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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Johann Wayfarer

Temporary by 커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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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선언 시점 전에 작성하던 거라… 그 시점으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은 그냥 스루해주셔도 됩니다.

나는 베아트리스 오필리아 에버화이트다.

그 이름 드높은, 명망 있는 순수 혈통 가문의 사랑받는 막내딸. 천박하게 겉으로 움직이지 않고, 뒤에서 고상하게 미소만 지으면 되는. 평생 새하얗게 순수함을 유지하고, 이 세상을 유지하는. 그 순백색의 비단 위에 그 어떠한 얼룩도 존재해서는 아니 되는. 그걸 위해서라면,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것도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불사를 용기를 지닌.

나는 베아트리스 에버화이트다.

언젠가 네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가 원하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어. 에버화이트일 수도 있고, 사랑스러운 트릭시일 수도 있지. 아니면 그냥 베아트리스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건 동시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의미 아닐까?”

그리고 이 모습이 그에 대한 대답이고, 내 선택이다.

언젠가 나는 네게 이렇게 말했다.

“…너 자신하고 싸우고 있는 것 같네. 싸우고 싶지 않은 너와, 그럼에도 싸움을 선택하는 너. 자신과의 싸움에서, 둘 다 잃지 않도록 조심해. …네가 누구인지 스스로를 잃어서 헤매지 않도록 말이야.”

그리고 정작 자신을 제 손으로 버린 건 나였다.


“…지금의 날, 나로 긍정해. …어서!!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지금 이 자리까지 아득바득 온 거니까.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내가 무엇을 포기하고 놓아버렸든…!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날, 베아트리스로 긍정하란 말이야!! 이 모습만이 나야. 이게 네가 알던 베아트리스랑 같다고!!!”

요한의 흥분이 옮기라도 한 것인지, 가라앉은 요한 대신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는 것은 그 앞에 선 베아트리스였다. 베아트리스는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눈 앞의 이를 노려보았다. 속에 들끓는 이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할 지는 모르겠으나, 그걸 어찌 가라앉혀야 할지 방도 역시 몰랐다. 아니면 그저 그 감정을 어떻게든 표출해고만 싶었다. 제 안을 가족이 주는 사랑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베아트리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로 한참을 헝클어트렸다. 그러다가, 툭. 팔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와 반대로 고개는 천장을 향해 들어 올린다. 다시 입을 열면,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그 행동으로 모든 기력을 소진하기라도 한 듯 작고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에버화이트가 살 수 있는 세상은 그 세상 뿐이야. 그 세상이 아니면, 난 돌아갈 곳이 없어. 이미 모든 걸 내려놨다고. 이미 내 세계는 없단 말이야. 모든 것을 놓고, 오로지 에버화이트만을 위해서 다 바쳤단 말이야.”

베아트리스가 이곳에 죽을 각오로 온 것은 당연했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하나만을 바라보며 도달한 길은 이제 뒤가 없는 막다른 길이었다. ‘순수 혈통 우월 주의’라는 사상이 낡게 되고 시대를 따라가지 못 한 것이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베아트리스 오필리아 에버화이트에서, ‘에버화이트’ 밖에 남지 않은 이는 살아남지 못 할 것이다. 새하얗고 순수한 흰 색을 자랑하는 비단이, 얼룩지는 것을. 가족들은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평생 이 비단이 옷이 되지 못 하고, 삭아버리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에버화이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베아트리스는 관심은 커녕, 믿지도 없던 축복의 땅을 노래하는 예언서에 목을 맬 수 밖에 없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천장을 향하던 베아트리스의 고개가 바로 되고, 요한에게 향한다. 어째선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모습이 보이자, 아무것도 없던 눈동자에 불안이 깃든다. 그렇게 네가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꼭 제가 없애버린 제 안 깊숙한 곳에 잠든 ‘베아트리스’를 위해 흘리는 것 같아서. 그것이 겹겹이 쌓아 올린 제 안, 깊숙하게 자리 잡은 마지막 한 점 남은 ‘베아트리스’를 깨울 것만 같아서. 그게 깨어나면, 지금까지 제가 연기하고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너한테 부탁하면, 꼭 그 날 현장에서 나를 도와준 것처럼 도와줄 것만 같아서…’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벌어지는 껍데기 안으로, 바람이 불어들어오는 것같다.

한겨울의 얼어붙은 호수 위로 부는 뺨을 시리게 에는, 머리카락을 전부 헤집을 듯 부는, 자유롭게 비행하면서 맞던 그 바람이 제 안을 채우는 것 같다.

“네 각오는 나에 비견될 수 없어. 넌 물러날 곳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요한. 물러날 곳이 있는 네가 돌아가.”

그러니, 베아트리스의 선택은 요한의 각오에 대한 폄하다.

“나는 이제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없어. 그것마저 그만두면 난 살아갈 이유가 없단 말이야…. 내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버리며 이곳에 왔는지… 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간 봐왔던 요한은 미련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으니까, 베아트리스의 선택은 동정심에 대한 호소다.

“내가 숨 쉴 곳을 앗아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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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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