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계약
친구비 없으니까 저리 가라고.
우는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울지마, 아님 괜찮아 뿐이다, 쓸모없는 인간은 없다. 정론이다. 다만 히르쿠스가 객관성을 상실한 열등감 덩어리였을 뿐이다.
“…시끄러운 게 싫고, 네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싫어. 지금 이렇게… 눈물 닦아주는 것도 싫어. 쓸모없는 사람이 없긴 왜 없어?”
그가 늘 그랬듯이 비관에 빠져 얼릭에게 성질을 부리려던 순간, 어색한 단어가 그의 귀에 꽂혔다. 뭐? 다리? 아… 이 변태 자식…. 히르쿠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득해졌다. 그래, 히르쿠스정도 되는 인간을 진정시키려면 더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얼릭이 시킨 대로 나는 할 줄 아는 게 있다, 고 외치지는 않았다. 그저 얼빠진 채로 눈을 몇 번 깜빡거렸을 뿐. 잠깐 그렇게 있다가. 그는 다시 인상을 쓴 채로 중얼거렸다.
“변태….”
왜 로브를 입고 나오지 않았을까? 그는 반바지를 입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조금 뒷걸음질 치다가, 얼릭의 물음에 답했다.
“히르쿠스. 염소란 뜻이거든. 누나는 아르비인데… 양이란 뜻이고. 단순하게 눈동자가 이렇게 생겨서 지어진 이름이야. 아끼거나... 그래서 지어준 게 아니니까. 사람 이름이 염소라는 것도 싫고…. 그런데,”
히르쿠스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름을… 바꿀 수도 있어? 이름은 한번 정해지면 끝이잖아. 그리고, 다들 날 히르쿠스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부르고….”
히르쿠스는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의미가 있는 몸짓은 아니었다.
“친구? 우리가 왜 친구야? 사용한다고 했지. …몇번이고 말하지만, 나는 쓰일 수 있는 인간이 아니야. 그러면 너는 나와 친구 하지 않을 거야. 그렇잖아…. 나는 쓸모 없고, 뭔가 할 수도 없고, 너한테… 무엇도 돌려줄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나한테 호의를 사려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야. 한 가지로는 못 믿어? 등급은 한가지가 아니야. 여러 요소를 조합해 최종적으로 판단한 나의 가치를 나타내는 거지. pax는 나를 c급 인간으로 정의한 거야.”
말을 쏟아내던 그는 한 단어에 멈춘다. 기사의 맹세. 얼핏 낭만적으로 들린다만, 실제 중세에서 기사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군주와 기사는 봉토와 충성을 교환했다. 일종의 계약관계였던 것이다. 충성 맹세, 기사도… 멋지게 들린다만, 히르쿠스에게는 그래… “친구비를 내놓으면 친구 해주겠다.” 정도로 들렸다. 그러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히르쿠스에게만.
“내 말을 뭐로 들은 거람. …c급 인간은 너에게 줄 만한 명예가 없어. 그러니 네가 나에게 할 맹세에는 대가가 없을 거야. 대가 없는 충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 너는 결코 내 기사가 될 수 없겠지. 응? 그런 거야. 대가 없는 희생 같은 건…. 진짜 이상하고, 멍청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잖아.”
얼릭의 웃는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정확히는 화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해? 정말로 대가 없이 좋아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 오늘도 정말 누이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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