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커플링(Non-CP)

NCP[0703ㅣ카즈이&후우타] 어느 8월 5일의 이야기

IF○○(19금X)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에 갇힌 두 사람의 이야기

밀그램 by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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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후우...”

몸을 누군가 살짝 흔들며,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낮고, 부드러운. 중년의 목소리. 그 익숙한 음성에 후우타는 저도 모르게 손을 피해 몸을 돌렸다. 아직 잠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알겠어...”

시끄러워...졸리니까, 좀 더 잘래... 그 행동에 상대는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나른한 목소리가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약간의 곤란함을 담고는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으음, 더 자도 상관은 없지만...”

아주 조금만 더...조금만... 어차피 오후 수업만 있으니까... 그보다 아버지는 출근이나......아버지? 아버지는...

“어차피 할 것도 없으니까. 자게 냅둘까”

아버지가, 아니다.

그걸 깨닫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잠결에 느끼지 못한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 느껴진다. 내 방이 아니야. 지금, 나, 무슨, 짓을?

다급히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자 밝은 풍경에 눈이 찌푸려졌다. 겨우 시야가 멀쩡해지자 왼쪽 눈에 하얀색이 담겼다. 제 방의 색도, 밀그램이라는 감옥의 색도 아닌 그것이. 천장과 벽, 바닥을 두르고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흰색 뿐이다. 그 외에 보이는 건 천장에 달린 조명 하나.

“어라, 깼어?”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역시 예상한 얼굴이다. 평소처럼 실실거리고, 전혀 믿음따위 안 가는 그 지겨우리만치 익숙한 표정이 자신을 보고 있다.

“좀 더 잤어도 됐을 텐데”

“됐어!”

그 말에 아까의 추태가 떠오른 후우타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기에 순간 흠칫했다. 하지만 카즈이의 표정이 여전했던 덕분에 몸에 넣은 힘을 뺐다. 차라리 저 얼굴에 짜증이나 불쾌감이 서렸다면 이쪽도 적반하장으로 나왔을텐데. 괜시리 느껴지는 찝찝함과 미안함을 뒤로하고는 주제를 바꾸는 걸 택했다.

“그보다 여기, 어디야?”

기분 나쁜데... 사방은 흰 벽이라 어느쪽이 앞이고 뒤인지도 모르겠고, 나가는 문이나 창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단 둘뿐인 공간. 의미 불명이네.

“글쎄. 그건 모르겠네. 이쪽도 방금 깬 참이라서”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한다. 어른인 주제에. 여전히 느긋해보이는 그 태도에 대해 속으로 불평하던 찰나, 후우타는 뭔가의 위화감을 깨달았다. 뭐지? 뭘까? 이 찝찝한 기분은.

“다만 밀그램의 힘보다 강력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 우리들은 죄수잖아? 간수 군이 우릴 판결 전에 어딘가로 넘겨버릴 것 같진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잠결과 당황 때문에 깨닫지 못했던, 그나마 머리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지금에 와서에 깨달은 그것은...

“후우타?”

대답 없이 멍하니 있던 자신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공간 안에 울려퍼졌다. 그래, 울려퍼졌다. 침묵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끝나 이윽고 완전히 사라져 다시 정적이 퍼진 그 순간. 그제서야 후우타는 깨달았다. 조용해. 조용하다고. 소름끼칠 정도로.

“아아...!”

자신의 목소리만이 귓가에 들린다. 아아, 느껴지는 그 감각에 희열을 느꼈다.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입꼬리가 얼마나 추한지, 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끊임없이 나를 부정하고, 비난하고, 비웃던 그 끔찍한 목소리들이. 그것들이 드디어...! 조용함이란 이런 것이었지. 그래, 그랬어. 원래 세상은 이렇게 고요했었다고. 되찾은 그 감각에, 새로 태어난 듯한 그 자유가...!

“후우타”

낮고, 침착한 목소리. 답지 않게 힘을 주어, 그러나 아프지 않게 양손으로 어깨를 아래로 누르는 감각. 아재 특유의 냄새. 진지한 표정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평소의 실없는 미소가 되었다.

“걱정마. 어떻게든 될 테니까”

...아, 설마 패닉에라도 빠진 거라고 착각한건가. 한 박자 늦게 그 행동의 의도를 눈치챘다. 착각이긴했지만 묘하게 긴장은 풀렸다. 저 느긋하고 대책 없는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는 편이 맞겠지만.

“그런 거 아니거든”

“그래,그래”

후우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적당히 넘긴 카즈이는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였다. 눈에 보이는 건 여전히 새하얀 벽뿐. 무언가의 지시 사항도, 하다못해 생명 유지를 위한 음식조차 없어. 도저히 이 상황에 이쪽을 던져넣은 쪽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어. 천천히 말려 죽여버리기라도 할 셈인가? 이게 벌인가?

아니, 그 간수 군이 그럴 리가 없어. 고작 2심에서? 판결도 제대로 내지 않고? 애초에 그 경우 왜 후우타와 나를 같이 가둬뒀는지가 납득이 안 된다. 혼자 두는 편이 보다 더 확실하게 망가질 테니까. 그만한 고통은 그다지 없다. 물론 후우타는 이미 상당부분 망가졌고, 나는 나 혼자 갇혔으면... 딱히 탈출 의지를 못 느꼈을 테니 어떤 의미에서는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아사의 정신적 고통과, 아무것도 없는 흰 벽, 고립된 상황. 오히려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그 상황에서 미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원래부터 미쳐있던 상황이겠지.

그나마 벌이라는 가정 하에 추측이 가능한 건 간수 군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 후우타는 꽤 감정적인 면모가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선 다른 죄수들도 다를 거라고 생각되진 않는데. 게다가 에스를 공격했던 건 1심이다.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이제와서 지라고? 벌이라는 자각도 없이? 차라리 명확하게 이건 벌이다라고 인지하게 두는 편이 행동 교정에 있어 훨씬 합리적이다.

“이거 곤란하네... 얼른 돌아가지 않으면”

굶어죽거나 미쳐서 죽어버리거나 둘 중에 하나일지도. ...애초에 밀그램이 그런 면에서는 최소한의 환경은 준비해주었다. 그로 인한 안정감도 있었겠지.  뭐, 그것도 금방 사라지고 1심이 끝나니 다들 불안정해졌지만. 적어도 그 최소한의 조치조차 하지 않는 이 공간보단 낫겠지.

“......차라리, 여기가...”

무의식적인지 뭔지 모를 중얼거림이 그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카즈이는 손쉽게 그 뒷부분을 짐작했다. 여기가, 더 낫지 않을까. 카즈이로서는 차라리 밀그램의 환경이 더 낫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나, 이해는 했다. 후우타는 밀그램에 의해, 에스의 판결 때문에 코토코에게 큰 육체적 피해를 입었고, 용서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의한 정신적 부담도 상당한 모양이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불합리한 상황에서 당한 일방적인 고통, 억울할 수밖에 없지. 해를 입을 바에야 차라리 여기 있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고. 더 좋아질 것도 없지만, 더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

그런 상태의 후우타 혼자 갇히지 않은 게 다행인가. 혼자 갇혔으면 더 불안해하며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을 테니까. 물론 이 상황도 딱히 좋다고는 못 하지만.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한 명이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아무튼 벌이라기엔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점이 많고, 그렇다고 해서 명확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아니면 이것 역시 밀그램의 일부인가? 죄수끼리 던져두고, 관찰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실험실의 동물 신세군. 인권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그보다 어떤 힘이 개입이라도 한 게 아닌 이상 후우타는 둘째 치더라도 자신을 옮길 수 있을리가 없다. 의식이 없는 사람, 하물며 고등학생을 옮기는 정도조차 운동을 어느정도 한 사람이어도 무리가 있고, 적어도 두 명은 되어야 가능한 정도. 그게 하물며 자신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옮겨놓는 건 둘째치고, 들 수 있는지가 의심되는데. 설령 간수 군이 아니라, 다른 인물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드는 게 아니라 바닥을 질질 끌고 이동했을 가능성도 생각했지만 구두도, 옷도 쓸린 흔적 따위는 없다.

애초에 기절했다고 치기에 몸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다. 나른하지도, 멍하지도, 두통이 있지도 않고. 오히려 가벼울 정도야. 기계처럼 사람의 의식을 전원으로 껐다가 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하기만하다. 역시 밀그램의, 혹은 그에 준하는 자의 힘인가? 처음 밀그램에 왔을 때도 비슷한 사고를 거쳤던 것을 떠올렸다. 납치를 당할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신선하다... 아니, 당황했다고 할까.

“어이, 아재”

과연 상대가 이것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으며, 뭘 목적으로 이런 짓을? 굳이 밀그램에서 빼내올 필요가, 나와 후우타일 필요가 있었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우리만이라면 그나마 상황은 낫지만, 만약 다같이 이런 공간에 잡혀온 거라면...

“아재!”

“아아, 미안. 무슨 일이야?”

“저기 뭐가 있는 것 같은데, 가보자”

후우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유심히 살펴보니 확실히, 뭔가의 형체가 있었다. 네모난 종이. 그것도 일본어로 글씨가 써진 무언가였다. 다만 여기서는 대략적인 윤곽만 보일 뿐, 내용까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찾은 거다”

“그래그래. 장하네”

솔직히 누가 발견했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 싶지만 한창 그럴 나이니까. 하물며 이런 상황에서 저런 것 정도로 기뻐한다면 다행이지. 젊은 애들은 여러 의미로 건강하다니까. 물론 그런 생각은 가까이 다가가 벽면에 붙은 종이를 본 순간 사라졌다.

【▆▆▆▆▆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그 문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인생 전반에 있어 드물 정도로 잠시 머리가 굳었다. 일단 글씨가 가려져 있어서 추측조차 어려웠고, 가능성이 너무 많았다. 설령 영화에서 많이 보는, 서로를 죽이라는 내용이더라도 말이 되고. 보통은 기계 음성으로 대체하지만. 만약 기계가 있었다면 전기가 되는 곳이라거나, 하는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말이지.

“...실화냐”

“꿈은.. 아니네”

시도우 군이 있었다면 좀 더 명확하게 현실인 이유를 찾아내서 설명했겠지만, 뭐... 직감이라고 할까, 다양한 요소에서부터 비롯한 확신이다. 결국 현실이든 뭐든 일단 탈출해야 한다는 건 변함 없지만.

“웃기지 마... 인권 침해잖아”

분명 밀그램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었지. 그때는 분노하며 불타올랐다면, 지금은 마치 물을 끼얹어진 것처럼 얌전하게 구는 모습이 다르다면 다른 점일까.

“의외로 별 거 아닐지도 모르지? 예를 들면 단순한 행동 지문이라거나”

“낙관적이네”

“비관적인 것보단 낫잖아”

자신의 태도를 빤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지,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듯한 모습이 마치 작은 햄스터가 고양이를 지켜주겠다는 모습 같았다.

“그보다 이런 게 있는 걸 보니 좀 더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방탈출이나 게임처럼 힌트가 숨겨져 있을 수도”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본 후우타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따라서 시선을 옮기자, 책이 한 권 있었다. 방향 감각이 상실되었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종이를 보고 이동하기 전까지 둘이 있었던, 아무것도 없던 그 공간에.

“......”

기다렸다는 듯이 주어진 힌트에 후우타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책만 바라보았다. 아니,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는 건 다행이다만...

“게임도 아니고... 아니, 게임이었으면 개연성 어딨냐고 한 소리 들었을 거라고...”

“뭐뭐, 그러지 말고. 일단 읽어볼까”

허무함이랄까, 어이없음을 뒤로하고 펼친 책은 누군가의 취향이 담긴 듯 꽤 고풍스러운 표지였다. 책을 펼치자 보이는 첫 문장은... 「갑작스럽게 갇혀서 당황스러우시죠? 나가는 온갖 방법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이 중에 정답이 있으니 알아서 하시길!」이었다.

이상한 폰트랑 커다란 크기랑 쓸데없는 스티커 같은 그림들로 꾸며져있었다. 반짝이 효과는 덤이고.

.......

............

 

“이 자식들이 장난하나!!”

책을 내던지며 오랜만에 화를 내는 후우타를 보며, 카즈이는 그립다고 생각하며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감정의 표현이 확실하다거나 하는 점은 부럽단 말이지.

“아재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여유롭네”

아, 어쩐지 가시 돋힌 말. 웃음이 거슬렸나보네.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나.

“하하, 그렇게 보여? 그건 다행이네. 어른이니까 말이지”

“...그러냐”

후우타는 내던진 책을 줍더니 한숨을 내쉬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책을 읽는 게 서툰 당신을 위해 준비된 만화,라는 문장에서 다시 한 번 내던질 뻔 했지만 겨우 참고 다음 장으로 넘기자 1.서로를 칭찬한다~라는 문장 아래 이어진 몇 컷 정도 되는 만화가 있었다. 이거, 언제 한 번 타임라인에서 봤던 것 같기도...

“...이 책, 오타쿠 같아”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는지에 대한 현타를 뒤로하고, 더 넘기자 2.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3.서로의 좋아하는 점을 10가지씩 말하기, 4.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기...등등을 보았다. 아니, 3번은 1번하고 똑같지 않아? 뭐가 다른데?

그냥 내던지고 싶은 걸 꾹 참고는 만화를 제외하고 주제만 확인하며 페이지를 재빠르게 넘기자, 어느 순간 멈췄다. 마지막 페이지들이 찢겨있었다. 깔끔하게 찢긴 것도 아니고, 마치 대충 잡아서 힘으로 찢은 것처럼.

“여기, 찢겨져있는데?”

“그렇네. 혹시 우리보다 먼저 여기 들어온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거나?”

“매너랄까, 기본 상식이잖냐. 책을 찢다니 어떻게 되먹은 정신머리야”

“어쩔 수 없이 다른 것부터 시도해볼까”

“다른 것도 그닥 하고 싶진 않은데...하아, 알겠어”

불평은 많아도 의외로 착실하다니까. 카즈이는 책 안의 목록들을 되새겼다. 의외로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았으니 우선...

“느긋하게 이야기라도 하자. 얘기하다보면 조건 충족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 최근엔 대화도 자주 안 했고”

“얘기라도 해도 딱히... 할 얘기는 없는데”

“그런 말 하지 말고. 일단 앉아”

“아, 알겠어! 밀지 마!”

벽에 기대어 앉은 후우타의 옆에 앉았다. 이런 건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보단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하는 편이 편하니까. 괜히 얼굴 보면서 했다간 중압감이나 받을테고.

“몸은 좀 괜찮나?”

“...그때보다는”

“그거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란 거야... 여전히 아프다고”

후우타는 환상통인지 진짜 통증인지 모를 미약한 고통에 다친 눈을 손바닥으로 누르다가, 양쪽 팔로 본인의 무릎을 껴안아 몸을 구부렸다. 딱히 카즈이에게 짜증이 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말투가 이모양이라 항상 이런 식으로 말이 나오는 것 뿐이지. 다만 착한 척 해봤자 만만하게 여겨질 뿐이니 오히려 이편이 낫지. 괜히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미안하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구해줬다면 너만큼은 아무 상처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표정을 보지 않아도 대충 알았다. 또, 한심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있겠지. 짜증날 정도로 익숙한 태도다. 다만 차라리 코토코처럼 차갑거나, 미코토처럼 눈에 띄게 실실대면 알기 쉽다. 적대할지, 아닐지 태도를 분명히 할 수 있어.

하지만 저런 태도는 익숙하지 않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지만, 이해도 납득도 할 수 없어.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 태도를 정할 수 있을리 없잖아. 어른인 주제에 약해빠져서는, 그럼에도 어른인 척을 해대니까.

“됐어. 이제와서 탓하려고 말한 것도 아니고, 과거 일 가지고 이것저것 불평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다고 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

익숙한 얼굴이 생각날 정도로, 부드럽고 나약한 목소리. 도저히 의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이 연약해서. 후우타는 답지 않게, 가시 없이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아까 책에도 이런 탈출 조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거기에 대해서만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 이상 다치지 않은 건 아재 덕이니까”

실제로, 마히루는 휠체어가 없으면 움직일 수도 없으며 후우타도 차마 그 앞에서는 약한 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가끔 미소짓고 있는 마히루를 볼 때면, 어떻게 웃고 있는거야?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나는 이 정도로도 아파서, 억울해서, 괴로워서 참을 수가 없는데.

시끄럽다고, 아프다고, 심판을 한 에스나 코토코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바락바락 소리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무서워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있었는데. 그 녀석은 똑바로 앞을 마주보았다. 그 눈에 체념과 고통은 있을지언정, 누군가에게 원망을 쏟아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 강인함 앞에서, 후우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추악하고 볼품없는 몸을 웅크리고, 타인과의 대화 빈도를 줄여나가며 스스로 낮출 뿐. 그런 의미에서 안대나 머리카락은 나쁘지 않았다. 타인과의 시선을 마주하는 게 무서워졌으니까.

눈을 다친 건 억울하고, 시력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무섭다. 하지만... 일순 그것을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로 후우타는 타인의 시선이 싫어졌다. 그 시끄러운 것들이 자신을 줄곧 지켜봐지는 감각이, 맞을 때 보았던 코토코의 차가운 눈동자가 떠올랐으니까. 시선이고, 말이고 지긋지긋해. 알아... 나는 약해빠졌다는 것 정도는.

“너는 강하구나”

“...하?”

“범죄나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보통 누군가의 탓을 하거든. 타인이든, 스스로든. 좀 더 일찍 구해줬어야지, 그날 거기를 가는게 아니었는데, 그 범죄자 자식 때문에... 그게 나쁜 건 아니야. 다만 계속해서 원인을 찾아내고, 그것에 매몰되어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만을 표출하며 무너져버리지. 계속해서 후회나 원망을 해. 그러고는 다시 나아가기를 주저해. 그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러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지. 당장의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대”

솔직하게 말하자면 들으면서도 어딘가 멍했다. 틀에 박힌 말처럼,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나도 그런데...나도 그런 나약한 사람들 중에 하나인데. 그렇게 생각했다. 귀에서, 귀로 흘러갈 뿐.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달라. 정체되어 이미 벌어진 일을 원망하고, 끌어안기보다는 앞을 제대로 마주하고 있어. 감사를 표하고,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구분짓고,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지”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데. 자기합리화조차 못 할 정도로 내 나약함을 인지하고 있고, 죄도 깨달았다. 물론 코토코의 그 빌어먹을 사상을 긍정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완벽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억울함을 호소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란 정도는.

하지만 이 사람만은 달라. 나를 나 자신보다도 좋게 보고, 칭찬해주었어. 저 말이 전부 진실이라고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그렇지만, 아주 오랜만에, 밀그램에 와서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 이 망할 개인주의 속에서, 처음으로 편을 들어준 듯한 말이어서.

“물론 아프다고 불평해도 좋고, 원망을 쏟아내도 좋아. 오히려 그러지 않는 쪽은 언젠가 망가져버려. 지금 당장 나아갈 수 없다고 자신을 자책하지도 말아. 시간은 많아. 그게 젊은이의 특권이지. 넌 충분히 강하고, 힘내고 있으니까”

“...뭐야, 그게. 아재같아”

줄곧 입발린 칭찬보다, 쓴소리를 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뻔히 보이는 아첨과 예의에서 비롯한 말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도 되지 않았고. 그런데 처음으로, 그 기분을 이해했다.

“그보다, 다음에 코토코랑 붙으면 이길 수 있어?”

“하하, 그게 궁금해? 호전적이네”

후우타는 속에서 올라오는 뭔가를 무시했다. 간질거리는 감각을 무시했다. 존경하면 지는 거다. 먼저 호감을 품으면 관계에서 을이 된다. 또 약자가 될 생각은 없다.

그 뒤로는 조금 편한 마음으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밀그램에 오기 전에 있던 이야기라거나, 타인에 대한 이야기라거나... 뭐, 그런 평범한 일상의 것들. 그러다보니 어느새 벽에 문이 생겨났다.

“...드디어인가. 도대체 무슨 기준을 충족한거야?”

“좋은 게 좋은 거지”

결국 후우타도 어느새 나가고 싶어졌었는지 처음에 비하면 보다 나은 얼굴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이건, 필요 없겠지. 카즈이는 주머니에 넣어둔 병을 떨어트렸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뭐야!?”

큰 소리에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는 후우타에게 카즈이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곤란한 척은 잘 하는 편이니까.

“별 거 아니야. 보급품으로 받았던 건데, 실수로 밟아버려서 말이지. 다치지는 않았으니 걱정 하지 않아도 돼”

“보급품? 아무튼 조심 좀 해. 하여튼 아재도 은근 맹한 구석이 있다니까. 빨리 와”

“알겠어”

먼저 나가는 후우타를 따라 나가면서 문이 닫히기 직전, 카즈이는 구겨서 공으로 만들었던 작은 종이도 던져버렸다. 그 종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답지 않게 약간의 혐오를 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후우타를 바라볼 때는 이미 사라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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