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싫어!
민필리아X빛전 기반, 리세 의자매 드림 커미션
다른 사람 입장으로 생각해봐라. 이노테라는 그런 역지사지가 힘들었다. 타인을 생각하고, 만들어낼 공간이 모자랐으니까. 발이 닿는다면 어디라도 갈 수 있는 모험가면서 담을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 우습긴 하지만. 사소한 목표라도 잡고 여행을 떠나는 일반적인 모험가와 달리, 이노테라는 가만히 서있을 수 없으니 이곳 저곳 떠밀려 걷는 모험가라 어쩔 수 없었다. 타인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자기 안에 타인이 머물 자리를 만들 공간을 만드는 것도 할 수 없을만큼 속도 마음도 좁았으니까. 그래서 누구와 있어도 어딘가 동떨어진 분위기가 났다. 내가 들어갈 자리라는 건 없고, 내 안에 들어갈 타인이라는 건 없으니까. 상대의 의도를 고려하는 것도 배려하는 것도 다 어려웠다. 쭉 그렇게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어울려 살아가는 게 어렵겠지.
타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 못하고, 왠지 모르겠는데 거북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손만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때우겠지. 왜 화 내지, 왜 못마땅해 하지. 알 수 없는 하루하루만 쌓고 미묘하고 미지근한 선 위에서 휘청거리면서 살겠지. 앞으로 쭉 그럴 거라는 작은 체념을 이노테라는 항상 가지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 어어어? 리세가 알라미고 사람들과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자리를 떠난 순간 이노테라는 신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익숙하고 낯선데, 확실하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각이었다. 언제 또 이랬더라. 계시처럼 찾아오는 초월하는 힘과는 달랐다. 그것보다 훨씬 일상적이고 평범한…… 분명…….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예시가 떠올랐다. 처음 창을 쥔 날이 생각났으니까. 균형 하나 제대로 못 잡고 어정쩡하게 창에게 끌려 다니다가 어느 순간, 정말 전조도 없이 불현듯이 내 팔처럼 창이 움직이고 휘둘러지는 그 순간. 그때 느낀 그 감각이다. 용기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초적인 감각이 이노테라를 다시 찾았다.
용과는 하나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의뢰인데. 시작할때 느낌이 영 아니라서 주의하다 보면 사룡과의 연결점이 생기는 일이 간혹 있고. 그게 지금은 없어진 용기사의 두 번째 덕목이었다. 처음 창을 쥔 날로부터 긴 시간이 흘렀고, 이노테라도 용기사로서 경험이 쌓였으니 그런 감이 생긴 걸까. 돌아온 리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대. 로 시작하는 용시전쟁의 잔해를 가져오는 게 아닐까?
그러겠냐고. 이노테라는 상황을 정리했다. 용시전쟁의 여파는 길고 오래 가겠지만. 알라미고와 연관될 리는 없다. 그럼 이 감각은 도대체 뭐지? 용기사로 출발선에 선 날 느꼈던 그게 왜 지금 또 느껴지는 걸까. 의자에 앉은 이노테라는 자기도 모르게 꼬리를 흔들었다. 용기사가 아닌 새로운 직업의 출발선에 선 거야. 그럼 이건 무슨 출발선 일까요?
조금만 생각해도 금방 답이 나올 문제였다. 답을 알고는 있는데 인정하기 싫어서 생각을 이리저리, 아무데나 보내서 그렇지. 이노테라는 예전의 이노테라와는 달랐다. 예전 과거를 버리고 완전히 탈피했습니다. 번데기에서 나비로 달라졌다고요. 그 정도로 달라진 건 아니지만. 새벽과 만나 다양한 사건을 헤쳐가면서 변했다. 그 전에는 뭐가 중요한 줄도 모르고 떠내려가는 하루하루에서 애써 정신줄만 붙잡고 있었다면. 지금은 새벽과 함께 내일을 보내는데 집중하게 됐다. 새벽과 함께 모험을 떠나고, 다 같이 다음 날을 맞이해 등불을 킬 준비를 하게 됐다.
나 하나가 아니라 단체가 되고. 오늘이 아닌 미래를 바라게 됐으니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능력인데. 이노테라에게는 없어서 크게 와닿지 않아 고생했던 그게. 눈치와 예감이라는 게 이노테라를 방문할 때가 왔다.
"미안해 늦었지. 우리도 슬슬 돌아가자."
난처하게 웃으면서 돌아오는 리세를 보고 이노테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자연스럽게 기지개를 피고 일어났다. 리세 본인이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아무 생각 없고 그럴 마음이 없을 수도 있지만. 이노테라는 예감했다. 리세는 알라미고야 남을거라고.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서, 피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원해서 남을 거라고. 당사자보다 먼저 그 조짐을 눈치챘다.
알라미고 새벽 본부 못 만드나? 만들겠냐? 정신 차려. 새벽이 지금 어떤 상황인데. 센 바람이 불면 꺼질까봐 안절부절 못했던 시기는 무사히 넘겼지만. 그래도 많이 부족하고 모자란 것 투성이이고. 왜 옛 새벽의 근거지, 모래의 집이 지리적으로 불편한 서부 다날란 구석에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알라미고에 새벽을 둔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성명이고. 중립으로 무색으로 있어야 하는 새벽이 뚜렷한 색과 입장을 가지게 된다.
새벽에는 변화가 필요하지만, 이건 변화가 아니라 변질이라고 여기겠지. 이 방법을 생각해낸 당사자인 이노테라도 먼저 이런 생각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눈에 선했다. …그리고 아마도.
아니 확실하게 이런 이유로 리세가 새벽을 떠나고 알라미고에 남겠지. 이노테라는 작게 심호흡 한 뒤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끝을 모르고 탁 트인 황야를 그대로 거울로 비춘 것처럼. 밤하늘도 끝을 모르고 탁 트여 있어 해방감과 개운함을 선사했고. 총총히 박힌 무성한 별과 은하수의 고리는 이노테라가 봐도 아름다웠다. 외부인인 자기 눈에도 아름다우니, 리세 눈에는 더 아름답게 보이겠지. 좋아할 수 밖에 없겠지…? 랄거의 손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내 등을 밀어주는 것처럼 시원하고 당찬데. 리세한테는 또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을까.
나에게 좋은 건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것이고. 나한테 특별한 건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도 특별한 것이라는 걸 아는 이노테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도 좋은데, 특별한 게 들어가면 더 더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제 안다. 이노테라는 모래의 집에서 보는 밤 하늘을 좋아했다. 옆에 누가 있으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민필리아가 있으면 좋다 못해 환상적이라 기억이 휘발될만큼 좋았다. 리세도 그런거겠지. 여기서 보는 밤하늘이 그렇게 특별하고 좋은 거겠지.
그럼 보내주는 게 맞아. 응. 그게 맞아.
하지만 혹시 모르지?! 이건 다 내 설레발이고, 떡 줄 생각도 없는데 떡 먹을 생각만 한 걸지도 모르고?! 나 혼자 북치고 막. 리세가 알라미고에 남겠지. 좋아하잖아 응 보내줄게. 그러고 있으면 웃기고 이상하니까. 응! 너무 티내진 말자. 티내지 말고, 보낼 준비 하지 말고. 응. 응응 그러자. 평소랑 똑같이!
…리세가 알라미고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리세는 새벽에도 애착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쉽긴 해도 새벽에 있지 않을까? 새벽이 이렇게나 도와주고 있기도 하고… 이러면 리세가 보답때문에 못 나가는 거 같잖아. 보답해야하니까. 그런 의무가 있고 마음의 빚이 있어서 남는 새벽이길 바라? 그건 아닌데. 그건 아닌데에….
마음의 빛이고 뭐고 의무고 뭐고 그런 거 고려하지 않고 리세가 바라는 대로 가면 좋겠어. 나는 중립이기 힘들테니까 나갈게. 이렇게 도와줬는데 미안해. 이런 말 하면 미안할 게 뭐가 있냐고, 새벽이 아니라도 너는. 아니 리세가 나간다고 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무슨 상상이야 이게 다. 앞으로 할 일도 많은데. 집중해도 모자란데! 작전 지도라도 다시 한 번 보자.
그치만 리세. 역시 알라미고에 남을 거 같지?
다날란과는 조금 달라 낯선 황야 바람을 맞을 때마다. 눈에 익지 않은 광활한 토지와 조우할 때마다. 이곳에 사는 이들에게 다가가면서 홍련처럼 불타오르는 리세의 옆모습을 볼 때마다. 이동하기 전에 불끈 쥔 리세의 두 주먹을 볼 때마다. 마음 속 무언가가 부풀어오르는 걸 이노테라는 느꼈다.
새벽이 이노테라에게 스며들고 자리를 만든 것처럼. 알라미고도 이노테라에게 스며들고 제 자리를 만드는 걸까? 이노테라의 세상이 팽창하기 위해서 부풀어오르는 걸까? 아니면 뜨겁고도 고요한 모순적인 열의가 이노테라에게도 열정을 불러들이는 걸까. 어딜가도 끝을 모르는 공간이니 모험가의 피가 끓어올라 탐구심이 반응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이노테라는 떠오른 선택지를 미처 지우지 못했다. 그치만. 아니 혹시 또 모르잖아. 그치만. 아니 혹시 또. 다 아는데 아닌 척 눈 가리고 아웅하고. 예측했으면서 다른 걸 가정하고. 길을 아는데도 이 길 아니라고 우기면서 우회하려고 드는 지금의 스스로를 가리킬 딱 좋은 단어가 떠올랐으니까. 나, 지금 혹시. 아니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건 아니긴 하지만. 나 정말로 진짜로…
불안한 거야? 알라미고에 리세가 남을까봐?
…한 수 더 떠서,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이건 완전 그…. …이거. 완전. 지. 질….
입 밖으로 내뱉기엔 너무 창피한 말이라서 이노테라는 귀까지 다 새빨개졌고. 떠오른 단어를 뭉개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그 날 밤, 오늘 상태가 별로 안 좋아보이던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말해봐요. 이런 중요한 시기에… 아, 오해의 소지가 있을 거 같아서 다시 말할게요. 당신은 소중한 동료니까. 무슨 일이 있길 바라진 않거든요. 무슨 일 있었어요? 뭐든 말해봐요.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해결 못한다고 해도. 털어놓으면 한결 가벼워질걸요? 이노테라의 이상을 감지한 야슈톨라가 찾아온 바람에.
이노테라는 자신의 치졸하고 속좁고 창피한 부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리세는 알라미고에 남고 새벽을 나가겠지.
그게 싫어!
아무리 새벽과 함께 수많은 경험을 쌓고 행동 범위가 늘었다고 해도 이노테라를 이루는 근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바로 타인의 마음을 예감하게 된 걸까? 리세 본인이 그렇게 생각했건 아니건, 새벽을 떠나 알라미고에 남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던전으로 들어갈때 실패를 상정하지 않듯이, 이런 건 걱정이 많은 이노테라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할 걸 상상해내고. 모르고 지나쳤을 부분을 알아내고. 이러한 성장을 하루아침만에 할 수 있나?
이노테라는 자신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진 뒤에 고개를 들었다. 호두나무로 이루어진 가면을 언제부터 벗고 돌아다녔더라. 수도복처럼 생긴 로브를 쓰고, 얼굴도 종족 특성도 잘 보이지 않게 꽁꽁 숨기고 다녔는데. 언제부터 평범한 미코테처럼 내보이고 다녔더라. 아 저사람, 저거 걔 아니야? 알아보는 게 낯설지만, 두렵지 않게 됐더라? 새벽을 만나고 나서. 새벽과 함께 움직이고 나서……. 그랬지.
리세는 언제부터 이다가 되었고, 이다는 언제부터 리세가 된 걸까. 안대 딸린 터번으로 꽁꽁 숨기던 눈동자를 드러내고. 싸움을 즐기는 호전적인 성격이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해맑고 당당하게 이끄던 리세가 한숨을 쉬고. 불안과 걱정을 내보이기 시작한 게 언제더라?
알리제는 고집이 세고 외골수에 무모한 면까지 있어. 하지만 그건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무너질 것만 같은 나약함의 이면이기도 해. 나한테도 그런 비슷한 면이 있었거든….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나한테도 있었어. 주저앉아 있는 나를 목숨 걸고 일으켜준 사람이. 나도 두 사람에게 지지 않도록 강해질 거야. 그리고 바라던 미래를 손에 넣을 거야!
아예 생판 남이라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의뢰로 만나게 된 처음 보는 모험가나, 길에서 스쳐지나가는 누군가였다면 몰랐을거야. 완전한 성장으로 타인을 상상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지라 아무나 이해할 수 있게 된 게 아니었다. 그렇게 기적적인 성장을 이룬 게 아니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더 마음의 공간이 늘었고. 보는 시야도 생각하는 범위도 늘었지만. 리세가 아니라 산크레드였다면, 야슈톨라였다면……. 알피노나 다른 새벽 인원한테도 이런 눈치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나한테도 그런 면이 있었으니까. 방황하고 이리저리 떠돌기만 하던 날 확실하게 잡아주고, 이정표를 건네준 사람이 있어서. 이노테라는 마음 속에 있는 리세를 향해 말을 걸었다. 바라던 미래를, 나도 가지고 싶어. 진짜 리세 앞에서는 좀 더 멋지고 그럴듯한 말을 하고 싶어서. 이노테라는 몇 번이나 속으로 연습했다.
그래놓고서 마지막 탈환 직전 날, 단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말하지 못했지만. 그건 뭐 어쩔 수 없으니까. 언니 흉내를 내는 건 아니라면서 쑥스럽게 웃는 리세에게 알라미고에 남을 거지? 그럼 할 이야기가 있어. 솔직하게 말해서 혼란을 부추기고 싶지도 않았고. 그때까지도 이노테라는 미련하고 생각이 많아서. 아직 모르잖아. 혹시 모르는 거잖아를 못 버렸다.
리세가 본인 입으로 나가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또 모르는 거야. 혹시 모르는 거야. 아닐수도 있잖아!
아니겠냐고.
왜 다 아는데 부정하고 싶어지는 걸까. 막 아니라고 우기고 싶어지는 걸까. 새벽 사람들이랑 다 같이 들어줬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리세가 부탁했을 때부터. 이노테라의 귀와 꼬리가 빙빙 움직였다. 아슈톨라랑 상담한 시간이 없었으면 아주 쌩쌩 돌았겠지.
새벽이 하나 둘 모이는 걸 곁눈질하면서 이노테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알라미고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은 리세를 이질적으로 느낀 적은 없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다른 사람은 어떨까. 새벽이 아닌 외부에서 보면 차이가 보일까. 새빨간 옷이 리세의 새 이정표가 되어주는 걸까?
고맙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희가 그런 말 들으면서…… 난 알라미고를……. 상상한 대로 줄줄 나오는 리세의 말을 듣고 이노테라가 눈을 질끈 감기 전에, 야슈톨라가 과장스럽게 한숨을 쉬어 허리를 뻣뻣하게 세웠다. 지금 잘 해야해. 몇 번이나 연습했잖아.
새벽을 나가더라도 당신은 우리 동료예요.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 참지 말고 우리를 불러요. 알았죠? 약속해요. 정돈된 새벽의 입장을 아슈톨라가 전하고. 그걸 받아들인 리세가 감정을 추스리고 일어나고 나서야 이노테라가 들어갈 차례가 된다.
뭐라고 말 걸지. 리세, 알라미고 전토 이상 잘 어울려. 아니 이건 전에도 말했잖아. 똑같은 말을 이런 분위기에서 해봤자 별 소용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멋지게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리세의 눈동자는 점점 평상심을 되찾고 있는데. 혼자 안절부절 못하는 이노테라의 등을 야슈톨라가 살짝 밀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 밀었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지금 하세요. 우리 앞에서 못 할 말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죠? 아, 아니야! 부끄러워서 그런가, 이노테라의 목소리가 크게 갈라졌다.
몸을 움직이면 상쾌하니까 기분 전환으로…… 몸을 좀 풀어보자……. 전에 그랬잖아, 최종 결전을 앞두고 힘을 얻고 싶다고. 나도 그래서, 그, 이게 마지막이라는 건 아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부끄러움과 긴장이 합쳐져 이노테라는 자기가 서두를 어떻게 시작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리세가 가만히 듣고 있었고, 다른 새벽도 아무말 하지 않았으니 엄청난 헛소리는 아니겠지. 봐줄만한 이야기를 했겠지.
그렇게 봐줄만하고 적당히 덜 부끄러운 헛소리로 서두를 마친 이노테라는 배에 힘을 줬다. 리세!
"나랑 대련해줘!"
그리고 내가 이기면 소원 들어줘!
이기적인 건 알지만 중립으로 있을 수 없으니 새벽을 관둘거라고 하자마자 내가 이기면 소원을 들어달라면서 대련을 신청한다면……. 그 대련 신청자가 그 누구도 아닌 이노테라라면……. 무슨 소원을 이야기할지 뻔했다.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산크레드는 깜짝 놀라면서, 아니, 허. 야슈톨라를 쳐다봤고. 야슈톨라가 알피노와 알리제를 잡고 있는 걸 보고 위리앙제와 쿠루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위리앙제와 쿠루루도 많이 놀랐는지 산크레드처럼 야슈톨라부터 확인한 뒤에 산크레드를 응시하고. 야슈톨라가 가만히 있는 걸 보니 괜찮지 않을까?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서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에서 나가지 말아줘. 중립으로 있어줘. 그런 소원을 빌 테지만.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이노테라 본인도 잘 알겠지. 리세가 그런 억지 소원으로 다시 돌아올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테고. 이미 결정한 걸 그런 이유로 무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거고. 무엇보다 상대의 의향을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이노테라인가? 그건 아니니까.
그치만 이런 겉치례라도 하지 않으면 리세를 보내 줄 수 없는 거겠지. 그만큼 쌓인 게 많았으니까. 이노테라가 새벽에 품은 감정은 골고루 깊고 무거웠지만. 유독 커다랗고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는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민필리아고. 또 하나는, 새벽으로 이노테라를 이끈 두 사람이었다. 시작과 계속을 연결할 부분을 특히 아끼고 사랑했으니 이런 과정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지. 안 될 걸 알면서도 해보고,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돌진해 봐야 하는 때도 있기 마련이니까.
나랑 대련해줘! 대련 요청을 받은 리세는 기뻐 보이기도 하고 난처해 보이기도 한, 감정의 경계선을 표정으로 보였다. 이런 식으로 어리광 부리는 게 기쁜 거겠지. 안 될 걸 알면서도 하겠다는 저 고집이 이노테라 다워서 좋았지만. 해방자를 넘어 지도자가 될 리세에게는 이 상황이 난처했다. 새벽에게도 알라미고에게도 좋은 방향이 아닐 수 있으니까.
어쩌면 좋지? 리세가 생각하기도 전에, 이노테라가 냅다 리세의 팔을 잡았다. 거칠고 대담한 행동에 비해서, 막상 붙잡은 손은 덜덜, 패기 없게 흔들리고. 이노테라의 귀도 형편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내, 내가, 내, 나. 나.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는 게 기적일만큼 불안한 모습에 리세는 멍하니 이노테라를 쳐다봤고. 이노테라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잡기 위해 마지막 용기까지 끌어다 썼다.
"내가 이기면 내 의자매가 되어줘!!"
옛날, 몽크 수도승들이 수련하던 장소… 랄거의 손길에서 승부를 보자!
의자매가 되기 위한, 승부야!
"…미안!! 역시 이런 걸로 내기 하는 건 좀 그렇지?!"
놀란 리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자, 손을 놓은 이노테라는 허둥지둥 말을 고르다가 적당한 문장이 안 나오는지 그렇게 외치고 냅다 도망쳤다.
"우리 영웅님은 공개 고백이 취미인가보네요."
"…중간까진 분위기 좋았는데. 아깝네."
"그건 모르지. 저쪽으로 쭉 가면 랄거의 손길 아니야? 따라잡으면 또 몰라."
"미안하다고 해놓고 약속 장소로 가네?"
"그런 사람이잖아요. 고집 부리면 끝까지."
어쩔래, 리세? 다들 직접적으로 묻진 않았지만 모이는 시선에서 간접적으로 그런 의도가 읽혔다. 이노테라는 이걸로 내기하는 건 좀 그렇지?! 부끄러워 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아까 했던 말은 취소할게 미안해. 나 잊어줘. 그런 부탁은 하지 않고 그냥 곧장 달리기만 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미안 역시 이런 걸로 내기 하는 건 좀 그렇지? 그치만 진심이니까. 랄거의 손길에서 기다릴게!
이게 아니면 뭐겠어? 이미 내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노테라 안의 기정사실인게 분명해. 의도를 알아챈 사람부터 웃음이 터지기 시작하더니, 멀뚱멀뚱 서있던 리세도 크게 웃었다.
"하긴 그랬지. 웬만한 부탁은 거절도 잘 못하고 유우부단 하면서. 의외로 고집이 쎄."
사기 당하기 딱 좋아. 모험가가 아니면, 아니 모험가였어도 사기 당했을 걸. 초코보도 제대로 된 곳에서 소개 못 받았을 거 같고. 의뢰 보수도 제대로 못 받았을 만큼 허술하고 맹한 부분이 있는데. 한 번 하기로 한 건 굽히지 않고. 한 번 마음 준 건 끝까지 안고 가려고 하고.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내 동생이 저런 사람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험담하는 건 아니야. 근데 그냥, 그런 거 있잖아? 내 동생이 저 사람이 될 줄 몰랐어. 아니 내 인생에서 알았던 게 얼마나 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냥 그렇다고. 리세가 어깨를 으쓱이자 다 같이 크게 웃었다.
"어서 가는 게 좋을 걸요? 새 언니가 생기기 전에."
"새 언니?"
"이노테라는 네 언니가 될 생각으로 저렇게 말한 거 아냐? 안 그럼 그냥 말했겠지."
"새벽도 내가 먼저 들어왔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노테라가 내 동생 되는 게 맞지 않아?"
"우리 영웅님께선, 생각이 좀 다른 거 같아요."
"이거 참, 승부해야겠네."
"쌍둥이가 아니여도 이런 건 예민하구나?"
"예민한 문제긴 하지."
근데 누가 봐도 아니 있잖아. 리세는 더 말하거나 장단을 맞추지 않고 한결 가벼운 태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을 나가도 넌 변함없이 동료고 우리 사이는 변함 없을 거야. 그 말도 정말 기쁘고 좋았지만. 변함없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면 서운하니 뭐라도 더 되고 싶다는 호소는 기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을 설레게 한다.
먼저 나가겠다고 했으면서, 사람이 염치라는 게 있어서. 리세는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못할 말을 해준 게 기뻐서 랄거의 손길로 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기분 좋게 서로 부딪치고, 개운하게 일어서고. 별것도 아닌 걸로 또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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