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쫑] 옛날에 썼는데 안 올린2
외부인 출입 엄금인 기숙사에서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최종수가 깨달은 것은 차라리 택시를 타고 집에 갈걸 그랬다는 간단한 사실이다. 집에 누가 있든 없든 그냥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면 되고, 부모님이 계시면 친구라고 얘기하면 된다. 내일 당장 훈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운동부 고등학생이 폭우를 피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얼마든지 있는데도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기숙사까지 달려온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무렵 지원군이 나타났다. 이규가 수건 두 개를 들고 다가와 제게 그걸 다 주었다. 이건 준수한테 줘. 나머지는 내가 얘기할게. 순식간에 뒤로 밀려난 저를 보던 성준수가 손을 내밀었다. 야. 수건 줘. 최종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수건 하나를 건넸다. 성준수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는 광경이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
대화는 일사천리에 이루어졌다. 아무리 운동부라도 편의를 봐 줄 수는 없다는 말과 이런 날씨에 보호자도 우산도 없는 미성년자를 다시 내보내는 건 불합리하지 않느냐는 말이 오가는 동안 최종수는 그냥 서있기만 했다.
경황이 없었다.
감독이나 코치에게 연락하는 건 말도 안 되고, 제가 농구부 소속이니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주장인 이규에게는 알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연락했을 뿐인데 이규는 카톡 하나에 바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달려와 줬다. 좋은데, 고마운 일인데 최종수는 그냥 막연했다. 장도고등학교는 용산에 있고, 지상고등학교는 부산에 있는데 거기에 있어야 할 성준수가 왜 여기에 있는지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다. 부모님께 알리는 것처럼 친구, 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제게는 친구라고 부를 만큼의 친분을 가진 동갑내기가 존재하지 않으며 하다 못해 거주 지역조차 다른 놈과 친해질 노력을 자행한다는 것 자체도 말이 안 됐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이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떡하지.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은 세 번 일어났다. 첫 번째는 사감이 한숨을 쉬면서 이번만이며 내일 아침에 바로 나갈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런데 준수는 어떻게 된 거야? 수련 환경을 바꾸고 싶었어?”라는 이규의 질문을 성준수가 싹바가지없게 “그냥.”으로 일축했다는 것이다. 이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최종수는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말하기 싫은 걸 캐묻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넘어갈 수 있었다고 봐야 했다.
세 번째는 방문을 열었을 때 알았다.
“뭐야?”
방이 비어있었다. 정확히는 같이 방을 쓰는 놈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주말에 어딜 간다고 했었는데 알 바 아니라서 흘려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성준수는 방을 한 번 훑어보고는 샤워는 어디서 하냐고 물었다. 최종수는 그제야 두 사람의 발밑이 젖어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서랍에서 옷을 잡히는 대로 꺼냈다. 새 속옷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입던 걸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성준수 성격상 그런 걸 신경 쓰진 않을 것 같지만 저는 신경 쓰니까 제가 챙기는 게 나아 보였다.
니네 샤워실 공용이냐? 어. 공용 간만이네. 우리 숙소는 좁아 터져서 화장실 둘이 들어갔다간 질식사한다. 걔네 냄새 나? 니는 안 나는 줄 아냐? ……나 냄새 난다고? 나겠냐? ……신경 쓰이니까 장난 치지 마. 뭐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쓰거든?
씻고 돌아오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자판기를 쓰러 나온 노수민과 마주치긴 했지만 어차피 이규가 알고 있으니 성준수 좀 들킨다고 별일이 생기진 않을 것 같아서 인사만 했다. 성준수는 이번에도 싹바가지없게 대응했다. 이 새끼 지금껏 어떻게 살아온 거지.
가장 큰 불행은 성준수에게 상식이 있다는 사실에서 왔다.
“얼굴도 모르는 놈 침대를 왜 써.”
최종수는 나름 충격을 받았다. 아무거나 쓸 것처럼 생겨놓고 그런 걸 따진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만에 숨길 마음도 없이 무례하게 생각해서 그런지 성준수가 도끼눈으로 저를 쳐다봤다. 뭐라고 할 것 같았는데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지가 남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 듯해서 마음을 놓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제 침대를 쓰기로 했다. 저 혼자 눕기에도 좁아서 가끔 구겨져서 자곤 했는데 여기에 저보다 체격이 좀 작긴 해도 어쨌든 농구 선수인, 키는 좀 비슷한 놈이 하나 더 눕는다니 얼마나 좁을지 상상도 안 갔다. 성준수는 나름 배려한답시고 침대 주인이 안쪽으로 가라고 말했지만 사실 누가 안쪽에 가든 바깥쪽에 있는 놈이 떨어질 건 자명한 일이었다. 손님을 바닥에 내던질 수는 없어서 제가 바깥에서 자겠다고 말했다가 먹금 당한 최종수는 얌전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벽에 딱 붙어서 됐다고 말하자마자 성준수가 불을 끄고 걸어왔다. 매트리스가 눌려서 꺼지는 느낌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팔다리가 완전히 맞붙는 게 느껴져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진짜 이상했다.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설명이 안 됐다. 진짜, 진짜 이상했다.
야. 어? 니네 침대 존나 좁다. 어…… 그러게. 우리는 이불 깔고 바닥에서 자. 어…… 그럼 안 좁겠네. 거실에서 다닥다닥 붙어 자는데 좁지 안 좁겠냐. 그런가……. 니는 그렇게 안 자 봤지. 어. 일단 내 기억 안에선 없어. 유치원에서 낮잠 자는 거? 그 시기는 그냥 없던 걸로 치는 거 아니냐? 언제까지 떠올릴 건데. 아니, 그냥 떠오르는데 어쩌라고. 네가 물어봤잖아. 누가 유치원 때 대답 듣고 싶어서 물어봤겠냐고. 근데 니 유치원생이면 존나 작았겠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유치원생은 다 작잖아. 이게 지금 대화냐? 그럼 아니야? 이 새끼 진짜 골 때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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