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위소병/매실 노랗게 익어갈 때 날마다 쾌청하여

梅子黃時日日晴

매실 노랗게 익어갈 때 날마다 쾌청하여

하지夏至가 지나고 날이 부쩍 더워졌다. 화산에도 슬슬 여름 티가 났다. 봄을 맞을 적에 붉은 꽃잎 다 떨구고 저희만 푸릇하게 남은 매화나무 잎은 끄트머리가 불긋하니 알록달록 물이 들었다. 매실도 노랗게 익어 곳곳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머지않은 소서小暑에는 비가 쏟아질 테지. 비바람이 몰아치면 탐스럽게 익은 매실이 다 떨어져 질펀할 것이다. 여름 초엽 우기에는 매실이 다 떨어져 그때를 매우梅雨라 한다던데, 남궁도위는 생각했다. 이번 여름은 화산에서 날 테니 그 모습을 보겠구나.

남궁도위는 고개를 높이 들었다. 날이 좋다 못해 하늘이 투명할 만큼 파랬다. 눈 안 물막이 쾌청한 천공으로 가득 찼다. 해가 높게 떠 절벽에서 보는데도 아찔했다. 남궁도위는 잠시간 해와 눈싸움을 하다 고개를 내렸다. 눈이 아려 물이 고였다. 참패였다.

남궁도위는 헛짓거리를 반성하며 눈물로 흐린 눈을 몇 번인가 깜빡여서 달랬다. 그러고 앞을 보자, 어디선가 빛줄기가 날아왔다. 남궁도위는 재차 공격당한 눈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다시 눈을 뜰 때는 조심스러웠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살피니 흉악범은 사라지고 없었다. 빛이 온 방향을 쫓으니 방금까지 없던 사람이 있었다. 녹림왕, 임소병이었다.

임소병은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가로이 부채를 부쳤는데, 남궁도위는 어쩐지 그가 타인의 시선을 바라는 것 같다고 느꼈다.

차림새가 묘하게 반듯했다. 평소에도 임소병은 낡았어도 잘 관리된 옷만 걸쳐 차림이 나쁘지 않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쥐새끼같이 비굴한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예의 그 학창의가 달리 보였다. 남궁도위는 한참을 고심한 끝에 임소병의 옷이 다려졌음을 알았다. 늘 구깃구깃하던 유건이며 학창의에 주름이 없었다.

임소병의 무엇이 평소와 다른지 알아차리는 데는 한참이었으나, 뜬금없이 옷차림에 신경 쓴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임소병이 손에 쥔 부채 밑으로 매듭 묶인 선추가 달랑거렸다.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 봐도 좋은 물건이었다. 단정한 차림에 선추가 더해지니 그림처럼 어울렸다. 모르고 보면 지체 높은 문사, 고아한 선비로 알았을 것이다.

하얀 손이 살랑살랑 부채를 부칠 때마다 선추가 이리저리 약하게 흔들렸다. 먼젓번 남궁도위와의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쥔 해가 임소병의 선추 위로 빛을 내려보냈다. 햇빛이 옥에 부딪혀 산란했다. 저러다 남궁도위의 눈을 찔렀겠지.

제 눈을 찌르고 도망간 무도한 이를 찾아냈지만, 남궁도위는 그를 탓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임소병의 선추를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오늘 아침 녹림도 다섯과 화음이며 은하 상단을 이곳저곳 돌아다닌 끝에 고른 선물이었다.

물론 남궁도위의 사심이 담긴 선물은 아니었다. 선물한 사람은 녹림의 이름을 가진 이들이다. 당연하지. 남궁세가 소가주가 산적왕한테 선물이라니, 정사가 유별한데 당치도 않다. 창천의 이름에 부끄러울 일이다. 애초에 사파 수괴의 어디가 어떻게 예쁘다고 제가 선물씩이나 바친단 말인가? 남궁도위에게는 산적들이 산적왕께 드릴 선물을 고르는 일에 함께할 합당한 사유가 있었다.

녹림도 여럿이 이르기를, 그들은 전날 밤 여태 벌어 모은 돈을 합해 왕께 드릴 선물을 사자고 뜻을 모았다(이 부분에서 덩치가 산만하고 인상 험악한 산적들의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빛나도록 환한 미소를 마주한 남궁도위는 비위가 몹시 상했으나 그들의 들뜬 감정을 상하게 할까 봐 저어되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산적이 산적질 대신 노동으로 번 돈의 액수는 크지 않았지만(남궁도위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의 지인 중에 산적이 돈 버는 꼴을 눈 뜨고 봐주지 않는 도사가 하나 있었다), 일한 햇수며 머릿수 역시 적지 않아서 모인 돈의 액수는 선물을 마련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으니, 그들이 배우지 못한 무지렁이라 귀물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었다(줄줄 늘어놓는 자학이 망설임 없이 또박또박하여 미리 써 둔 글을 읊는 듯했다. 남궁도위는 임소병의 인성을 의심했다). 그들은 귀한 것을 가져도 비싸게 팔아 입에 풀칠하고 무기를 정비할 생각이나 하며 살아와 물건 고르는 법을 몰랐다. 무엇보다, 녹림의 역사를 탈탈 털어도 그들이 자신들의 왕을 흡족하게 한 일이 없었다. 그들이 비록 선물이라는 걸 해 본 경험은 없지만 그게 받는 사람 좋으라고 하는 일이라는 정도는 알았다. 하여, 그들은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마침 천우맹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사람이 모인 차였다. 그들은 ‘장사’ 경력으로 사람을 골랐다. 우선 절벽 꼭대기에 집 짓고 사는 화산 도사 놈들부터 제외(재물에 눈이 돌아간 한 사람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했고, 남만야수궁이나 북해빙궁 놈들은 중원에서 귀물을 찾을 이유가 없었을 테니 제외했다. 남은 건 곱게 자란 정파 도련놈만 모인 사천당가와 남궁세가였는데, 하필 그날 평화로운 잠시를 못 견딘 녹림도 들이 싸움을 벌인 상대가 당가 놈들이었단다.

남궁도위는 구구절절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긍정적으로 답했다. 독 먹고 쓰러진 산적들이 바닥에 깔린 와중에 머리채 잡힌 당가 사람이 머리 가죽 뜯긴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꼴을 구경하며 화산 사람들한테서 당과를 받아먹은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물할지도 정해놓은 터라 어느 것이 좋은지 골라주기만 하면 되기도 했다.

그들이 남궁 소가주는 세가 도련놈이니 예쁨으로 쓸모를 다 하는 물건에 대해 잘 알지 않느냐며 띄워주었을 때는 거절할까 싶었으나, 칭찬 같지도 않은 말을 칭찬이라고 하면서도 재수 없는 남궁 놈 비위 맞춰주느라 오만상 쓰는 걸 보자니 저희 수장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져 갸륵했다.

그들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남궁도위가 누구인가, 천하제일세가의 소가주로 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도록 귀한 것만 몸에 걸치고 산 세월이 근 삼십 년인 사람이다. 남궁도위의 관심사는 아니었으나, 아름다움을 논할 줄 아는 것도 남궁의 가주가 될 자의 마땅한 소양이었다. 남궁도위의 보는 눈은 아주 좋고 아주 높았다.

소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다. 남궁도위는 보는 눈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남궁도위는 가격을 물은 녹림도의 아무개가 거품을 물 만한 물건만 쏙쏙 골랐다. 남궁도위는 혹시라도 그들의 자금이 부족하면 돈을 보탤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돈이 부족하지 않게 모였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남궁도위는 은전 한 닢 쓰지 않고 물건을 고르기만 했다. 더해서 도와주어 고맙다는 그들의 성의로 시전에서 파는 간식까지 받아먹었다(이는 남궁도위에게 달갑지 않은 성의였다. 선물 값을 치르느라 돈을 다 쓴 탓에, 그들은 남궁도위에게 질 나쁜 군것질거리를 쥐여줬다. 게다가 남궁도위의 옆에서 기대가 담긴 눈으로 지켜보기까지 했다. 남궁도위는 간식을 목구멍 안으로 하나하나 밀어 넣고 입맛을 버렸다).

도움을 주기 위해 함께했으나, 오히려 남궁도위가 그들 덕에 즐거웠다. 근 몇 년은 선물을 준비할, 기쁜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남궁도위는 걸음을 재촉했다. 기실 그가 선물에 들인 공이라곤 평생을 들여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높여 놓은 눈을 제공한 것뿐이지만, 그 정도로 임소병의 반응을 볼 자격이야 충분하겠거니 싶었다. 게다가 임소병 본인도 선물 받은 물건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녹림왕!”

 

저를 부르는 소리에 임소병이 몸을 돌렸다. 남궁도위는 태어나 처음으로 친구의 생일 선물을 준비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푸른 잎사귀를 남궁도위에게 끼얹었다. 청량한 하늘을 배경으로 웃음이 말갛게 보였다.

 

“어쩐 일입니까?”

 

예의상 물어는 보지만 용건은 뻔했다. 제가 고른 선추가 내 마음에 드는지 확인하려는 게지.

대표로 선물을 건넨 번충은 남궁도위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으나(그러기는커녕 저들끼리 골랐다며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을 고했다), 임소병은 선물을 보자마자 남궁도위의 입김이 들어갔으리라고 알았다. 그야, 오늘 아침 우연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는데 그걸 맞은 놈이 하필 녹림도여서 그 녀석이 교양 쌓고 깨어난 게 아닌 한에는, 필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게 아닌가.

저들도 바보는 아니니 도움 청할 사람으로 세가 놈을 골랐을 건데, 천우맹에 세가는 둘이고 그중 하나와 서로 떡이 되도록 쌈질한 게 어제 일이다. 결국, 남은 건 남궁, 아마도 남궁도위였겠지. 제일 대접받는 놈이 제일 잘 알지 않겠는가. 그래도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찾아가다니 통이 크다고 해야 할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해야 할지. 허구한 날 남궁도위를 멍청이 취급하는 임소병 때문인지 녹림도 녀석들은 남궁도위를 쉽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도 그렇고, 선추가 지나치게 화려했다. 이놈이 정도 없이 반짝거려서 부채가 다 가려졌다. 장식이 본체를 다 가려서야. 옥 따위에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고를 모양새가 딱 남궁 놈 취향이었다. 황실과 강남의 화장한 미친놈과 남궁을 제외하고, 세상천지에 이런 번쩍번쩍한 선추를 선물로 고를 사람이 어디 있겠나? 제가 가질 것도 아니고 선물을. 오만방자하여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나 남궁세가의 소가주쯤 되는 사람이 골랐을 것이다. 임소병은 사심을 가득 담아 확신했다.

그런데, 임소병이 아는 남궁도위는 도움을 주었다고 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제가 값을 치른 것도 아니잖은가. 그러니 모르는 척하겠거니 했는데, 들뜬 티를 감추지 않는 걸 보니 잘못 짚었나 싶기도 했다. 아니면 여태 친구한테 줄 선물을 직접 골라본 적이 없어서 애처럼 설렜다거나?

임소병은 남궁도위에게 안면근육을 바르게 하라 비아냥거리는 대신 아량을 베풀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남궁도위가 망발을 날렸다.

 

“오늘따라 겉모습이 나쁘지 않군요. 산적왕으로 아니 보이십니다.”

“뭐, 인마?”

 

남궁도위는 말을 하자마자 멈칫했다. 그러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는데, 입이 멋대로 움직여 자칫 시비로 들리기에 십상인 말을 해버렸다.

그러잖아도 요즈음 가솔들의 언행이 녹림이나 화산과 진배없이 험해져 심란하던 차다. 이러다 천하제일세가가 아니라 천하제일산채 되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한탄했는데, 누가 남궁 아니랄까 봐 저까지 산적 놈의 말씨를 옮아왔다. 그래도 쌍소리는 않는 걸 보면 그 많은 산적 중에서도 산적왕을 보고 배운 듯하니 그것만이 다행이었다. 남궁도위는 장차 남궁의 가주가 될 자다. 산적왕 정도는 되어야 급이 맞았다.

남궁도위가 헛생각하는 동안 임소병은 눈썹을 모로 세웠다. 그에 남궁도위는 조금 억울해졌다. 제게 이런 언행을 가르친 자가 누군데, 양심이 있어야지! 그러나 행실을 바르게 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고, 남 탓은 하면 할수록 흉해지는 법이다. 남궁도위는 어설프게 웃으며 악의는 없었노라 해명했다.

임소병은 눈썹을 눕히지 않았다.

잠시간의 적막 끝에 남궁도위는 말을 돌렸다.

 

“선추를 다셨군요?”

 

남궁도위의 말 돌리는 솜씨는 가히 형편없었다. 말을 얹기도 한심할 지경인지라 임소병은 눈을 흘기는 것으로 그쳤다. 남궁도위는 임소병의 뜻을 추측했다. 폭력이나 폭언 혹은 비아냥이 돌아오지 않는다니, 선물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셨나 보다!

 

“녹림왕이 장신구를 걸친 모습은 처음 봅니다.”

 

남궁도위는 뿌듯함을 만끽했다. 잘생긴 얼굴이 밝아지니 참으로 재수 없었다. 초를 쳐야겠다. 임소병은 생각하던 것을 입 밖으로 냈다.

 

“값비싼 것을 원했다면 무엇인들 못 가졌겠습니까. 소가주 말대로 어울리지는 않다만 내가 산적왕인데.”

 

남궁도위의 눈썹이 모로 기울어졌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하는 걱정보다는 임소병의 말에 납득하는 자신이 새삼스러웠다.

듣고서야 깨달은 것이 이상할 만큼 옳은 말이었다. 임소병은 산적왕이다. 산적왕의 아들로 태어나 산적왕으로 자랐다. 태어나보니 산적왕의 아들이었던 설움을 아느냐는 비아냥을 하도 들어 귀에 딱지로 앉았다. 산적왕의 아들로 태어난 자가 무엇을 누렸을지 남궁도위로서는 모를 일이나 임소병이 적어도 재정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자랐으리라는 추측은 쉬웠다. 본인이 원했다면야 사치를 부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생각에 잠긴 남궁도위를 두고 임소병은 선추에 눈길을 두었다. 곱게 매듭지어진 수실은 촘촘하니 결이 좋았고, 옥은 빛깔이 고왔다. 귀한 물건이다. 남궁도위의 말대로 산적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다. 임소병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게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선추가 어울리는 사람. 이를테면 과거를 치르고 관리가 된 이들. 남궁도위가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은 임소병으로 하여금 적잖게 시간이 지난 옛일을 기억에서 끄집어내게 했다.

임소병은 인의예지와 충효를 글로 읽어 배우고, 익힌 바를 행하며 살아왔다. 지식을 가진 이는 마땅히 뜻을 가져 펼쳐야 한다기에 과거까지 치르러 갔다. 그날 시험지를 제대로 내기만 했으면 장원 급제는 떼놓은 당상이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임소병도 이런 선추가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겠지.

시험장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부채를 갖고 있었다.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진다 한들 그것을 잡으려 하는 사람의 면면은 뻔했다. 기회를 잡을 여력이 되는 사람이야 거기서 거기니까. 타고나기를 신분이 높아 배워 익힘이 당연한 자, 비록 신분은 낮으나 가계가 넉넉하여 배움을 욕심낼 수 있었던 자, 여유로운 이들, 여유를 가진 이들.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임소병은 흔들렸다. 저들은 배운 것을 행함에 망설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네들은 그랬다. 과거에 급제하여 질 좋은 비단으로 지은 화려한 옷을 걸치고, 한 떨기 난이 그려진 부채에 선추를 달아 팔랑팔랑 부치며 점잖은 체하는 고아한 삶이 머지않은 미래에 당연했다. 그곳 모두가 배우고 익힌 것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당당하게 뜻을 펼칠 사람들이었다. 임소병은 그와 같은 앞날을 그릴 수 없었다. 이상했다. 그토록 바라고 동경했는데, 별이 꼬리 달고 떨어지는 걸 보면 재빠르게 기도할 수도 있었는데.

잠잠하던 심연에 불씨가 떨어졌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다. 덜컥 겁이 났다. 그대로 관료가 되어서 배운 것을 행할 자신이 없었다. 오지 않은 미래가 거센 불길에 맥없이 잡아먹혔다. 연기가 눈 앞을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뵈는 것이라고는 여태 모르는 척 회피해 온 현실이 전부였다. 그이는 임소병이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일필휘지 글을 써 내릴 때까지만 해도 얌전히 구석에 앉아 있었으면서, 인제 와서 여기가 제 자리라며 임소병의 앞에 뻗대고 앉았다. 이놈이었다. 이놈이 불을 질렀다.

바쁘게 붓을 놀리는 서생들의 가운데에서, 진작에 마침표를 찍은 임소병은 한탄했다. 자신은 왜 하필이면 산적왕의 아들로 태어났는가. 일개 산적 나부랭이의 아들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담 제 몸 하나만 쏙 빼서 도망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임소병은 만산의 주인, 녹림왕의 아들로 태어나 소왕으로 길러졌다.

녹림왕이라는 이름은 고귀했다. 하필 사파, 하필 녹림이라 무림에서는 천대받는 처지이었으나, 산에 모인 이들 중에선 가장 형편이 좋았다. 임소병이 그 증거였다. 그는 절맥을 타고난 몸이었다. 그가 녹림왕의 아들이 아니라 일개 산적 나부랭이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이제껏 살아나 있었겠나.

임소병은 답안지를 내려다봤다. 제 손으로 적은 이상론을 한 자, 한 자 읽어내렸다. 적은 대로, 배운 대로 행하려면 녹림의 형제들을 죽여야 할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쓴 문장들의 단어 하나하나가 고깝게 읽혔다.

임소병은 산적들을 그저 죄인으로 볼 수 없었다. 지은 죄가 명명백백하다 한들 그게 어찌 전부 이놈들의 잘못이란 말인가. 들에서 살 수 없어 산으로 기어들어 온 놈들이다. 굶어 죽기 싫어 남의 것을 훔치고, 얼마 되지도 않는 가진 것 빼앗기기 싫어 빼앗으려는 자를 죽이고, 저지르고 나서 보니 고향 땅에서 살 수 없어 도망쳐온 곳이 산이다. 밖에서 보는 이들에게야 사특할지 몰라도, 아니, 진정 이놈들이 사특하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임소병은 그들이 가여웠다.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

죽이지 못할 거라면 살려야 했다. 살릴 거라면 사람답게 살게 해야 했다.

바람이 멎었다. 바람이 없으니 자연히 산불도 가셨다. 잿가루 가라앉은 산은 평화로웠다.

임소병은 마른 붓을 벼루에 대어 적셨다. 먹물 양껏 머금은 붓을 제 이름자에 가져다 댔다. 지그시 눌렀다.

그날 가장 완벽한 답안지를 작성한 사람은 임소병이었다.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내보이지 않은 글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소병에게 선추가 어울릴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의 뜻이 들 아닌 산에 있는 한에는.

기억을 되짚은 끝에 임소병이 말했다.

 

“제가 가져봐야 돼지 목의 진주만큼이나 어울리겠습니까.”

 

그에 남궁도위가 곧장 반박했다. 아주 확고한 목소리로.

 

“아니요, 녹림왕께 잘 어울립니다.”

 

아니, 내가 안 어울린다는데 네가 왜…. 임소병이 어이가 없어 시선을 마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궁도위가 물었다. 말이 좋아 질문이지 심문이나 다름없었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 여태 선추를 달지 않으신 겁니까?”

“거추장스러운 건 취향이 아니기도 했습니다만.”

“그리 생각하셨으면서 다신 걸 보니 그건 선물로 받으셨겠습니다.”

“예에, 산적 놈들이 돈을 벌더니 사치품을 사더랍니다. 우스운 일이지요.”

“우습다니요. 녹림도 분들은 오랜 시간 녹림왕의 곁에서 함께했으니 녹림왕께 무엇이 잘 어울리는지 아셨을 겁니다. 어울리지도 않을 선물을 정성껏 준비했을까 봐요.”

 

그놈들이 정성껏 준비했는지 어쨌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임소병은 모나게 생각했다. 임소병의 반응이 심드렁해도 남궁도위는 열정적이었다. 하지 않는 버릇이 들어 어울리지 않다고 느끼시는 것이라느니, 아름다움을 즐기는 일에 자격이 있느냐느니, 무릇 수장된 자로서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어야 한다느니. 이런저런 말로 감싸도 제가 고른 선물이 어울리지 않을 리 없으니 얌전히 지니고 다니라는 속내는 가려지지 않았다. 거,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지, 하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도. 하여튼 오만하기로는 천하제일이었다.

순순히 끄덕이자니 남궁도위에게 지는 것 같아 싫었다. 임소병은 꿋꿋하게 토를 달았다.

 

“산적 같지 않다고 시비 걸 때는 언제라고 태도를 바꾸시는군요. 가주 될 자가 쉽게 쉽게 말 바꾸면 아랫것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그, 그건! 그만큼 선추가 잘 어울린다는 뜻이었습니다!”

“아, 그게 그런 뜻이었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말이었군! 깨달음을 얻은 임소병이 실랑이를 멈추었다. 손바닥 하나로는 손뼉을 칠 수 없는지라 남궁도위도 덩달아 침착해졌다. 임소병은 부채에 매달려 달랑거리던 선추를 손에 쥐었다. 손끝으로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가진 것을 보는 눈이 새삼스러웠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번충이, 이걸 줄 때 소가주랑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번충이 말했다.

 

─ 두목은 산적왕답지 않으십니다.

 

그에 임소병은 일없이 와서 사람 속이나 뒤집느냐고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그러기 전에 번충이 정성스레 포장한 함을 건넨 탓이다.

 

─ 산적 놈들이랑 여태 번 돈을 모아 장만했습니다.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번충은 어쩐지 기가 죽은 듯 조심스러웠지만 동시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나운 인상에 볼때기를 붉히니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몸짓이 산만해 어설펐다. 번충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임소병은 그를 이해했다. 산적 놈한테 선물 줘 본 경험이라는 게 있겠는가. 어색해서 문제지 선물은 모자랄 데 없이 포장되어 있었다. 선물을 함에 담고, 그 함을 다시 비단으로 감쌌다. 선물은 어찌 골랐을 것이며, 그를 담을 함과 비단은 어떻게 골랐겠는가. 여간 수고를 들인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리고 어색하기로는 받는 쪽도 마찬가지였다. 임소병 역시 멍청한 몸짓에 넋 빠진 목소리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며 선물을 받았다. 물론 임소병이 남궁도위에게 알려줄 때 이 부분은 생략됐다.

임소병의 이야기를 들은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해서 한 말일 겁니다.”

 

그에 임소병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갑자기 가슴께가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뭔지 모르겠다. 이상했다. 방금까지 콧등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던 남궁도위가 밉지 않게 보였다. 소가주가 번충을 알면 얼마나 알아서 떠드느냐는 말은 목구멍 안에서 사르르 녹아버렸다. 다른 얄미운 말이라도 뱉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마땅찮았다. 실하게 익은 매실이 입안에 들어찬 것처럼 기분이 마냥 달았다.

결국 임소병은 이번만 남궁도위를 봐주기로 했다.

 

“보는 눈 없는 것들 돕느라 애쓰셨소.”

 

저가 골랐음을 알아챈 것에 놀란 건지, 갑자기 분이 풀린 것에 놀랐는지 남궁도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눈꼬리를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귀한 마음이 온전히 전해졌음에 기쁠 뿐입니다.”

 

흠잡을 곳 없는 대답이 되려 재수 없었으나, 임소병은 아무 말도 못 했다.

三衢道中 삼구산 가는 길에

                                   증기(曾幾)

梅子黃時日日晴 小溪泛盡卻山行

매실 노랗게 익어갈 때 날마다 쾌청하여

소계를 배로 달려 와서는 다시금 산행을 하네

綠陰不減來時路 添得黃鸝四五聲

녹음은 오던 길 못지 않게 우거졌는데

꾀꼬리 몇 마리 지저귀는 소리 덤으로 얻네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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