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모음

빛롸/ 생일

TYYYYYYYYYYY by 칙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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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하.”

“어!”

영웅은 보통 신출귀몰하다. 어제까지는 이곳에 있었는가 하면, 오늘은 다른 곳에 있고, 내일은 또 다른 곳에 있다. ‘어딘가로 갈 거야’라는 말을 해주기도 하고, 올드 샬레이안에 오기 전 미리 이야기를 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말을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니까, 그라하 티아에게 미리 이야기를 전하지 않고 그가 갑작스레 올드 샬레이안에 찾아와 발데시온 분관에 얼굴을 비치는 일에 굳이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라하 티아는, 대회의실에서 서류를 뒤적거리던 중 갑작스레 문을 열고 태연하게 들어서는 그를 보고 놀랐다.

“오늘도 일?”

“으응… 아무래도 그렇지. 옴팔로스에 대해 조사할 게 아직 많이 남았거든.”

태연함을 가장하고 웃어 보이기는 했지만 기대감인지, 의아함일지 모를 두근거림과 기쁨이 솟아오른다. 이 몸의 나이는 20대에 불과하다지만 그라하 티아는 백 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이다. 오늘과 같은 날을 백 번 이상 겪었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어느 날엔가는 이젠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특별하지 않게 지낸 날이 더 많기도 했다. 그럼에도 터무니없는 기대감 같은 것이 제 속에 뭉글뭉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찌 되었건 눈앞의 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대단한 사람과 연인이라는 이름을 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저도 까먹고 있었던 오늘이라는 날을 아침부터 요란하게 들이닥친 발데시온 위원회 사람들이 요란스레 축하해준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이 기대감은 얼토당토않다. 저 스스로도 까먹고 있었던 만큼, 그에게는 말한 적이 없으니까. 쿠루루가 일부러 그에게 연락해 이야기를 전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니까, 영웅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오늘 같은 날은 이렇게 일하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런데도 왜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마치 다 알고 있다는 양!

“오늘이 왜….”

“생일 축하해.”

영웅은 다정한 사람이다.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이야기를 해 봤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면서 당황하고 미안해하면서 지금부터라도 벌충하려 하고도 남았다. 그러니까 언젠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이 지나간 날을 굳이 새삼스러워하지 않을 때에야, 생각이 나면 전해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는데, 그런 그라하 티아의 생각을 꾹 눌러놓기라도 하듯 그가 말을 끊고 먼저 말을 꺼냈다. ‘아’ 하고 입을 헤벌린 채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 어, 어떻게.”

“진짜 너무하다. 어떻게 생일도 안 알려줬을 수 있어? 나, 사귄 지 얼마 안 된 연인 생일에도 마물이나 잡으러 다니는 구제불능이 될 뻔했다고.”

“아. 그게. 그러니까.”

입꼬리를 한껏 늘어뜨리며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는 그가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 상황이 갑작스럽기도 했고, 놀라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지만 역시 기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의미 없이 손을 움직이면서도 말이 되지 못하는 목소리를 떠듬떠듬 흘리고 있으려니 곧 바르게 어깨를 올린 그가 흐흐,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정보원이 있어서 늦지 않게 그럭저럭 준비할 수 있었어. 자, 오늘 일은 여기까지야. 남은 시간은 통째로 나한테 줘야 하거든.”

“정보원…? 쿠루루가 알려준 거야?”

“음… 아니. 쿠루루는 방금 전에 ‘그라하를 꺼내가도 된다’는 허락만 해줬어.”

그가 아주 편안히, 오래도 웃었다. 그 웃음이 평소치고는 길어진다는 생각을 하고서 가볍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때였을까. 그가 가방을 뒤적거려서는 평소보다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꾸러미를 꺼냈다.

“일단, 나가기 전에 이걸 전해줄게.”

마찬가지로 조심스러운 손길로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받고 나서 든 감상은, 실례되기는 하지만 ‘이상하다’는 감각이었다. 그가 준비한 것치고는 포장이 꼼꼼했으며, 정갈했고,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으음. 역시 좀 실례되기는 하지. 하지만 그가 직접 포장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투박한 쪽을 생각하게 되니까. 어디서 산 걸까, 하고 생각하기에는 누군가가 직접 포장한 태가 나는데. 게다가 이건, 그라하 티아에게 어딘가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어.

……………….

직감에 가까웠다. 예감이라는 쪽이 맞기도 했다. 어쨌거나 어떤 근거를 보고서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라하 티아는, 수정공은 확신했다. 꾸러미를 내려다보고 있던 눈을 황급히 올려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는 마치 ‘알아볼 줄 알았지’라는 듯 웃었다.

“라이나한테 ‘전해 주세요’라면서 이 선물을 받았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 거라고 생각해?”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쿵, 하고 무언가에 얻어맞은 기분이 들어 그라하 티아는 시선을 내려 다시 꾸러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전에도 그전에도 받았지. 어린 라이나의 고집을 못 이겨 생일을 가르쳐준 후, 라이나는 키가 많이 크고 손끝이 여물면서는 꼭 제가 스스로 만들고 포장한 것을 수정공에게 선물하곤 했다. 수정공이 저에게 해주었듯, 크리스타리움 사람들과 케이크에 알록달록한 초를 장식해 다 함께 들고 와서는 생일 파티도 해주었다. 그 기억들이 물밀듯 떠올라, 그라하 티아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꾸러미를 조심스레 쓸어 보았다.

“나더러 지나기 전에 제1세계에 와서 다행이라면서, 이걸 전해 주는데 진짜진짜 놀랐거든. 만약에라도 그때 제1세계에서 낚았던 물고기 생각이 나서 가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

“더불어 나도 아무것도 준비 못 했을 뻔했지. 어휴, 진짜 다행이었다니까……….”

어쩐지 눈이 조금 촉촉해지는 기분이라 더, 웃어 보이면서 고개를 들었다. 영웅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그라하 티아의 얼굴을 다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양 킥킥 웃었다.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고 했어. 라이나뿐만 아니라 크리스타리움의 많은 사람들이.”

“아…….”

“이거 말고도 선물 많아서, 네 방에 놓아둬야 해. 들고 다니기에는 무겁거든.”

이제는 웃으려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아 그라하 티아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꾸러미를 바라보기를 택했다.

아주 소중한 인연이고, 아주 소중한 시간들이지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그 당시 저도 최선을 다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원망을 들어도 어쩔 수 없었던 작별이었다. 적어도 라이나만큼에게는 더 많은, 충분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더 많은 약속을 남기고 더 충분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숨조차 쉬기 어려웠던 그때, 제1세계에 남을 제 몸을 그들이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또 기억하고 있을 수정공의 모습으로 남겨두고 오기는 했으나 그것이 크리스타리움의 사람들에게 이별의 슬픔을 지우기에 충분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제1세계를 떠나 원초 세계로, 영웅의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라하 티아였다. 그러니까, 미안함이 더 크기도 했다. 특히나 라이나에게는 그랬다. 그랬기 때문에 영웅을 통해 편지는 보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편지만으로 전할 마음이 아니기도 했고, 이미 떠나버린 제가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이들의 마음을 재차 뒤엎어놓는 것이 더 못할 짓이라고 생각되어서.

그런데도.

그렇구나.

끝내, 그라하 티아는 웃었다. 그렇지. 끝내 원망이나 슬픔 따위에 잠식당할 사람들이 아니고, 그런 아이가 아니지. 서로를 추억하고, 걸어 나갈 미래를 축복하며 서로를 안위와 행복을 빌어 갈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지금 제가 그러하듯이.

입술을 깨물고 눈을 좁게 떴던 그라하 티아는 웃었다. 눈이 말갛게 빛나고 있을 것을 알지만, 그는 이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도 웃어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의 눈앞에서 그라하 티아가 더 무리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할 이유는 없었다. 꿀꺽, 목에 가득 찬 것을 삼켜 내리고서 그라하 티아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곧 있으면. ……라이나의 생일이야.”

목소리는 메어 있었으나 그라하 티아는, 수정공은 더 밝게 웃었다.

“그때…… 선물을 전해줄 수 있을까? 부탁할게.”

예상했던 것처럼, 눈을 마주친 영웅은 더 환하게 웃었다. 마치 눈이 부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럼. 물론이지. 얼마든지!”

그러고서는 그라하 티아의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자, 그래도 오늘은 말이지. 나한테 전부 줘야 해. 급하게 준비하기는 했어도 이것저것 많이 계획했거든. 알겠지?”

“아…… 그럼, 물론이지! 고……마워.”

“고맙기는.”

그가 웃으며 그라하 티아의 한쪽 손을 가져가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 체온을 느끼면서는,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아주 행복한 생일을 보냈다고. 나는 아주 행복하게, 매일매일을 만끽하며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고. 너에게도 매일매일 반짝이며 행복한 날이 가득하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잔뜩, 행복한 이야기를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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