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말소]

출발지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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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시간여행자였다. 아니, 세계여행자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시계를 깨트리는 것으로 지금 있는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선으로 이동하는 게 가능했다. 우선 한 번 시계를 부수면 아무것도 없는 세계선의 교차로에 떨어졌다. 끝이 없는 것만 같이 무한한 공간에 눈부신 하얀 빛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마치 영화 필름처럼 생긴 거울 세계들이 천장을 메우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쓸쓸하여 부순 시계를 하나씩 그곳에 두었다. 그것이 어느새 지금은 거대한 산처럼 쌓였다. 소녀는 그것을 잡동사니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소녀는 한동안 그 무덤 위에 파묻힌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이제까지 지나왔던 긴 여로가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갈 수 있는, 남아버린 수많은 미래의 길이 있었다. 몇 백 번 반복하면서 이젠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로 많은 방법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딱 천 년의 여행 끝에 단 하나 있을 수도 있는 해답을 찾아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는 분명히 강요된 생을 원망할 것이다. 하지만 한껏 원망받아도 좋을 만큼 소녀는 이상의 삶을 원했다. 소녀는 벌떡 일어나서 무덤의 끝까지 기어 올라 첨단에서 높게 뛰어 천장의 나선 하나를 붙잡았다.

마지막 세계로 뛰어들었을 때 떨어진 곳은 본래 L사가 있었던 곳이었다.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은 이미 몰락했고 지부 역시 무너졌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결정된 미래처럼 종종 일어났던 일이고,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이 몰락했을 때 비로소 림버스 컴퍼니가 설립되었으니 오히려 수고가 덜어 좋은 일이었다.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직접 무너트리기에는 수고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으니까. 때는 마침 림버스 컴퍼니가 대외적으로 존재를 홍보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뒤틀림 현상 전문 처리 및 방역, 현상의 연구…….”

소녀는 림버스 컴퍼니가 실제적으로는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알고 있었기에 홍보 문구에 김빠진 웃음이 샜다. 하지만 하는 일 따윈 어떻든 좋았다. 안팎으로 어떻게 소개하는지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L사 지부에는 처분되지 못한 환상체들이 돌아다녀 상당히 위험했으나 한 두 번 해본 일도 아니었다. 소녀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걷어 허벅지에 끼워 둔 두꺼운 나이프를 꺼냈다. 양손에 하나씩 쥔 채 무너질 듯 위태로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계단 쪽에 붙어서 기척을 살피고 난간을 짚은 채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소녀는 곧장 아래층 복도의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철문을 열었을 때 안쪽에서 시체 썩은 냄새가 확 덮쳐왔다. 소녀는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구더기마저 말라 죽어버린 시체 옆에 떨어진 사원증을 집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사원증은 여러 명 분이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이 사진도, 글씨도 흐릿했다. 소녀는 그 중에서 사진이 심하게 훼손된 것 중 안감만 비교적 멀쩡한 것을 골랐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L사 지부를 탈출했다.

운이 좋게도 날이 궂었다. 소녀는 일부러 비를 다 맞은 채로 림버스 컴퍼니 본사 앞으로 향했다. 경비를 서고 있는 직원에게 시체 냄새가 빠지지 못한 신분증을 내밀며 조용히 면담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하는 손은 원피스의 주머니 근처에 가 있었다. 구 L사에서 살아남은 비운의 직원을 동정했던 것인지 일은 순조롭게 풀렸다. LCC의 차장과 함께 마주 앉은 소녀는 시덥잖은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 남자에게 원하는 것을 똑바로 요구했다.

“파우스트라는 여자와 이야기하고 싶어요.”


세 번의 거절과 네 번의 요구 끝에 소녀는 파우스트와 만날 수 있었다. 고집을 부리면 못이겨 연락을 취해줄 것을 알았고, 연락을 받는다면 파우스트는 반드시 응할 것을 알았다. 우선 베르길리우스라는 남자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건 림버스 컴퍼니에 소속된 파우스트라는 여자였다. 파우스트는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아무 말 하지 않는 소녀에게 먼저 물었다.

“L사 지부에서 오셨다고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내민 사원증의 사진이 피로 뒤덮여 있었다. 다만 확실하게도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의 인감이 찍혀 있어서. 영민한 여자는 그것이 무너진 L사에서 훔쳐온 것이라고 금방 알아차렸다.

“베르길리우스라는 남자를 알고 있어요?”

“물론이죠.”

“그 남자와 접촉할 수 있어요?”

“가능은 할 거라고 보는데요.”

“그 남자와 이야기 하고 싶어요. 이 회사에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거예요. 그에게 ‘가넷과 라피스를 다시 되돌릴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전해주세요.”

파우스트는 눈을 꿈뻑였다. 그와 접촉하여 합류를 제안하는 것은 예정에 있었던 일이긴 하나 그 핑곗거리까진 아직 찾아내지 못한 참이었다. 그것도, 가넷과 라피스를 되돌리겠다니. 조금 구겨진 인상이 의심하는 목소리를 뱉었다.

“아직까지는 방법이 확실치 않아요.”

“저는 그 방법을 알고 있어요.”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베르길리우스와 거래하기 위한 조건으로써 이미 몇 번이고 봐 온 과거였다. 그 뒤로 파우스트가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는 묵묵부답인 소녀를 혼자 둔 채로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쿵 닫힐 때 철컥 잠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뒤, 베르길리우스가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의 모든 것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서, 소녀는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베르길리우스와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이미 메피스토펠레스가 제작 중에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초췌한 표정으로 잠긴 독방 문을 열고 들어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손엔 따듯한 차가 한 잔 들려 있었다.

“드십시오.”

지치고 피곤한 목소리이긴 했지만, 예상 외로 정중한 말투였다. 소녀는 제 앞에 놓인 하얀색 머그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찮은데…….”

“독 안 탔습니다.”

생각보다 김빠진, 이번 세계에서의 첫만남이었다. 소녀는 마지못해 잔을 잡고 조금 홀짝였다. 마시멜로가 반쯤 녹은 초콜릿이었다. 못내 거절할 수가 없어서 마신 거긴 하지만 홀딱 비에 젖은 뒤에 처음 마시는 따듯한 음료여서 그런지 바짝 긴장해서 굳은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듯 했다.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뭡니까. 거짓말로 여기까지 꼬여낸 건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만.”

“당연하지만 이제부터 이야기 하는 건 전부 비밀이야. 이 회사의 누구에게도.”

그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까지 비밀을 지키는 것 따위 원하는 것에 비교하면 아주 작은 일이었다. 소녀는 긴 여행 간 이야기 한 적 없었던 비밀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내었다.

“난 거울 세계를 여행하는 존재야.”

믿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그는 차분하게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녀는 자신의 여로를 간단히 설명하고 그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짧게 설명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성공하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했어. 그리고 방법도… 난 어려운 기술은 잘 모르니까…….”

소녀는 말끝을 흐리며 목에 건 로켓을 꺼냈다. 마음 만큼 다 닳아버린 로켓 안엔 접힌 종이가 있었다.

“이게 그 방법의 핵심이야. 파우스트가 보면 바로 알 수 있어.”

“…….”

남자는 잠시 말을 끊고 눈을 감았다. 염원해왔던 것이었다. 매일 밤 자기 전마다 되뇌어 오던 것,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이윽고 뜬 눈은 가라앉은 붉은 보석의 빛이었다.

“무얼 하면 됩니까.”

“이제 곧 메피스토펠레스가 완성되고, LCB 부서가 생길 거야. 부서의 목적은 아마도… L사 본부에 피어난 황금색 가지를 회수하는 것. 그 버스에 타서 길잡이가 되어줘. 그리고 길잡이로서 내가 지금부터 알려주는 인물들을 그 버스에 수감시켜주었으면 해.

“그것도 당신이 확인한 미래입니까?”

“이 앞은…….”

소녀는 말을 머뭇거렸다.

“아직 나도 가보지 않은 길이야.”

불확실한 미래임에도 소녀의 눈은 확신으로 빛났다. 남자는 흔들림 없이 반짝이는 그 눈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수도없이 만났다더니, 정말인가. 그 빛이 눈부셔서 그는 금방 눈을 돌렸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나를 같이 수감시켜줘. 그게 내 소원이야.”

“허.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 여행을 시작했어. 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수감자 중 한 사람입니까.”

이상이라고 해.

소녀는 이름을 입에 담을 때서야 옅게 웃었다. 남자는 더 질문하지 않고 일어섰다. 원하면 계약서를 써도 괜찮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약속만 지켜준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다만 그는 문을 열고 떠나기 전에 우천에 우산을 잊은 것처럼,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혹시 다른 세계에서도 저는 똑같이 그 아이들을 잃었습니까?”

소녀는 알 듯 말 듯한 대답을 건넸다.

“난 운명론을 믿지 않아. 그리고……”

그리고 어느덧 마시멜로가 다 녹아버린 초콜릿처럼 따듯한 위로를 건넸다.

“어느 쪽이든 넌 그 아이들에게 다정했고, 그 아이들은 널 많이 좋아했어.”

“…그렇습니까.”

문이 다시 한 번 닫혔다. 이번엔 잠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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