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다왼

[구다지크] 용 앞에 서서

FGO 후지마루 리츠카(남)x지크프리트 전연령가 글

2020.04.27 포스타입 게재했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오를레앙에 관해 이야기하는 둘로 리퀘 받아서 작성


눈을 뜨자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아직도 몸이 떨렸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숨이 막혔다.

“꿈…….”

그렇다. 꿈이다. 일반적인 꿈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꿈은 꿈이라고 해야겠지.

닥터 로망의 설명에 따르면 마력 패스가 원활하게 연결된 마스터와 서번트는 그 통로를 통해 서로가 과거에 겪었던 경험이 흘러들어와 그 기억을 꿈으로 보는 일이 이따금 있다고 한다. 그건 혼자만의 힘으로는 서번트 하나조차 현계하게 만들 수 없는 반편이 마스터인 내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칼데아에서 공급하는 대량의 마력은 나를 통해 서번트에게 전달되므로, 어쨌든 나와 서번트 사이에는 통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가 서번트의 과거를 꿈으로 엿보는 일은 전혀 특이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지. 실제로 예전에도 몇몇 서번트의 꿈을 꾼 적도 있으니까 이제 와 새삼 놀라워할 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금 꾼 꿈은…….

“미안하다, 마스터. 내 탓에 괜한 것을 보게 했군.”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지크프리트가 퍽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땀에 젖은 이마를 쓸고 뺨을 감싸온다. 보기보다 서늘한 온도에 쿵쾅거리던 심장이 점점 진정되기 시작했다.

“아니……. 괜찮아.”

나는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굳어 있는 입매를 억지로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나 마음만큼 제대로 웃지 못했는지, 그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괜찮아. 그냥 꿈인걸.”

뺨을 감싼 손 위에 손을 얹으며 나는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그냥 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비단 지크프리트의 과거여서만은 아니다. 나 역시도 직접 겪은 적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따지자면 두 번이나.

“파프니르는 역시…… 무섭네. 하하.”

밝게 말하려 했지만 끝에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몸을 잠식한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지던 용의 포효가 아직도 아른거렸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지크프리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섭지.”

말과 함께 든든한 팔이 나를 끌어당긴다. 지크프리트의 넓은 품에 폭 안기자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매캐하고 아릿하게 들쩍지근한 향이 났다. 다른 의미로 마음을 술렁거리게 만드는 냄새다. 게다가 가슴팍의 마력노심이 빛나는 탓에 그의 몸 곳곳에 간밤에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너무 잘 보였다. 민망함에 몸을 꼼질대는 사이 그가 천천히 내 등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아, 정말. 애도 아니고 이런 걸로 무서워하기 싫은데. 꿈이고, 몇 번이나 이겼는데 뭐가 무섭다고. 나 바보 같지.”

“전혀. 널 그렇게 생각하는 일은 결코 없어.”

“그치만 지크프리트는 이제 하나도 안 무서워하잖아. 오를레앙에서도 그랬고.”

토닥거리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어색한 듯이 반문했다.

“그때,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온갖 저주에 몸이 먹혀 괴로운 가운데서도 파프니르와 대치해 그 무시무시한 거룡을 물러나게 하던 지크프리트는 몹시 당당해서, 조금도 두려움 따위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두 성인의 도움으로 저주를 풀고 다시 싸우던 때 역시도―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용과의 재전을 기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 역시도 두려움을 떨치고 힘을 내서 필사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고, 답하자 지크프리트는 소년처럼 순진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런가. 네게는 그렇게 보였군.”

“아니야?”

생전에는 불사의 몸도 가지지 않은 채 단신으로 용과 싸웠으니 두려울 수도 있지만, 지금은 영령이고, 불사의 몸도 있고, 게다가 한 번은 싸워 이긴 상대인데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는 나의 말에 용살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유감스럽지만, 마스터. 나는 그때도 두려웠다.”

그의 진지한 시선이 나를 곧게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전에도 꼭 이런 표정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크프리트는 늘, 두렵다는 말을 할 때면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깨닫자 어쩐지 묘한 기분이 되었다.

“말했지만, 나는 생전에 파프니르를 어떻게 이겼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저 필사적으로, 아주 작은 승리를 가까스로 주워낸 것에 불과해. 다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어. 게다가 내가 실수하면 네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두려웠어.”

“그랬어?”

“그래. ……실은 파프니르와의 재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부끄럽지만, 내게는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서웠다.”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뒤통수를 꾹 눌려 졸지에 잘 단련된 탄탄한 가슴팍에 얼굴을 문지르는 꼴이 되었다. ……아, 정말. 좀 전까지 무서워하고 있었던 게 어디 갔는지, 금방 딴 맘을 먹게 된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는 지크프리트한테 실례잖아. 나는 조심조심 얼굴을 떼어내었다. …아직도 뺨이 화끈거린다.

“전혀 몰랐어.”

“그랬다니 다행이군.”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대답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다행이라니,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는 언제나 자신의 약점이나 두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이렇게 전부 솔직하게 말해주는걸. 그런데 왜 내가 몰랐다는 게 다행이라는 걸까. 궁금해 하는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지크프리트가 조용히 부연했다.

“모두 내게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두려워한다는 걸 알면 전원의 사기가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특히…… 마스터, 네 걱정을 덜고 싶었다.”

“우.”

나는 할 말을 잃고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다시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왜 이렇게 멋있는 거야. 반칙이잖아.

“알고 있었어? 내가 무서워하고 있었던 거.”

나름대로 열심히 감추고 있었는데. 중얼거리자 지크프리트는 난처한 듯이 눈썹을 모으고 사과했다.

“미안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에. 진짜?”

되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버릇처럼 사과가 뒤따른다. 아니, 지크프리트가 사과할 일은 아닌데. 어쩐지 멋쩍다. 그렇게 애썼는데도 남들이 보기에는 겁먹고 있다는 게 다 보였다니. 아무래도 난 지크프리트같은 인격자가 아니라 그런지, 역시 무서워하는 걸 전부 들켰다고 생각하자 좀 부끄러워졌다. 나름대로 필사적인 허세였는데. 그렇게 말하자 지크프리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속삭였다.

“하지만 그렇게 두려워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너였기 때문에, 다들 돕고 싶다고 여겼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어. 그런 너였기에 다시 만나고 싶다고 바라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네게 소환된 지금, 정의의 편이 되고 싶다는 새로운 소원 역시 떠올릴 수 있었어.”

고맙다. 진지하게 감사를 표하며 지크프리트는 정말로 기쁜 듯이 웃어 보였다. 얼굴이 뜨거워진다. 나는 쑥스러움을 무마하려 괜히 지크프리트의 품에 파고들며 대답했다.

“으, 저기, 나야말로…… 늘 고마워.”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꿈질거리자 지크프리트는 아이를 달래듯 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소리조차 내지 않는 가벼운 입맞춤이 이상할 정도로 간지러웠다. 어느새 공포는 전부 가셔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도로 잠에 빠져들었다. 꿈 하나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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