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洗雨
"살별 세彗에 나타날 현現을 쓰네."
"와, 바로 알아맞히는 사람은 처음 봤어! 선우는 한자도 잘하는구나."
자연스레 자신을 끌어안는 그를 모른 척하고 차선우는 민증에 찍힌 그의 이름을 손끝으로 훑어내렸다. 이름 옆에는 부드러운 낯으로 웃는, 지금보다 어린 티가 나는 그가 있었다. 머리카락도 눈도 밝은 색을 띠는 그는 어디서든 눈에 띌 터였다, 광채를 흩뿌리며 밤하늘을 가르지르는 혜성처럼. 한참 사진과 이름을 번갈아 보던 차선우는 느낀 바를 그대로 이야기했다.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해. 너와 잘 어울려."
"그런 얘기, 많이 들어. 선우는 무슨 한자를 쓰는데?"
차선우는 대답 대신 메모지에 한자를 써서 내밀었다. 깨끗한 비洗雨라는 뜻이구나. 정세현은 단번에 그 한자를 알아맞혔다. 놈은 원체 모든 분야에서 아는 게 많았다. 아무래도 한자를 잘한다고 칭찬한 건 흰소리였던 모양이었다. 차선우는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버려 두었다. 하늘은 또다시 우중충한 기색이었다. 유난히 비 내리는 날이 잦은 봄이었다. 차선우가 정세현에게 시선을 두거든 그는 나른하게 웃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이름을 별로 안 좋아하나 봐, 선우는."
곧바로 정곡을 찔러 오기에 차선우는 또다시 조금 짜증이 났다. 그래. 퉁명스러운 답변을 툭 던지면 정세현은 달래듯 상냥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왜 싫어? 예쁜 이름인데……. 차선우는 그 말에 대답할 말이 아주 많았다. 학창 시절, 다른 친구들과 이름자를 비교하고 있자면 별뜻 없는 제 이름이 부끄럽게 느껴지곤 했다. 누나의 이름은 고심해서 지었으면서 제 이름은 돌림자로 적당히 붙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끔찍하게 싫어졌었다. 비가 오는 날에 널찍한 집에 홀로 남겨지면 크게 들려오는 빗소리가 무서웠었다. 그 이유들을 샛별처럼 예쁜 이름을 가진 정세현에게 곧이곧대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선우는 머리를 굴려 괜찮은 이유 하나를 꺼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별을 볼 수 없잖아. 그래서 비 오는 날을 싫어해."
"정말이지 선우다운 이유네……. 낭만적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또다시 눈을 접어 웃었다. 차선우는 놈의 속내를 가늠해 보려다가 금세 그만두었다. 놈이 또다시 입술을 비벼 대려고 했던 탓이다.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입술을 너무 많이 내 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선우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캐물어 오는 것보다야 주둥이 비비고 끝내는 게 훨씬 나았다.
*
"드디어 내 장기를 전부 팔아먹고 시체를 유기하려는 생각인가 봐?"
"선우는 가끔씩 생각하는 게 너무 극단적이라니까. 그런 건 한적한 폐공장에서나 하지, 이런 번화가에서 대담하게 그러겠어?"
차선우가 눈을 가늘게 떴지만 정세현은 본체만체했다(실행에 옮긴 적은 없다고 했다). 목적지도 알리지 않은 채 대뜸 차선우를 태우고 차를 몰던 정세현은 번화가의 중심까지 진입한 후 세웠다. 자신을 어디로 데려온 건지는 몰라도 차선우는 자연스럽게 내리려고 했다. 그런 그를 정세현은 대뜸 붙들어 놓고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기다려 봐……. 시동이 꺼진 차안에서는 라디오에서 송출하는 음악만 조용하게 흘렀다. 정세현은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차선우도 그가 보는 방향을 들여다 보았다. 비 내리는 밤중에도 번화가는 여전히 소란했고 불빛이 번쩍거렸다. 다만 거리의 형체들이 조금씩 빗물에 녹아 흐려지고 있었다. 정세현이 말을 걸어온 건 앞유리가 온통 빗물에 젖어 버린 후였다.
"선우야, 내가 어렸을 때는 비 오는 날이면 가끔씩 이렇게 유리에 맺힌 물방울을 들여다보곤 했어. 알알이 맺혀 있다가, 가끔씩 자기들끼리 손을 잡고 흘러내리기도 하지. 봐, 이렇게……."
차선우는 그 모양새를 가만 들여다 보았다. 꼭 별 같지. 정세현이 나직이 말했다. 차선우는 가만가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대로, 빗물로 이루어진 우주가 쉴새없이 모습을 바꾸어 가며 눈앞에 있었다. 도시의 불빛들이 저마다 다른 색채로 작은 우주를 물들였다. 빗물이 모여 흐르면 꼭 은하수 같았다. 아니, 애초에 은하수라는 이름이 흐르는 물줄기를 본따 지어지지 않았던가. 차선우는 손을 뻗어 차가운 유리를 쓸었다. 물줄기가 만져지지 않아도 좋았다. 아무리 손을 뻗는대도 은하수를 잡을 수 없던 것과 같았다.
한참 동안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차선우는 집요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정세현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색소 옅은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온통 도시의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그럼에도 차선우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차선우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싶어졌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듯이.
"나이가 들어서는 이 풍경이 예쁘다는 걸 잊고 지냈지. 그렇지만 네 말을 듣고서 추억 속의 별들을 다시 떠올렸어……. 네가 보기에는 어때?"
"예뻐, 마음에 들어. …… 내가 비를 싫어하지 않기를 바랐어?"
"응. 그리고 네 이름을 예뻐해 주기를 바랐어. 나는 깨끗하게 흐르는 네 이름을 좋아해. 선우, 선우야……."
차선우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놈은 언제나 자신에게 호감을 얻는 법을 통달한 사람처럼 굴었다. 지금껏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차선우는 별을 사랑하지 않는 법을 알지 못했다…….
차선우는 정세현에게 입을 맞추기로 했다. 사랑에 빠진 여느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놈이 좋아하는 짓을 해 주고 싶었던 탓이다. 정세현은 기쁘게 눈을 감았다. 입술이 맞닿으면 또다시 유리창을 때려 대는 빗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번에는 차선우도 그 소리가 무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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