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에서 피어나는

명운 현대 AU





아침 8시. 새벽 일찍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가게 문을 열자면 그 즈음이었다. 채 새벽의 한기가 가시지 않고, 적당한 아침 햇살이 창가를 간질일 즈음. 누군가는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을 그 시간에 가게는 오늘 장사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올 겨울은 공사 소리가 안 들려서 좋네.’


사계절 중에서도 겨울. 그 적막하고 서늘한 공기를 즐기는 명이다. 하잘 것 없는 생각을 넘기는 와중에도 테이블을 닦아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언제더라. 몇 달 쯤 지났던가. 한참 비어 있던 건너편 상가에 웬 꽃집이 하나 들어섰더랬다. 꽃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서 굳이 찾아가 보진 않았지만. 애시당초 옆집도 아니고 길 건너 건물이다. 굳이 찾아가는 꼴이 더 이상치 않은가? 뭐어, 옆집 정도였으면 개업 축하한다고 인사라도 드리는 게 좋았겠지만.


요 사이 오시는 손님마다 율이 녀석한테 꽃을 주고 가던데. 처치 곤란이라 몇 개는 가게에 장식해 두기도 했다. 가게 이름이 뭐라더라. 메시지 카드 아래쪽에 적혀 있었는데.


‘... 흠, 뭐 됐나.’


9시. 오픈 준비를 마치고 유리문에 걸려 있던 [Closed] 팻말을 [OPEN]으로 뒤집어 두면, 비로소 하루의 시작이다.


“사장님, 그 얘기 들었어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잔을 닦고 있자면, 조잘거리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하게도 카페 영원의 귀염둥이 마스코트- 아니, 직원. 율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식구… 일까. 삼촌과 조카? 정도의 묘하게 가까운 거리감. 어릴 적에 고아가 되어 거리를 나돌던 녀석을 거둔 지도 벌써 십 년이다.


… 그런 녀석이 사장님, 사장님 하며 귀염성 없게 부르는 꼴이라니. 몇 년 전만 해도 아저씨니 삼촌이니 썩 친근하게 불러줬던 것 같은데 말이다.


“무슨 얘기.”


“아 왜, 맨날 꽃 주고 가시던 분들 있잖아요.”


꽃 얘기였다. 확실히- 매일 그렇게 질리지도 않고 꽃 한 송이씩을 사다 들르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 바이럴… 뭐 그런 건가? 옆 가게도 아니고 길 건너 가게에 이런 식으로 바이럴을 돌리다니. 장사를 꽤 하는 사장인가 싶었다.


“단골손님들? 뭐어… 보니까 다들 똑같은 가게 같던데.”


“저어기 길 건너 옆 건물 꽃집이라던데요? 왜 그… 서너달 쯤 전에 새로 들어온.”


아침 10시. 얼추 출근시간대가 끝나가며 조금 한가한 시간대라 그런 걸까. 심심해서인지 별 쓰잘 데 없는 소리나 늘어놓는다. 맹랑한 녀석. 그럴 시간에 청소나 열심히 할 것이지. 지금 내가 잡고 있는 게 걸레가 아니라 뭐 안경닦이라도 되는 줄 아나?


“그래서 뭐.”


조금 성의 없게 대꾸하자 대번에 양 볼이 부푼다. 귀엽긴.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주.


“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오늘은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들어서 그래요!”


흥! 치! 하며 괜히 빗자루나 거칠게 쓸어대는 녀석은 됐고. … 꽃인가. 어쩐지 매일같이 꽃을 사들고 오신다 싶더라니. 바이럴… 같은 건 아닐 것 같고. 꽃집이 뭐 특이한가? 조금의 궁금증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는다. 굳이 신경쓸 만 한 수준의 의문이야 아니었다만, 무료함은 사람을 효율에서 멀어지게 하는 법이었다.


- 하는 생각을 삼키고 있자니,


딸랑-


아주 한가하다 싶으면 꼭 손님이 온다. 돈 버는 거야 좋지만… 에휴. 이건 뭐 마법의 단어라도 되나.


“어서오세-”


온통 어두운 톤의 목재로 조성된 인테리어. 그 탓에 꽤나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는 카페 영원은 동네에서도 유명한 독서 스팟으로 자리잡았다. 적절한 조명과 앤틱한 인테리어로 마니아층을 겨냥한 게 도움이 됐을까. 그리고 그런 칙칙한 카페 안으로 들어선 것은-


꽃 이름이 뭐라더라. 꼭 한 송이씩은 들어 있던데.


아무튼 이름까진 기억나질 않는 연한 분홍빛의 꽃. 그 꽃을 닮은 한 사람이었다.


“… 그, 여기 커피 말고 뭐 있어요?”


들어오자마자 한다는 말이- 한숨을 삼키며 대답한다.


“여기 카펜데요…?”


첫 만남은 이상했다. 카페란 자고로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던가? 카페에 와서 커피 말고라니. 이렇게나 커피로 가득찬 공간에서?! 전세계 각지의 콩들을 종류별로 구비해둔 완벽한 공간에서?! 뭐- 물론 커피 메뉴 말고도 차라거나, 스무디, 에이드 같은 메뉴도 파는 카페가 세상엔 대부분이긴 하지만, 명의 카페는…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커피의, 커피에 의한, 커피를 위한 카페. 커피 광인의 노골적인 욕망의 표출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아, 밤에는 클래식 바로 운영 중이긴 하다 - 곳인 것이다.


“헉. 없나요? 그… 에이드 같은 거라도… 아, 차도 괜찮… 음. 그렇군요…”


이리저리 허둥대며 오락가락. 가게를 나가려나 싶더니, 결국 어색한 걸음으로 척척 들어와 자리를 턱- 잡고 앉더라. 뭐지, 저 여자. 


“커피… 커피 주세요!”


커피 뭐. 블랙? 더치? 핸드드립? 에스프레소? 라떼? 카푸치노? 과테말라 안티구아?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풀시티 로스팅? 시나몬 로스팅? 그러니까 커피 뭐.


“메뉴 여기 있습니다, 손님. 그리고 주문은-”


처음 보는 단어들의 향연. 이란 당황스런 감정이 만면 가득하다. 뭐지 이 사람. 진짜.


“... 음. 직원용으로 차가 몇 종류 있습니다. 그거라도 괜찮으시면 가져다 드리죠.”


“네? 아, 네? 네! 그- 그래 주시면… 아, 저는 저어기 건너편 꽃집 사ㅈ-”


“네네, 캐모마일 티 한- 예?”


어쩐지 저런 미모가 왜 낯이 익은가 싶었는데. "그” 꽃집 사장이란다. 그건 그렇고, 이 동네 자주 돌아다니는 거였어? 그럼 애초에 이제서야 오는 이유는 뭔데. 3개월만에? 그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니잖아. 아니- 아니지. 그냥 카페를 가려다 왔을 수도 있잖아. 하며 곱씹어보면… 글쎄, 이 거리에만. 그것도 그 꽃집 옆에만 해도 찻집이 있다. 애초에 커피가 목적이 아니었다면 굳이 찻집을 피해 카페에 올 리-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끊임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상념을 깨뜨린 것은 조금 어색하게 웃는 표정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오늘 카페가 좀 밝지 않나? 조명을 잘못 켰나. 전압이 튀나…


“아, 예. 호명입니다. 여기서 카페 영원 운영하고 있구요.”


하며 품 속을 뒤져 명함 한 장을 꺼낸다. 다행히 잡힌 것은 빳빳한 새 명함이었다. … 굳이 다행일 것 까진 없지만. 뭐 그래도 이왕 첫 인사 아닌가? 깔끔한 인상을 남겨서 나쁠 것은 없다.


“영운이에요. 건너편에서 꽃집… ‘피워내다’ 운영하고 있어요.”


명함 한 장 건네는데 왜 그렇게 수줍게 웃는 걸까. 볼가는 왜 붉은 거지? 그리고 아까부터 내 눈을 살살 피하는 게… 역시 뭐 찔리는 게 있나. 저 꽃은 바이럴이 맞았던가?


“그- 그렇게 계속 빤히 보시면…”


… 아.


“-크흠. 죄송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도 눈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끈덕지게 따라붙는 눈동자를 어거지로 멈춰세우곤 일어난다. 가볍게 목례하며 살짝 웃어주는 건… 그냥 몸에 붙은 서비스.


“그럼 캐모마일 티 한 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자리로 돌아가 차를 우리고 있으면, 연신 두리번거리는 영운이 눈에 들어온다. 온통 신기한 것으로 가득해 보이는 눈치. … 좀 귀엽나. 칙칙하기만 한 인테리어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 또 있을까. 황야에 피어난 장미처럼 홀로 빛나는 모습이 절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는 생각을 하기도 잠시. 너무 빤히 쳐다봤을까. 무심코 눈이 마주치면 동시에 눈을 돌리며 헛기침을 내뱉는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집중이 통 안되네.’


정신 차려야지, 호명. 차에 집중하는 거야. 고개를 세차게 젓곤 다시 찻물에 집중한다. 가장 향을 즐기기 좋은 타이밍에 맞춰 찻잎을 건져내고 멋스러운 잔에 채워넣는다. 분실이나 파손이 걱정되어 보통 직원만 사용하는… 금으로 장식된 잔이지만, 이게 제일 예쁘니까.


“주문하신 캐모마일 티 드리겠습니다.”


조용히 테이블에 잔을 내려두면 다시 눈이 마주친다. 백색의 눈동자가 저를 마주하면 일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매가 초승달을 닮았다고 생각할 무렵, 영운의 입술이 달싹인다.


“... 안 바쁘면 호명씨도 같이 한 잔 할래요?”


“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바보같은 단말마였다. 그야 아직 손님들도 오지 않았고, 이 시간엔 꽤 한가하니 상관은 없었다. 애시당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명에게는 생소한 일이었지만, 그런 이성적 지적따위야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 네. 뭐어… 그럼 제 커피만 내려오겠습니다.”

바(bar)로 돌아와 커피를 내리는 중에도 자꾸만 눈을 뗄 수 없었다. 창 밖을 바라보며 입가로 찻잔을 가져가는 모습이, 살며시 감겼다 뜨이는 긴 속눈썹이 그 눈길을 잡아끌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오, 사장님! 저분이 그 꽃집이래요? 거기 사장님이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요!”

킥킥대는 녀석의 웃음소리가 그렇게 거슬리지가 않았다. 조금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어느새 커피도 다 내려져 있었다. 잔은… 아까 꺼내뒀던 찻잔으로.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커피가 올려지고, 그 소리에 영운의 눈길이 스르르 닿는다. 이윽고 마주친 눈이 곱게 접히면 괜스레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커피… 는 안 좋아하시나 봅니다.“

겨우 꺼낸다는 말이 고작 커피였다. 다른 말… 다른 말 없나.

“개업하신 지는 몇 달 되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장사는 잘 되세요?”

몇 달쯤 전… 그러니까 그 지겨운 공사 소리가 잦아들 때 즈음에. 아마 공사소리는 인테리어 공사였겠지. 꽤 오래 하는 것 같던데.

“아아… 네, 지난번에 인사 드리러 왔었는데, 안 계셨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사르르 웃는 낯이 꽤… 아름다웠다. 예쁘다 같은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 지난번?

“아, 지난달에 오셨었구나. 저희가 잠깐 여름 휴가를 갔던지라.”

율이 녀석 데리고 계곡에 좀 다녀왔더랬다. 피서도 할 겸.

“네에. 그래서 다음에 와야겠다~ 했는데. 통 바빠서 이제야 겨우 왔네요.”

아까 카페가 밝았던 건, 아무래도 이 사람 때문인 것 같았다.


요 몇 주 사이에 꽤 가까워져 버렸다. 그냥 같은 동네에서 장사하는 근처 가게 사장일 뿐인데, 이것저것 꽤나 잘 맞는 부분이 많았더랬다. 커피는 못 먹어도 술은 또 좋아한다나. 마침 영원은 종종 밤에 바(Bar)로도 운영하니 이야기 나눌 것들이 많았다.

“명!”

저 앞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인영은 당연하게도 영운이다.

“영운씨.”

조금 어색하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면, 밝게 웃는다. 오늘은 가게가 쉬는 날이라 밖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데이트 같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영운의 옷차림이 평소와는 다른 것도 같았다. 초록색의 원피스. 연분홍빛의 긴 머리칼과 어울려 한 송이 꽃 같았다.

… 첫 데이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괜히 실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 무슨 일 있어요?”

“흠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른 가시죠.”

달콤한 하루였다. 회상하자면 찰나처럼 지나가버린 하루.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카페에 앉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 공원을 걷다가 저녁을 먹고, 또 잠시 거리를 거닐고.

사실 영화 내용이 잘 기억나지는 않았다. 눈동자에 비친 스크린의 불빛이 반짝이는 별빛같아서.

적당히 시간대가 맞는 영화를 아무렇게나 골랐던 거였는데, 눈을 빛내며 집중하는 모습이 또 아름다워서.

“… 오늘, 그. … 즐거우셨나요?”

머뭇거리며 꺼낸 말은 조금이나마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소망이었을까. 자신과 보낸 시간이 부디 즐거웠기를 바라는 소원이었을까.

“음… 어떨 것 같아요? 맞춰보세요.”

장난스레 웃으며 대꾸하는 영운의 모습에 난처하면서도 다시 웃게 되어버리는 명이었다.

"얼른 들어가세요. 늦었다.“

“지금 말 돌리는 거죠? 저 진짜 가요?”

쿡쿡 웃으며 두어 번 고개를 돌리는 영운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명이었다.

“… 다음엔 더 재밌는 거 해요. 같이.”

나지막히 덧붙인 말이 영운에게 닿았을 지는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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