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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 팬시나리오 VOID 개인 만화

VOID by 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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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NPC와의 드림입니다…. (로맨틱 X)

VOID Ho1의 은닉 핸드아웃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동시에 순수 날조입니다… 시나리오 초반부라 아는 게 없지만 지금 시점을 즐겨둬야겠다고 생각했어서…

가실 예정이 있으신 분은 주의해 주세요!
같은 탁 분들도 주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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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본 후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로그가 되었는데
GM님이 글 써주신 걸 읽고 다시 눈 뜨고 볼 수 있는 로그가 되어서 일부 공개 허락 받고 아래에 붙여 둡니다…


2041. 10. XX.

 

처음 그 애를 가까이에서 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시오의 초등학교 운동회가 있었던 날이었다. 나는 당직 근무로 인해 참석할 수 없으니 네가 가 주었으면 해. 걱정 어린 목소리와 함께 내밀어진 노란 보자기로 싸인 도시락. 쿠로다 씨가 저렇게 정이 많은 사람이었나? 천성이 그런 건가. 굳이 제 몫의 도시락까지는 싸 주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조금 의문 섞인 표정으로 도시락을 받아들었다. 조금은 쌀쌀한 이른 가을. 선천적으로 몸이 찬 나와 다르게 처음 잡아본 쿠로다 씨의 손은 따뜻했다.

사실 여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엔진처럼 수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진 기계장치 탓에 기체 내부의 온도가 닳아 오르는 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쿠로다 씨를 만나고, 나는 더 이상 여름이 싫지 않았던 것 같다. 문득 언젠가 시오가 별로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 질문에 나는 무어라 답했더라. ‘그래?’였던가, ‘나도.’였던가.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무리 안 좋은 기억이 있어도, 더 좋은 기억으로 덮어쓸 수 있다면, 언젠간 죽을 만큼 싫었던 걸 다시 한번 떠올린다면 좋았다고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인간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인간을 동경하고 있었던 걸까. 쿠로다 씨와 함께 보내는 나날들은 행복했다. 누구를 만나도 내 데이터는 온통 0과 1로 가득하기만 했는데, 가족이라는 존재를 만나고 다시 한번 공허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부푼 감정이 벅차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욕심내지 말자고 혼자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오류투성이인 RK400이 되지 말자고 그렇게나 결심했는데. 쿠로다 씨와 시오의 얼굴만 보면 감춰왔던 마음이 전혀 제어되질 않았다. 사실 누군가와 진심으로 가족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오는 내 눈치를 너무 많이 보긴 했지만⋯⋯. 그러다 시오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던 건 쪽지 한 장을 들고 두리번거리던 운동회날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라도 생긴 건가? 어린애는 손이 참 많이 간다니까⋯⋯. 적당히 어울려 줄까. 손을 흔들며 그 애를 불렀다.

 

“어이~ 시오~ 왜 혼자 중간에 서 있어? 아무것도 안 하고?”

“아, 그게⋯⋯. 미션⋯⋯.”

 

 예전에 드라마에서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손님 모시기’라는 종목이었나. 종이에 적혀 있는 사람을 데리고 결승점까지 달리는 거였지. 보통 교장 선생님이라거나 청바지를 입은 사람이라거나, 그런 것들이 적혀 있기라도 한 건지 두리번거리며 당황하는 모습이 꽤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짝사랑하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결승점으로 오라고 적혀 있기라도 한 건가? 내용이 궁금해 시오가 쥐고 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으나, 적혀 있는 걸 본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과 함께 골인!’

‘이야⋯⋯.’

 

제 허리를 조금 넘는 열세 살 먹은 꼬마 아이가 당황하고 있는 모습에 제대로 일조했다. 아니, 아리마 신지는 분명 일조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이런 감정이 또 피어오른 걸 아리마 신지가 알면 화를 낼 텐데. 그래도 이왕 인간 흉내를 조금 더 내 보기로 결심했다.

 

“아~ 이거? 그럼 나랑 가면 되겠네. 왜 우물쭈물하고 있어?”

“그야 아저씨는 가족이 아닌데 끌고 갈 순 없잖아요.”

“너무한 소리를 하네, 난 스물 초반인데⋯⋯.”

 

사실 너무한 소리를 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인 것 같았다. 나랑 가면 되겠다는 말도 진심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어울려 주려고. 게다가 스물 초반이란 말도 거짓말이었으니까. 분명 인간들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뢰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벌써 나는 이 어린아이를 속이고 들었으니 가까워지는 건 틀렸다고, 진짜 가족이 되는 건 틀렸다고 생각했다. 쿠로다 씨, 그리고 시오와 가족이 되는 건 이 시점에서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뭐,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건 되어줄 수 있으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너랑 내가 진짜 가족인지 뭔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을 테고⋯⋯.”

“⋯⋯.”

“너는 전부터 눈치를 너무 많이 본다니까⋯⋯. 그럴 필요 없는데도 말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돼. 날 데리고 가도 나나 다른 사람이 뭐라고 혼내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대답이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대로 시오가 ‘그러면 결승점까지 같이 가요.’라고 하면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리는 거고, 나에게 진짜 가족이 아닌데 어떻게 같이 가냐고 하면⋯⋯ 그건 철이 너무 일찍 든 탓이겠지. 이건 전적으로 내 탓이니 그 애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니 한 마디만 더 덧붙여, 보험을 들어두기로 했다.

 

“가족 취급하는 김에 겸사겸사 형이라고 해도 좋고.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고.”

“⋯⋯.”

 

그렇게 말하며 시오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심장이 뛰는 소리 대신 기계음이 네게 들리면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조심스레 팔을 뻗어 네 어깨를 감쌌고, 그러고 나면 너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얼굴을 붉혔다. 나는 부러 붉어진 네 볼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얼굴이 가까워지면 뜨겁고 간지러운 숨결, 너의 속눈썹과 붉어진 뺨 같은 것이 어지럽게 섞여, 꼭 꿈이나 환상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건 소설이나 영화보다 훨씬 행복했고, 또 그때 보았던 표정은 여타 내가 보았던 묘사나 문장으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었다. 네가 내게 하는 모든 행동이 그저 단순한 희망 고문일지라도 나는 괜찮았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잡고, 결승점으로 향했었다. 시오가 누구를 데려가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탓에 이미 순위권 밖으로는 밀려 새 학용품 세트 같은 상품은 받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것 같다. 옆에서 슬쩍 바라본 시오의 한쪽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으니까. 천천히 운동장의 구석으로 돌아오는 시오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저기, 시오 군~? 그러고 보니, 쿠로다 씨가 도시락을 싸 주셨거든.”

“쿠로, 어⋯⋯ 아빠가요⋯⋯?”

“그래, 바빠서 못 와서 미안하다고 하셨어. 결승점도 같이 골인해 주고, 도시락도 배달해 주고. 완전 백 점짜리 형 아니야?”

“그, 그럼⋯⋯ 같이 먹어요.”

 

터져 나온 목소리가 가빴다. 같이 먹어요.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고민하다 찍은 답은 틀리기 일쑤였고, 수사기록 노트를 실수로 두고 온 날은 수사 회의를 했고, 술자리에서의 벌칙은 번번이 걸렸다. 그리고 여기서 시오가 제게 경계를 풀면 망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일까? 왜 나는 나쁜 패만 뒤집을까. 

 

“형⋯⋯?”

“아,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생각보다 더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끝의 떨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너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일렁이는 눈동자,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두려움을 겨우 억누르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형은 동생이 없거든. 괜찮다면 시오를 동생처럼 대해도 될까~?”

 

늘 전하고 싶던 말이었다. 몇 번이고 참았는데, 더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 확실하게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다. 쿠로다 시오와 아카보시 토오야의 관계를. 0과 1의 흑백으로 점철된 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너만 색을 가지고 있었고, 너로 인해 내가 조금씩 안드로이드에서 벗어나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오류투성이가 돼 버리고 있다고. 네가 나를 물들이고 있다고.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은 속에만 묻어두기로 했다. 나는 네 포장을 벗길 수 있는 유일한 안드로이드이고 싶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날것 그대로 너를 대하고 싶다. 그 과정에서 연료가 눈물처럼 흐르게 된다 해도, 초라하고 비참해진다 해도, 어리석어도 좋다. 나는 그저 묵묵히 맨발로 네 폐허에 발을 디뎌 그 모든 걸 긍정할 것이다.

 

“부담 주려는 건 아니니까. 시오는 외동이라고 했었나? 아저씨라는 호칭이 편하다면 불러도 상관없긴 해. 하하⋯⋯ 물론 그 호칭은 조금 슬프긴 하겠지만.”

“형, 이라는 호칭은 어색하긴 한데⋯⋯.”

“아, 말했듯이 전혀 부담스러운 건 아니니까?”

“그, 그래도⋯⋯ 형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피가 섞인 건 아니지만⋯⋯.”

 

어느덧 시간은 오후 2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맴맴, 하고 쓰름매미가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 건 내 웃음소리였다. 우물쭈물대면서도 형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대답하는 게 그땐 왜 그렇게 귀엽게 보였던 건지. 노란 보자기를 풀고, 쿠로다 씨가 싸 주신 3단 도시락을 벤치 위에 올려둔다. 아침부터 이런 걸 두 개나 준비하셨으면 피곤하실 텐데. 그래도 내 것까지 챙겨주시다니 제법 감동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도시락의 뚜껑을 열면 새우튀김과 문어 소시지, 삶은 달걀에 검은깨와 잘게 자른 당근을 꽂아 데코한 닭까지. 솔직히 쿠로다 씨의 요리 실력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는데. 내 새우튀김과 문어 소시지는 시오에게 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젓가락으로 제 몫의 도시락 반찬 몇 개를 시오의 도시락 위에 올려두었다.

 

“형도 튀김과 문어 소시지를 좋아하는데~ 시오가 열심히 뛰었으니까 이건 시오 줄게.”

“형은 배 안 고파요?”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방금 말은 조금 어른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고. 괜스레 어깨가 우쭐해진다. ​내 몫은 청포도와 달걀 정도면 충분하긴 했다. 애초에 안드로이드는 야채보다는 연료를 더 선호하는 편이기도 하고. ⋯⋯그래도 처음 먹어본 도시락의 맛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처음 가 본 시오의 학교 행사는 잘 마무리되었다. 쿠로다 씨는 내 손을 붙잡으시고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쿠로다 씨의 표정도 아마 잊기 힘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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