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커플링(Non-CP)

NCP[1000/0010]2심 심문 이후, 판결 이전의 이야기

IF○○(19금X)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에 갇힌 두 사람의 이야기

밀그램 by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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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에스는 어쩐지 두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슬쩍 돌린 시야에는 돌아다니며 방을 조사하는 코토코가 보였다. 온통 하얀색인 벽이라 그런지, 검은색이 잔뜩인 모습이 역으로 눈에 띄었다. 가뜩이나 심문을 마친 게 얼마 전이라 껄끄러운데.

누가 들으면 너한테도 그런 감정 있었냐, 따위를 입에 올리겠지만 아무리 나여도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불과 얼마 전에 싸우다시피 대화한 상대를 마주하는 건 껄끄럽다고. 그나마 판결을 내리기 전인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애초에 이런 공간에 온 점이 문제지. 이 방은 대체 뭐냐고. 벽이고 천장이고 온통 하얗고, 있는 건 달랑 침대 하나랑 책이 빼곡히 채워진 3×3 책장? 도대체 무슨 용도로 건설된 방인지 도저히 감도 오지 않는다.

“잭카로프는 대체 뭘 하는 건지”

잭카로프가, 밀그램이 절대 자신을 이런 공간에 보내게 두지는 않을 텐데. 적어도 3심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믿음은 잭카로프가 밀그램에 흥미를 가진 만큼, 밀그램이 가진 절대적인 힘의 크기만큼 에스의 안에서 확고했다. 자신은 밀그램의 간수다. 반드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기이한 확신은 에스가 눈을 뜬 첫 순간부터 있었다. 그나마 밀그램은 자신에게 명확한 목적을 제시했고, 행동 지시를 주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삼은 지표였다. 하지만 여기는 도저히 무슨 목적인지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것도 인간성의 관찰 중 하나인가?

“하지만...”

쾅!! 커다란 소음에 뒤돌아보자, 코토토가 문 쪽에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설마 부숴보려는 건가? 철문인데...? 그런 생각과 함께 지켜봤지만, 안 되는지 금방 그만뒀다. 카즈이였다면 됐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왼손을 움직였다.

바스락. 손에 아주 미세한 힘을 줬을 뿐인데 들려오는 그 소리가 마치 코토코에게도 들릴 것만 같아서 몸이 굳었다. 다시 한번 확인한 코토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문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래. 안 들리는 게 당연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꽉 쥔 왼쪽 주먹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 안에 있는, 작은 쪽지 역시. 다시 접을 시간도 없이 힘을 주어 구겨버린 탓에, 장갑 밖에서 자신을 콕콕 찌르고 있는 그것은 자신의 찝찝함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코토코보다 먼저 눈을 떴을 때 이미 손에 쥐어져 있었다.

잠에서 깬지 막 된 탓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지만, 쪽지의 내용을 읽고는 잠이 달아났다. 그래, 마치 2심 개시에서 눈을 뜨고는 잭카로프로부터 코토코의 습격을 들었을 때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그래, 똑같다. 전부. 자신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일방적이고도 단편적이며, 제게 그것을 바꿀 힘 따위는 없어서...

에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 차려. 지금은 하찮은 자기 연민 따위에 빠질 때가 아니야. 그런 건 아무런 가치도 없어. 중요한 건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현실이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이런 건 익숙하잖아. 죄인의 심판에 대해서만 사고하던 것을 방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바꾸면 되는 일이니.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아무튼 주어진 상황을 파악하기도,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코토코가 일어났기 때문에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지금 이렇게 조사를 나눠서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코토코가 벽면, 자신이 책장으로 나눠진 탓에 적당히 책이나 읽고 있었다. 지금 읽고 있는 건 사고 실험의 종류에 관한 책으로, 짜증 나게도 흥미롭지만 이런 장소에서 강제적으로 읽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단서는 이것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대부분은 이미 본 적 있는 내용이라 적당히 훑으며 넘기던 와중, 한 페이지에 멈췄다.

「적 군인들의 수색으로부터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덤불 속에 한데 모여 숨을 죽이고 있는데, 한 주민이 데려온 아기가 난데없이 울기 시작한다. 이 아기를 가만히 두면 군인들이 주민들을 전부 찾아내 죽이겠지만, 그런 상황을 막으려면 그 아기를 목 졸라 죽여야만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는 아기 딜레마인가. 아기를 포함한 단체의 사망과 아기 한 명의 사망. 도덕적 딜레마로, 두 개의 도덕 원칙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문제다. 인간이 단체의 사망을 피하고자 통제 불가능한 약자를 죽이느냐 아니냐의 문제. 평소였다면 단순히 지식만으로 여기고 넘겼을 것이다. 사고 실험은 만약이라는 가정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 평소라면. 하지만 이입해서 생각해 본다면 자신은 어떨까.

아이를 죽이지 않는다면 아이를 포함한 전원이 사망한다. 아이를 죽인다면 불확실 요소를 없애 죽을 위험에서 피할뿐더러 앞으로의 생존 가능성 역시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비윤리적 행위와 생존 욕구 사이에서의 선택. 결국 결론은 그것이다.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사람을 죽일 결심을 할 수 있느냐.

그건...

“뭐 좀 발견했어?”

갑작스럽게 들린 코토코의 목소리에 에스는 흠칫 몸을 떨었다. 생각에 집중하고 있던 탓인지, 언제 다가왔는지 바로 옆까지 와있었다. 다행인 건 코토코가 그다지 자신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일까. 예를 들어 하루카랑 갇혔으면 엄청나게 어색해졌겠지... 잠시 상상했다가 그만뒀다. 그나마 그래, 그나마 낫다고 할까. 차악이다.

“그다지. 너는 어떻지?”

“나도 딱히 없어. 벽이 빈 공간 없이 단단하단 것과, 부수고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정도밖에는. 문도 조금 부숴보려고 해봤는데, 안 부서져. 특이점은 열쇠 구멍이 없다는 점”

“그런가. 이쪽은 몇 권 읽어봤는데 평범한 책이다. 딱히 힌트도 무엇도 없어”

그 말을 들은 코토코는 잠시 생각하더니 마지막 책장에서 한 권을 빼내더니 에스에게 건넸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눈을 깜빡이자 받으라는 듯이 책을 두어 번 흔들었다.

“앞에서부터 읽었잖아. 보통 이런 건 뒤에 두니까”

“아...그래”

떨떠름해하며 책을 받자, 코토코는 침대를 조사하러 가겠다며 멀어져갔다. 하긴. 실제로 우리에 대해 조사하거나 아는 사람이 이곳에 집어넣은 거라면 맨 앞에 있는책부터 순서대로 읽는 습관을 알고 마지막에 뒀을 수도. 다만 앞에서부터 읽었는지 어떻게 안 걸까. 지금 보던 건 1번째 칸에 있는 6번째 책이었는데. 앞서 읽은 책들은 그대로 꽂아놨기 때문에 얼핏 본 걸로는 눈치 못 챌 텐데. 보통은 중간에 있는 아무 책을 꺼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추측의 신빙성과는 별개로 찝찝한 기분에 코토코를 힐끗거렸지만 코토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를 구석구석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저 표정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달까. 미묘했다.

에스의 기억 안에서 코토코는 항상,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첫 만남에는 웃으면서 이쪽에게 일방적으로 할 말을 퍼부었고, 2심에서는 분노했다. 에스의 입장에서 코토코는 늘 무언가를 표출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다르다. 오히려 의도적일 정도로 아무것도 없어. 마치 초면의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뭐, 됐나”

탈출. 최우선 목표, 그 외에는 뒷전으로 미루는 편이 좋다. 애초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니까. 미움을 받든, 관계가 없는 일이 되든, 전부 자신이 책임져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결정한 일이니까. 그보다 이거 두께에 비해 은근히... 뭐가 들어있는 거야.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펼친 그것에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 들어있었다.

검은색의 손잡이가 있고, 은색의 빛나는... 한마디로 권총. 매체에서 흔히 등장하는 그것이 책을 잘라서 만들어진 네모난 직사각형의 내부 공간 안에.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한국 경찰용 리볼버? 분명 이름이 S&W M60이었던가.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손쉽게 상대의 목숨을 뺏을 수 있는 이것이, 지금 제 손에 들어왔단 것이다.

에스는 기억이 없기에, 대부분의 것은 지식으로서만 에스의 안에 존재한다. 실물을 본 적 없는 것 따위도 많다. 죄수들이 자주 말하는 풍경, 장소, 경험 등. 그에 조금의 갈망을 느낀 적도 많다. 다만 이런 경험은 필요 없어. 단언할 수 있다. 이게 가짜일 가능성은 없을까 고민했지만 장갑 끝으로 느껴지는 철 특유의 차가움이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대체...”

흘러나오는 말을 꾹 참으며 내뱉은 그건 억눌린 신음과도 같았다. 분노였는지 비탄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꽉 쥔 왼쪽 주먹으로 머리를 눌렀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조금 식은땀을 흘렸는지 이마가 축축했다.

현실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현실로 강제로 끌고 오는 것만 같은 그 감각은 정말로 끔찍했다. 힘을 잔뜩 준 왼쪽 주먹 안에 있는 쪽지는 더 이상 구겨질 공간도 없이 날카롭게 제 손을 찔렀다. 그 아픔은 에스에게 다시 한번 그것을, 쪽지에 적혀있던 명령을 상기시키는 촉진제에 불과했다.

「상대를 죽이십시오」

정갈하게 인쇄된 글자에 불과할 텐데, 귓가에서부터 들려오는 그 내용은 눈을 뜬 순간 「에스」에게 입력된 단 하나의............도저히, 모르겠어. 이곳은 내게 뭘 요구하는 거지? 나는 무슨 행동을 취해야 옳은 거지? 이 행동을 한다고 탈출할 수 있는 건가? 간수가 죄수를 죽이면 밀그램은? 살인자들을 심판하는 밀그램의 간수인 내가, 죄수를 죽인다면 그거야말로 주객전도잖아. 전제부터가 올바르지 않게 된다. 살인자가 살인자를 심판하다니. 후우타도 같은 말을 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전혀 달라. 후우타가 상정한 건 만약의 일이었다. 에스조차 가정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걸 그대로 따라버리면 나는,

“아무 가치도 없어지잖아...”

걸치고 있는 이 제복만이, 그것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책임만이 에스에게 주어진 것인데. 그것들을 제외하면 내게 남는 것 따위는 없는데. 이것마저 앗아간다고? 일방적으로 쥐여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럴 거라면 처음부터 쥐여주지 말았어야지. 아무것도 앗아가지 말았어야지. 멋대로 권한과 함께 책임만 잔뜩 들러붙은 그것을 건네줘 놓고는. 멋대로 상자 안에 사람을 가둬서, 그 안에서만 살아가기를 강요한 주제에! 이제 와 그 책임으로부터 도망갈 공간을, 처음에 준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강요하다니.

방금 읽었던 우는 아이 딜레마가 떠오른다. 간수로서의 권리, 얕은 신념, 윤리적 가치관, 한 생명, 그 모든 것들과 이 의미 불명인 곳에서의 탈출을 저울에 올린다. 아무것도 없어. 기준도, 억압도, 규칙도. 그저 두 가지 상황 중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생전 처음 겪은 규제의 부재는, 마치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밀그램이라는 비좁은 상자 안에서, 허락된 범위 내에서, 정해진 사고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았나. 답답함과 안락함은 동의어가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갑자기 주어진 자유는 오히려 불쾌하기 그지없다. 쪽지에 이어 총까지. 차례차례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들이닥치는 상황에 정말로 미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 머리는 그마저도 정보로서 정리하고, 코토코라는 변수와 위험 요소를 두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옳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사고가 멈추는 일 따위는 없다. 끊임없이 뇌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온갖 사고가, 처음으로 불쾌했다. 끔찍하기까지 하다. 마치 내 머리 안에서 다른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중얼거리는 듯한 감각. 자신을 타자화하는 듯한 기분.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것과는 달라.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을 정도로, 머리 안에서 종이 울리는 것만 같던 그 경고와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르다. 굳이 따지자면 스트레스성 두통일까. 영원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던 그것과는 달리, 이것은 버틸 만했다. 사고가 멀쩡히 가능하다는 점이 그 증거였다. 사고 자체를 멈춰버리는 그 익숙한 느낌이 아니니까. 아니, 고통에 익숙해진 건지도. 아무튼 겨우 돌아온 현실 감각을 느끼며 코토코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코토코는 여전히 침대를 분리라도 할 것처럼 자세히 조사하고 있었다. 침대는 왜 들었다가 놔보는... 애초에 저거 킹사이즈 침대인데, 혼자서 들어 올리는데도 힘든 기색조차 없다. 그런 코토코를 빤히 보았다. 그 카즈이조차 코토코를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물론 죽일 각오로 달려드는 상대를 상대로 어느 쪽도 상처 입지 않고 끝냈다는 점에서 힘의 우위는 확실히 카즈이에게 있겠지만, 적어도 일반적인 사람은 반응할 새도 없이 당하겠지. 그래, 정말로.

코토코 몰래 뭔가를 한다면 지금밖에 없을 것이다. 조사를 한다는 핑계로 떨어져 있는 지금밖에는. 에스는 생각했다. 딱딱한 책 끝을 차가운 손끝으로 매만지며. 제 왼손 아래에 있을 구겨진 쪽지를 떠올리며. 처음으로 겪는 축축하고도 찝찝한 감각을 느끼며.

에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이 무엇으로부터의 도피였는지는 그 자신마저도 모를 일이다. 현 상황에 대한 외면인지, 자신이 하는 행위를 인지하고 싶지 않은 건지. 어느 쪽이든지 그다지 소용없었다는 것이 유감이라면 유감일까.

결국, 사람은 제 죄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도. 어느 다중인격자가 떠오르는 것을 무시하고 에스는 꼭 감은 눈을 뜨며 책을 덮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책 제목은 설득의 심리학... 이런 책에 총이 들어있었다니 질 나쁜 농담 같은데. 누군지 모를 작자의 농담 센스에 표정을 굳혔다.

“하아...”

단정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는 행위로 답답함을 표출하며, 에스는 총이 들어있던 책을 그대로 마지막 위치에 두고, 그 앞에 있는 책을 꺼냈다. 코토코의 말대로 뒤에서부터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게 정말이었을까. 「위기 상황에 대한 탈출 방법 100가지」라고 적힌 책이니까 뭐 정말로 탈출 방법이 있을 수도...

“......”

......이거, 진짜인가?

에스는 눈앞의 책이 어쩌면 질 나쁜 농담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누구 취향인지 몰라도 농담 센스가 의심되는 수준이다. 물론 에스도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지만, 그럼에도 이건 일반적으로도 좀 아니지 않나. 책 제목을 가지고 장난질하는 듯한 짓거리는 정말 별로였다. 그 감정을 꾹 누르고 책을 펼치자, 적당한 폰트로 잘 정리된 내용이 보였다.

「탈출 방법은 이 중에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있지만, 당신이 그것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면 이 수많은 방법을 도전하여 그중에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쉬운 길을 두고 빙빙 걸어가려는 그 방식을 이해할 순 없지만, 이 뒤에 적힌 내용은 그런 당신을 위해 준비된 비효율적인 방법의...」

쓸데없는 말이 길고, 어쩐지 비꼬는 모양새였지만 결국 요점은 하나였다. 이중에 방법은 있다. 마침 에스는 쪽지의 명령을 그다지 따르고 싶지 않았던 참이다. 그 와중에 등장한 실낱같은 기회. 그것이 중요했다. 다만 고약한 농담 센스를 보면, 말장난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쪽지에 있던 방법을 똑같이 넣어놓고는 그게 방법인 주제에 다른 해결 방법이 있는 것처럼 군다거나, 그 이상의 불쾌한 방법이 존재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이 책 자체가 가짜라거나. 그런 생각으로 긴장하며 목차를 천천히 훑어보자 확실히 이상한 조건들은 많았다. 장점•단점•속마음 말하기, 고백, 그리고...

“무, 무슨...!”

에스의 하얀 피부가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손에서 힘이 빠져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에스는 주먹을 쥔 손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살짝 가렸다.

“저...”

저런, 저런 걸 할 리가 없잖아...! 웃기지 마!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에스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침대 쪽으로 돌렸다. 일련의 소란을 들었는지 코토코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한 얼굴. 침착하게 아무 일 아니라고 대응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알았지만, 유감이게도 에스는 연기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을뿐더러 당황하면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 타입이다.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책에 적혀있던 내용이 다시 떠오른 탓에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치밀어오르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고 간수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일인데. 이 책 때문?”

“아니, 그...!”

에스가 줍는 것도 잊은 책을 주워버리는 코토코에, 움찔거리며 손을 뻗었지만 허공을 가를 뿐 본인에게 닿지 못하고 멈췄다. 이미 코토코는 책을 펼쳐서 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책을 읽는 모습이 여과 없이 보였다. 민망함에 그것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힐끔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다 읽은 코토코는... 웃고 있었다. 익숙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붉은 눈동자는 올곧게 이쪽을 마주 본다. 그에 몸을 굳히며 코토코를 빤히 보자 코토코가 순식간에 다가왔다. 보폭도 크지, 단 한 걸음이었는데도 단번에 거리가 좁혀졌다.

“저기, 해볼래?”

“하?”

이해 못 할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렇게 답하자, 코토코가 한 번 더 다가와 에스의 어깨를 잡고는 약간의 힘을 주는 탓에 에스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몇 번 치며 물러서자, 침대의 메트리스가 다리에 닿은 순간에 그대로 밀렸다. 시야는 순식간에 천장으로 이동해, 하얗기만 한 벽만이 보인다. 모자는 뒤로 넘어가며 머리에서부터 떨어졌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침대 특유의 푹신함과 약간 등이 배기는 감각. 그리고, 눈앞에는 코토코가...

“언제까지고 여기 갇혀있을 건 아니잖아. 나에겐, 그리고 당신에겐 해야 할 일이 있어”

양손을 에스의 얼굴 바로 옆 침대에 댄 채로 몸을 기울인 상태로 그렇게 말하는 코토코는, 지극히 평소와 같았다. 에스가 알고 있는, 알고 있던 유즈리하 코토코였다. 마치 협력을 제안할 때의.

“너, 무슨 소리를...”

“보통 이런 행위는 관찰을 위해서야. 인간이 동물을 일정한 환경 속에 두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떻게 변화하는지 관찰하는 것처럼. 밀그램도 마찬가지잖아? 그렇다면 이런, 「하기 싫어할 조건」이 정답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한쪽 손에 턱을 잡히고는 만지작거려지는 감각에 에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고자 했으나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움찔거리고 끝날 뿐이었다.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뭔가, 좋은 향기가... 밀그램의 지급품...? 아니 이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이... 이런 걸 가장 먼저 해야 할 이유는 없어. 일단 다른 방법을...”

“그렇게 여유로운 소리를 할 줄은 몰랐네. 눈치 못 챘어? 여긴 아무것도 없어. 물도, 음식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시간제한은 있다는 소리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부터 해보는 편이 효율적이잖아”

“네가 말했던 대로 그런 부분을 노렸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게 아니라 낮은 것부터 해야겠지.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네 그 사고를 읽었을 테니까”

붉은 눈동자가 크게 떠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뭔가를 중얼거린 것 같기도. 아무튼 비키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 코토코가 에스의 턱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펼쳐 천천히 내려갔다. 턱에 그 손가락 끝이 닿았다가, 이윽고 손바닥 전체가 목을 덮는다. 묘하게 차가우면서 미약한 열기를 가진 그것이, 간지럽히듯이 목을 문질렀다.

“저기, 에스”

“뭐..읏”

뭐냐고 물으려고 했을 때, 목을 쥔 손에 미약한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취약하고 예민한 급소를 건드리는 그것에, 그 압박감에 말을 멈췄다. 잠깐, 지금.

“지금이라면, 밀그램이 아닌 이곳에서라면, 당신이 간수도 무엇도 아닌 이 순간이라면 말이지”

뭔가... 이상하지 않나? 한참 전부터 느꼈지만 여러 상황에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위화감이 떠올랐다. 지금의 코토코는 너무나도 평소다웠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느껴진다. 그게 하필 지금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당신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뭐? 뒤늦게서야 그 소리를 이해했다. 머리가 빠르게 굴러간다. 확실히 이곳은 밀그램이 아니다. 이 복장을 하고 있다고 하여 내가 간수라고 주장할 근거는 턱없이 부족하다. 주장할 수 없다. 하물며 간수를 향한 죄수의 폭력을 억제하는 밀그램의 규칙과 비현실적인 힘이 유지되느냐도 별개.

나는 여전히 보호받는가? 아직까지도 밀그램의 간수인가?

“그,”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고, 뭐라고 해야 하지? 나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코토코는 나를 죽일 생각인가? 그럴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죽는 건가? 여기서? 이런 곳에서? 나 자신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채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채로? 무엇도 아닌 채로? 여전히 에스인 채로? 내가 저지른 짓의 결착을 내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하지 못하고? 모르겠어. 난, 이런 곳에서 이런 상태인 채로, 아무것도 끝내지 못한 채로...

“나,는... 나는...”

코토코는 그저 목에 손을 올리고 있을 뿐인데, 그런데도 숨이 막혀온다. 무수한 생각에 잠식되어, 호흡은 멈추고 사고만이 작동한다. 늘 그랬듯이. 그런 에스의 뺨을 코토코는 부드럽게 쓸었다.

“가엽게도”

…가여워? 누가? 내가? 이 내가? 동정. 결코 받고 싶지 않은 그것이 에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뭔가가 치밀어올랐다. 모욕감? 분노? 아무래도 좋았다. 코토코에게 느꼈던 일말의 공포와 상황에 대한 불안감, 그 모든 것들이 단번에 무언가로 타올랐다. 그게 에스에게서 부유감을 앗아갔다. 하나둘 감각이 느껴진다. 목에서 느껴지는 체온, 전등의 눈부심, 푹신한 감각과 더불어 등 뒤 허리 부근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감각이 다시...

코토코의 팔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 힘껏 밀고자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밀그램의 힘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뜻은 되지 않았다. 저쪽에서 공격하지 못하는 것과 이쪽에서의 힘이 통하지 않는 건 별개니까. 다만 저항하더라도 아무 소용 없을 거라는 사실만은 깨달았다.

“당신에게 그 옷은 너무 무거워”

코토코는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인가? 그렇다면 내가 취할 행동은? 반항을 해? 코토코를 죽여? 그렇지만 코토코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런 코토코를 내가 먼저 공격한다면, 죽인다면 과잉방위가 아닌가? 애초에 나는,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인을 할 수 있는가? 그건 옳은가? 「그런 사람」인가?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감각이,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듯한 손이 한쪽 선택을 향해 압력을 넣는 듯한 느낌이다. 살고 싶다면 어서 코토코를 향해 그걸 쏘라고 속삭인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먼저 공격성을 드러낸 건 코토코라고. 그렇게 정당성과 자기합리화하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어쩌면 재미로, 흥미 본위로 쏘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까지...

“하”

내뱉은 헛웃음에 코토코가 의아함을 표출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에스는 코토코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뗌과 동시에 힘을 빼고 침대에 완전히 기댔다.

“알아서 해”

“뭐...?”

“알아서 하라고 말했어”

“왜? 설마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없을 것 같아?”

왜 거기로 생각이 흘러가는 거야.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 듯한 모습에 한숨을 내뱉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죽일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나를 죽일까 싶은 의문 정도는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설령 여기서 네가 날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 외의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죽이지 않아”

그 대답에 코토코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차갑고도 날카로웠지만 마주 응수해 주었다. 자기 자신마저 태울 것처럼 타오를 때는 언제고, 타고 남은 재처럼 미적지근하기는.

“......”

그렇게 몇분이나 되었을까, 코토코의 손이 약간 움직일 기미를 보이자 이제 목이 졸리는지 싶어 몸에 힘을 주었으나 손은 얌전히 목에서 떠났다. 한숨을 내쉬며 굽힌 허리를 펴며 일어나는 코토코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에스 역시 천천히 눕혀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래,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지”

그렇게 말하는 코토코에겐 방금까지 내뿜던 살기 어린 듯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도중에 떨어뜨린 책과 함께 침대 근처 바닥에 있던 모래시계를 주워 왔다. 모래시계는 파란색의 모래가 들어있는, 어딘가 익숙한 생김새다.

“그건...?”

“침대 아래쪽에 있었어. 그리고 침대 아래쪽에 먼지가 전혀 없던데. 이건 주기적으로 청소하거나 아니면 뭔가의 특수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그리고 아까 당신이 준 책에서 봤는데...로 말을 이으며 책을 펼치는 코토코의 자연스러움에 에스는 아직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단순한 시험이었나?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려고? 아니, 굳이? 날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왜 도전해 보지 않는 건지. 죽이려다 마음을 바꿨다...? 그런 에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토코는 찾던 페이지를 찾았는지 에스에게 건네주었다.

“솔직한 마음 털어놓기 10문답...?”

“아래쪽에 설명을 보면 모래시계로 문답의 제한 시간을 정해뒀다고 하니까. 모래시계가 있는 걸 보면 이게 조건일 확률이 높아”

그 말에 따라 설명을 읽으니 확실히, 서로 문답할 시간은 1분이라고 정해져 있고, 잘은 모르겠지만 모래의 양과 떨어지는 속도를 보면 대략 1분 정도겠지. 솔직히 이게 맞는 것 같다,까지는 아니지만 코토코의 말대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맞다. 일부러 모래시계가 준비되어있다는 점에서. 다만 묘하게 잘 흘러가서 찝찝한데...

“1이든 8이든 일단 해보는 편이 낫잖아”

“그러면 나부터 질문하지”

“마음대로”

어깨를 으쓱이며 코토코는 에스의 앞에 섰다. 평소의 에스였다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불쾌해 일어났겠지만, 죽음의 공포를 겪은 몸은 부드러운 침대에 앉아있고 싶어했다. 어찌되어도 좋으니 이젠 탈출이 하고 싶다. 그런 생각에 내버려두자고 생각하며 모래시계를 돌렸다.

“코토코 너, 알고 있었지?”

“뭘?”

그렇게 말하며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코토코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진실로 답해야 하니까. 쪽지에 대해 묻는 거지? 아, 아니면 권총이려나? 둘 다 알고 있었어”

예상했지만 확신은 하지 않았던 대답이 들려오자 첫 문답부터 오는 스트레스에 한숨을 내쉬고 싶어졌다. 이게 한 문답...인 건가. 역시 뭔가를 알고 싶다면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할지도. 모래시계가 다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뒤집었다.

“어째서, 내게 주었지?”

“...일부러 모호하게 묻는 거려나”

“글쎄. 애초에 전제부터 애매하니까”

진심, 진실성 있는 답변은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조건이고, 밀그램처럼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 관리된다는 전제 하에 결국 청자가 화자의 발언을 어떻게 해석하냐에 달려있다. 자신이 이해한 질문의 의도를 대답할 때, 스스로 생각하는 거짓을 입에 담느냐 마느냐. 방금 코토코가 질문에 대해 모른 척을 하려다가 이어서 진실을 말한 것 역시 그렇겠지. 코토코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이 명확하지 않으면 대답하는 사람은 질문을 주관적으로 해석해야 하니, 청자가 질문을 여러 가지 갈래로 해석한다면 대부분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거짓으로 판달될 가능성이 작으니까. 애초에 대답의 회피가 거짓이느냐 아니냐도 불확실하기도 하고.

“그렇네... 어느 쪽이어도 내 대답은 같지만”

주었냐는 물음에 대한 긍정, 역시 코토코가 내게 일부러 쪽지와 권총을 준 건가. 그런 생각에 빤히 바라보자 코토코는 모래시계의 남은 양을 보고 고민하더니 금방 입을 열었다. 과연 코토코가 고민하던 건 질문에 대한 대답의 내용일까, 아니면 어디까지 대답할지에 대한 고민이었을까.

“어쩌면 기대였을지도. 당신이 이런 상황에서 내 목숨을 취하는 악인이었다면 나도 당신을 완전히 부정해 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지 못했다는 건가?”

“대답이 듣고 싶으면 모래시계를 뒤집고 물어봐 줄래. 뭐,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 거지만”

모래가 다 떨어진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1분은 의외로 길면서 짧았다.

“어떻게 알았어?”

“너... 같은 수법이냐...”

“당신이 먼저 사용했잖아?”

쓸데없이 학습력만 좋기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총과 쪽지를 자기가 줬는지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거겠지.

“쪽지는 방금의 질문을 통해 알았고, 권총에 대해서라면 책의 배치가 이상했으니까”

그 책장은 언뜻 보면 평범하게 책이 나열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일본 십진분류법에 의해 순서대로 놓여있었다. 그리고 일본 십진분류법에 의하면 심리학은 100번대, 즉 그 책장의 첫 번째나 두 번째 칸에 있어야 했다는 것이지. 그런데 그 책은 부자연스럽게 맨 뒤에 있었다. 바로 앞에 있던 탈출 방법에 대한 건 애매하니 둘째치더라도. 그것을 대충 설명해 주니 코토코가 그렇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질문하지. 내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글쎄... 눈치챘다기보다는 예측이겠지. 다만 당신이 그걸 발견하고도 내게 그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했고, 당신 자세가 조금 달랐거든”

“그렇군... 그럼 내가 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발악했다면?”

“그것도 질문으로 하는 거야? 당신은 그런 가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묻자,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굴었다. 그다지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러고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모르겠는데”

“하...? 그게 무슨…”

“모르겠는걸 모르겠다고 했을 뿐이야. 딱히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했겠지. 애초에 당신은 총을 챙겼어. 그건 변하지 않잖아?”

어쩐지 요령 좋게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불쾌했으나, 말 그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건 대답으로 인정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코토코를 빤히 바라볼 때, 그 사이에 코토코가 모래시계를 돌렸다.

“왜, 날 죽이지 않았어?”

빤히 바라보는 그것은 정말로 순수한 의문인 것 같았지만, 어쩐지 타박이나 불만으로 들리는 건 기분 탓이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너희들을 내 손으로 처분하지 않아. 너희들은 내 관리물이다. 3심도 전에 죽이는 일은 있을 수 없어”

“간수다운 대답이네. 다만 정말로 그것뿐?”

“......”

“아아, 그래. 시계는 뒤집고 질문해 줄 테니까”

입을 꾹 다물자 그렇게 말하며 모래시계를 뒤집고는 재질문했다. 그렇게까지 듣고 싶은 건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자 모래시계가 가고 있다면서 한 번 더 재촉했다.

“그대로 널 죽였다면 넌 아까 말했듯 내가 악인이라고 생각하며 죽어가겠지. 너 스스로가 옳다고 믿으며 죽어가는 것 따위 해줄 것 같아”

회피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에스에 코토코는 그래, 잠시 입꼬리를 굳혔다가 웃어주었다. 애정과는 별개의 책임감과 나름의 고집에 가까운 신념. 평소의 멍청해 보일 정도로 죄수들에게 은근히 너그러운 태도와 달리 잔혹한 면모가 기꺼우면서도 어찌나 불쾌하던지. 그런 코토코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에스는 웃는 코토코에게서 느껴지는 뭔지 모를 찝찝함에 표정을 굳히기만 했다.

“당신도?”

“그래. 나 역시 도망갈 마음 따위는 없어. 모든 건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그래야만 해”

“흐응... 그런데, 왜 죽으려고 했어?”

......거길 찌르는 건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다. 굳이 답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다만 모래시계까지 뒤집어가며 질문했다. 대답해야만 한다.

“믿었으니까. 그뿐이다”

밀그램을? 나를? 그렇게 묻는 것만 같이 쳐다봤으나 에스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코토코는 모래시계를 뒤집고 또 질문할 거라는 에스의 예상과 달리 그저 에스에게 한 발짝 다가올 뿐이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그냥, 아무래도 좋은 거야. 당신에겐 아무것도 없으니까”

“멋대로 남의 삶을 재단하는 짓은 그만둬. 뭐, 확실히 그런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중요한 건 네가 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이겠지”

“확실히. 그럼 다음 질문. 나를 용서할 거야?”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용서한다? 용서하지 않는다? 질문을 듣자마자 온갖 의견이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다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모르겠어. 그건 아직이다. 다만, 네가 날 향해 살해 협박을 한 일은 딱히 판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을 거란 건 확실해”

“그렇구나... 그럼 이번 질문이 마지막인가. 마지막이니까 물어볼까. 내 죄라던가 정의, 그런 「판결에 도움이 될 만한 것」에 대해 묻지 않은 이유는?”

...무언가의 대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만 에스는 그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다른 사고를 거쳐 겉으로 보기에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을 내뱉었다.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 같은데. 그야 당연하지. 너희의 죄에 대해 알아가는 건 이런 곳의 힘 따위 필요 없어. 나로도 충분하다”

“오만한 대답이네”

“오만하지 않은 인간 따위 있을까 보냐”

그렇게 문답을 완전히 끝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아니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탈출 책을 다시 훑어봤을 때 끼익, 그런 뭔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쪽을 향해 시선을 올리자 코토코가 문을 열고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안 나다니 어지간히 취미가 고약하네”

“확실히”

코토코가 아니었다면 이게 정답이 아닌 줄 알고 다른 걸 도전하며 시간만 허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책 제목 센스도 그렇고, 이런 방 따위에 가둔 것도 그렇고, 어지간히 상종하고 싶지 않은 타입이라는 느낌이다.

“에스”

“왜?”

“돌아가자”

그 말에 에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을 작게 벌렸다가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묘한 무언가를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

그렇게 말하며 둘은 문 너머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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