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이별, 아홉 번째 연인
…… 대충 여덟 명이었던 것 같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하루 종일 수프를 몇 방울 먹었고 머리카락을 몇 가닥 흘렸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그만큼 옛 연인의 숫자는 무가치했다. 헤어졌다고 속상한 것도 한두 번이지, 여덟 번 까고 나니까 감흥도 없었다. 그러니 한잔 하자고 제 친구를 불러내는 건 지극히 관성적인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불러낸 친구는 잔뜩 복잡한 낯을 한 채 할 일을 제쳐두고 제게 달려와 주었다. 그게 몹시 감미로웠다. 그 낯을 보고 싶어서 구태여 웃기지도 않는 연애 놀음을 하려 안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코앞에 앉은 친구가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자신 역시 장단을 맞추어 주어야 했다. 카논은 한껏 꾸며낸 속상한 낯을 한 채 손 안에서 술잔을 굴렸다. 이번에는 또 불쌍한 연애 상대의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더라. 기억나기는커녕 상대의 얼굴까지 가물거렸다. 짧지 않은 고민 끝에 꺼낸 말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물론 내가 찬 거지만…… 그렇다고 속상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란다."
거짓말이다. 안 속상하다, 하나도. 연애 따위로 그딴 걸 느낄 청춘은 이미 지났다. 친구가 제게 보내는 눈길 또한 썩 미덥지 않은 듯했다. 추궁이라도 당하는 듯하여 카논은 몇 마디를 더 보탰다. 이번에도 나는 최선을 다했단다. 서로가 서로에게 썩 좋은 상대가 아니었을 뿐이지. 이마저도 진실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상대는 자신을 몇 년간 짝사랑했다고 했다. 카논은 오로지 그 마음이 갸륵하여 받아 주었다. 한쪽이 호의를 베푼 관계는 당연히 오래가지 않았다, 특히 카논의 아량은 유통기한이 짧았다. 그리하여 슬슬 지겨워지니 거침없이 이별을 고한 것이다. 그 이력을 줄줄 읊을 마음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사랑을 잃어 서글픈 친구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야 걱정해줄 테니까, 무척 감미롭게.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친구는 예의 평소의 근심 가득한 낯으로 돌아왔다. 그 얼굴을 시선에 가득 담으며 쐐기를 박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냐. 그렇지만 하나같이 결격 사유가 있는 걸 어떡하니? 아마 평생 이렇게 연애만 하다가 세월을 죽일지도 모르겠구나."
됐다, 이 정도면 대충 잘 둘러댔다고 생각했다. 카논은 무척 뿌듯한 기분으로 한 잔을 더 따라 마셨다. 이제 제 친구가 어떤 말들로 제 마음을 위로해 줄까. 무슨 말이든 좋으리라. 자신을 위해 애쓰는 친구가 카논은 몹시 좋았다. 이 또한 갸륵하다고 해야 하나, 그것보다는 한 층위 높은 감정인 것 같기도 하고. 뭐가 됐든 구태여 정의내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카논은 별로 마시지도 않은 술에서 번뜩 깨는 듯했다.
"…… 그럴 거면 그냥 나랑 사귀어."
말을 마친 제 친구, 리미온의 얼굴에는 어떤 결의가 서려 있었다. 이제 보니 귀도 조금 붉었다. 단지 술 때문에 일어난 홍조가 아니라는 것쯤은 카논도 알았다.
하하. 카논은 조금 웃고 말았다. 과연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카논의 연애가 두 달을 넘어가는 일이 더 드물다는 건 리미온이 더 잘 알 것이다. 몇 달 애인 행세를 하는 대신 우정은 포기하기로 한 건가? 그러고 보니 '그 녀석'과는 헤어졌다고 했었나.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보잘것없는 남자 말야. 좀 집요하게 괴롭히긴 했었는데.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엉겨붙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거절할 마음만큼은 추호도 들지 않았으니 카논은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좋아. 거절할 이유가 없구나."
이제 대충 아홉 번째 애인인가.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느냐고 물어보면 부끄러워하려나. 너와 헤어지면 누구에게 상담을 받지.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 굴러다녔다. 잡념들을 걷어내면 단 한 줄의 의문만이 남았다. 나도 너를 좋아했었나? 지금 당장 정답을 가리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아, 이런 고민이 들 때면 아주 간단한 판별법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카논이 말했다.
"키스부터 하겠니? 그래, 그게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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