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포켓몬스터
“ 마음에 다가가다 보면 나아지리라 믿어요. ”
마음과 마음은 이어지기 마련이니까….
つつじ님의 픽크루 사용.
머리색과 속눈썹 가공.
미스티 제벨, 가명 유리에
17세, 168cm에 마른 체형. 팔다리는 곧고 길게 뻗어 비율이 좋지만, 소식할 뿐이지 관리된 몸은 아니다. 체력도 비실한 편.
호연지방 등화도시 출신이지만 억양 등은 하나지방의 것이다. 정작 본인은 하나지방에 간 적도 없다고 한다. 부모님의 영향이라는데, 본인이 태어나기 전에 호연지방으로 이사한 하나인들이란다.
풋사과를 닮은 애플민트빛 머리카락. 순한 눈매에 속눈썹은 길다. 점 없이 하얀 피부에 유순해보이는 인상.
눈동자는 낮은 채도의 연한 붉은색인데, 분홍색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만큼 모호한 색이다.
옷을 입는 스타일이 굉장히 좋다. 패션피플. 착용하고 있는 귀걸이 역시 단순하게 생긴 듯하나 사실 놀랄 만큼 정교하게 세공된 것이다.
오른팔 팔뚝에 붕대가 감겨있다. 팔을 보여주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지만 붕대를 푸는 것은 꺼린다.
세계적인 명품 쥬얼리 브랜드 ‘티어드롭’의 오너 일가. 사실 일반인이 오너 일가까지 알고 있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고자 평소에는 가명을 쓰고 있다. 하지만 금전 감각이나 돈씀씀이, 사고방식 등이 범인과는 전혀 달라서 숨기려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다. 엄청난 부잣집이라는 건 누구나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수준.
부드럽고 품위있어보이는 / 엉뚱한? / 소심하고 움츠러든
차분하고 사근사근 상냥한 성격. 눈에 띄는 언행이나 무례하고 저급한 돌발행동 등도 일절 하지 않는다. 고리타분해보이는 예의범절까지도 몸에 익은 듯하여 말 그대로 고귀한 귀족같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전혀 서민처럼 보이지 않는 행동에서 기인하는 것도 있음을 염두해야 할 것이다. 대체 어디서 배운 예법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류층이나 쓸 법한 느낌인 걸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닐 지도.
‘전혀 서민처럼 보이지 않는 행동’은 이런 것이다. 호텔은 5성급이 아니면 호텔이 아닌 줄 알거나, 비행기 좌석은 비즈니스석 말고는 없는 줄 알거나. 어떤 인기드라마에서 재벌 캐릭터가 포장마차의 음식을 처음 먹고 맛있어하는 장면이 흥하지 않았는가? 비슷한 느낌이다. 그가 엉뚱하다는 것은 상식이 없고 무례하다는 뜻도 아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특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는 뜻도 아니다. 아주 일상적인 부분에서조차 범상치 않음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도전’을 굉장히 무서워한다. 포켓몬 접촉 공포증이 있다더니 그에서 비롯한 성향인 듯하다. 그들의 세계는 포켓몬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 언제 어디서나 포켓몬을 만나고 마주칠 수 있는 세계. 포켓몬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그들과의 교류는 무섭고 두렵다. 필연적으로 매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옷깃에 스치기라도 할세라 잔뜩 경계해야 하는 일상. 그런 생활 태도가 몸에 배다보니, 종국에는 성격 자체도 그렇게 변해 굳어버렸다.
엔트리
엘레이드: 미스티의 첫 포켓몬. 정식으로 트레이너가 될 수 있는 10살, 부모로부터 받은 랄토스가 엘레이드까지 진화했다. 미스티의 공포증의 유일한 예외. 볼에 들어가는 걸 싫어해서 항상 미스티 곁 혹 근처에 머무른다. 미스티가 곤혹스러워하거나 위협받을 만한 상황이 오면 바로 저지하여 그를 지키는데, 문제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라 종종 난감한 상황이 생긴다고. 하지만 미스티를 지키는 것에만 열중하는 탓인지 배틀에는 그닥 흥미를 보이지 않으며, 미스티의 배틀 지시도 무시하기 일쑤다.
이브이: 집 근처 맡기미집에서 받은 알이다. 트레이너가 찾아가지 않은 알이었는데, 공포증 완화 목적으로 맡기미집 일을 돕던 미스티가 맡게 되어 부화시켰다. 직접 부화시킨 포켓몬은 괜찮지 않을까, 하여 수락했으나…. …때문에 평소에는 볼에만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꺼낸 적도 거의 없어서 엘레이드 말고 다른 포켓몬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엔트리 주요 변화 흐름
10살, 부모로부터 랄토스를 선물받다.
11살, 랄토스가 킬리아로 진화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성의 돌을 잡고 엘레이드로 진화하다.
16살, 일을 돕던 맡기미집에서 알을 받다. 3개월 후, 이브이가 태어나다.
17살, 칼로스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다. 이후 이런저런 일을 겪고 성장하며 변화가 생기다….
첫 만남부터 어긋나서
미스티를 위해 그의 부모가 직접 잡아 선물해준 랄토스. 미스티는 자신의 포켓몬이 생겼다며 무척 기뻐했으나, 랄토스는 미스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을 잡은 건 미스티의 부모지, 미스티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랄토스의 거부를 미스티의 부모는 아직 네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스티 역시 랄토스가 쑥쓰러워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대로 된 상호이해 없이 단순한 낯가림 문제인 줄로만 알았던 탓에, 미스티는 랄토스에게 무작정 들이대기만 했고 랄토스는 그런 미스티가 싫어 도망다녔다. 랄토스가 마냥 좋아 마구 치대는 미스티와, 그런 미스티를 피해 도망다니는 랄토스. 그게 일상이었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미스티는 랄토스를 끌어안거나 손 잡지 못해 안달이었고, 랄토스는 그런 그의 품에서 벗어나 도망치던 중이었다. 그러다 랄토스는 길을 잃어버렸다. 미스티에게서 정신없이 벗어나다 보니 도시 밖으로 나오게 된 것도 모자라 웬 풀숲 안이었다. 당황하여 이리저리 방황하던 중, 랄토스는 야생 그라에나와 포챠나들의 보금자리를 침범해버렸다. 랄토스는 순식간에 그들에게 둘러싸였고, 머릿수에는 장사 없어 반격할 틈도 없이 공격당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물어뜯기느라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찰나, 누군가가 사이에 뛰어들어 랄토스를 몸으로 감쌌다. 뛰쳐나간 랄토스를 찾으러 마찬가지로 풀숲을 헤매던 미스티였다.
트라우마의 발현
랄토스는 이런저런 상처가 많긴 했지만 다행히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한편 미스티의 부상은 좋지 못했다. 랄토스를 감싸다가 팔을 심하게 물려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흉터도 크게 남아버렸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팔이 아니었다. 그라에나에게 물리던 그 순간의 기억이 뇌리에 선명하고도 끔찍하게 남아 트라우마의 형태를 띄어버린 것이다. 그토록 품에 안고 뺨을 부비고 싶던 랄토스였는데, 이제는 랄토스가 손을 뻗기만 해도 극심한 공포심에 휩싸였다. 안다. 랄토스는 그 그라에나가 아니고, 나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정작 몸은 모른다고 한다. 믿지 못한다고 한다, 두렵다고 한다, 위험하다며 찢어지게 울부짖는다.
그런 미스티를 보며 랄토스 역시 뼈저리게 알았다. 미스티의 트라우마는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이젠 자신이 한없이 약해지고 작아진 미스티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수없이 거부당했으면서도 미스티가 자신에게 그래주었듯이. 이는 곧 랄토스에게 단 하나의 절대적인 행동원칙이 된다. 랄토스 역시 그 나름의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것이다.
맞닿지 못하는 시선
랄토스의 인고의 노력 끝에 미스티는 랄토스 한정으로는 트라우마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이 랄토스는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생긴 것이다. 랄토스 역시 미스티를 더욱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힘을 원했고 이에 부응하듯 킬리아로 진화하게 되었다. 킬리아로 진화했을 당시에는 미스티도 그의 진화를 축하하며 기뻐했으나, 엘레이드로의 진화를 겪으면서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엘레이드는 상당히 급작스럽게 진화했는데, 킬리아로 진화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사건은 해안시티 백화점에서 일어났다. ‘티어드롭’ 해안시티 지점 방문 일정이 있어 백화점에 오게 되었는데, 킬리아가 웬일로 뒤에서 따라오나 싶더라니 번쩍 빛이 났다. 진화의 빛이었다. 놀란 미스티가 뒤를 돌아보니 킬리아는 없고 대신 엘레이드만이 있었다. 그들이 서있던 곳은 진화의 돌 등 각종 아이템을 파는 매장 앞이었고, 먼저 앞서나가던 킬리아는 각성의 돌을 발견하곤 멈춰서느라 미스티의 뒤에 있게 된 것뿐이었다. 문제는 킬리아가 일말의 소통이나 언질 없이 냅다 돌을 잡고 진화해버렸다는 것이다. 덕분에 미스티는 각성의 돌을 구매하지도 않고 써버린 트레이너가 되었고, 점장쯤 되어보이는 사람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어야 했다. 물론 각성의 돌 값은 치르긴 했지만, 사용하기 전에 먼저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한 상식이니까. 일련의 소동 이후 미스티는 깨닫는다. 지금 자신과 엘레이드와의 관계는 전혀 정상적이지 않다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는 있는가? 미스티는 절대적으로 엘레이드의 보호가 필요했다. 마음이 통하지 않는, 허울 좋은 트레이너일 뿐이라도 절실하고 간절했다. 두터운 벽을 보듯 답답하고 막혀있더라도, 새카만 암흑마냥 상대가 보이지 않더라도, 잔뜩 어긋나 삐걱거리더라도 그것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미스티는 모른체하기로 했다. 엘레이드가 자신의 지시를 듣지 않더라도, 자신을 무시하더라도 자신이 부족한 트레이너라서 그렇다며 덮어두기로 했다. 사실이긴 했다. 그래서 회피하는 것이 더욱 쉬웠다.
트레이너 실격
이때쯤, 미스티는 등화도시 근처에 있는 맡기미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돈이 궁한 건 아니었지만 맡기미집을 운영하고 있던 노인은 마침 말벗 겸 일손이 필요했고, 미스티는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서 이런저런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어했다. 일종의 이해관계가 맞은 셈이다. 노인은 미스티의 트라우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때로는 그의 공포증을 답답해했지만, 미스티가 못하겠다는 업무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잔뜩 겁먹고 긴장한 상태로 일을 했다가는 더 큰 사고가 나기 십상이니 차라리 하지 말라면서. 노인에게는 죄송스러웠지만 미스티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 미스티는 포켓몬 푸드와 영양 간식을 만들거나 털결 상태 관찰로 건강을 체크하는 등, 포켓몬과 거리를 두고서도 할 수 있는 보조적인 업무를 위주로 했다. 덕분에 요리실력과 눈썰미가 엄청 좋아지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맡기미집에서 포켓몬 알이 생겼다. 주인이 될 트레이너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데, 알은 가져가지 않고 자신의 포켓몬만 찾고서는 떠나버렸다. 홀로 남겨진 알은 미스티가 맡게 되었다. 자기가 직접 부화시키고 탄생을 지켜본 포켓몬이라면 공포증이 덜해지지 않겠냐는, 노인의 제안 때문이었다. 노인의 제안은 그럴 듯했고, 실제로 알은 무섭지 않았다. 미스티는 성실하게 알을 돌봤다. 알을 돌볼수록 애정은 커져만 갔고, 애정만큼 기대도 커졌다. 부화가 가까워지면서 알 안에서는 태동이 느껴졌고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무서웠지만, 그래도 곧 태어날 너라면 무섭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본인이 부화시킨 포켓몬도 전혀 다가갈 수 없었다. 태어난 것은 이브이였고 눈을 뜨자마자 좋다고 어버이에게 달려갔으나 미스티는 패닉에 빠졌고, 엘레이드가 이를 단숨에 제압했다. 엘레이드는 어린 생명에게도 가차가 없었고, 영문을 모르는 이브이는 겁에 질려 서럽게 울었다. 미스티가 중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극적으로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미안하다며 이브이를 볼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몇 번 더 이브이와의 교감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이브이 역시 실패를 거듭할수록 미스티의 스킨십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스티를 향한 애정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늘상 밝고 애교넘치는 모습인 것이 더 마음 아팠다.
말로 못 할 죄책감에 짓눌리며 미스티는 생각한다. 책임지지도 못할 생명을 태어나게 했다고. 저 어린 것에게 벌써부터 큰 마음의 상처를 줘버렸다고. 그러니 이브이에게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주 훌륭한 트레이너를 만나게 해야겠다. 이브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무엇인지, 잘 하는 건 무엇인지 모두 알아주고 그를 존중하고 책임질 수 있는 멋진 트레이너에게 이브이를 맡겨야겠다. 자격도 없는 나는 이브이를 행복하게 할 수 없고, 이브이 역시 내 곁에 있으면 계속 상처만 받을 테니까.
메가진화의 고장으로
17세가 되던 해, 미스티는 엘레이드나이트와 키스톤을 선물받는다. 굉장히 희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지만 제벨에게는 그깟 푼돈, 전혀 문제가 없으니 그 점은 넘어가자. 어쨌든 미스티는 선물을 주니 감사하게 받기는 했는데, 실제로 사용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다. 엘레이드에게도 엘레이드나이트를 장착시키지도 않았다. 배틀 실력이 좋지 못하고 엘레이드 역시 배틀을 즐기지 않으니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귀중하게 보관해놨다고.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변명이다. 메가진화의 필수 조건은 서로의 유대감. 그렇지 않으면 폭주하여 마구 날뛰게 된다는 것을, 미스티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엘레이드에게는 그만한 유대감이 없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미스티의 부모는 미스티에게 칼로스 지방으로 가보는 건 어떠냐 제안했다. 그 귀하다는 키스톤과 메가스톤까지 있는데 정작 메가진화를 잘 다룰 자신이 없다고 하니, 그의 고장인 칼로스 지방에서 공부하면 괜찮지 않겠냐면서. 미스티의 트라우마를 모르진 않았지만 갇혀있기만 해서는 나아지는 게 없기도 하지 않겠는가. 미스티 역시 쥬얼리 브랜드 오너 일가답게 키스톤과 메가스톤의 세공 방식에 흥미를 가지고 있긴 했고, 무엇보다도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는가. 어떻게 에둘러 거부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부모가 선수를 쳤다. 이미 칼로스행 비행기표를 끊었다는 것이다. 표가 있든말든 안 가면 그만이다만, 부모의 너를 응원한다는 기대만발 눈빛을 배신하는 건 미스티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진짜 가? 이렇게? 쫓겨나듯이? 진짜로? 나 아직 준비가 안 됐, 곧 비행기 뜬다고?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
칼로스 지방에 일단 오긴 했는데… 뭘 하면 좋지? 고민 끝에 미스티가 선택한 것은 미르시티의 연구소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일단 칼로스지방의 최신 타운맵도 다운로드해야 하고, 첫 모험을 떠나는 트레이너들에게 스타팅 포켓몬을 지원해주는 곳이기도 하니 괜찮은 조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그런 마음으로 연구소의 문을 열었는데, 내부에서 포켓몬들이 온 사방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던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연구소에서 돌보던 포켓몬들이 온실 대탈출극을 찍고 있었단다. 아무튼 미스티는 덕분에 문을 열자마자 난장판인 연구소와 자신에게 달려드는 포켓몬을 코앞에서 마주하게 되었고, 이후는 뭐… 혼비백산하여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연구소 마당에서 한바탕 구른 뒤였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미스티가 연구소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이어 연구소를 방문한 손님이 있었다. 손님의 이름은 레나드. 메가진화와 필요 아이템 관련으로 조언 및 지원을 얻기 위함이었다는데, 아무튼 레나드가 연구소의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도망치던 미스티가 튀어나온 것이다. 미스티 입장에서는 갑자기 문이 열리는 바람에 장애물이 없어져 멈출 수가 없-멈출 정신머리도 없었을 거다-었고, 레나드는 레나드대로 무방비하게 미스티와 부딪혀 엉키면서 그대로 연구소 마당을 뒹굴게 되었다. 레나드는 이 일련의 사건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아 흙바닥에 누워있는데도 멍하니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고, 뒤늦게 정신이 든 미스티는 손이 발이 되도록 사과를 했다.
이 멍파치판을 모두 지켜본 박사가 말했다. 아무래도 미스티 혼자 보내는 것은 불안하니, 레나드가 함께 가달라고. 영문도 모른 채 부딪혀서 바닥을 뒹굴었는데 이젠 여행을 책임지기까지?!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다. 하지만 레나드가 보기에도 미스티가 영… 저러다 또 대판 사고칠 것 같고, 사고만 치면 다행이지 아주 물가에 내놓은 갓난아기 같았나보다. 여행은 동료가 있는 게 좋긴 하다며 박사의 제안을 수락한다. 미스티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엘레이드가 있다지만 모든 상황에서 엘레이드만을 믿고 있을 수는 없고, 사실 엘레이드와의 관계도 묘하게 껄끄럽고. 그렇게 미스티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어설프지만 착실한 여행, 이브이의 진화
미스티의 여행은… 정말이지 어설펐다. 야영을 해본 적이 없고, 요리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뭐 이런 사소한… 사소한? 사소하진 않지만 어쨌든 그런 부분에서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껏 가명까지 써가며 재벌가라는 정체를 숨길 요량이었으면 제대로 하든가, 아무렇지도 않게 블랙카드를 꺼내질 않나 황당하기 그지없다. 아, 나름 숨긴다고 숨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물정과 서민 수준의 일반적 상식에 너무 무지해서 그렇지. 부모가 장신구사업을 한다 정도는 레나드에게 말해줬다. 하지만 레나드도 해봐야 기념품점에 가면 자주 보이는, 그런 장신구들 얘기인 줄 알았겠지. 그런데 점점… 씀씀이를 보아하니 사업이 꽤 크구나 싶었을 것이고, 블랙 카드가 나온 시점부터는 생각을 포기했을 것이다. 덕분에 여행의 거의 모든 것을 레나드가 책임지기에 이른다. 돈이 부족할 걱정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미스티가 결정하는대로 냅두면 이게 무슨 돈지랄인가 싶었기 때문에.
아무튼 영 불안하고 못 미더운 그였지만 착실히 견문을 넓히고 있었는데,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별 진전이 없었다. 애초에 트라우마라는 게 정신적인 요인에서 기인하는 것이니 쉽게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포켓몬들과 거리낌없이 터치하고 교감하는 레나드가 참 부러웠더랬다. 그런 눈으로 레나드와 그의 포켓몬들을 바라보는 이브이에게도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미안했고. 이브이를 볼 밖에 꺼내두는 시간은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쓰다듬고 안아주고 하진 못했다. 맨손으로 만지면 위험한 포켓몬들도 있다지만 그건 미스티의 포켓몬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어느 날, 매우 급작스럽게 트라우마가 극복되는 일이 생긴다.
별로 특이한 날은 아니었다. 이동 중에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고, 마침 근처 강가에 괜찮은 공터가 있었다. 겸사겸사 휴식시간을 갖기로 하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물을 마시기 위해 강가에 다가가던 이브이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 것이다. 물 여기 있다고 이브이를 부르려던 미스티가 그 순간을 목격했고, 이브이는 바위를 잡고 버티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강의 수심도 깊었고 물살도 빨랐다. 엘레이드와 레나드 일행과는 좀 떨어져있어서 그들을 불러오기도 위험했고, 이브이의 몬스터볼 역시 일행 쪽에 두고 온 상태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브이도 오래 못 버틴다. 하지만, 하지만…. 이브이의 발이 결국 바위를 놓친 순간, 미스티의 기억이 끊겼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자신은 이미 물에 들어가있었으며, 이브이를 건져 안아올린 상태였다. 또 패닉이 올 뻔했으나 이브이를 놓칠 때 놓치더라도 땅에서 놓쳐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미스티의 허벅지 절반까지 오는 깊이였고, 물살 때문에 다시 강 밖으로 나오는 것도 은근 힘이 들었다. 마침내 땅을 밟았는데도 잔뜩 긴장한 탓에 몸이 굳어 이브이를 놓아주지도 못하고 그 자세 그대로 얼어있자 보다 못한 레나드가 천천히 팔을 풀어 이브이를 놓아주었다. 이브이가 땅을 밟자마자 미스티는 거의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았는데, 몸도 털지 않고 쭈뼛쭈뼛 다가온 이브이가 미스티에게 얼굴을 조심스럽게 부볐다. 미스티가 움찔하긴 했지만 피하지 않자 짧게 울더니 빛이 나기 시작했고… 빛 속에서 님피아가 걸어나왔다.
트라우마의 극복, 다시 처음부터
추측하기로는, 님피아의 진화 조건 중 하나인 친밀도는 이미 충족이 되어있던 것 같다. 미스티가 직접 부화시켰고, 미스티가 어버이로 각인이 되어있으니 아마 오래 전에. 하지만… 미스티가 자신을 거부하는 듯해보여 자신감이나 자존감 따위가 많이 낮았던 것 같다. 미스티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님을 알지만, 이브이도 역시 자신의 부모와 제대로 교감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미스티의 사정을 알고, 또 이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상처받고 애써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나날. 그렇게 단념하고 포기하고 진작에 체화되고도 남았을 때,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이브이는 미스티의 손길을 느꼈다. 미스티가 얼마나 무서워하고 얼마나 어려워하는지는 이브이도 잘 알고 있었는데. 미스티가 제 뺨을 비비는 이브이를 피하지 않자, 아마 이브이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나, 괜히 태어나서 필요도 없고 못난 존재가 아니었구나. 이브이의 말이나 생각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어버이에게 내내 거부당하다 비로소 받아들여졌을 때의 그 감정은 과연 어땠을지….
사실 미스티는 그때까지만 해도 트라우마가 극복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브이가 뺨을 비벼오는 걸 피하지 못한 건 당시 넋이 나가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얼결에 이브이와의 접촉이 성공했기 때문에 이브이까지는 괜찮아진 줄 알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던 것이, 이브이는 확실히 괜찮아졌다. 초반에는 어쩔 수 없이 움찔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점점 줄어들었고. 그런데 미스티는 마침내 레나드의 포켓몬들과도 손을 잡고 끌어안을 수 있었고, 이윽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의 포켓몬이나 제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야생 포켓몬과의 접촉도 가능하게 되었다. 한참을 머뭇거리고 망설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능해졌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지 않겠는가.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하게 되면서, 상징이었다시피 했던 흉터 역시 굳이 가리려 들지 않았다. 아직은 볼 때마다 마음이 뒤숭숭하지만 꾸역꾸역 가리려 들 만큼의 감정은 들지 않는다고.
미스티의 트라우마가 개선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엘레이드의 역할도 줄어든다는 뜻. 자연히 엘레이드도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스티에게 있어 절묘한 기회였다. 아직 미스티 자신의 트라우마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엘레이드와의 진솔한 대화 및 교류를 통해 어긋나있던 관계를 회복하고 비로소 함께 나아가기 위한 기회. 거쳐가야 할 단계가 많았다. 행동방식이 오랫동안 고정되어있던 탓에 교정과정도 꽤 오래 거쳐야 했고, 엘레이드가 미스티와의 교감을 매우 어색해하는 바람에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천천히 진행해야 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엘레이드 역시 조금씩 개선되는 것이 보였고, 아직은 자잘하게 충돌이 있지만 배틀할 때도 미스티의 지시를 조금씩 따르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미스티의 여행에도, 엘레이드에게도 청신호였다.
여행 이후로도
좀 더 시간이 지나 엘레이드와의 관계도 원만해지고, 님피아 외에 다른 포켓몬들도 엔트리에 들이고, 칼로스 지방의 여행이 마무리되었을 때. 메가스톤과 키스톤의 세공 방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스티였지만, 엘레이드와의 관계 회복 이후 그의 메가진화까지 무리없이 다룰 수 있게 되자 미스티는 ‘티어드롭’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느끼게 되었다.자신처럼 포켓몬과의 유대 및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말이다. ‘포켓몬 행동교정 전문가’의 꿈을 꾸게 된 순간이다.
레나드와의 인연은 계속해서 이어져서 칼로스지방 이후 여행에도 동행하게 됐다. 친구도 없는데 여행자금줄까지 놓치기 싫단다. 미스티 입장에서도 이미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익숙한데다가 자기보다 여러모로 능숙하고 노련한 트레이너와 함께 할 수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솔직한 사람은 싫지 않다. 이후 미스티는 체육관 도전도 해보고 여러 시도를 해보며 많은 것을 경험한 후 전지방 여행을 마무리지었고, 본가로 돌아가서는 ‘티어드롭’의 후계자 공부와 함께 포켓몬행동지도사와 포켓몬행동교정사 자격증을 위한 공부도 병행하여 기어코 자격증을 따낸다. 지금이야 사람들에게는 ‘티어드롭’의 미스티 제벨이 더 익숙하겠지만, 언젠가는 포켓몬 행동교정 전문가 미스티 제벨로서 더 알려지고 싶단다.
레나드도 그 때까지 쭉 알고 지내고 있는데, 초보 트레이너 시절 레나드가 이래저래 자신을 책임져주고 고생해준 것을 알고 있기에 보은한다는 느낌으로 개인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다. 레나드는 이러다 너 호구잡힌다며 잔소리하지만 그 정도의 일이라면 보통 로펌이나 하다못해 변호사를 끼고 할 것이고, 네게 감사한 게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도 못해주겠냐며 억울해한다. 말로만 질색팔색하고 실제로는 열심히 챙기는 모습이 웃기고 귀여워서 냅두는 것도 있다. 여행자금줄 운운했을 때처럼 솔직해도 좋은데 그건 좀 아쉽다.
레나드: 세상물정 모르는 애를 주워놨더니 로또를 맞았습니다?
가디안이 될 예정인 킬리아에게 메가진화 아이템을 주고 싶어 연구소를 방문했다가 우당탕탕 미스티에게 휘말려서 졸지에 그를 책임지게 됐다. 다행히 당초 연구소 방문 목적이었던 키스톤은 잘 받아갔다고 한다. 킬리아는 실제로 가디안으로 진화했는데, 같은 라인인데도 레나드와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처럼 손발이 짝짝 맞는 것을 보며 내심 부러워했다.
엘레이드와의 관계가 회복된 이후로는 배틀에 재능이 없는 미스티의 훈련을 도와주기도 했고, 배틀 외에도 다양한 곳에서 상식 등을 직간접적으로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 참고로 미스티의 배틀 실력은 뱃지 개수로 따지면 3~4개 정도로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레나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리그 도전은 커녕 8개를 다 몹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본인도 본인 실력을 알기 때문에 어찌저찌 뱃지를 다 모았어도 리그 도전은 하지 않았지만.
성인이 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도 레나드와는 쭉 알고 지냈는데, 레나드가 자신만의 가게를 차릴 생각이라고 했을 때는 가게 장소로 자기 소유의 건물 1층을 거저주는 수준으로 제공했고, 본인의 집 역시 레나드의 자취방으로 제공해줘서 반동거생활 중이다. 왜 반동거냐면, 집이 워낙 넓어서 동거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화장실이나 주방을 찾지 못해서 길을 잃은 레나드를 몇 번 볼 수 있었다. 레나드가 사업적으로나 공식적으로나 채무를 지겠다고 할 만큼 급이 커지는 문제라면 변호사를 끼고 하겠지만 일상적인 부분이야 뭐… 못해줄 것도 없다.
- 카테고리
-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