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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판 14 에메트셀크 드림

테세우스의 배

잠깐 by 션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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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지금, 하나의 배가 있어. 아주 오래 사용한 배야. 호수에서 타고 다녔을 수도 있고 창조 생물 실험용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고. 용도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사용한 시간이지. 하여튼 그렇게 오래 사용하다 보니 교체할 때가 온 거야. 새로 사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새로 사는 게 아니라 고치기로 한 거지. 비효율적이지만 그러기로 했어. 자 여기서부터가 진짜 문제야. 들어봐 그렇게 고친 배는 새롭게 만들어졌어. 생각보다 고칠게 많았거든 바닥도 뜯어내고 갑판도 뜯어내고. 균형도 왠지 안 맞는 거 같아서 처음부터 바로 잡겠다고 내부도 많이 고쳤어. 그렇게 고쳐댔으니 멀쩡한 부분이 없어서 겉도 깔끔하게 새로 칠했지.

그러면 새로운 배가 되는 거 아니냐고? 내가 지금 할 이야기야 그게.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달라졌어. 그 배를 사용한 사람도 이게 저번에 썼던 배라는 걸 모를 정도로 달라진 거야. 부품도 구조도 완전히 달라졌지. 그렇다면 그건, 전과 똑같은 배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아? 아니면 그럴 수 없을 거 같아? ……너는 이런 생각 많은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달갑지 않은 모양이네. 여행지에서 이상한 걸 배워오는 게 싫다고. 그것 참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여행과 이야기는 동일한 단어야. 다양한 곳에 가면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오는 게 당연한 걸.

질문한 게 나니, 내 대답부터 듣는 거구나. 좋아 말해주면, 네 대답도 알려줘. 그게 공평하고 좋잖아.

나는 태우는 게 같다면, 사용하는 게 같다면 그게 어떤 형태로 변해도 같은 배라고 생각해.

본 목적이 변하지 않았으면 그건 동일한 거야. 거기에 담은 바람과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변하지 않은 거야. 그 배가 전과 다를 바 없이 누군가의 디딤돌이 되어 준다면 여전한 거야! 내 판단 기준은 그래. 에메트셀크 너는 어때?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너는 그 배를 같은 배라고 생각해? 생각하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해? 알려줘! 토의해보자. 토의라는 말은 이때 쓰는 게 아니라고? 안 넘어가주네. 알았어 그럼 이야기해보자. 어차피 할 거 없잖아. 할 게 많다고. 할 게 많았으면 처음부터 말 막고 갔을걸? 얘기해봐. 들어줄게. 

"역시 다른 배야. 구조가 달라졌으면 같아질 수 없어."

"어, 어디서……."

"그거 놔, 너는 임시라고 해도 편입된 동료, 아 이런. 알았어. 구경하기로 한 사람을 무기로 맞이하는 취미가 있는 건가? 그게 아니더라도 퍽이나 성대한 환영이군. 나는 네가 물어보는 것에 정성껏 대답해주고. 명복을 빈 동료까지 찾아줬는데."

세계가 엉망진창으로 갈라져 기준 없이 흩어지긴 했지만, 그런 조각도 나름대로 잘 모았을텐데. 에메트셀크는 눈앞에서 부산스럽게 시선을 돌리면서 무기를 쥔 손을 쥐었다 피는 이노테라를 응시했다. 닮은 건 눈알 하나 뿐이군. 아젬은 사교성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주눅 들거나 남의 눈치를 보는 일이 적었다. 좋아하는 걸 하고 좋아하지 않는 일은 조금 미루다가 했지. 자기가 가야 할 길이라면 둘러보지 않고 일단 가고 보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 빛의 전사는 어떤가? 가야 할 길을 알면서도 수십 번 수백 번 뒤를 보고 누군가가 손을 잡아줘도 우물쭈물. 저런 성격으로 잘도 여기까지 왔어. 그대로 뒷걸음 쳐도 다들 그러려니 여기고 넘어가겠지. 저런 성격으로 창은 제대로 잡을 수 있는지. 어떻게 용기사가 되기로 마음 먹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장을 이끌고 기적을 일으키는 영웅이라기 보다는, 아득한 오두막에서 얌전히 살다 가끔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다니는 산책을 모험이라 부르며 돌아다닐 것같이 생겼는데.

완전한 인간. 온전한 혼이라고 해도 살아있는 이상 추억을 빼놓을 수 있을까. 에메트셀크는 추억이란 단어와 억만년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본질은 추억과 과거다. 이미 멸망해 갈라진 것을 미화하면서 기울어진 천칭 위에 올리며 지금까지 살아왔으니까. 지금까지 버텨왔으니까. 그래서 변덕으로 이 방을 찾아왔다. 아젬의 발걸음 소리가 바람과 함께 움직이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여행을 다녀왔는지 보고 하지도 않고 성큼성큼 에메트셀크를 찾아온 아젬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에 지금, 하나의 배가 있다고.

아젬의 눈동자도 지금 눈앞에 있는 덜떨어진 빛의 전사의 눈동자도 새벽과 아침 사이에서 언뜻 보이는 파란 하늘과 닮아서. 에메트셀크는 충동적으로 질문했다.

"이봐, 여기에 배가 하나 있다고 치자."

에메트셀크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노텔라는 귀를 쭈뼛쭈뼛 세우면서 얌전히 무기를 집어넣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고까운 상대지만. 오늘 밤은 생각할 게 많은 밤이라 환기할 이야기 거리가 필요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당신, 나랑 만난 적 있나요? 아니면 누구 아는 사람이 저와 닮았나요? 이노테라는 어떻게 그러고도 모험가를 하고 있었어? 가끔 놀라움과 빈정거림이 섞인 질문을 받을만큼 둔하지만. 에메트셀크는 언짢아 지는 상대라서 그런건가. 흠이 잡혀 한 소리 듣는 게 싫어서 그런 건가. 그것도 아니면 이노테라도 짚이는 게 있는 건지. 그를 상대로는 눈치가 제법 좋았다. 그가 말하고 싶은 걸 바로 알아차리고. 가고 싶은 방향이나 원하는 걸 바로 알지는 못하지만.

나를 보지만 '나'를 보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종족 특성 덕분에 동공이 유독 비대해, 다른 종족에 비해서는 시선을 끌긴 하지만. 그런 시선과는 다르다. 본인이 알면 내가 왜 그러겠냐고 그 머리는 장식이냐며 욕하겠지만 거울을 보듯이 상대를 보고 자신을 투영하는 것도 아니다. 에메트셀크 본인은 아니지만, 이노테라에 무언가를 투영하고 있다. 아마도 과거의 무언가를. 그게 뭔지를 물어보면 솔직하게 대답해줄까? 하이델린과 조디아크의 진실처럼? 아씨엔에 대한 걸 말해줬을 때처럼?

대답해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노테라는 입술만 몇 번 움직이고 말았다. 궁금하긴 해 확인해보고 싶긴 하다. 하지만 직접 물어볼 만큼 신경 쓰이는 건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다보니 언어로 쉽사리 변환되지 않았다.  이 질문에 책임감이 있었다면 더 용기를 냈을 테지만. 그런 책임감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품은 의문 대신 에메트셀크한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이노테라는 입을 열었다. 

"테세우스의 배……."

그렇다면 그 배를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슈톨라가 재미있고 기본적인 이론이라고 가져온 질문이었다. 거기서 이노테라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슈톨라가 흥미를 가지는 대답, 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실망 시키고 싶지 않아서 이리저리 생각했다가. 파파리모가 네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린다고, 솔직하게 그냥 말해도 된다고 해서……. 

"비어 있는 머리인 줄 알았는데, 제대로 이론은 들어있군. 네 의견은 어떻지?"

"태운 게 같으면, 같은 배죠. 달라지지 않아요."

잘 설명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지리멸렬하고 재미 없을지도 모르지만. 몇 번이나 실망하지 말아달라고, 부족하다고 쿠션을 까는 이노테라를 보고 아슈톨라가 웃었다. 그런 말을 할수록 당신의 말이 기대되는 건 아시나요? 장난스럽고 드물게도 천진난만한 태도로. 

"형태가, 달라져도 사용해주는 사람이 같다면, 찾아주는 사람이 똑같다면…… 그건 같은 배죠."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알고보니 수정공이 제대로 된 좌표를 잡지 못해서 한 명씩 데려가다 난 참사지만 그때는 다른 세계에 대한 연구를 할 수가 없었다. 아슈톨라도 위리앙제도 가버렸으니까. 새벽이 점차 의식을 잃어도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룰 거 같았지만. 여전히 이노테라는 새벽의 모험가였다. 새벽의 이다가 알라미고의 해방자 리세가 되어도 이노테라는 홍련의 해방자 일부를 맡은 새벽의 모험가였다. 빛을 쌓아두고 있는 지금 상황이 불안하긴 하지만. 이노테라는 이런 나라도 새벽이 찾아준다면야, 자신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로 이끈다면 무섭지 않았다. 죄식자가 되어도 (상상만으로도 무섭긴 하지만) 이노테라는 끝까지 새벽의 일원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아르버트는 싸우고 난 뒤에 남는 마음, 누군가가 전한 마음이 남는 게 좋았다고 했지. 그리고 그건 아르버트의 본질이다. 그런 마음이 남은 곳을 지나갈 수 있으면 어둠의 전사 아르버트는 다소 방황할지라도 분명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오명을 뒤집어 쓰고 죽어도 그는 여전히 어둠의 전사다. 속할 곳이 있다면 품은 마음이, 바람이 변하지 않았으면 어떤 모습이 되어도 동일하다. 디딤돌이 같다면 서있는 위치가 달라져도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에 변함 없는 마음가짐으로 서있을 수 있다.

그러니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서 묻는다면 입을 모아 대답할 수 밖에. 그건 전과 똑같은 배야. 아젬이 들고 온 의견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잘게 부서진 아젬의 조각이라 그런걸까. 그들 개인의 삶에서 나온 대답일까. 

"분명 되다말았는데……."

심심풀이로 묻고 물었던 것이 거창한 명칭이 되어 유명한 질문이 되었다. 그런 변화가 있었으니 흐리멍텅한 빛의 전사가 엉뚱하지만 진실된 아젬인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알고 있는데도 에메트셀크는 무심코 읊조리고 말았다. 분명, 되다 만 것인데 "같은 걸 태우면 똑같은 배"라는 대답을 하는 걸까. 어째서 저것이 아젬의 조각 중 하나인 건지. 아젬의 조각이니까. 아젬과 비슷한 삶을 살게 되는 걸까. 에메트셀크는 여전히 과거에 대한 판단이 느렸다.

난해한 문제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격한 것 같기도 하고. 이노테라의 대답을 들은 에메트셀크가 턱을 괴자 이노테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중간한 정답이라 어디까지를 정답으로 보고 어디를 오답으로 볼지 고민하는 거 같았으니까. 그가 기준을 내세워 무어라 말하기 전에 못 박아두고 싶었던 게 있었다. 

"되다 말면 안 되나?"

흘러나온 게 단순한 숨소리라면 그러려니 넘겼겟지. 오늘 밤은 어딘가 어색한 밤으로 기억했겠지. 이노테라는 에메트셀크를 곱게 보지 않았다. 뭐 이건 에메트셀크도 마찬가지지만, 뻔뻔하게 적대는 실패했으니 적대하지 않는다 네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노테라보다는 훨씬 유하게 상대와 접하는 셈이다. 이노테라는 그런 식으로 상대와 접할 수 없다. 사람과의 교류가 워낙 서툴기도 했고.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에메트셀크인가.

아씨엔. 갈부스. 하나만 있어도 치가 떨리는데 그는 그 둘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직접 수 놓은 수의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을까. 이노테라가 그 수의를 접으면서 흘린 눈물을 그가 알까? 잔 심부름하고 다니던 고즈넉한 교회를 눈물과 후회로 찾아간 경험을 알기나 할까. 좁고 어두운 통로에서 무서워 죽겠는데.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이 꺼지면 해가 떠오를 일은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떨림을 참고 숨차게 달린 경험을 했을까. 이대로 쐐기를 놓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서 장대를 세게 쥔 적이 있을까. 

있다 해도 이노테라와는 다르겠지. 이노테라는 영웅을 기대하면 실망하고 평범한 개인을 바래도 조금 아쉬운 평균보다 살짝 아래에 인간이다. 비관적으로 굴기 쉽고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졌고. 낯선 걸 두려워하지. 하지만 에메트셀크는 어떠한가? 아씨엔과 갈부스의 삶을  과장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말투는 광대라기 보다는 무대 위에 올라간 배우처럼 느껴졌다. 

비유하자면, 아니 비유하지 않아도 정말 그랬다. 이노테라는 이 세계 끝자리에 앉은 관객이고 에메트셀크는 이 세계를 바탕으로한 극의 배우겠지. 같은 세계란 극을 이루는 주된 구성 요소니 대화하다 보면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극이라도 함께 지낼 수 있지 않나. 이노테라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파티나, 그런 술 연회는 달갑지 않아 했지만. 그런 곳에서 산크레드와 함께 마시는 술은 좋았다. 소란스럽고 낯 분위기는 몸을 주눅 들게 만들지만. 리세와 함께한 연회는 즐거웠으니까. 전부를 이해하지 못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있을지도 몰라.

눈앞에 있는 상대가 아씨엔도 갈부스도 아니라면. 평범한 에메트셀크라면 이노테라는 그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겪은 고난이나 역경의 무게정도는 삼킬 수 있으니까. 그건 이노테라가 영웅이라서. 그런 커다란 그릇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과 달랐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으니까. 자신감과 자존감도 낮은 전형적인 타입의 문제다. 내가 뭘 당하건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으니까. 

잔 심부름하고 다니던 교회를 눈물과 후회로 찾은 경험도. 좁고 어두운 통로에서 벌벌 떨면서도 등불을 들고 뛰었던 날도. 살아있으니까 어떻게든 해봐야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 어떻게든 쐐기를 잡은 걸 놓고 싶은 밤도 이노테라 혼자라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을텐데. 훌훌…… 털어내진 못하고 우물쭈물, 어정쩡하게 나섰을텐데. 

꽃 같은 사람이라는 게 단순한 비유가 아니구나. 재가 되어도 사랑스러울 수 있겠어. 이노테라만의 후회와 눈물이 아니었다. 믿기질 않아서 꾸물거리면서 매장을 하고 있자니 문득 그게 생각났다. 인사성이 참 밝은 사람이었는데. 어물거리는 이노테라한테도 자주 인사하고, 모래의 집에서 자주 말을 걸어주셨는데. 

등불을 가지고 뛰어다니면서, 안전한 통로를 따라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모래의 집은 어른의 사정이라고 하는 모종의 이유로 에텔라이트가 없어 한참 돌아가야했다. 그게 참 불편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래서 더 좋은 점도 있었다. 가는데 긴장을 풀 시간이 많기도 했고, 모래의 집 근처에 있는 상인들과 이야기하다 친해지기도 했고. 아름다운 사막의 밤 아래를 걸으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고. 새벽과……. 새벽과.

"어쩌면, 정말 어쩌면이지만. 당신의 제안에 응했을지도 몰라."

흥분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리 말하자 에메트셀크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배우처럼,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는 주겠다는 교수님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부질없는 것까진 아니니.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태도로.

- …… 이것 참 그리운 광경이군.

돌의 집으로 이주하고 나서도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저녁별만을 찾아가 주변만 살피고 돌아왔다. 모래의 집엔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근처에 간 것만으로도 충족되는 기분이 들어서. 그 날은 유독 만족스러웠지. 그때의 이노테라와 이 에메트셀크는 비슷하지 않을까. 아마 엇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같지는 않겠지. 에메트셀크는 고대를 그리워하고 이노테라는 새벽을 그리워했으니까.

형태가 달라져도 찾아주는 사람이 똑같다면 같은 거야. 이노테라는 아젬의 조각이지만 이노테라를 찾은 건 에메트 셀크가 아니라 새벽이니 아씨엔이 될 수도 없고. 그와 뜻을 함께할 수도 없었다. 이미 다른 존재가 되었으니까.

새벽이 아니라 에메트셀크가 가장 먼저 이노테라를 찾았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많이 달랐을테지. 이노테라는 가장 되다 만 존재였다. 지금도 부족한 사람이지만 옛날에는 정말 불완전을 뛰어넘어 만들다 말았다. 일단 살아있으니 살긴 하지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보니 모험가가 됐긴 했지만 이래도 정말 괜찮은 걸까. 목적도 갈 방향도 명확히 없는 삶에 의미는 있는 걸까. 창 하나 쐐기 삼아 돌아다니던 이노테라한테 에메트셀크가 나타나 똑같은 제안을 한다면 어떨까.

나는 세계를, 인간을 진정한 형태로 돌려놓고 싶다는 속내를 내보인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세계를 진정한 형태를 되돌려놓겠다고 잔혹한 짓을 하는 걸 계속 신경 쓰겠지. 규탄하고 혐오하면서도 너는 지금 잘못된 형태라서 그런거야.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어. 완전한 네가, 온전한 세상이 된다면 달라질지도 몰라. 달콤한 속삭임을 듣고 그걸 돕겠지. 새로운 쐐기가 생겼으니까. 아 역시 이런 삶은 잘못된 게 맞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 선악과를 먹은 이들이 낙원에서 추방 당했듯이. 깨달음을 얻은 이노테라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 어느 하나 유지하지 못하고 망가지겠지. 이미 얻은 깨달음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무너지는 것도 싫고, 더 부정 당하는 것도 싫어서. 이리저리 이유를 붙여가며 버티다 안 쪽에서 썩어갔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노테라는 에메트셀크가 아니라 새벽을 만났다. 특별히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고 평범한 모험가인 이노테라가 새벽을 따라가기로 한 건 단순한 호기심과,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다. 하이델린의 인도일까. 그 이끌림과 호기심의 근거를 찾을 순 없지만 따라가기로 했다. 새벽이 되었다. 새벽이 된 이노테라는 갈부스 덕분에 많은 동료를 잃었고, 많은 슬픔을 공유해야했으며. 아씨엔덕분에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무대 위에 있는 당신은 연기와 전체적인 극의 진행을 위해서 관객인 날 보지 못했을 거야. 보잘것없고 초라하고.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이는 한 자리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겠지. 이제 와서 무대 위로 올라가라고 해도 난 가지 않아. 이 극은 내가 올라갈 극이 아니니까. 내가 올라갈 무대는 그런 게 아니야.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연기하지 못해도 상관없고, 마음 가는대로 하고 싶은 대로 스텝을 밟아도 괜찮은 곳이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배우가 되지 못하면 다른 걸 찾으면 되지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문제를 넘겨주는 동료를 위해서라도. 한 무대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이어지는 모든 극을, 이야기를,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준 이들을 위해서라도.

"참 눈물 겨운 동료애군. 그럼 그 새벽이 사라지면 죽기라도 할 건가?"

"여태까지 뭘 들은 거야?"

고대를 그리워하며 완전한 세계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게 지금의 에메트셀크고. 모래의 집을 그리워하고 그에 관련된 모든 추억을 품었지만. 다시 모래의 집을 만들진 않았다. 그게 지금의 이노테라였다. 

새벽이 없어진다고 해도 새벽을 되살리겠다면서, 조각을 모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 흩어진 조각도 사랑할 수 있어. 그 조각이 있는 세상을 사랑할 자신이 있어.

그게 격이 떨어진다고 해도? 이게 과연 그 조각이 맞기나 한지, 의심 될 정도로 형편 없다고 해도? 

이노테라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이델린과 조디아크로 둘로 갈려서 싸운거면, 고대인도 어디 하나 모자랐다는 거 아니야?"

완전하면 의견도 같아야 하는 거 아니야? 완전하다는 건 하나의 세계라는 거잖아. 갈림길이 있는 길이 올바르고 완전한 길이 될 수 있어? 되다만 것이 이노테라를 찌르는 표현이라면. 지금 화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태도는 에메트셀크를, 그의 모든 걸 찌르는 한마디였다. 이노테라가 아젬의 조각이 아니라면. 아르버트가 아젬의 조각이 아니라면. 가능성을 보고 다른 방법을 하기로 한 에메트셀크가 상대가 아니었으면 평온을 깨질 벼락이 내리치고 빛이 범람했겠지.

에메트셀크는 턱을 괸 손을 모으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방금 좋은 분위기였던 거 같은데. 저렇게 보내도 돼?"

"좋은 분위기는, 아르버트 방금 너랑 이야기한 게 좋은 분위기지. 저런 상대랑 이야기한 건 좋은 분위기가 못 돼."

좀 더 어른스럽고 태평한 태도로. 날카로운 지적인 척, 제대로 상대를 파고 들어가는 무기인 척 찔렀어야 했는데. 이노테라는 머리에 너무 열이 올라서 목소리도 표정도 엉망진창, 난리도 아니었다.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좀 더 정돈된 논리로. 다듬어진 모습으로 멋지게 대응하고 싶었는데…… 이노테라가 마른 세수를 하자, 아르버트가 편히 웃었다.

"평소의 이노테라는 어디로 간 거야? 진정 좀 해."

"……응."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었으니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어떤 형편없는 표현이라도 의견을 전하는 건 중요하다는 걸 배우기도 했고. 또. 또. 

에메트셀크는 아젬의 조각인 - 정작 이노테라 본인은 그 사실까진 모르고 아는 사람과 내가 비슷한가 보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만 - 이노테라를 특별히 여기고 있으니까. 그게 참 싫었다. 이노테라는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으니까.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나라고 정의 내린 적도 없으니까.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마다 사고방식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과 어울리는 건 싫지. 내가 싫어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리는 건 어렵지. 무덤을 만들겠다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터전을 망치겠다니, 이노테라는 그럴 수 없었다. 

새벽과 만나서, 아니 새벽과 만나기도 전부터 이노테라는 그 누구보다도 살아가는 현재를 동경하고 사랑했으니까. 영웅답지 못한 빛의 전사에게 있는, 영웅적인 면모였다.

아니지 지금은 어둠의 전사인가?

빛의 전사. 어둠의 전사. 칭할 단어가 무엇이든 상관없겠지. 이노테라는 반쪽 짜리 인간이었지만,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였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어떤 변화를 겪어도 달라지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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