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모음

멜냥멜/ 눈 오는 밤

TYYYYYYYYYYY by 칙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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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나겠지? 에스티니앙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곧 눈가를 삐죽거리며 이대로 있기로 했다.

'아이메리크 경이 그리다니아에서 하는 별빛 축제에서 선물을 나눠주고 있더라고.' 빛의 전사에게 그리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녀석이 그렇게 한가할 리가 없는데, 하고 생각했건만 역시나. 회의 때문에 간 그리다니아에서 없는 시간 쪼개어 그리 선물을 나누어주고 돌아다닌 데에는 '이렇게라도 축제를 즐기고 싶다'는 그 녀석의 욕심만이 작용했으리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는 셈인지 뭔지, 오늘도 역시나 눈이 내리는 중인 이슈가르드에서 모처럼 침실에 있다던 총장 나으리께서는 다 깊은 밤에도 침실에 딸린 작은 책상에 매달려 서류를 읽는 중이었다. 어차피 서류를 읽을 거라면 넉넉한 서재에라도 있을 것이지, 무슨 미련을 떠느라 침실까지 와서는 그 두툼한 보고서를 읽고 있는지.

'에스티니앙?'

'그래, 에스티니앙이다.'

별빛 축제 시즌엔 제가 이슈가르드로 돌아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녀석이. 어느 날은 그걸 신경 써 일부러 노력해 매일 집으로 돌아와 너를 기다리려 한다며 침대 속에서 참 듣기에 좋은 소리를 속살거리더니, 지금 보니 순 거짓부렁이었던 모양이다. '네가 어쩐 일로 여기에?'라는 듯한 멍청한 눈빛을 보니 말이다.

'바빠? 그러면 돌아가고.'

순간 에스티니앙이 토라진 것을 알아챘는지 뭔지, 허둥지둥 책상 앞에서 몸을 떼어낸 아이메리크가 달려와서는 에스티니앙의 손을 덥석 잡는다. 이후에 이어진 변명은 뻔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일에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놀라서 그랬다 등등. 사실이든 아니든 아이메리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요근래와 별다를 바 없는 뻔한 변명이었으나 살살 웃는 얼굴이며 제가 온 것이 반갑기 그지없다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는 듣기에 달지 않을 리 없었다. 여기까지 할게, 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향했던 몸을 돌리자 아이메리크는 곧 배시시 웃으며 에스티니앙의 몸을 천천히, 편안히 껴안았다.

'………이 일은 정말 오늘 해야 하는데.'

'진짜 가라는 거야?'

대뜸 가까워진 귓가에 눅눅해진 목소리로 내뱉는 말은 마음에 다시 가시를 세우고도 남는 내용이었지만. 등을 껴안으려던 팔을 멈추고서 떨떠름하게 묻자 에스티니앙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아이메리크는 그대로 살짝 도리도리, 고개를 돌려 보였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왜 하필 오늘이냐는 한탄이다.'

'나 말이야?'

'일 이야기다.'

후후, 웃으며 아이메리크가 고개를 들고는 쪽, 입을 맞췄다. 쪽, 쪽, 맞물리는 입술이 제법 무겁다. 이 정도 한탄도 못 알아듣진 않지. 날을 정해 둔 것은 아니었으나 에스티니앙이 찾아오던 시기는 보통 이보다 이르다. 아마 아이메리크가 무리해서라도 저택으로 돌아온 것도 며칠째일 것이다. 저택을 비우고 싶진 않고, 일은 많으니 슬슬 집에서도 본격적인 일을 하고 있었을 테지. 그러던 중에 하필 마감이 급한 날 에스티니앙이 돌아와 버린 것이다.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는 일이나 결국은 에스티니앙을 탓하기보다는 일 탓을 하는 아이메리크도, 한탄을 하면서도 품에서 에스티니앙을 놓지 못하는 아이메리크도 제법 사랑스러웠다. 여기서 끝끝내 에스티니앙을 품 안에서 놓아버릴 수 있는 남자였다면 이런 급한 일을 들고 저택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을 알고 있으니, 지각한 에스티니앙의 역할은 저를 오래간 기다려준 연인이 그간 쌓아놓은 고단함을 충분히 녹여주는 것뿐이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에스티니앙이 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일에 열심히 매달린 것치고 아이메리크는 외로움도 많이 쌓아놓았는지 에스티니앙에게 끈덕지게도 매달렸으니까. 단순히 몸만이 외로웠던 때만큼 거칠게 움직이면서도, 마음이 닳았던 때만큼 애절하게 달라붙기도 했다. 에스티니앙, 에스티니앙. 제 이름을 부르며 제게 안겨드는 아이메리크의 몸은 뜨거웠으나 이슈가르드의 찬 공기가 닿는 곳은 싸늘했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아이메리크가 저에게 매달리는 동안, 차가운 아이메리크의 등을 껴안으며 에스티니앙은 한동안 녀석에게 자주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이슈가르드가 추운 것 같으니까, 하고서. 그리고 아이메리크의 몸에서 식은 부분이 없도록 열심히도 그를 매만졌다.

에스티니앙이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서류를 내려다보던 아이메리크의 표정은 피곤함으로 허물어져 있었다. 그런 몸 상태로 몇 시간을 헐벗고 움직여댔으니 노곤함이 머리끝에서부터 쏟아지고도 남았다. 학, 학, 마지막으로 사정을 끝낸 아이메리크는 몸을 무너뜨리기 전에 허리부터 굽혔고, 제 무릎을 붙잡은 아이메리크의 손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음을 눈치챈 에스티니앙이 품을 벌리며 아이메리크의 등을 토닥토닥해주자 그제야 아이메리크는 제 체중을 온전히 쏟으며 에스티니앙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제 움직일 기운도 없는 연인을 쓰다듬으며 여기저기 입 맞춰 주는 것은 에스티니앙의 역할이었다. 제 팔에 아이메리크의 머리를 올려놓고,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까지 덮어주고 몸을 보듬으며 이슈가르드에 어울리지 않는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주었다. 가물가물, 눈꺼풀을 올릴 힘도 없는 아이메리크는 잠들기 전에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마저 봐야 해. 일을 해야….'

아까 제 위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는 머릿속에서 일 생각은 다 날아간 것 같더니. 그새 찾아온 모양이다. 하여튼, 이런 때만이라도 일은 좀 잊고 있으면 안 되나? 가뜩이나 요즘엔 더더욱 이 머리통에서 일 생각이 없을 때가 없는데.

'이따 깨워줄게.'

'…………그럼 한 시간만….'

'그래, 한 시간만.'

'아니, 30분…….'

'알았어.'

에스티니앙이 이불을 더 끌어 올리고, 더 따뜻하도록 저를 끌어안아 품어주자 아이메리크는 그제야 얼굴에서 인상을 지우고 편안히 눈꺼풀을 내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편안해진 얼굴에서 규칙적인 숨소리는 곧 흘러나왔다. 어렴풋한 달빛이며, 끄지 않은 책상 위의 조명 덕에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잠든 아이메리크는 참 몹시도 평화로웠다. 그 아이메리크를 품에 안고, 에스티니앙은 작게 미소했다.

그러니까,

그게 두 시간 전 일이다.

품 안의 아이메리크는 아직도 세상 모르고 자는 중이다. 내가 오지 않았으면 이 시간까지도 인상을 쓰고서 졸린 눈을 들어 올려 가며 서류를 보고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깨울 수가 있나. 게다가 깨우기에는 너무 귀여운 얼굴로 자고 있기도 하단 말이다. 이 녀석이 자는 얼굴이 얼마나 바보 같고 귀여운데. …뭐, 그리고, 꼭 오늘 다 해야 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겠지. 아이메리크 녀석의 대처 능력이 얼만데.

하지만, 그래도. 약속했는데도 뻔뻔하게 어겼으니, 내일 아침엔 잔뜩 혼나겠지? 에스티니앙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곧 눈가를 삐죽거리며 이대로 있기로 했다. 녀석을 더 재우고 싶다거나, 저택에 들어올 때 시종장이 염려하는 말을 했다거나, 빛의 전사가 '그때 아이메리크 경, 즐거워 보이던데'라는 말을 했다거나 같은 일을 모두 떠나서. 두 시간이나 뜬눈으로 아이메리크를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질리지 않은 에스티니앙이 그를 품 안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은 탓이다. 그래, 사실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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