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직장 동료 내지는 만나면 점심 같이 먹는 사이에는 그 정도의 세세한 이해가 필요하지는 않다. 원래 그런 법이다.
그리고 흰나비는 누구보다 그 ‘선’을 확실하게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고.
"저에게 연애 상담 같은 걸 받으시겠다고요?"
세상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불러내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용건을 들은 애쉬는 금세 심드렁한 낯이 되었다. 이런 일에 끼는 게 제일 귀찮습니다. 벌떡 일어나 나가려는 애쉬의 옷자락을 붙들고 선배가 우는 소리를 했다. 그러지 말고. 애쉬 씨가 적임자야. 다른 동료들에게 물어보면 '사내연애 같은 짓을 왜 해요?' 이런 말밖에 안 해준단 말이지. 즉 사내연애를 오래 하고 있는 자신이 만만해 보인다는 뜻이었다. 애쉬는 결국 도로 자리에 앉았다. 실랑이를 벌이느니 차라리 잠깐 들어 주고 가는 게 낫겠다, 겸사겸사 제일 비싼 음료도 좀 얻어먹고. 연애 상담이 별거 있나. 대충 듣고 있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진짜 찐사인데요? 바로 사귀시면 될 것 같습니다.'따위의 말이나 해 주면 되는 것이다(다년간의 경험 끝에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그는 '진짜 찐사'라는 말을 던질 만한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선배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어야 했다. 선배가 현장직의 히어로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도저히 선 안에 자신을 들일 생각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였다.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내게 마음을 열어 줄까? 그 사람의 마음도 이해가 돼서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겠어. 선배가 한탄했다. 애쉬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무슨 변고가 생길지 모르는 것이 현장직 히어로였다. 섣불리 마음을 주고받았다가는 상대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선배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길게 끌지 않고 곧바로 조언을 했다.
"선 안에 들여 주기를 기다리면 영영 아무것도 안 될 겁니다. 먼저 선 안으로 발을 들이셔야죠."
"어떻게 그래? 그 사람이 원하지 않을 게 뻔한데."
몇 년 사이 비약적으로 인내심이 늘어난 애쉬는 '이런 얘기 듣고 싶어서 연애 상담 받는 거 아닌가요?'라고 일갈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할 방도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선배의 에스프레소에서 풍기는, 지독하게 쓴 향기가 자꾸 생각을 방해했다. 저 정도의 자극이면 그분께서는 좋아해 주실까, 이제는 일상이 된 잡념이 스쳐갔다.
"그럼에도 선을 넘고 싶다면 넘어야지 별수 있나요. 배려는 연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덕목이지만, 지금 연인이신 것도 아니잖아요? 한번 해 봐요, 사귀는 것도 아닌데."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냐?"
"제가 해 봐서 하는 말이에요.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짐작이 가시지 않나요?"
선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찌저찌 납득한 듯했다. 그분이 호락호락한 이미지가 아니긴 하지, 그리 생각하며 애쉬는 잠시 웃음을 삼켰다. 함께한 지 몇 년이 지났으나 애쉬는 그분이 아직도 조금 어려웠다, '어렵다'는 단어가 내포하는 모든 의미에서 그러했다. 그리고 애쉬는 그 감각을 이제는 꽤 좋아하게 되었다. 영영 우주의 진리에 가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먼 과거의 천문학자들처럼.
"애초에 선을 넘으면 안 되는 건가요? 달리기 경주에서 총성이 울렸는데도 선을 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아요. 그리고 선배님의 총성은 이미 울렸잖아요. 좀더 뻔뻔하게 굴어 보세요."
"그러다가 싫어하면?"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하세요. 그러다가 그분이 마음을 조금 놓는 것 같으면 다시 발을 들이세요. 의외로…… 그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죠."
옵션을 몇 개나 추가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가장 비싼 음료를 얻어먹고 애쉬는 만족스럽게 집으로 향했다. 도움이 되는 조언을 했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오늘 갔던 카페는 맛이 좋았는데요. 괜찮으시면 다음에 같이 올까요?] 메세지를 다 입력해 놓고서 애쉬는 화면을 툭툭 두드리며 고민했다. 어딜 가든 애인 생각이나 하는 녀석은 꼴불견이라는데 자신이 딱 그 짝이었다. 다만 그것 때문에 망설이는 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애쉬는 음료에 이것저것 추가해서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워낙 낯가림이 심하기도 하고, 구태여 직원을 수고스럽게 할 만큼 음료에 정성을 들이지 않았었다. 옅은 미각 때문에 맛보다는 식감을 중시하는 그분 때문에 애쉬 또한 음료에 이것저것 넣어 먹는 사람이 되었다. 자바칩이며 오레오 같은 것들은 -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 - 풍미를 더하지는 못했고 애쉬는 썩 식감을 즐기는 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분을 따라하는 게 좋아 애쉬 또한 그렇게 했다. 카페 직원들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생각하니 또 웃어 버릴 것 같았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나 자신조차 이렇게나 이해하기 어려운데. 어쩌면 나는 영영 당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지레짐작하며 선 안으로 발을 들이는 것이다. 단순한 직장 동료나 점심 같이 먹는 사이 따위로 남지 않을 거라고 결심해 버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애쉬는 근본부터 다른 존재였다. 그럼에도 어떤 부분이 맞닿았기에 서로를 직면해 버렸다. 풀리지 않는 난제라 해도 애쉬는 기꺼웠다.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다만 곁에서 나란히 걷고 싶었다. 당신의 선 안에서, 아주 느린 걸음으로.
오늘 갔던 카페는 독특한 젤리를 쓰던데요, 괜찮으시면 다음에 같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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