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일렁

thinkinu by 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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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될 거라 예상하며 죽는 사람은 없다. 준수가 재유에게 얻은 깨달음 중 하나였다.

 

일렁일렁

 

10월, 날은 추워지기 시작했고 준수는 다리를 자주 떨었다. 추워서인지 초조해서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다리를 자주 떨어서 그런가, 배가 되게 금방금방 꺼지기도 했다. 준수는 신라면 작은 컵에 물을 부어 독서실 옥상에서 자주 먹었다. 재유를 만난 날도 똑같았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옥상으로 올라갔다. 버려진 책걸상 중 아무 데나 앉아 나무 젓가락을 뜯으려고 했을 때, 저 구석에 재유가 있었다.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웬 남자애가 아빠 다리를 하고 옥상 초록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준수는 처음엔 무시했다. 라면을 후룩 먹고 나서는 벌떡 일어나서 후드 집업을 벗었다. 라면 개뜨겁다. 입김 막 나오고, 쟨 독서실 다니는 애도 아닌데 내 또래인 것 같고.

“안 추워?”

퉁명하게 말하며 후드집업을 건넸다. 재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수를 꿈벅꿈벅 쳐다봤다. 초면부터 반말 까서 그러나, 생각했는데, 재유의 첫마디는 아주 상투적이었다.

“내가 보이나?”

유령의 뻔하디 뻔한 첫 인사였다.

 

 

재유는 경상도 출신 유령이랬다. 죽은 것도 경상도. 이번 여름에 엠티에 갔다가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려 죽었다고 했다. 그때 몇 살이었느냐고 묻자 스무 살이라고 대답했다. 해가 안 지났으니 아직도 스무 살이긴 해, 생일도 안 지났고… 재유가 그렇게 말했고 준수는 그러냐, 나도 스무 살이다, 재수생이고. 라고 대꾸 했다.

“서울에 뭐 볼일 있었어? 왜 서울까지 왔어.”

“그런 건 없었고. 가만히 공중에 있다 보면 바람인지 뭔지, 알아서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여까지 왔네.”

“원한이나 소원이나 그런 거 있어?”

“없다.”

“그럼 왜 유령이 됐어?”

“내가 그럴 줄 알고 죽었겠냐.”

재유는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뻔한 건 첫 인사 뿐이었다. 재유는 유령치곤 속세에 미련이 없어보였다. 혹시 넌 유령이 아니라 영혼인 거 아니냐고, 아직 덜 죽은 거 아니냐고 준수가 겨우겨우 머리를 굴려 물었지만, 재유는 깔깔깔 웃었다.

“내 머리통 계곡 바위에 깨진 것도 똑똑히 봤는데, 덜 죽긴 뭐가. 내 완전 죽었다.”

그게 웃으면서 할 이야기인가? 준수는 라면 국물을 끝까지 다 마셨다.

“조금만 더 지켜봤으면 내 몸이 바다까지 흘러가는 거 볼 수 있었을 텐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까진 못 봤다.”

“그런 게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본 거 아이다. 안 믿기니까 봤지… 난 내가 신이라도 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거 아니고 걍 죽은 거데. 내도 내가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줄은 몰랐는데. 재유는 그렇게 말하며 팔뚝을 쓰다듬었다. 춥지 않다고 했으면서. 손가락이 추워보였다.

“그러는 니는 재수 왜 하는데?”

“그거야말로 특별히 이유가 있냐… 대학 떨어졌으니까 하지.”

“어디 가고 싶은데?”

“대학보다는… 내가 입시체육을 했는데…”

제자리 멀리 뛰기가 약해서 떨어졌어. 준수는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재유는 준수에게 위로랍시고 야 사실 대학 가도 별거 없디, 맨날 술만 퍼마시고, 그냥 양아치 집단이다, 하며 온통 말해대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니한테는 중력이 조금 더 센 모양이지. 억울하게.”

재유가 흘리듯 말했다. 준수는 그게 뭐라고 조금 부끄러워졌다. 사실 억울했다. 키는 큰데 더 멀리 뻗지 못하는 게, 한심하면서 억울해. 이젠 모두 없던 일이 되었지만 그때는 분명 그랬다.

그런데 너는 그렇게 일찍 죽은 게 억울하지도 않은 거냐. 준수는 재유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옥상에는 하루에 두세 번 정도 올라갔다. 사람들이 몰려있을 시간을 피해 올라가 재유에게 인사했다. 안녕. 재유는 그런 준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준수의 인사에 어색하게 웃으며 준수 왔나, 했다.

사실 준수는 재유를 마주한 뒤에, 옆자리 중딩이 보던 엑소시즘 유튜브를 몰래 찾아 봤다. 몸 꺾이고 기어다니고 눈이 까뒤집힌 사람들과 뭐시기 가이스트인지 카이스트인지 같은 현상을 20분 정도 봤다. 사실 공부가 더 하고 싶지 않아서 멍 때리듯 화면을 틀어둔 것뿐이었다.

“한입 줄까.”

라면 한 젓가락을 들어 올릴 때면 늘 재유에게 물었다. 재유는 못 먹는다니까? 하하하 웃고 말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역시 재유는 쫓아내야 할 유령이 아니다. 준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엔 담배를 피우러 옥상에 올라갔다. 사실 담배를 배운 적도 없었다. 매번 컵라면 갖고 올라 가긴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이 올라가면 좀 그러니까. 민망해서 만만한 담배를 골라 가지고 옥상으로 갔다.

혹시 내가 헛것을 보나? 재유가 설마 허상이고 나는 환각을 보는 미친 재수생이 된 건가. 이왕 미친 거면 올 1등급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준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옥상 문을 열었다. 재유는 언제나처럼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옥상 바닥에 앉아 있다가 준수에게 왔나, 하며 인사했다.

“그런데 너 왜 이번에는 아무 데도 안 가?”

“뭐가?”

“아니… 공중에 있다가 뭐 흘러흘러 움직인다며. 어떻게 여기에 계속 있느냐고.”

“밤에 창고 안에 드가 있거든.”

“창고에 왜 가, 그냥 독서실 내 자리에 앉아.”

“그럼 읽을 책 한 권만 가져다주라.”

“알겠어. ……뭐하려고 여기 있냐?”

준수가 물었을 때, 재유는 귀 옆을 긁적이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냥…… 니 심심해 보여서.”

“나?”

“어. 좀 그래 보이길래…”

준수는 심심하지 않았다. 심심할 틈도 없었다. 나는 지금 발등에 불 떨어진 수험생이야, 매일매일 수능 시간표로 살기에도 바쁠 걸…… 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재유가 그렇게 말하고 나니 그동안 먹었던 컵라면들이 전부 싱거웠던 것처럼 기억됐다. 재유가 없었어서 싱거웠던 것 같았다.

밤 12시에 독서실 자리를 정리하고 책상 가운데에 국어 모의고사 기출 문제집을 내려놨다. 옥상 창고 안에 있던 재유를 독서실 복도로 불러다가 귓속말 했다.

“왼쪽, 제일 안쪽이 내 자리거든? 지금 읽을 만한 거 없어서 국어 문제집 내놨으니까 그거라도 봐. 내일 책 가져올게.”

재유가 알겠다며 문제도 좀 풀겠다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준수는 볼에 재유의 머리카락이 닿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재유는 만져지지 않았다. 유령이니까. 가짜도 무존재도 아니지만 만져지지 않으니까. 재유는 준수를 만지고 싶을 때 만질 수 있었다.

“집 잘 가래이, 준수. 고맙다.”

지금처럼. 재유는 잘 가라는 인사를 하며 어깨를 쳤다. 재유의 손가락 모양대로 어깨가 서늘해졌다. 준수는 차가운 어깨로 재유의 존재를 느꼈다. 넌 역시 진짜 있구나.

 

 

다음날, 독서실로 가기 전에 서점에 들렀다. 문제집 코너에는 파이널 봉투 모의고사가 쫙 깔려 있었다. 과목별로 다 쥐고 나서는 베스트셀러 코너를 어슬렁댔다. 에세이를 펼쳤다가 자기계발서를 펼쳤다가 소설과 시집을 뒤적이다가… 계속 반복하다 결국 만화책 코너로 가서 완결 난 스포츠 만화 열 권을 샀다. 용돈이 거의 다 털렸지만 가방은 확실히 무거웠다.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독서실로 걸어가며 준수는 바보처럼 온갖 책을 뒤적인 것을 부끄러워 했다. 괜히 뒷머리를 거칠게 흐트러뜨렸다. 그냥 재유한테 같이 가자고 했으면 될 건데. 나는 걔가 뭘 좋아하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네. 걔는 내가 컵라면이랑 담배를 좋아하는 줄 알겠지.

독서실에 들어갔을 때는 자리에 재유가 없었다. 어제 두고 갔던 문제집 위로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다시 푸니까 어지러워서 못 풀겠다

그래서 시간 잘 가데

고맙다

 

메모지를 스터디 플래너 안쪽에 붙였다. 서랍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사온 만화책의 비닐을 다 뜯어 가지런히 놨다. 구석 자리 고시생이 준수가 하는 꼴을 보며 혀를 쯧 찼다. 준수는 그 사람의 등을 째려보다가 서랍을 닫았다.

수능이 정말 코앞이었다.

 

 

“준수 니는 생일이 언제고.”

“나 겨울…… 12월 24일.”

얼어붙은 손끝으로 담배를 잡고 있었다. 옥상에 사람들이 잘 안 올라오는 밤 시간대. 입김이 여기저기 빌려온 불빛들 때문에 일렁거렸다. 성냥팔이 소녀라도 된 것처럼 담뱃불에 손을 데우고 싶었다. 그런 준수 옆에서 재유는 여전히 반소매 반바지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준수는 물끄러미 재유의 정수리를 내려다 봤다. 여름에 죽어서 두피까지 빨갛게 탄 재유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이브?”

“어……”

“쑥쓰럽나.”

“말하면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그때 날짜 골라 태어난 것도 아니고.”

“맞나…”

“응.”

“내 그럼 그때까지만 살까?”

재유가 말했다. 준수는 담배를 떨궜다.

“어, 야 위험하게시리. 발로 밟아라.”

아무렇지 않게 재유가 떨어진 꽁초를 가리켰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 맞네 난 산 게 아니제… 따위였다. 준수는 재유가 가리킨 꽁초를 슬리퍼 신은 발로 꾹 밟았다. 어차피 제대로 피우지도 않아 불씨가 없었다.

“그거… 시기를 네가 정할 수 있어?”

다리가 떨릴 것 같았다. 초조함의 신체화. 10월부터 겪었고 실기 시험 전에는 늘 겪어왔던 것이 수능 직전의 독서실 옥상에서 또 나타났다. 다만 옆에는 여름 옷차림을 한 유령 한 명이 있었다.

“정한다기 보다는 그냥 좀, 그런 예감이 들어가.”

“어떻게 느껴지는데.”

“음… 요즘 좀 춥데.”

하핫. 재유가 어색하게 웃었다. 준수는 입김을 뱉었다. 머릿속으로 패딩을 벗어줄까, 아니 근데 입을 수 있을까, 라이터로 불이라도 피워줄까, 남은 담배에 전부 불을 붙일까… 온갖 생각을 다 했다. 이렇게 머리를 어지럽게 굴린 적은 없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대체 뭔지, 준수는 알 수 없었다. 재수까지 하고 있는데도 전혀 똑똑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모든 게 싱겁게 느껴졌다. 예전에 먹었던 컵라면처럼.

 

 

수능 당일, 재유는 응원하러 오지 않았다. 준수는 점심을 먹은 뒤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학교 옥상으로 올라가면 재유가 있지 않을까? 국어 진짜 존나 어려웠어. 그딴 걸 재유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유는 그날 내내 마주하지 않았다. 사실 준수도 재유가 찾아온다면 반갑지 않을 것 같았다.

왜 옥상을 벗어났어? 거기에 계속 있어주면 안 됐어?

주제넘는 질문을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준수는, 늘 재유에게 질문을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유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수능은 잘 봤다. 피씨방에서 성적을 확인했다. 근처에서 게임을 하던 남자가 디스코드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빨이지 씨발 이건.

그러게, 재유 너는 신일지도 몰라. 무심코 생각하고 피씨방을 떠났다. 재유는 독서실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준수가 독서실에서 짐을 뺀 뒤에도 재유는 계속 그곳에서 지냈다. 슬쩍 우리집에 가서 지내자고 운을 띄우기도 했으나 재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신들린 집이 되면 어쩌냐는 거였다.

네가 춥다고 했었잖아.

준수는 재유에게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바람이 쌩쌩 불어서 재유와 낚싯줄로 서로를 묶었다. 투명한 낚싯줄을 패딩 지퍼에 묶고 한쪽은 재유의 손가락에 묶었다. 준수는 재유를 만질 수 없어서 재유가 스스로 했다.

“사람 안 걸리게 조심해야겠다.”

“그러니까 날아가지 마.”

“그게 맘대로 되나… 니 모자 잡고 갈게.”

패딩 모자를 슬쩍 잡은 재유가 준수의 뒤를 따라왔다.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다. 두 사람은 예전에 준수가 재유를 위해 샀던 스포츠 만화의 나머지 권을 읽기 위해서 종종 도서관에 갔다. 재유는 그 만화를 읽었고, 준수는 눈에 보이는 아무 만화책이나 골라 읽었다. 재유가 만화책을 넘기는 게 다른 사람 눈에는 참 이상해 보일 것이므로, 언제나 재유는 벽에 붙어 책을 읽었다. 준수는 그 앞에 앉아 재유를 가렸다.

사람이 위험하게 지나갈 때는 재유가 벽에 더 붙었다. 준수는 팔을 들어 재유를 완전히 가릴 수 있게 했다. 몇 번 쯤 반복한 뒤엔 재유가 깨달은 듯 이야기했다.

“근데… 책만 숨기면 되는 거 아이가?”

“아. 그러네.”

재유는 클클 웃으며 준수의 명치를 밀어냈다. 아주아주 차가운 손이었다. 준수는 순순히 떨어졌다. 다시 자리를 잡으며 만화책을 펼치는 재유가 혼잣말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되게 시끄럽네.

내가 뭐가 시끄럽다고. 난 말도 없는데. …꼭 자긴 살아본 적 없던 것처럼 이야기를 하네. 준수가 앞 내용을 전혀 모르는 만화책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내가 재유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구나.

 

 

수능이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12월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준수는 성적에 맞춰 원서 쓸 대학을 정했다. 매일매일 사소하게 바뀌는 합격 퍼센테이지에 골머리를 앓다가 집을 박차고 나가 독서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예전보다 조금씩 더 흐려지는 재유가 늘 기다리고 있었다.

“준수 왔나.”

“어.”

“뭐하고 왔나?”

“맨날 하는 거, 대학…”

“아 맞나… 어디 갈 것 같은데?”

“모르겠어, 매일 조금씩 바뀌니까 그냥 머리 터질 것 같아.”

“아하하. 그제.”

원래 그렇지, 그런 거는… 아니 세상만사가 그렇지. 재유는 눈을 감고 그렇게 말했다.

“넌 가끔 세상 다 산 사람… 아니 애늙은이… 통달한 사람처럼 말하더라.”

“내 죽은 사람 맞는데?”

“미안….”

“뭐가? 맞는 말이구마…… 그냥, 이래 지내다 보니까 사람 사는 거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싶은 거지.”

“다 그렇다는 게 뭔데?”

“불쑥 불쑥 모르는 문제가 튀나오는 거? 니는 그런 적 없나? 예상한 적 없던 일 생기는 거.”

골목길 돌다 갑자기 차가 튀어나오고, 문제 풀다보니 시간이 3분밖에 안 남았고, 샤프심이 똑 떨어지는 일. 준수에게도 그런 일은 당연히 있었다. 예상 밖의 일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었다.

“니를 만날 거라 예상한 적도 당연히 없다.”

“어?”

“그래서 내는… 내가 살아 있는 줄 알았다, 가끔씩. 유령이면 내 시체 떠내려가는 것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그래서 다른 일은 그렇게 뭐 놀랍지도 않았거든. 근데 니가 날 본 거, 대화하는 거. 그런 건 다 신기해서… 아 혹시 내가 지금 살아 있는데 엄청나게 긴 꿈을 꾸는 거 아닌가… 그런 착각이 들기도 하고.”

꿈을 꾸는 거 아니냐고… 준수는 차라리 이것들이 다 재유의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조차도 재유의 꿈속에 들어가 있는 엑스트라라면 좋겠다고. 그렇지만 12월이었고 너무 추웠으며 자신의 코와 입에서 나오는 허연 연기가 재유를 가릴 정도였다. 사실 꿈을 꾸는 건 준수 자신이어야 옳았다. 흐릿해져가는 것은 재유였기 때문에.

“아니, 니 진짜 시끄럽다. 아나?”

“예전부터 대체 뭐가?”

“니 머리 굴러가는 소린지 피 도는 소린지 심장 뛰는 소린지, 아님 뭐 소화되는 소린지. 암튼 니한테서 소리가 너무 많이 들린다.”

듣고 있던 준수가 몸을 기울여 재유의 등에 귀를 댔다. 물론 닿지는 않았다. 재유가 뭐하냐고 물었지만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재유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이 얇은 티셔츠 너머로 심장 뛰는 소리가 아주 쉽게 들렸을 텐데. 문득 재유가 정말로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뭐하는데?”

“아냐, 아무것도.”

숙인 몸을 빳빳하게 세웠다.

재유가 준수에게 생일에 대해 물었다. 뭐 할 거냐고, 파티는 하느냐고, 갖고 싶은 건 없냐고. 준수는 집에서 가족들이랑 케이크나 자를 것 같다, 파티 같은 건 안 한다, 생일 선물… 평범하게 플레이스테이션이 갖고 싶다고 말했다.

“왜, 사주게?”

“뭐, 훔쳐라도 주까.”

“뭐?”

“농담이다. 나는 뭐 주려면 죄다 훔치는 수밖에 없네.”

“아무것도 안 해줘도 돼.”

“해주고 싶은데 못해주니까 참, 답답하다.”

“안 챙겨줘도 돼.”

챙겨주면 그게 정말로 재유의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아서, 준수는 조금 간절하게 말했다. 목소리를 들은 재유는 흠칫 얼굴을 굳혔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절대로 아무것도 챙겨주지 않겠다고.

 

 

거리에 캐롤이 울려 퍼졌다. 준수는 그 우렁찬 캐롤을 뚫고 매일 같이 재유를 만나러 갔다. 추워서 발가락에 약한 동상이 왔고, 집에 돌아와서는 찜질을 했다. 재유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준수에게 생일 선물로 노트북을 사줬다. 준수는 노트북으로 <사랑과 영혼>을 봤다. 이왕 재수한 거 미대 입시를 해서 도자기를 전공해 볼걸, 같은 실없는 상상을 했다. 재유와 도자기를 만들면 웃길 것 같았다.

생일 당일 아침에는 미역국을 먹었다. 소고기가 잔뜩 들어가 있었다. 너무 많이 먹지 않으려고 했다. 음식이 소화되는 소리를 재유가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거실 텔레비전에서는 일기 예보가 흘러나왔다. 평년보다 훨씬 높은 기온의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밥을 다 먹은 다음엔 평소와 같이 독서실 건물로 올라갔다. 텅텅텅 걸음이 울렸다. 문을 열자 컵라면으로 탑이 쌓여 있었다. 용케도 바람에 쓰러지지 않은 채였다.

“컵라면 어디서 났어?”

준수가 재유에게 물었다. 그러나 답이 없었다. 재유? 묵묵부답. 재유야. 조용했다. 준수는 컵라면 탑 앞까지 걸어가 고개를 두리번댔다.

“나 이런 장난 잘 못 받아치는데.”

생일 선물이 장난인 건 좀 그렇지 않냐? 입김을 허어어 뱉었다. 건물 아래에서 온갖 가게에서 틀어둔 캐롤이 섞여 들려 귓속이 어지러웠다. 재유 목소리 한번이면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될 텐데, 재유가 없었다.

재유가 없었다, 정말로.

준수는 옥상을 샅샅이 뒤졌다. 창고 안도 전부 들여다봤다. 하지만 재유는 정말 없었다. 이런 것도 예상을 하고 말고의 범위에 들어가나?

가장 위에 있던 컵라면 아래에는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준수는 종이를 펼쳐서 그 안에 있는 것을 읽다가 옥상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눈이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날씨가 춥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재유는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었으니까.

 

준수!

컵라면은 너네 방에 있던 고삼 애가 버리고 간 거다. 훔친 거 아냐.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그럴듯한 게 이거였다. 맘에 드나? 네가 맨날 먹던 신라면 아닌 건 좀 아쉽긴 하다.

대학은 붙을 기다. 느낌이 그래. 책상에 앉았을 때 봤는데 니 진짜 열심히 하더라. 내였음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생일 축하한다. 크리스마스도 잘 보내고. 아 이건 싫나?

새해 복도 많이 받아.

편지 잘 안 써봐서 어케 써야할지를 모르겠네… 종이는 총무가 쓰던 노트다. 이건 눈감아줄 수 있지?

만화책 마지막 권 내용 궁금하다고 했었지. 사실 별로 안 궁금한 표정이긴 했는데… 알려줄게. 걔네 월드컵 나갔다. 너도 대학 갈 거라고, 그러니까.

 

p.s. 내 생일은 오늘이다. 신기하지.

 

12월 23일

진재유 씀

 

 

준수는 편지를 접혔던 모양대로 고이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햇빛이 아주아주 밝았다. 재유 성씨가 진씨였구나…… 그런 거나 곱씹었다.

그렇게 재유는 스무 살인 채로 죽었다. 아마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경상도에 있는 대학에 합격한 준수는 혼란스러운 첫 학기를 보냈다. 어딜 가나 재유와 같은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엠티를 가서는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고 숙소를 이탈하는 애들을 단속하기나 했다. 그래서 준수는 애들 사이에서 경비원으로 불렸다.

귓속과 머릿속이 어지러운 한 학기를 다 보낸 뒤, 여름이 찾아왔다.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주변에 잔뜩이었다. 아스팔트 바닥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가끔 아지랑이 너머의 사람이 재유로 보이기도 했다. 준수는 그것이야 말로 환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재유는 아지랑이가 없는 계절에 나타났으니까.

자취방에서 준수는 창밖으로 내리쬐는 햇빛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눈이 멀 것 같은 기분에 눈을 감았다. 커튼을 치고 에어컨 설정 온도를 가장 낮게 내렸다. 앞으로 여름이 되면 종종 이런 짓을 반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계절이 모두 겨울이면 좋겠다고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준수는 잠들었다. 꿈을 꾸지 못하는 낮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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