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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젠, 이유를 말해보라고

커미션 10000자 / BL 2차

커미션 by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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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쇼파에 한쪽 팔을 굽혀 머리를 기대고 몸을 길게 누운 히라코는 팔락거리던 잡지도 내려 놓은 채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이젠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싱크대가 낮아서 한껏 허리를 숙이고 꼼지락거리며 그릇을 닦고 있는 모습을.

 저놈은 말이지.. 참 알 수가 없는 놈이라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생각에 변화는 없다. 달그락거리며 쌓여가는 물에 젖은 그릇들이 산더미같다. 처음에는 서툴러서 그릇을 곧잘 깨먹고는 했는데, 이제는 제법 능숙해져서 싹싹 잘도 닦아 놓는다.

 몇 번이나 미끄러져 손에 쥔 유리를 깨트리는것을 보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이런 거 자주 안 해봐서 그런다고, 열심히 하면 늘 거라고 말하는 모습이 참 안 그렇게 보이면서도 은근히 고집도 있고. 집안일에 익숙해져서 뭐에 쓴다고.. 하고 생각하다가도 뭐 귀찮은 거 다 해준다는데 말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말이지. 여기서 저러고 살 놈이 아닌데 뭐하러 저러고 있을까. 그는 머리도 좋고 일도 잘한다. 그건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었다. 어디 가서 처음하는 일을 해도 곧잘 할 놈이었다. 현세에 익숙해질 수 있는 척도를 따져보면 그가 제일 유리했다. 취업도 손쉽게 할 수 있을 테고, 돈을 벌면 멀쩡한 집을 하나 얻을 수도 있겠지. 굳이 이 폐공장에서 득실득실 모여있는 대장급들 사이에 몸을 비벼대며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참 희한하다는 말이지. 왜 굳이 여기에 있는 걸까? 본인에게 누명을 씌워서 내쫓아낸 우라하라에게 원한이 있어서? 아니면 다시 소울 소사이어티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이유가 뭐지.

 저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옆에 앉아있던 로쥬로는 제가 손을 놓고 있는 잡지를 슥 가져가면서 한 마디 했다.


 “쳐다만 보지 말고 직접 도와주는 건 어때?”

 “잡지 내놔라잉.”

 “어차피 보지도 않잖아?”

 “내놓으라니께.. 으악..!”


 그를 잡기 위해 팔을 뻗었다. 순간 몸이 휘청거리면서 흔들거리다가 앞으로 확 넘어지고 말았다. 데굴데굴 굴러서 폐공장 끄트머리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멈춘 제 몸을 보고 잡지를 가져간 이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로쥬로는 순보를 이용해 저 멀리 떨어진 다음, 의자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순식간에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누운 저는 끄으으.. 하는 소리를 내며 코를 가렸다. 아이고 아파라. 이러다가 죽겠네, 아주 그냥.. 인상을 찡그리면서 컥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가슴이 바닥에 처박힌 탓이었다. 턱과 입도 너무 아팠다. 설상가상 콧속까지 뜨끈해지고 있었다.

 쾅 하는 소리에 설거지를 하던 이가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바닥에 엎어져 있는 저를 보면서 대장님?! 하고 큰 소리를 내더니 냉큼 가까이 달려온다.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차마 저를 만지지는 못하고 안절부절하면서 괜찮으시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제법 다급하다.


 “안 다치셨어요? 괜찮으세요?”

 “어어.. 가서 느 할 일 해라..”


 내는 괜찮응께. 얼굴을 가렸던 손을 떼어내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곧 뜨뜻한 액체가 콧속에서 주르륵 흘러 내렸다.


 “코, 코피 나시잖아요!”

 “으잉..”


 그는 허겁지겁 앞치마에 손을 닦은 다음 제 코를 아주 약하게 쥐었다. 저는 엄살을 피웠다.


 “아야, 아프당께..”

 “아, 죄송합니다.. 그.. 어.. 휴지가..”

 안 그래도 힘 없이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더 풀어낸 이는 일단 본인의 손바닥으로 제 코피를 받아냈다. 그리고 다급하게 휴지를 찾아 제 코에 조심스럽게 끼워주었다. 세심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저는 엄살을 부렸고, 그럴 때마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아프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멀리서 상황을 보던 리사는 다 엄살잉께 너무 신경 쓰지 마라. 하고 툭 말을 뱉었다. 제 앞에 있는 이는 웃으면서도 조심스럽게 다루는 손길을 멈추지 못했다. 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리사를 바라보다가 다시 저를 본 이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움찔거리며 놀랐다.
다시 설거지를 시작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콧구멍에 들어온 휴지가 젖어들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그런 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까 시선이 마주했을 때 움찔거리던 몸과 지금도 붉어져 있는 저 귀. 저걸 뭐라고 해석하면 좋을까.

 눈치가 없지는 않다. 다만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가 본인의 마음이 이렇다 저렇다 말한 적이 없으니 섣부르게 이렇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런 건가? 혹시? 하는 생각만 하는 거지.

 머리를 벅벅 긁던 손을 내리고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어떤 방식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게 제 곁에 남아있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라하라도 직접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당신을 신경 쓰지 않는 대장에게 헌신적인 이유가 뭐죠? 하고. 약간 인상을 쓰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달빛이 유독 밝은 밤이었고 그의 얼굴이 밤하늘 아래서 참 잘 보이는 날이었다. 주변의 나무들이 바람과 함께 웅성거렸다.

 얼굴이 답답하게 가면으로 가려진 제 앞에 후다닥 달려와 멈춰선 것은 다름 아닌 아이젠이었다. 니가 여기를 어떻게 왔냐는 제 물음은 콜록거리는 기침에 허리가 잘리고 말았다. 헐떡거리고 숨을 뱉어내면서 앞에 있는 다른 부대 대장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은.. 이거 듬직하다고 해야 할지, 건방지다고 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참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지.

 제 부대장은 떨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십시오, 우라하라 대장님.’

 ‘저는 당신이 참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죠.’

 ‘.....’

 ‘자신을 한 번도 믿어주지 않은 대장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말투. 본인의 머리로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답답하다는 말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분인데. 그는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가 오른쪽으로 기울였다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남자. 아마 아이젠을 향한 그의 관심은 지금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계속되고 있겠지. 저를 끝까지 보살피는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를 못한 모양이었으니까.

 말을 하고 싶었으나, 너 이새끼 죽여버리겠다고 화를 내고 싶었으나 기침 때문에 쉽지 않았다. 기어코 흰 액체가 입에서 흘러 나와 얼굴을 전부 뒤덮은 다음은 기억이 없다. 답답하고 힘들었으며 눈을 다시 떴을 때 가장 처음 본 건 피곤해보이는 아이젠의 모습이었다는 것. 소스케, 하고 이름을 부르자 황급히 저를 쳐다보는 눈동자에 약간 눈물이 고였다는 것 정도..

 우라하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저는 아이젠을 믿지 않았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대로 된 놈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언젠가는 사고를 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하고 가까이 다가오려는 것도 밀어냈다. 눈에 보이도록.

 다른 사신들도 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부관인데 가까이는 못 지내더라도 믿어주는 것이 도리라는 켄세이의 말을 들으면서 한 귀로 흘렸던 기억. 아이젠은 늘 한 걸음 뒤에서 저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짐작도 되지 않는다.


 저를 믿고 따르는 이유도 알 수 없다. 이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예전이야 대장이니 부대장이니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믿는 척이라도 해야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를 영영 모르는 척 해도 괜찮고, 마음에 담아둔 말을 전부 쏟아낸 다음 눈 앞에서 사라져도 원망할 사신은 없었다.

 그가 우리의 곁에 남아 있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다들 놀랐다. 일단 호로화가 진행된 사신을 살려 놓았다는 사실도 놀라운데(사실 죽거나 말거나, 우리가 호로 취급을 받아 살해를 당한다고 해도 본인은 알 바 아니니까..) 거기다가 온갖 집안일까지 도맡아한다니.

 우리 식구들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 꼭 아이젠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면서 우리를 따라 온 동료이기도 했다. 제가 무슨 말 한 마디만 하려고 하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는데 뭐, 잔소리는 고사하고 좋지 않은 말을 했다가는 사루가키의 발차기를 얻어 맞아야 하는 수준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솔직히 그럴만 했다. 우리가 다 누워서 끙끙거리고 있을 때 우리를 살려낼 준비를 끝낸 것은 그였고, 우리가 멀쩡해질 때까지 케어를 한 것도 그였다. 다들 그를 부둥부둥 하는 것도 이해됐다. 처음부터 모든 일은 본인이 하겠다고 하는 거 뜯어 말리다가 저 똥고집 어떻게 되지를 않아서 그럼 돌아가면서 하자는 약속을 얻어내고 나서야 저를 노려보는 시선들은 잠잠해졌다.

 ..아니 왜?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고 뒤늦게 억울해했지만 듣는 사신은 없었다. 에휴.. 하고 한숨을 푹 내쉬는데 그는 저를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볼을 긁적거리면서 한참 망설이다가 하는 말이 계속 대장님이라고 불러도 되냐는 물음이다.

 허.. 참나.. 하고 헛웃음을 치다가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본인이 무언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단단하고 말간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참.. 잘생기기는 했네. 하고 생각했다. 우습게도 그렇게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한 건 현세에 와서부터였다.

 마음대로 혀라.. 하고 중얼거리자 밝게 미소를 짓던 그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니, 뭐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이렇게도 웃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팽 하고 코를 풀었다. 피에 젖은 휴지가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마침 설거지를 끝내고 앞치마를 벗다가 저를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저 두 눈. 저기에 제가 어떻게 담기는지 궁금하지만 알아볼 자신은 없다.

 아니, 알아본다고 해도 그게 제 곁에 남아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모를 일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휴, 머리 복잡해. 저는 가볍게 뛰어서 바닥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아이젠만이 제게 물었다.


 “대장님! 어디 가세요!”

 “산책.”

 “저도 같이..”

 “그냥 있어라잉.”


 손을 휘적거려 나오려는 이를 멈추게 했다. 뚜벅뚜벅 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망설이던 이는 다녀오시라는 말을 건넸다. 저는 오냐. 하고 대답하면서 앞으로 걸었다.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고 입에 물다가 문득 그의 잔소리가 떠올랐다.

 대장님, 몸에 안 좋은 건 끊으셔야죠. 안 그래도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렸는데.. 어쩌고 저쩌고. 말이 길어지는 것을 끊어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흰 연기가 훅 하고 입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니까 영 모르겠다는 말이다. 제 곁에 여지껏 남아있는 이유를. 그걸 알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뭘까. 직접 물어보기? 곰곰이 생각했다. 물어보면 솔직하게 답하기는 하겠지. 대장이 물어보는 거니까 똑바로 말하라고 하면 망설이다가도 진심을 털어놓을 것이다.

 히라코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약간 숨을 들이 마셨다가 훅 뱉어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대장이 아니고, 그도 이제 부대장이 아니다. 무슨 대장 타령.. 킁 하고 숨을 뱉었다. 코에서 흰 연기가 스믈스믈 흘러 나왔다.

 대장이 어쩌고 하지 않으면 솔직하지 않을 텐데. 그 부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부끄러워서 거짓말을 할 것이다. 아니면 정말 숨기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거나. 그리고 그걸 티내지 않으려고 하겠지. 그는 알고 있을까. 본인이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더 알아보기가 쉬워진다는 사실을.

 어쩌면 숨기는 티를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아달라고. 그런데 왜? 숨기는 걸 알면 더 캐물어줄까봐? 참 모르겠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녀석이라는 말이지.

 담배필터를 질겅질겅 씹었다. 쓴 물이 쭉쭉 빠져나와 혓바닥 위로 번졌다. 우웩, 맛없어. 퉤퉤거리다가 다시 숨을 들이 마시고 연기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영 모르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오랜만에 떠올린 우라하라의 얼굴과 그 목소리, 어째서 당신을 믿어주지 않는 대장에게 이렇게까지 희생을 하냐고 묻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도 맴돌았다.

 그놈에게 뭐라고 해줘야 했을까. 아니, 당시의 제 부대장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을까. 저도 궁금했다.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나서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담배가 절반 이상 타들어갔다. 가만히 나무에 등을 기대고 손가락을 튕겨 재를 떨어트렸다.

 그 순간 기침이 쉼없이 나왔다. 그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하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뜨거워졌다. 혀 아래가 아려오고 속이 울렁거렸다. 울컥 쏟아낸 호로의 흔적은 뜨겁고 미끈거렸다.

 타액이 줄줄 흐르는 것을 닦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이마를 쳐 박았다. 저를 부르는 아이젠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일단 거기까지는 기억이 있었다. 짧게 다듬어진 손톱으로 가슴을 긁어내리면서 이를 악 물었다. 빠드득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물었던가.

 곧 툭 끊어진 정신과 제 앞에 나타난 허여멀건 호로는 물었다. 믿음이 배신당한 기분은 어떠냐고.

 흥, 헛소리를. 저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믿는다. 제가 진심으로 우라하라를 믿었다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대처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건 그 뿐이었다. 그를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는 것. 제 부대장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사실 지금도 그가 의심스럽다는 것. 전과 같은 이유는 아니다. 예전에는 무슨 일을 벌일까봐 의심했다면 지금은 왜 제 곁에 붙어 있는 것인지 의심이 된다고나 할까.

 그거나 그거나.. 어쨌거나 저는 그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 마음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언젠가가 대체 언제 오려나. 여러 번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어쨌거나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이렇게 밀어내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도 감정을 느끼는 사신이다. 외로워할 것이고, 괴로워할 것이고, 힘들어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루 하루를 흘려 보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손가락을 세게 쳐 불씨를 튕겼다. 툭 떨어진 불덩이를 발로 밟고 꽁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어쩐지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미치겠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주머니에는 술 몇 병과 간단한 과자 안주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만 남아 있었다.


 여러가지를 사서 폐공장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잔소리가 두려워져서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뭐라고 하겠지. 돈이 얼마 없어서 많은 안주와 술을 사온 게 아니라서 빼앗긴다면 취하지도 못하고 혀만 적신 다음 끝낼 것이다.

 치사하지만 지붕 위로 올라가자. 그럼 아무도 못 보겠지. 슬그머니 바닥을 차고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그가 입혀준 의해는 효과적으로 영압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현세에 숨어서 지낼 수 있던 것이었다.

 이 의해를 입은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저는 작게 키득거리며 폐공장 지붕 위에 발을 딛었다. 약간 기울어진 곳에 서는 바람에 순간 미끄러질 뻔 했지만 그래도 잘 착지를 해서 앉았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하.. 넘어져서 그대로 술 다 깨질 뻔했네.

 비닐봉투 안에 들어있는 과자를 까고, 술을 깠다. 까드득 까드득 소리를 내다가 이내 열리는 소주를 잔에 따르지도 않고 곧장 입으로 가져다 댔다. 잔까지 사올 돈은 없었다. 종이컵 같은 거 써봐야 쓰레기만 늘어나는 건데. 기왕이면 안 쓰는 게 좋지. 물론 공장 안에는 소주잔이 있었지만 그걸 들고 나가다가 들키면 술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 것이다.


 어느새 하늘에는 어둠이 짙게 깔리고 저와 동료들이 희생되던 그 날처럼 둥글고 큰 달이 하늘 위에 떠 있었다.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달 하나만 하늘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처럼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거의 해처럼 빛을 내고 있는 달을 보고 있으니 그날이 자꾸만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믿을 것을.. 아니, 믿지 않아서 다행인 건가. 도저히 알 수가 없군. 이마를 긁적거리다가 과자를 집어 먹었다. 씁쓸한 입안에 고소한 과자향이 퍼졌다. 단 걸로 안 사오기를 잘했다. 그랬으면 먹다가 뱉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에 복잡해져서 정신없이 마시다 보니 배가 불렀다. 약간 숨을 돌려야겠다.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 하고 연기를 마셨다가 뱉을 때마다 눈앞이 조금씩 어지러웠다. 시야가 빙빙 돈다고 하기 보다는 물건이.. 두 개로 보이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너무 급하게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천천리 마셨어야 했는데. 젠장할.. 담배를 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긁어 위로 올렸다. 이마가 훤하게 드러났다가 앞머리가 투둑 하고 떨어졌다.

 머릿속은 맑아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술이 약해진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 어지러움은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다. 저는 지붕에 벌러덩 누워서 손가락으로 툭툭 재를 턴 다음 다시 입에 물었다. 숨을 약간 들이 마셨다가 푸우.. 하는 소리를 내면서 길게 뱉어내고. 다시 반복하면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씩 담배 연기가 희뿌옇게 들어차는 머릿속으로 기어 들어오는 생각. 아이젠 소스케. 그놈이 끝없이, 지겹도록, 자꾸만 제 생각 속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대놓고 생각해보자. 마치 오늘 하루종일 생각했던 그에 관한 것들은 다 없었던 것처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 곁에 있는 것인지 저는 정말로 짐작가는 게 없었다. 아, 솔직해지자. 하나 있었다. 있는데, 그게 도대체나 가능한 일인가. 저는 그 부분을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 놈이 저를 약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치자.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가. 그런 건 어차피 다 한때의 감정 아니었나..?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를 약간 다른 눈빛으로 보는 건 사실이다. 부정할 수 없다. 그건 소울 소사이어티에 있을 때부터 그랬다. 가끔 뒤통수가 따끔거릴 정도로 쳐다볼 때도 저는 모르는 척을 했다.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똑똑한 사신이다. 굳이 사랑 같은 것에 인생을 던지지 않아도 될 만큼. 아니, 그런 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만큼. 머리가 좋은 사신들은 하나에 돌면 이런 식으로까지 구나?

 저였다면 아주 정이 다 털렸을 것이다. 잘못 걸려서 내 인생이 망했다고 소리를 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하다못해 입을 꾹 다물고 돌아서는 일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니. 아직도 그런 이름으로 제 곁에 남아 있다니. 나참..


 “아.”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양반은 못 되겠구만. 방금 전까지 제 머릿속을 바쁘게 걸어다니면서 뽈뽈거리던 녀석이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아이젠은 헐떡거리고 있었다. 눈을 아주 크게 뜬 채. 이마에는 약간 땀도 흐르고 있었다. 저는 느긋하게 쳐다봤다가 그의 행색에 약간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기를 한참. 그는 아무런 말도 없다가 제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저는 담배를 튕겨 지붕 밖으로 버리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볼을 긁적거리면서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아, 이거 잔소리 들을 각인데.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적당한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술을 마시고 있었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나.. 그냥 몰래 술 마셨다고 하는 거지.

 그는 걱정이 많았다. 특히 제 몸에 대한 걱정이었다. 호로화는 어찌저찌 안정 시켰지만 아직 건강하려면 술도 자제해야 하고 담배도 자제해야 하고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잔소리가 아주 길었다. 그러니까 전에도 심했는데 최근에는 아주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길어져서.. 어휴.

 그런데 지금 술 마시면서 담배 피우는 것을 들켰다. 이제 귀청 따가워지게 혼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도 내가 상사인데.. 예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웅얼거리고 있으니 다가온 그가 손을 뻗어 제 볼을 감쌌다. 그리고 달싹이는 입술 사이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괜찮으세요?”

 “..으잉?”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어.. 어. 그렇지, 뭘.. 하고 웅얼웅얼 대답을 하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안도의 한숨일 것이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다가 손을 어색하게 떼어냈다. 제 얼굴을 만졌다는 사실에 본인도 당황스러웠는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그 모습이 또 웃겼다. 뭐여, 손 좀 댔다고 놀라기는.

 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거리가 제법 가까웠다. 아까 코피를 닦아줄 때보다 훨씬 가깝기도 하고, 어물쩡거리다가 얼굴도 만지고, 저를 샅샅이 훑어봤기 때문에 그는 아무래도 많이 민망한 모양이었다. 흠. 저는 슬그머니 멀어지려는 그의 얼굴을 턱 잡았다.

 턱과 볼을 움켜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자 어색하게 뒤로 물러난 몸에 비해 고개는 제 앉은 키와 비슷하게 숙이고 있었다. 애앙잉.. 하고 말하는 걸 보니 아마 대장님 하고 저를 부르는 모양인데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놈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 이상한 놈.  이해할 수 없는 놈. 아무리 봐도 사랑 같은 것에 목숨을 걸지는 않을 것처럼 생겼는데. 반듯하고 반질반질한 게 본인을 좋아하는 사신을 찾으려면 쉽게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왜 저한테 매달릴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그의 귀가 점점 빨개지기 시작했다. 시선을 마주치고 있다가 곧 눈동자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제법.. 귀엽기도 하고.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긴 얼굴이었다. 괜히 나 좋아한다고 하면 어 진짜? 하고 돌아보게 되는 얼굴.

 손을 떼어줬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물러나려고 하는 모습. 얼른 손을 뻗어서 그의 팔을 잡았다. 끝내 제 입술 사이에서는 오늘 하루종일 궁금해하던 그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니는 왜 내 옆에 있나.”

 “..네?”

 “내가 밉지도 않나.”


 그렇지 않은가. 저 아니었으면 지금쯤 비어있는 제 자리를 그가 차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더 편안한 삶을 살았겠지. 대장이라는 자리가 어울리는 사신이다. 부대장으로만 머물기에는 아깝기는 했다. 아마 제가 의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제 곁에 두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저와 같은 자리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제게 의심을 사서 대장 자리는커녕 소울 소사이어티에서 쫓겨난 몸이 되고 말았다. 앞길이 참 밝은 사신이었는데 이제는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안쓰러우면서도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런데 참 희한하게 제 옆에 붙어 있는 걸 보면 이상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고. 안타까운데.. 안타깝지 않다는 이 느낌.

 저는 알아야 했다.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팔이 잡힌 이는 어.. 하고 말을 더듬었다. 무려 말을 더듬었다. 아이젠 소스케가. 이미 거기서 약간 당황한 상태였다. 딸꾹질 한 번에 술기운이 와라락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어물어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야.. 저는 부대장이고, 대장님은..”

 “그런 거 말고.”

 “.....”

 “내를 도운 이유가 뭐냐고.”


 그냥 두면 죽었을 것이다. 이건 아마도.. 하는 추측이 아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제대로 숨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라하라의 눈을 피할 수 없었겠지. 그가 지금까지 우리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지 않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상대가 아이젠이기 때문에 그 우라하라 키스케도 애를 먹고 있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일 우리끼리 숨으려고 했다면, 차마 호로화를 진정시키는 법을 알기도 전에 들켰겠지. 순식간에 목숨이 날아갔을 것이다.

 제게 잡힌 이는 여전히 어물쩡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대답을 들을 생각이었다. 놔줄 마음은 없었다. 어디 한 번 말해봐라, 말 안 하면 할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라는 표정으로 턱을 약간 들었다. 그는 아무래도 제 뜻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저는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가 가까이 다가가면서 눈을 마주쳤다. 얼굴을 들이대자 깜짝 놀라서 움찔 떤 그는 슬쩍 뒤로 빠지려다가 실패했다. 제게 붙잡힌 탓도 있었고 하필 앉은 자리가 지붕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기 딱 좋은 장소였다.

 물론 죽지는 않겠지만 한동안 아파서 끙끙거리기는 하겠지. 그가 아프면 화살은 제게로 돌아올 것이다. 또 무슨 짓을 했길래 애가 아프냐며 저를 쥐잡듯 잡겠지. 그리고 그 사실은 제게 붙잡혀 있는 이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고민을 하는 척하는 눈치였다. 답은 나와 있는데 이걸 말해도 되는지 아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거야.. 제가 방법을 아니까요.”

 “아니.”

 “네?”

 “진짜 이유.”


 말해봐라. 시선을 맞췄다. 숨결이 서로 얽힐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귀만 점점 붉어지고 있던 그의 얼굴이 어느새 빨간색으로 변해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마르는 아랫입술을 핥는 속도는 빨라졌다.

 어.. 어.. 하고 말을 더듬거리다가 생각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눈동자를 피했다가.. 안절부절 못하는 게 보였다. 누가 봤으면 아마도 음, 이런 상황이라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어나서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더 당황해서 다들 어디 가시냐고 어버버거리겠지.


 환한 달빛이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참 곱게도 생긴 얼굴이었다. 잘생겼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려나? 하나를 고를 수가 없었다. 둘 다 그를 칭하는 것 같았다.

 곱고 잘생긴 얼굴이 붉어져서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데 픽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는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그 답지 않게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느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왜 그런 것은 갑자기 물어보는지, 지금 이 순간에 그게 중요한지.. 복잡한 표정은 열심히 변하다가 이내 단단해졌다.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드디어 말해주려나. 그런데 저는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던가. 아, 맞다 그 생각을 안했다. 일단 말하라고 닦달하면서 제가 준비됐는지는 전혀 떠올려보지 않았다! 그가 만약, 정말로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하면 저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만약 그렇게 대답을 한다면 저는 그에게 고백을 강요한 꼴이 되어 버린다.

 아, 정말 어떡하지. 말하지 말라고 할까? 됐다고 할까? 내가 취해서 물어본 거라고 할까? 저도 같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은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에게는 들을 일밖에 남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선택한 일이었고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다들 하는 그 예상이 맞는지 아닌지.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괜히 김칫국 마셨다가 좋을 거 없다. 들어보고 생각하자.

 히라코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면서 아이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 얼굴이 붉어진 그는 한 번 더 우물쭈물거리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귀에 쏙쏙 박힐 만큼 명확한 말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말. 제가 단번에 알아들은 말. 그리고 그것은 예상했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말로, 이 남자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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