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단] 폐허
4기
오알 언더그라운드
1.
당신이 나의 폐허를 예감한다면.
2.
오알은 맨발로 왔다.
간신히 신겼던 신발은 진작 널브러졌겠지. 나단은 오알의 인큐버스가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부터 지금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른거리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신발부터 벗었으리라고 이해하고 있었겠지. 인간이 준 것 어느 것 하나 두려 하지 않았으니 맨발로 흙바닥을 걸었을 거라고. 오알이 부른, 그래서 나단의 방문이었지만 나단은 그 순간 오알이 자신에게 온 것, 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단은 오알이 자신에게 곁을 내주었음을 알았다. 발이, 많이 상하지는 않았나? 나단은 오알에게 신을 신겨주었을 적 보았던 발의 상처들을 기억했다. 습관이라 무딘 아픔이어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나. 땅이 할퀸 자국은 어김없이 살결마다 아프게 배어 있었는데 오알은 꼭 희미할 수 있다는 듯이 무던했다. 나단은 허리를 숙여 발을 살펴보지는 않는다. 오알은 발을 맡겨주지 않았고 나단도 더는 신발을 신겨줄 수 없었다. 나단은 비스듬하게 앉아 있는 오알 앞에서 멈춰 섰다가 입을 열었다. 서투른 짓을 시켰더군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당신이 부르면 와요. 속일 거라면 잘 속이는 게 좋겠죠. 오알은 인큐버스를 힐끔 한 번 쳐다봤고 인큐버스는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재회 치고는 무감했던 순간은 그것으로 그쳤다. 나단 던스트는 기꺼이 이용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헌신일 수는 없었고 그저 부채에서 비롯되지 않았으므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나단 던스트가 첫 번째 조건으로 둔 것은 그렇듯, 오알에게 책임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었다. 선택의 모든 책임은 온전히 나단 던스트 자신에게 있었으니까. 오알은 교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단은 교단에 기거하지는 않기로 했다. 펠릭스가 소개해준 숙소에서 지내다 늑대라든지, 인큐버스를 통한 연락을 받으면 오알에게 갔다. 오알은 대개 무뚝뚝했고 종종 신경질적이었다. 나단이 처음 오알이 던진 장식품을 머리에 맞았을 때에는 오른쪽 이마가 살짝 찢어졌다. 살이 벌어진 곳으로 눌어붙어 따끔거리는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오알에게 치료를 받았다. 가장 신실한 자는 흉이라고는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상처를 지워냈다. 고마워요. 그래서 인사는 타당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흉터도 생겼다. 몇 번인가 물건을 부수고 뺨을 올려붙인 끝에 오알은, 그날만큼은 울지 않고 나단의 손 안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칼은 손을 관통했다. 뺨을 맞을 때라도 고개조차 돌아가지 않을 만큼 약한 힘이었는데 드물게도 칼끝으로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나단은 이를 악물고 겨우 신음을 참았다. 통각은 어지간히도 둔한 편이었지만 살이 꿰뚫린대서야 숨을 흐트러트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알은 늘 잃어버린 안녕을 동행한 채 교단 밖을 돌아다니곤 했다. 나단은 노블에게서 오알이 혼자 외출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으면 뒤를 쫓으러 나섰다. 늑대를 거느리는 조건이라고는 해도 교단 밖을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교단 중앙청이 있어서 사정이 낫다고는 하나 이 부근이라고 해서 안전할 리는 없었다. 소대륙 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인간 이외 종족의 여성을 대상으로 둔다면 더더욱. 나단은 그간 오알이 밖으로 나설 때면 인큐버스의 안내를 받아 살피러 나서곤 했다. 거기까지가 그들 사이의 합의였고 나단은 매번 오알보다 몇 걸음 뒤로 가서 걸었다. 오알은 아주 가끔씩만 뒤를 돌아봤고 나단은 오알의 뒷모습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오알의 신변을 살피는 일은 그 정도 거리로도 충분했다. 그날, 몰려서 웅크리고 있던 아이들이 별안간 오알 앞으로 튀어 나가지 않았다면. 아, 성녀님, 성녀님이시지요? 저희를 구해주세요. 성녀님, 배가 고파요. 너무 아파요. 성녀님, 성녀님……. 오알은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의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지자 나단이 돈 주머니를 꺼내서 입구를 풀기 전에 칼이 들린 손을 높게 쳐올렸다. 막는다고 막아선 게, 뜻밖의 수난으로 이어졌지만.
그만해요.
아이들은 벌써 웬만큼은 달아나 있었다. 막아선 뒤에서 한 번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잘 벗어났을 것이다. 길게 이어질 화도 아니었으니 오알은 이미 많이 누그러진 얼굴이었다. 시선은 그대로 뾰족했지만. 나단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가 순간 무릎부터 무너졌다. 칼이 박혀 있던 손에서는 피가 붉게만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아, 독. 피는 벌어진 데서 짙은 색으로 새어나왔다. 잠깐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랜 시간이었던 것 같기도 했는데 어느 쪽이었을지는 알지 못한다. 오알은 나단의 손을 치료해주었다. 칼이 한 번에 빠지지 않아서 비틀어 뺐는데 독 덕분에 도리어 아픔의 세부는 도드라지지 않고 둔탁하게 뭉개졌다. 나단은 자신이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제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가. 치료를 다 끝내고도 애매하게 살이 아문 손안으로는 검은 핏자국이 스며있었다. 나단은 주저앉은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언뜻 위를 올려다보자 오알은 잠자코 나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단은 인큐버스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아무튼, 과격하게들 놀아. 인큐버스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있다가 한마디 꺼냈다. 나단은 이미 앞질러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오알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노블, 당신은 사람이 좋아요. 인큐버스는 기가 막힌다는 것처럼 혀를 찼다. 오알의 발뒤꿈치는 언뜻 붉었다.
주인이 미쳤어. 인큐버스는 대뜸 과장된 태도로 호브에 있던 나단을 부르러 왔을 때와 동일한 말을 했지만, 이번에는 풀이 죽어 있었다. 괜찮아요. 나단은 옷을 털고 발을 내디뎠다. 다치고 중독된 여파인지 걸음이 휘청댔지만 걷는 과정에서 점차로 정신이 맑아졌다. 정말 괜찮은 거야? 재차 되묻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호의로 둘러댄 말일 이유도 없었다. 거짓을 말한 적은 없다. 주변의 누군가가 내부에서부터 곪아 들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나단은 오알이, 이전처럼 자신에게로 방향을 두고 있지 않았으므로 안도했다. 너무 오래 지속될 분노는 아니었고 일종의 고요로 침잠할 때까지 곁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약속처럼 무너지지는 않도록. 따라서 나단의 선택은 나단 던스트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단은 평소처럼 오알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채 걸었다. 나단이 다친 탓인지 오알은 금세 교단으로 방향을 돌렸다. 마저 치료해줄 건가요? 나단은 교단 앞에서 뒤돌아선 오알을 보며 웃었다. 손은 말끔하게 아물어 있었지만 이따금 환상 같은 고통이 손안에서 푸석거렸다. 아마 실재하지는 않을 예리한 아픔. 오알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단은 그날 하루 교단에서 머물기로 했다. 진짜 용사의 동행이라는 귀한 신분이어서는 빈 방도 내줄 방도 많았겠지만, 그 밤 나단은 오알을 향한 대우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오알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망령처럼 대하던 시선.
오알은 자신의 방과 가까운 곳으로 방을 마련해주었다. 신에게 구하듯 손을 내밀고 있었던 시간 동안에는 슬그머니 타박을 들었다. 누가 막으래? 나단은 픽 웃었다. 이런 걸 사고라고 해요. 그러게, 말했잖아요? 화풀이는 내게 하라고. 말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고 그냥, 손 안으로 구원처럼 꾸역꾸역 빛이 모여들었다. 벌 준 살을 아물게 하듯 다정한 손 아래서는 얕은 아픔만이 배회하듯 맴돌았다. 많이 아파? 오알은 가책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치료는 지루한 과정이어서 잠깐, 눈을 감고 있다가 언뜻 잠이 눈꺼풀 사이로 끼어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살살 졸음이 밀려왔다. 눈을 떴을 때 손안으로는 쭉 빛이 감돌았다. 따듯한지, 온화한지, 알 수도 없이 무작정 압도적인 힘. 아파요. 게으르게 늘어진 목소리로는 벌써 잠이 가물거렸다. 오알은 표정 없이 나단을 힐끗 봤다. 웃는 건 나단의 몫이었다. 나단은 몇 번인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정원을 산책하던 걸음은 손동작으로도 감각되었다. 그 손으로, 방 문손잡이를 돌리려던 밤, 당신, 애인이라도 되나요? 뒤에서 불쑥 말이 들이닥쳤다. 일반 신도로 보이는 그들은 나단에게 대뜸 난처한 질문을 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부정하지 않는 게 오알에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헨슨이 있는 상황에서조차 위화감이 느껴지는 처우를 받는다면, 헨슨 이외의 연고가 전혀 없다고 인식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들에게 한 번 시선을 주고 방문을 열자 곁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죄 받을 짓 하고 다니지 말아요. 어딜 짐승 같은 것들이랑. 훈계 치고는 다정한 투였다. 나단은 웃어만 보였다.
3.
그날 밤에는 꿈을 꿨다. 비어 있는 꿈. 그리스비 원정 이후로는 수시로 그런 꿈을 꿨다. 꿈은, 꿈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어떤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사랑해서 꿈으로 남겨두었던 기억들마다 검고 어두운 색으로 뭉개지거나 칠해져 있었는데 덩어리 진 것들을 덜어낼 방법은 알지 못했다. 또는 되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숨조차 납작해져서, 나단은 종종 숨을 멈추고 있는 듯이 느꼈다. 나단은 이제 꿈 안에서 누구도 목격하지 않았다. 습관처럼 빚어두었던 모든 목소리들은 밤이어서 잠든 듯이 고요했다. 나단 던스트는 길고 긴 악몽을 지나 선물을 받았다. 적막했으므로 드디어 구원이었으나 무엇도 남겨지지 않았고 그래서 무엇도 가지지 못했다. 불모의 꿈은 잠자코 그곳에 있었다.
……익사한 것들의 숨.
……저 애들은 오늘 난파할 예정이었어. 그게 내 일이었으니까. 나단 던스트는 이안 데코르가 마련해두었던 난파가 정말 난파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는 내 물이 호브의 바다를 본 딴 것이었으면 좋겠어. 테오가 환희로 외곤 했던 소망은 나단의 손끝에서 물거품의 말로 전락했다. 나단의 물은 숨을 죄기 위해서만 고였다. 나단의 물로는 바다의 결 대신 질식하는 호흡만이 꿈틀꿈틀 새겨졌다. 하지만 그, 바다 아닌 데서 사그라졌을 몸들은 바다의 호흡으로 치장되어 해변에 전시되어 있었다. 난파자의 시신으로, 바다 냄새를 잔뜩 달고. 바다에서 죽지 않았을 몸들은 그럼에도 거품의 말을 알고 있었겠지. 나단은 이따금 귀에서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를 입지 못했으므로 그저 뻐끔거리는 것 이상으로는 빚어지지 않았을 말소리들. 불모의 꿈은 자주 거짓 난파자들의 숨을 집어삼켰다. 나단은 꿈꾸지 않고 있을 때면 모래 위로 희게 얹혀 있었던 손을, 시신들을 떠올리곤 했다. 꿈에서는 명백하게 멎어드는 목소리들이었으니 눈이 뜨여 있는 순간에 가물거려도 한결 나았다.
그랬는데, 그날, 나단은 불모의 꿈에서, 오랜만에 거품 자국을 본다. 익사한 것들의 숨으로 올라오는 무수히 많은 거품들. 나단의 손으로 꺼트려졌을지도 모르는 거짓 난파자들의 목소리는 뜻밖에 테오의 말을 속삭였다. 형, 나는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지 다 알아. 형이 내 형이니까. 그래서, 형. 테오 던스트는 다시 나단 던스트가 지어낸 말을 왼다. 기억에 없는 말. 나를 기억하기 지친 거지? 테오가 하지 않았던 말은 누명처럼 테오에게 씌워졌다. 죽은 사람이 무슨 새로운 말을 할 수나 있다는 듯이, 나를 저버렸으면서. 비난으로 맺어지며. 그때에 나단은 비로소 테오를 봤다.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마지막 모습이 꿈에서만큼은 또렷하게 보이는 듯이 여겨졌는데 정작 눈을 뜬 뒤에는 똑같이 흐렸다. 나단은 기어이 꿈에서 테오의 얼굴을 가지고 나온 것처럼 잠깐은 얼떨떨하게 검은 천장을 보다가 도로 눈을 감았다. 나단은 테오의 희게 질렸던 손끝과 슬그머니 부풀었던 발가락으로만 테오를 떠올릴 수 있었고 그래서, 테오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눈꺼풀 안쪽으로는 도려내진 듯이 텅 비었을 뿐 무엇도 다시는 긁어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허상으로 들었던 난파자들의 숨은 테오의 것이기도 했겠지. 나단 던스트는 더디게 깨닫는다. 난파자들의 숨은 돌연 테오를 기억하기 위한 단서로 자리했고 까무룩 잠이 들었을 때, 여전히 테오의 모습을 보지 못한 자리에서 나단은 거품이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바다 깊은 곳인 듯이 무겁게. 그것이 빗소리였을 거라는 건 새벽이 어스름하게 밝아올 쯤에야 알았다. 하늘은 전날 맑았던 것과는 딴판으로 검었고 바다 안인 듯이 물 뒤섞이는 소리가 웅성거렸다. 폭우였다. 날이 늦게 밝았으므로 아침도 느지막이 시작됐다. 나단은 계속, 비어 있던 꿈속에서 별안간 발소리를 들었다. 젖은 땅으로는 찰박이는 소리여야 했을 것이나 사뿐한 걸음이었는데, 그러므로 그것이 발소리라고 생각하는 건 꿈에서나 가질 수 있는 확신이었다. 나단은 어디서 들려오는 발소리인지를, 누구의 발소리인지를 생각하다가 테오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와 같이 불쑥 희게 드러난 발목을 보았다. 맨발. 나단 던스트는 그 발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았다. 알았고, 꿈이었으니까 허리를 숙여 발을 보려고 생각했다. 신길 수 없는 신발을 신기려고.
……꿈이 비어버린 자리로 앙상한 발이 걸어 들어왔다. 발은 도무지 초라하지 않았다. 약하고 야윈 발.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하지만 발은 한 번 더 신발을 남겨두고 떠났다. 나단 던스트는 발이 돌아서는 소리를 들었다. 멀리 떨어져나가는 소리. 다시 눈이 뜨였을 때에는 신발을 신기려던 손을 되찾을 수 없었다. 꿈으로는 더는 돌아가지 못했다. 발이, 많이 상해 있던 발이 눈앞에 아른거렸으므로 오알을 찾으러 나왔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오알은 대체로 들일 때와 같이 배웅에도 무심했다. 비를 퍼붓는 하늘을 헤집으며 발길을 돌렸던 다음 날 나단은 오알이 교단 밖으로 내몰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폭우가 그쳤으나 세상은 여전히 거품소리로 들끓었다. 계속, 빗속이었다.
4.
짐승을 사육하는 것과 비슷해,
……이종족이라는 것들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그 쓸모없는 상상들은. 나단 던스트는 소대륙에 이른 후 몇 번인가 이종족을 두고 추측하는 말들을 들었다. 교단 중앙청이 있는, 신과 가까운 땅에서 오가기에는 참혹한 소문이었고 천치 같은 공상이었다. 인간 이외의 종족을 노예로 부릴 권리라도 있는 듯이 으스대는 목소리가 들릴 때면 어김없이 어처구니없었다. 인간 이외의 종족이란 신화의 영역에나 놓이도록 인간과 멀었는데 망상만 기승이었다. 인간 이외의 지성체를 알던 인간의 세대는 벌써 다 죽고 사라진 자리에 이종족의 심장이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다느니, 이종족을 기르는 방식은 어떠하다느니 하는 야만만이 우거졌다. 왜, 인어의 전설도 있지 않나. 불사를 누리게 해준다는. 나는, 그것들이 영 꾸며낸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거든. 그래서, 어떤가? 우리 인어라도 사냥할까? 에이, 이 사람, 실없는 소리를. 시시하게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을 때면 나단은 가장 연한 듯이 웅크리고 있는 형상을 떠올린다. 앙상하게 말라 있던 팔. 당신은 천 년을 살 텐데 미처 천 년이 되기 전에 마른 팔이 붙들리고 만다면.
나단은 가끔 그런 걱정을 했다. 상상이라서 웃고 넘길 불안. 당신은 그 이전에 단단하게 자리 잡혀 무너지지 않게 되어야 하니까. 호파 원정의 공백을 두고 다시 만난 오알은 양 어깨를 감싼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울지는 않았고 날카롭게 벼려진 채 헨슨에게 가해질 위협의 가능성을 가늠했다. 혹 목걸이가 검어지지 않을지 바짝 신경을 기울이며. 그러니까, 다행이었다. 헨슨의 삶에 불행 이외의 무엇으로 놓이게 된다면 그때에는 오알이 있을 것이다. 본래도 헨슨에게 유일하게 남겨져 있었으니 헨슨에게서 귀하게 돌봐지겠지. 허물어지는 일 없이. 나단 던스트는 자신이 바라지 않는 두 가지의 파멸이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기울어져 망가지는 파국. 따라서 나단 던스트가 구하고 싶은 삶들이, 나란히 기댄 채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랐다. 도대체 그들의 불행을 저버리고서 바깥으로 발을 돌릴 수 없었으니 원하지도 않을 자신의 고집을 그들의 삶에 슬그머니 얹어두고서. 소망하는 마음은 차라리 이기심이나 같았다.
그런데, 광장에서, 사람들이 엘프가 노예 시장의 품목으로 내걸렸다는 내용으로 들썩일 때 나단은 알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나단은 왜, 오알의 일을 광장에서 먼저 접해 들어야 했는지 의아했지만 더 지체하지는 않았다. 저녁 무렵 노예 시장에 걸리게 된 엘프는 돈 있는 자들이나 살 사치품으로써 설명되었는데 대개의 사항이 오알과 일치했다. 노블도 잃어버린 안녕도 찾아오지 않았던 낮, 오알은 산발로 교단 주변부를 배회하다가 사람의 손에 붙들려 끌려갔다. 나단이 염려했던 취약한 모습 그대로. 그래서 뒤쫓는 걸음이라고 한들 성할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헨슨을 떠올렸지만 헨슨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오알은 교단 내에서 쭉 헨슨과 격리 상태로 지냈고 헨슨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알도 아는 바가 없었다. 외부인 자격으로 헨슨에게 접근하느니 바로 오알의 신변부터 확보하는 게 옳았다. 헨슨이, 오알을 버렸을 리는 없었다. 교단 측에서 손을 쓴 일일 거라고는 짐작했으나 나단 자체가 오알이 만일을 위해 마련해둔 패였다. 차후에 어떤 상황이 일어나든 대비하면 되었다. 일의 처리가 조금이라도 더뎌졌을 때 오알이 겪을 일을 생각했다. 그건 돌이킬 수 없었다.
서두르는 걸음이었는데 딴판으로 차분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김없이 형편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비틀거리며 꼴사납지 않았을 것은 알았다. 오히려 헤매는 구석 없이 상황을 짚어냈다. 오알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려운 문제는 못 되었다. 수런대는 소리를 찾아 들어가자 그늘지고 좁은 곳이 나왔다. 몰려든 인파로 비좁은 공간. 나단 던스트는 길을 열어둔 융단을 밟으려던 때에, 나단. 오랜만에……. 오알의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나단은 너무 늦지는 않게 오알을 발견했다. 오알은 호브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머리를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귀는 단정하게 숨겨져 있었고 목 아래로도 같았다. 나단은 넉넉하게 외투를 두른 채 서 있는 오알을 보고 잠깐, 눈을 찡그렸다. 나단은 얼떨떨하게 눈앞을 헤아렸다. 앞이 언뜻 흐려서 몇 번인가 눈을 감았다 뜨고야 겨우 오알 앞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나단은 찬찬히 오알을 살폈다. 도리어 지키듯 감싸여 있는 몸. 오알은 느리게, 공포 대신 주저와 경계로 자신의 주변에 서 있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알. 나단은 간신히, 오알을 불렀고.
나단은 오알, 이라고 부르려는 숨에 씌워지려던 이름을 이해한다. 테오.
……당신을 잃을 수도 있었다면.
그래서 지겹게 건져내지는 비탄. ……테오, 너는 물 위에 떠 있었지. 하얗게 질려서. 네 몸이 벼랑인 양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때, 물에 삼켜졌을 때 너는 너무 춥고 아팠을 텐데 내가 왜 몰랐을까. 너를 그렇게 혼자 남겨두고. 그리고, 오알에게 겹쳐지려던, 거품이 인 자국. 귓가에서 들끓는 거품소리, 바다 안인 듯이. 나단은 조금 웃었다. 나단 던스트는 괜찮지 않았다.
5.
잘, 모르겠어. 내게 최초의 타인은 너희였으니까. 주인님은, 타인이라고 하기에는 다르고, 주인님 말고 다른 사람이라면 너희를 처음으로 봤어. 나는 그 전까지는 주인님이랑만 다녔거든. 그대로 주인님이랑 죽을 때까지 단둘이었어도 좋았을까? 주인님이 아프지 않고, 괴롭지 않고, 외롭지 않고, 너희와 만나지 않고 둘이서만 지냈어도 됐을까? 나랑 둘이서, 주인님은 외롭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건 모르지만, 나는 주인님에 의해 사는 거니까, 그것만 생각했어. 그랬는데, 주인님 말고, 너희가 보였어. 너희가 나를 보면서 슬퍼해서 나도 슬펐어. 내가 너희를 괴롭게 했어. 내가 좋아하는 너희들을. 미안해.
너희를 사랑해서, 폐허로 만들었어.
……당신이 언젠가 말했을 때에.
6.
오알은 다시 이름을 불러주지는 않았다. 잠자코 옆을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나단은 오알에게서 의혹을 읽어낸다. 노예상은, 아닌 것 같네요. 오알의 곁에 서 있던 늙은 여사제는 나단의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나단은 사제에게서 정황 설명을 들었다. 나단은 오알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들은 파마교 인근에 교단 본부를 둔 대지교의 성직자들이라 했다. 터무니없는 이름이었다. 대지교의 성직자들은 근처를 지나다 소란 속에서 오늘 노예시장에 내놓아질 엘프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야만이야 소대륙에 가장 흔하게 널려 있는 것이었는데 엘프라고 떠벌리던 입이 이때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비슷하게 반복되었던 광경이라도 엘프의 일이 되자 대번에 눈에 띌 만한 성질로 돌변했으니까. 그들은 드문 사건을 두고 지나치지 않기로 결정했고 오알은 알맞게 구원받았다. 그들은 오알이 원한다면 오알의 신변을 보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단은 그들이 오알과 파마교 사이의 관계를 알고 오알을 비호하려는지 가늠했지만 그들은 오알이 엘프라는 것 이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속이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나단은 그들을 믿지는 않았다. 가능성이라면 많았다. 종교 집단이니 엘프를 포교나 세 확장 따위에 사용할 도구로 판단했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거절하기 위해 떠올려진 사항들은 아니었다. 어차피 오알은 파마교 주변에 머물러야 했고 종교 집단이란 몸을 의탁하고 있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차라리 이용 대상인 쪽이 편할 것이다. 이용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조건을 걸 수 있었다.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균형이라면 억지로 맞추면 된다. 하지 않을 수도 없으므로. 고려해두었던 가정들은 정작 쓸모가 없었다. 나단은 오알과 함께 대지교의 건물 안에서 지냈다. 오알의 운명을 강제했던 야만의 이름은 소대륙의 작은 성당에서 돌연 빛으로 화했다. 이들 교인들 사이에서는 진작부터 빛이었을 것이나 나단에게는, 더구나 오알에게는 난처한 노릇이었다. 오알은 100년이 넘는 시간을 죽기 위한 준비만을 하며 지냈다. 대지신의 제물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대지신의 이름은 그 작은 성당에서 단지 너그러운 소망을 거쳐서만 외어졌다. 어떤 참혹이나 파탄도 동반하지 않고.
……괜찮단다. 오래도록 아프다는 건 앞으로 건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뜻이야. 아이의 이마를 살살 어루만져주던 손길 뒤로 괜찮다, 고 이르는 말이 건네질 때면, 여사제의 주름진 손 아래에서 아이가 살살 눈을 감을 때면, 오알은 끈질기게 사제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런 무르고 따듯한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듯. 오알은 땅 아래서, 땅 속에서 흙을 입에 문 채 호흡하는 일을, 입 안을 채운 흙의 맛을 느끼는 과정으로 감각하게 되는 순간을 기다리며 자랐다. 그런, 이야기였다. 나는 제물이었으니까. 오알은 단순하게 정리할 줄 알았지만 과거는 균열의 여지로 잔재한다. 백년의 어둠과 독을 먹으며 지하에서 자라났던 몸은 제물로써 완결되지 못하고 세상에 내어졌다. 오알은 죽기 위한 삶 이외의 것은 알지 못한다. 헨슨을 교리로 삼아 새로운 대지에 내디딘대도 그것은 이따금 제물로써의 삶이 연장되는 것만을 의미했다. 오직 새로운 신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 죽음. 죽음이 두렵지 않거나 무감해서가 아니다. 오알의 지하에서 신앙은, 사랑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대지신의 이름 아래 지상이 있었다면.
나는 잘못됐어?
그러므로 대지신의 이름으로는 한 번도 어루만져지지 않았던, 대지신의 세계에서 잉태된 아이는 자신의 근간을 묻는다. 나단은 부쩍 자주 멍한 표정을 짓는 오알을 보며 아직도, 맨 것으로 내어져 있는 발을 생각한다. 대지신의 지하 바깥으로 나섰던 발은 처음으로 내디디는 걸음에서 초라하게 비척댔을 것이다. 하지만 잡아주는 손이 있었으므로 웃었겠지. 오알, 웃는 표정이 어색하지는 않았어요? 장난스럽게 물었을 때 오알은 뜸을 들이며 고민했었다. 모르겠어. 나는 어떤 표정으로 웃었지? 그래도, 주인님의 손을 잡고 나와서, 좋았어. 나단은 숨이 드문드문 박혀 있던 말소리를 기억한다. 그 순간, 대지신 이외의 땅에도 볕이 내려질 수 있음을 알았을 때 이미 새로운 신을 위해 죽으려는 준비를 마쳤을 몸. 그, 외길로만 난 세상으로 오래도록 완전했을 텐데……. 오알은 예비하지 못한 지점에서 새로운 의혹들을 맞는다. 오알은, 혹은 땅 속에 묻혀 있었을 제물은 처음 지하에서 올라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맨발로, 그러나 잡아줄 손 없이 비틀거렸다. 맞잡아줄 손은 나단 던스트의 몫은 아니므로.
당신이 잘못됐을 리 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나단이 내어줄 수 있는 말이었다. 뒤틀린 태에서 태어난, 기형의 삶이라도 부정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것으로도 되었다, 고. 오알은 아무 말이 없다가 웅크려 앉아 있던 몸 안쪽으로, 무릎으로 얼굴을 묻었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장막처럼 두고 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단, 왜 내 땅은 모두 폐허일까. 태어나 본 것 모두 폐허여서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볕 내리는 땅을 본 듯이 오알은 눈을 감춘다. 빛을 가리려고, 감추려고. 네 땅도, 폐허가 될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물음이 나왔을 때.
나단 던스트는.
7.
그날, 오알 곁에 서 있던 늙은 여사제는 대지교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이였다. 주름이 온화하게 배어 있었는데 뼈마디가 불거진 손으로는 고생한 태가 났다. 소대륙의 형편이야 어디나 비슷하다지만 성직자로서는 험한 손이었다. 나이 든 사람이 이만하면 됐지요. 사제는 손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사제는 오알을 데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곤 했다. 오알은 기대듯 기울어진 채 사제의 말소리에 집중하곤 했다. 소대륙으로 와서는 뭐가 보이던가요. 땅이 좁지는 않습니까? 그건, 모르겠어. 가장 좁은 땅에서는 땅 끝에서, 맞은편 땅 끝까지 훤히 보였어. 소대륙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소대륙에서도 보통은 땅 끝이 잘 보이지 않아. 바다는, 바다는 다른 것 같아. 대대륙의 바다와는 어떻게 다르지요? 글쎄……. 호브에서는, 기다리는…… 동안 멈춰서, 지평선을 바라보고만 있었어. 아주 오랫동안. 그 바다와는 다르다는 건 알아. 살금살금 말들이 이어질 때면 오알은 무른 얼굴로 저 너머의 바다를 꿈꾸는 것 같기도 했다. 향수라도 되는 것처럼.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늘 감사하고 있어요. 고개 숙일 일이라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나단은 틈틈이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럴 것 없습니다. 나는 대지신의 뜻으로 당신들을 돕습니다. 그런데 당신. 사제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나단을 봤다. 힘에 부치는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그녀와는 별개로 묻습니다. 나단은 웃었다. 나는 원래 피로해보여서요. 마법사는 그렇잖아요. 그건 그렇고, 사제님.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단은 몸체에 잘게 흠집이 밴 반지를 내보였다. 이걸, 목걸이로 만들어볼 수는 없을까 해서. 사제는 나단이 내보인 커다란 반지를 본다. 다섯 꽃잎으로 넓게 퍼져 있는 보석의 면들.
허름한 반지는 여전히 푸른색이었다. 검은 데 없이.
오알의 반지는 노예상에게 잡혔을 때 우선으로 빼돌려졌다. 언뜻 보기에도 장식장에만 놓여 있던 물건으로는 여겨지지 않도록 헌 태가 났지만 값비싸 보이는 보석들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으니까. 나단은 오알이 대지교에 들어간 지 사흘째 되었던 낮, 반지를 도로 되찾아왔다. 오알을 잡아 넘긴 노예상의 거처를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는 대단치 않은 신분이었고 저택의 경비가 삼엄할 이유도 없었다. 남자의 책상 위에는 오알의 반지가 뽐내듯 얹혀 있었다. 한 번은 닦아낸 건지 반짝였고. 오랜만에 하는 일이었고 본래도 솜씨가 뛰어나지 않았으나 손이 여물지 않았던 어린 애 때보다 도리어 수월하게 일이 흘러갔다. 마법의 도움을 보기도 했고. 나단은 예기치 않은 불청객 신분에서 대지교로, 오알에게로 돌아갔다. 반지를 가져다주자 오알은 반지를, 그러쥔 채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괜찮아. 오알의 첫마디는 뜻밖으로 어르는 말이었는데 오알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라는 걸 알았다.
주인님은, 살아 계셔. 오알은 증표를 귀하게 끌어안아두었다. 디디고 설 수 있는 땅이나 같았으니까.
……오알은 헨슨을 보지 않고도 그런대로 버텼다. 얼마간은 헨슨이 교단 내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오래지 않아 그마저도 희미해졌다. 헨슨은 어디에도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쁘게 생각할 것 없어요. 헨슨이, 당신에게 작별도 없이 가버릴 리 없잖아요. 다시 또 만나겠죠. 오알은 생각지 않게 순순히 나단의 설명을 이해해주었다. 또는 상관없이, 잘 견뎌낼 수 있었다. 헨슨의 안전에 생긴 위험을 감지해내는 반지는 쭉 파랄 뿐 어떠한 변화도 담아내지 않았으니까. 오알은 몇 번인가, 망가진 몸체에다 손가락을 끼워 넣으려다가 실패했다. 목걸이로 수선이 된 뒤라야 그럴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 전에는 주먹으로 보석을 쥐고 있는 모습만이 보였으니까. 오알은 반지가 목걸이로 변했대서 개의치는 않았으나 본래 너클이나 마찬가지로 면적이 넓던 반지였다. 손이 횅해지니 허전했는지 오알은 가끔 비어버린 손에서 무언가를 찾듯 손을 내려다보곤 했다.
그래서 나단은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잠깐, 손 줘볼래요?
뒤에서 불쑥 던지기에는 순서를 거치지 않은 말이었으므로 오알은 멀뚱히 나단을 뒤돌아봤다.
뭐야?
손을 주면 알려줄게요.
수상해.
말이 많네요, 오알.
오알은 건방지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반만 엄격했다. 오알은 나단이 손짓하는 대로 손을 내밀었다. 나단은 로브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은색 몸체에 꽃 모양으로 세공된 푸른 보석이 늘어져 있는 반지였다. 오알은 나단의 손가락 사이로 들려 있는 반지를 두고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봤다. 나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신 선물이에요.
끼라고?
네.
싫어.
마음에 들 걸요.
나는,
나단은 빛이 덜 받는 각도로 반지를 오알에게 보였다.
익숙한 색이죠?
……?
눈치 채는 게 늦네요. 헨슨의 눈과 같은 색이잖아요.
…….
그러니 당신이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면, 당신이 껴주기나 하려고요. 나단은 오알에게 손을 내밀어보였다. 오알은 마지못해, 그러나 순순히 손을 건네주었다. 나단은 오알의 오른쪽 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오알은 손을 펼친 채 반지를 내려다보는 동작을 할 줄 알았다. 반지를 받은 이가 해내기에 그럴듯한 양식이었다. 나단은 오알이 반지를 내려다보는 동안 틈이 될 수라도 있는 듯이, 오알의 눈을 보았다. 아래로 시선을 두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백금의 속눈썹 아래서 반짝였다. 반지는, 헨슨의 눈과 같은 색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알의 눈 색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소한 모략이었다. 오알의 색을, 오알이 받아들이게 하려거든 딴판의 명명이 필요했다. 나단은 진실이기도 하고 동시에 빤한 거짓말을 사연으로 가져다붙였다. 그리고 오알의 오른손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졌다. 이전에 끼던 반지는 왼손이었으니까, 어색하겠네요. 오알은 잠잠히 반지를 내려다볼 뿐 쭉 조용했고, 그래서 나머지 말도 나단의 몫으로 놓였다. 그래도 익숙해져 봐요. 오알은 반지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이건, 왜 주는 거야? 근원적인 질문이었으므로 슬그머니 웃었다. 그냥, 당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죠. 세련된 답을 내주지는 못했으나 오알도 더 묻지는 않았다. 예뻐. 나단은 기분 좋게 웃었다. 다행이에요. 반지는 불순물처럼 손에 자리했다. 본래 있었던 것 대신으로, 언제든 덜어내질 수 있는 것으로.
……다르지 않게.
9.
당신이 나를 망칠 것 같아서 무서워요? 오알. 사막의 그늘 아래서 가물어가던 대화 다음으로 이어지던 말들. 나는, 당신과 만난 걸 후회해요. 당신은 죽고 싶어 하고, 나는 당신이 죽지 않기를 바라니까. 나는 말릴 방법도 없이 당신의 맹목을 봐야 해요. 당신이 언젠가 할 선택을 어쩌지 못할 일로 받아들일 순간만을 불안하게 기다리며. 그러나 나는 이미 당신을 만났고, 외면하지도 못하겠죠. 나는 내게 들어선 사람들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요. 당신도, 망가지게 두지 않아요. 언제든. 그러니까 알아둬요.
나는 내 방식대로 해요.
10.
그러니까, 오알. 내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이것도 내 선택이에요.
11.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바다를 끼고도 빠르게 닥쳐왔다. 나단 던스트의 머릿속으로는 순진할 정도로 단순한 사항들만이 나열되었다. 사랑하는 땅, 사랑하는 사람들. 나단은 주변에 두고 있던 사람들, 원정 동료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마야라든지 헤이서라든지, 가족을 함께 데리고 온 이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안부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단 던스트 자신에게……. 인간을 위한 전쟁은 나아가야만 하는 전장이었는데.
처음 볕을 봤을 때에 그러했던 것처럼 어김없이 희고 약한 발목을 알았다. 상처투성이의 발, 어젯밤 태어난 듯이 해 뜬 환한 세상에서 어김없이 헤매며 비틀거리는. 갓난아이의 걸음걸이. 주인님을 찾아야 해. 내가, 당신에게 떠난다고 말을 한다면.
……네가 필요해. 나단 던스트는 오알이 할 말을 안다. 그러므로 그 말은, 듣지 않아도 좋다. 나단은 당위를 저버리는 선택을 한다. 그 이후로 어떤 변명도 가지지 못하는. 그래도, 그것이 나단 던스트 자신의 선택이었고 대가였다. 이미 책임지기로 한 것에 대한.
나단 던스트는 필요로 여겨졌던 장면에서 저버리는 것을 택했다.
12.
네 땅도, 폐허가 될까? 나단은 곤란하게 웃었다. 그래서, 죄책감이라도 가질 거예요? 오알은 고개를 저었다. 정해진 거네요. 나는 피해자였던 적이 없으니 당신도 가해자는 되지 않는 걸로 해요. 당신에게 이용당하려는 건 내 방식이고, 선택이니까.
자 그러면, 오알.
13.
가야 해. 오알은 글라디우스의 아키마 원정대 모집 소식에 망설이지도 않고 말했다. 모집 공고에는 글라디우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정작 떠오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름을 대리로 내세우는 것쯤은 있을 법했고 도리어 글라디우스가 등장하는 쪽이 어색했다. 이번에는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보장도 없이 이르는 말에 오알은 표정 없이 나단을 봤다. 나단은 느긋하게 웃었다. 만나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무책임한 말이었으나 오알은 대강 확언인 양 안아두었다. 오알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수녀님이 옷을 만들어준댔어. 어떻게? 주인님의 옷을 입고 싶다고 했더니 내 몸에 맞춰서 줄여준댔어. 잘됐네요. 그렇게 입고, 헨슨을 만나러 갈 거예요? 응. 헨슨이 기뻐해줬으면 좋겠네요. 기뻐하셔? 기분이 이상할 것 같기도 해요. 어지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그런데, 수녀님, 수녀님으로 부르면 안 되는 거야? 그 분은 사제셔서요. 수녀 대신 사제님, 이라고 불러야죠. 여자는, 수녀만 되는 줄 알았어. 그런 곳도 있지만 대지교는 여사제도 허용되는 종교인 거겠죠? 신기해. 나단은 수녀복을 차려 입고 있는 오알을 보며 웃었다. 진짜 수녀가 된 기분은 어때요, 오알. 나는 예전에도 수녀였는걸. 나단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헨슨도, 오알도 그 이전까지 소대륙은 잘 몰랐으면서. 어쩐지, 어색한 티가 난다 했어요. 거짓말. 오알은 불퉁하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속았잖아. 덕분에, 함께할 수 있었잖아요. 그럼 됐죠.
그럼, 가짜 수녀님.
가실까요. 나단은 오알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알은 반지를 낀 손으로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 안으로는 반지가 우둘투둘하게 돋아나 있었다. 여전히 맞잡아줄 손은 나단의 역할이 아니었고 그들은 소풍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단은 소풍을 떠날 때와 같이 오알의 손을 잡았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14.
나는 당신의 폐허가 될게요. 나단 던스트는 웃었다.
15.
기꺼이 당신의 약하고 무른 발로 나의 폐허를 밟고 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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