄새만으로 당뇨에 걸릴 것 같아서 억울한 삶을 살아 왔답니다.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사람이 저에게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이름은 명사월, 훑어보면 카페 사장인 듯했습니다. 저는 무척 황당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 뭡니까, 여기로 찾아오라고요?
🌙 찾아와 주시면 기쁠 거예요. 제가 졸졸 따라다니면 분명 감찰을 당하게 될 테니까요.
🌊 내가 가지 않으면요?
🌙 오실 거라고 믿어요.

그 사람이 눈을 접어 웃었습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 미인이었습니다. 저는 긍정도 부정도 않고 차에 타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이 백미러로 비쳐 보였습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기다리고 있을게요.

정말로 불쾌한 초대였습니다, 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말이죠.

#3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리겠지만 저는 정말로 며칠 후에 그 사람을 만나러 갔습니다. 정원이 예쁜 카페였습니다. 저는 이 정원을 관리하는 데 연간 얼마가 들지 생각하며 잠시 그곳을 거닐었습니다. 그따위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제 발로 호랑이굴에 찾아온 스스로를 비관하게 될 테니까요! 그 사람은 냄새를 맡았는지 맨발로 뛰쳐나왔습니다(문명인답지 못한 면모에 굉장히 놀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원래 맨발걷기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 어서 와요! 정원이 예쁘죠? 제가 직접 꾸몄어요.
🌊 좋아 보입니다. 꽃이 싱그럽고 부지도 넓군요. 사람의 유해를 몰래 파묻어도 사 년 정도는 들키지 않겠습니다.
🌙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잡아먹으려고 초대한 게 아니에요, 같이 꽃도 보고 음료도 한 잔 만들어 주려고 했죠.

그 사람이 새침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반신반의하며 그 사람에게 유니콘 셰이크(잘 먹고 죽어서 때깔이라도 고와야 하니 가장 비싼 거 시킴)를 주문했습니다. 그 사람은 계속 무어라 조잘조잘 말을 걸다가 은근슬쩍 말까지 놓았습니다. 그 사람의 화법 탓인지 저는 그에게 신상의 대부분을 털어놓았습니다. 집주소 같은 건 불지 않아서 다행이었죠. 좌우지간 한 입 먹자마자 저는 그 사람을 5신95의하게 되었습니다.

🌊 맛대가리 없는 음식을 평생 먹어야 하는 포크의 고충을 느껴 보라는 겁니까? 그러니 순순히 미식이 되어 달라고요?
🌙 그렇게 맛이 없니? 내 야심찬 신메뉴였는데……
🌊 괴식으로 암살하고 잡아먹으려는 야심이라면 잘 전해집니다.

뭐, 맛대가리 없는 요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 사람은 포크니까 대부분의 음식에서 맛을 못 느끼거든요. 맛을 느끼더라도 그게 객관적으로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쓴맛에 조예가 깊어져서 커피를 잘 내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를 맛있겠다고 여기는 것도 건강식품 맛이 날 것 같아서잖아요. 그 사람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며 정원을 거닐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포크치고 상냥하고 부드러워서 저도 모르게 오래도록 듣고 있게 되었거든요. 몰래 잡아먹을 수 있었음에도 그 사람은 의외로 순순히 저를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차 시동을 걸려고 하니 그 사람은 또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 또 놀러 오렴, 기다리고 있을게.

저는 근시일 안으로 또다시 이곳에 오게 되리라 직감했습니다. 스스로 마녀의 화덕으로 들어가는 헨젤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죠, 그 사람은 굉장한 미인이라니까요.

#4

우리는 꽤나 자주 서로를 만났습니다. 저는 날이 갈수록 그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괴짜 같지만 순진하고, 위험하지만 사랑스러운 사람. 어쩌면 이 사람에게 닿기 위해서 요상한 향을 달고 태어난 게 아닐까? 나의 삶이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안배된 게 아닐까? 조금만 방심해도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습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배드엔딩으로 끝나곤 하죠. 제 결말은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5

언젠가의 우리는 바다에 함께 갔습니다. 그 사람은 바다의 끝을 알지 못해서 무섭다고 했습니다. 저는 끝없이 가로질러 가다 보면 다시 이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 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다를 조금 덜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의 우리는 밤새 함께 있었습니다. 천둥번개가 치는 밤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큰 소리를 무서워하고 바이올린처럼 정제된 소리를 듣는 편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천둥번개가 치면 언제든 자신에게 오라고 답했습니다. 실없는 소리라며 웃었지만 저는 어쩐지 조금 안심이 되었습니다.

또 언젠가, 우리는 레스토랑에 함께 갔습니다. 사월은 미식 같은 걸 체질적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순전히 저를 위해 방문한 겁니다. 그 사람은 정갈하게 놓인 포크를 매만지며 쓸쓸해했습니다.

🌙 내가 포크라고 밝히면 사람들은 나를 무서워하지. 포크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나는 명사월이 아니라 그저 포크 중 하나가 된단다. 그 시선을 느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통감하곤 해…….

외로우셨겠네요. 저는 뻔한 말을 했습니다. 사월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 고민하다가, 제가 느낀 바를 그대로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 솔직히 나도 사월 씨가 두려웠어요. 언젠가 반드시 잡아먹힐 줄 알았거든요. 그렇지만 당신과의 만남은 너무 즐거워서, 지금의 나는 당신을 경계하려 애써도 그렇게 되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은 그저 당신인 채로 있으세요, 내가 사월을 사월로 보아 드릴게요.

사월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저를 보았습니다. 이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어 왔습니다.

🌙 나에게 잡아먹히면 어떡하려고 그런 말을 하니?

저는 그 목소리가 몹시 슬프게 들렸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경계하지 않으니 오히려 그 사람이 스스로를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런 생각은 당치도 않습니다. 사실은 저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잡아먹을 요량으로 저와 가까워지려 했다는 사실을요. 저는 손끝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 ……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당신을 그저 당신이라고 생각하게 되겠죠.

사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소보다 배로 조용한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던 밤이었습니다.

#6

🌊 있죠, 당신의 영혼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날은 달빛이 아주 강렬한 밤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과 아주 가까이 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 품에 고개를 묻고 향을 맡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니? 그렇게 물었지만 그 사람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을 겁니다. 저는 특별히 한번 더 설명해 주기로 했습니다.

🌊 목숨을 바치는 건 싫으니까 팔 한 쪽은 내어 드릴게요?

눈치가 빠르다면 아셨겠지만, 팔 한 짝을 주면 저는 더 이상 바이올린을 켤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정말이지 모든 걸 그 사람에게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월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끔찍한 말을 들었다는 양 우물쭈물거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습니다.

🌙 왜 그렇게 말하니? 나는 너를 해치고 싶지 않아…….
🌊 나를 잡아먹고 싶어했잖아요. 그러려고 지금까지 공을 들였잖아요. 잘된 일 아닌가요?

아니,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꼭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아냥거리려는 뜻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달래려 했습니다. 그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습니다. 저를 만난 의도가 불순했다는 것을 스스로 뉘우치려는 듯했습니다. 침묵이 길게 이어지다가, 마침내 그 사람이 느릿느릿 말했습니다.

🌙 너를 먹어치우면 영혼의 갈증은 해소되겠지. 그러나 그건 나의 영혼을 잃었기 때문일 거야. 영혼을 송두리째 잃어버려 갈증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는 거야…….
🌊 하지만 당신은 결국 나의 곁에서 괴로워질 거예요, 나를 잡아먹지 못하니까요. 내 옆에서 굶주리고 목마를 테니까요.
🌙 그게 걱정된다면 계속 내 곁에 있어 주렴.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어 줘.

그 말을 들으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습니다. 토끼가 호랑이를 걱정한다는 말 말예요. 나는 피식자인 주제에 포식자를 너무나 사랑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포식자도 저를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를 사랑하니까요.

🌊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거라면, 알겠어요. 목숨보다 훨씬 싼 값이네요.

#7

며칠 전에는 사월과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딸기 케이크를 사랑해서 잡아먹지 않고 평생 곁에 끼고 다니면 제정신이 아닌 거겠죠. 당신이 딱 그런 꼴이네요.
🌙 케이크로 비유하니까 이상하지. 너는 케이크 위의 설탕 인형이야. 설탕 인형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안녕하세요?” 인사도 하고 나와 대화도 나누고 내가 외로울까 걱정도 해 준다고 생각해 보렴.
🌊 음, 그렇다면 잡아먹기 좀 그렇겠네요.

뭐, 그런 얘기예요.

저는 여전히 사월과 잘 지냅니다. 그 사람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끔 변태처럼 손가락 따위를 핥곤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요. 그 사람이 언젠가 정말로 절제하지 못해서 손가락 한 쪽을 잡아먹는 날이 올까요?

그래도 여전히 괜찮을 거예요. 저는 바이올린을 좀 켤 줄 알아서, 손가락 하나쯤 없어도 근사한 연주를 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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