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의신] 호(虎)언장담
그 호랑이는 말했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 이 글은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의 2차 창작 글입니다.
* 황호의신 BL 커플링 글이니 못 보시는 분은 뒤로 가기 눌러주세요.
* 날조와 캐붕 주의
* 오해하시는 분은 없겠지만, 호언장담의 호는 호랑이 호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굳게 믿어본 적이 없었다.
투철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도, 체스를 둘 때 상대의 수를 예상한 것이 맞을 거라고도, 더 나아가 자신의 마음이 이렇다고 확신하질 못했다.
믿음이 틀렸을 경우, 그 다음이 무척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그렇다면 너무 확신하지 말자고, 내 판단을 믿는 것을 신중함과 맞바꾸었다.
그래서 황지호가 했던 말 또한 쉽게 믿지 못했다.
"조의신,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다."
"뭐?"
"진짜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
이 말은 어느 여름날, 황지호가 고백해 오면서 했던 말이었다. 햇빛이 따갑게 뺨을 물들이는 여름날, 바람결에 흔들리는 푸른 나무들을 등지고, 나와 시선을 맞춘 그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달콤하게 다가왔다.
나를 좋아한다고, 그리고 자신과 사귀면 분명 행복해질 거라고. 언뜻 보면 오만하다고 느껴지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며 뱉을 수 있을까?
황지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정의하진 못했지만, 문뜩 그 자신감이 궁금했다. 당당하게 내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확신한 이유가 무엇일까? 반짝이는 그의 금안이 확신을 담은 듯 보여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믿지는 않지만, 손해 볼것은 없을 거라고.
그 순간, 나는 황지호와 시선을 마주 보았고 특이한 연애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행복해졌냐고?
잘모르겠다.
황지호와의 연애는 생각만큼 행복하고 즐겁지는 않았다. 그저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물론 그의 능력이 뛰어났기에 데이트의 물질적인 부분은 항상 풍족했지만, 마음이 그만큼 들떴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기대를 품고 그와 어울렸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기대조차 들지 않았다. 우린 그 많은 시간을 어울리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원하는게 있다는 듯이, 장난스런 눈빛을 보내오면 손을 잡고 싶다는 걸 눈치채고 잡아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이후에 즐겁다듯이 처웃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익숙함 속에서는 특별함을 느낄 수 없다.
지금의 결론은 그랬다.
황지호는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보이면서도, 내 일상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 먼 곳에 둘이서 놀러가자면서 항상 변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럴 때면, 그의 노력이 보이기에 나 또한 거절하지 않고 어울려줬다.
항상 마지막에 '오늘의 데이트도 즐거웠다.' 같은 말을 해서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만들었지만.
오늘, 하굣길의 황지호는 바다로 놀러가자는 얘기를 했다. 시원하고 깨끗한 동해 바다로 놀러가자고. 그가 만들어 온 오렌지 셔벗의 새콤하고 상큼한 맛이 입 안에 맴돌고 있었기에, 망설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볼에 시선을 그대로 둔 황지호가 오렌지 셔벗을 당일에 만들어 오겠다며 웃었다.
"이왕이면 서로 먹을 걸 준비해 오도록 하지."
'안 그래도 자꾸 얻어 먹어서 좀 미안했는데...'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약속 당일, 우리는 경주 양남면에 있는 주상절리를 보러갔다. 여름이기도 하고 당연하게 해수욕장에서 수영 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오묘한 색을 띄는 투명한 구슬같은 바다를 보고 주상절리도 보고, 전망대에 올라서 해당 광경을 내려다 보거나 전시되어 있는 풍경 사진을 관람했다. 무더운 여름이라 밖에 나가는 것보단 안에서 활동하는 걸 좋아했기에, 그가 이끄는 대로 군말없이 따라갔다.
황지호는 오히려 자주 내 걱정을 하며 귀찮게 따라 붙었기에, 강행군 같은 여행 계획은 애초에 성립될 일이 없었다. 주상절리를 따라 마련된 산책길을 걷자는 얘기에 밖으로 나온 지금도 내가 열사병에 쓰러질까 봐 걱정된다며 주위로 결계를 쳐 온도를 조절해줬다. 이런데 능력을 쓰는 게 걱정되지만, 덕분에 오랫동안 바깥에 나와있어도 힘들지 않았다. 산책길을 따라 도착한 읍천항에서 앉아있기 딱 좋은 정자가 나왔다. 황지호는 그쪽으로 먼저 가서 들고있던 아이스박스를 내려 놓았다. 나도 가서 적당한 곳에 앉자 기분 좋은지 늙은 호랑이가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처웃었다.
"조의신,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어차피 곧 열 거잖아?"
"하하하하, 네가 정녕 궁금하다면 알려 줄 수도 있다만?"
"...그냥 빨리 열어."
노친네가 뭐 대단한 거라도 준비해 왔나, 저러니까 열어서 뭐 이상한 게 튀어나올까봐 경계심이 들었다.
"어차피 오렌지 셔벗 아니야?"
어제 약속한 것이 있으니 내용물이야 당연히 셔벗일 것이다. 별 생각없이 말했는데, 노친네의 표정이 살짝 굳은 것 같았다.
"야, 왜 그래?"
"하하하하, 조의신 네 것부터 공개해 보거라."
분명 어딘가 안절부절해 보였는데 처웃는 걸 보니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조심스럽게 가지고 온 도시락 통을 열었다. 요리실력이 황지호와 비교했을 때 그닥이라 간편하고 실패 확률이 적은 샌드위치를 준비해 왔다. 모서리를 잘라낸 식빵에 구운 햄과 치즈, 계란 후라이를 올렸고 그 위에 양상추와 마트 드레싱을 뿌려 가져왔었다. 정성이 없나 싶어서 네트형 머스크 멜론도 잘라 넣었다.
그냥 먹으면 될 것이지 황지호는 처웃으며 평을 내렸다.
"하하하하, 꽤 노력하지 않았나? 기특하다, 조의신."
"특히 멜론의 초록색 부분이 저번보다 많아진 것 같군, 손질 실력이 늘었구나."
노친네는 분명 나랑 연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나?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노친네의 늙은이 짓은 변함이 없었다. 귀청 떨어질 것 같으니까 그만 웃었음 좋겠다.
"네 거나 공개해."
노친네도 나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처웃는 걸 멈추고, 순순히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보이는 하얀 아이스크림과 과일청, 과자가 들어있었다. 놀랍게도 오렌지 셔벗이 아니었다. 노친네가 약속을 잊어버린 건가.
들어있는 내용물을 하나하나 확인하는데, 노친네가 멋쩍게 웃었다.
"미안하다, 조의신."
"괜찮아."
지나가면서 했던 말이고, 약속이라기 보단 노친네 혼자 가져오겠다고 다짐했던 거 아닌가. 황지호는 괜찮다고 했는데도 신경쓰였는지, 과일청 중 오렌지 청을 잡아 하얀 아이스크림에 살짝 덜어 넣어 휘젓고는 과자를 위에 뿌려 내밀었다.
"황유호의 입맛으로 먹어보고 가져온 것이다. 셔벗만큼 괜찮은 맛일 거라 보장하지."
황유호가 만족할만한 맛이라니 당연히 맛있을 거 아닌가? 노친네의 장담이 아니라도 먹었을 것이다. 한 입 받아먹으니 확실히 잘 어울리긴 했다. 오렌지 청의 상큼하고 달달한 맛이 아이스크림과 어울려 시원했고 과자가 입 안에서 부서지며 식감도 좋았다.
"과일 청과 잘 어울리도록 우유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 왔다. 괜찮느냐?"
이번에도 역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대답을 대신 했다. 황지호는 곧바로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나게 처웃던 지난 날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오렌지 셔벗을 챙겨오지 못한 게 그리도 걸리는 일인 걸까?
내가 만들어 온 샌드위치를 먹을 때는 또 가공의 맛이 난다며 처웃어서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다. 근데, 그렇게 즐겁게 웃었으니 괜찮았던 거 아닐까?
그 후, 우리는 조금 더 바닷 바람을 쐬며 푸른 바다를 바라보다 떠날 준비를 했다.
에어 택시로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 줬을 때, 황지호가 계속 해왔던 말을 안 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오늘은 왜 그 말을 해주지 않는 건지, 떠나가려는 노친네의 모습이 답답하다 느껴졌다. 그래서 깨닫기도 전에 말이 나와 버렸다.
"오늘의 데이트도 즐거웠단 말, 왜 안 해?"
노친네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마주 봤다. 이렇게 바라 보고 있으니 전에 고백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물론 그때는 낮이었고, 지금은 황혼의 시간대였으니 푸르른 영화의 한 장면과는 달리 느껴졌지만. 노친네도 의기소침해 보였으니까. 노친네는 시선을 떨어뜨려 큰 잘못이라도 지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장담했는데 실망하게 만들었지 않나?"
"오렌지 셔벗 말이야?"
"그래, 실망하게 만들었으니 면목이 없군."
"그걸 이제야 알았냐?"
"...뭐?"
"네가 그렇게 호언장담 했을 때부터 항상 최고로 행복하단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고."
당연한 일 아닌가?
타인에 의해 항상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는 건 허구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힘들 거나 불행하다 느끼는 것이 그 타인에 의한 것이라면 몰라도 세상이나 남이 만들어낸 괴로움을 다른 누군가가 다 해결해 주는 것은 무리다. 그 누군가가 아무리 능력 넘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초능력자도 아니고 그걸 다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황지호는 여전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충격 받은 표정도 아니고 그냥 미안하단 표정. 저 호랑이가 멍청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도 이미 자기가 항상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자기가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한 말일 것이다.
"야."
"왜 그러지, 조의신?"
"네 행동이 전부 날 행복하게 만든 건 아니지만,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니까... 풀 죽지 말라고."
순간 노친네의 표정이 밝아진 듯했다.
"오늘의 데이트는 행복했다."
그렇게 말한 노친네가 손을 잡아왔다. 잡은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노친네가 그렇게 호언장담 했던 이유를.
황지호는 그렇게 장담하면서 자신이 진짜 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으면 했던 거 아닐까? 미래에 내가 행복할진 알 수 없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뱉으며 다짐했던 것이다.
내가 최고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그걸 위해 네게 매 순간 진심으로 대할 거라고.
잡은 손의 온기를 느끼며 하늘을 보니 까만 밤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하늘의 푸르름도 내리쬐는 햇빛의 따뜻함도 없었지만,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 많은 별들이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많이 알려진 영화의 한 대사, 반복되는 흔한 일상처럼 로맨스 하면 떠오르는 그 대사가 머릿속을 스쳤다.
'달이 참 예쁘네요 였던가?'
언제 풀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처웃는 호랑이가 옆에 있었다.
아, 일상이네 뭐니 하면서 흔한 일로 치부했지만, 그 일상 속에 녹아든 호랑이의 존재를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게 다 노친네가, 아니 황유호가 귀여워서다.
일상에서 비일상적인 일로 바뀌었을 때, 마음을 깨달은 게 이미 항상 행복하다는 비일상의 시작이었던 게 아닐까.
이제는 내가 호언장담을 할 때였다.
"나는 지금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야."
이미 잡고 있던 손을 꽉 잡으며 웃었다.
하, 잘 쓴 것 같지가 않네요.
뭔가 더 담고 싶었는데, 못 담은 것 같아요. 황의의 사랑이 이 정도일리가 없잖아요? ㅠ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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