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성' 의미의 차이

한강과 기형도 작품 비교를 통해

기형도의 시와 한강의 소설을 읽은 건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 입시생 시절, 교과서에 나온 기형도의 '길 위에 서서'라는 시를 읽고 굉장히 감명받으며, 매마른 식물같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무사히 입시 전쟁을 끝내고 가장 먼저 읽은 소설이 한강의 '채식주의자'였다. 여기서도 나는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비슷하지 동일하진 않았다. 두 작품 다 굉장히 식물적이지만, 그 지향점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차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저 좋아하기만 하며 시간을 보내다 시대의 변화를 맞이했다. 기존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변화가 한국에 페미니즘으로 불어온 것이다. 그 변화를 느끼면서 내가 망각했던 그 차이를 분명히 알게 된다.

둘의 식물성은 분명히, 비슷하다. 대부분의 전통적 작품들이 그랬듯이 식물은 현실이 아니라 '죽음' (그리스 신화에서 기용했던 여러 작품들)을 대부분 의미한다. 두 작품 역시 모두 결과는 죽음이거나,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기형도의 작품은, 생동성을 인간으로 죽음을 식물로 표현하여 지쳐 죽은 자신을 식물처럼 묘사한다. 결국 져버렸다는 의미의 식물로 그 끝이 죽음인 이유 역시 그렇다. 

그러나 한강의 작품은 식물을 '지향'점으로 본다. 어쩔 수 없이 삶에 실패하여 식물이 된 게 아니라, 동물적이고 폭력적인 기존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식물'이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주체성과 자아의 차이다. 주체성을 포기하여 식물이 된 자와 주체성을 위해 식물이 된 자는 분명히 다르다. 한강의 작품들은 폭력을 적나라하게 비유하면서, 식물적인 반항을 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 현 세대 직전까지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가 '전진'을 긍정적인 의미로 본 것에 대해 반대적이다. 요즘 서점에 가면 이른바 힐링 서적들이 많이 나온다. 조금 쯤 쉬어도 된다는 의미로. 그럼 식물성은 그런 쉼의 의미인가. 그것도 아니다. 한강은 거기서 더 나아간 미래 시대의 새로운 지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건 의외로 고리타분하게도 '자아성찰'이다. 누군가를 착취하여 성공하는 삶이나, 경쟁사회에서 벗어나긴 하지만 거기서 벗어남에 끝나지 않고 다른 성장방향을 제시하는 거다. 자신에게 집중하여 오롯이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착취적이진 않지만 단단한 삶의 새로운 방식이다.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인, '죽고싶다'는 진실로 죽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러니 현대적인 의미의 '죽고싶다'를 표현한 식물성이 바로 한강의 작품이다. 

기형도는 굉장히 전통적인 방식을 띄고 있는데, 이것 역시 새롭다고 느껴진다. 동시대 작가들이 식물을 희망 (꽃 피는 시절인 봄으로 총칭되는)이라거나, 꽃으로 대표되는 아름다움의 비유적 표현이었다면. 기형도의 식물은 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한다. 삶에 지친 사람이 걷는 것을 멈추고 '길 위에 서'있다는 것은 그가 곧 식물이 될 것이다. 걸어가지 않는 존재, 식물이다. 인간임을 포기하겠다고 해석된다. 기형도는 포기의 식물성을, 한강은 선택의 식물성을 나타내고 있다. 대책과 감정은 다르다.


카테고리
#비문학
페어
#그 외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