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젤다] Bliss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 1주년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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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 (왕국의 눈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상 시 유의해 주세요.

# 15금? 정도의 묘사가 나오는데 불편하심 뒤로가기 해주세요.

#링크가 멘헤라라 불쾌한 묘사가 나옵니다. 주의해 주세요.

하이랄을 할퀸  대재앙을 봉인 후, 거취가 불명확해진 젤다를 위해 하테노 마을에 마련한 자신의 집을 기꺼이 내어 준 링크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푯말을 그 자리에서 깔끔한 검기로 부숴 버렸고, 볼슨에게 젤다가 원하는 대로 집을 고쳐 달라고까지 의뢰했다. 물론 비용까지 그가 감당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신의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헌신해 주는 그를 지켜보던 젤다의 제안으로 어쩌다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집주인이 버젓이 여기 있는데 대체 어딜 가냐며, 여관이나 화톳불에서 지새울 결심일랑 추호도 하지 말라는 단호한 말에 링크는 집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동안 간헐적으로 가시넝쿨 같은 악몽이 젤다를 괴롭혔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였기에 괜찮았고 나아갈 수 있었으리라.


원망하는 곡소리들, 왜 너만 살아남았냐는 저주의 말들, 원념 속에서 저를 노리던 수많은 눈들. 조금만 방심하여 힘겨루기에서 밀리면 단번에 삼켜져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가려 했던 재앙은 자신의 죄의식과 백 년간의 세월이 만들어낸 환영이 젤다를 지독히도 놓아주지 않았다.


한 번은 밤늦게까지 잠에 들지 않고 부러 연구를 계속하며 무리를 하다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

하테노 고대 연구소와 집, 우물 속 비밀공간을 오가며 해가 뜨기 전에야 잠자리에 들었으니 과로도 과로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코피를 자주 흘리는 것이 심상치 않더니만, 기어코 집 안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현기증이 일더니 그대로 기절하는 걸 링크가 받아냈기에 망정이었다.


또 한번은 링크의 간호로-맥스순무로 만든 푸딩과 프루트케이크에 상급고기스튜에다가 활력당근야채볶음까지 아무튼 좋다는 건 다 헤 먹였다-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마을 밤산책을 링크의 감시 겸 보호 하에 하기 시작했다.

링크도 피곤할 터인데 먼저 들어가 자라 해도 그는 고집이 세게도 들은 척도 안 하고 묵묵히 곁을 지키며 걸었다. 젤다가 졸리다고 말할 때까지. 결국 짧은 산책을 하고 귀가하여 침대에 누웠다.


차마 한 침대는 못 쓴다는 완강한 의지에, 젤다가 눕고 링크는 침대 밑에 걸터앉아 호위하며 앉은 채로 잠을 청하기로 하였으나 그녀의 악몽의 농도가 생각보다 짙어 링크의 뜻은 무마되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잠꼬대 정도였으나, 갈수록 매일 밤중에 몸부림의 정도와 강도가 심해졌다.

결국 젤다가 격렬하게 오열하며 깨어났을 때 반사적으로 안아 달래며 링크는 자신이 그녀를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홀로 외로운 싸움을 또 하게 만들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치가 떨리며 젤다가 이 집을 선물 받은 날부터 제안한 동침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젤다가 우는 얼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였기에.


두 사건 이후 조금이라도 젤다가 늦게 취침을 하려는 기색을 보이면 링크는 완강히 실례라곤 말하면서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거의 가장자리에 아슬아슬 제 몸을 뉘었다. 젤다는 못 이기며 누웠고 그런 그에게 소심한 복수로 더 가까이 오라 해도 침대에서 링크가 차지하는 지분은 너무나도 적었다. 퍽 그 다워서 젤다는 어쩐지 웃음이 나오며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서.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젤다가 잠든 줄 알았으나 그녀는 윗몸을 일으켜 링크의 심장 위로 제 한쪽 귀를 대어 기울였다. 위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이고 따뜻한 숨결, 안정적으로 박동하는 심장의 파동과 온기. 그 옛날 당신이 명운을 다했을 때와 너무나도 달라서 젤다는 눈물이 차올랐다.


“살아 있어…”

눈물이 흘러내리기 직전 얼굴을 물리려는 찰나, 링크는 팔을 뻗어 젤다를 살포시 마주 안았다.

“살아 있어요.”


결국 작은 방울들은 링크의 가슴팍에 흩뿌려졌으나 그것조차 기꺼운 링크였다.

날 살린 사람. 날 부른 사람. 내 삶의 방향이자 무게추가 되어 준 사람.

이 심장은 당신에 의해 뛰고 있고 당신을 위해 뛰고 있으니,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심장쯤이야 내어줄 수 있다. 이 덩어리가 주는 온기와 박동이 당신에게 안온함을 준다면 가슴이라도 갈라 꺼내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젤다는 링크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게 되며 악몽의 빈도가 현저히 줄었다.

링크는 그 악몽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으며 젤다가 살린 기적의 빛 그 자체였으니까.


그러나 곤란한 일도 있었다. 아무래도 몸이 밀착되어 수면을 하다 보니 서로의 몸이 엉겨 붙을(?) 때가 있어 민망한 순간도 발생했다. 예로 젤다의 손이 링크의 셔츠 안쪽에 놓여-허리 쪽과 골반 쪽에-의도 없이 순수히 무의식적으로 침범했다든지 말이다. 링크도 자다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부드러운 촉감에 눈을 떠보니 젤다의 가슴이 제 팔 쪽에 밀착되어 있어 패닉이 온 적이라든가. 다행인지 아닌지 젤다는 모르고 링크만 알았지만 갈수록 이 검사의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쌓여만 갔다.


집이 리모델링되고, 하테노에 학교가 생기고, 감시 요새와 조망대가 완공되는 등 바쁘게 하이랄 재건은 실행된 어느 날, 불행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스며 나오는 독기가 모든 걸 앗아갔다.


더 커진 당신의 존재의 의미와 크기, 부피를 알고도 몰랐다.

잃고 나서 온전히 알게 되었다.


당신은 어째서 나보다 더 앞서 가버리는 것인가.

그리고 난 왜 그런 당신을 붙잡을 수조차 없는 것일까.

그런 기회조차 왜 주어지지 않는 걸까.

아, 다 의미 없으리라.


당신과 마주한 두 번째 재앙, 마왕 가논돌프.

그를 토벌하고 당신은 기적과도 같이 돌아왔다.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미연의 문제가 남아 있는 줄도 모른 채 묻어놓고 안도하며.



**




링크는 요즘 젤다가 보관하고 있는 시간의 비석이 못마땅했다.

아니, 못마땅하다고 표현하는 건 가볍다.

불안했다, 가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마음 같아선 저놈의 비석을 하일리아 대교 밑 강으로 던져버리고 싶다. 아무도 못 찾게.

더 솔직한 심정은 과격 그 자체이지만 말이다.


시간 여행에서 돌아온 젤다는 신화시대에서 만난 사람들을 추억하기 위해 우선 하테노 학교에서 신화시대의 역사에 대해 가르쳤다. 더불어 현자들의 협력을 얻어내 각지의 마을을 방문하여 재건에 더욱 힘쓰고 조나우 조사대 거점을 순회하고 조나우 유물의 연구와 공부를 시작했으며 그들의 기술에 대해 피력하기를 앞장섰다. 여기에 하이랄을 건국한 라울 왕과 소니아 왕비를 위한 추모비를 자신의 이름으로 바쳤다. 그들 덕분에 다시 이 땅에 돌아와 두 발로 설 수 있음에 감사하며. 끝내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며.


그렇게 바쁜 나날들 속에서 불화의 씨앗은 심어져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음을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그 씨앗이 심어진 숙주마저도.


하테노 학교의 수업을 준비하기 위한 전날 밤이었다.

내일 조나우의 유물인 비석에 대한 수업을 하기로 하여 보관 중이던 시간의 비석을 찾던 젤다였다. 

없었다.

분명 우물 속 책장의 작은 상자에 보관 중이었는데. 텅 빈 상자만 자리하고 있었다.

비석의 보관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현자들, 임파와 프루아, 로베리, 그리고…


링크.


상자를 확인한 순간부터 확신하고 있었잖아?

직감이 말을 걸었다. 나와 가장 가까우며 이곳에 쉽게 접근하여 비석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라는 걸.

다만 그를 의심하기 싫어 외면했지.


고개를 도리질 치며 그를 찾아 나서기 위해 사다리를 올랐다.

아마 멀리 못 갔을 것이다. 그는 밤에 나를 두고 멀리 가지 않으니까. 아니, 못하니까.

아직까지도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악몽에 시달리는 내 곁을 몇 년 동안 지켜주는 그였으니까.

그리 추리하며 젤다는 계속하여 머리를 굴렸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 그러면서 일을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곳.

그렇다면 혹시.



*


예상대로 링크는 멀리 가지 못했다.

집 뒷산, 깨진 하트 모양이 있는 특이한 산 위에 그가 있었다.

한 손으론 마스터소드를 단단히 거머쥐고 다른 한 손으론 비석을 손아귀에 쥔 채로 말이다.


“링크, 돌려줘요. 그건-”

“신화시대 사람들과의 추억이 얽힌 소중한 물건이죠. 알아요.”

“그럼 왜..”

“.. 이 비석이 당신을 또 삼키기라도 하면 저는…”


더는 못 버틸 테니까.

뒷말은 입안에 맴돌다 말이 되지 못하고 기화되었다. 링크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젤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실망했어요, 질색이에요.. 이러실까.

모쪼록 면목없는 짓을 저질러 버렸다.

면책을 못 피할 각오를 한 것 아니었는가?

그건 그렇지만, 그랬지만 젤다의 실망을 사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아, 참을걸. 여태껏 잘 억눌러 놓고 왜 새어 나와서는.

하지만 당신의 안녕에 관한 것이면 조급해진다. 마음이… 아주 복잡해져 사고가 꼬인다.

그 일 이후로.

자꾸만 선을 넘으려고만 한다. 무언가가, 기어 나오려고만 하는 것 같다.


링크의 정곡을 찌른 말에 젤다도 굳어버렸다.

자신은 아직도 비석의 힘을 다 알지 못하며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언제 휘둘릴지 모를 일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프루아와 로베리의 지혜를 빌리고 현자들의 도움을 받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링크는 그것조차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나 보다.


“링크.”

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나 젤다는 오랜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기에 그가 긴장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전설의 용사가 겨우 제 말 한마디에 놀란다니. 젤다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그가 귀엽기도, 안쓰럽기도 해서-결국 자신을 위해 저렇게 행동한 것일 텐데-그를 다시 불렀다.


“링크, 집에 가요.”


그제야 공주의 귀중품을 훔친 잘못을 통감한 도둑이 된 용사는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 죄송합니다. 심려 끼쳐드려…”

“괜찮아요. 용서할게요.”

확실하게 용서한다 말해두어야 그의 끝없는 사죄가 끝날 테니 젤다는 쐐기를 박으며 그가 건네는 비석을 받았다.



검을 거둬 등의 검집에 꽂아 넣고 집에 오는 동안 눈치를 보며 죄지은 커다란 강아지처럼 뒤에서 몇 걸음 떨어져 오는 링크였다.

화 안 났는데. 당황하긴 했지만.

집에 들어오자마자 장작을 구해오겠다고 다시 나가겠다는 그를 뜯어말리곤 의자에 앉혔다.


“장작은 충분하잖아요.”

“…”

“잠시만 기다려요. 당신이랑 먹고 싶은 게 있어요.”


이럴 때 그걸 쓰는 건 좀 비겁(?)할 순 있지만.. 얼마 전에 리드 촌장님께 받아온 황금 사과로 만든 사과주로 그의 투덜거리는 주정이라도 좋으니 속마음을 듣고 싶었다.

왜 ‘술김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그게 나쁜 거란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철옹성 같은 링크의 빈틈을 찌르려면 한번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 돌도 나무도 씹어먹는 위장의 소유자인 링크가 과연 취할지는 모르겠다만.

오히려 소화력이 너무 좋아서 잘 취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이상, 도박이었다.

젤다는 아까 산을 내려오며 술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링크의 요즘 묻어둔 생각을 알아낼 각오를 했다.

어쩌다 그런 결심을 했는지,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 속이 얼마나 곪아 병들었을지.


리드에게 선물 받은 사과주를 두 개의 잔에 나눠 따르고 안주로 하테노 치즈를 자르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젤다였다.



*


꽤 마셨을까.

이리저리 잡담을 하면서 젤다는 부러 마시는 양을 조절하며 링크에겐 계속 술을 권했다.

예상대로 소화력이 뛰어난 링크는 취기가 금방 돌았다.

(허나 이것은 젤다의 착각이었다. 아무쪼록 술을 처음 접해본 링크는 알코올에 익숙하지 않았고, 이후로 점점 익숙해지며 그는 술고래로 각성하게 된다…)

흐려진 푸른 동공을 마주 보며 젤다는 가까이 가 서서 조심스레 물었다.


“링크, 괜찮아요..?”


너무 먹였나, 젤다에게 가벼운 죄책감이 드리우려던 순간, 링크가 젤다를 제 무릎 위로 당겨 앉히곤 그녀를 안았다. 쉽게 떨쳐내 벗어나지 못하도록.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그의 진심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이 또 사라질까 봐 두려워요.”


취기에 뭉뚱 그러진 발음이었으나 의미는 확실히 전달되었다.

동시에 감싼 양팔의 힘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아프지는 않았다. 해할 저의는 조금도 없었기에 그런 것일까. 젤다는 그가 안쓰러워져 조심스레 색이 탁한 금발을 살며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가만가만 손길을 받으며 이어 말해갔다.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아나요. 그때 반드시 당신의 손을 잡았어야 했는데, 하고 몇 번을 후회했는지… 더 괴로운 건 무슨 짓을 해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그 사실이 날 짓눌려 죽일 것 같아서 맡겨진 일을 하기로 했어요. 어떻게든, 어떤 형태든지 당신이 살아 있기만 하면 됐다고 어설픈 자기 위로나 해대면서…”


한낮의 바다와 하늘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빛을 잔뜩 머금어 흘렸다.

몸의 떨림도 전보다 더해져-그럼에도 잘 단련된 몸이라 크게 흔들리지 않는-안쓰러움은 가중되어만 가 젤다는 그의 얼굴을 끌어와 제 품에 묻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잠시 당황한 걸까. 말하기를 멈춘 그였다.


“괜찮으니까, 계속 말해 줘요.”


그의 등을 살며시 토닥이며 젤다는 이어 말하길 청했다. 이 과묵한 남자는 말이 없어 평소에 얼마나 상념들을 속으로 쌓고 삭힐지 젤다는 알 길이 없었다. 오늘의 사과주와 같은 해프닝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알 수 있겠는가? 생각보다 과음한 그라 가능한 상황이었다.


“.. 마왕을 토벌하고 나면, 당신을 따라가려고 각오했어..가논돌프의 비석이든 현자들의 비석이든 간에 뭐든 이용해서 용이 되려고… 그래, 당신이 사랑한 이 세상을 죽을 때까지 지킬까도 했는데.. 이미 의미가 없었어. 지킬 이유가. 젤다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어..”


이젠 거의 혼잣말의 경지였다. 품속에 묻힌 작은 중얼거림은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크고 뚜렷하게 전달되었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상의 앞섶이 축축해졌다. 처음이었다. 링크가 젤다의 앞에서 운 건. 더군다나 이렇게 밀착하여 안긴 채로 말이다.


젤다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티를 내어 분위기를 깨고 싶진 않았다.


“.. 그래도 난 당신이 살아 주면 했어요. 당신은 마음이 강한 사람이니까.”

“강하지 않아요..”

“그 절망 속에서도 그렇게 해내 주었잖아요.”

“당신이 없었음 못 했어요.”


이리 유약한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여린 면을 여과 없이 내보이다니 늘 잘 벼려진 검날 같은 사람과 동일인물인가 싶다. 그래, 아무리 강한 당신조차도 사람이기에 약한 모습도 있는 거겠지.

내가 그렇듯.

젤다는 다음에 할 말을 고르며 사고를 곰곰이 이어갔다.



떠맡기기인 걸 알고 있었다. 

그저 불확실한 미래에 작은 희망을 띄워 보내 모든 걸 미루는 유예기간. 한마디로 시간 벌이.

내가 사라진다 하여도 당신은 살아서 이어진 일을 완수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이용했다.

우리의 관계를 사용했다 하여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당신과의 소중한 인연을 세계 수호를 위한 제물로 바쳤다.


당신은 그래도 나를 용서해 줄 거라는 자만에서 우러나온 선택이었다.

*


언젠가의 이야기였을까, 젤다가 인간으로 되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후계자 겸 혼인 주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왕비 요나를 아내로 맞은 시드 왕처럼, 하이랄 왕가의 존속을 위해 젤다 공주도 그리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감시 요새에 잠시 들린 여행자들의 수다를 주워들은 시커족 3인방과 젤다와 링크였다. 


-무례하군요. 한 마디하고 오겠습니다.

-Hey you! 진정하고 무기 집어넣게!

-뭐, 완전 틀린 말도 아니야. 공주님, 관심 있는 사람은 없어?

-하긴, 젤다 님도 혼기가 차셨지…

-ㄴ, 네?


시커족 3명은 젤다가 관심 있는 사람이 누군지 너무나도 뻔하게 잘 알았으니, 프루아는 골릴 생각으로 부러 떠보았다.


-링크는? 맘에 든 사람 있어?

-…

-프, 프루아! 실례예요!

-오, 공주님은 있나 봐~?


결국 공주님 놀리기로 방향이 바뀌어버렸지만…

젤다의 뺨이 살짝 달아오른 건 다들 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 고백 아닌 고백을 한 젤다였다.

어김없이 링크와 함께 한 자리에 누운 채로 익숙한 집 천장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텄다.


-링크.

-네. 말씀하세요.

-아까 결혼 얘기는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프루아가 장난으로 한 말이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은 할 생각 없으니까요..!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저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 그, 그런가요. 그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네.

-너무 제 욕심이지만.. 당신의 남은 삶을 묶어버리는 거지만 그래도…


젤다는 차마 뒷말을 이을 용기가 솟지 않아 이불속에서 두 손만 모아 꼼질거렸다.

그런 그녀의 용기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링크는 알고 있었다.


-말해 주세요.

-…


다시 맞물린 푸른빛과 비취빛 눈동자들 속엔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가 담겼다.


-하이랄을 위해서.. 나중에.. 나랑, 결혼… 해 줄래요?


링크는 직감했다.

젤다는 하이랄을 위함을 내세웠고, 그녀는 그 말대로 이행할 것임을. 그리고 자신은 젤다의 제안을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음을.

설령 이 세상을 위해 이용당하고 사용당해도 영광일 거라고.

젤다에게 우선이 자신이 아니어도 좋다. 그런 사람임을 뼈저리게 잘 아니까. 그래서 사랑하니까.


-네.

-정말요..?

-좋습니다.

-.. 제가 당신을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요?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요.

-당신이 원하는 걸 줄 수 없을 지도 물라도요?

-이미 과분합니다.


젤다는 그의 순애에, 링크는 그녀의 총애에 숨이 벅차 막혀오는 밤이었다.

평소처럼 그러했듯, 그러나 그날은 조금은 다르게 서로를 얼싸안고 온기를 나누며 어쩐지 서글픈 기분으로 잠이 드는 두 사람이었다.


태산처럼 쌓인 사명이 있었다. 아마 평생을 바쳐도 역부족일지도 모르지. 그러기에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고 평탄한 삶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사랑에 따르는 사명은 이다지도 무거워 그로 하여금 행하는 이의 삶을 단단히 귀속했다. 젤다는 세상을 사랑하기에 이 세상에, 링크는 젤다에게 보이지 않는 길고 두꺼운 사슬로 묶였다. 

젤다는 사사로움 한 조각도 사랑하는 그에게 주지 못해 슬펐다. 링크는 그런 그녀를 온전히 지키긴커녕 사명을 조금밖에 나눠 드는 것 밖에 할 줄 몰라 슬펐고.



*


젤다는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다음 할 말을 찾지 못해서, 링크가 하는 방법대로 해 보기로 하였다.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

때론 열 마디 말보단 행동 하나가 더 큰 의미를 함축하고 전달할 수 있으니까.


링크의 누선과 뺨에 어린 물기를 엄지로 훔치고 이마를 가린 금발을 뒤로 살짝 넘긴 후 젤다는 가볍게 입술을 떨궜다.

그치길 바랐긴 했지만, 바로 저돌적으로 입을 맞춰 올 줄은 젤다는 예상치 못했다.

굶주린 짐승처럼 입술을 물어뜯을 기세였으나 혀로 부드럽게 맛보듯 문을 열어 달라 청해 왔다.

이성이 흐릴 텐데도 세심하게 대하는 그에 젤다는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며 뭉클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아 마음이 동해 입안의 침입을 허락했다.

길이 열리자마자 젤다의 혀를 잡아 옭아매 빨아들이고 위아래로 간질였다. 아직 그녀의 맛을 다 음미하지 않았다는 듯 다시 혀를 빼내어 작은 입술이 통통 부어오를 때까지 빨아올렸다.


“링크, 잠깐..”


튀어나온 살결에 혼이라도 담아 새길 작정인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다음 입맞춤이 이어졌다. 

거기다 링크의 양팔에 힘이 들어오더니 젤다를 안아 올리고 그녀의 온 얼굴 언저리에 키스를 퍼부었다.

계단은 대체 이 상태로 어떻게 오른 건지, 신체 능력이 발군인 용사의 뛰어난 감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도 위층으로 올라와 침대에 다다랐다.


젤다를 깔아뭉겔 기세로 눕히고 링크는 한쪽 귀를 젤다의 왼쪽 가슴 위로 가져가 대었다.

거의 벗겨진 숄 때문에 드러난 얇고 하얀 슬릿은 여과 없이 박동을 그에게 전달했다.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젤다의 숨결. 온기. 그럼에도 안심은 되지 않아서.


고개를 들어 허리선을 덧그려 손을 닿을 듯 말 듯 내리다 젤다의 납작한 배를 손끝으로 매만지던 링크의 머릿속은 진탕이었다.

".. 둘밖에 모르는 곳으로 데리고 떠나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서 가두고 묶어놓고 싶다.

오직 나만 보도록. 나만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집 밖에는 절대 못 나가게 하고.

아니, 어쩌면

아이를 가지게 되면 당신은 더 빨리, 반드시 나와 결혼해 주겠지. 당신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되면 당신을 이곳에 잡아놓을 수 있겠지.

내 옆에, 곁에, 언제 어디서든지 어딜 가나 나와 함께겠지. 

당신이 먼저 내가 좋다고 했잖아. 

내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나를 원한다 했잖아.

그럼 용서해 줄 거지.


비뚤어진 욕망이 만든 소유욕이 링크의 신경을 외줄 타기로 이끌었다.



“링크, 이리 와요.”

불안에서 기인한 욕망이 눌러 담긴 중얼거림을 들었을 텐데도

양팔을 벌리고 날 부르는 목소리. 

나를 줄곧 지키던 그 목소리와 그 이름.

그 밝고 맑은 부름에 시꺼먼 욕정과 집착은 사그라져 힘을 잃는다.

또 울고 싶어 진다. 하지만 아까와 다른 기분이다.

염치없게도 그 품에 안긴다. 짙은 금발을 동여맨 푸른 머리끈을 더듬어 찾아 검지에 걸어 풀어내며 젤다는 물었다.


“링크. 내가 또 없어질까 봐 불안한 거죠.”

“.. 네.”

“그럼 이렇게 해요.”


젤다가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링크는 한발 먼저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그다음 일은 금세 일어났다. 젤다가 갑자기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숄을 침대 한구석에 내려놨다.

그리고 녹음이 짙은 두 눈을 맞춰 오는데.


“날 안아 주세요, 링크. 당신이 없으면 안 되도록 만들어요.”


“그게, 무슨…”

무슨 의미인지 알고 이러시는 걸까.

링크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당신도 날 원하는 거 아니었나요?”

당신도. 그럼 설마 당신도 날.

“.. 맞습니다…”

“그럼 이제, 불안해하지 말아요."

"... 죄송합니다. 역시 전 당신께 안길 자격이 없.."

"둘밖에 모르는 곳으로 떠나진 못해도, 계속 함께 있어요, 응?”


젤다가 양팔로 링크의 목을 감싸 안아 몸에 무게를 실어 제 쪽으로 그를 당겼고 링크는 힘없이 엎어지는 와중에도 그녀가 다칠세라 등 뒤를 받히고 제 무게를 견뎠다. 이 와중에도 자신을 위하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당신 곁에 계속 있을게요. 그러니까, 당신도 계속 제 옆에 있어 줘요.”


코 끝이 시큰거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같은 것을 원한다.

당신의 사랑에 나는 나의 불안정함과 불안을 태워버릴 수 있다.

정말이지 더없는 행복이다.


그날 밤은 삶에서 가장 길고 긴 축복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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