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가면

마녀대적자

세상을 구할 구원자로구나.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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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떨리고설레다 2021


씨발, 씨발, 씨발. 카마르 알제빈은 되는 대로 욕지거리를 주워섬기며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렸다. 상황의 긴급함과는 별개로 그에게는 가고 싶은 곳도, 갈 곳도 없었다. 목적지를 찾지 못한 발은 결국 막다른 복도로 들어섰다.

복도의 모든 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지만 모두 잠겨 있었다. 카마르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복도 끝 벽에 기대었다. 연구원 가운은 미끄러운 천으로 되어 있어서 그를 선 채로 고정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공포와 피로에 질린 다리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카마르는 주저앉았다. 흔히 '쭈그린다' 라고 표현하는 동작이었다. 엄마, 어떡해. 나 정말 무서운데. 떠오른 생각은 입술의 경계를 넘지 못했다. 조용히 숨 죽이고 있으면 그를 쫓는 괴물이 미처 보지 못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사소한 희망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고, 카마르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그냥 얌전히 복도 저편에서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긴장에 마모되어 버린 카마르의 감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었다. 꼭 억겁이라도 살아낸 듯한 기분이었다. 카마르가 달려온 끝자락에서 울리는 발소리는 자박자박, 꼭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카마르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딱히 귀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본능이 그렇게 이끌었다. 그가 또 한 번의 영원이 흘렀다고 느낄 즈음, 희미한 형체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머리카락 끝은 검게 그을렸고 충만하던 푸른색의 눈동자 역시 원래의 빛을 잃었다. 팔꿈치 아래로는 사람의 신체가 없었으며 대신 길고 뾰족한, 꼭 나무줄기를 엉성하게 엮어 놓은 것 같은 손이 빨갛게 자리잡았다. 그것이 향하는 걸음마다 검붉은 액체가 발자국을 대신해 흔적을 남겼다. 카마르는 압도적인 공포를 느꼈다. 흘러내려 시야를 가리는 피를 훔쳐내기는커녕 손가락을 까딱할 수도, 심지어는 조금 크게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것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다. 카마르가 손을 뻗는다면(물론 그는 그럴 수 없었지만) 무리 없이 멱살을 잡아챌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그 자리에 그것은 멈추었다. 이내 천천히 몸을 굽혀 카마르와 눈을 마주쳤다. 고양이처럼 가늘게 찢어진 동공에서 카마르는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것의 입이 벌어지며 기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마르는 이제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카마르가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구원자'라 불렀다.

그리고 어떻게 저 모습이 구원일 수 있는지 카마르 알제빈은 알 수 없었다.

/

선배들은 '세상을 구할 구원자' 라는 미사여구로 그것을 카마르 알제빈에게 소개했다.

카마르는 그것의 첫 모습을 기억하는데, 어린아이처럼 뽀얀 피부와 마찬가지로 밝은 머리색을 가지고서는 유리관 안에서 숨만 쉬고 있었다. 코뿐 아니라 드러난 목덜미와 팔에 무수히 꽂힌 호스가 뽀글대며 알 수 없는 색의 액체를 이동시켰다. 점막을 보호하려는지 투명한 고글이 얼굴 위쪽을 덮었다. 한 겹의 유리와 한 겹의 플라스틱 너머로 카마르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였다. 어머니가 목숨만큼 소중히 보관하시던 목걸이의 사파이어를 닮았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살짝 가늘어졌다. 카마르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잘 몰랐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것의 표정이 흔들렸다. 얇은 산소마스크를 통해서 카마르는 기이한 입술의 곡선을 보았다. 어찌 보면 미소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카마르의 선배들은, 그러니까 크러스트웨이의 밀란코에하 연구소에서 그것을 담당하는 연구원들은 그것을 '구원자'라고 불렀다. 카마르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래서 들었으나 금방 잊어버린 방법으로 그것이 세상을 구한댔다. 방법에 대한 이해 여부와는 별개로 카마르는 그것에게 가해지는 짓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많이 쳐 줘야 열서넛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외형을 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마르는 그것의 어깨-오른쪽이었다. 같은 자리에 흉터가 있어 확실히 기억했다-를 통해 흘러들어가는 액체를 만져 본 적이 있었다. 검보랏빛으로 끈적거리는 젤리 같은 촉감이었고, 굉장히, 정확하게는 터져나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아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카마르의 손등에 떨어진 것은 한 방울, 그것에게로 흘러들어가는 양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할 고작 한 방울이었는데도.

카마르는 세상을 구한다는 것의 대가가 이런 고통이라면, 차라리 그 운명을 벗어던지고 세상이 멸망하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에게 인간을 초월한 능력이 더 있어서 카마르 알제빈의 머릿속을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것이 세상을 구할 가능성은 더 희박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세상을 구한다 해도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것에게 세상을 구할 의무를 부여한 이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

"살려 줘."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카마르는 애원했다. 그것이 명령만 한다면, 그리고 목숨을 보장해 준다면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끔찍한 손끝이라도 기꺼이 핥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과 달리 어떤 행동 - 짐승처럼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는다거나, 괴상한 손을 들어 카마르의 가슴을 꿰뚫는다거나 하는 - 도 취하지 않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지금까지 그것의 행적을 보면 상당히 기이한 것이었다. 카마르는 용기내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고개를 들 엄두까지는 나지 않아 눈동자만 굴려서였다.

카마르는 그것의 눈동자에 타오르던 검보랏빛 불길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것을 보았다. 칼날처럼 날카롭던 손도 점차 인간의 것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카마르가 처음 본 유리관 안의 모습을 하고 웃었다. 호스 탓에 울긋불긋 생긴 팔과 목의 멍 자국도 여전했다. 변화라고는 이제 그것이 밖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닌다는 점과, 눈 색깔에 맞춘 파란 줄무늬 실험복이 찢어지고 얼룩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의 '변신'이 뜻하는 정확한 바는 몰랐으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카마르는 후들거리는 팔로 바닥을 짚어 간신히 상체를 지탱했다.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혀끝에 고인 말을 흘려보냈다. 쉬고 거칠어진 목소리였지만 카마르는 믿었다. 그것은 아마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나한테 뭘 원해?"

"함께 가자."

그것의 '말'은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짐승의 그르렁거림, 또는 뱀의 쉭쉭거림과 더 비슷하게 들렸다.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웅얼대는 바람에 발음은 온통 뭉개졌지만, 카마르가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너는 죽이지 않아."

그것이 계속 말했다.

"나를 도와."

고민은 찰나에 불과했다. 어차피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눈 앞으로 하얀색의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의 손이라는 사실을 카마르는 한 발 늦게 깨달았다. 그는 눈가에서 굳어 가는 피를 옷소매로 대충 문지르고, 다른 손으로는 그것의 손을 맞잡았다. 그것은 작은 체구에서 나왔다고 믿어지지 않는 힘으로 카마르를 일으켜 세웠다. 카미르는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렸으나, 금방 벽을 붙잡은 탓에 사나운 꼴은 면했다.

"…카마르 알제빈."

"샬."

그는 그 이름을 길게 늘여서 불렀다. 샤알, 혹은 샤-알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카미르는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다. 명치가 당기고 욱신거리는 바람에, 괴상한 캑캑거림만 뱉어내고는 주저앉았다. 샬이 그 소리를 이어받았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예의 그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카미르는 처음의 유리관 안에서 그가 웃고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샬."

카미르가 읊조렸다.

비로소 카마르 알제빈은 그것의 운명에 부여된 '구원'이라는 정의를 알 것도 같았다.

카마르는 웃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성공했다. 텅 빈 웃음소리가, 마찬가지로 생명의 흔적이 남지 않은 복도를 타고 달려나갔다. 

"샬."

훗날 마녀대적자라고 불릴 샬 마그룬과 그의 '달 까마귀' 카마르 알제빈.

세상을 버린 구원자와 미쳐버린 천재의 첫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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